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석에 선 한지유
1. 증인 선서와 정적
법정 경위의 호명이 대법정 천장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검찰 측 제1호 증인, 한지유 씨 앞으로 나오십시오."
방청석 맨 앞줄에 단정히 앉아 있던 한지유(韓智由)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순간 법정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작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남원 시민들의 숨죽인 탄식, 취재기자들의 바쁜 펜 끝 소리, 그리고 피고인석에 결박된 채 앉아 있는 강태석(姜泰錫)의 시퍼런 살기가 한데 뒤엉켜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지유는 목에 정갈하게 둘러맨 어머니의 하얀 면 손수건을 가만히 매만졌다.
가슴팍에는 어머니 박순례가 병상에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낡은 양장 가계부 일기장이 묵직한 온기를 품은 채 안겨 있었다.
또각, 또각.
낡았지만 흠집 하나 없이 닦아 신은 구두 소리가 법정 바닥을 울렸다.
지유는 법대 바로 아래에 마련된 높은 증인석을 향해 한 걸음씩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검사석에 선 성재환(成宰桓)의 눈빛이 지유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법복 소매 아래로 쥔 성재환의 주먹에 핏줄이 솟아 있었으나, 지유가 증인석 난간을 잡고 돌아서자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오직 거악을 향해 함께 칼을 겨눈 동지이자, 영혼을 나눈 사람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서려 있었다.
지유는 법대를 향해 단정히 고개를 숙인 뒤,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선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1996년 9월 5일, 증인 한지유."
맑고 청아한 음성이었다.
조금의 떨림도, 망설임도 섞이지 않은 그 목소리는 장내를 가득 메우던 웅성거림을 단숨에 잠재웠다.
문성현(文成鉉) 부장판사가 안경 너머로 지유를 온화하면서도 엄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석하십시오.
증인은 피고인 측 변호인이나 검찰 측의 신문에 오직 사실만을 진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찰 측, 주신문(主訊問)을 시작하십시오."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 주머니에 꽂힌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에 쥔 성재환은 마이크를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고요히 교차했다.
칠 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벚꽃 잎을 맞으며 시작되었던 약속,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야 했던 이별, 그리고 신림동 고시촌과 삼거리 김밥집 단칸방을 오가며 지켜냈던 불변의 시간들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성재환의 낮고 단단한 음성이 법정을 울렸다.
"증인, 본인의 신원과 피고인 강태석과의 관계를 진술해 주십시오."
지유는 증인석 마이크를 바짝 당겼다.
그리고 피고인석에서 독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강태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는 전북 남원시 동충동 182번지에서 삼거리 김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한지유입니다.
피고인 강태석은 과거 삼거리 토건 대표 시절부터 저희 아버지의 과수원 부지를 강탈하고, 시장에 당선된 이후 시청의 공권력을 사적으로 동원해 제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입니다."
2. 피눈물로 복기한 6년의 야만
첫마디부터 법정 안이 술렁였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韓重浩) 대표변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볼펜을 탁탁 쳤으나, 성재환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증인, 피고인 강태석이 1995년 민선 1기 남원시장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증인의 가게에 가한 행정 조치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십시오."
지유는 가슴에 품고 있던 어머니의 가계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증언대 위에 올려놓았다.
가죽 모서리가 닳고 눈물 자국이 얼룩진 그 낡은 책을 어루만지는 지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으나, 목소리는 오히려 서늘할 정도로 또렷했다.
"취임 한 달 만인 1995년 7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청 위생과 직원들이 불시에 들이닥쳤습니다.
손님이 김밥을 먹고 있는 대낮에 주방으로 난입해, 목재 도마를 쓴다는 이유로 과태료 사전통지서를 던졌습니다.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와 소주병에 담아둔 국산 통깨 참기름을 무표시 불량 식품이라며 압류하려 했습니다.
어머니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말리자, 위생과 직원은 참기름병을 시멘트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 냈습니다."
방청석에서 억눌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시 삼거리 골목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던 생선전 배 씨가 주먹으로 무릎을 내리쳤다.
지유의 진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위생 점검이 끝나자마자 다음 날은 소방과에서 찾아왔습니다.
1970년대에 지어진 낡은 목조 상가라는 트집을 잡아, 영세 분식집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업용 자동소화장치와 배관 금속관 전면 교체, 방염 내장재 시공을 5일 안에 끝내라는 개수명령서를 발부했습니다.
기한 내에 이행하지 않으면 즉시 영업장을 폐쇄하고 이행강제금 삼백만 원을 물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성재환이 서류철에서 남원시청 소방과의 내부 결재 문건 사본을 들어 올렸다.
"증인, 당시 발부된 개수명령서와 시장실 직통 내선 번호 101번이 적힌 강태석 피고인의 친필 지시 메모를 기억합니까?"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삼거리 김밥집. 노후 목조 구조 소방법 엄격 적용할 것. 미이행 시 즉각 행정대집행 계고 및 폐쇄 조치. 시장실 직접 보고. 강태석.'
그 메모는 공권력의 집행이 아니라,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힘없는 모녀를 말려 죽이겠다는 사적 처형장이었습니다."
피고인석에 앉은 강태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포승줄에 묶인 몸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유의 시선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강태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직격했다.
"이웃 목수 아저씨의 도움으로 방염 도료를 칠해 소방 점검을 적합 판정으로 넘기자, 피고인은 남원세무서를 움직였습니다.
카드 단말기도 없던 영세 김밥집에 특별 세무조사반이 들이닥쳐 3개년 영수증 원본을 모조리 압수하려 했습니다.
무자료 거래와 현금 매출 누락이라는 누명을 씌워 세금 폭탄으로 가게를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당일 판매 수량과 밥 한 줄 무게 210그램, 십 원짜리 동전 시재까지 1원의 오차도 없이 적어둔 일일 결산록 세 권을 내밀자, 그제야 세무서 직원들은 낯을 붉히며 도망쳤습니다."
지유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으나, 그 안에 담긴 슬픔과 분노의 무게는 법정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합법의 탈을 쓴 보복이 모두 실패하자, 피고인은 어둠 속의 짐승들을 풀었습니다.
심야에 복면을 쓴 자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가게로 난입해 전면 통유리창을 박살 냈습니다.
벽면에는 붉은 유성 페인트로 '불태워 죽인다'는 협박 문구를 도배했습니다.
그 공포와 협박 속에서…… 평소 신장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피를 토하며 남원의료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습니다."
법정 곳곳에서 방청객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성재환은 가슴을 에는 고통을 집어삼키며, 가장 잔혹했던 마지막 진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증인, 모친 박순례 씨의 임종 당시 남원의료원 영안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진술해 주십시오."
지유의 눈가에 마침내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그러나 입술은 떨리지 않았다.
"1996년 8월 19일 새벽 네 시 사십팔 분, 어머니는 끝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인 아침 여덟 시, 피고인 강태석의 사주를 받은 조폭들과 시청 계장이 영안실로 들이닥쳤습니다.
밀린 병원비와 장례비를 전액 대납해 줄 테니, 삼거리 김밥집 상속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제가 거절하자, 그자들은 병원 원무과를 압박해 영안실 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무연고 변사체로 냉동고에 처넣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갓 스무 살이 된 제 멱살을 잡고 협박했습니다."
지유가 증언대 위에 놓인 어머니의 일기장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어머니는 남원을 사랑하셨지만, 강태석 시장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기장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까지 적어두신 피고인의 모든 만행이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적혀 있습니다.
피고인은 시장이 아니라, 공권력이라는 칼을 쥐고 힘없는 민초들을 도륙한 살인자입니다!"
지유의 맺힌 절규가 대법정의 참나무 벽을 흔들었다.
방청석에서는 분노의 함성과 오열이 터져 나왔고, 문성현 재판장은 굳은 표정으로 법봉을 가볍게 두드려 장내를 정돈했다.
성재환 검사는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상으로 검찰 측 주신문을 마칩니다."
3. 전관의 비열한 덫
문성현 재판장이 변호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고인 측, 반대신문(反對訊問) 하십시오."
법무법인 세율의 대표변호사 한중호가 묵직한 서류철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검 차장검사와 고검장을 거치며 수많은 대형 사건의 법정을 쥐락펴락했던 백발의 노회한 법조인이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가장한 채, 느릿한 걸음으로 증인석 앞으로 다가섰다.
사냥감을 노리는 늙은 늑대의 눈빛이었다.
한중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증인,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대해 변호인으로서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험한 세상을 헤쳐오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기만적인 위로였다.
지유는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한중호를 응시했다.
한중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증인, 감정을 가라앉히고 법적인 사실관계만을 명확히 짚어봅시다.
증인은 시청의 위생 점검과 소방 점검이 '표적 단속'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삼거리 김밥집은 1970년대에 지어진 무허가 불법 증축 목조 건물이 맞지요?"
지유가 또렷하게 답했다.
"불법 증축이 아니라, 1975년 남원군청의 적법한 도로 점용 허가와 양성화 조치에 따라 20년간 세금을 납부해 온 정상적인 영업장이었습니다."
한중호는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서류를 넘겼다.
"허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목조건물에 기름을 다루는 음식점이라면 화재 위험이 높은 것은 상식입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방자치단체가 노후 목조 상가에 소방 시설 보강을 요구한 것이 어떻게 '살인 행정'이 됩니까?
행정청의 정당한 감독 권한 행사를 증인이 사적인 피해망상으로 과장한 것 아닙니까?"
성재환 검사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은 이미 압수된 피고인의 친필 사적 보복 메모와 5일이라는 불가능한 이행 기한의 위법성을 고의로 왜곡하며 증인에게 모욕적인 의견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문성현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용합니다.
변호인은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신문을 자제하고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신문하십시오."
한중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더 악랄한 덫을 놓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금전적인 문제를 짚어보지요.
증인은 피고인 강태석이 상속 포기 각서를 강요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원시가 추진하던 동충동 관광특구 정비사업에서, 삼거리 김밥집 부지에 책정된 보상금은 평당 공시지가의 130퍼센트였습니다.
게다가 피고인은 증인의 어려운 처지를 딱하게 여겨, 요천 수변 상업지구 1층 노른자위 점포의 무상 분양권과 어머니의 밀린 병원비 수천만 원을 사비로 대납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선의(善意)를 베풀었습니다.
맞습니까?"
방청석의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자칫하면 피해자가 시장의 호의를 걷어차고 더 큰 보상금을 요구하다가 갈등을 빚은 것처럼 비칠 수 있는 교활한 프레임이었다.
한중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증인은 시세보다 높은 보상과 신축 상가 무상 입주라는 엄청난 특혜를 제안받았음에도 이를 거절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욕심이 생겨, 남원시를 상대로 더 막대한 알박기 보상금을 뜯어내려 했던 것 아닙니까?
피고인의 정당한 개발 사업을 방해하고 언론 플레이를 통해 시장을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운 진짜 목적이 거액의 합의금 때문이 아니었느냐는 말입니다!"
비열하고 잔인한 인신공격이었다.
방청석의 상인들이 분노로 들썩거렸고, 윤하은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한중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유의 얼굴을 바짝 쏘아보았다.
어린 여학생의 멘탈을 법정에서 완전히 무너뜨려 울음을 터뜨리게 하거나 감정적인 실언을 유도하려는 전형적인 법정 기술이었다.
4. 진실의 품격
대법정 안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모든 이들이 증인석의 한지유를 바라보았다.
모욕과 수치심에 질려 눈물을 쏟거나 말을 잇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유는 울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지도, 호흡을 흐트러뜨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자신을 짓밟으려 드는 백발의 거물 변호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맑고, 거대한 해일 앞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바위처럼 의연했다.
지유가 천천히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직하지만 법정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변호사님께서는 그것을 '선의'와 '특혜'라고 부르시는군요."
한중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유는 어머니의 일기장 옆에 놓아둔 낡은 서류 사본 한 장을 펼쳤다.
"피고인이 제시한 계약서 제12조 특약 조항을 읽어보셨습니까?
'신축 상가 입주 시 평당 600만 원, 점포당 1억 5천만 원의 현금 추가 분담금을 완납하지 못할 경우 분양 자격을 박탈하고 시행사에 귀속한다.'
하루에 김밥 백 줄을 팔아 만 원, 이만 원을 남겨 겨우 풀칠을 하던 영세 상인들에게, 1억 5천만 원이라는 빚을 지우고 쫓아내는 것이 변호사님이 말씀하시는 선의입니까?
기준 지가를 3년 전 과거 공시지가로 묶어 실제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돈을 던져주고 길거리로 나앉게 만드는 것이 특혜입니까?"
지유의 논리정연하고 차분한 반박에 한중호의 턱이 굳어졌다.
지유의 시선이 피고인석의 강태석에게 닿았다.
"그리고 시장실에서 제게 개인적으로 내밀었던 그 노른자위 점포 분양권.
피고인은 제게 말했습니다.
'너 하나만 눈감고 내 밑으로 들어오면 평생 호강하게 해 주겠다. 대신 1991년 환지 서류를 내놓고 죽은 아비의 억울함을 입 밖에도 내지 마라.'"
지유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더러운 입막음이었습니다.
이웃 상인들의 피눈물을 쥐어짜 만든 썩은 고기 한 조각을 제 입에 던져주고,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고통을 영원히 묻어버리려 했던 악마의 유혹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의 눈에 피눈물 내며 빼앗은 돈으로 호강할 만큼 비겁하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김밥 한 줄을 말 때도 쉰 밥을 쓰지 않으셨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정직하게 땀 흘려 번 돈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더러운 침묵의 대가로 백억을 준다 한들, 저는 제 영혼과 어머니의 명예를 팔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피고인의 제안을 찢어버린 이유이고,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진실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정적.
완벽한 정적이 대법정을 집어삼켰다.
화려한 법 논리와 교활한 말장난으로 무장했던 한중호 변호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지유가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서슬 퍼런 결기 앞에, 거대 로펌의 노회한 기술은 한낱 추악한 궤변으로 전락해 버렸다.
방청석 맨 뒷자리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노신사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맞는 말이다……."
"지유 말이 맞아!"
장내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뜨거운 공감이 법정을 뒤흔들었다.
문성현 재판장은 감정을 억누르는 엄숙한 표정으로 한중호를 바라보았다.
"변호인, 다음 신문 있으십니까?"
한중호는 헛기침을 하며 굳어버린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전관 변호인단의 비열한 기습이 완벽하게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5. 어둠 속의 또 다른 음모
문성현 재판장이 증인석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증인 한지유 씨, 어려운 자리에서 용기 있게 진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증인은 이제 방청석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지유는 법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뒤,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검사석을 지나칠 때, 성재환 검사가 지유를 향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에 맺힌 것은 깊은 경외감과 뜨거운 안도감이었다.
지유는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꼭 쥔 채, 방청석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윤하은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지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지유야…… 너 정말 최고였어.
어머니가 정말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야."
지유는 하은의 손을 마주 잡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피고인석의 분위기는 처참했다.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완벽하게 짓밟아 무력화시킬 줄 알았던 어린 여학생에게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태석의 핏발 선 눈동자가 변호인석의 한중호를 향해 찢어질 듯 번뜩였다.
'저 빌어먹을 늙은이가 돈만 쳐먹고 뭐 하는 짓이야!'
자리로 돌아온 한중호 변호사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땀을 닦았으나, 그의 눈빛은 맹독을 품은 독사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앉은 배상문 전 법원장 출신 변호사에게 고개를 숙여 은밀히 속삭였다.
"피해자 감성팔이로는 저 계집을 꺾을 수 없어.
남원 바닥의 여론도 완전히 저쪽에 넘어갔고."
배상문이 굳은 표정으로 서류철 하나를 슬그머니 꺼내 밀었다.
어제 서울에서 긴급 입수한 과거 남원군청의 극비 토지 문서 사본이었다.
"이걸 쓰실 겁니까, 한 대표님?"
한중호의 입가에 잔인하고 비열한 냉소가 번졌다.
"다음 공판기일에 이 카드를 깐다.
증인 한지유와 주임검사 성재환의 관계.
단순한 피해자와 검사가 아니라, 학창 시절부터 깊은 치정 관계였으며…… 저 만년필과 흑청색 잉크로 맺어진 사적 복수를 위해 국가의 사법권을 사유화했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리고 한지유의 죽은 아비 한석규가 1968년 성재환의 조부와 함께 농민들의 땅을 사기로 가로챈 원천 브로커였다는 문건을 터뜨려.
그렇게 되면 저 계집의 증언은 순식간에 파렴치한 범죄자 집안의 사적 복수극으로 둔갑하게 될 테니까."
거악의 잔당들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더 추악하고 거대한 진흙탕 싸움을 준비하며, 다음 칼날을 갈고 있었다.
탕, 탕, 탕!
문성현 재판장의 법봉 소리가 대법정을 울렸다.
"오늘 공판은 이것으로 마치고, 제2회 공판기일은 다음 주 금요일 오전 열 시에 속행하겠습니다.
검찰 측은 증인이 제출한 망 박순례의 일기장을 증거로 정식 제출해 주시고, 변호인 측은 서증 조사를 준비하십시오.
폐정을 선언합니다!"
재판부가 퇴정하고, 교도관들이 강태석을 일으켜 세웠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가던 강태석은 뒤를 돌아보며 방청석의 지유와 검사석의 성재환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 시퍼런 원한의 눈빛 너머로, 성재환 검사는 검사 법복을 매만지며 단호하게 맞섰다.
진실의 첫 번째 승리는 쟁취했다.
그러나 법정 문 너머에서는 가문 간의 오랜 악연과 두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음모의 폭풍이 다시금 몰려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