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의 축제
1. 풍경 소리와 비워진 어둠
딸랑, 딸그랑.
남원 동문 우체국 안쪽 좁다란 골목 모퉁이에 내걸린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며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흩뿌렸다.
칠 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방앗간에서 갓 짜온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손끝에 묻힌 채 처마 밑 서까래에 매달아 두었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사철 모진 비바람과 매캐한 흙먼지를 뒤집어써 검푸른 녹이 덕지덕지 슬어 있었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귓전을 스칠 때마다 울리는 그 소리만큼은 지난 세월 억눌려 있던 골목의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노래였다.
그 아래, 거미줄처럼 박살이 나 박스 테이프로 흉측한 빗금을 칭칭 감아두었던 삼거리 김밥집의 전면 통유리창 위로 투명하고 청명한 아침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붉은 유성 페인트로 거칠게 휘갈겨져 있던 '빨갱이 소굴', '불태워 죽인다'는 섬뜩한 낙서는 지유가 밤새 석유 묻은 걸레와 철 수세미로 문지르고 또 문질러 닦아낸 흔적 탓에 희뿌옇고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러나 살점을 도려내듯 긁힌 그 흉포한 상흔조차 이제는 공포나 능욕의 표식이 아니었다.
어떤 폭압과 협박, 조폭들의 쇠파이프 앞에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낸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훈장이었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골목길 어귀에서 자전거 바퀴가 자갈을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문 우체국 소속의 베테랑 집배원 박 씨였다.
그는 묵직한 가죽 우편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채 자전거를 김밥집 앞 전신주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수년간의 무거운 침묵과 부채감을 털어내려는 듯, 박 씨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김밥집의 굳게 닫힌 낡은 함석 셔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셔터 한구석에는 어제 오후 남원지원 법정에서 전격 교부된 문성현 부장판사의 '구속영장 발부 통지서' 사본과 함께, 오늘 아침 윤전기에서 갓 뿜어져 나온 남원일보 1면 호외가 붉은 압정으로 꽂혀 나붙어 있었다.
[거악의 몰락! 강태석 남원시장 전격 구속 수감…… 140억 횡령 및 살인교사 혐의]
굵은 마포 포승줄에 온몸이 결박된 채 썩은 토마토와 계란 오물을 뒤집어쓰고 압송되던 강태석의 일그러진 얼굴 사진.
박 씨는 거칠어진 손을 떨며 그 신문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들어갔다.
"진짜로…… 진짜로 끝났구나."
그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혼잣말은 탄식이 아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거대한 해방의 고백이었다.
매일 아침 김밥 두 줄을 사며 그 가녀린 여학생에게 힘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시청 위생과와 조폭들의 눈치가 두려워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세월이었다.
남원의 어른들이라는 자들이 어린것 하나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 지독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이제야 무거운 짐을 벗고 있었다.
그때 골목 반대편에서 하정리 시장의 포목점 김 씨 아주머니와 생선전 배 씨가 커다란 대바구니를 양손에 묵직하게 든 채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배 씨의 고무장화 끝에는 여전히 새벽 어판장에서 묻혀온 비릿한 바닷물 냄새가 배어 있었으나, 얼굴에 번진 웃음만큼은 만개한 봄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우체부 양반! 지유는, 지유는 아직 병원에서 안 온 겨?"
배 씨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으며 바구니를 김밥집 앞 평상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안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은빛 갈치와 싱싱한 참조기 대여섯 마리가 정갈하게 손질되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병원에서 아침에 퇴원 수속 밟고 하은이랑 같이 나온다고 했는디, 아직 도착을 안 했구먼요."
박 씨 집배원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이고, 세상에! 그 어린것이 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쇠파이프를 온몸으로 맞아가면서도 이 자리를 지켜냈는디, 우리가 그동안 눈이 멀고 귀가 처먹어서 그 몹쓸 놈들 눈치나 보고 살았으니……."
포목점 김 씨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걷어 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커다란 보따리 속에서는 곱게 풀을 먹여 짠 하얀 무명천과 폭신한 솜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라도 가게 안쪽에 깔아줘야지. 그 차가운 병원 바닥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온 애를 그냥 먼지 구덩이에 맞을 수는 없잖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목 안쪽에서 덜컹거리는 손수레와 리어카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지며 시장 상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부른 것도 아니었다.
시청의 강요도, 번영회의 뇌물 동원도 없었다.
삼십 년간 남원의 숨통을 틀어막고 피를 빨아먹던 토건 조폭의 사슬이 끊어지자, 억눌려 있던 민초들의 양심과 온정이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으로 봇물 터지듯 밀려들고 있었다.
2. 골목을 채우는 온기
"자, 다들 멍하니 서서 눈물바람만 하지 말고 손들 좀 보태쇼!"
골목 어귀에서 목공소를 운영하는 윤 씨가 굵직한 통나무 평상 두 개를 어깨에 번쩍 메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뒤로 건재상 박 씨와 철물점 이 씨가 두툼한 목장갑을 낀 채 백색 페인트 통과 롤러 붓, 유리 세정제와 공구함을 들고 줄줄이 따라붙었다.
"오늘 지유가 퇴원해서 돌아오기 전에 저 흉측한 유리창부터 싹 갈아엎어야지! 저 흉측한 테이프 쪼가리 붙은 꼴을 지유한테 또 보게 할 셈이오?"
윤 씨의 불호령에 모여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소매를 걷어붙였다.
날카로운 스크래퍼와 칼날을 든 손들이 조심스럽게 유리창에 엉겨 붙어 있던 낡은 박스 테이프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찌익, 찌이익.
질기게 찢겨 나가는 테이프 소리는 마치 지난 칠 년간 김밥집을 옭아매고 있던 참혹한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는 듯했다.
철물점 청년들이 가져온 새 강화유리가 투명한 아침 햇살을 튕겨내며 박살 났던 창틀 자리에 빈틈없이 끼워졌다.
지유가 손톱 밑이 벗겨지도록 문질렀던 외벽의 붉은 페인트 자국 위로는, 동네 청년들이 뽀얀 백색 페인트를 롤러로 덧칠해 나갔다.
피비린내 나던 위협의 낙서가 눈부시게 하얀 도화지처럼 순식간에 지워져 갔다.
그와 동시에 골목길 공터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무쇠솥이 걸리고 마른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정리 국밥집 주모가 양지머리를 듬뿍 넣고 무를 썰어 넣어 끓여낸 진한 쇠고기 뭇국의 구수한 냄새가 가을바람을 타고 요천 둑길까지 멀리 퍼져나갔다.
떡집 방앗간에서는 갓 쪄낸 시루떡의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기름을 두른 솥뚜껑 위에서 부침개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지글거리는 소리가 흡사 경사스러운 날의 꽹과리 소리처럼 경쾌하게 울렸다.
"이봐, 배 씨! 막걸리 말통 어디 뒀어? 시원하게 살얼음 띄워서 얼른 내와! 오늘 같은 날 목구멍에 막걸리 한잔 안 넘어가면 남원 사람도 아니지!"
"아따, 성님도 성격 급하시네! 저기 동문 우체국 당직실 뒤란에 두 말이나 차게 재워놨응게 걱정 붙들어 매쇼! 오늘 아주 동문 골목길 아스팔트 바닥이 닳아 없어지도록 마셔보는 거여!"
상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골목의 허공을 맑게 갈랐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양토건 용역들의 쇠파이프와 굴착기 굉음에 질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던 공포의 골목이었다.
누군가 가게 문을 닫고 쫓겨나면 제 가게도 강제 철거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이웃의 불행을 애써 외면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유가 끝까지 부서진 문틀을 붙잡고 피를 흘리며 버텨냈기에, 그들도 마침내 공포를 깨고 도망치지 않고 인간 띠를 만들어 용역들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검사 법복을 입은 성재환이 서슬 퍼런 법리의 칼을 휘둘러 괴물의 목을 베어 넘겼다.
지유가 지켜낸 그 작은 세 평짜리 김밥집 터는,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영세 분식점이 아니었다.
권력의 폭압에 짓밟히던 남원 민초들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스스로 당당해질 수 있게 해준 거대한 희망의 보루였고, 양심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그때였다.
골목길 저편, 요천 둑길을 따라 천천히 들어서는 하얀색 택시 한 대가 사람들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다가오는 차창 너머로, 목에 얇은 거즈를 덧댄 채 단정한 남색 원피스를 입은 지유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왔다! 지유 왔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빗자루질을 하던 손도, 부침개를 뒤집던 젓가락도 일제히 멈추어 섰다.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십 명의 상인들이 일제히 길 양옆으로 물러서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3. 눈물로 차린 잔칫상
택시 문이 조용히 열렸다.
조수석에서 먼저 내린 윤하은이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펼치려 하자, 뒷좌석에서 내린 지유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은아, 나 걸을 수 있어. 부축 안 해줘도 돼."
지유의 발이 자갈 섞인 흙바닥을 천천히 디뎠다.
아직 타박상의 통증 탓에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였으나, 지유는 남원의료원의 칙칙한 환자복 대신 어머니가 생전에 장만해 주었던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뺨에 옅게 남아 있는 푸르스름한 멍 자국과 목덜미의 거즈 테이프는 여전했지만, 지유의 눈동자는 더 이상 납치되던 밤의 끔찍한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골목길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페인트로 뒤덮였던 김밥집 외벽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박살 났던 통유리창은 새 유리로 말끔히 갈아 끼워져 따스한 아침 햇살을 투명하게 튕겨내고 있었다.
가게 처마 밑에는 정갈하게 닦인 통나무 평상이 길게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쇠고기 뭇국과 갓 쪄낸 시루떡, 싱싱한 과일과 노릇한 부침개가 상다리가 부러져라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평상 둘레로, 수십 명의 시장 어르신들과 이웃들이 두 손을 모은 채 자신을 눈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유야……."
하정리 시장의 포목점 김 씨 아주머니가 먼저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와 지유의 양손을 와락 붙잡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마디가 지유의 가녀린 손을 감싸 쥐며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이고, 이 착한 것아…… 이 모진 세월을 그 어린 몸으로 어떻게 버텼누……."
김 씨 아주머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지유의 손등을 흠뻑 적셨다.
그것은 미안함의 눈물이었고, 부끄러움의 참회였다.
"우리가 죄인이다, 지유야. 네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피를 토하며 누워 있을 때도, 조폭 놈들이 가게 셔터를 부수며 몽둥이를 휘두를 때도…… 내 가게 뺏길까 봐 문 꽁꽁 걸어 잠그고 내다보지도 못했어. 어른들이라는 것들이 그 도둑놈들 무서워서 너 혼자 피 흘리게 내버려 뒀어…… 정말 미안하다, 지유야. 이 못난 것들을 용서해 다오……."
아주머니가 가슴을 치며 목놓아 통곡하자, 뒤편에 서 있던 건재상 박 씨와 생선전 배 씨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유의 눈가에도 맑고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눈물 속에는 원망이나 서러움 따위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유는 오히려 떨리는 손을 들어 아주머니의 거친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유의 맑고 단호한 음성이 골목길의 서글픈 울음소리를 따뜻하게 가라앉혔다.
"어르신들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제방이 무너졌을 때도, 굴착기가 가게 처마를 부수러 밀고 들어왔을 때도…… 어르신들이 꽹과리를 치며 인간 띠를 만들어 지켜주셨잖아요. 저 혼자 싸운 게 아니에요. 우리가 다 같이 믿고, 다 같이 지켜낸 거예요."
지유의 그 의연한 말 한마디에 상인들의 가슴속에서 묵직하게 얹혀 있던 응어리가 와락 풀려나왔다.
"지유 말이 맞다! 우리가 이긴 거여!"
국밥집 주모가 눈물을 훔치며 목청을 돋우었다.
"자, 다들 울지들 말고 어서 국 식기 전에 먹자고! 지유야, 너 병원 밥맛 없어서 며칠 동안 제대로 뜨지도 못했지? 이리 와서 얼른 앉아라. 네 좋아하는 양지머리 듬뿍 넣고 푹 고았다!"
상인들이 지유의 등을 다정하게 떠밀어 평상 한가운데로 안내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놋그릇 국밥이 지유의 앞에 놓이고, 막 쪄낸 시루떡 한 조각이 지유의 숟가락 위에 얹어졌다.
골목길 가득 퍼져나가는 구수한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온기.
그것은 삼십 년 동안 남원을 짓누르던 폭력과 공포의 기나긴 겨울이 완전히 끝나고, 마침내 온전한 사람의 온기가 되살아났음을 알리는 가장 거룩하고 소박한 축제였다.
지유는 숟가락을 쥐고 국물을 조심스레 한 모금 삼켰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번져오는 맑고 진한 국물의 온기에,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정갈하게 끓여주던 바로 그 정직하고 따뜻한 남원의 맛이었다.
4. 희망의 징표, 다시 열린 문
한바탕 웃음과 눈물이 오간 뒤, 지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밥집의 굳게 닫힌 미닫이문 앞에 섰다.
자물쇠를 쥐는 손길이 가늘게 떨려왔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낡은 나무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익숙하고 그리운 방앗간 참기름 냄새와 바삭하게 말린 김의 향이 훅 끼쳐왔다.
납치되던 밤, 해결사들의 거친 군화 발에 짓밟혀 쓰러졌던 플라스틱 상자들과 도마는 윤하은과 동네 청년들이 이미 정갈하게 제자리를 찾아 깨끗이 닦아둔 뒤였다.
조리대 위 스테인리스 상판은 거울처럼 투명하게 닦여 있었고, 벽면 찬장에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흰 사기그릇들이 나란히 엎어져 맑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
지유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 조리대 기둥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괴한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느라 손톱으로 깊게 긁어놓았던 가느다란 상흔이 손끝에 또렷하게 닿았다.
그 상흔 바로 옆으로, 윤하은이 다가와 작고 묵직한 유리병 하나를 조리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지유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하은아, 이건……?"
깊고 푸른빛이 투명하게 감도는 흑청색 잉크병이었다.
강태석이 찾아와 협박하며 조리대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 냈던 바로 그 잉크병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남원여고 앞 문구점 아저씨한테 내가 새벽같이 달려가서 사 온 거야."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아저씨가 이 잉크병 꺼내주시면서 그러시더라. 성재환 검사님이 서울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할 때도 지유 네가 보내준 이 잉크만 썼다면서? 지유 네가 피 흘리며 지켜낸 게 그냥 가게가 아니라, 남원 전체의 자존심이라고…… 아저씨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돈도 한 푼 안 받으려고 하셨어."
지유는 잉크병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었다.
매끄러운 유리 표면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 너머로,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듯 법전을 파고들었을 재환의 고독한 밤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재환은 자신의 잉크로 법을 세워 거악을 베었고, 자신은 재환의 약속을 품고 이 자리를 지켜냈다.
딸랑, 딸그랑.
가게 입구 처마 밑에서 다시 한번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며 맑고 청아하게 울렸다.
문밖에서 최민재가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채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갓 인쇄된 두툼한 남원일보 호외 뭉치가 들려 있었다.
"지유야!"
민재가 신문 한 장을 조리대 위에 촥 펼쳐 보였다.
1면 톱기사 아래, 구도심 상인들이 김밥집 앞에 모여 평상을 펴고 활짝 웃고 있는 오늘의 잔치 현장 사진이 긴급 호외 2판으로 인쇄되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부패 권력 무너뜨린 민초들의 연대! 삼거리 김밥집에 다시 켜진 희망의 불빛]
"이 기사, 내가 직접 현장에서 쓰고 1면 헤드라인도 내 손으로 달았다."
민재가 깁스를 한 팔을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배도식 국장 놈이 야반도주하고 나서 남원일보 기자들이 똘똘 뭉쳐서 편집권을 되찾았거든. 오늘 남원 시내 방방곡곡에 만 부를 뿌릴 거다. 이제 남원 땅 그 어느 누구도 너를 얕보거나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못해."
지유가 신문 속 활자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내려가며 벅찬 감격에 젖어 들었다.
"민재 오빠, 정말 고마워요…… 오빠가 쇠파이프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지켜주지 않았으면, 전 벌써……."
"에이, 싱겁기는. 동생이 깡패 놈들한테 끌려가는데 도망치면 그게 사람이냐?"
민재가 손을 내저으며 헛기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눈가에도 묵직한 전율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가게 밖 골목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다급하고 상기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이, 성 검사님 오신다! 성재환 검사님 오셔!"
지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쥐고 있던 잉크병을 조리대에 가만히 내려놓고, 떨리는 걸음으로 가게 문밖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5. 약속의 완성, 그리고 가문의 그림자
골목길 어귀, 하얗게 새로 칠해진 담벼락 사이로 검은색 관용 세단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단정한 검은 양복 차림의 성재환이 내렸다.
그의 한 손에는 남원지원에서 교부받은 묵직한 서류철이 들려 있었고, 가슴 포켓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바로 그 흑청색 잉크가 채워진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골목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상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성 검사님 만세!"
"남원의 진짜 영웅이십니다!"
박 씨 집배원과 윤 씨 목수가 달려가 재환의 손을 덥석 부여잡고 눈물겨운 감사의 인사를 쏟아냈다.
재환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어르신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내면서도, 그의 시선만큼은 오직 한 사람, 김밥집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지유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상인들이 길을 터주었다.
재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유의 코앞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칠 년의 비극과 피비린내 나던 전쟁의 잔해가, 부서져 내리는 따스한 가을 햇살 속에서 완벽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재환이 품 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지유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모서리가 비뚤게 잘려 나가고 피가 묻어 굳어버렸던 그의 학생증 증명사진.
그리고 그 옆에, 백부에게 물려받아 가문의 숙명을 상징하던 독일제 각인 만년필을 나란히 얹어주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의 금빛 법언 위로 눈부신 햇살이 비쳐 들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바위처럼 단단하고 깊었다.
"약속 지켰다."
단 네 글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천오백육십이 일 동안 가슴을 찢어가며 버텨온 모든 시간의 무게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
지유는 만년필과 사진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가슴에 품어 안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 고마워, 재환아. 정말 고마워."
골목을 메운 상인들과 시민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동문 우체국 골목길 위로 청명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놋쇠 풍경이 끊임없이 맑은 소리를 흩뿌렸다.
그것은 남원이 되찾은 정의의 축가였다.
하지만 축제의 소란 속에서, 재환의 시선은 문득 지유의 등 뒤, 김밥집 주방 안쪽의 어두운 구석을 스쳤다.
어젯밤 최민재가 건네주었던 강태석 관사의 극비 문서철.
'1993년 성호석 환지 이행 확약서 및 성재환 유학비 대납 영수증'.
아버지가 아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강태석의 손을 잡고 타협했던 그 씻을 수 없는 죄악의 족쇄.
강태석이라는 지방의 거악은 무릎을 꿇렸지만, 그 악의 뿌리와 결탁해 서울의 권력 한가운데로 올라간 친부 성호석과의 마지막 사법적 대면이 여전히 서늘한 칼날이 되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가슴속으로 조용히 칼을 갈았다.
'아버지.'
'남원의 눈물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가문이 이 땅에 진 빚을 법의 이름으로 갚는 것뿐입니다.'
정의의 축제가 절정에 달한 남원의 푸른 하늘 아래, 청년 검사의 눈빛 속에는 거악의 심장부인 서울을 향한 또 다른 결전의 불꽃이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