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성재환의 최종 구형
1. 텅 빈 피고인석과 서슬 퍼런 침묵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의 공기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높은 아치형 창틀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으나, 법정 내부의 냉기는 조금도 녹이지 못했다.
피고인석 오른편, 방금 전까지 서울의 거물급 전관 변호사들이 거만하게 진을 치고 있던 변호인석은 텅 비어 있었다.
남겨진 것은 그들이 황급히 챙기지 못해 흩어진 서류 몇 장과,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컵뿐이었다.
피고인 강태석은 미결수 수의를 입은 채 허물어질 듯 의자 모서리를 붙들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박힌 붉은 수번 2104가 그의 가쁜 숨결에 따라 흉측하게 들썩였다.
"피고인 강태석. 변호인단 전원이 사임계를 제출하고 퇴정한 이상, 본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의 원칙에 따라 국선변호인을 선정하거나 공판을 속행할 수 있습니다."
법대 한가운데에 앉은 문성현 부장판사의 음성이 낭랑하게 장내를 울렸다.
문 판사의 시선은 피고인의 초라한 꼴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맞은편 검사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본 사건은 이미 수개월에 걸쳐 방대한 증거 조사가 완료되었고, 피고인의 핵심 공범들에 대한 신문과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 스위스 은행 자산 동결 결정문까지 모두 적법한 증거로 채택되었습니다. 검찰 측, 결심 절차에 이의 있습니까?"
검사석에 단정하게 서 있던 성재환이 법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둠을 머금은 듯 짙은 검은색 검사 법복이 그의 곧은 어깨선을 타고 단정하게 흘러내렸다.
"이의 없습니다, 재판장님. 피고인 강태석의 범죄 사실은 이미 피고인의 자백 유무를 떠나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물증으로 완전히 입증되었습니다. 검찰은 지체 없이 최종 변론과 구형 절차를 속행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법정 구석구석을 찌르듯 파고드는 서늘한 힘이 실려 있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지유는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조용히 맞잡았다.
지유의 시선은 재환의 꼿꼿한 등 뒤에 닿아 있었다.
그 등은 7년 전, 서울로 떠나는 완행열차 승강장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바라보아야 했던 열여덟 살 소년의 등이 아니었다.
남원의 짓밟힌 민초들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 박순례의 한을 온몸으로 짊어진 국가의 검사, 성재환의 등이었다.
"말도 안 돼……! 이런 법이 어디 있어! 국선이라도 붙여 줘야 할 거 아니야!"
강태석이 쉰 목소리로 악을 쓰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마른 침이 지저분하게 번져 있었다.
"문 판사!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이 남원 땅을 삼십 년 동안 먹여 살린 강태석이야! 내 밑에서 밥 빌어먹던 놈들이 수두룩한데, 저 새파란 놈 말 한마디에 날 이대로 보낸다고? 성호석이 그놈이 날 엮은 거야! 저놈 아비가!"
탁, 탁!
문성현 판사가 들고 있던 법봉을 단호하게 두드렸다.
"피고인, 정숙하십시오! 이곳은 남원시장실이 아니라 대한민국 법정입니다. 피고인에게는 이미 충분한 방어권 행사 기회가 주어졌으며, 스스로 선임한 사선 변호인단이 범죄수익은닉의 공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변호를 포기하고 도주한 것입니다. 자중하지 않으면 퇴정 조치 후 궐석으로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서슬 퍼런 재판장의 경고에 교도관 두 명이 즉각 강태석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강태석은 꺾인 나뭇가지처럼 의자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더 이상 호령하던 지방의 군주가 아니었다.
권력의 갑옷을 빼앗기고 썩은 속살을 드러낸 파렴치한 범죄자에 불과했다.
2. 검사석의 만년필
재환은 천천히 옷깃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유서 깊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는 금빛으로 '成宰桓'이라는 한자 이름과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펜촉 안에는 지유가 어린 시절 용돈을 모아 선물해 주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최종 의견 진술서를 집어 들었다.
총 40여 쪽에 달하는 그 서류철은, 남원의 흙바닥에 뿌려진 피와 눈물로 작성된 역사적 기록이었다.
재환이 법대와 피고인을 번갈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피고인 강태석은 지난 30년 동안 이 남원 지역사회를 자신의 사적 영지로 착각하고, 법치주의와 공권력을 철저히 유린해 왔습니다."
법정 안의 모든 숨소리가 멎었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백여 명의 남원 시민들, 수해로 터전을 잃은 하정리 상인들과 동문 우체국 집배원, 그리고 취재 기자들의 눈빛이 재환의 입술 끝으로 쏠렸다.
"피고인의 범죄는 단순한 지방 토착 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생명권과 재산권,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뿌리째 짓밟은 권력형 폭력의 집대성이었습니다."
재환의 어조는 차분했으나, 문장 하나하나가 차가운 비수가 되어 피고인석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피고인은 1991년 남원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 사업 당시, 공공용지 수용이라는 행정 권한을 악용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과수원과 옥토를 헐값에 강탈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토건 회사를 끌어들여 막대한 개발 차익을 독식했습니다."
재환은 손에 쥔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 출발점이 바로 피해자 한석규의 과수원이었습니다. 피고인은 군청 관료들과 결탁해 가짜 도장을 날조하고 측량 대장을 조작하여, 평생 흙을 일구어 온 일가족의 삶을 파탄 냈습니다. 피해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세상을 떠났음에도, 피고인은 일말의 반성조차 없이 그 피 묻은 종잣돈으로 토건 회사를 키우고 마침내 민선 남원시장의 자리까지 찬탈했습니다."
강태석이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으나, 재환의 서슬 퍼런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흠칫 턱을 떨었다.
재환의 눈빛에는 증오나 사적인 분노 따위는 없었다.
오직 거악을 법의 심판대에 묶어 두고 해부하는 집행관의 절대적인 차가움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시장의 자리에 오른 피고인의 행보는 더욱 참혹했습니다. 피고인은 시청의 위생과와 소방과를 자신의 사병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가게를 지키려 했던 삼거리 김밥집을 향해 자행된 열네 번의 표적 행정 단속이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지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식품위생법을 핑계로 조리대를 뒤엎던 공무원들의 거친 군홧발.
어머니가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고소한 참기름병을 깨뜨려 바닥을 피와 기름으로 물들였던 그날의 비명.
그리고 5일 안에 수백만 원짜리 방염 시설을 하지 않으면 폐쇄하겠다며 날아들었던 개수명령서.
재환은 그 모든 세부 내역을 단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공소사실로 엮어 낭독하고 있었다.
3. 짓밟힌 자들의 이름으로
"피고인은 공권력의 탈을 쓴 채, 늙고 병든 여인과 어린 소녀가 살아가는 작은 분식점을 고사시키려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심야에 쇠파이프를 든 폭력배들을 사주해 통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붉은 유성 페인트로 벽면을 도배하며 야만적인 공포를 심었습니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정리에서 채소전을 하는 배 씨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젖은 손수건으로 코를 팽 풀며 지유의 가냘픈 어깨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재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졌다.
"그 폭압의 정점은 피해자 박순례 여사의 임종 순간이었습니다. 피고인은 만성 신부전과 급성 심부전으로 숨을 거둔 고인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은 남원의료원 영안실에 조폭들을 급파했습니다. 입원비와 장례비를 대납해 줄 테니 상속권을 포기하고 가게를 넘기라는 파렴치한 각서를 내밀었습니다. 불응하면 시신을 무연고 변사체로 냉동고에 방치하겠다는 패륜적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야……! 저건 다 날 음해하려고 조작한 소설이야!"
강태석이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재환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증거 목록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이미 법정에 제출되어 증 제42호증으로 채택된 망 박순례 여사의 친필 일기장, 그리고 증 제43호증인 남원일보 편집국 외압 녹음테이프, 소방과 고참 직원이 제출한 피고인의 친필 지시 메모가 이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혀는 진실을 가릴 수 없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비로소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똑바로 겨누었다.
"피고인의 탐욕은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에서 피고인은 처남 조상태의 동서개발과 한양토건을 끌어들여, 총사업비 중 무려 40억 원의 공사비를 횡령했습니다. 기준치의 3분의 1에 불과한 불량 철근을 넣고, 방수 시멘트 대신 규격 미달의 잡석과 모래를 채워 넣었습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 참사를 직접 겪었던 남원 시민들의 가슴속에, 지난 여름 흙탕물이 집안으로 들이닥치던 그 끔찍한 공포가 되살아난 탓이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여름, 백 년 만의 호우도 아니었던 일상적인 장맛비에 50여 미터의 제방이 맥없이 붕괴되었습니다. 하정리와 동충동의 수백 가구가 침수되었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을 뻔한 미증유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피고인은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자치단체장의 책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시민의 목숨값을 빼돌려 자신의 배를 불렸습니다."
재환의 어조에 서늘한 분노가 어렸다.
"그뿐입니까. 피고인은 자신의 범죄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비자금 장부를 들고 자수를 결심한 건설교통국장 황선태를 향해 15톤 덤프트럭을 돌진시켰습니다. 청부 살인을 교사하여 피해자를 사경을 헤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수족이 다 잘려 나가자, 옥중에서 매수된 교도관을 통해 비밀 지령을 내려 피해자 한지유를 강제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려 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형사사법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인간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만행입니다."
강태석은 이제 입을 딱 벌린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30년의 죄악이,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촘촘한 법망의 그물로 엮여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4. 가문의 원죄를 베어내다
재환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 침묵의 순간, 법정 안의 모든 이들이 검사의 입을 주시했다.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방청석의 지유도, 법대의 문성현 판사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의 뿌리에는, 다름 아닌 성재환 검사 자신의 가문이 얽혀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법대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으나, 그 어떤 대목보다 명징하게 울렸다.
"검사는 이 자리에서 피고인의 죄책만을 묻지 않겠습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재환은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더 꺼내 들었다.
"피고인 강태석이 이토록 오랫동안 남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권력의 또 다른 축이었던 전임 군수이자 전 내무부 차관인 성호석의 묵인과 비겁한 타협이 존재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범죄의 공범으로 호명하는 순간이었다.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환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내며 이 자리에 서 있음을, 지유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성호석은 1991년 환지 비리 당시, 피고인 강태석의 불법성을 인지하고도 중앙 정계의 외압과 협박에 굴복하여 이를 묵인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고, 자식인 검사 본인의 학업을 지원받는 치욕스러운 타협을 맺었습니다. 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권력의 야합이자, 가문의 부끄러운 원죄입니다."
재환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영혼을 실어 낭독했다.
"검사는 피고인 강태석을 기소함에 있어, 피고인과 결탁했던 친부 성호석 전 차관 역시 국고손실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으로 정식 입건하여 병합 기소했습니다. 법은 권력자의 신분이나 혈연에 따라 굽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한이 있더라도, 부패한 과거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는다면 이 남원에 진정한 정의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문성현 부장판사의 눈빛에 깊은 경의와 숙연함이 스쳤다.
방청석의 시민들 역시 숨을 삼킨 채, 자신의 혈육마저 사법의 칼날 위에 올려놓은 젊은 검사의 결기를 바라보았다.
강태석은 멍하니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성호석의 아들이라는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재환이 흔들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성재환은 아비를 물고 늘어지는 적의 손목을 잡고, 스스로 아비와 자신의 목에 법의 칼날을 들이댄 채 함께 지옥으로 걸어 들어온 괴물이었다.
그런 인간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5. 약자의 약속이어야 합니다
재환은 최종 의견 진술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은 만년필이 햇살을 받아 영롱한 금빛을 뿜어냈다.
그 펜촉에 담긴 흑청색 잉크는, 7년의 세월 동안 지유가 홀로 울며 써 내려갔던 편지들의 색이었고, 남원 시민들이 흘린 눈물의 빛깔이었다.
재환의 낭랑하고 단호한 음성이 대법정의 천장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재환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오롯이 재판부와 이 시대의 양심을 바라보았다.
"법(法)이라는 글자는 물 수(水) 변에 갈 거(去) 자를 씁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세상의 억울함과 고통을 막힘없이 씻어내라는 뜻입니다."
방청석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기자들의 펜촉조차 멈추어 섰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이 남원에서 법은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추악한 배를 불리고 죄악을 가려주는 견고한 방패였으며, 힘없는 민초들에게는 생존의 터전을 빼앗고 목을 조르는 가혹한 몽둥이에 불과했습니다. 시장이라는 권력자는 법을 사유화하여 무고한 상인들을 도륙했고, 법을 아는 자들은 거액의 수임료 앞에 무릎 꿇으며 그 몽둥이를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주었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방청석의 지유에게로, 그리고 굳은살 박인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장 상인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 검사는 이 법정에서 준엄하게 선언하고자 합니다."
재환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목소리가 강철처럼 단단하게 허공을 갈랐다.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합니다."
쿵, 하고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심장에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유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
공설 방앗간의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밤마다 가계부를 적어 내려가던 그 정직한 노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불의한 권력의 폭압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언젠가 법이 자신들의 정직한 눈물을 닦아줄 것이라는 마지막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무너진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는 사라집니다. 만약 오늘 이 법정에서 피고인의 죄악을 엄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힘없는 자들에게 다시는 정직하게 살아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재환은 다시 피고인 강태석을 향해 돌아섰다.
그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죄자의 칼날이었다.
"피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거액의 횡령금을 스위스 비밀 계좌로 빼돌려 사법부를 매수하려 했고, 변호인단이 사임하자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며 피해자들을 저주했습니다. 죄질이 극히 불량하고 개전의 정이 전혀 없는바, 법이 허용하는 가장 엄중한 심판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재환은 손에 든 구형 용지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마침표를 찍듯 선고했다.
"이에 검사는, 피고인 강태석에 대하여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횡령 및 배임죄, 업무상과실치사상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그리고 형법상 특수살인교사죄 및 특수약취유인교사죄를 종합 적용하여,"
재환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피고인을 징역 15년에 처해 주실 것을 청구합니다!"
6. 벼락같은 구형
"아울러, 피고인이 관급 공사 부실시공과 횡령으로 취득한 범죄 수익 전액을 박탈하기 위해, 벌금 50억 원 및 추징금 140억 원을 병과하여 선고해 주실 것을 재판장님께 엄히 구형합니다!"
징역 15년.
벌금 50억 원, 추징금 140억 원.
그 숫자가 떨어지는 순간, 법정 안은 거대한 침묵 속에 잠시 멎었다가 일순간 폭풍 같은 웅성거림으로 뒤흔들렸다.
기자들의 타자기가 미친 듯이 덜컥거리기 시작했고, 방청석의 상인들은 경악과 환희가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내려진 구형으로는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혹하고도 준엄한 극형이었다.
"지, 징역 15년……? 십오 년이라고……?"
강태석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벌금 50억과 추징금 140억.
그것은 그가 30년 동안 남원의 흙과 피를 빨아먹으며 축적했던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국고로 몰수하겠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에 징역 15년은 교도소 안에서 늙어 죽으라는 무기징역의 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말도 안 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 빨갱이 새끼야! 성재환! 네놈이 사람이야?"
강태석이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수갑을 찬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검사석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교도관들과 법원 경위들이 번개처럼 덮쳐 그의 목과 팔을 꺾어 바닥에 메쳤다.
쿵!
"이거 놔! 날 놔라! 내가 남원시장이야! 내가 강태석이라고!"
바닥에 짓눌린 강태석의 입에서 핏물 섞인 거품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광기에 차 완전히 풀려 있었다.
재환은 난동을 부리는 피고인을 미동조차 없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연민도, 조소도 없었다.
그저 오물을 치워낸 자의 담담한 정적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문성현 부장판사가 거칠게 법봉을 내리쳤다.
쾅!
쾅!
쾅!
"피고인은 정숙하십시오! 교도관들은 피고인을 제압하고 신병을 철저히 통제하십시오!"
세 번의 묵직한 타격음이 법정의 소란을 단칼에 잠재웠다.
문 판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피고인을 혐오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뒤, 천천히 서류를 정리했다.
"검찰 측의 구형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모든 변론을 종결합니다."
문 판사의 시선이 다시 검사석과 방청석을 향했다.
"본 사건의 중대성과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여, 판결 선고 기일은 1996년 9월 12일 오전 10시, 본 법정에서 진행하겠습니다. 피고인을 구치감으로 입감시키십시오. 이상으로 오늘의 재판을 모두 마칩니다."
탕, 탕, 탕.
결심을 알리는 법봉 소리가 대법정 안에 길게 메아리쳤다.
"성재환……! 한지유……! 내가 살아서 나가면 너희 둘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네놈들 피를 마실 거야!"
강태석은 교도관 네 명에게 들려 지하 통로로 끌려가면서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육중한 철문이 쾅 닫히는 순간, 그 악에 받친 비명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7. 교차하는 시선
폭풍이 지나간 법정 안에는 거짓말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시민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끝났다…… 정말로 끝났어……."
"십오 년이래. 강태석이 놈, 이제 감옥에서 늙어 죽는 일만 남았어."
하정리 시장 상인들이 지유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여윈 손을 어루만졌다.
"지유야, 네가 해냈다. 네 어머니가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실 게다."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의 유골함 앞에 무릎 꿇고 피눈물을 흘리던 밤들.
붉은 페인트로 뒤덮인 벽을 맨손으로 문지르며 손톱이 벗겨져 나가던 그 참혹했던 새벽들.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이, 마침내 오늘 이 법정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상받고 있었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일 아침, 전국 일간지의 1면 톱기사는 단 하나로 도배될 것이 분명했다.
'검사 성재환, 토착 권력 강태석에게 징역 15년 구형.'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소란스러웠던 법정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
검사석의 성재환, 그리고 방청석 맨 앞줄의 한지유.
재환은 천천히 법복 자락을 정리하며 몸을 돌렸다.
법대의 높은 턱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고요히 얽혀 들었다.
재환의 손에는 여전히 흑청색 잉크가 묻은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 만년필을 바라보던 지유의 눈가로, 다시 한번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 아래에서, 벚꽃 잎이 날리던 봄날에 나누었던 그 어린 약속.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와 남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그 맹세가, 마침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완결되었음을 알리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재환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지유를 향해 아주 작게, 오직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켰어, 지유야.'
그 무언의 목소리가 지유의 귓가에 따스하게 닿았다.
지유 역시 젖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가계부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재환아. 정말로…… 고마워.'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요천 둑길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가는 그 저녁노을은, 남원을 30년간 뒤덮고 있던 기나긴 암흑이 마침내 걷히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을 나서는 재환의 가슴 한편에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한 마지막 숙제가 남아 있었다.
남원지청 1호 취조실에서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친부, 성호석.
그리고 일주일 뒤로 다가온 문성현 부장판사의 최종 판결 선고.
사법의 칼날은 거악의 숨통을 끊었으나, 그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마지막 심판의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