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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82화

사전 구속영장 청구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204호의 백서(白書)

 

밤은 깊었으나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낡은 형광등 아래로 푸른 잉크 냄새와 인쇄기 토너의 비릿한 기름내가 묵직하게 뒤섞여 가라앉아 있었다.

 

성재환 검사는 책상 위에 양손을 얹고 정면에 놓인 서류 뭉치를 응시했다.

 

높이만 뼘을 훌쩍 넘는 방대한 서류철.

 

그 표지 정중앙에는 서슬 퍼런 굵은 활자가 박혀 있었다.

 

'사전 구속영장 청구서'.

 

피의자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

 

적용 법조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및 배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업무상과실치사상,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교사), 그리고 형법 제250조 및 제31조(특수살인교사)와 특수약취유인교사.

 

한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온갖 사법적 패악과 권력의 오물이 총 백삼십여 쪽에 달하는 종이 위에 낱낱이 박제되어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캡 상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의 금빛 닙이 백지 위를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을 갈랐다.

 

지유가 선물해 준 깊고 서늘한 흑청색 잉크가 한 획 한 획 종이의 결 속으로 파고들었다.

 

영장 청구서의 본문은 단순한 공소 사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30년 전 요천 변 비옥한 과수원을 빼앗기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 한석규의 원통함이었고, 5년간 시청 위생과와 소방과의 표적 탄압 속에서 신부전을 앓다 영안실에 방치될 뻔했던 지유 어머니의 피눈물이었으며, 지난 7년간 붉은 페인트와 쇠파이프 테러 속에서도 남원을 지켜낸 한지유의 거룩한 상흔이었다.

 

"검사님."

 

옆에서 굵은 철제 집게로 별책 증거 목록을 정리하던 안진우 검사가 낮게 숨을 들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지리산 부운리 별장에서 압수한 비자금 원부 5권의 정밀 대조표와, 1층 민원실에서 확보한 토착 유지 서른두 명의 자수 진술서 사본 첨부 완료했습니다."

 

안 검사의 눈 밑에는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형형했다.

 

"강태석의 계좌로 직접 흘러 들어간 차명 자금만 140억입니다. 거기에 요천 제방 붕괴 현장에서 수거한 저질 골재 감정서, 최민재 기자가 넘겨준 언론 조작 육성 테이프, 그리고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납치범들의 옥중 살인교사 자백 녹취까지…… 증거의 연쇄가 완벽합니다. 법리적으로 흠결이 전혀 없습니다."

 

재환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마지막 장 '검사 성재환' 이름 석 자 옆에 굵고 단정한 친필 서명을 새겨 넣었다.

 

"흠결이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상대는 이 나라의 사법부를 주물렀던 전관 변호인단이니까요."

 

재환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년필 캡을 닫자 딸깍 하는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정종길 중수부장님 말씀대로, 저들은 내일 법정에서 강태석의 자백을 허위 자백으로 몰아갈 겁니다. 밤샘 강압 수사, 전임 시장 아들의 사적 복수, 그리고 급성 심근경색을 핑계로 병보석과 영장 기각을 노릴 테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지청장 결재를 지체할 수 없습니다."

 

안진우가 시계를 쳐다보며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새벽 1시 20분.

 

"조동식 지청장이 아직 퇴근하지 않고 2층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문현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속보로 뜬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기만 붙들고 있다더군요."

 

재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백삼십 쪽의 구속영장 청구서 원본과, 붉은색 결재인이 찍혀야 할 상신 표지가 들려 있었다.

 

"가야지요."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남원의 사법 거래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지청장실에서 직접 매듭을 지어야겠습니다."

 

2. 결재판을 든 방문자

 

지청장실 복도는 무덤처럼 적막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리놀륨 바닥이 삐걱거리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두께 5센티미터의 육중한 오크 무늬 지청장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담배 연기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 똑, 똑.

 

재환의 손가락 마디가 문판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덜컹거리며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한참 뒤에야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요."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입니다. 강태석 남원시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청구 결재를 받으러 왔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거절의 말도, 들어오라는 허락도 떨어지지 않는 질식할 듯한 침묵이었다.

 

재환은 망설이지 않고 황동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문이 열리자 자욱한 담배 연기가 매캐하게 쏟아져 나왔다.

 

응접 테이블 재떨이에는 장지방 담배꽁초 수십 개가 수북하게 꽂혀 있었고, 집무 책상 뒤편에는 전주지검 남원지청장 조동식이 넥타이를 거칠게 푼 채 퀭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불과 사흘 전, 성재환을 향해 호통을 치며 수사 축소와 직무 배제를 종용하던 그 오만한 검찰 고위 간부의 위엄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며칠 굶은 부랑자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로 경련하고 있었다.

 

책상 위 TV 화면에서는 음소거된 YTN 뉴스 특보가 쉴 새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속보: 국회,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 체포동의안 압도적 가결…… 검찰, 전격 강제 구인 착수]

 

붉은 자막이 조동식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번갈아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탁.

 

재환은 성큼 걸어가 조동식의 책상 한가운데에 두툼한 사전 구속영장 청구서 결재판을 내려놓았다.

 

조동식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서류 표지로 떨어졌다.

 

'피의자 남원시장 강태석'.

 

그 활자를 본 순간, 조동식의 메마른 목젖이 덜컥거리며 요동쳤다.

 

"……성 검사."

 

조동식이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짰다.

 

"꼭……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꼭 남원시장 명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쳐야겠어?"

 

재환은 서류판 옆에 독일제 만년필을 조용히 세워 놓았다.

 

"검찰청법 제4조,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수사와 공소제기 및 그 유지에 관한 직무를 수행합니다.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 관급 공사비 140억을 빼돌려 제방을 무너뜨리고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비리를 감추기 위해 시청 간부를 트럭으로 들이받아 살해하려 했고, 무고한 시민을 납치해 칼을 들이댔습니다. 구속영장을 치지 않는다면, 검찰이 왜 존재합니까?"

 

"강태석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물어?"

 

조동식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러나 그 주먹질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못해 안달 난 사냥개의 비명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전직 대법관에 전주지법원장을 지낸 민중기 변호사까지 내려왔어! 대형 로펌 변호사 여섯 명이 지금 남원 파크호텔에 진을 쳤단 말이다! 내일 영장실질심사에서 강압 수사로 뒤집히면, 우리 지청은…… 나는 어쩌란 말인가!"

 

"지청장님."

 

재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게 내려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서슬 퍼런 어조였다.

 

"지청장님이 걱정하셔야 할 것은 내일의 실질심사가 아닙니다."

 

재환이 결재판의 첫 장을 넘겼다.

 

그 안쪽에는 별책 증거 목록 제7호가 끼워져 있었다.

 

조동식의 시선이 그 문서를 마주한 순간, 그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1995년 9월 14일,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비밀 대여금고 제7호 자금 인출 내역: 수령인 조동식(현 남원지청장), 명목 수사 무마 사례비 현금 3억 원.'

 

그 밑에는 조동식 본인이 1년 전 요천각 난초실에서 직접 날인했던 영수증 사본과, 지리산 부운리 별장 금고에서 압수한 비밀 녹음 테이프의 전사록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조동식: 강 시장, 이번 요천 제1공구 민원은 내가 알아서 덮을 테니 걱정 마시오. 대신 지난번 약속한 장학재단 출연금은 확실히 챙겨줘야지?]

 

[강태석: 아이고, 조 지청장님. 제 금고에 있는 건 다 지청장님 돈 아닙니까. 허허허.]

 

글자 하나하나가 조동식의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였다.

 

"이, 이것을…… 자네가 어떻게……."

 

조동식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서류 위로 떨어졌다.

 

"강태석의 지리산 별장 금고에서 압수한 원본입니다."

 

재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조동식의 핏발 선 눈을 직시했다.

 

"대검 중수부 정종길 부장님께 이미 사본을 송부했습니다. 지청장님께서 지난 1년간 남원 카르텔의 우두머리로부터 얼마를 받아 챙겼고, 어떤 사건들을 불기소로 덮어주었는지 중수부 내사팀이 전 계좌를 동결하고 있습니다."

 

"성, 성재환……!"

 

조동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둔탁음을 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환을 가리켰다.

 

"네놈이 감히…… 네 직속상관을 협박하는 거냐? 하극상이야! 내가 여기서 결재를 거부하고 자네를 직무유기로 대검에 고발하면……!"

 

"해보십시오."

 

재환이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

 

그의 서늘한 태도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결재를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검사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상급자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지청장님이 서명을 거부하신다면, 저는 이 결재판과 지청장님의 3억 수수 영수증을 들고 내일 아침 9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실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총장 직통 특임검사 훈령에 따라 법원에 단독으로 영장을 접수하겠습니다."

 

재환이 조동식의 책상 앞으로 반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쉰을 넘긴 부장급 지청장이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되면, 내일 오전 10시 영장실질심사 법정에 피의자 강태석의 옆자리에 앉게 될 사람은…… 바로 지청장님이 되실 겁니다."

 

3. 붉은 인주와 굴복의 서명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조동식의 다리가 풀렸다.

 

그는 쓰러지듯 소파 모서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와이셔츠가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서울의 하늘이라 믿었던 김문현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수갑을 찼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던 남원의 바닥은 성재환이라는 괴물 같은 청년 검사의 칼날 아래 갈가리 찢겨 나갔다.

 

더 이상 기댈 언덕도, 도망칠 쥐구멍도 없었다.

 

그때, 닫혀 있던 집무실 창문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지청 앞마당 쪽이었다.

 

조동식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저게 무슨 소리냐? 시위대가 아직도 안 간 거냐?"

 

"직접 보시지요."

 

재환이 창가로 걸어가 짙은 남색 암막 커튼을 옆으로 젖혔다.

 

조동식이 비틀거리며 창가로 다가와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숨이 턱 막혔다.

 

새벽 1시 반이 넘은 시각.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남원지청 정문 앞마당과 진입로 일대가 수백 개의 노란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위대가 아니었다.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조폭도, 돈을 받고 동원된 어용 관변단체도 아니었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들의 오토바이 전조등, 하정리 시장 상인들이 들고 온 손전등, 요천 제방 붕괴로 집을 잃었던 이재민들이 든 양초, 그리고 삼거리 골목길 노점상들이 피워 올린 작은 촛불들이 모여 거대한 빛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면서도 청사 정문을 향해 묵묵히 서 있었다.

 

누구 하나 고함을 지르거나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남원의 썩은 고름을 도려내고 있는 젊은 검사가 고립되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체온으로 청사를 감싸 안고 있는 침묵의 방파제였다.

 

정문 철문에는 하얀 천막천으로 만든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법을 믿습니다. 강태석을 구속하십시오.'

 

삐뚤빼뚤한 매직 글씨.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시장 할머니들과 생선 장수들이 굳은살 박인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자였다.

 

"저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재환의 나직한 목소리가 조동식의 귓전을 때렸다.

 

"지청장님과 강태석이 30년간 '썩었다'고 비웃으며 짓밟았던 남원 시민들입니다. 돈으로 매수할 수 없고, 권력으로 협박해도 물러서지 않는 진짜 남원의 주인들입니다."

 

조동식의 눈동자가 하얗게 질려 흔들렸다.

 

저 수백 개의 불빛은 단순한 군중이 아니었다.

 

자신과 강태석이 저지른 죄악을 백일하에 비추는 거대한 업화(業火)였다.

 

저 불길을 거스르고 결재를 거부한다면, 검사로서의 파멸을 넘어 인간으로서 이 땅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리라는 공포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지청장님."

 

재환이 책상 위에 놓인 결재판을 가리켰다.

 

"결정하십시오.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 남아서 서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강태석과 함께 저 불빛 아래 끌려 나가 심판을 받으시겠습니까."

 

조동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메마른 침묵을 찢었다.

 

그는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책상 서랍에서 꺼낸 결재용 만년필을 쥔 손이 심하게 떨려 잉크 찌꺼기가 종이 위에 튀었다.

 

조동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윽, 서걱.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청구서 상신란에, 남원지청장 조동식의 이름 석 자가 힘없이 그어졌다.

 

이어 서랍에서 꺼낸 붉은 결재 직인이 서명 옆에 쾅 찍혔다.

 

선혈처럼 붉은 인주가 종이 속으로 번져 나갔다.

 

30년간 견고하게 유지되던 남원 토착 사법 카르텔의 마지막 빗장이, 여론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마침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조동식은 인두를 내려놓듯 도장을 떨어뜨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져가게."

 

재환은 결재판을 덮어 가슴에 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청장님."

 

재환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등 뒤에서 조동식이 책상 위에 엎드려 길고 거친 신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손잡이를 잡던 재환은 멈추어 서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이제 남원지청을 넘어, 내일 오전 10시로 예정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법정을 향하고 있었다.

 

4. 전관 변호인단의 그림자

 

새벽 2시 10분.

 

남원 시내 외곽 요천 변에 자리 잡은 남원 파크호텔 7층 스위트룸.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진 넓은 응접실 탁자 위에는 서울에서 공수된 고급 양주병과 수백 쪽의 법률 서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소파 중앙에는 은발을 정갈하게 빗어 넘기고 금테 안경을 쓴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전직 대법관이자 서울 대형 로펌 '세율'의 대표 변호사 민중기.

 

그 맞은편에는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내고 퇴임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관내 최고위 전관, 배상문 변호사가 서류철을 넘기며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탁자 한구석에는 파리한 안색의 변호인이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강태석의 개인 고문변호사였다.

 

"그러니까, 강 시장이 204호에서 전부 불었단 말이지?"

 

민중기 전 대법관이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수십 년간 법정 꼭대기에서 사람의 목숨을 내려다보던 자 특유의 서늘한 권위가 묻어 있었다.

 

고문변호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대법관님. 성재환 검사가 지리산 별장 금고에서 비자금 원부를 몽땅 털어왔습니다. 거기에 최민재 기자가 넘긴 녹음파일과 밤재 터널 납치범들의 자백까지 들이미니…… 시장님이 버티질 못하고 지장을 찍었습니다."

 

"멍청한 놈."

 

배상문 전 법원장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코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조폭 출신 아니랄까 봐, 검사 놈이 조금 윽박지른다고 그걸 덜컥 불어? 김문현 의원이 국회에서 잡혀갔어도 법원에는 아직 우리가 있어. 남원지원 영장전담이 누구야? 문성현 판사라고?"

 

"예, 문성현 부장판사입니다."

 

"성현이 그 친구…… 내가 전주지법원장 할 때 밑에 있던 녀석이야. 원칙주의자네 어쩌네 폼을 잡지만, 영장 기각 사유라는 건 법관이 쓰기 나름이지."

 

배상문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민중기를 바라보았다.

 

민중기는 잔에 든 양주를 한 모금 머금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백은 상관없어. 형사소송법 제309조,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민중기의 안경 너머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어린 검사 놈이 밤을 새워가며 피의자를 몰아붙였어. 게다가 그 검사가 누구인가? 7년 전 남원에서 축출된 전임 시장 성호석의 아들이야. 피의자와 사적 원한 관계가 있는 검사가 수사를 전담하고, 심야에 변호인 접견권을 차단한 채 강압적으로 받아낸 자백이다. 이것 하나만 물고 늘어져도 자백의 임의성은 법정에서 깨져."

 

민중기가 탁자 위에 놓인 노란색 서류 봉투를 툭툭 쳤다.

 

"거기에 전주 예수병원에서 방금 팩스로 받은 강태석의 긴급 진단서가 있어. '급성 관상동맥 증후군 및 심근경색 의증, 뇌혈관 연축에 따른 구속 수감 시 돌연사 위험'."

 

고문변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의무기록을…… 벌써 떼 오셨습니까?"

 

"돈이 얼마가 들어갔는데 그깟 종이 쪼가리 하나 못 만들겠나."

 

배상문이 킬킬거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자백의 임의성 탄핵, 그리고 구속 집행 시 생명 위험. 이 두 개면 문성현 판사도 영장을 발부하지 못해. 기각 아니면 최소한 구속영장 실질심사 연기 및 병원 후송 결정이 떨어진다. 일단 강태석을 병원으로 빼돌려 숨통을 트여놓으면, 그다음엔 서울의 여론을 움직여 성재환 검사를 직권남용으로 감찰에 넘기는 거야."

 

민중기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2시 40분.

 

"성재환 그 애송이가 제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남원에 내려와 칼을 휘두르는 모양인데…… 법이란 건 칼자루만 쥔다고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내일 법정에서 뼈저리게 가르쳐주지."

 

세율의 거물들이 서류를 나누어 들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거악의 마지막 독니가, 내일 아침 법정을 향해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5. 요천의 여명과 출진의 맹세

 

새벽 5시.

 

남원의 하늘이 짙은 군청색에서 희뿌연 잿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남원의료원 3층 308호 격리 병실의 창가.

 

지유는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두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요천 둑길을 따라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7년 전, 벚꽃이 눈처럼 날리던 그 봄날.

 

재환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가문의 비밀과 아픔을 나누었던 그 강둑길이었다.

 

탁탁.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며 윤하은이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지유야, 바람 차. 창문 닫자. 목도 아직 다 안 나았는데……."

 

"하은아."

 

지유가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하은이 멈추어 섰다.

 

지유의 시선은 창밖 저 멀리, 안갯속에 붉은 벽돌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법원과 검찰청 청사를 향해 있었다.

 

"재환이…… 지금 법원에 갈 준비 하고 있겠지?"

 

하은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까 민재 오빠한테 전화 왔었어. 어젯밤에 지청장 결재 떨어졌대. 오늘 오전 10시에 남원지원 1호 법정에서 강태석 영장실질심사가 열린대. 서울에서 거물 변호사들이 떼거지로 내려왔다는데…… 오빠가 걱정하지 말래. 성 검사님 눈빛이 아주 도끼날 같다고."

 

지유의 손이 가슴께로 올라갔다.

 

환자복 안쪽, 심장 바로 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작은 증명사진.

 

모서리가 잘려 나가고 붉은 피가 묻어 있지만, 뒷면에 적힌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는 글씨는 여전히 타오르듯 살아 있었다.

 

지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재환아.'

 

'너는 언제나 약속을 지켰어.'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던 그 말처럼, 너는 한 번도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어.'

 

'그러니 흔들리지 마.'

 

'내 상처도, 엄마의 눈물도, 남원의 아픔도…… 오늘 네가 든 그 칼끝에서 전부 끝날 거야.'

 

지유가 눈을 떴을 때, 동쪽 하늘 지리산 능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장엄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 남원지청 2층 204호 검사실.

 

방 안에는 출진을 앞둔 장수들의 삼엄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성재환 검사는 검사실 한구석에 걸려 있던 검사 법복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 비단 바탕에 짙은 자주색 깃이 덧대어진 법복.

 

국가의 이름으로 정의를 세우고 거악을 단죄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제복이었다.

 

재환은 천천히 법복을 입고 앞단추를 채웠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감.

 

그것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신림동 세 평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듯 버텨냈던 2561일의 무게였고, 남원의 힘없는 백성들이 그에게 걸어준 거대한 염원의 무게였다.

 

재환은 가슴 안주머니에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진 검은 옻칠 만년필을 꽂았다.

 

탁.

 

안진우 검사가 두 손으로 구속영장 청구서 정본과 증거 서류 가방을 받쳐 들었다.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가 양옆으로 도열했다.

 

"출발하시지요, 검사님."

 

안진우가 묵직하게 말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앞장서서 204호 검사실 문을 열고 나섰다.

 

2층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내려가는 재환의 구두 굽 소리가 청사 전체를 서늘하게 울렸다.

 

1층 로비를 지나 청사 현관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햇살 아래,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이 밤을 지새운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환이 법복을 입고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숨을 멈추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멎고, 장엄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조용히 외쳤다.

 

"성 검사님! 남원을 살려주십시오!"

 

그 외침을 신호탄으로, 마당을 메운 수백 명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강태석을 법정에 세워주십시오!"

 

시민들이 길을 열었다.

 

청사 정문에서부터 남원지원 법정 입구까지 이어진 아스팔트 길 양옆으로, 남원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인간 방파제가 끝없이 펼쳐졌다.

 

재환은 가슴을 펴고 계단을 내려섰다.

 

그의 서늘한 눈빛은 저 멀리,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법정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시간은 오전 9시 10분.

 

30년간 이어져 온 피와 눈물의 사슬을 끊어낼 최후의 영장실질심사가, 이제 단 50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