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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5화

무너지는 악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지하 대기실의 균열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지하 1층, 축축하고 냉랭한 냉기가 감도는 호송 피고인 대기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면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회색 콘크리트 구석, 수번 '2104'가 붉은 실로 박힌 카키색 미결수 수의를 걸친 강태석은 쇠창살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두 손목목목을 옥죄고 있는 은색 수갑이 거친 호흡에 맞춰 짤랑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철창 밖 복도에는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소속의 건장한 수사관 둘과 교도관이 부동자세로 버티고 서서 안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야, 한 변호사.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

 

강태석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맞은편 간이 접견용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짓씹듯 물었다.

 

법무법인 세율의 대표변호사 한중호는 평소의 그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와 번들거렸고, 빳빳하게 다려 입었던 이탈리아제 고급 양복 깃은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가죽 서류 가방 위에는 방금 법정에서 성재환 검사가 던져 주고 간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청의 계좌 동결 결정문 사본이 덜덜 떨리는 손끝에 쥐여 있었다.

 

"……강 시장님. 상황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한중호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나기는 뭐가 끝나! 리히텐슈타인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빼돌린 취리히 은행 계좌야! 스위스 비밀 계좌는 전 세계 어떤 사법당국도 못 건드린다고 네놈들이 호언장담하지 않았어? 수임료만 30억을 쳐 받아먹고, 상고심까지 대법관 출신들 줄줄이 세워서 무죄로 뒤집어 주겠다고 큰소리친 게 바로 당신들이잖아!"

 

강태석이 벌떡 일어나 쇠창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쇠창살이 덜컹거리며 날카로운 굉음을 울렸다.

 

복도에 서 있던 교도관이 곤봉을 쥐며 다가서려 하자, 한중호가 황급히 손을 들어 제지했다.

 

"목소리 낮추십시오! 여기는 남원 바닥이 아닙니다!"

 

한중호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성재환이라는 놈이…… 단순히 기소장이나 만지작거리던 애송이 검사가 아니었습니다. 놈은 이미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외환관리법과 국제 금융거래 세탁 구조를 파헤쳐 논문까지 쓴 괴물입니다. 대검 중수부와 외무부를 직통으로 움직여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청과 취리히 주 검찰청에 '정경유착 부패 범죄수익 환수 공조 요청'을 정식으로 때려 박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돈이 묶였다고 내가 죽어? 묶인 돈이야 나중에 풀면 될 거 아냐!"

 

"못 풉니다! 계좌 실소유주가 강 시장님 본인으로 특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좌에서 상고심 로비 자금을 집행하기로 되어 있던 법정 대리인 명단에 저와 민중기 전 대법관, 배상문 전 법원장의 실명이 고스란히 박혀 나왔습니다!"

 

한중호의 목소리가 공포로 찢어지듯 갈라졌다.

 

"지금 서울 대검 특별수사본부에서 우리 법무법인 세율 본사에 대해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및 변호사법 위반으로 전격적인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러 들어갔습니다. 저와 민 변호사, 배 변호사 전원에게 오늘 자로 긴급 출국금지 조치가 떨어졌단 말입니다!"

 

강태석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남원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던 30년의 세월 동안, 그는 언제나 돈과 연줄이면 모든 법망을 찢어발길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지방의 토착 권력이 흔들릴 때마다 서울의 거물급 전관들을 사들이면 그 어떤 비리도 가벼운 벌금형이나 무죄로 둔갑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전관 변호사는 거악의 방패가 아니라, 사냥꾼의 덫에 걸려 목이 졸린 한 마리 쥐새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2. 사임계라는 이름의 배신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압수수색을 당해?"

 

강태석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수갑 찬 손이 허공을 휘젓다가 힘없이 쇠창살을 붙잡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신의 무죄를 다툴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 로펌 전체가 공범으로 엮여 감옥에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한중호가 서류 가방 안에서 백색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굵은 매직으로 단정하게 인쇄된 글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변호인 사임서(辭任書).'

 

그것을 본 강태석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사임……? 지금 뭐라고 했어? 사임서를 내겠다고?"

 

"민중기 고문님과 배상문 변호사는 이미 조금 전 남원지원 민원실에 정식 사임계를 접수하고 서울행 차편으로 떠났습니다. 저 역시 이 공판이 속행되는 즉시 재판부에 사임계를 제출하고 서울 서초동으로 올라가 대검 조사에 대비할 겁니다."

 

"이런 개자식들이!"

 

강태석이 쇠창살을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쿵!

 

쿵!

 

쿵!

 

육중한 철창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고, 강태석의 입술에서는 허연 거품이 튀어나왔다.

 

"내가 준 돈이 얼만데! 남원 땅을 팔아넘기고, 관급 공사비에서 빼돌려 네놈들 주머니에 꽂아준 현금이 몇십 억인데! 이제 와서 발을 빼? 날 버리고 도망을 쳐?"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강 시장님!"

 

한중호가 마침내 참아왔던 이성을 잃고 쏘아붙였다.

 

"그 성재환 검사는 지금 당신 하나만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감싸고 돌던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은 이미 국회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어 구속영장이 떨어졌고, 전주지검 간부들과 남원지원 계장들까지 모조리 뇌물수수로 엮여 줄줄이 쓸려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당신과 손잡았던 전임 군수이자 현직 차관인 성호석이 방금 지청 취조실에서 스스로 모든 죄를 자백하고 자진해서 기소장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자기 아비의 모가지까지 법정에 내던진 놈입니다! 그런 검사를 상대로 우리가 무슨 수로 법을 농락합니까?"

 

한중호는 떨리는 손으로 사임서 봉투를 가슴팍에 고쳐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승소율 1위의 오만한 대형 로펌 대표의 위엄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성재환이라는 젊은 검사가 휘두른 서슬 퍼런 법의 칼날에 베여 피를 흘리는 패잔병의 비참함만이 가득했다.

 

"성재환 검사는 단순한 법조인이 아닙니다. 그자는…… 그자는 법 그 자체를 무기로 삼아 당신들의 썩은 카르텔을 도륙하러 내려온 망나니입니다. 피고인 강태석, 당신은 이미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세율은 여기서 손을 털겠습니다."

 

"야! 한중호! 야, 이 개새끼야! 서! 거기 서!"

 

강태석이 쇠창살 사이로 팔을 뻗어 한중호의 멱살을 잡으려 발악했다.

 

그러나 한중호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한중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실 철문을 밀치고 복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쾅-!

 

철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 복도를 울렸다.

 

"열어! 문 열어! 날 여기서 내보내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남원시장 강태석이야! 이 남원의 주인이라고!"

 

강태석이 피투성이가 된 손목을 내려다보지도 못한 채 철창에 머리를 찧으며 고함을 질렀다.

 

수갑이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귓가에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지하 독방의 축축한 어둠만이 그의 메아리를 비웃듯 삼켜버릴 뿐이었다.

 

3. 대법정으로 향하는 발걸음

 

오후 2시 정각.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법정 안은 이미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남원 시민들과 취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는 짙은 남색 코트를 입은 한지유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7년간 지켜온 어머니 박순례의 낡은 가계부 일기장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곁에는 친구 윤하은이 지유의 차가운 손을 꼭 쥐어주고 있었다.

 

취재석에서는 남원일보의 수습기자 딱지를 떼고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한 최민재가 비밀 취재 수첩과 펜을 쥔 채 긴장된 눈빛으로 법정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법원 경위의 우렁찬 목소리가 법정 안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가라앉혔다.

 

"피고인, 입정합니다!"

 

지하 통로를 통해 이어진 피고인 출입문이 열리며, 교도관들의 삼엄한 호송 속에 피고인 강태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검찰과 방청객을 멸시하던 권력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강태석의 머리칼은 땀과 먼지로 헝클어져 흉하게 곤두서 있었고, 양 볼은 흙빛으로 푹 꺼져 있었다.

 

포승줄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끌려 들어오는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짐승처럼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저 살인마 놈……!"

 

"강태석이, 네놈이 우리 남원을 피눈물 나게 만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방청석 곳곳에서 요천 제방 붕괴 참사로 터전을 잃었던 수해 이재민들과, 30년간 그의 토건 폭력에 신음하던 상인들의 억눌린 고함이 터져 나왔다.

 

탕!

 

탕!

 

탕!

 

법대 중앙에 앉은 문성현 부장판사가 법봉을 힘차게 내리쳤다.

 

"정숙하십시오! 방청석에서는 일체의 소란을 금합니다. 계속해서 소란을 피울 경우 퇴정 조치 및 감치 처분을 명하겠습니다."

 

판사의 서슬 퍼런 경고에 방청석은 숨을 죽였으나, 피고인을 향해 쏟아지는 수백 개의 눈빛은 여전히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웠다.

 

피고인석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강태석은 멍하니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화려한 서류철을 쌓아두고 거만한 태도로 검찰을 비웃던 법무법인 세율의 변호인단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민중기도, 배상문도 없었다.

 

오직 변호인석 책상 한가운데에 한 장의 종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변호인 전원 사임계.'

 

그것을 본 강태석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버려졌다.

 

자신의 돈과 권력을 보고 꼬여들었던 그 모든 인간들이, 단 한 푼의 이용 가치도 남지 않자 썩은 동아줄을 끊어내듯 자신을 내던져 버린 것이었다.

 

4. 사법의 이름으로 선 검사

 

문성현 재판장이 차가운 시선으로 변호인석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판을 속행하기에 앞서 보고합니다. 피고인 강태석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세율 소속 한중호, 민중기, 배상문 변호사로부터 오늘 오후 1시 30분부로 일신상의 사유에 따른 변호인 전원 사임서가 접수되었습니다."

 

법정 안이 일제히 술렁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전관 변호인단이 재판 도중 피고인을 버리고 집단 사임했다는 사실은, 피고인의 죄질이 더 이상 법리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파멸의 지경에 이르렀음을 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성현 판사가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피고인 강태석.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하였습니다. 국선변호인을 선정하여 공판을 연기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증거 조사 및 결심 절차를 속행하겠습니까?"

 

강태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바짝 말라붙어 쇳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검사석에서 묵직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일어섰다.

 

성재환 검사였다.

 

검은색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가슴에는 서릿발 같은 정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병과,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법언이 새겨진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성재환은 차분하면서도 법정을 압도하는 낮고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형사소송법상 공소사실은 이미 지난 공판을 통해 객관적 물증과 공범들의 자백,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1원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입증되었습니다."

 

성재환의 시선이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향해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피고인은 14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관급 공사 비자금을 횡령하고, 요천 제방을 부실시공하여 무고한 남원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건설교통국장 황선태를 덤프트럭으로 청부 살해하려 하였고, 피해자 한지유를 백주 대낮에 납치해 암매장하려 한 잔혹한 흉악범입니다. 나아가 피고인은 자신의 죄악을 덮기 위해 스위스 비밀 은행으로 100억 대의 비자금을 빼돌려 사법부를 매수하려 획책하였으나, 국제사법공조를 통해 해당 범죄수익은 전액 몰수·동결되었습니다."

 

성재환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공소장 변경 신청서와 추가 증거 목록이 들려 있었다.

 

"변호인단의 사임은 피고인의 방어권 침해가 아니라, 피고인과 함께 범죄수익을 은닉하려던 사법 브로커들이 법의 심판대 앞에서 도주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미 공판 절차에서 실체적 진실이 모두 규명되었으므로, 검찰은 오늘 이 법정에서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최종 변론 및 구형을 진행할 것을 재판부에 강력히 요청합니다."

 

성재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방청석에서는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떤 사적 원한도, 어떤 타협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법의 언어였다.

 

문성현 재판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부 역시 본 사건의 중대성과 피해자들의 신속한 권리 구제를 고려할 때, 더 이상의 기일 연기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합니다. 피고인에 대한 증거 조사를 최종 종료하고, 검찰 측의 최종 의견 진술 및 구형 절차를 속행하겠습니다."

 

5. 피고인석의 절규

 

그 순간, 얼어붙어 있던 강태석의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안 돼! 재판장님, 안 됩니다!"

 

강태석이 포승줄에 묶인 상체를 비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도관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으나, 광기에 휩싸인 강태석은 거칠게 몸부림치며 피고인석 나무 난간을 들이받았다.

 

콰앙-!

 

"성재환! 네놈이 뭔데 날 심판해! 네놈 애비 성호석이도 나랑 한패였어! 그놈도 내 돈 처먹고 내 덕에 차관 자리까지 올라간 도둑놈 새끼란 말이다! 그런데 네깟 놈이 감히 날 심판하겠다고? 네놈 가문도 나와 똑같은 시궁창이야!"

 

강태석의 입에서 저주와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법정 안의 방청객들이 술렁이며 분노로 들끓었다.

 

그러나 성재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성재환은 차분한 걸음으로 법대 앞으로 다가가, 1호 취조실에서 친부 성호석이 직접 날인한 자백 조서와 병합 기소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피고인 강태석. 당신이 그토록 붙잡고 늘어지려던 성호석 전 차관은, 바로 오늘 아침 남원지청 취조실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고 스스로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

 

성재환의 서늘한 목소리가 법정의 공기를 갈랐다.

 

"성호석은 1991년 당신의 협박에 굴복해 불법 환지 처분을 묵인했던 자신의 죄를 낱낱이 인정하고, 이 법정의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가?"

 

성재환의 눈빛이 비수처럼 강태석의 가슴을 찔렀다.

 

"당신은 30년 동안 남원의 흙을 파먹고 민초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권력을 휘둘렀다. 죄 없는 여인의 가게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어머니의 시신이 누운 영안실을 봉쇄하겠다고 협박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도망칠 구멍을 파며 돈으로 법을 사려 했다. 당신은 권력자가 아니라, 법의 그늘 뒤에 숨은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범죄자에 불과하다."

 

"닥쳐! 닥쳐라, 성재환!"

 

강태석이 발악하며 침을 뱉어 댔다.

 

"내가 어떻게 만든 남원인데! 내 손으로 도로를 깔고, 내 손으로 건물을 세웠어! 그깟 김밥 한 줄 파는 천한 것들이 감히 내 앞길을 막아? 내가 시장이야! 남원의 법은 바로 나 강태석이란 말이다!"

 

그 오만하고 썩어빠진 절규가 법정 천장을 찌를 듯 메아리쳤다.

 

방청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지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유는 피고인석에서 추악하게 몸부림치는 강태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과거의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의 삶을 짓밟았던 악인을 향한 깊고 단호한 연민과 경멸만이 서려 있었다.

 

지유는 품에 안고 있던 어머니의 가계부 일기장을 가슴에 단단히 품어 안았다.

 

'엄마. 저 사람이 시장이래. 남원의 법이래. 하지만 엄마, 보이지? 저 사람은 법이 아니라, 그냥 홀로 남겨진 초라한 죄인일 뿐이야.'

 

지유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의연하고 아름다웠다.

 

6. 허망한 권력의 종말

 

탕!

 

탕!

 

탕!

 

문성현 재판장의 법봉 소리가 다시 한번 법정을 엄숙하게 갈랐다.

 

"피고인 강태석! 법정을 모독하고 난동을 부리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십시오! 계속해서 법정의 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퇴정 명령 후 궐석재판으로 결심을 진행하겠습니다!"

 

재판장의 추상같은 호통에 교도관 네 명이 달려들어 강태석의 팔다리를 완전히 꺾어 누르고 의자에 강제로 결박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강태석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졌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을 찔렀지만, 묶여 있는 손으로는 닦아낼 수도 없었다.

 

방청석을 메운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이 침묵 속에서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들 속에 담긴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더 이상 강태석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깨어난 민초들의 서늘한 분노이자 준엄한 심판이었다.

 

강태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권력의 성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음을.

 

돈으로 매수했던 조폭들도, 아첨을 떨던 토착 유지들도, 거액을 받아 챙기던 서울의 거물 변호사들도 모두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다.

 

남은 것은 오직 차가운 쇠창살과,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서슬 퍼런 법의 칼날뿐이었다.

 

"……어째서냐."

 

강태석의 입술 사이로 허망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

 

그 혼잣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검사석에 우뚝 선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법정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성재환은 지유가 선물했던 단정한 흑청색 잉크병의 뚜껑을 열고, 만년필의 금빛 닙을 깊숙이 담갔다.

 

검푸른 진실의 잉크를 가득 머금은 펜촉이, 피고인 강태석의 운명을 영원히 단죄할 최종 구형 의견서 첫머리에 묵직하게 닿았다.

 

재판장이 엄숙한 어조로 검사석을 향해 선언했다.

 

"검찰 측,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최종 의견을 진술하고 구형하십시오."

 

성재환이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서류를 펼쳐 들었다.

 

법정 안의 모든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30년간 남원을 짓밟아 온 거악의 숨통을 영원히 끊어버릴 최후의 구형이, 마침내 젊은 검사의 입술을 통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