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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3화

친구들의 법정 증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무너진 공작의 잔해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의 공기는 얼어붙은 삭풍처럼 매서웠다.

 

문성현 부장판사의 법봉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진 뒤에도, 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검사석과 피고인석 사이를 오가며 서슬 퍼런 긴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대표변호사가 획책했던 치열하고 비열한 공소기각 기도는 산산조각이 났다.

 

성재환 검사와 증인 한지유를 사적 치정과 가문의 원한으로 엮어 수사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했던 궤변은, 성재환이 자신의 친부인 전 내무부 차관 성호석마저 피의자로 적시해 기소하겠다고 선언한 서슬 퍼런 결기 앞에 완전히 분쇄되었다.

 

피고인석에 웅크린 채 턱을 덜덜 떨고 있던 강태석의 얼굴은 이미 흙빛이었다.

 

미결수 수의 왼쪽 가슴에 박힌 수번 '2104'가 거친 숨결에 따라 볼품없이 들썩였다.

 

30년간 남원을 자신의 왕국으로 군림시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토착 거두의 위세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중호 변호사는 땀으로 젖은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치켜올리며 피고인석의 강태석에게 낮게 귓속말을 던졌다.

 

"시장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검찰이 감정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친부까지 팔아넘기며 쇼를 하는 겁니다. 재판부가 저런 극단적인 퍼포먼스에 끝까지 휘둘릴 리 없습니다."

 

"쇼라고? 저놈 눈깔을 봐! 저게 쇼를 하는 놈의 눈깔인가!"

 

강태석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핏발 선 눈으로 검사석을 쏘아보았다.

 

성재환 검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단정한 검사 법복 아래로 곧게 뻗은 어깨,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의 깊고 푸른빛을 닮은 서늘한 눈동자가 피고인석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캡에 새겨진 그 서슬 퍼런 법언이 1호 대법정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문성현 재판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철을 넘겼다.

 

"피고인 측 변호인의 공소권 남용 및 주임검사 기피 신청은 이미 기각되었음을 다시 한번 고지합니다. 변호인, 더 이상 본안과 무관한 사적 신상에 대한 소모적 공방은 불허하겠습니다."

 

"재판장님, 변호인단은 검찰 측 공소사실 중 제방 붕괴 및 삼거리 김밥집에 대한 강제 행정지도와 관련된 혐의에 대해 여전히 전면 무죄를 주장합니다. 시청 위생과와 소방과의 점검은 자치단체장의 합법적 재량권 행사였으며, 어떤 외압이나 표적 탄압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의 주장은 일부 불만 세력의 편향된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중호가 호흡을 가다듬고 법복 매무새를 다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대검 차장검사다운 노회함이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피해자인 한지유의 일기장 낭독으로 기운 법정의 분위기를 어떻게든 '행정의 적법 절차'라는 법리적 안개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술책이었다.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장내의 웅성거림을 일거에 가라앉혔다.

 

"검찰은 피고인의 위법한 직권남용과 폭력교사가 결코 '합법적 재량' 따위의 허울 좋은 가면 뒤에 숨을 수 없음을 명백히 입증하겠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은 시청의 공권력을 사병처럼 동원해 영세 점포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관변 언론과 결탁했습니다. 검찰은 이를 곁에서 목격하고 생생하게 기록한 산증인들을 통해 공소사실을 완벽히 증명하고자 합니다. 검찰 측 제2호 증인 최민재, 제3호 증인 윤하은을 신청합니다."

 

문성현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출석해 있습니까?"

 

"예, 대기실에 출석해 있습니다."

 

"채택합니다. 증인 최민재 씨, 먼저 증인석으로 입정하십시오."

 

법원 경위가 대법정의 묵직한 참나무 문을 열자, 정적을 가르며 한 청년이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2. 기자의 수첩, 카르텔을 찢다

 

증인석으로 걸어 들어오는 최민재의 어깨에는 여전히 지난 심야 테러 당시 입었던 타박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빛나는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

 

그의 손에는 낡고 모서리가 닳아 헤진 검은색 비밀 취재 수첩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

 

강태석이 수습기자 시절부터 자신을 '쥐새끼' 취급하며 남원일보사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 때, 사주와 국장의 눈을 피해 남원시청과 경찰서, 건설 현장의 어둠을 낱낱이 필사했던 그 수첩이었다.

 

"증인은 증언에 앞서 선서를 하겠습니다. 증인 선서서를 낭독해 주십시오."

 

참여관이 건넨 선서서를 든 최민재는 떨림 없는 목소리로 낭독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1996년 9월 5일, 증인 최민재."

 

성재환 검사가 서류철을 들고 증인석 앞으로 다가섰다.

 

두 청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교차했다.

 

7년 전, 통일호 기차역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헤어졌던 소년들이 이제는 검사와 언론인이 되어 거악의 목줄을 죄기 위해 마주 서 있었다.

 

"증인은 남원일보사 사회부 수습기자로 재직하며 피고인 강태석과 남원시청의 관급 공사 비리,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에 대한 행정처분 과정을 지속적으로 취재해 왔지요?"

 

"그렇습니다. 남원일보가 강태석 시장의 홍보지로 전락해 진실을 덮는 동안, 저는 그 이면에서 벌어진 폭압을 직접 취재해 기록했습니다."

 

한중호 변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증인의 발언은 주관적 편견에 기반한 모욕적 언사입니다. 남원일보사는 공신력 있는 지방 언론이며, 수습에 불과했던 자의 일방적 비방은 증언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성재환이 서늘하게 말을 받았다.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증인이 제시할 객관적 물증을 확인한 후 재판부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변호인은 증언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문성현 재판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변호인 착석하세요. 검찰, 계속 신문하십시오."

 

성재환이 서류철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어 실물화상기에 올렸다.

 

대형 스크린에 남원일보사 1면 교정지와 찢겨진 원고지들이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증인, 1996년 8월 요천 제방 붕괴 참사 당시 남원일보사가 발행한 '100년 만의 기습 폭우,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기억합니까?"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 기사는 온전한 조작이었습니다."

 

최민재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당시 현장에서 수거된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한양토건의 감리 보고서는 요천 제1공구 제방이 설계 기준의 3분의 1에 불과한 철근을 쓰고 잡석을 채워 넣은 명백한 인재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취재해 1면 머리기사로 올렸을 때, 피고인 강태석은 배도식 편집국장실로 직통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최민재는 품속에서 소형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증인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당시 남원일보사 편집국 복도 자료실에서 제가 직접 녹음한 육성 테이프입니다."

 

순간 한중호 변호사의 낯빛이 변했다.

 

피고인석의 강태석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뻔한 것을 법원 경위가 강하게 어깨를 눌러 주저앉혔다.

 

"증 제43호증으로 제출합니다. 재판장님, 테이프의 일부 재생을 요청합니다."

 

문성현 판사의 허가가 떨어지자, 법정 스피커를 통해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서슬 퍼런 육성이 울려 퍼졌다.

 

―

"배 국장! 이 새끼가 미쳤나! 시정 홍보비 3억 싹 다 날아가고 윤전기 멈추는 꼴 보고 싶어? 당장 그 새파란 놈 기사 찢어버려! 320밀리 기습 폭우 때문에 제방이 불가항력으로 터졌다고 써! 내가 장화 신고 흙탕물에 뛰어든 사진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으란 말이야! 알아들어?"

 

―

"시, 시장님… 이미 기자들이 현장을 다 봤는데…."

 

―

"주둥이 닥쳐! 남원에서 내 말 거역하고 밥 빌어먹을 신문사가 있을 줄 알아? 삼거리 그 김밥집 계집애도 말 안 듣다가 어떻게 됐는지 봤잖아!"

 

법정 안이 일순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다가, 이내 방청석 곳곳에서 분노에 찬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런 날도둑놈이 시장이라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알고 저 지랄을 했어!"

 

"정숙! 정숙하십시오!"

 

문성현 재판장이 법봉을 두드렸으나 방청석의 술렁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성재환 검사가 강태석을 똑바로 응시하며 신문을 이어갔다.

 

"증인, 녹음 속에서 피고인이 언급한 '삼거리 그 김밥집 계집애'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증인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 있습니까?"

 

"한지유 씨입니다."

 

최민재가 수첩을 펼쳤다.

 

손때 묻은 페이지마다 날짜와 시간, 공무원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1995년 여름부터 피고인 강태석은 삼거리 김밥집을 표적으로 삼아 잔혹한 보복 행정을 자행했습니다. 위생과 직원들은 점심 장사로 붐비는 시간에 들이닥쳐 손님들을 쫓아내고, 정당한 식자재를 바닥에 쏟았습니다. 소방과는 1970년대 노후 목조 건물에 상업용 자동소화설비와 벽체 방염 시공을 5일 안에 끝내라는 불가능한 개수명령을 내렸습니다. 미이행 시 즉각 영업장을 폐쇄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행정지도가 아니라 피고인의 사적 지시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최민재가 수첩의 다음 장을 높이 들어 올렸다.

 

"소방과 내부에서 파쇄되기 직전 입수한 시장실 직통 메모입니다. '소방과장 앞. 삼거리 김밥집 노후 목조 구조 소방법 엄격 적용할 것. 5일 기한 엄수. 미이행 시 즉각 행정대집행 계고 및 폐쇄 조치. 시장실 직접 보고. 7월 18일, 강태석.' 피고인의 친필 서명과 시장실 직통 내선 번호 101번이 선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변호사는 더 이상 반박의 타이밍조차 잡지 못하고 입술을 바짝바짝 깨물었다.

 

객관적 물증과 육성 녹음, 내부 공문서의 삼각 연쇄 고리가 법정 안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성재환 검사가 서류를 정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증인, 피고인의 이와 같은 행위로 인해 피해자 한지유와 고(故) 박순례 씨가 겪은 고통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최민재의 목이 잠시 메어왔다.

 

그는 방청석 맨 앞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의 무릎 위에 놓인 하얀 손수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행정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탈을 쓴 합법적인 살인이었습니다. 지유 어머니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매일 들이닥치는 시청 직원들의 폭언과 영업정지 협박에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분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한 김밥 몇 줄이 아니라, 남원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최민재의 증언이 끝나자 법정 안은 숙연한 침묵에 잠겼다.

 

피고인석의 강태석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 뿐, 변호인 한중호조차 반대신문 포기 의사를 밝히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증인 최민재 씨, 수고하셨습니다. 퇴정하십시오."

 

문성현 재판장의 말에 최민재는 정중히 목례를 하고 증인석을 내려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 이상 쫓기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3. 흙탕물 속의 목격자

 

"다음 증인, 윤하은 씨 입정하십시오."

 

법원 참여관의 호명에 따라 법정 문이 다시 열렸다.

 

남원 토박이이자 지유의 가장 가까운 벗인 윤하은이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으로 걸어 들어왔다.

 

평소의 쾌활하고 거침없던 모습 대신, 친구의 억울함을 밝히겠다는 굳은 결기가 어린 얼굴이었다.

 

하은은 증인석에 서서 오른손을 들고 또박또박 선서서를 낭독했다.

 

성재환 검사가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어조로 신문을 시작했다.

 

"증인은 피해자 한지유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이자, 삼거리 김밥집의 일손을 자주 도왔던 이웃이지요?"

 

"네. 지유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매일 방과 후와 주말마다 가게에 나가 지유와 함께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1996년 8월, 삼거리 김밥집에 가해졌던 일련의 위협과 테러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겠군요."

 

"목격한 수준이 아닙니다. 저는 그 끔찍한 현장에 지유와 함께 있었습니다."

 

윤하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쥐며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지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였습니다. 새벽에 가게 문을 열러 나갔는데, 통유리창과 외벽 전체에 새빨간 유성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습니다. '빨갱이 소굴', '불태워 죽인다'는 시뻘건 글씨들이 도배되어 있었고, 문 앞에는 썩은 생선과 인분이 담긴 오물 통이 깨져 있었습니다."

 

방청석에서 낮은 탄식과 경악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재환이 붉은 페인트로 뒤덮였던 당시의 현장 감식 사진을 실물화상기에 띄웠다.

 

화면 가득 드러난 참혹한 광경에 방청석에 앉은 시민들은 주먹을 쥐었다.

 

"증인, 그 페인트를 지우기 위해 피해자 한지유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합니까?"

 

"지유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윤하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어린애가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석유를 묻힌 걸레와 철 수세미를 들고 벽을 문질렀습니다. 지유의 손톱 밑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고, 살갗이 벗겨져 짓물이 나는데도 벽을 닦아냈습니다. 제가 울면서 제발 그만두고 경찰을 부르자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지유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하은이 고개를 들어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경찰은 안 와.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저 사람들은 이 가게가 정말 자기들 것인 줄 알아. 내가 도망치면 재환이가 지키려는 법도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피 묻은 손으로 벽을 다 닦아냈습니다. 그 손으로 아침에 손님들에게 팔 김밥을 말았습니다!"

 

법정 안의 많은 방청객들이 눈가를 훔쳤다.

 

피해자석에 앉은 지유는 고개를 묻은 채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성재환 검사의 턱관절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분노와 애절함이 검사 법복의 검은 자락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검사로서의 냉정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갑고 단호한 법리로 무장했다.

 

"변호인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상인들 간의 단순한 우발적 마찰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증인, 당시 현장에 나타난 자들의 신원이나 그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에 대해 직접 들은 바가 있습니까?"

 

"똑똑히 들었습니다!"

 

윤하은의 목소리가 법정 전체를 쨍하게 울렸다.

 

"페인트 테러가 있던 날 밤, 골목 어귀에 검은색 관용 세단이 서 있었습니다. 남원시청 봉황 깃발이 꽂힌 강태석 시장의 로얄 살롱이었습니다. 차창이 반쯤 내려왔고, 한양토건 조폭 놈들이 차 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시장님, 말씀하신 대로 확실하게 손봐줬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습니다!"

 

"거짓말이야! 저 계집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

 

피고인석에서 마침내 강태석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포승줄에 묶인 몸으로 난간을 붙잡고 흔들며 삿대질을 해댔다.

 

"어디서 저런 근본 없는 것들을 데려와서 위증을 시켜!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내가 남원의 시장이야!"

 

"피고인, 착석하십시오! 경위, 피고인을 제압하세요!"

 

문성현 재판장이 법봉을 거칠게 내리쳤다.

 

"피고인 강태석에게 경고합니다. 한 번만 더 법정 질서를 어지럽히고 소란을 피우면 퇴정 명령과 함께 감치 처분을 내리겠습니다!"

 

경위 두 명이 강태석의 양팔을 꺾어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강태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윤하은과 성재환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한중호 변호사는 이미 체념한 듯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의 반대신문은 오히려 피고인의 파렴치함만 부각시킬 뿐이라는 것을 노련한 전관 변호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성재환 검사가 마지막으로 증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증인, 삼거리 김밥집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윤하은은 숨을 고르고, 방청석의 지유와 눈을 맞추었다.

 

"약속이었습니다. 서울로 떠나며 반드시 돌아와 정의를 세우겠다고 했던 성재환 검사의 약속,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남원의 양심을 지켜내겠다는 지유의 약속. 그 두 약속이 있었기에 저 무도한 권력자 앞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윤하은의 증언을 끝으로 검찰 측 증인신문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재판정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도덕적 무게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태석이 구축했던 30년 토착 권력의 철옹성은, 가장 힘없고 여린 자들이 목숨을 걸고 남긴 기록과 증언 앞에서 낱낱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4. 두 갈래의 길

 

"오후 재판은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기일은 내일 오전 10시에 속개하겠습니다."

 

문성현 재판장의 폐정 선언과 함께 법봉 소리가 울렸다.

 

경위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빠져나가는 강태석의 뒷모습통은 비참할 정도로 꺾여 있었다.

 

법정 문이 열리자마자 방청석에 있던 수해 이재민들과 시장 상인들이 일제히 기립해 성재환 검사와 증인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성재환은 검사석에 서서 묵묵히 고개를 숙여 시민들에게 예를 표했다.

 

법정 밖 중앙 복도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최민재와 윤하은, 그리고 지유가 재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생 많았다, 민재야. 하은아."

 

재환이 두 친구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낮게 말했다.

 

그의 서늘했던 눈매에 비로소 따뜻한 온기가 번져 나왔다.

 

최민재가 낡은 수첩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씩 웃었다.

 

"고생은 무슨. 7년 동안 썩은 냄새 맡으며 적어둔 보람이 오늘에서야 있네. 속이 다 후련하다."

 

"나 아까 잘했지, 재환아? 저 인간 소리지를 때 간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지유 손 보니까 용기가 나더라."

 

하은이 눈가를 훔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지유가 조용히 다가와 재환의 검사 법복 깃을 매만져 주었다.

 

그녀의 깊고 맑은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재환아. 고마워. 어머니도… 오늘 하늘에서 다 보셨을 거야."

 

"아니다, 지유야. 버텨준 건 너희들이었어. 너희가 남원에 끝까지 남아 증인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내가 든 법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을 거다."

 

재환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법원 직원들마저 발걸음을 멈추고 숙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최민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재환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가 일순 낮고 은밀하게 가라앉았다.

 

"재환아. 아까 법정 들어가기 전에 내가 말했던 첩보, 기억하지?"

 

재환의 눈빛이 다시 검사 특유의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강태석의 스위스 취리히 비밀 계좌 말인가."

 

"그래. 남원상호신용금고 임종식 계좌를 털었을 때 비어 있던 100억 원의 종착지다."

 

최민재가 품속에서 접힌 갱지 한 장을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강태석이 1심 패배를 이미 직감하고 있었어. 저놈의 목표는 1심이 아니야. 대법원 상고심까지 재판을 질질 끌면서, 서울의 거물급 사법 브로커들과 최고위 전관들을 매수해 판결을 뒤집으려는 속셈이다. 그 로비 자금 100억이 스위스 비밀 은행의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은닉되어 있어."

 

재환은 갱지에 적힌 영문 이니셜과 스위스 은행의 지점 코드를 응시했다.

 

'끝까지 빠져나갈 구멍을 파두었단 말이지.'

 

피고인의 탐욕은 감옥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국내의 모든 비자금과 차명 계좌가 동결되자, 해외로 빼돌린 검은돈을 이용해 사법부의 심장부를 매수하려 하고 있었다.

 

"이건 서울 대검 중수부와 외무부를 통해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부에 국제사법공조를 긴급 청구해야 한다. 자금이 움직이기 전에 계좌를 동결시키지 못하면, 저 거악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낼 수 없어."

 

재환의 결단력 있는 말에 최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외신 쪽 라인과 금융감독원 취재망을 총동원해서 계좌의 실소유주 페이퍼 컴퍼니 명의를 끝까지 추적해 볼게. 기사로 터뜨려 여론의 방파제도 만들고."

 

"고맙다, 민재야. 조심해라."

 

민재와 하은이 지유의 손을 꼭 쥐어주고 법원 정문을 나섰다.

 

법원 복도에 홀로 남겨진 재환과 지유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유가 재환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이제 지청으로 가는 거지?"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스위스 100억 계좌라는 새로운 전선 너머로,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장 잔혹하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다가와 있었다.

 

남원지청 1호 취조실.

 

그곳에는 청와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단신으로 남원에 내려와 아들의 칼날 앞에 제 목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친부, 성호석 전 내무부 차관이 앉아 있었다.

 

가문의 원죄이자, 30년 비극의 또 다른 한 축.

 

재환이 품속에 든 독일제 각인 만년필을 꽉 쥐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옥죄었다.

 

지유가 재환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지유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거친 상처의 흉터가 재환의 손등에 닿았다.

 

"재환아.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아버지를 미워하라는 게 아니야. 진실 앞에 아버지를 세우는 것이, 네가 아버지를 진정으로 구원하는 길이야."

 

지유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가게를 지키며, 붉은 페인트를 맨손으로 지워냈던 그 순결하고 강인한 영혼이 재환의 등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지유야."

 

"응. 기다릴게. 김밥 따뜻하게 싸두고 있을게."

 

재환은 뒤돌아섰다.

 

법원 중앙 현관을 나서는 그의 검은 법복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하늘에서는 어느덧 푸르스름한 가을 노을이 요천 둑길 너머로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5. 취조실의 문 앞에 서서

 

남원지청 1층 로비는 사방이 고요했다.

 

204호 검사실 복도를 지나 지하 취조실로 향하는 계단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계단참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태훈 수사관이 다가와 경례를 붙였다.

 

"검사님. 오셨습니까."

 

"안에 계시나."

 

"예. 오후 2시에 출석하신 이후로 단 한 모금의 물도 드시지 않고 미동도 없이 앉아 계십니다. 변호인도 대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강태훈의 목소리에도 짙은 긴장감이 묻어났다.

 

일개 지방 지청의 취조실에 전직 내무부 차관이자, 현직 주임검사의 친아버지가 피의자 신분으로 앉아 있는 전대미문의 상황이었다.

 

재환은 취조실 문앞에 섰다.

 

두꺼운 철제 방음문 중앙에 달린 작은 관측창 너머로 취조실 내부가 보였다.

 

백열등 불빛 아래,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성호석.

 

남원의 군수로서, 내무부의 실세 차관으로서 세상을 호령하던 가문의 절대자.

 

'남원의 힘은 썩었다. 바닥의 정의에 매달려서는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다.'

 

어린 시절, 재환에게 냉혹한 권력의 법칙을 강요하며 서울로 내몰았던 그 아버지가, 이제는 모든 권력과 직위를 내려놓고 아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초라한 피의자로 앉아 있었다.

 

재환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서 7년간 억눌러왔던 원망과 슬픔, 그리고 혈육의 정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는 검사였다.

 

피고인 강태석의 비열한 치정 프레임을 깨부수기 위해 법정에서 만천하에 천명했던 약속이 있었다.

 

'내 친부마저 이 법정에 피의자로 세우겠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선언이자,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계약이었다.

 

성재환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쇠 문고리가 돌아가며 육중한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취조실 안의 백열등 불빛이 재환의 검은 법복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성호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자의 시선이 7년 만에, 취조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성호석의 깊게 파인 눈가에 형용할 수 없는 회한과 비장함이 교차했다.

 

노신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마침내 낮고 쉰 목소리가 취조실의 침묵을 갈랐다.

 

"…왔느냐, 성 검사."

 

아들이 아닌, 자신을 단죄할 검사를 향한 호칭이었다.

 

성재환은 서류철을 쾅 소리 나게 철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충격음이 좁은 취조실 벽을 울리며, 가문의 오랜 원죄를 사법적으로 청산할 비극적이고도 위대한 결전의 서막을 알렸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