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의 증인 출석 결심
1. 204호의 그림자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층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유리창 너머로 늦은 오후의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지리산 능선 위로 붉게 타오르던 석양이 검사실 바닥에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서히 식어가는 시간이었다.
책상 한가운데에는 불과 몇 시간 전 남원지원 종합민원실에서 공식 수령해 온 백오십 쪽에 달하는 공소장 접수증 사본이 놓여 있었다.
'사건 번호 1996고합82,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국고손실) 및 특수살인교사 등 피고사건. 피고인 강태석(姜泰錫) 외 30인.'
그 메마른 활자들 위로 가을바람이 들이닥치며 차가운 적막을 흩뿌렸다.
공소장 정본이 접수되자마자,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형사합의부에서는 통상적인 기일 지정 절차를 깨뜨리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제1회 공판기일을 열흘 뒤인 9월 5일 오전 10시, 제1호 대법정으로 지정해 통지해 왔다.
남원 시내 전역을 휩쓴 수해 비리와 토착 권력의 몰락을 온 시민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법원 역시 사안의 중대성을 무겁게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남원지청 팩스실을 통해 서울 대형 로펌 법무법인 세율(世律)의 대표변호사 한중호(韓重浩) 명의로 된 서류 한 장이 날아들었다.
'피고인 강태석 외 일동에 대한 증거인부서 및 증인신청 예고서'.
예상했던 바였으나, 서류에 적힌 문구는 상상 이상으로 노골적이고 악랄했다.
세율은 검찰이 제출한 수사 기록 중 피고인 강태석의 자백 조서는 물론이고, 공범 조상태와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해결사들의 자필 진술서, 그리고 유성골재 경리 정미숙의 비밀 장부 일체에 대해 '검사의 불법 심야 강압 수사와 회유에 의해 작성된 임의성 없는 허위 진술'이라며 전면적인 증거 부동의(不同意) 의견을 제출했다.
수사 단계에서 수집된 핵심 조서들을 법정에서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증거능력을 깨부순 뒤 공판정에서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사법 카르텔의 선전포고였다.
성재환(成宰桓)은 검사 법복을 벗어 의자 뒤에 걸어둔 채, 책상 앞에 홀로 서서 증인 신청 계획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이 증거에 부동의하면, 조서를 작성한 공범이나 진술 당사자가 법정에 직접 출석해 성립의 진정을 증명하거나 피해자가 법정 증언을 통해 공소사실을 뒷받침해야만 했다.
하지만 세율은 이미 손을 써두었다.
조상태와 밤재 터널 해결사들의 가족은 서울 외곽으로 빼돌려졌고, 그들은 법정에 서서 '검사가 살려주겠다고 꾀어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며 말을 뒤집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다면 법관의 심증을 움직이고 공소사실의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강태석이 시장이라는 절대 권력을 등에 업고 영세 상인을 어떻게 서서히 목 졸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합법의 탈을 쓴 공권력의 폭압이 한 가정을 어떻게 참혹하게 도륙했는지를 육성으로 증언할 살아있는 피해자.
그 이름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한지유(韓智由).'
하지만 성재환의 손가락은 만년필을 쥔 채 바들바들 떨려왔다.
법정에 한지유를 세운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재환은 형사부 검사로서, 그리고 한 여자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한 남자로서 너무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전직 대검 차장검사와 고검장, 법원장 출신의 노회한 전관 변호사들이 방청석과 재판부 앞에서 어린 지유를 먹잇감 삼아 맹수처럼 달려들 것이었다.
'증인의 부친 한석규가 과거 1968년 환지 과정에서 토지 브로커로 개입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친 박순례의 지병 악화는 상가 운영상의 과로일 뿐, 시청의 정당한 행정지도와는 인과관계가 없지 않은가.'
'병원비 미납을 해결하기 위해 시장 관사에 찾아가 억지 보상을 요구했던 것 아닌가.'
'증인은 현재 수사를 지휘하는 성재환 주임검사와 학창 시절부터 사적 연인 관계였으며, 검사의 기획 수사에 맞춰 진술을 과장하고 날조한 것 아닌가.'
사악하고 교활한 질문들이 칼날처럼 날아와 지유의 여린 살갗과 갓 아문 마음의 상처를 사정없이 후벼 파낼 터였다.
어머니를 잃고, 쇠파이프 난동과 붉은 페인트 테러 속에서 홀로 피눈물을 삼키며 버텨온 지유였다.
그런 지유를 또다시 저 피비린내 나는 법정 한가운데 세워 그날의 참상을 제 입으로 복기하게 만드는 것은, 검사라는 직분을 넘어 인간으로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잔인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성재환은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뺨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틀을 스치며 지나가는 삭풍 소리가 검사실 안을 낮게 맴돌았다.
그때, 닫혀 있던 검사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강태훈 수사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검사님, 삼거리 김밥집의 한지유 씨가…… 지금 청사 아래 민원인 대기실에 와 계십니다."
성재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지유가요? 지금 이 시간에 혼자 왔습니까?"
"예, 손에 하얀 광목천으로 싼 작은 보따리를 하나 들고 오셨는데…… 검사님을 꼭 뵙고 가야겠다고 하십니다.
얼굴색이 무척 진지해 보여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성재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책상 위의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 해질녘의 요천 둑길
남원지청 청사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 요천 둑길로 향했다.
해질녘의 요천은 가을빛 붉은 노을을 머금고 푸른 강물과 뒤섞여 장엄하면서도 처연한 빛깔로 찰랑이고 있었다.
제방을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 잎들이 스산한 저녁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칠 년 전, 소년 성재환이 자전거 뒤편에 소녀 한지유를 태우고 가문의 무거운 비밀과 상처를 나누었던 바로 그 둑길이었다.
둑길 저편에는 지난 집중호우 당시 부실공사로 붕괴되었다가 임시 가마니로 덮인 제1공구 제방의 흉측한 단면이 여전히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지유는 재환이 목에 둘러주었던 낡은 털목도리를 매만지며,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응시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손등의 붉은 흉터와, 납치 당시 승합차 바닥에 긁혔던 이마의 옅은 상처 자국이 붉은 노을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재환은 그 상처들을 쳐다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죄책감에 휩싸여 차마 지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재환아."
지유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맑고 깊은 눈동자가 성재환의 흔들리는 시선을 온전히 받아냈다.
바람에 흩날리는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래?
공소장도 무사히 접수되었고, 시장 놈들도 교도소에 갇혔는데…… 왜 얼굴이 더 수척해진 거야?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 거야?"
지유의 목소리에는 원망이나 불안 대신, 오직 재환을 향한 순수한 염려와 애틋함만이 배어 있었다.
성재환은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강둑 아래로 부서지는 물결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메웠다.
"지유야……."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성재환의 목소리는 바닥으로 참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가…… 증거를 모조리 부동의했다.
수사 단계에서 강태석이 혐의를 인정하며 남겼던 자백 조서도, 처남 조상태의 진술도, 밤재 터널에서 널 납치했던 깡패 놈들의 자필 반성문도 전부 법정에서 번복시키겠다고 통보해 왔어.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수사 검사가 고문과 회유를 일삼았다는 파렴치한 거짓말을 법정에서 쏟아낼 준비를 끝마쳤더구나."
지유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재환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자들이잖아.
자신들이 가진 돈과 힘으로 죄를 지우고, 남의 인생을 짓밟는 데 익숙한 자들이니까."
"그래, 하지만 형사재판은 냉혹해.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자백을 번복하면, 법관은 눈앞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증인신문만을 보고 유무죄를 판단하게 되어 있어.
공판중심주의라는 법의 원칙이, 때로는 저런 거악들에게 가장 안전한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강태석이 삼거리 김밥집에 저지른 열네 번의 표적 단속과 소방법 위반 협박, 세무조사와 영안실 봉쇄…… 그 잔혹한 살인 행정의 실체를 입증하려면, 피해 당사자가 직접 법정 증인석에 서서 증언해야만 해."
성재환의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배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널 그 법정에 세울 수 없다."
성재환의 눈가에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그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세율의 전관 변호사들이 어떤 놈들인 줄 알아?
평생 법전의 허점만을 파고들어 살인범도 무죄로 빼돌리던 괴물들이야.
수십 년간 법관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카르텔을 형성해 온 늙은 늑대들이라고.
네가 증인석에 앉는 순간, 그자들은 하이에나 떼처럼 덤벼들 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픔을 모욕하고, 네가 겪은 지옥 같은 시간들을 시청을 상대로 보상금을 뜯어내기 위한 자작극이었다며 난도질할 거야.
너와 나의 관계를 들먹이며, 어린 시절의 인연을 빌미로 사건을 조작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울 거라고!
네 상처를 온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다시 찢어 발겨 피를 흘리게 만들 텐데…… 내가 어떻게 널 또다시 그런 지옥 한가운데로 밀어 넣겠니."
성재환의 목소리가 끝내 울먹임으로 갈라졌다.
칠 년 전 남원을 떠나며 지키지 못했던 약속, 그리고 돌아와서도 납치라는 끔찍한 위기 속으로 지유를 몰아넣었던 죄책감이 성재환의 이성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다른 증거를 찾을 거다.
시청 위생과나 소방과 하위직 공무원들을 다시 털고, 경찰서 장부들을 뒤져서라도 내 손으로 다른 증언을 만들어낼 거야.
그러니까 너는…… 법정에 나오지 마.
너는 그냥 가게를 지키고, 따뜻한 밥을 짓고 있어.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내가 다 끝낼 테니까, 너는 더 이상 다치지 마라.
그게 내가 널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성재환의 절규 같은 고백 뒤로 차가운 강바람만이 둑길을 휘몰아쳤다.
3. 도망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
둑길 위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지유의 옷자락을 거세게 펄럭였다.
지유는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떨고 있는 성재환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 거칠고 메마른 두 손을 뻗어, 성재환의 차갑게 굳어버린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지유의 온기에 성재환이 흠칫 놀라며 젖은 눈을 들었다.
지유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요천의 깊은 소(沼)보다 더 투명하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환아, 날 똑바로 봐."
지유의 맑고 고요한 음성이 성재환의 귓전을 울렸다.
그것은 떨리는 소녀의 음성이 아니었다.
야만의 세월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스스로 단단해진 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내가 왜 지난 칠 년 동안 이 남원을 떠나지 않았는지 알아?"
성재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머니가 피를 토하며 병원 바닥에 쓰러지셨을 때도, 시청 깡패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가게 유리창을 박살 냈을 때도, 벽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도…… 민재 선배가 서울로 도망치라며 기차표를 쥐여줬을 때, 내가 왜 그 표를 조리대 위에서 찢어버렸는지 알아?"
지유의 엄지손가락이 성재환의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가만히 훔쳐냈다.
"네가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해.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분명한 이유가 있었어.
내가 도망치면, 그 사람들이 저지른 죄가 전부 없던 일이 되어버리니까.
우리 아버지가 과수원을 빼앗기고 홧병으로 돌아가신 것도, 우리 엄마가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쫓겨나듯 숨을 거둔 것도, 전부 못나고 가난한 우리 탓이 되어버리니까.
내가 이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 강태석 같은 자들이 이 남원에서 천년만년 주인 행세를 하며 또 다른 힘없는 사람들의 목을 조를 테니까."
지유는 목에 감긴 털목도리를 매만지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폭압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인간의 숭고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재환아, 넌 검사로서 나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난 네 등 뒤에 숨어서 보호나 받는 가련한 어린아이가 아니야.
난 강태석의 폭압에 짓밟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저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남원의 살아있는 증인이야."
지유의 목소리에 서서히 서슬 퍼런 힘이 실렸다.
"세율의 변호사들이 나를 모욕할 거라고?
내 상처를 들쑤셔 온 세상에 까발릴 거라고?
난 하나도 두렵지 않아.
어머니가 숨을 거두시던 날, 차가운 영안실 문을 걸어 잠그고 시신을 냉동고에 처넣겠다며 으르렁거리던 깡패들의 눈빛보다 더 무서운 건 이 세상에 없어.
밤재 터널에서 목에 칼날이 들어왔을 때도 난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어.
거짓을 꾸며낸 자들은 떨겠지만, 오직 진실만을 쥐고 있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유는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풀어 성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얀 광목천을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모서리가 닳아 헤진 낡은 양장 가계부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표지에는 어머니의 삐뚤빼뚤하고 투박한 글씨로 '삼거리 김밥집 일기 - 박순례'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니, 지유야?"
성재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상에서 매일 밤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신 일기장이야.
강태석이 사람을 보내 어떻게 협박했는지, 위생과 직원이 찾아와 무슨 욕설을 퍼부으며 뇌물을 요구했는지, 세무서에서 날아온 엉터리 과태료 고지서를 보며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었는지…… 날짜와 시간, 그자들이 내뱉은 말 한마디까지 전부 적혀 있어."
지유가 일기장 표지를 거친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엄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어.
'지유야, 분식집 망했다고 울지 마라.
죄지은 놈들이 무서워 도망치지 말고, 언젠가 바른 세상이 오면 이 일기장을 들고 법정이든 어디든 가서 똑똑히 말해라.
우리는 단 하루도 부끄럽게 살지 않았고, 저놈들이 우리를 죽인 살인자라고.'"
지유는 성재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갈게, 재환아.
내가 그 법정 증인석에 당당히 설게.
네가 피를 토하며 쓴 백오십 쪽의 공소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너의 정의가 옳았다는 걸 내 입으로 똑똑히 증언할 거야.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남은 사람으로서, 강태석의 면전에서 그자가 지은 죄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만천하에 고발할 거야."
4. 피 묻은 가계부와 맹세
성재환은 손에 쥐인 어머니 박순례의 일기장을 떨리는 손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죽 모서리가 닳아 속지가 드러나고, 군데군데 마른 눈물 자국과 참기름 얼룩, 그리고 어머니가 각혈하며 튀었을 희미한 핏자국이 밴 낡은 가계부.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기자, 거칠고 투박하지만 한 자 한 자 정직하게 눌러쓴 어머니의 필체가 성재환의 가슴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1995년 8월 12일.
맑음.
위생과 계장이라는 자가 불쑥 찾아와 참기름병을 구둣발로 찼다.
국산 통깨로 정성껏 짠 맑은 기름이 흙바닥에 다 쏟아졌다.
우리 지유가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며 손가락을 깊게 베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이는 울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내가 어미로서 지유에게 물려줄 것이 가난과 빚더미뿐이라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강태석 회장, 네놈에게 과수원 땅도 모자라 이 작은 가게 터까지 거저 내줄 수는 없다.
하늘이 보고 있고, 땅이 알고 있다.'
'1996년 3월 4일.
비.
몸이 자꾸만 붓고 숨이 차서 서 있기가 힘들다.
의사는 큰 병원에 입원하라는데 김밥 한 줄에 백 원 남겨서 언제 병원비를 대나.
어젯밤 가게 앞 유리창에 쇠파이프 자국이 거미줄처럼 났다.
새벽마다 순찰차가 지나가지만 놈들은 비웃듯이 전봇대 뒤 어둠 속에 서 있다.
방 안에서 지유가 서울 간 재환이 엽서를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운다.
그 도련님은 서울 양반이니 제 갈 길 갔다고, 잊으라고 아이에게 모질게 쏘아붙였지만…… 내 딸 가슴에 맺힌 시퍼런 피멍을 어미인 내가 어쩌면 좋을까.'
글자 하나하나마다 피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것은 한 영세 상인의 억울한 하소연을 넘어, 강태석 일파의 폭압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가장 확실하고도 처절한 유죄의 스모킹 건이었다.
성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더 이상 지유를 나약한 피해자로만 바라보며 자신의 울타리 안에 숨겨두려 했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지유는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칠 년간의 야만과 폭력을 온몸으로 부딪쳐 깨뜨리고, 마침내 진실의 칼날을 쥐어든 당당한 역사의 주체였다.
성재환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소중히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지유의 거칠어진 손을 두 손으로 힘주어 감싸 쥐었다.
"……미안하다, 지유야.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네가 얼마나 큰 용기로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왔는지,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어."
성재환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나약함이 완전히 씻겨 나갔다.
오직 서슬 퍼런 사법 정의의 확신과 절대적인 결기만이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증인으로 신청하겠다.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 가장 높은 증인석에 널 당당히 세울게.
그리고 검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세율의 그 어떤 전관 변호사 놈들도 법정에서 감히 너를 모욕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그자들이 궤변과 법 기술로 널 옭아매려 할 때마다, 내가 검사로서 그 칼날을 모조리 부러뜨려 줄게."
지유의 입가에 잔잔하고 깊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응, 재환아.
난 널 믿어.
우리가 함께 서 있다면, 그 어떤 거악도 우릴 무너뜨리지 못해."
두 사람은 저물어가는 요천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나란히 섰다.
오랜 침묵과 눈물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진실의 법정으로 함께 걸어 들어갈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강둑 위로 길게 이어졌다.
5. 구 남원역의 기적 소리
같은 날 오후 두 시 십오 분.
전라선 구 남원역(舊 南原驛) 플랫폼으로 육중한 디젤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서울발 남원행 새마을호 열차가 거친 쇳소리와 브레이크 마찰음을 내며 승강장에 멈추어 섰다.
자욱한 디젤 기름 냄새와 붉은 벽돌 역사의 서늘한 공기가 뒤섞인 플랫폼으로 승객들이 하나둘 쏟아져 나왔다.
3호차 객실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 한 사람이 천천히 철제 계단을 내려섰다.
짙은 회색 모직 코트에 낡은 갈색 가죽 서류 가방 하나만을 손에 든 남자.
불과 며칠 전까지 대한민국 행정과 지방자치를 호령하던 내무부 차관 성호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르던 수행 비서도, 역 광장에 대기하던 의전용 관용차도 없었다.
청와대에 제출한 사직서가 공식 수리되고 관보에 의원면직 처리가 게재된 순간, 그는 모든 권력의 외투를 벗어던진 자연인이었다.
아니, 칠 년 전 남원에서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저지르고 도망쳤던 늙은 피의자였다.
성호석은 플랫폼 한가운데 멈추어 서서, 붉은 벽돌 역사 위에 우뚝 솟은 오래된 기계식 시계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 이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칠 년 전, 열여덟 살의 아들 성재환을 서울로 강제 압송하던 바로 그 승강장이었다.
피 흘리는 무릎으로 달려와 차창을 두드리던 한지유의 절규를 뒤로한 채, 아들을 살리겠다는 비틀린 일념 하나로 매정하게 기차를 출발시켰던 비극의 장소.
성호석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깊은 회한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구나."
그때, 개찰구 너머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표식을 가슴에 단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였다.
강태훈이 성호석의 앞에 멈추어 서서 주머니에서 빳빳한 공문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피의자 출석요구서 - 성호석'.
기소 검사이자 주임검사인 성재환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사법 문서였다.
"성호석 전 차관님이십니까."
강태훈의 목소리는 법을 집행하는 자의 엄정함과 깍듯한 예의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성호석은 출석요구서 하단에 또렷하게 적힌 아들의 이름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체념이나 굴욕감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를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단죄하러 나선 아들의 서슬 퍼런 칼날을 확인한 아비의 씁쓸하면서도 장한 미소였다.
"그렇소.
내가 성호석이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실로 임의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성재환 주임검사께서 청사 1호 취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호석은 낡은 가죽 가방을 고쳐 쥐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남원의 검사에게 심판을 받으러 내 발로 온 것이니, 지체할 이유가 전혀 없소."
역 광장을 가로질러 호송 차량으로 걸어 나가는 성호석의 뒷모습은 쓸쓸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당당했다.
평생을 옭아매던 권력의 허상을 스스로 부수고, 아들이 겨눈 사법의 단두대를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마지막 속죄의 걸음이었다.
남원 하늘 위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유의 법정 증언 결심, 아비와 아들의 처절한 취조실 대면, 그리고 남원으로 집결하는 법무법인 세율의 전관 변호인단.
삼십 년간 남원을 지배해 온 거악의 잔당들과,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자들의 최후 대격돌이 폭풍전야의 뇌관을 당기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