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선고
1. 9월 12일의 아침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남원의 하늘은 높고 시리도록 푸르렀다.
요천(蓼川)을 타고 내려온 서늘한 바람이 지리산의 마른 풀 냄새를 싣고 시내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 끝에 걸린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맞을 때마다 청아한 쇳소리를 토해 냈다.
그 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비바람과 폭압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온 이 작은 터전의 숨소리와도 같았다.
가게 앞은 이른 새벽부터 모여든 이웃들로 북적였다.
깨끗하게 닦아낸 통유리창 너머로 단정한 감색 정장 차림을 한 지유의 모습이 비쳤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낡은 손거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지유의 손끝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했다.
조리대 한편에는 여전히 단정하게 놓인 흑청색 잉크병과, 며칠 전 재환이 손에 꼭 쥐여주었던 피 묻은 학생증 증명사진이 놓여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뒷면에 번져 있던 잉크 자국은 이제 짙은 기억의 화석이 되어 지유의 가슴 한가운데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유야, 차 탈 준비 다 됐어?"
문가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척해진 얼굴에 붕대를 감은 최민재와, 그의 팔을 부축한 윤하은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 골목길을 메운 시장 상인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배추전을 부치던 배 씨 아저씨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지유야. 오늘 그놈이죗값을 얼마나 단단히 치르는지 똑똑히 보고 오너라. 네 어머니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거다."
포목점 김 씨 아주머니도 눈시울을 붉히며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우리가 다 같이 법원 앞까지 갈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다녀와."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손에는 어머니 박순례가 마지막 순간까지 품에 안고 썼던 밤색 가계부 일기장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모진 표적 단속과 협박, 깨진 참기름병의 피비린내를 견뎌내며 한 글자씩 눌러쓴 그 낡은 종이 뭉치는 오늘 법정에 바쳐질 가장 무겁고 신성한 제물이었다.
지유는 가게 문을 나서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삼켰다.
'엄마. 드디어 오늘이에요.'
차에 오르는 지유의 발걸음은 7년 전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주저앉았던 그 열여덟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거악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당당한 인간의 걸음이었다.
2. 법정을 메운 침묵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법원 본관 계단 아래부터 정문 바깥의 인도까지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남원일보를 비롯한 전북 지역 언론사들은 물론, 서울에서 내려온 방송사 중계 차량들이 청사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마이크를 든 기자들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지만, 정작 군중 사이에는 기묘할 정도의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분노나 환희를 넘어서서, 30년 동안 이 고장을 짓눌러온 거대한 암흑이 과연 법의 이름으로 온전히 베어질 것인가를 숨죽여 지켜보는 이들의 숙연한 긴장감이었다.
철컥.
법정 육중한 문이 열리고 방청객들이 차례로 들어찼다.
방청석 맨 앞줄 가운데에 지유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양옆으로 하은과 민재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이어 검사석의 문이 열렸다.
검은색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성재환이 서류 가방을 든 채 걸어 들어왔다.
피로가 깃든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두 눈만큼은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하고 명징했다.
법복 가슴팍 안주머니에는 백부에게 물려받아 지유의 손을 거쳐 돌아온 독일제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꽂혀 있었다.
재환은 검사석 테이블 위에 사건 기록철을 올려놓은 뒤,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방청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지유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친 시선 속에는 지난 7년간의 고독한 사투와, 폭우가 쏟아지던 처마 밑의 약속과, 피로 물들었던 시간의 무게가 온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재환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유 역시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어루만지며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윽고 피고인 출입문 쪽에서 거친 쇠사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고인 입정합니다."
교도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피고인 강태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과 일주일 전, 최종 구형 공판에서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카키색 미결수 수의 왼쪽 가슴팍에 새겨진 붉은 수번 '2104'는 땀과 때에 절어 얼룩져 있었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퀭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가 지난 일주일 동안 구치감 바닥에서 어떤 지옥을 겪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을 호화롭게 변호해 줄 줄 알았던 서울 대형 로펌 세율의 변호사들은 스위스 계좌가 동결되자마자 전원 사임계를 내던지고 도망쳤다.
법원이 직권으로 지정해 준 국선변호인은 피고인석 맨 구석에 서류 한 장만 덜렁 얹어놓은 채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태석은 법정으로 들어서다 방청석의 지유를 발견하고 흠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증오와 살기를 뿜어내려 애썼지만, 지유의 맑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그의 입술은 맥없이 바르르 떨렸다.
토건 조폭으로 시작해 남원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사람의 목숨조차 파리 목숨처럼 여기던 자가, 마침내 자신이 짓밟으려 했던 가장 연약한 인간의 눈빛 앞에서 동물적인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피고인, 착석하세요."
교도관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자 강태석은 비틀거리며 피고인석 의자에 주저앉았다.
3. 법대의 엄정한 침묵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참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를 향해 엄숙하게 외쳤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재판부 입정하십니다."
법정 안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리고, 재판장 문성현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가 법대로 걸어 나왔다.
문 부장판사는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법대 중앙에 서서 법정 안을 둘러보았다.
수백 개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두툼한 판결문으로 집중되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법관들이 자리에 앉자, 법정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문성현 재판장은 안경을 고쳐 쓴 뒤 마이크를 당겨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나, 법정 구석구석의 참나무 벽을 울리며 청중의 귓전에 똑똑히 꽂혔다.
"지금부터 1996고합82, 피고인 강태석 외 1인에 대한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특수살인교사 등 사건에 대한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강태석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무릎 위에 얹은 결박된 두 손을 쥐어뜯듯 비틀며 마른침을 삼켰다.
재판장은 피고인을 향해 시선을 던지지 않은 채, 판결문의 첫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판결에 앞서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해 간략히 짚고자 합니다."
문 판사의 시선이 검사석의 성재환과 방청석의 지유를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부여한 권능은 오직 지역사회의 복리와 시민의 생명, 그리고 공공의 안녕을 수호하기 위해 행사되어야 할 신성한 위임입니다. 그러나 본 법정에 선 피고인 강태석은 자신이 장악한 공권력을 사적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억압하는 폭력의 몽둥이로 휘둘렀습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재판장의 어조에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다듬은 사법부의 고뇌와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피고인은 자신의 과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지적 공문서를 불법으로 봉인하였고, 관급 공사의 막대한 예산을 친인척 명의의 유령 회사를 통해 횡령하였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시공은 마침내 요천 제방 붕괴라는 참혹한 인재로 이어져 수많은 시민의 삶의 터전을 흙탕물 속에 수몰시켰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뜻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세 상인에 불과한 피해자 한지유와 고 박순례 모녀에게 무려 열네 차례에 걸친 표적 단속을 자행하고, 심야 폭력 테러를 사주하였으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영안실마저 봉쇄하려 협박하는 등 인륜을 저버린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방청석 곳곳에서 억눌린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지유는 무릎 위에 얹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두 손으로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일기장 가죽 표지 위로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검게 번져 나갔다.
재환은 미동도 하지 않고 검사석에 바로 선 채, 문 판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죄악의 나열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4. 죄의 무게를 달다
문성현 재판장은 차분하면서도 서슬 퍼런 어조로 공소사실에 대한 유무죄 판단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피고인 및 변호인은 수사 과정에서의 강압과 자백의 임의성을 다투며 공소사실 일체를 부인하였으나, 본 법원이 면밀히 검토한 증거에 따르면 피고인의 주장은 모두 이유 없습니다."
강태석이 고개를 푹 꺾었다.
"먼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의 점에 관하여 살피건대, 지리산 비밀 별장에서 적법하게 압수된 비자금 원부 다섯 권과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원장,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 비밀 계좌의 금융 거래 명세에 이르기까지 공소사실은 객관적 물증에 의해 완벽하게 입증됩니다. 피고인이 조성한 140억 원대의 비자금은 시정 발전이 아닌 정관계 로비와 사적 치부를 위해 쓰였음이 명백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유죄로 인정합니다."
재판장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음으로 업무상과실치사상의 점에 대하여 살피건대, 피고인은 공사비 횡령을 위해 규격 미달의 골재와 철근을 사용하도록 현장 감리와 시공사를 직접 압박하였고, 이로 인해 집중호우 당시 요천 제1공구 제방 옹벽이 붕괴되어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초래하였습니다. 비록 자연재해의 요소가 일부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인위적인 부실시공이 제방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및 전문 감정기관의 감정 결과로 명백히 확인되는바, 상당인과관계가 충분히 인정되므로 이 역시 유죄입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수해 상인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훔쳤다.
천재지변이라는 파렴치한 거짓말로 자신들의 고통을 덮으려 했던 권력자의 거짓이 사법의 제단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의 점에 관하여 살피건대, 피고인이 남원시청 위생과와 소방과를 사주하여 삼거리 김밥집에 대해 자행한 연속적인 표적 단속과 행정대집행 계고는 행정권의 남용을 넘어선 사적 폭력에 해당합니다. 이는 최민재 기자가 제출한 시장실 직통 메모 및 공무원들의 자백 진술에 의하여 명백히 인정됩니다. 아울러 황선태 전 건설교통국장에 대한 15톤 덤프트럭 충돌 사고 및 피해자 한지유에 대한 17번 국도 야간 납치 사건에 관하여도, 현행범으로 체포된 하수인들의 일관된 자백과 통화 내역, 그리고 피고인이 교도관을 매수해 비밀리에 교사한 사실이 넉넉히 인정되므로, 특수살인교사 및 특수약취유인교사의 점 또한 모두 유죄로 판단합니다."
유죄, 유죄, 유죄.
재판장의 입에서 떨어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강태석의 목을 옥죄는 오라줄이 되어 내려앉았다.
강태석은 숨이 막히는 듯 턱을 덜덜 떨며 헛구역질을 삼켰다.
그가 믿었던 돈도, 중앙의 든든한 정계 인맥도, 호화 변호인단도 그 어떤 것도 법의 엄정한 그물망을 찢어내지 못했다.
모든 공소사실이 유죄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5. 법은 약자의 약속이다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을 마친 문성현 재판장은 안경을 벗어 법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검사석의 성재환과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법정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양형의 이유를 밝힐 차례였다.
문 판사는 낮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판결문을 집어 들었다.
"양형의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남원 일대의 토건 이권을 독점하며 폭력과 사기로 부를 축적해 온 자로서, 민선 자치단체의 수장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그 비뚤어진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고 지방 행정 전체를 사병화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민초들이 공권력의 폭압 앞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재판장의 시선이 방청석의 지유에게 가닿았다.
"특히 피고인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한 여학생과 그 어머니의 소박한 삶을 철저히 파괴하려 들었습니다. 생계의 수단인 김밥집을 부수고,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가로막겠다고 협박한 패륜적 범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 폭거입니다. 피고인은 법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거액의 비자금으로 사법을 매수하려 시도하고 국가의 형사사법 시스템을 우롱하는 등 일말의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강태석의 고개가 바닥으로 완전히 꺾였다.
재판장의 목소리가 한층 더 엄숙해졌다.
"검사는 결심 공판에서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한다'는 준엄한 논고와 함께 피고인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하였습니다. 본 재판부 역시 검사의 그 숭고한 사법적 외침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법이 힘 있는 자들의 죄를 덮어주는 비단옷이 되고, 힘없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다면 이 땅의 사법 정의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재환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숨을 삼켰다.
자신이 7년 동안 차가운 신림동 고시촌 바닥에서, 그리고 서울지검 특수부의 밤샘 취조실에서 피를 말리며 지켜내고자 했던 그 가치가 마침내 대한민국 법원의 공식적인 판결문 속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횡령한 비자금 중 상당액이 스위스 계좌 동결 등을 통해 국고로 환수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 그리고 특수살인교사 범행이 미수에 그쳤다는 점 등 양형 조건을 종합적으로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합니다."
문성현 재판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판결문을 똑바로 치켜들었다.
"피고인 강태석은 일어서십시오."
교도관 둘이 강태석의 양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린 강태석은 허수아비처럼 흔들리며 간신히 법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완전히 가셔 시체처럼 창백했다.
6. 징역 12년, 철퇴가 내리치다
법정 안의 모든 숨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기자들은 펜을 움켜쥐었고, 상인들은 두 손을 모아 쥐었으며, 지유는 눈을 감지 않고 똑바로 피고인의 등을 응시했다.
탕, 탕, 탕.
문성현 재판장이 법봉을 쥐고 세 번 내리쳤다.
그 소리는 30년간 남원을 지배해 온 거악의 심장에 박히는 준엄한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주문."
문 판사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법정의 허공을 찢었다.
"피고인 강태석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징역 12년.
그 서슬 퍼런 단어가 선포되는 순간, 방청석에서 거대한 탄성과 함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재판장의 낭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고인으로부터 140억 원을 추징한다. 압수된 1991년 환지 처분 원천 측량 대장 및 지리산 별장 비자금 원부 일체를 몰수한다. 피고인에 대한 미결구금일수 중 120일을 위 본형에 산입한다."
추징금 140억 원.
그것은 강태석이 평생 동안 사기와 폭력, 협박과 횡령으로 쌓아 올렸던 탐욕의 바벨탑이 법적으로 완전히 몰수되고 파산되었음을 알리는 철퇴였다.
"아, 안 돼……!"
강태석의 입에서 마침내 짐승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12년이라니! 내가 왜 12년이야! 내가 남원시장이야! 내가 남원을 먹여 살린 강태석이라고! 성재환, 네놈이 감히 날 속여? 성호석 그 배은망덕한 놈이 기어이 날……!"
그는 묶인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검사석을 향해 발악하듯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양옆에 버티고 서 있던 건장한 법원 경위들과 교도관들이 순식간에 그의 멱살과 팔을 꺾어 바닥에 짓눌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태석의 뺨이 차가운 법정 바닥에 처박혔다.
"이거 놓아라! 판사 새끼야, 네놈이 뭔데 날 심판해! 난 못 받아들여! 항소할 거야! 대법원까지 갈 거라고!"
바닥에 짓눌린 채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지르는 전직 남원시장의 꼴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문성현 재판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명했다.
"피고인의 법정 모독과 소란 행위를 제지하고, 즉시 지하 구치감으로 압송하십시오. 피고인에 대한 법정 구속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네, 재판장님!"
교도관들이 거칠게 강태석을 일으켜 세워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강태석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핏발 선 눈으로 방청석의 지유와 검사석의 재환을 번갈아 노려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한지유! 성재환! 네놈들이 온전할 줄 아느냐! 내가 감옥에서 나가면 네놈들의 살점을 씹어 먹을 것이다! 내 돈 돌려내! 내 남원을 돌려내란 말이다!"
철컥, 쾅!
피고인 퇴정실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악인의 추악한 절규는 마침내 완벽한 어둠 속으로 차단되었다.
법정 안에는 오직 그가 끌려가며 남긴 거친 쇠사슬 긁히는 소리의 잔향만이 맴돌 뿐이었다.
7. 눈물로 씻겨진 상처
소란이 가라앉은 법정 안은 거짓말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은 방청석 맨 앞줄에서 터져 나온 지유의 눈물이었다.
지유는 가슴에 안고 있던 어머니의 밤색 가계부 일기장을 끌어안은 채, 참았던 울음을 토해 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흘리는 그 눈물은, 지난 7년간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통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정화의 의식이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차가운 병상에서 숨을 거두던 날의 새벽바람.
비 오는 날 가게 유리창을 깨부수던 쇠파이프의 공포.
맨손으로 벽을 문지르며 살갗이 벗겨지던 석유 냄새 자욱한 붉은 페인트의 밤.
그리고 서울로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다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던 남원 톨게이트 앞 아스팔트의 기억까지.
그 모든 잔인했던 시간들이 '징역 12년'이라는 법의 준엄한 선고 아래 비로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지유야……."
하은이 곁에서 지유를 와락 끌어안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민재도 붕대를 감은 손으로 안경을 벗어 거칠게 눈가를 훔쳤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시장 상인들과 수해 이재민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된 박수 소리가 이내 거대한 함성이 되어 법정의 높은 천장을 뒤흔들었다.
"정의가 이겼다!"
"박순례 댁, 하늘에서 보고 계시오! 우리가 이겼소!"
상인들의 외침과 환호가 법정을 가득 메웠다.
문성현 재판장은 법정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 깊이 머리를 숙여 방청석의 시민들을 향해 묵례를 보낸 뒤 법정을 빠져나갔다.
재판부가 퇴정한 뒤에도 시민들의 박수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성재환은 검사석에 선 채,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유가 붉어진 눈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환의 눈가에도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그는 검사석을 벗어나 천천히 방청석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법정의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침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재환은 품속에서 하얀 면 손수건을 꺼냈다.
7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남원 광한루원 처마 밑에서 지유가 자신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뻗어 지유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단단했다.
"약속 지켰어."
지유는 손수건에 뺨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입술가에는 7년 만에 가장 눈부시고 따뜻한 미소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응. 고마워, 재환아. 정말 고마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드는 순간, 남원을 옥죄고 있던 기나긴 악몽의 사슬은 마침내 완전히 끊어졌다.
8. 문을 열며
법원 청사 바깥으로 통하는 거대한 회전문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기자들은 속보를 타전하기 위해 앞다투어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고, 카메라 기자들은 법원 정문 앞 계단에 진을 치고 주임검사와 피해자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고 결과 나왔습니다! 강태석 피고인 징역 12년, 추징금 140억 원 실형 선고!"
"법정 구속 유지! 검찰 구형 사실상 대부분 인용!"
기자들의 다급한 외침이 남원지원 앞마당을 뒤흔들었다.
성재환은 지유의 곁에 나란히 서서 법정의 문을 열었다.
법정 복도를 지나 청사 로비로 향하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수많은 시민들의 따뜻한 배웅이 이어졌다.
재환은 자신의 법복 안주머니를 지그시 눌렀다.
그곳에는 캡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여전히 선명한 각인 만년필이 숨 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것은 가문의 굴레도, 권력자의 폭압도 아닌, 오직 상처받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재환은 이 길고 험난했던 싸움을 통해 온몸으로 증명해 냈다.
그리고 지유의 손에 들린 어머니의 일기장은 이제 더 이상 피눈물의 기록이 아닌, 불의에 꺾이지 않은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는 빛나는 승리의 훈장이 되어 있었다.
청사 출구의 육중한 유리문이 열리며, 가을의 청명한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플래시 세례와 기자들의 질문 공세만이 아니었다.
이 지긋지긋한 어둠을 함께 견뎌내고 마침내 새 시대를 맞이한 남원의 푸른 하늘과, 그들을 기다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환한 얼굴이었다.
재환이 지유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지유야."
지유는 망설임 없이 재환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두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나누었던 바람의 냄새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강인했다.
두 사람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법원 계단을 향해 당당하게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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