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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83화

영장실질심사의 날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제1호 법정의 대치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법정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육중한 파열음을 토해내며 닫혔다.

 

창밖에서는 남원 시민 수백 명이 청사 담벼락을 에워싸고 지르는 함성이 가느다란 유리창을 진동시키며 아스라이 파고들었다.

 

법정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빙판처럼 서늘하고 팽팽했다.

 

방청석 맨 앞줄에는 서울에서 급파된 법무법인 세율 소속 변호사들과 지역 일간지 기자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검사석에는 검은 비단 법복을 입은 성재환 검사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날인된 130쪽의 사전 구속영장 청구서 원본과,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맞은편 피고인 및 변호인석.

 

카키색 수의를 입고 수번 2104를 가슴에 단 강태석이 휠체어에 비스듬히 몸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남원을 호령하던 토착 군주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강태석은 고개를 떨군 채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수갑 찬 손으로 연신 왼쪽 가슴팍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옆을 호위하듯 버티고 선 사내들.

 

은발을 단정히 넘긴 전직 대법관 민중기 변호사와,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낸 배상문 변호사였다.

 

두 거물 전관의 얼굴에는 지방의 일개 평검사 따위는 한 손으로 으스러뜨릴 수 있다는 오만과 관록이 서려 있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법원 경위의 엄숙한 구령과 함께 재판장 출입문이 열렸다.

 

법복을 입은 문성현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묵직한 서류철을 든 채 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이 법대로 쏠렸다.

 

문성현 판사는 자리에 앉아 뿔테 안경을 고쳐 쓴 뒤, 방청석과 검사석, 그리고 피의자석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때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배상문 전 법원장과 마주쳤을 때, 배상문은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선배이자 사법부 최고위 전관으로서의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문성현 판사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법봉을 잡고 세 번 내리쳤다.

 

탕, 탕, 탕.

 

"지금부터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수살인교사 등 사건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문 판사의 차분한 음성이 정적을 깼다.

 

"먼저 검찰 측, 구속영장 청구 취지와 범죄사실의 요지를 진술하십시오."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법복 자락이 가볍게 스치는 소리와 함께,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휠체어에 기대앉은 강태석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2. 전관의 덫, 자백의 임의성 탄핵

 

재환은 결재판을 펼치지 않은 채, 오직 망막에 각인된 사건의 궤적을 읊조리듯 또렷한 목소리로 공소 사실을 낭독해 나갔다.

 

"피의자 강태석은 민선 1기 남원시장이라는 우월적 공권력을 악용하여,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 관급 공사비 중 14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공금을 횡령하고 분산 세탁했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법정 천장을 찌르듯 서슬 퍼렇게 울려 퍼졌다.

 

"그 탐욕의 결과로 기준치 3분의 1에 불과한 저질 골재와 규격 미달 철근으로 날림 시공된 요천 제1공구 제방 50미터가 붕괴되었고, 구도심 상가와 주택가가 물에 잠겨 수십 명의 사상자와 수재민을 낳았습니다. 나아가 피의자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시청 건설교통국장을 덤프트럭으로 들이받아 살해하려 교사하였으며, 옥중에서 무선전화를 반입해 조폭 해결사들을 사주해 무고한 시민 한지유를 강제 납치하고 살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사법 질서를 유린하고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 중대 범죄로서,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극히 농후하므로 형사소송법 제70조에 따라 구속영장 발부를 강력히 청구합니다."

 

재환이 말을 맺고 자리에 앉자, 법정 안이 술렁였다.

 

그때, 변호인석에서 민중기 전 대법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법대 앞 발언대로 걸어 나와 헛기침을 한 번 내뱉었다.

 

"재판장님. 검찰 측의 청구 요지는 화려한 웅변에 불과하며,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민중기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법정 바닥을 짓누르는 노회한 울림이 있었다.

 

"우선, 검찰이 제시한 핵심 증거라는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부터 전면 탄핵하고자 합니다. 형사소송법 제309조는 강압, 기망,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등에 의한 자백의 증거능력을 엄격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민중기가 검사석의 성재환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주임검사인 성재환 검사는 누구입니까? 7년 전 남원에서 비리로 축출되었던 전임 군수 성호석의 친아들입니다. 피의자와 개인적·가문적 원한 관계를 지닌 자가 검사라는 합법의 탈을 쓰고 남원에 내려왔습니다. 게다가 성 검사는 피의자를 전주교도소에서 강제로 끌고 와 밤을 꼬박 새우며 변호인의 접견조차 차단한 채 가혹한 심야 조사를 감행했습니다. 60세가 넘은 고령의 시장을 밀실에 가두고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며 겁박하여 억지로 받아낸 지장입니다! 이러한 위법 수집 증거를 바탕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법주의에 대한 정면 모독입니다!"

 

민중기의 서슬 퍼런 변론에 방청석의 세율 변호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배상문 전 법원장이 서류 봉투를 치켜들며 발언을 이어받았다.

 

"더욱이 재판장님, 피의자의 현재 건강 상태는 분초를 다투는 위급 상황입니다."

 

배상문이 문성현 판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과거 직속 후배였던 판사에게 보내는 무언의 위력 행정이었다.

 

"여기 전주 예수병원 순환기내과 전문의가 발행한 긴급 진단서가 있습니다. '급성 관상동맥 증후군 및 불안정 협심증, 뇌혈관 연축'. 피의자는 지금 당장 스텐트 삽입술과 중환자실 집중 치료를 받지 않으면 구치소 내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할 위험이 90% 이상입니다! 설령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 한들, 피의자의 생명권보다 앞서는 영장 집행이 어디 있습니까? 재판장님의 현명한 결단으로 영장 청구를 즉각 기각하시거나, 최소한 영장실질심사를 연기하고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두 전관의 완벽한 2인 1조 공세였다.

 

자백의 임의성을 깨부수고, 허위 의무기록을 들이밀어 법관의 심리적 부담을 극대화하는 노련한 수법.

 

방청석의 기자들이 숨을 죽인 채 문성현 판사의 입을 바라보았다.

 

문 판사의 미간이 무겁게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이 예수병원 진단서 사본 위로 떨어졌다.

 

피의자의 생명과 건강 문제는 영장전담판사에게 언제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었다.

 

그 침묵의 틈바구니를 뚫고, 성재환 검사가 단호하게 손을 들었다.

 

"재판장님. 검찰 측 반박 입증을 허가해 주십시오."

 

문 판사가 고개를 들었다.

 

"검찰, 반박하십시오."

 

3. 흑청색 잉크의 반격

 

재환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나 분노 따위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덫을 놓고 기다리던 사냥꾼의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엷게 번져 있었다.

 

재환은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파란색 바인더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변호인 측에서는 피의자의 자백이 심야 강압 수사에 의한 것이라며 증거능력을 부인했습니다. 좋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피의자 강태석의 자백 조서를 이 법정의 증거 목록에서 '완전히 배제'하겠습니다."

 

"뭐라고?"

 

민중기 전 대법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백을 무력화하여 수사의 기둥을 뽑으려던 변호인단의 허를 찌르는 발언이었다.

 

재환은 파란색 바인더를 높이 쳐들었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피의자의 입술에서 나온 나약한 말 따위에 기대어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재환이 바인더를 펼치며 문성현 판사 앞으로 다가갔다.

 

"첫째, 140억 비자금의 조성과 횡령 혐의입니다. 지리산 산내면 부운리 비밀 별장 지하 2중 방폭 금고에서 압수한 '남원 특별 대외관리 원부' 5권 원본입니다. 여기에는 관급 공사비가 차명 계좌 12개로 쪼개져 분산 인출된 시각, 은행 창구 번호, 그리고 강태석의 비선 관리인 임종식의 친필 서명이 1원 단위까지 적시되어 있습니다."

 

재환의 손가락이 서류철을 넘겼다.

 

"둘째, 어제 오후 남원지청 민원실에 자수한 남원 관내 건설업체 대표 28명과 구도심 번영회 임원들이 자진 제출한 비리 장부와 이면계약서 40여 권입니다. 피의자 강태석이 수주 대가로 챙긴 리베이트 영수증,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 앞에 조폭을 보내 붉은 페인트 테러를 사주하며 건넨 수표의 추적 내역이 완벽히 일치합니다."

 

법정 안 변호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피의자의 자백이 없어도, 이미 제3자들의 진술과 객관적 물증만으로 범죄사실의 소명이 차고 넘쳤다.

 

재환의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휠체어에 앉아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 강태석을 향했다.

 

"셋째, 변호인 측이 제시한 전주 예수병원의 급성 심근경색 진단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재환이 품 안에서 백색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 겉면에는 '전주 예수병원 감사과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배상문 변호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이, 저것은……?"

 

"오늘 새벽 4시 15분, 대검 특별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전주 예수병원 심장내과 당직실을 기습 확인하여 확보한 병원 전산 로그 기록 및 담당 의사 김 모 과장의 자필 진술서입니다."

 

재환의 서늘한 목소리가 법정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피의자 강태석은 최근 3년간 예수병원에서 심장 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사실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늘 새벽 2시, 변호인 측의 사주를 받은 병원 사무처장 박 모 씨가 심장내과 과장에게 현금 5천만 원을 건네며 '허위 진단서'를 발급하도록 청탁한 사실이 적발되어, 현재 담당 의사와 사무처장 모두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허위진단서작성 혐의로 전주지검에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재, 재판장님! 저것은 일방적인 수사 보고에 불과합니다!"

 

배상문 변호사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하지만 재환은 예수병원 당직실 CCTV 녹화 비디오테이프와 녹취록을 법대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탁!

 

"더불어, 어제저녁 남원 파크호텔 7층 스위트룸에서 변호인단과 피의자 측 가족이 나눈 통화 도청 감청 영장 집행 결과서입니다."

 

재환의 눈빛이 민중기와 배상문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의무기록을 조작해 심근경색으로 빼돌린 뒤, 병원에서 탈출시켜 밀항을 모색하자'는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강 악화가 아니라, 형사소송법 제70조 제1항 제3호가 규정한 가장 명백하고도 파렴치한 '증거 인멸 및 도주의 기도'입니다!"

 

법정 안이 일순간에 거대한 충격과 정적에 휩싸였다.

 

서울 대형 로펌의 초호화 변호인단이 준비했던 최후의 무기, 허위 진단서와 강압 수사 프레임이 단 10분 만에 완벽한 증거 인멸의 흉기로 둔갑하여 자신들의 목덜미를 베어버린 것이다.

 

민중기 전 대법관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고, 배상문 전 법원장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뎅그렁, 하는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4. 무너진 괴물과 재판장의 고뇌

 

"으, 으으…… 크아악!"

 

휠체어에 앉아 연기를 이어가던 강태석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짓 심근경색의 연기가 아니었다.

 

모든 퇴로가 차단되고, 자신이 믿었던 수십억짜리 전관 변호인단마저 청년 검사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뼈째 발려나가는 것을 목격한 자의 원초적인 공포 발작이었다.

 

강태석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검사석의 재환을 향해 발악했다.

 

"성재환!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해? 네 애비 성호석이도 내 손바닥 안에서 기어 다니던 놈이야! 내가 남원을 어떻게 만들었는데! 내가 세운 제방이고, 내가 먹여 살린 남원이야! 네놈 같은 애송이가 법을 알아? 권력이 뭔 줄 아냐고!"

 

"피의자, 진정하십시오! 경위, 피의자를 착석시키세요!"

 

문성현 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법원 경위 넷이 달려들어 발버둥 치는 강태석의 어깨를 짓누르고 강제로 휠체어에 결박했다.

 

포승줄이 살을 파고들며 강태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침을 튀기며 법대를 향해 소리쳤다.

 

"문 판사! 너 배상문 원장님 밑에 있을 때 내가 뒤봐준 거 잊었어? 내가 남원지원 판사들 밥값 대준 게 얼마인데 나한테 영장을 쳐! 영장 기각해! 기각하라고!"

 

추악한 밑바닥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방청석의 기자들이 미친 듯이 수첩에 펜을 굴렸다.

 

배상문 변호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고, 민중기 변호사는 외투를 챙겨 쥐며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문성현 판사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선배이자 전주지법원장이었던 자가 법정을 어떻게 더럽히려 했는지, 그리고 눈앞의 괴물이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얼마나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었는지를 목도한 법관의 참담한 분노였다.

 

재환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와 법대를 향해 섰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재판장님."

 

재환의 나직하고 단호한 음성이 흥분으로 들끓던 법정을 엄숙하게 가라앉혔다.

 

"법(法)이라는 글자는 삼수변(氵)에 갈 거(去) 자를 씁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식과 정의를 뜻합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남원에서 법은 물처럼 흐르지 못했습니다. 저 피고인의 탐욕과, 권력에 기생한 자들의 결탁으로 거대한 웅덩이에 갇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그 썩은 물에 무고한 시민들의 피눈물이 섞였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이 개미처럼 짓밟혔습니다."

 

재환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흑청색 잉크가 담긴 각인 만년필을 꺼내 손에 쥐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은, 권력자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아닙니다. 억울하게 울부짖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죄지은 자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심판대에 세우라는 국가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피의자 강태석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남원에 다시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재환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묵례를 올렸다.

 

법정 안에는 침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장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성현 판사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았다.

 

그의 시선이 검사석의 백삼십 쪽 영장 청구서와, 그 위에 놓인 각인 만년필을 깊게 응시했다.

 

사법부의 독립과 양심.

 

오랜 세월 전관예우와 토착 유착이라는 망령에 짓눌려 있던 지방 법관의 가슴속에, 청년 검사가 던진 서슬 퍼런 법리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문 판사가 안경을 다시 썼다.

 

"심문을 모두 종결합니다."

 

문 판사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영장 발부 여부의 결정은 기록을 정밀 검토한 뒤, 금일 오후 4시 정각에 피의자 유치 장소인 남원경찰서 유치장으로 통보하겠습니다. 피의자는 남원경찰서 유치장에서 대기하도록 하십시오. 폐정을 선언합니다."

 

탕, 탕, 탕.

 

세 번의 법봉 소리와 함께 심문이 끝났다.

 

5. 붉은 도장의 무게

 

오후 3시 50분,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2층 영장전담판사실.

 

방 안에는 오직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책상 위에는 백삼십 쪽의 구속영장 청구서와, 수십 권의 증거 바인더, 그리고 방금 문성현 판사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구속영장 발부 결정문'이 놓여 있었다.

 

문성현 판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법원 청사 앞마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인파는 한 치도 줄어들지 않은 채, 차가운 늦여름 바람 속에서 법원의 결정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 서려 있는 간절함.

 

그것은 사법부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갈구하는 백성들의 기도였다.

 

문 판사는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와 묵직한 옥돌 인주함을 열었다.

 

선혈처럼 붉은 인주가 묻은 관인을 손에 쥐었다.

 

결정문 주문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이유:

'피의자의 범죄사실은 지리산 비자금 원부 및 다수의 자수 진술서 등 객관적 증거에 의해 소명이 충분하고 사안이 극히 중대함. 나아가 피의자가 허위 진단서 발급을 사주하고 밀항을 모의하는 등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명백히 인정됨.'

 

문 판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판사 서명란 옆에 관인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쾅!

 

붉은 인주가 한지의 결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남원을 30년간 암흑 속에 가두었던 거대 토착 권력 강태석의 숨통을 법적으로 끊어버리는 사법의 쐐기였다.

 

문 판사는 영장 정본을 집어 들고 문가에 서 있던 법원 참여관에게 건넸다.

 

"남원경찰서 유치장으로 즉시 송달하십시오."

 

"예, 판사님!"

 

참여관이 영장을 받아 들고 뛰쳐나갔다.

 

같은 시각, 남원경찰서 지하 유치장 1호 독방.

 

철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강태석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군화 발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유치장 철창 너머로 남원경찰서 수사과장과 검찰 특수부 강태훈 수사관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붉은 인주가 선명하게 찍힌 법원의 공식 영장 정본이 들려 있었다.

 

강태석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거, 영장이…… 어떻게 됐어? 기각이지? 민중기 대법관님이 빼내 준 거지? 어?"

 

수사과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철창 앞에 서서 영장 표지를 펼쳐 보였다.

 

"피의자 강태석."

 

수사과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지하 유치장의 시멘트벽을 때렸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 명의로 구속영장이 정식 발부되었습니다."

 

"……뭐?"

 

강태석의 턱이 덜덜 떨리며 넋이 나간 비명이 새어 나왔다.

 

철컥, 철컹!

 

유치장 철문이 열리고, 강태훈 수사관이 굵은 마포 포승줄과 묵직한 강철 수갑을 꺼내 들었다.

 

"수감 번호 2104번, 강태석. 전주교도소 본원 미결수 특별 독방으로 압송합니다. 나오십시오."

 

포승줄이 강태석의 어깨와 팔뚝을 사정없이 옭아매기 시작했다.

 

30년간 남원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자의 양팔이 등 뒤로 꺾이며, 차가운 쇠사슬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 시각, 남원지원 정문 앞.

 

법원 청사 계단을 내려오는 성재환 검사의 모습이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드러났다.

 

그의 손에는 법원이 교부한 구속영장 집행 지휘서가 들려 있었다.

 

재환이 계단 끝에 서서 고개를 들자, 정적에 휩싸여 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재환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재환의 사자후가 남원의 맑은 하늘을 갈랐다.

 

찰나의 침묵 뒤, 남원 시내 전체를 뒤흔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폭발했다.

 

"와아아아아아아!"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는 시장 상인들, 꽹과리를 치며 만세를 부르는 농민들, 서로의 손을 맞잡고 통곡하는 수해 이재민들.

 

수백 년 묵은 요천의 어둠을 걷어내고, 마침내 정의의 빛이 남원 땅 한복판에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환호성 너머로, 삼거리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고 청아한 쇳소리를 울렸다.

 

그것은 길고 길었던 7년간의 겨울이 마침내 끝나고, 한지유와 성재환의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축복의 종소리였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