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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1화

어머니의 편지 낭독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낡은 양장 가계부의 무게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

 

문성현 재판장의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높은 법대 위에서 울려 퍼졌다.

 

"증인 한지유는 소지하고 있는 모친 고(故) 박순례의 일기장 및 기록물을 재판부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석에 앉아 있던 한지유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던 낡은 가계부 일기장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모서리가 닳아 헤지고 표지의 인조 가죽이 군데군데 벗겨진 짙은 밤색 장부였다.

 

표지 정중앙에는 세월의 손때에 반쯤 지워진 금박 글씨로 '삼거리 가계부'라는 투박한 활자가 박혀 있었다.

 

손때와 먼지, 그리고 참기름 냄새와 오래된 종이 특유의 퀴퀴하면서도 서글픈 냄새가 법정 앞쪽으로 은은하게 번져 나갔다.

 

법원 참여관이 다가와 경건한 손길로 그 장부를 받아 법대로 조심스레 전달했다.

 

문성현 재판장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장부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대법정 천장에 작게 공명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강태석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카키색 수의 가슴팍에 박힌 붉은 수번 2104가 그의 가쁜 숨결을 따라 잘게 들썩였다.

 

그의 두 손은 휠체어 팔걸이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는 지유의 무릎과 법대 위 장부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변호인석의 한중호 대표변호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증인석의 지유를 매섭게 응시하고 있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윤하은은 주먹을 꼭 쥔 채 눈물을 글썽였고,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는 취재 수첩을 쥔 손가락에 파랗게 힘을 주었다.

 

방청석을 빽빽하게 메운 구도심 상인들과 요천 제방 수해 이재민들 역시 숨을 죽인 채 법대를 응시했다.

 

검사석에 선 성재환은 숨조차 크게 내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떨리는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지유의 가녀린 등만을 향하고 있었다.

 

문성현 재판장이 장부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법정 안의 침묵은 점점 더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장부 안쪽에는 빽빽한 필기 외에도 영수증 조각과 군청 민원 접수증, 누렇게 바랜 신문 스크랩들이 핀으로 꼼꼼히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재판장이 안경을 벗어 법대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본 재판부가 확인한바, 이 기록물은 단순한 가계 지출 내역을 넘어 피고인 강태석의 남원시장 재임 및 그 이전 토지 환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사실들이 날짜별, 시각별로 극히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재판장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법정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특히 1995년 여름부터 모친 박순례 씨가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기록된 부분은 공소사실 제4항, 피고인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특수공무집행 방조 혐의와 직접적으로 결부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중호 변호사가 즉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고급 양복 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해당 일기장은 작성자가 이미 사망하여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전형적인 전문증거에 불과합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 전문법칙에 따라 증거능력이 부인되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증인이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짜 맞춘 사적 메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법정 안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문성현 재판장의 서늘한 눈빛이 한중호 변호사를 엄중하게 향했다.

 

"변호인, 자리에 앉으십시오. 재판부의 판단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은 법대 위의 장부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증인 한지유는 모친과 한집에서 동거하며 해당 장부의 작성을 직접 목격하고 일부 내용을 공동으로 작성한 당사자입니다. 또한 형사소송법 제314조 및 제316조에 명시된 특신상태, 즉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작성된 것인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본 법정은 증인에게 해당 일기장 말미의 기록을 육성으로 낭독할 것을 명합니다. 변호인의 이의는 기각합니다."

 

재판장의 단호한 선언이 떨어지자 한중호 변호사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 앉았다.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금 증인석의 한지유에게로 쏠렸다.

 

2. 법정에 울려 퍼진 어머니의 목소리

 

법원 참여관이 다시 장부를 들고 내려와 한지유의 증인대 위에 정갈하게 펼쳐 놓았다.

 

펼쳐진 페이지는 노랗게 변색된 갱지 위에 거친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쓴 어머니의 투박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가 투박하게 꺾여 있었고, 어떤 대목은 손이 떨렸는지 획이 길게 빗나가 있었다.

 

군데군데 둥글게 번진 자국은 틀림없이 밤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흘렸을 어머니의 눈물 흔적이었다.

 

지유는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장부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거친 종이의 까슬한 질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져 오자, 억눌러왔던 그리움과 서러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지유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귓가에 낡은 김밥집 주방에서 도마를 탕탕 치던 어머니의 칼질 소리와, 늦은 밤 다리를 주무르며 끙끙 앓던 숨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유는 눈을 뜨고 마이크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낭독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으나 결코 떨리지 않았다.

 

방청석의 상인들이 일제히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였다.

 

"1995년 8월 17일, 맑음. 그러나 내 마음은 썩은 흙탕물이다."

 

지유의 첫 문장이 마이크를 타고 대법정의 두꺼운 벽면을 먹먹하게 울렸다.

 

"오후 세 시에 시청 위생과에서 또 세 사람이 들이닥쳤다. 벌써 이번 달만 네 번째다. 손님들이 김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나갔다. 계장이라는 사내는 가게 바닥에 침을 뱉으며 쉰내가 난다고 소리를 질렀다.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병을 무표시 불량품이라며 압수하겠다고 낚아채더니, 내 손을 거칠게 밀치고는 시멘트 바닥에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방청석 한구석에서 읍내 시장 상인 김 씨가 주먹으로 무릎을 치며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천벌을 받을 놈들……."

 

지유는 흐트러짐 없이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겨 내려갔다.

 

"바닥에 고소한 참기름이 피처럼 번져 흘렀다. 그 참기름은 우리 지유가 교복 치마를 줄이지도 못하고, 밤마다 졸린 눈 비벼가며 단무지를 썰어 번 돈으로 산 통깨를 짠 기름이다. 내가 무릎을 꿇고 제발 장사만 하게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았더니, 그 계장이 발길질을 하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시장님 뜻을 거스르고 이 남원 바닥에서 계집애 데리고 장사할 수 있을 줄 알았소? 삼거리 김밥집 간판 내리고 도장 찍기 전에는 매일 올 거요.'"

 

피고인석의 강태석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휠체어 위에서 거칠게 몸을 뒤틀었다.

 

지유는 피고인의 험악한 태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차분히 책장을 넘겼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갈랐다.

 

"어머니의 일기는 계속됩니다."

 

지유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깨뜨린 것은 참기름병이 아니라, 나와 내 딸아이가 세상을 향해 쥐고 있던 마지막 사람 대접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기름투성이가 된 깨진 유리 조각을 맨손으로 주워 담았다. 손가락이 베여 붉은 피가 기름 속에 섞여 번졌다. 피가 섞인 기름을 훔쳐내며 나는 울지 않았다. 지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 비참한 꼴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걸레로 바닥을 백 번도 넘게 닦아냈다. 그러나 참기름 냄새는 빠져도, 그들이 남기고 간 멸시의 냄새는 며칠이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지유의 낭독이 이어지는 동안 법정 안에서는 기침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취재석의 기자들은 타자기와 펜을 쥔 채 굳어 있었고, 법정을 지키던 법원 경위들마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고개를 숙였다.

 

검사석에 선 성재환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지유의 어머니가 참기름 범벅이 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피를 흘리며 유리 조각을 줍던 그 잔혹한 여름날, 자신은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좁은 방에서 형법 판례를 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푸른 핏대가 솟구쳤고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재환은 공소사실을 끝까지 입증해야 하는 검사였기에, 입술을 짓깨물며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턱을 굳게 치켜들었다.

 

3. 30년 전 빼앗긴 땅, 그리고 유언

 

지유의 손가락이 일기장의 가장 마지막 장, 세월에 누렇게 찌든 두꺼운 갱지로 조심스레 옮겨졌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글씨뿐만 아니라, 3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겼던 낡은 측량 도면의 모서리와 손수 필사해 둔 메모들이 반듯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지유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로 실려 가기 불과 일주일 전에 쓰인 글이었다.

 

"1996년 5월 12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양쪽 다리가 무쇠솥처럼 부어올라 조리대 앞에 십 분도 서 있기 힘들다. 오줌에서 피가 섞여 나오고 숨이 턱턱 막힌다. 병원에 가면 돈이 든다. 우리 지유 서울 갈 밑천인데, 이 어미가 피를 쏟아붓고 떠날 수는 없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하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꼈다.

 

최민재 기자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지유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꾹 누르고, 단어 하나하나를 정갈하게 발음했다.

 

"오늘 밤, 지유가 지쳐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카운터 밑바닥 판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우리 남편 석규 씨가 죽기 전까지 품에 안고 피눈물을 흘리던 1968년 토지 서류가 들어 있다. 요천 변의 기름진 과수원 사천 평.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벌들이 웅웅거리던 우리 가족의 전부였던 땅. 강태석 그자가 조폭들을 끌고 들어와 군청 관인을 찍은 가짜 서류를 들이밀며 도로를 낸다고 강제로 빼앗아 간 우리 땅이다."

 

그 대목이 법정에 낭독되는 순간, 피고인석의 강태석이 벼락 맞은 듯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이야! 저 계집년이 남원을 집어삼키려고 죽은 에미 팔아서 소설을 쓰고 있어!"

 

강태석의 고함이 법정 천장을 뒤흔들었다.

 

그가 휠체어에서 상체를 불쑥 일으키며 포승줄에 결박된 두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

 

그의 얼굴은 핏발이 서서 터질 듯 붉어졌고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일었다.

 

"입 닥쳐라, 한지유! 네 애비나 에미나 원래 남원 바닥에서 보상금 더 뜯어내려고 알박기하던 악질 사기꾼들이야! 내가 남원 발전을 위해 그 쓸모없는 자갈밭을 군청을 통해 수용해 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어디서 수작질이야!"

 

"피고인, 정숙하십시오!"

 

문성현 재판장의 분노 어린 호통과 함께 법봉이 거칠게 세 번 내리쳐졌다.

 

"탕! 탕! 탕!"

 

육중한 쇳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지며 강태석의 폭언을 잘라냈다.

 

"경위들, 즉시 피고인을 제자리에 착석시키세요! 계속해서 법정 모독과 소란을 이어간다면 즉각 퇴정 조치하고 감치 명령을 집행하겠습니다!"

 

양옆에 서 있던 법원 경위 두 명이 휠체어로 달려들어 강태석의 양어깨를 억센 힘으로 짓눌렀다.

 

강태석은 억지로 자리에 처박히면서도 독기 어린 눈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그러나 지유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강태석의 살기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맑은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지유는 마이크를 바짝 끌어당기며, 어머니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을 온 힘을 다해 낭독하기 시작했다.

 

"석규 씨는 억울해서 피를 토하며 눈을 감았고, 강태석은 그 빼앗은 땅 위에 건물을 올리고 빌딩을 세워 남원의 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도둑질한 죄를 영원히 덮어버리려고 내 딸아이의 목숨마저 위협하고 있다. 밤마다 쇠파이프를 든 자들이 가게 앞을 서성인다. 그러나 나는 무섭지 않다. 죄지은 자는 반드시 자기가 지은 죗값의 불덩이에 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유의 음성은 맑았으나, 그 안에는 거대한 바위를 쪼갤 듯한 서슬 퍼런 결기가 서려 있었다.

 

대법정 천장에 메아리치는 그 목소리는 마치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 산 자를 심판하는 신탁처럼 장엄했다.

 

"만약 내가 지유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다면, 남원에 있는 바람이, 요천의 물결이 내 딸아이를 지켜주기를 기도한다. 지유야, 너는 결코 도망치지 마라. 도둑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얻어먹는 밥은 모래알보다 쓰디쓴 법이다. 정직하게 살아온 네 아버지의 이름과 이 어미의 땀방울을 끝까지 지켜내라. 남원의 땅은 사기꾼의 것이 아니라, 묵묵히 흙을 파고 밥을 짓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지유의 낭독이 끝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덮었다.

 

책장이 덮이며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났을 뿐이었으나, 그것은 법정 안의 모든 불의를 단죄하는 거대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도 같았다.

 

대법정 안은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 들었다.

 

누구 하나 감히 기침조차 하지 못했다.

 

방청석에서는 흐느낌과 함께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는 소리가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오랫동안 권력의 발밑에서 짓밟히고 숨죽여 살아왔던 남원의 소시민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빼앗긴 존엄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깨달은 얼굴들이었다.

 

4. 검사의 결기, 무너진 변호인석

 

검사석에서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은 법복 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서늘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성재환은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오른손에 굳게 쥔 채 중앙 통로로 걸어 나왔다.

 

캡 상단에 금빛으로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의 문구가 법정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번쩍였다.

 

성재환은 증인대와 피고인석 사이에 멈춰 섰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휠체어에 구겨져 있는 강태석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검찰 측, 증거 제출 확인하겠습니다."

 

성재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으나 법정의 구석구석까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방금 증인이 낭독한 고(故) 박순례의 일기장 말미에는 1968년 5월 작성된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사본과 함께, 1995년 8월 17일 위생과 단속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시청 계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시정명령서 수령증이 원본 그대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성재환은 품에서 투명 비닐에 봉인된 증거 서류철을 꺼내 들어 올렸다.

 

"뿐만 아니라 당시 피고인의 사주를 받은 공무원들에 의해 파손된 참기름병의 구입 영수증과, 당일 오전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국산 통깨 세 되를 볶아 짠 내역이 적힌 방앗간 영수증 원본까지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 채 철되어 있습니다."

 

성재환은 몸을 돌려 법대 위의 문성현 재판장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본 기록물이 작성자 사망에 따른 전문증거에 불과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일기장에 첨부된 처분문서와 영수증, 그리고 현장 상황의 상세한 일치성은 형사소송법 제315조 제2호, 통상 업무 과정에서 작성된 신빙성 있는 문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모친이 임종 직전 자신의 딸에게 남긴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은 제314조의 특신상태를 완벽하게 충족합니다. 이에 검찰은 본 가계부 일기장 및 첨부 서류 일체를 증 제42호증으로 정식 채택해 주실 것을 재판부에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중호 변호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무런 말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법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날짜, 시간, 출동 공무원의 직급과 이름, 파손된 물품의 영수증까지 완벽하게 결합된 물증 앞에서는 전관 대형 로펌의 어떤 교활한 법리도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수사기관이 기획해 낸 서류가 아니었다.

 

권력이라는 거대한 맷돌 밑에 깔려 피를 흘리면서도, 오직 제 자식과 진실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몽당연필로 꼭꼭 눌러쓴 진실 그 자체였다.

 

문성현 재판장의 안색은 숙연함을 넘어 서늘한 분노로 굳어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휠체어 위의 강태석을 엄중하게 내려다보며 법봉을 들었다.

 

"본 재판부는 증인 한지유의 증언 태도, 제출된 가계부 일기장의 필적 및 보관 상태, 첨부된 영수증과 공문서의 진정성립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해당 기록물에 고도의 증거능력과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검찰의 신청을 인용하여 본 일기장 및 첨부 서류 일체를 증 제42호증으로 정식 채택합니다."

 

"탕! 탕! 탕!"

 

세 번의 둔탁한 타격음이 법정을 울리는 순간, 한중호 변호사는 허탈하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강태석의 고개가 꺾였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터져 있었다.

 

민선 시장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 뒤에 숨겨두었던 30년 토건 폭력의 추악한 민낯이 백주 대낮의 법정에서 온전히 박제된 순간이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기자들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수첩 위를 달렸다.

 

'피눈물의 일기장, 강태석의 살인 행정을 단죄하다'.

 

'깨진 참기름병과 모성의 절규, 법정을 울리다'.

 

내일 아침 전국의 신문 1면을 도배할 활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강태석이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던 도덕성과 공직 적격성은 이제 단 한 조각도 남지 않고 산산조각이 났다.

 

5. 법정을 가르는 시선

 

문성현 재판장이 벽시계를 확인한 후 법대 위의 서류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검찰 측 제1호 증인 한지유에 대한 증인신문 절차를 모두 종료합니다. 증인은 퇴정하셔도 좋습니다."

 

그 선언과 함께 지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법대를 향해 허리를 굽혀 깊이 인사를 올렸다.

 

증인석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오는 지유의 모습은, 더 이상 7년 전 서울행 관용차를 뒤쫓다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져 피 흘리던 가련한 여고생이 아니었다.

 

거대한 권력의 폭압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어머니의 명예를 바로 세운 당당한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성재환은 검사석에 서서 걸어 나오는 지유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법정 한가운데의 허공에서 묵직하게 얽혀 들었다.

 

성재환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벅찬 경외감과 끝 모를 미안함이 깊게 배어 있었고, 지유의 맑은 눈동자에는 '당신이 약속을 지켜주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무언의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지유가 방청석 통로를 따라 법정 퇴정 문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집배원 박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가 일어섰고, 제방 붕괴로 집을 잃고 눈물짓던 노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방청석에 있던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기립했다.

 

그들은 퇴정하는 지유의 뒷모습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사과였다.

 

지난 세월 동안 강태석의 공포 정치에 질려 삼거리 김밥집 모녀가 피눈물을 흘릴 때 외면하고 침묵했던 자신들의 비겁함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었다.

 

동시에 불의에 무릎 꿇지 않고 남원의 양심을 지켜낸 어린 처녀를 향해 바치는 온 시민의 가장 뜨겁고 엄숙한 연대의 맹세였다.

 

지유의 발걸음이 문가에 닿았을 때, 지유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민들을 향해, 검사석의 성재환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육중한 법정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자 문성현 재판장이 법봉을 쥐며 다음 공판 일정을 알렸다.

 

"다음 공판기일은 1996년 9월 12일 오전 10시로 지정합니다. 다음 기일에는 피고인 측의 반대증거 조사 및……."

 

"재판장님! 잠시 발언권을 청합니다!"

 

그때였다.

 

패색이 짙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대표변호사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수치심을 덮기 위한 비열하고 독기 어린 냉소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중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지도 않은 채 마이크를 낚아채듯 쥐었다.

 

"재판장님, 다음 기일 심리에 들어가기에 앞서 변호인 측에서 공소기각 판결 및 수사 검사에 대한 제척·기피를 요구하는 중대한 변론 준비 서면의 요지를 사전 고지하고자 합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일순간 팽팽하게 팽창했다.

 

기자들의 눈빛이 번뜩였고, 성재환의 미간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한중호 변호사는 검사석의 성재환을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뱀처럼 독기 어린 목소리를 뱉어냈다.

 

"본 변호인단은 방금 눈물겨운 감성 팔이로 퇴정한 증인 한지유와, 저기 서 있는 주임검사 성재환이 단순한 피해자와 검사의 관계가 아니라는 명백한 물증을 확보했습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한중호는 방청석과 재판부를 번갈아 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남원에서 은밀하게 정을 통하던 사적 연인 관계였습니다! 성재환 검사가 품에 쥐고 흔드는 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과, 한지유가 소지했던 흑청색 잉크병은 두 사람이 과거 광한루원에서 사랑의 징표로 교환했던 치정의 증거물입니다! 나아가 증인의 부친 한석규와 성재환 검사의 부친 성호석 전 차관, 그리고 성재환의 조부 대부터 이어져 온 1968년 토지 분쟁의 개인적 원한을 갚기 위해, 주임검사가 국가의 신성한 사법권을 사유화하여 무자비한 표적 기획 수사를 자행한 것입니다!"

 

"변호인! 그 입 닥치지 못해!"

 

검사석에서 안진우 검사가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한중호는 비열한 폭소를 터뜨리며 품 안에서 누렇게 변색된 낡은 서류 한 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다음 기일, 본 변호인단은 1968년 성재환 검사의 조부와 한석규 사이에 작성된 토지 환지 브로커 비밀 계약서 원본과 함께, 두 사람의 불순한 사적 치정 관계를 입증할 결정적 편지와 사진을 법정에 제출할 것입니다! 이 재판은 부패 척결의 장이 아니라, 사적 복수와 치정을 위해 공권력의 칼을 휘두른 한 정치 검사의 추악한 사기극입니다!"

 

그 순간, 휠체어에 축 늘어져 있던 강태석이 마침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의 일그러진 입꼬리가 찢어질 듯 말려 올라가며 광기 어린 조소가 터져 나왔다.

 

성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만년필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그의 눈빛은 거대한 암벽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 안에는 거악의 무리가 감히 지유와의 가장 순결했던 약속을 더럽히려 한다는 사실에 대한 서슬 퍼런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성재환의 차가운 입술 사이로 결전의 숨결이 낮게 흘러나왔다.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에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혈투의 전조가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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