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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9화

어머니의 묘소에서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밥을 짓는 새벽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새벽은 언제나처럼 가마솥의 하얀 김으로 시작되었다.

 

푸른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네 시의 골목길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부엌 유리창 안쪽은 갓 지어낸 햅쌀밥의 구수한 단내로 가득 차올랐다.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냈다.

 

딸랑.

 

한지유는 굵은 무명 앞치마를 단정하게 동여매고 큼직한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뽀얗게 솟아오르는 증기 너머로 윤기가 흐르는 하얀 쌀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박순례가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지유야, 밥알 하나하나에 온기가 살아야 김밥을 마는 손끝에도 진심이 실리는 법이란다. 거친 세상에 속이 빈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밥 한 줄이 마지막 버팀목이 되기도 하는 법이야.'

 

지유는 주걱을 쥐고 조심스럽게 밥을 퍼내어 넓은 편백나무 함지박에 담았다.

 

갓 볶아낸 국산 통깨의 고소한 향과, 공설 방앗간에서 새로 짜온 진한 참기름 냄새가 주방 안을 온통 훈훈하게 채웠다.

 

소금과 참기름을 적절히 두르고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주걱날을 세워 고루 섞는 지유의 손놀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했다.

 

조리대 위에는 어제 법원에서 받아온 묵직한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1996고합82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피고인 강태석 판결문 정본.'

 

대한민국 법원의 붉은 관인이 찍힌 두툼한 종이 묶음.

 

피고인 강태석에게 징역 12년과 추징금 140억 원을 선고한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힌 종이였다.

 

지유는 손가락 끝으로 그 단단한 활자들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종이의 모서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머니와 자신이 7년간 삼켜온 피눈물의 결정체였다.

 

어머니가 위생과의 표적 단속으로 깨진 참기름병 파편을 치우며 피 흘리던 손, 심야 쇠파이프 테러로 박살 난 유리창을 박스 테이프로 꿰매던 밤, 그리고 영안실을 봉쇄하겠다며 들이닥친 폭력배들의 협박 속에서 홀로 지새웠던 장례식의 새벽까지.

 

그 모든 어둠의 시간들이 이 몇 장의 사법 문서로 온전히 결말을 맺었다.

 

조리대 한편에는 짙은 밤색 가죽 바인더로 엮인 어머니의 가계부 일기장과, 성재환이 법정에서 쥐고 흔들었던 흑청색 잉크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유는 대나무 김발을 펴고 바삭하게 구운 김 한 장을 올렸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을 얇고 고르게 펼쳤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정성스레 간을 맞춘 우엉조림, 소금에 절여 볶아낸 당근채, 노릇하게 부쳐낸 달걀지단, 직접 담근 아삭한 단무지, 데친 시금치를 차례대로 올렸다.

 

어머니에게 바칠 단 한 줄의 김밥.

 

지난 7년 동안 수천, 수만 줄의 김밥을 말아왔지만, 오늘처럼 가슴이 떨리고 온 신경이 손끝에 모인 적은 없었다.

 

지유는 숨을 고르며 단단하게 김밥을 말아 쥐었다.

 

칼날에 참기름을 살짝 묻힌 뒤, 밥알이 뭉개지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냈다.

 

단면 가득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재료들이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처럼 정갈했다.

 

지유는 김밥을 알루미늄 보온 도시락 통에 정갈하게 담고, 그 위에 하얀 보자기와 손수건을 겹겹이 둘렀다.

 

어머니에게 닿을 때까지 한 줌의 온기도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 골목 어귀의 발걸음

 

동이 트기 시작한 오전 여섯 시 반, 김밥집 미닫이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함께 익숙한 기척이 들어섰다.

 

짙은 감색 정장에 단정한 코트를 걸친 성재환이었다.

 

어제 법정에서 강태석을 향해 서슬 퍼런 논고를 쏟아내던 검사의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유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7년 전 광한루원 완월정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며 흑청색 잉크병을 건네받던 그 열여덟 살 소년의 맑은 빛 그대로였다.

 

재환의 품 안에는 어젯밤 지청 검사실에서 소중히 보관해 둔 판결문 정본 부본과, 국화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지유가 앞치마를 벗어 개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일찍 왔네, 재환아. 밤에 잠은 좀 잤어?"

 

재환은 조리대 위에 놓인 보온 도시락과 그 옆의 판결문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뵈러 가는데 늦을 수가 없지. 잠은 거의 못 잤어. 7년 동안 이 판결문을 들고 어머니 앞에 설 날만을 수없이 꿈꿔왔는데, 막상 그날이 되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누워 있을 수가 없더라."

 

재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깊은 울림이 묻어났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안에 쥐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이 새겨진 만년필의 금빛 닙에는 여전히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맑은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자, 지유야. 어머니께서 너무 오래 기다리셨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온 도시락과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가계부 일기장을 가슴에 안았다.

 

가게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두 사람은 나란히 골목길로 걸어 나왔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은 고요했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재환의 시선이 골목 모퉁이 전봇대 그늘 뒤편으로 향했다.

 

어제 법원 앞 축제 때 골목 어귀에서 참회의 서류 가방을 쥔 채 먼발치에서 지유를 바라보던 사람.

 

성호석 전 내무부 차관이었다.

 

성호석은 어제의 구겨진 양복 차림 그대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듯 핏발 선 눈으로 골목 어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아들과 지유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재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지유 역시 재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서 있는 노신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남원군수와 내무부 차관을 지내며 한때 남원의 하늘처럼 군림했던 권력자.

 

그러나 지금 그의 어깨는 한없이 굽어 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 사이로 흐르는 기운은 처량할 정도로 초라했다.

 

재환의 턱선이 굳어지며 눈빛이 흔들렸다.

 

부친이 저지른 30년 전의 과오, 그리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침묵을 택하고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썼던 비극적인 진실.

 

성호석은 차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그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원망을 받아도, 돌팔매를 맞아도 아무런 변명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한 완전한 굴복과 참회의 자세였다.

 

지유는 가슴에 안은 보온 도시락을 조금 더 꼭 쥐었다.

 

분노나 증오의 감정이 솟구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진짜 악마는 강태석이었고, 성호석 역시 그 탐욕스러운 카르텔의 덫에 걸려 아들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당했던 또 다른 비극의 희생양이었음을 재환의 취조 기록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지유는 성호석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용서의 표시는 아니었으나, 멸시나 배척의 몸짓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를 묵묵히 인정하는 무언의 인사였다.

 

지유는 굳어 있는 재환의 소매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재환아, 가자. 어머니 산소에 햇살이 들기 전에 도착해야 해."

 

재환은 지유의 따뜻한 손길에 굳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부친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성호석의 곁을 지나쳐 요천 둑길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들릴 듯 말 듯, 성호석의 메마른 탄식과 흐느낌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3. 요천 둑길의 자전거와 바람

 

두 사람은 남원 시내를 벗어나 지리산 자락이 완만하게 굽어보이는 교룡산 기슭의 공동묘지로 향했다.

 

요천 둑길을 따라 걷는 길가에는 초가을 이슬을 머금은 억새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7년 전, 교복을 입은 재환이 자전거 뒤편에 지유를 태우고 달렸던 그 길이었다.

 

그때는 언제 닥쳐올지 모를 가문의 억압과 이별의 공포에 짓눌려 바람 소리조차 서글프게 들렸었다.

 

서울로 압송되던 날, 관용차를 뒤쫓아 달리다 아스팔트에 넘어져 무릎을 짓찧었던 지유의 붉은 피.

 

그 흉터는 지금도 지유의 무릎 위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피며 곁을 지켰다.

 

조금이라도 오르막길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지유의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었다.

 

지유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나, 재환아? 우리 열여덟 살 봄에 여기서 자전거 타다가 체인이 빠졌던 거."

 

재환의 입가에도 옅은 온기가 번졌다.

 

"기억하지. 기름투성이가 된 내 손을 보고 네가 손수건을 꺼내 닦아줬잖아. 그 손수건에 묻은 기름때가 안 지워진다고 속상해했었는데."

 

"그 손수건, 아직 내 서랍에 있어. 버리지 못하겠더라. 네가 서울로 떠나고 나서는 그 손수건을 꺼내 보면서 매일 밤 버텼어."

 

지유의 담담한 고백에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재환은 잡고 있던 지유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용히 쓰다듬었다.

 

지유의 손은 거칠었다.

 

열여덟 소녀의 보드랍던 손은 7년간 칼질을 하고, 뜨거운 밥을 푸고, 붉은 페인트를 철 수세미로 문질러 지우느라 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 거친 손등을 마주할 때마다 재환은 자신이 짊어진 법복의 무게를 뼛속 깊이 되새기곤 했다.

 

"미안해, 지유야.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왔어. 네 손을 이렇게 거칠게 만들 때까지, 너 혼자 그 험한 폭풍을 다 맞게 해서……."

 

"아니야, 재환아."

 

지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재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늦지 않았어. 너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잊은 적이 없잖아. 서울에서 고시원 벽에 남원 지도를 붙여놓고 피를 토하듯 법을 공부했던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네가 법을 들고 남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는 영원히 알박기나 하려던 욕심쟁이로 기억되었을 거고, 우리 김밥집은 포클레인에 흔적도 없이 뭉개졌을 거야."

 

지유의 눈동자는 맑고 단단했다.

 

"네가 돌아왔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졌어. 네가 검사로서 그 흉악한 자들을 법정에 세워줬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의 억울함이 풀린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우리는 함께 싸운 거야."

 

재환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묵묵히 언덕길을 올랐다.

 

바람이 불어와 지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날렸고, 맑은 초가을 햇살이 교룡산 비탈길을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4. 솔바람 소리와 흙무덤

 

교룡산 중턱 양지바른 비탈길에 자리 잡은 한씨 문중의 작은 선산.

 

그 한구석에 소박한 흙무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석도 비석도 없이, 그저 둥글게 솟아오른 봉분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덮여 있는 무덤.

 

'망(亡) 박순례(朴順禮)의 묘.'

 

나무 팻말에 흑청색 페인트로 소박하게 적어 넣었던 이름표만이 비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봉분 뒤편으로는 수십 년 된 솔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싸늘한 가을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솔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쏴아 하는 파도 소리 같은 솔향이 산자락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묘소 앞에 다다르자, 지유의 발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지난 1년 전, 어머니의 시신을 남원의료원 영안실에 가두고 내주지 않겠다며 협박하던 강태석 일파의 폭압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치렀던 초라한 장례식.

 

그날 지유는 어머니를 흙 속에 묻으며 눈물조차 마음 놓고 흘리지 못했다.

 

울면 무너질 것 같았고, 무너지면 어머니가 목숨 걸고 지켜낸 김밥집 터와 숨겨둔 토지 서류들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유는 무릎을 꿇었다.

 

차갑고 단단한 흙바닥에 무릎이 닿았지만, 지유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재환은 말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들고 온 국화꽃 다발의 포장지를 벗겨냈다.

 

순백의 국화꽃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재환은 무덤 앞 흙바닥에 국화꽃을 정갈하게 바치고, 지유의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지유가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보온 도시락을 꺼냈다.

 

하얀 보자기의 매듭을 풀고, 알루미늄 찬합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김밥 냄새.

 

가마솥에서 갓 지어낸 햅쌀밥과 공설 방앗간의 참기름, 정성껏 볶아낸 나물들이 어우러진 따뜻한 김밥 냄새가 묘소 앞마당에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찬 바람 속에서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하얀 김은, 마치 어머니가 살아생전 부엌에서 딸을 향해 건네던 숨결 같았다.

 

지유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

 

단 한 마디를 뱉어냈을 뿐인데, 1년간 가슴속 깊은 옹이구멍에 가두어 두었던 눈물이 둑이 터진 것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나 왔어…… 지유 왔어, 엄마."

 

지유는 보온 찬합을 묘소 봉분 바로 앞 상석 대용으로 놓아둔 평평한 넙적 바위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이 가져온 어머니의 낡은 가계부 일기장을 펼쳐 놓았다.

 

위생과 단속반에 밀려 깨진 참기름병 파편에 찔려 피 묻은 자국이 선명한 일기장.

 

'오늘도 지유를 위해 밥을 안친다. 아무리 세상이 모질어도 내 딸 앞에서는 웃어야지.'

 

연필로 꾹꾹 눌러쓴 어머니의 거친 글씨 위로 지유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엄마, 나 김밥 싸 왔어.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참기름 듬뿍 치고, 밥알 안 으깨지게 꼭꼭 쥐어서……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당근이랑 시금치 많이 넣어서 싸 왔어."

 

지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오열했다.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고,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울음소리가 솔바람 소리에 섞여 산자락을 메웠다.

 

지난 세월, 어머니를 잃고 홀로 김밥을 말던 새벽마다 얼마나 외로웠던가.

 

가게 창문에 붉은 페인트가 칠해지고 '불태워 죽인다'는 협박 글자가 적혔을 때, 혼자 석유 묻은 걸레를 들고 살갗이 벗겨지도록 벽을 문지르며 얼마나 어머니를 불렀던가.

 

그 처절했던 고통과 외로움이 마침내 안식의 눈물이 되어 흙바닥을 적셨다.

 

5. 봉분 앞에 펼쳐진 판결문

 

성재환은 숨을 죽인 채 지유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검사로서 수많은 범죄자를 심문하고 단죄해 왔지만, 피해자가 겪어낸 세월의 무게 앞에서는 그 어떤 법리도 한낱 활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재환은 코트 안쪽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어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에서 문성현 부장판사의 날인이 찍혀 교부된 판결문 정본이었다.

 

재환은 옷깃을 여미고 무덤을 향해 정중하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이마가 차가운 흙바닥에 닿았다.

 

가문의 죄악을 짊어진 자로서, 그리고 이 땅의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서 올리는 가장 깊고 무거운 참회의 절이었다.

 

몸을 일으킨 재환은 판결문 정본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어머니 박순례의 묘소를 향해 펼쳤다.

 

"어머니.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재환이가 왔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굵게 떨렸으나, 단어 하나하나에는 서슬 퍼런 결기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를 그토록 괴롭히고, 이 남원 땅에서 법을 비웃으며 권력을 휘두르던 자를…… 마침내 법의 이름으로 무릎 꿇렸습니다."

 

재환은 판결문의 주문을 나지막하게, 그러나 온 산이 울리도록 또박또박 낭독하기 시작했다.

 

"'주문. 피고인 강태석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피고인으로부터 140억 원을 추징한다.'"

 

바람이 멈춘 듯 솔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재환의 서늘하고 맑은 음성만이 봉분 앞을 채웠다.

 

"'이유. 피고인은 남원시장이라는 공적 권력을 사유화하여 영세 상인인 망 박순례와 피해자 한지유에게 14회에 걸친 악의적 표적 단속과 행정 탄압을 가하였고, 망인의 임종 직후 영안실을 봉쇄하려 협박하는 등 극악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였다.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한다는 검찰의 논고는 본 법정의 확고한 판단과 정확히 일치한다.'"

 

판결문의 문장이 낭독되는 동안 지유는 어머니의 흙무덤을 두 손으로 짚은 채 흐느꼈다.

 

국가 권력이 마침내 어머니의 죽음이 천재지변이나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들의 사적 폭압에 의한 희생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순간이었다.

 

재환은 판결문을 조심스럽게 접어 어머니의 가계부 일기장 위에 가지런히 얹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놓았다.

 

캡 상단에 새겨진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과,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의 흔적이 햇살 아래서 투명하게 빛났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마지막 유언대로, 지유는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쇠파이프가 날아들고 가게가 붉은 페인트로 뒤덮여도, 지유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어머니의 가게와 정직함을 지켰습니다."

 

재환은 지유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저 역시…… 가문의 부끄러운 원죄에 숨지 않고, 법복을 입고 돌아와 피고인 강태석의 목줄을 끊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모든 두려움과 원통함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남원의 하늘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지유는 무덤을 안고 뺨을 비볐다.

 

차가운 흙의 감촉 속에서, 마치 어머니가 거친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듯한 포근한 온기가 전해졌다.

 

'지유야, 장하다. 내 딸, 참으로 장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지유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들었지? 강태석 그 사람, 감옥에 갇혔어. 12년 동안 햇빛도 제대로 못 보고 죗값을 치를 거래. 엄마가 평생 흘린 눈물, 재환이가 전부 갚아줬어. 그러니까 이제 아프지 마, 엄마. 차가운 병원 침대도 아니고, 무서운 깡패들도 없으니까…… 여기서 아빠 만나서 편하게 쉬어."

 

6. 김밥 한 줄의 온기

 

지유는 보온 도시락에서 썰어놓은 김밥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따스한 김밥이었다.

 

지유는 그 김밥을 깨끗한 한지 위에 올려 봉분 바로 앞에 바쳤다.

 

"엄마, 잡숴봐. 엄마가 좋아하던 그 맛 그대로 냈어. 방앗간 아저씨가 새로 짠 참기름이라고 제일 좋은 놈으로 병에 담아주셨거든. 동네 사람들도 전부 엄마를 기억하고 있어. 어제 우리 가게 앞에 모여서 다 같이 축제도 했어."

 

바람결에 실려 온 솔잎 하나가 김밥 옆으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지유는 그 솔잎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눈물의 약속을 나누던 어린 소년 소녀는 어느덧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정의를 바로 세운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재환은 무릎을 꿇은 채 지유의 거친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체온이 서로의 살갗을 통해 깊숙이 전해졌다.

 

"지유야."

 

"응, 재환아."

 

재환은 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7년 전 남원을 떠날 때, 나는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와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그 약속 하나만을 바라보며 신림동 고시촌의 차가운 단칸방에서 피를 말리며 버텼어. 하지만 남원에 돌아와 보니, 실은 네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더구나."

 

지유의 눈가에 다시금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삼거리 김밥집에서 온몸으로 버텨주지 않았다면, 붉은 페인트를 맨손으로 지워내며 내 등 뒤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는 부패한 권력자들의 외압 앞에 무릎을 꿇었을지도 몰라. 네가 품어준 따뜻한 김밥 도시락이, 네 흑청색 잉크가 나를 비겁한 타협으로부터 구해낸 거야."

 

재환은 품에서 자신이 간직해 온 낡은 증명사진을 꺼냈다.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지유에게 주었던, 뒷면에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고 적혀 있던 그 사진.

 

괴한들에게 납치당하던 지유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떨어뜨려 모서리에 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사진이었다.

 

재환은 그 사진을 어머니의 묘소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영혼 앞에서, 오늘 다시 맹세할게."

 

재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단단해졌다.

 

"남은 내 평생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어떤 칼바람이 불어오고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내가 네 방패가 되고 네 울타리가 되어줄게. 어머니께서 하늘에서 안심하고 지켜보실 수 있도록, 너를 평생 아끼고 지키며 살아가겠다고 약속해."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지유는 재환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고마워, 재환아. 나도…… 평생 네 곁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줄게. 네가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동안, 돌아올 집이 되어줄게."

 

두 사람은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산새 한 마리가 솔가지 끝에 앉아 맑은 소리로 울었고, 솔숲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황금빛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과 어머니의 봉분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기나긴 7년의 어둠과 비극이 완전히 걷히고, 비로소 찾아온 참된 평안이었다.

 

7. 산자락을 내려오며

 

한참 동안 어머니의 묘소 곁에 머물렀던 두 사람은 묘역 주변의 잡풀을 정성스레 뽑아내고 봉분을 다시 한번 단정하게 매만졌다.

 

판결문 정본과 어머니의 가계부 일기장, 그리고 각인 만년필을 소중히 챙겨 가방에 넣었다.

 

어머니에게 바친 따뜻한 김밥 한 줄과 새하얀 국화꽃 다발만이 가을 햇살 아래 온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유는 마지막으로 봉분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엄마, 또 올게. 이제 슬퍼하지 않고 자주 올게."

 

발걸음을 돌려 산길을 내려오는 지유의 발걸음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했다.

 

마치 어깨를 짓누르던 수천 근의 바위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듯한 해방감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비탈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선산 초입의 외딴 공터 부근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을 향했다.

 

선산 입구 팽나무 고목 그늘 아래,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홀로 서 있었다.

 

새벽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성호석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묘소를 참배하는 동안 산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차마 발을 들여놓을 자격조차 없다는 듯 산 밑자락에서 두 시간 동안 꼬박 서서 기다린 것이었다.

 

성호석의 양복바지 밑단은 새벽이슬과 흙탕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의 구두는 붉은 황토로 뒤덮여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눈빛만은 뼈를 깎는 결의로 차 있었다.

 

성호석의 손에는 낡고 묵직한 서류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재환과 지유가 다가오자, 성호석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지 않고 길 한편으로 비켜섰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서류 가방을 공손히 받쳐 든 채, 지유를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털썩.

 

마른 흙바닥에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한때 전라북도 남원의 최고 권력자였고, 중앙정부의 내무부 차관을 지냈던 거물이, 스물다섯 살 영세 분식점 처녀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재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죄를 지은 아비라 한들, 피를 나눈 부친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는 광경은 젊은 검사의 가슴을 날카롭게 도려냈다.

 

그러나 재환은 부친을 말리지 않았다.

 

이것은 가문의 원죄를 짊어진 성호석이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한지유와 그녀의 망가진 가문 앞에 반드시 치러야 할 최소한의 속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성호석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손으로 서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누렇게 바랜 두툼한 서류철 서너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호석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굵은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지유 양……."

 

지유는 멈춰 서서 무릎을 꿇은 성호석을 내려다보았다.

 

성호석이 두 손으로 서류철을 들어 올리며 오열에 가까운 참회의 말을 토해냈다.

 

"내 죄를…… 내 가문의 죄를 어찌 입으로 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30년 전, 강태석의 간계와 내 어리석은 탐욕으로 한석규 선생의 비옥한 과수원을 빼앗았고, 7년 전에는 내 아들의 목숨을 지키겠다는 비겁한 구실로 자네 모녀가 겪는 생지옥을 외면했습니다."

 

성호석의 눈물이 서류철 표지 위로 떨어졌다.

 

"여기…… 30년 전 빼앗겼던 동충리와 하정리 일대 토지 4,500평의 원상회복 증서와, 내 일가가 소유했던 모든 잔여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 포기 및 피해 배상 양도 각서가 들어 있네. 검찰에 자수하며 내 모든 죄를 자백했고, 이제 법의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네만…… 이것만은 법정에 가기 전에 자네 손에 직접 전해주고 싶었네."

 

성호석은 이마를 흙바닥에 대며 절규하듯 덧붙였다.

 

"부디…… 부디 내 아들 재환이를 원망하지 말아주게. 재환이는 아비의 죄를 덮지 않고 스스로 칼을 뽑아 내 목을 벤 결백한 아이일세. 모든 죄는 내가 지고 지옥으로 갈 터이니……."

 

차가운 산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불어왔다.

 

30년간 두 가문을 피비린내 나는 비극과 눈물로 얽어맸던 거대한 원죄의 매듭이, 마침내 최종적인 화해와 청산의 문턱 앞에 도달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