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개발중입니다! 오픈예정은 12월25일 예정하고 있습니다.
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89화

제1회 공판기일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대법정 앞의 운집

 

1996년 9월 5일 아침,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앞마당은 새벽부터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남원 시내를 관통하는 요천 변 제방 붕괴 참사로부터 불과 보름 남짓 지난 날이었다.

 

아직도 흙탕물 냄새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구도심 하정리와 동충동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 수해로 가재도구를 잃고 요천 둑길 가마니를 바라보며 통곡하던 이재민들이 낡은 옷차림 그대로 법원 정문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누구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둘렀고, 누구는 부서진 점포의 사진을 든 채 핏발 선 눈으로 법원 청사 현관을 노려보았다.

 

그 인파 사이를 비집고 서울과 전주에서 내려온 방송사 중계차 세 대와 수십 명의 취재기자들이 삼각대를 설치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뿜어냈다.

 

삼십 년간 남원을 철권통치하며 토착 조폭 출신에서 시장의 자리까지 올랐던 거두 강태석(姜泰錫)의 첫 정식 형사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강태석을 엄벌하라!"

 

"부실공사로 제방 터뜨리고 뇌물 받아 처먹은 살인마 시장을 사형에 처하라!"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오는 메마른 고함이 차가운 초가을의 공기를 찢었다.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단골들과 이웃 상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유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영안실에 갇혔을 때 침묵했던 부끄러움을 털어낸 목공소 윤 씨와 생선전 배 씨, 집배원 박 씨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법정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 차림의 한지유(韓智由)가 서 있었다.

 

목에는 성재환이 둘러주었던 자주색 털목도리 대신, 어머니 박순례가 남긴 하얀 손수건이 단정하게 매여 있었다.

 

지유의 손에는 어머니의 피 묻은 가계부 일기장이 담긴 작은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옆에 선 윤하은이 지유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지유야, 손이 얼음장 같아.

 

정말 괜찮겠어?

 

저기 서울에서 내려온 변호사들 얼굴 좀 봐.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윤하은이 가리킨 법원 청사 입구 쪽에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 세 대에서 내린 정장 차림의 사내 대여섯 명이 도열해 있었다.

 

법무법인 세율(世律)의 대표변호사 한중호(韓重浩)와 전직 부장판사, 특수부 검사 출신의 전관 변호인단이었다.

 

그들은 시민들의 거센 야유와 오물 투척을 경호원들로 막아선 채, 차갑고 거만한 미소를 머금고 법정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지유는 하은을 돌아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은아.

 

저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법 기술을 가졌어도, 내가 겪은 진실까지 지울 수는 없어.

 

오늘 난 방청석에서 그 인간의 얼굴을 똑바로 볼 거야.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고 계시니까."

 

지유의 맑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전 아홉 시 사십오 분, 법원 청원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제1호 대법정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렸다.

 

백여 석의 방청석이 단 삼 분 만에 가득 찼고, 복도와 계단까지 들어가지 못한 시민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2. 법복을 입은 검사의 출진

 

법정 우측 검사석은 팽팽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검은 비단 바탕에 짙은 자주색 깃이 둘러진 법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성재환(成宰桓) 검사가 서류철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 주머니에는 캡에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새겨진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어젯밤 지유가 선물해 준 흑청색 잉크를 가득 채워둔 만년필이었다.

 

성재환의 옆자리에는 공판을 보좌하는 안진우 검사와 강태훈 수사관이 두툼한 증거목록과 금융 계좌 추적 철을 쌓아 올린 채 자리를 지켰다.

 

성재환의 눈빛은 북극의 바다처럼 시리도록 차가웠다.

 

불과 이틀 전, 남원지청 1호 취조실에서 진행되었던 피의자 성호석(成浩錫)에 대한 신문 조서가 그의 가죽 서류 가방 맨 위에 놓여 있었다.

 

친부의 손으로 낱낱이 자백한 1993년 환지 비리 묵인과 대치동 유학비 대납의 전모.

 

아들은 아비의 범죄 혐의를 피눈물로 조서에 기록했고, 아비는 아들의 칼날 앞에서 단 한 줄의 변명도 없이 지장을 찍었다.

 

그 비극적인 조서가 완성됨으로써, 강태석이 쥐고 흔들려 했던 가문의 치부는 더 이상 협박의 도구가 아닌 거악을 완전히 옭아맬 사법적 단죄의 사슬로 변모해 있었다.

 

"성 검사님, 피고인 호송차가 지하 통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강태훈 수사관이 낮게 속삭였다.

 

성재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법정 좌측 피고인석 너머로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대표변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한중호는 은테 안경 너머로 성재환을 쏘아보며 냉랭한 미소를 흘렸다.

 

그 뒤로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배상문, 전 대검 수사기획관 출신의 민중기 변호사 등 총 여섯 명의 초호화 변호인단이 거대한 서류 가방들을 풀며 자리를 잡았다.

 

한중호가 검사석을 향해 나직하지만 위압적인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성재환 검사, 명성은 익히 들었소.

 

젊은 패기로 여기까지 판을 벌인 모양인데…… 공판정은 서초동 특수부 취조실과는 다른 곳이오.

 

오늘 법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배우게 될 거요."

 

성재환은 시선을 서류에서 떼지 않은 채, 차분하고 서늘하게 응수했다.

 

"피고인의 썩은 돈을 받아 쥔 노회한 기술자들에게 배울 법 따위는 없습니다, 한중호 변호사님.

 

이 법정은 피고인의 범죄를 세탁하는 거래소가 아니라, 남원 시민들이 삼십 년간 흘린 피눈물을 갚아줄 심판대입니다.

 

그 화려한 전관의 간판이 법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오늘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중호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젊은 검사의 서슬 퍼런 기세에 일순간 법정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3. 포승줄에 묶인 맹수의 독기

 

오전 아홉 시 오십오 분.

 

"피고인 강태석, 조상태, 박진철 입정합니다!"

 

법정 경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좌측 철제 출입문이 열렸다.

 

방청석에서 일제히 거친 숨소리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강태석이다!"

 

"저 파렴치한 놈!"

 

두 명의 교도관에게 이끌려 법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강태석의 모습은 참혹하면서도 기괴했다.

 

카키색 미결수 수의 왼쪽 가슴팍에 박힌 붉은 수번 '2104'.

 

두 팔은 굵은 포승줄로 결박되어 있었고,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쩔렁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봉황 깃발이 달린 로얄 살롱 관용차를 타고 남원 시내를 질주하던 제왕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아니, 맹수가 우리에 갇혀 사냥꾼을 노려보듯 시퍼런 독기와 살기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강태석은 방청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백 명의 성난 눈동자들 한가운데, 목에 하얀 손수건을 두르고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한지유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강태석의 입술이 뒤틀리며 잇새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저 계집년이…….'

 

삼거리 김밥집의 어린 여학생.

 

자신이 내민 백억 대 상가 분양권과 치료비 대납을 면전에서 걷어차고, 쇠파이프 난동과 납치 위협 속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질긴 잡초.

 

강태석의 시선이 이어 검사석에 서 있는 성재환에게 꽂혔다.

 

성재환은 미동조차 없이,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강태석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성재환, 네놈이 감히 날 여기에 앉혀?

 

내 기필코 네놈의 살가죽을 벗겨낼 것이다.'

 

그 원초적인 적의와 살기 앞에서도 성재환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성재환은 천천히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며, 피고인석을 향해 서늘한 살기를 되돌려주었다.

 

'네놈이 서 있을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강태석.

 

단두대 위다.'

 

소리 없는 혈투가 법정 안을 가득 메우던 찰나, 법정 서기가 기립을 명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재판부 입정하십니다!"

 

방청석과 법조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 정면 높은 법대 뒤편 문이 열리고,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형사합의부 재판장 문성현(文成鉉)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가 검은 법복을 휘날리며 걸어 들어왔다.

 

문성현 부장판사의 표정은 굳건한 바위처럼 무거웠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법정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법봉이 세 번 단호하게 울렸다.

 

탕, 탕, 탕.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1996고합82,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 및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수살인교사 피고사건의 제1회 공판기일을 개정합니다."

 

4. 첫 머리의 선전포고

 

대법정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어 들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울릴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문성현 재판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피고인석을 응시했다.

 

"피고인 강태석, 앞으로 나오십시오.

 

인적사항을 확인하겠습니다."

 

강태석이 교도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피고인 신문대 앞으로 나섰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선 강태석의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피고인의 성명은 강태석, 생년월일은 1938년 4월 12일생, 직업은 남원시장 맞습니까?"

 

"……맞습니다."

 

"본적 및 주소는 전북 남원시 하정동 42번지.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없던 시절이므로 통상 절차에 따라 진행합니다.

 

검찰 측, 모두진술(冒頭陳述)을 해 주십시오."

 

문성현 재판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재환은 백오십 쪽에 달하는 공소장 정본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의 단단한 구둣발 소리가 적막한 법정 바닥을 울리며 중앙 발언대로 향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한지유의 시선이 성재환의 등에 닿았다.

 

성재환은 헛기침 한번 없이, 맑고 서슬 퍼런 음성으로 공소사실 낭독을 시작했다.

 

"공소사실의 요지를 낭독하겠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은 민선 1기 남원시장으로서 관내 공공의 안녕과 시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해야 할 헌법적 책무를 망각하고, 삼십 년간 구축해 온 토착 폭력조직 삼거리 토건과 한양토건, 동서개발을 결탁시켜 남원시 행정력을 사병화(私兵化)하였습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성재환의 첫 문장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중호 변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에 메모를 끄적였으나, 성재환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피고인은 남원 춘향 테마랜드 종합정비사업 총공사비 180억 원 중 40억 원을 페이퍼 컴퍼니와 차명 계좌를 통해 횡령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에서 고장력 철근 배근을 3분의 1로 축소하고 규격 미달의 잡석 골재를 타설하도록 직접 지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1996년 8월 집중호우 당시 요천 제방 제1공구 옹벽 50여 미터가 처참하게 붕괴되어, 남원 구도심 하정리와 동충동 일대 영세 상가와 주택가가 물에 잠기고 수백 명의 이재민과 막대한 재산 피해를 야기하였습니다."

 

성재환의 시선이 피고인석의 강태석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강태석의 턱밑 핏줄이 울컥 솟아올랐다.

 

성재환은 공소장 별지 첫 페이지를 넘겼다.

 

"나아가 피고인 강태석은 과거 1968년과 1991년에 자행한 토지 불법 강탈 비리를 영구 은폐하기 위해, 피해자인 삼거리 김밥집 망(亡) 박순례와 한지유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식품위생법을 악용한 열네 번의 표적 단속, 노후 목조건물 소방법 규정을 왜곡한 시설 개수명령 및 영업정지 협박, 남원세무서를 사주한 보복 세무조사, 그리고 심야 쇠파이프 난동과 붉은 페인트 테러를 교사하였습니다.

 

급기야 모친 박순례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사망하자, 조폭들을 급파해 영안실을 봉쇄하고 시신 인도를 거부하겠다고 협박하여 삼거리 김밥집 상속 포기 각서 날인을 강요하였습니다."

 

방청석 곳곳에서 억눌린 탄식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런 천벌을 받을 놈……."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방청객들의 술렁임에 법정 경위들이 제지에 나섰으나, 성재환의 낭독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피고인은 비자금 장부를 폭로하려던 건설교통국장 황선태를 15톤 덤프트럭으로 들이받아 살해하려 하였고, 피해자 한지유를 야간에 강제 납치하여 지리산으로 끌고 가 검찰의 증거와 맞교환하려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검찰은 피고인 강태석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 및 국고손실,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특수살인교사, 특수약취유인교사 등 총 열두 개 죄명으로 공소 제기하며, 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준엄한 심판을 청구합니다."

 

성재환이 낭독을 마치고 공소장을 덮는 순간, 법정 안은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듯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였다.

 

5. 전관들의 기습과 성재환의 반격

 

재판장 문성현이 피고인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피고인 측,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을 밝히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법무법인 세율의 대표변호사 한중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중호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재판부를 향해 묵직한 중저음으로 포문을 열었다.

 

"재판장님, 변호인단은 검찰의 공소사실 전부를 단 한 줄도 인정할 수 없음을 명백히 밝힙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한중호는 방청석을 매섭게 쏘아본 뒤, 재판장을 향해 서류를 치켜들었다.

 

"검찰이 제출한 공소장은 실체적 진실을 밝힌 공문서가 아니라, 주임검사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과 편향된 확증편향으로 점철된 소설에 불과합니다.

 

첫째, 요천 제방 붕괴는 백 년 만에 쏟아진 320밀리미터의 기습 폭우와 상류 댐의 불가피한 방류로 인해 발생한 명백한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입니다.

 

변호인단은 이미 일본 동경대 수자원공학 연구소와 미국 토목학회 권위자 세 명의 정밀 감정서를 확보하여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시공 과정의 미세한 하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하도급 시공사의 자재 관리 과실일 뿐 시장 강태석이 붕괴를 예견하거나 횡령을 공모한 사실은 추호도 없습니다."

 

한중호의 유려하고 거침없는 언변에 재판부의 배석판사들이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한중호의 칼끝은 곧바로 검찰의 핵심 증거들을 향했다.

 

"둘째, 검찰이 제시한 지리산 부운리 별장의 백사십억 비자금 장부와 황선태의 비밀 수첩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한 영장주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위법수집증거'입니다.

 

검찰 수사관들은 야간 압수수색 당시 영장 제시도 없이 사유지의 보일러실 문을 절단기로 파괴하고 무단 침입하여 서류를 강탈했습니다.

 

독수독과(毒樹毒果)의 원칙에 따라,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위법한 압수물은 법정에 단 1초도 증거로 현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법률 용어로 무장한 전관 변호사의 교활한 공격에 시민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성재환을 쳐다보았다.

 

한중호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비수를 날렸다.

 

"셋째, 특수살인교사 및 약취유인교사 혐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은 조상태나 해결사들에게 살인이나 납치를 교사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수사 단계에서 작성된 조상태와 피의자들의 자필 진술서는, 성재환 검사가 '자백하지 않으면 가족들까지 모조리 구속시키겠다'며 심야에 잠을 재우지 않고 자행한 가혹행위와 불법 회유의 결과물입니다.

 

피의자 조상태와 행동대장 박철구는 이미 자신들의 자백이 검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진술이었음을 밝히는 진술번복서를 본 변호인단에 제출했습니다.

 

따라서 검찰의 모든 핵심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으므로, 피고인 강태석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정 안이 발칵 뒤집혔다.

 

자백 번복과 위법수집증거 탄핵.

 

세율이 준비한 완벽한 방어 시나리오가 법정을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강태석의 입가에 비열하고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강태석은 턱을 바짝 쳐들고 검사석의 성재환을 조롱하듯 쏘아보았다.

 

그때,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에는 당황이나 분노의 기색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수를 이미 다 읽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늘하고 명징한 안광이 번뜩였다.

 

성재환은 탁자 위에 놓인 마이크를 당겨 쥐었다.

 

"재판장님, 변호인의 기만적인 주장에 대해 검찰의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성재환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법정의 소란을 단숨에 베어 물었다.

 

"변호인은 천재지변을 운운하며 외국의 감정서를 들이밀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는 명백합니다.

 

자연력이 결합하였다 하더라도 행위자의 부실시공과 안전관리 해태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면 상당인과관계는 결코 단절되지 않습니다.

 

검찰은 이미 요천 제방 옹벽에서 떼어낸 불량 골재 시편과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 원본, 그리고 강태석 피고인이 남원일보 편집국장을 협박해 '천재지변 호외를 찍어내라'고 지시한 육성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성재환의 시선이 한중호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또한 위법수집증거 주장 역시 어불성설입니다.

 

지리산 별장 압수수색 당시 영장전담판사의 적법한 야간 압수수색영장 원본이 제시되었고, 현장 경비원들이 엽총과 쇠파이프로 무장 저항함에 따라 형사소송법 제120조 제1항 집행상의 필요한 처분으로서 잠금장치를 해제한 것입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 순찰차의 112 무전 녹음과 수사관들의 현장 채증 비디오테이프가 그 모든 적법성을 분초 단위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중호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성재환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조상태와 해결사들의 자백 번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호인단은 검찰의 회유와 강압을 주장하지만, 피의자 조상태와 박철구가 세율 측으로부터 거액의 생활비 지원과 가족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허위 진술번복서를 작성한 정황을 대검 특별수사본부 계좌추적팀이 실시간으로 포착하였습니다."

 

쿵, 하는 충격이 변호인석을 강타했다.

 

배상문과 민중기 변호사가 사색이 되어 한중호를 돌아보았다.

 

성재환은 서류철에서 증인신청서를 높이 쳐들었다.

 

"피고인 측이 공범들의 진술을 돈으로 오염시키고 자백을 번복하려 하기에, 검찰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핵심 증인을 정식으로 신청합니다.

 

피고인 강태석의 삼십 년 공권력 사유화와 표적 탄압, 납치 및 살인교사의 전모를 온몸으로 겪어낸 유일한 피해 당사자이자 산증인.

 

삼거리 김밥집 한지유 씨를 검찰 측 제1호 증인으로 채택해 주실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성재환의 단호한 선언이 대법정 천장을 울렸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지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하얀 손수건을 두르고, 어머니의 피 묻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은 소녀의 눈빛이 피고인석의 강태석과 법무법인 세율의 노회한 전관들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강태석의 얼굴이 경악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갔다.

 

문성현 재판장의 법봉이 단호하게 허공을 갈랐다.

 

탕, 탕, 탕!

 

"검찰 측의 신청을 받아들여, 증인 한지유에 대한 증인 채택을 결정합니다.

 

차회 기일에 증인신문을 진행하겠습니다!"

 

거악의 숨통을 끊어놓을 최후의 진실 공방이, 마침내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