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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86화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차가운 독방의 맹수

 

두꺼운 쇠문이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닫혔다.

 

전주교도소 남원 분소 지하 특별 구치 감방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뼈마디를 에는 악취를 머금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강태석(姜泰錫)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남원경찰서 앞마당에서 시민들이 던진 썩은 계란과 토마토 찌꺼기가 카키색 미결수 수의 깃에 여태 들러붙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가슴팍 왼쪽에 붉은 실로 박힌 수번 '2104'라는 숫자가 그의 눈에 들어올 때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가 혀를 적셨다.

 

"성재환……."

 

이를 악물자 잇몸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입술을 타고 번졌다.

 

삼십 년이었다.

 

남원 바닥에서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던 철옹성을 쌓아 올리기까지 흘린 피와 땀, 숱한 협잡과 폭력이 저 풋내기 검사의 손끝에서 단 며칠 만에 부서져 내렸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시청 공무원 놈들도, 제 손으로 키워 의원 자리에 앉혀준 시의회 버러지들도, 입찰 담합으로 수십억을 챙겨 먹던 건설업자 놈들도 모조리 검찰청 민원실로 기어 들어가 제 목숨만 살려달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배은망덕한 개종자들 같으니라고.'

 

벽면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멘트 가루가 흩날리며 손등의 살갗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 따위는 가슴을 태우는 증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무거운 철창 너머로 교도관의 거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그락거리는 열쇠 꾸러미 소리와 함께 문이 반쯤 열렸다.

 

"2104번, 특별 접견이다."

 

교도관의 목소리에는 과거 시장을 대할 때의 굴종과 비굴함이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구속된 거물을 경계하고 멸시하는 서늘함만이 묻어났다.

 

강태석은 턱을 바짝 쳐들었다.

 

"누구냐."

 

"서울에서 오신 손님이다.

 

서둘러."

 

포승줄이 다시금 양팔을 옥죄어 왔다.

 

결박의 치욕 속에서도 강태석의 눈동자에는 한 줄기 번뜩이는 탐욕과 살기가 되살아났다.

 

'서울.'

 

그 단어 하나가 꺼져가던 불씨에 기름을 붓듯 그의 뇌관을 자극했다.

 

2. 서울에서 온 사신

 

접견실은 일반 면회실과 달리 두꺼운 유리 칸막이가 없는 변호인 전용 밀실이었다.

 

탁자 맞은편에는 한 치의 구김도 없는 최고급 감청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신사가 단정히 앉아 서류를 훑고 있었다.

 

그 옆에는 두툼한 가죽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젊은 변호사 둘이 굳은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고급 명함에는 금박으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법무법인 세율(世律) 대표변호사 한중호(韓重浩).

 

대검찰청 차장검사와 서울고검장을 역임하며 서초동 검찰 조직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철창문이 열리고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 들어온 강태석을 바라보는 한중호의 시선은 싸늘했다.

 

동정이나 유대감 따위는 일절 섞이지 않은, 오직 거대한 사건을 마주한 냉혹한 승부사의 눈빛이었다.

 

교도관들이 나가고 육중한 철문이 닫히자, 강태석은 쇠사슬을 쩔렁거리며 의자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한 대표, 오셨소?"

 

갈라진 목소리가 접견실의 적막을 깼다.

 

한중호는 돋보기를 벗어 가슴 주머니에 꽂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강 시장님."

 

"저 빌어먹을 성재환 놈이 날 여기에 처넣었소.

 

남원 바닥의 개새끼들이 모조리 날 배신하고 검찰에 기어들어 갔단 말이오.

 

영장실질심사에서 그 늙은 민중기하고 배상문은 도대체 뭘 하다가 영장을 통째로 받아 처먹은 거요?"

 

강태석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중호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영장 발부 통지서 사본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쳤다.

 

"민 전 대법관과 배 전 법원장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고 지독했을 뿐이지요.

 

성재환 검사는 피의자 자백을 아예 증거 목록에서 철회했습니다.

 

스스로 자백을 버리고 지리산 비자금 장부와 하도급 업자 스물여덟 명의 자수 장부만으로 영장을 관철시켰어요.

 

게다가 예수병원 의사 매수 현장과 호텔 밀항 모의 도청 테이프까지 법정에서 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장을 기각할 판사는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문성현 판사가 아니라 그 어떤 강직한 판사라도 영장을 쳤을 겁니다."

 

한중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강태석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그럼 난 이대로 끝장이라는 거요?

 

내가 당신들에게 건넨 돈이 얼마인데!

 

김문현 의원도, 중앙 정무라인도 모조리 나한테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먹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다고?"

 

한중호가 옅은 실소를 머금었다.

 

"버리려고 왔다면 제가 직접 이 누추한 남원 땅까지 내려왔겠습니까?"

 

그 말에 강태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영장은 내줬지만, 본안 재판은 완전히 다른 싸움입니다.

 

성재환 검사가 판을 크게 벌인 것은 그 스스로 목을 죌 덫이 되기도 하니까요."

 

3. 옥중의 밀약

 

한중호는 옆에 선 어쏘 변호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변호사는 가죽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강태석의 눈앞에 펼쳤다.

 

'사건 대응 전략 보고서 - 남원시장 특가법(뇌물·횡령) 및 살인교사 피고사건'.

 

한중호가 나직하지만 서슬 퍼런 음성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영장 청구 단계는 소명(疏明)의 영역입니다.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만 있으면 판사는 영장을 발부합니다.

 

하지만 1심 형사재판은 증명(證明)의 영역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엄격한 증거능력이 요구되는 공판중심주의의 무대지요."

 

강태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서류를 응시했다.

 

한중호의 손가락이 특정 혐의들을 짚어나갔다.

 

"성재환 검사가 시장님께 씌운 혐의는 크게 세 갈래입니다.

 

첫째, 요천 제방 부실공사로 인한 40억 횡령 및 업무상과실치사상.

 

둘째, 지리산 비밀 별장에서 나온 140억 원대 비자금과 정관계 뇌물.

 

셋째, 황선태 건설국장과 한지유에 대한 특수살인교사 및 약취유인교사."

 

"그걸…… 재판에서 뒤집을 수 있단 말이오?"

 

"뒤집는 것이 아니라, 성재환이 엮어놓은 고리를 하나씩 끊어내는 겁니다."

 

한중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먼저 살인교사 혐의.

 

이것이 시장님을 무기징역이나 사형으로 몰고 갈 가장 무거운 혐의입니다.

 

하지만 교사범의 성립은 정범의 진술 일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밤재 터널에서 잡힌 깡패 놈들과 처남 조상태의 진술이지요.

 

그들이 법정에서 검찰 조사 당시 강압과 회유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했다고 번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태석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번복……?"

 

"조상태와 해결사들의 가족은 이미 저희 로펌에서 신변을 확보하고 생활비를 넉넉히 지원하기로 약정을 마쳤습니다.

 

남원 바닥을 뜬 지 오래예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십 년을 썩더라도 출소 후 보장받을 거액의 대가와 가족의 안위입니다.

 

법정에 서서 '검사가 살려주겠다고 꾀어서 시장님이 시켰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울부짖게 만들면, 공판정의 법관은 증거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치밀하고 악랄한 계획이었다.

 

수사 단계의 조서를 법정에서 무력화시키는 전형적인 거대 로펌의 공판 기술이었다.

 

"그리고 요천 제방 붕괴."

 

한중호가 서류장을 넘겼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한국지반공학회의 공식 감정서를 탄핵할 겁니다.

 

저희는 이미 일본과 미국의 권위 있는 수자원 학회 교수 세 명에게 자문 용역을 발주했습니다.

 

시간당 80밀리미터가 넘는 유례없는 집중호우와 상류 댐 방류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한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라는 감정서를 법정에 제출할 겁니다.

 

철근 배근이나 골재 문제는 시공사의 자재 관리 부실일 뿐, 시장의 직접적인 횡령 지시나 붕괴 예견 가능성은 없었다고 밀어붙이면 업무상과실치사는 무죄로 빠져나갈 구멍이 생깁니다."

 

강태석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지옥 밑바닥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지리산 장부는? 그 빌어먹을 140억 장부는 어쩔 거요?"

 

그 질문에 한중호의 눈빛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이번 공판의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될 겁니다.

 

그 장부의 법적 성격을 '임의 작성된 개인 메모'로 격하시켜야 합니다.

 

진정성립을 완강히 부인하고, 압수수색 절차의 위법성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영장 집행 당시 현장에 있던 경비원들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검찰 수사관들이 영장 제시 전에 유압 리프트를 강제로 부수고 들어갔다는 절차적 흠결을 집중 공략할 겁니다.

 

독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다는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

 

이것으로 140억 장부의 증거능력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입니다."

 

강태석은 전율했다.

 

합법의 탈을 쓴 악마의 논리.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전관 변호사들이 법전의 빈틈을 파고들어 범죄를 세탁하는 방식을 그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한중호가 서류를 덮으며 강태석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모든 전략을 실행하려면 시장님의 절대적인 복종과 막대한 실탄이 필요합니다.

 

선임료와 성공보수, 각계 감정비용을 포함해 착수금만 현금 30억입니다."

 

강태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숨겨둔 차명 부동산과 스위스 계좌를 풀어서라도 그 돈은 맞춰주겠소.

 

대신…… 조건이 하나 더 있소."

 

강태석이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성재환 그 애송이 놈.

 

그놈을 반드시 법정에서 능지처참해 주시오.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의 그 계집년…… 한지유도 내 눈앞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야겠소."

 

한중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강태석에게 내밀었다.

 

"성재환 검사는 이번 재판을 통해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공판 검사 한 명이 상대하기에 법무법인 세율의 화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여기에 날인하십시오."

 

결박된 손으로 만년필을 쥔 강태석은 계약서 하단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고 엄지손가락에 붉은 인주를 묻혀 힘껏 찍었다.

 

피처럼 붉은 지장이 선명하게 박혔다.

 

남원을 피로 물들였던 어둠의 잔당들이 법정이라는 새로운 전쟁터에서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 순간이었다.

 

4. 승리의 그늘과 묵직한 서류철

 

같은 시각,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은 떠들썩한 잔치의 여운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골목길에 모였던 이웃 상인들은 말끔히 복구된 가게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게 앞 처마 밑에 걸린 놋쇠 풍경만이 맑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딸랑, 청아한 소리를 냈다.

 

조리대 위에 단정하게 놓인 새 흑청색 잉크병과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바라보던 한지유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따스한 안도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조리대 한구석에 선 성재환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검은 양복 코트 안주머니에 꽂힌 낡은 서류철.

 

어젯밤 최민재 기자가 강태석의 관사 금고에서 빼돌려 건네준 '1993년 성호석 환지 이행 확약서'가 그의 갈비뼈를 서늘하게 찌르고 있었다.

 

자신의 서울 명문고 전학, 대치동 아파트 전세금, 고시원 과외비까지 모조리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검은돈으로 대납되었다는 피 묻은 영수증들.

 

아버지는 아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괴물과 타협했고, 그 대가로 남원의 민초들은 과수원을 빼앗기고 제방이 터지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에 새겨진 그 서슬 퍼런 법언이 지금 성재환의 심장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재환아."

 

지유가 다가와 재환의 굳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거칠어진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재환은 비로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표정이 너무 무거워."

 

지유의 맑은 눈동자에는 오직 재환을 향한 염려와 순수한 사랑만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겪고도, 조폭들의 쇠파이프 테러와 붉은 페인트 협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저 순결한 영혼 앞에 재환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응, 재환아."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지유는 가만히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저 재환의 깊은 고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듯 단단한 눈빛이었다.

 

"강태석이 교도소에 갇혔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의 거대 로펌을 끌어들여 재판을 뒤흔들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재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우리 아버지가 너희 집안을 짓밟는 데 가담했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먹고 자며 공부했던 그 돈이 네 어머니의 피눈물이었다'는 잔혹한 진실을 지유의 면전에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유는 이미 재환의 망설임 이면에 자리한 거대한 고통을 직감하고 있었다.

 

지유는 감싸 쥔 재환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알아, 재환아.

 

그 사람이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난 무섭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고, 우리가 진실을 쥐고 있으니까."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인 옻칠 만년필을 집어 재환의 가슴 주머니에 다시 꽂아주었다.

 

"이 만년필로 네가 지켜야 할 정의를 써.

 

그게 누구를 향하든, 설령 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라 해도 멈추지 마.

 

난 여기서 네 등 뒤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재환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유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재환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그 칼끝이 결국 어디로 향해야만 하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재환을 온전히 믿어주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진한 참기름 냄새와 소박한 밀가루 냄새, 그리고 지유의 맑은 숨결이 코끝을 적셨다.

 

"고맙다, 지유야.

 

반드시……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이 모든 걸 바로잡고 돌아올게."

 

5.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로 돌아온 성재환의 눈빛은 다시금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검사실 책상 위에는 지리산 부운리 별장에서 압수한 비자금 원부 다섯 권과 황선태 국장의 진술 조서, 하도급 업자들의 자수 장부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수사관 강태훈이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검사님, 방금 전주교도소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재환이 고개를 들었다.

 

"법무법인 세율입니까?"

 

"예.

 

한중호 대표변호사가 직접 내려와 강태석을 두 시간 동안 특별 접견하고 방금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선임계가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에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담당 변호인단 명단에 전직 부장판사, 검찰 특수부 출신 전관 변호사만 여섯 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강태훈의 목소리에는 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형사 전문 로펌이 총력을 기울여 달라붙었다는 뜻이었다.

 

재환은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강태석이 순순히 목을 내놓을 리 없지요.

 

공판중심주의를 악용해 수사 단계의 자백을 법정에서 모조리 뒤집으려 할 겁니다.

 

증인 매수와 허위 감정서, 그리고 위법수집증거 배제 주장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법적 기술을 쓰겠지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방 법원 재판에서 저런 매머드급 로펌이 흔들어대면 판사들도 심리적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소장이 완벽해야 합니다.

 

단 한 글자의 법리적 흠결도, 증거능력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재환이 안주머니에서 옻칠 만년필을 꺼내 쥐는 순간, 책상 위의 유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청 내부 내선이 아니었다.

 

서울 지역번호 02로 찍힌 직통 유선이었다.

 

재환은 수화기를 들었다.

 

"전주지검 남원지청 검사 성재환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규칙적이지만 깊게 가라앉은 숨소리.

 

재환의 손가락이 순간 굳어졌다.

 

칠 년 전, 자신을 강제로 서울행 기차에 태워 보내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다정하게 말을 섞어보지 못했던 목소리.

 

친부, 내무부 차관 성호석(成浩錫)이었다.

 

"……재환이냐."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재환은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차관님."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직함을 부르는 아들의 서슬 퍼런 태도에도 성호석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념과 회한이 뒤섞인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원 소식은 들었다.

 

강태석을 네 손으로 구속시켰더구나."

 

"검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잘했다.

 

참으로…… 장하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재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성호석의 다음 말은 재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 책상 위에 있는 관사 서류…… 이미 확인했겠지."

 

재환의 시선이 코트 안주머니의 낡은 서류철로 향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강태석 놈이 그걸 끝까지 쥐고 너를 협박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죄악…… 네 앞길을 열어주겠다는 비틀린 욕심에 그 괴물의 손을 잡았던 그 부끄러운 과오 말이다."

 

성호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평생의 죗값 앞에 무릎 꿇은 한 초라한 늙은이의 절규였다.

 

"오늘 아침 청와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장관과 총리에게도 내 죄를 모두 자백했다."

 

재환의 숨이 멎었다.

 

"사직서……라고요?"

 

"그래.

 

이제 나는 내무부 차관이 아니다.

 

단지 칠 년 전 남원에서 죄를 지은 피의자 성호석일 뿐이다."

 

수화기 너머로 종이가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아.

 

네 백부께서 물려주신 그 만년필에 새겨진 글귀를 기억하느냐."

 

재환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래.

 

설령 무너지는 하늘이 네 아비의 머리통 위라 할지라도, 너는 검사로서 그 칼을 휘둘러야 한다.

 

그것이 네가 짊어진 숙명이고, 내가 너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성호석의 음성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울 대검 중수부에서 날 소환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내 죄는 남원에서 시작되었으니, 남원의 검사에게 심판받겠다고 했다.

 

소환장을 보내라, 성재환 검사.

 

네 손으로 나를 법정에 세워라."

 

뚝.

 

전화가 끊겼다.

 

단절음만이 텅 빈 검사실을 가득 채웠다.

 

재환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등 뒤에서 지켜보던 강태훈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검사님…… 괜찮으십니까?"

 

재환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동요가 순식간에 차가운 결의로 화했다.

 

탁자 위에 놓인 빈 공소장 양식.

 

재환은 지유가 선물해 준 새 흑청색 잉크병의 뚜껑을 열고,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었다.

 

스르륵, 금빛 닙이 푸른 어둠을 삼키는 소리가 정막을 갈랐다.

 

법무법인 세율을 앞세운 강태석의 최후 발악, 그리고 제 발로 단두대에 오르겠다는 친부의 참회.

 

성재환은 만년필을 쥐고 백지 위에 첫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고인 강태석, 피의자 성호석.'

 

남원의 비극을 끝내기 위한,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완벽한 공소장 작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