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 작성의 밤
1. 204호의 침묵과 사투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층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메마른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창밖으로는 지리산 능선을 타고 곤두박질치는 거센 삭풍이 낡은 알루미늄 창틀을 흔들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하얗게 피어난 성에 너머로, 칠흑 같은 남원의 어둠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길게 드리워진 성재환(成宰桓)의 그림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책상 위에는 일반적인 형사 사건 기록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서류철들이 산더미처럼 솟아 있었다.
지리산 산내면 부운리 비밀 별장 지하 특수 금고에서 압수해 온 백사십억 비자금 원부 다섯 권의 검은색 가죽 바인더는 여전히 퀴퀴한 지하실 냄새와 피비린내 나는 욕망의 잔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유성골재 경리 주임 정미숙이 신변 위협 속에서 장롱 밑에 은닉해 두었던 자재 차액 십사억 원 횡령 이중 장부, 남원 제1건설 대표 배동진이 폐차장 소각로에 처넣으려다 회수된 특별 대외 협력비 정산서, 그리고 남원지원에 앞다투어 자수한 토착 유지 스물여덟 명의 자필 진술서와 이면계약서 사본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방대한 서류더미 한가운데, 성재환의 차가운 시선을 서늘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누렇게 변색된 낡은 갱지 서류철 하나였다.
'1993년 남원군 구도심 환지 처분 이행 확약서 및 유학비 대납 영수증 원본'.
친부 성호석(成浩錫)의 직인이 선명히 날인된 이행 각서와, 삼거리 토건 강태석(姜泰錫)의 법인 명의로 결제된 서울 대치동 아파트 전세금, 명문 학원 수강료, 그리고 신림동 고시원 지원금 영수증들이 붉은 실로 묶여 있었다.
그 서류를 마주할 때마다 낮에 걸려 온 성호석의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소환장을 보내라, 성재환 검사.
네 손으로 나를 법정에 세워라.'
성재환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심장 가장 깊숙한 곳을 날카로운 비수로 저며내는 듯한 통증이 늑골을 타고 번져 나갔다.
열여덟 살의 봄날, 영문도 모른 채 서울행 통일호 열차에 강제로 실려 가며 차창 밖으로 피 흘리는 무릎을 감싸 쥐고 달려오던 지유를 바라보아야 했던 그날의 참담한 기억.
그 모든 비극이 중앙 정계의 협박 속에서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던 아버지의 피눈물 나는 고육지책이었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 가슴을 짓누르던 원망은 잠시 눈물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뒤편에 숨겨져 있던 대가는 너무도 가혹하고 처절했다.
아버지는 결국 괴물의 손을 잡았고, 그 더러운 타협의 대가로 아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안락한 길을 걸었다.
성재환이 밤을 새워 법전을 파고들며 사법시험 수석이라는 영광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 그 계단 밑바닥에는 지유 어머니 박순례의 피눈물과 병원비 독촉장, 그리고 남원 구도심 영세 상인들의 헐벗은 삶이 거름처럼 깔려 있었던 것이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성재환은 캡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을 나직이 읊조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법언은 법조인의 긍지가 아니라, 가문의 죄악을 제 손으로 단죄해야만 하는 피 묻은 형극의 굴레였다.
"검사님."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검사실의 적막을 조심스럽게 깨뜨렸다.
붉게 충혈된 눈의 강태훈 수사관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믹스커피 두 잔을 종이컵에 받쳐 들고 다가왔다.
테이블 맞은편에서는 수사관 박철민과 안진우 검사가 두꺼운 대법원 판례 공보와 형법 특별법 해설서를 펼쳐놓고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낯빛이 흙빛으로 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방 안에는 진한 담배 연기와 메마른 종이 냄새, 그리고 식어버린 배달 도시락 찌꺼기 냄새가 뒤섞여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다.
입술이 다 터지셨습니다, 검사님.
잠깐 소파에 가셔서 삼십 분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공소사실 첫머리와 횡령액 계좌 대조표 기본 골격은 저희가 잡아둘 수 있습니다."
강태훈이 종이컵을 서류더미 틈새에 내려놓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간곡히 권했다.
성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로의 기색 대신 날을 바짝 세운 푸른 안광만이 서려 있었다.
"아닙니다, 강 계장님.
이 공소장은 제 손으로 한 자 한 자 직접 써 내려가야 합니다.
단 한 줄의 논리적 비약도, 단 한 단어의 법리적 허점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재환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결기가 배어 나왔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가 움직였습니다.
서울에서 대검 차장검사, 서울고검장, 법원장 출신 전관들이 대거 선임계를 냈습니다.
그자들은 수사 단계에서 확보된 강태석의 자백 조서를 흔들어 공판중심주의의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 겁니다.
처남 조상태와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해결사들에게 거액을 쥐여주고 가족들을 빼돌려, 법정에서 '검사의 강압과 회유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했다'고 울부짖게 만들 계략을 이미 세워두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비자금 장부의 야간 압수 절차를 트집 잡아 위법수집증거 배제 법칙을 들이대려 하겠지요."
안진우 검사가 두꺼운 안경을 치켜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 검사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세율 형사팀의 주특기가 바로 그겁니다.
실체적 진실을 두고 검찰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형사소송법상에 규정된 아주 미세한 절차적 흠결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찾아내 증거능력을 통째로 탄핵하는 방식이지요.
조상태의 진술 번복으로 자백의 신빙성을 무너뜨리고, 비자금 원장에 독수독과(毒樹毒果)의 덫을 씌워 증거에서 배제시키면, 피고인 강태석은 단순 뇌물 몇 건의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유유히 걸어 나갈 구멍이 생깁니다.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나 범죄사실 특정성 결여를 빌미로 첫 공판부터 공소기각 판결을 노릴 것이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소장은 단순한 기소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재환이 안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냈다.
금빛 닙 끝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성재환은 지유가 선물해 준 새 흑청색 잉크병의 뚜껑을 열었다.
어둡고 깊은 밤바다의 빛깔을 머금은 잉크가 만년필 피스톤을 따라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피고인 강태석의 죄는 단순한 관급 공사 횡령이나 뇌물수수가 아닙니다.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한 도시의 민초들을 삼십 년간 합법의 탈을 쓰고 도륙해 온 구조적 거악입니다.
그 거악의 뿌리를 뽑아내려면, 공소사실 하나하나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뚫어낼 만큼 완벽한 강철의 성벽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악의 거미줄에 얽혀 들어간 내 가문의 원죄까지 이 공소장에 빠짐없이 담아내야만 합니다."
성재환의 단호한 선언에 검사실 안의 공기가 숨 막힐 듯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2. 백삼십 쪽의 사법 심판문
성재환은 법무부 공식 규격의 두툼한 공소장 백지철을 책상 정중앙에 반듯하게 펼쳐놓았다.
만년필 촉이 사각거리며 백지의 질감을 짓이기듯 파고들기 시작했다.
첫 줄에 쓰인 글자는 서슬 퍼런 단두대의 칼날과도 같았다.
'피고인 1. 강태석(姜泰錫, 58세, 남원시장,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등, 구속)
피고인 2. 조상태(趙相泰, 46세, 동서개발 대표, 업무상횡령 및 특수약취유인 등, 구속)
피고인 3. 박진철(朴振哲, 51세, 한양토건 대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등, 구속)
……(이하 관내 건설업체 및 브로커 28명)'
이어지는 관련 피의자 적시란에 다다르자, 맹렬하게 내달리던 성재환의 펜 끝이 일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심장의 대동맥이 거칠게 조여들며 관자놀이의 핏줄이 파르르 떨려왔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굳어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재환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펜을 다시 쥐었다.
흑청색 잉크가 갱지 위로 번져 나가며 또 하나의 이름이 또렷하고 처절하게 새겨졌다.
'공범 및 피의자 성호석(成浩錫, 59세, 전 내무부 차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 방조 및 직권남용, 불구속 피의자 소환 예정)'
옆에서 숨을 죽인 채 서류를 넘기던 강태훈 수사관이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의 손으로 친부의 관등성명과 범죄 혐의를 피의자 명단에 정식으로 박아 넣는 검사의 심중이 어떠할지, 곁에서 지켜보는 이조차 차마 눈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성재환의 눈빛은 북극의 빙하처럼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서 주저하거나 혈육의 정에 이끌려 한 줄이라도 에둘러 표현하는 순간, 법무법인 세율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수사의 정당성을 '전임 시장 아들의 표적 기획'으로 몰아붙일 것이었다.
가장 엄정하게 자신의 살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거악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다.
성재환은 곧바로 공소사실 제1항으로 파고들었다.
"박철민 수사관, 계좌 추적 결과표와 자금 세탁 흐름도 이리 올리십시오."
"예, 검사님!
여기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열두 개와 동서개발 유령 하도급 페이퍼 컴퍼니 스물여덟 곳의 입출금 전표 대조표입니다."
박철민이 두툼한 회계 전표철을 펼쳤다.
성재환은 1원 단위의 숫자 하나, 날짜 하나까지 꼼꼼히 대조하며 횡령의 거미줄을 조여나갔다.
남원 춘향 테마랜드 종합정비사업 총공사비 180억 원 중, 시공사 동서개발과 세창물산을 통해 허위 자재 납품 세금계산서로 횡령된 40억 원의 종착지.
그 돈이 요천 수변공원 제방 제1공구로 흘러 들어가며 벌어진 참혹한 부실시공의 전모.
규격 고장력 철근을 3분의 1로 줄이고 방수 시멘트 대신 규격 미달의 잡석 골재를 채워 넣은 기술적 하자 내역을, 단순한 건설 시공사의 과실이 아닌 형법 제268조 업무상과실치사상죄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국고손실 및 뇌물)의 '공동정범' 법리로 옭아맸다.
"세율의 한중호는 천재지변 프레임을 짤 겁니다.
시간당 80밀리미터가 넘는 집중호우와 상류 댐 방류라는 자연력을 내세워 불가항력의 사고였다고 강변하겠지요.
하지만 대법원 89도1234 판례와 94도203 판결을 보십시오.
'자연적 조건이나 제3자의 행위가 결합하여 피해가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행위자의 부실시공과 안전관리 해태가 직접적인 붕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면 상당인과관계가 단절되지 아니한다'.
이 확립된 대법원 판례를 공소장 인과관계 설명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못 박습니다."
성재환의 펜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은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강철의 성벽이었다.
이어 제2항, 지리산 부운리 비밀 별장의 백사십억 비자금 원부.
세율이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위법수집증거 배제'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성재환은 영장 집행 당시의 적법 절차를 분초 단위로 복기해 공소장에 삽입했다.
'1996년 8월 23일 10시 42분,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영장전담판사의 적법한 야간 압수수색영장 제시 후, 현장 피압수자들의 엽총 무장 및 물리적 저항에 직면하여 형사소송법 제120조 제1항 집행상의 필요한 처분으로서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지하 리프트를 강제 개방함'.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 순찰차의 무전 녹음 기록과 수사관들의 바디 메모를 증거 목록에 철저히 연계시킴으로써, 독수독과의 덫을 사전에 완벽히 파쇄해 둔 것이다.
3. 범죄 일람표 속의 이름
새벽 다섯 시.
남원 시내를 감싸고 있던 짙은 밤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고, 지평선 너머로 희미한 남청색 여명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검사실 형광등 불빛 아래, 성재환은 공소장의 가장 핵심적인 별지 서류인 '범죄 일람표 (1) - 표적 행정지도 및 재산권 침해 피해 내역'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관급 공사 비리와 비자금 횡령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강태석이라는 괴물의 추악한 본질을 법정에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토건 조폭 출신의 시장이 어떻게 시청 행정력과 공권력을 사병처럼 동원해 힘없는 영세 상인들을 서서히 질식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법률의 언어로 낱낱이 고발해야 했다.
성재환의 펜촉이 흑청색 잉크를 듬뿍 머금고 거친 갱지 위에 내려앉았다.
'일련번호: 1996-01
피해 대상: 전북 남원시 동충동 182 삼거리 김밥집
피해자: 망(亡) 박순례(朴順禮), 피해자 한지유(韓智由)
범죄 일시 및 수법: 1995년 7월경부터 1996년 8월경에 이르기까지, 피고인 강태석은 과거 1968년 및 1991년 토지 불법 강탈 비리의 은폐와 동충동 일대 관광특구 개발 이익 독점을 목적으로……'
성재환의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만년필 닙을 짓누르는 압력에 갱지가 찢어질 듯 바르르 떨렸다.
박순례.
그리고 한지유.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공소장 피고인의 범죄 행위 피해자로 정식 기재하는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쇳물 같은 응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식품위생법 제36조 위반을 구실로 한 위생과 표적 단속 총 14회.
공설 방앗간 참기름을 무표시 불량 식품으로 규정해 압류하려다 병을 파손한 행정 폭력.
1970년대 노후 목조건물 소방법 규정을 악용한 5일 기한 초법적 시설 개수명령 및 영업정지 계고.
남원세무서를 사주하여 1원의 오차도 없는 일일 결산록을 강탈하려 한 표적 정밀 세무조사.
한양토건 폭력배들을 사주한 심야 쇠파이프 난동 및 전면 유리창 파손.
가게 외벽과 통유리창을 피처럼 물들인 붉은 유성 페인트 테러 교사.
급기야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던 모친이 사망하자, 영안실을 전면 봉쇄하고 시신 인도를 거부하겠다고 협박하여 삼거리 김밥집 상속 포기 각서 날인을 강요한 패륜적 권리행사방해 및 공갈미수.'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갈 때마다 성재환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했다.
이것은 성재환이 서울 대치동의 따뜻한 방에서 사법시험 문제집을 넘기고, 사법연수원에서 수석의 영예를 안으며 특수부 검사로 임관하던 바로 그 시간들에, 지유가 홀로 차가운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감내해야 했던 지옥의 기록이었다.
어머니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는 그 비극적인 순간까지도, 강태석 일파는 조문 방명록을 덮어버리고 시신을 무연고 변사체로 냉동고에 처넣겠다며 갓 스무 살이 된 여학생의 목을 졸라왔던 것이다.
뚝.
성재환의 눈가에 맺혀 있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공소장 여백 위로 떨어졌다.
흑청색 잉크가 엷게 번지려는 찰나, 성재환은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유 모녀가 겪어낸 그 참혹한 고통을 사법적으로 보상하고 씻어내는 유일한 길은, 법전에 적힌 가장 무겁고 서슬 퍼런 조항들로 피고인 강태석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뿐이었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형법 제314조 업무방해, 형법 제350조 공갈미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국고손실), 형법 제268조 업무상과실치사상,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단체등의구성·활동 및 특수재물손괴), 형법 제250조 및 제31조 특수살인교사, 형법 제287조 특수약취유인교사…….'
적용 법조만 열두 개에 달했다.
형법상 실체적 경합범 가중 처벌을 통해 법원이 선고할 수 있는 법정 최고형.
사형(死刑)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야 마땅하다는 주임검사의 서슬 퍼런 구형 의견이 공소사실 말미에 시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4. 새벽을 가르는 자전거 소리
아침 일곱 시가 되자 칠흑 같던 어둠이 물러가고, 희뿌연 아침 햇살이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의 두꺼운 유리창을 통과해 비쳐 들었다.
책상 위에는 정서(淨書)를 완벽히 마친 총 백오십 쪽에 달하는 공소장 세 부가 단정한 비단 끈으로 묶여 정렬되어 있었다.
성재환은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펴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섰다.
유리창 너머로 저 멀리 요천을 따라 굽이치는 둑길과, 광한루원 완월정 뒤편의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들이 아침 물안개 속에서 푸르스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칠 년 전, 열여덟의 소년과 소녀가 벚꽃 잎 날리는 오작교 위에서 만년필을 쥐여주며 약속을 나누었던 그 누원이었다.
그때, 고요한 청사 앞마당 골목길에서 맑고 청아한 자전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르릉.
성재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창문 아래로 떨어졌다.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온 낡은 은색 여성용 자전거 한 대가 지청 정문 바리케이드를 지나 앞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핸들 앞 쇠바구니에는 하얀 광목천으로 겹겹이 싸맨 큼직한 3단 알루미늄 찬합이 실려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계단 아래 멈추어 선 사람은 한지유였다.
밤새 내린 서리를 온몸으로 맞았는지, 털모자 아래로 드러난 지유의 뺨과 귓바퀴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전거 스탠드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 2층 검사실 창가를 올려다보는 지유의 눈동자는, 이른 아침의 햇살보다 더 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재환의 심장이 쿵, 하고 거칠게 내려앉았다.
"강 계장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성재환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챙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차림 그대로 검사실 문을 박차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구두 굽이 시멘트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청사 복도에 요란하게 울렸다.
1층 로비 현관문을 밀고 나서는 순간, 뼈마디를 파고드는 차가운 아침 공기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통깨 참기름의 향기였다.
"재환아."
계단 아래 서 있던 지유가 허겁지겁 내려오는 재환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거칠어진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찬합을 조심스럽게 안아 든 지유가 성큼 다가왔다.
"외투도 안 입고 그렇게 뛰어나오면 어떡해.
지리산 골바람이 얼마나 매서운데."
지유는 목에 두르고 있던 낡은 자주색 털목도리를 풀더니, 까치발을 들어 성재환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감아주었다.
지유의 손끝에서 묻어나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옷깃에 밴 참기름 냄새와 소박한 밥 짓는 냄새가 얼어붙어 있던 성재환의 심장을 단숨에 녹여 내렸다.
성재환의 눈시울이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지유야, 이 추운 새벽에 어떻게…… 몸도 성치 않은데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지유는 재환의 목에 목도리를 단정히 매어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수사관님들이랑 검사님이 사흘 밤을 새우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제 시장 상인분들이 가게로 햅쌀이랑 갓 짠 참기름, 달걀을 잔뜩 가져다주셨거든.
우리 엄마가 김밥 말던 그 방식 그대로, 당근이랑 우엉 정성껏 볶아서 따뜻할 때 바로 쌌어.
뜨끈한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머리도 돌고, 그 독한 놈들이랑 싸울 기운도 나지."
지유는 묵직한 찬합을 재환의 가슴팍에 가만히 안겨주었다.
두 손으로 전해지는 찬합의 뜨거운 열기가 밤새 성재환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피로와 고뇌를 씻은 듯이 덜어내 주었다.
성재환은 찬합을 꼭 쥔 채, 맑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유를 응시했다.
"지유야."
"응, 재환아."
"공소장을…… 방금 다 썼다."
지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성재환은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아내며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소장 별지 범죄 일람표 제1번에, 어머니와 너의 이름을 가장 먼저 적었다.
강태석이 지난 삼십 년간 합법의 탈을 쓰고 너희 가족에게 저지른 열네 번의 표적 단속, 소방법 협박, 세무조사, 쇠파이프 테러, 그리고 영안실 봉쇄 협박까지…… 단 한 줄도 빠짐없이 낱낱이 범죄사실로 엮었어.
이제 법정에서, 온 천하가 그 괴물의 죄악을 듣게 될 거다."
지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재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깊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원망이나 슬픔의 잔재 대신, 칠 년이라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온몸으로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하고 거룩한 평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유의 눈가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
"고마워, 재환아."
지유의 목소리는 티끌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우리 딸이, 그리고 네가 남원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서 약속을 완성했다고…… 정말 대견해하고 기뻐하실 거야."
5. 붉은 인주와 최후의 출진
지유를 골목길 모퉁이까지 배웅하고 204호 검사실로 돌아온 성재환은 수사팀 전원을 불러 모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3단 찬합 속에는 참기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두툼한 김밥들이 단정하게 채워져 있었다.
지유 어머니의 손맛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따뜻한 밥 한 줄이 지쳐 쓰러져가던 수사관들의 메마른 혈관에 뜨거운 온기와 생기를 가득 불어넣었다.
식사를 마친 검사실 안에는 더 이상의 피로감이나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재환은 백오십 쪽에 달하는 공소장 원본 세 부를 책상 위에 반듯하게 정렬했다.
정본 한 부는 법원에 정식 접수될 기록이었고, 부본 한 부는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피고인 강태석에게 송달될 것이었으며, 나머지 한 부는 공판정에서 주임검사가 가슴에 품고 피고인들의 죄상을 낭독할 심판서였다.
성재환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공소장 맨 뒷장, 기소 검사 서명란으로 펜촉이 향했다.
서걱거리는 명징한 소리와 함께 흑청색 글씨가 단호하게 새겨졌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成宰桓)'.
성재환은 탁자 위에 놓인 묵직한 사각 황동 검사 직인을 집어 들었다.
인주통 뚜껑을 열고 선홍빛 인주를 직인에 빈틈없이 꾹 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석 자 바로 옆에 직인을 내리찍었다.
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갱지가 찢어질 듯 깊게 각인된 붉은 인영(印影)이 찍혔다.
그것은 삼십 년간 남원을 피눈물로 물들였던 토착 부패 권력 카르텔을 향한 공식적인 단죄 선언이자, 절대 번복될 수 없는 사법적 처형의 서약이었다.
"강 계장님."
성재환이 가죽 서류 가방에 공소장 정본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하며 돌아섰다.
"예, 검사님!"
강태훈 수사관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
"지금 즉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종합민원실에 이 공소장을 접수하십시오.
형사합의부 사건 번호가 부여되는 즉시 제1회 공판기일 지정을 신속히 신청하시고, 피고인 강태석과 조상태, 박진철에 대한 공소장 부본 송달을 법원에 촉탁하십시오.
법무법인 세율이 어떤 서류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접수증 사본을 반드시 직접 수령해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지체 없이 다녀오겠습니다!"
강태훈 수사관은 경례하듯 고개를 숙이고, 백오십 쪽의 공소장 정본을 두 팔로 소중히 감싸 안은 채 검사실 문을 힘차게 박차고 나갔다.
복도 너머로 그의 다급하면서도 당당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검사실 안에는 안진우 검사와 박철민 수사관만이 성재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재환은 벽면 옷걸이로 다가가 자신의 검사 법복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검은 비단 바탕에 짙은 자주색 깃이 둘러진 옷.
정의와 진실, 그리고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서만 말해야 하는 사법권의 상징이었다.
그때, 성재환의 책상 위에 놓인 유선 전화벨이 찢어질 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지청 내부 인터폰이 아니었다.
서울 지역번호 '02'가 선명하게 찍힌 대검찰청 직통 유선이었다.
성재환은 지체 없이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전주지검 남원지청 검사 성재환입니다."
"나다, 정종길이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정종길의 묵직하고 서늘한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부장님."
"공소장 작성이 끝났다는 보고는 받았다.
방금 강태훈 수사관이 남원지원으로 접수하러 출발했다지?"
"예, 방금 법원으로 보냈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특수살인교사 등 열두 개 죄명을 병합하여 법정 최고형으로 기소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정종길의 짧고 굵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가 서울에서 부장판사 출신 전관 세 명과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들을 규합해 방금 전주행 전용 차량을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정종길의 목소리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무게감에 성재환은 숨을 멈추었다.
"오늘 아침 청와대에서 성호석 차관의 사표를 공식 수리했다.
내무부에서도 의원면직 처리가 완료되어 관보에 게재되었다."
정종길의 목소리에 깊은 탄식이 묻어났다.
"성호석 전 차관이…… 지금 서울역에서 오전 열차에 올랐다.
수행 비서도, 변호인도 일절 대동하지 않고 홀로 남원행 새마을호 3호차에 탔더구나.
손에는 낡은 가죽 서류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다.
오늘 오후 두 시면 구 남원역 플랫폼에 도착할 거다."
쿵, 하고 성재환의 심장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오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서 아들의 탄탄대로를 열어주기 위해 평생을 군림했던 남자가, 모든 직위와 명예를 스스로 내던진 채 아들이 파놓은 사법 심판의 단두대를 향해 홀로 기차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
성재환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는 뼈를 깎는 아픔을 집어삼킨 검사의 서슬 퍼런 결의가 담겨 있었다.
"피의자 성호석에 대한 출석요구서는 이미 발부되었습니다.
지청 1호 취조실을 피의자 신문실로 비워두었습니다.
과거 1991년 토지 환지 비리의 묵인과, 강태석으로부터 대납받은 서울 유학비 전모를 제 손으로 신문 조서에 담을 겁니다.
그리고 피고인 강태석의 재판에 공범 사건으로 병합 청구하여 법정에 세우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정종길이 나지막이 물었다.
"칼자루를 쥔 네 손이 피로 물들 것이다.
제 아비를 법정에 피고인으로 세우는 그 참담함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겠나?"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입니다."
성재환은 가슴에 품은 만년필을 쥐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 하였습니다.
설령 무너져 내리는 그 하늘이 제 집안의 지붕이라 할지라도, 저는 검사로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제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자, 제가 지유와 남원의 민초들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입니다."
정종길은 긴 침묵 끝에 무겁게 읊조렸다.
"좋다.
대검 중수부는 남원의 공소유지를 끝까지 엄호하겠다.
세율의 늑대 떼들이 법정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덤벼들 테니, 한 치의 방심도 없이 맞서라."
딸깍.
전화가 끊겼다.
성재환은 수화기를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옷걸이에서 벗겨낸 검사 법복을 양팔에 꿰어 입었다.
검은 비단 옷자락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흘러내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가슴팍 주머니에는 지유가 돌려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꽂혀 있었고, 목에는 지유가 감아준 낡은 털목도리의 따스한 온기가 여전히 맥박 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법정이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펼쳐질 최후의 진실 공방뿐이었다.
성재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검사실 문을 열었다.
사법 정의의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위대한 싸움이, 마침내 그 서막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