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조실의 혈투
1. 굳게 닫힌 철문 뒤에서
육중한 방음 철문이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맞물렸다.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안쪽, 외부의 소음과 햇살이 단 한 줌도 새어 들지 않는 취조실의 공기는 얼어붙은 석탄 가루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면을 감싼 회색 방음 보드는 바깥 정문 앞마당에서 수백 대의 카메라가 터뜨리던 섬광과, 수천 명의 남원 시민들이 울부짖던 격렬한 함성을 완벽하게 집어삼켰다.
취조실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의 시선이 날 선 비수처럼 얽혀 들었다.
한쪽에는 단정하고 서슬 퍼런 검사 법복을 입은 성재환이 미동조차 없이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맞은편, 싸늘한 철제 의자에는 카키색 미결수 수의를 걸치고 가슴팍에 붉은 실로 수놓아진 수번 '2104'를 단 현직 남원시장 강태석이 짓눌린 맹수처럼 앉아 있었다.
포토라인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강태석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30년간 남원의 밤과 낮을 지배해 온 토착 거악 특유의 잔혹한 광기와 오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성재환은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테이블 한구석에 놓인 소형 카세트 녹음기의 적색 녹음 버튼을 눌렀다.
딸깍.
정적을 찢는 기계음과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는 미세한 모터 소리가 사방의 콘크리트 벽을 타고 맴돌았다.
"1996년 8월 24일 오전 9시 42분.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횡령, 업무상과실치사상, 형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특수약취유인교사 피의사건에 관하여,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취조실에서 제1회 피의자 신문을 개시합니다."
성재환의 음성은 단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차갑고 명료했다.
법복 자락 아래로 뻗어 나온 그의 손가락 끝은 단정하게 깎여 있었으나,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살을 베어내는 서릿발과도 같았다.
강태석은 마른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허탈한 듯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의자 신문? 특수살인교사? 지랄 염병을 떠는구나, 성재환이."
강태석의 걸걸한 목소리가 긁히듯 튀어나왔다.
수의 가슴팍에 새겨진 수번 2104가 거칠게 들썩였다.
"애송이 놈이 서울 물 좀 먹고 검사 껍데기 둘러썼다고 눈깔에 뵈는 게 없지? 남원 바닥에서 네놈 기저귀 차고 아장아장 기어 다닐 때부터 이 강태석이가 흙 파먹고 피 흘려 일군 땅이다. 어디서 감히 근본도 없는 잡놈들 주둥이에서 나온 헛소리를 엮어다가 현직 시장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려 들어?"
성재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금빛 닙과 캡 상단에 새겨진 한자 '成宰桓', 그리고 지유가 사준 흑청색 잉크로 채워진 그 펜촉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런 광채를 뿜어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성재환은 만년필을 조용히 메모 패드 옆에 내려놓은 뒤, 테이블 한쪽에 쌓여 있던 두툼한 서류 뭉치 중 맨 위에 놓인 붉은 표지의 수사 기록을 집어 들었다.
"피의자 강태석. 잡놈들의 헛소리라 하셨습니까."
재환의 낮은 목소리가 취조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그렇다면 그 잘난 남원의 흙을 파먹고 피를 흘렸다는 분께서, 어째서 자신이 만든 제방 밑바닥에 모래와 썩은 자갈을 처박아 수십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수장시킬 뻔했는지부터 설명해 보시지요."
2. 무너진 제방, 모래 콘크리트의 진실
타앙.
성재환이 붉은 표지의 두툼한 공문서철을 강태석의 코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먼지 냄새와 함께 종이 파편이 바르르 떨렸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진행된 남원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및 춘향 테마랜드 기반 조성 공사. 총사업비 180억 원 중 시비와 도비 40억 원이 증발했습니다."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환은 차분하게 만년필을 쥐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남원 제1건설과 유성골재. 유성골재 대표 조두식은 피의자의 처남 조상태의 사촌 동생이지요. 공사 시방서상 규격은 고장력 철근 D25, 콘크리트 압축강도 240kgf/㎠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투입된 철근은 기준치의 3분의 1에 불과한 저가 D13 철근이었고, 콘크리트는 세척도 하지 않은 염분 섞인 강모래와 건축 폐기물 분쇄 골재였습니다."
"그건 현장 소장 놈들이 자재비 후려쳐 먹으려고 장난질 친 거다!"
강태석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 큰 공사를 일일이 시멘트 포대 까면서 감시하냐? 관내 영세업자들 먹여 살리려고 일감 줬더니 밑바닥 놈들이 눈이 멀어 빼돌린 걸 가지고 왜 나한테 덮어씌워! 관리 감독 부실이라면 행정적 도의는 질 수 있어도, 횡령이니 부실공사 교사니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야!"
예상했던 꼬리 자르기였다.
그러나 성재환의 입가에는 싸늘한 비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재환은 두 번째 서류를 펼쳤다.
그것은 유성골재 경리주임 정미숙이 목숨을 걸고 장롱 밑에 숨겨두었던 2중 비밀 장부와 출하 전표 원본이었다.
"유성골재 경리 정미숙 주임의 친필 출하 일지입니다. 정품 레미콘 차량 10대분이 청구될 때마다, 실제로 배차된 차량은 불량 순환 골재 차량 3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액으로 발생한 14억 원은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조두식의 손을 거쳐 남원시장 관사 후문으로 현금 박스 채 전달되었습니다."
성재환은 전표 한 장을 손끝으로 짚었다.
거기에는 강태석의 비서실 직인이 찍힌 영수증과 함께, 강태석 본인이 휘갈겨 쓴 특유의 지렁이 같은 수결(手決)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관사 후문 경비 일지와 비서실 판공비 집행 내역을 전부 대조했습니다. 14억 원 중 6억 원은 피의자의 차명 계좌로 들어갔고, 나머지 8억 원은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2층 제7호 대여금고로 들어갔습니다. 피의자, 이 수결이 본인의 것이 아닙니까?"
강태석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비서실 놈들이 시장 도장 도용해서 장난친 거다. 관사에 드나든 돈 상자? 명절 떡값이고 지역 원로들 부조금이야! 시장 노릇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오가는 푼돈 몇 푼 가지고 사람을 도둑놈으로 몰아? 남원 시정(市政)을 이끌려면 관행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백 년 만에 쏟아진 300밀리미터 물폭탄에 둑이 터진 걸 가지고, 시멘트 몇 포대 덜 들어갔다고 천재지변을 인재로 둔갑시켜?"
강태석은 억지를 부리며 책상 위로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곤두섰다.
"남원 땅 지형도 모르는 서울 것들이 법전 쪼가리 몇 줄 달달 외워서 사람 잡네! 요천 둑은 원래 비만 오면 넘치던 곳이야! 내가 시장 돼서 그나마 둑 높이고 사람 살게 만들어 준 은혜도 모르고, 천재지변을 시장 탓으로 돌려?"
"천재지변이라."
성재환이 서류철을 덮었다.
묵직한 파열음이 취조실의 적막을 갈랐다.
"완월정 팽나무 밑동 바위 틈에 숨겨져 있던 부실 콘크리트 시편 국과수 감정 결과서입니다. 모래 함유량 78%, 압축강도 68kgf/㎠. 손으로 쥐어도 부서지는 두부 모래였습니다. 그 둑이 무너지면서 하정리와 동충동 저지대 상가 스물네 채가 물에 잠겼고, 여든 넘은 노인이 흙탕물에 휩쓸려 갈 뻔했습니다. 그게 천재지변입니까?"
성재환의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아닙니다. 그것은 피의자가 탐욕으로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 삼아 파놓은 합법의 학살 터였습니다."
3. 140억 원의 검은 저수지
강태석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수의 소매로 훔쳐내며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직 배후가 있었다.
서울 여당의 거물,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버티고 있는 한, 일개 평검사가 자신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
"말장난하지 마라, 성 검사. 흙탕물 좀 튄 것 가지고 학살 운운해? 네놈이 아무리 쥐어짜 봐야 토건 비리, 횡령, 직무유기야. 벌금 좀 때리고 집행유예로 끝날 일이야. 어디서 특수살인교사를 갖다 붙여?"
강태석이 비열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너, 나 못 넣어. 알잖아? 남원 바닥에서 나 하나 자빠지면 도청이고 내무부고 줄줄이 목이 날아갈 거물이 몇인 줄 알아? 서울에 계신 김문현 위원장님이 이 꼴을 가만히 보고 계실 것 같으냐? 감찰반이 괜히 내려왔던 줄 알아? 깝죽대지 마라. 네놈 칼끝이 닿기도 전에 네놈 법복부터 벗겨질 테니까!"
마침내 튀어나온 이름.
김문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성재환의 눈가에 서늘한 그림자가 스쳤다.
재환은 천천히 의자 뒤로 등을 기댔다가, 테이블 아래에서 묵직한 검은색 가죽 바인더 다섯 권을 꺼내 올렸다.
쿵.
묵직한 쇳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지리산 산내면 부운리 버섯 재배사 지하 밀실, 독일제 바우어 특수 방화 금고 안에서 꺼내온 140억 원대 비자금 원천 장부였다.
강태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간에 싹 가셨다.
"저…… 저건……."
강태석의 턱뼈가 딱딱 부딪히며 떨려왔다.
그 장부의 가죽 표지 모서리에는 특유의 금박 낙관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자신과 황선태, 그리고 죽은 금고 관리인만이 알고 있어야 할 절대적인 판도라의 상자였다.
"지리산 부운리 뱀사골 비밀 별장. 보일러실 뒤편 유압식 리프트 지하 특수 금고에서 압수한 '남원 특별 대외관리 원부' 전권입니다."
성재환은 첫 번째 바인더를 펼쳤다.
"피의자가 지난 6년간 남원 관내 도로, 하천, 수변공원, 아파트 인허가 관급 공사에서 횡령한 비자금 총액 142억 8천만 원. 그리고 그 자금이 쪼개져 흘러 들어간 차명 계좌 열두 개."
성재환의 손길이 거침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남원시청 간부들에게 뿌려진 뇌물 18억 원. 남원경찰서 수뇌부에 살포된 수사 무마비 6억 원. 전주지검과 남원지원 하위직 협조자들에게 건너간 4억 원. 그리고……."
재환이 바인더의 맨 마지막 장을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로 전달된 1억 원권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 스무 장. 총 20억 원."
강태석의 숨통이 틀어막혔다.
목구멍에서 꺽꺽거리는 파열음만이 새어 나왔다.
"네놈이…… 네놈이 그걸 어떻게…… 황선태 그 새끼가……!"
"황선태 국장은 살아 있습니다."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피의자가 15톤 덤프트럭을 보내 대가리를 깨부수고 입을 찢어 영구히 매장하려 했던 황선태 국장은, 지금 남원의료원에서 의식을 되찾고 검찰의 특별 증인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직접 넘겨준 마스터키로 금고를 열었습니다."
성재환은 가죽 바인더 옆에 작은 디지털 USB 메모리와 오디오 테이프 하나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금고 안 벨벳 상자에 이것도 함께 들어 있더군요. 피의자가 서울 혜화동 한옥 요정 청운각에서 김문현 의원에게 20억 원을 건네며 나눈 대화 녹음 파일, 그리고 스위스 은행 차명 계좌 내역서. 피의자는 김문현을 자신의 뒷배라고 믿고 있었겠지만, 피의자 역시 유사시를 대비해 김문현의 목줄을 쥘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두지 않았습니까?"
강태석의 동공이 사정없이 팽창했다.
자신이 숨겨둔 가장 치명적인 무기이자, 동시에 자신을 단두대로 보낼 독약이 고스란히 적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성재환의 눈빛은 북극의 빙하처럼 차가웠다.
"피의자가 믿고 있는 그 김문현 의원은 말입니다. 오늘 아침 8시를 기해 대검 중수부에 의해 출국금지 조치되었고, 국회 체포동의안이 법무부에 상신되었습니다. 김문현 의원실에서는 방금 전 언론에 공식 성명을 냈더군요. '남원시장 강태석의 일방적인 뇌물 공여 주장은 파렴치한 날조이며, 본 의원은 토건 조폭 출신 지방자치단체장의 비리를 결코 비호한 적이 없다.'"
성재환의 입술 끝이 서늘하게 비틀렸다.
"버려진 겁니다, 강태석 씨. 당신의 그 잘난 뒷배에게서 완벽하게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4. 테이프가 토해낸 비명
"크으으윽……!"
강태석의 목구멍에서 짐승의 단말마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쇠 책상을 긁어댔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축적해 온 140억 원의 돈과 권력, 그리고 중앙의 거물들까지 모두 신기루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재환의 심문은 이제 겨우 서막을 지났을 뿐이었다.
재환의 손이 서류 가방 안쪽에서 또 다른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어제 심야, 17번 국도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납치범들의 자백이 담긴 테이프였다.
성재환은 테이블 위 녹음기 옆에 놓인 재생용 카세트 데크에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철컥.
버튼을 누르자, 거친 노이즈와 함께 한 사내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장님이…… 교도관 통해서 지령을 내렸습니다……! 김밥집 가시나 한지유를 보쌈해 오라고……! 지리산 장부 뺏긴 거 그거랑 맞바꾸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가시나 모가지에 칼 대고 협박해서 성재환 검사한테 장부 가져오라고 시키랬습니다……! 만약 불응하면, 가시나 목 따서 뱀사골 계곡에 암매장하라고…… 분명히 조상태 대표 입으로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지직거리며 울리는 음성은 명백한 우두머리 해결사의 육성이었다.
이어 또 다른 음성이 이어졌다.
남원지청 조사실에 구금된 조상태의 자백이었다.
'──매형이…… 매형 강태석이가 시켰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비밀 무선전화로 나한테 직접 전화해서…… 황선태 덤프트럭으로 밀어버린 것처럼 지유 그 기집애도 흔적도 없이 갈아버리라고……! 난 시키는 대로 사람만 붙였을 뿐입니다, 검사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철컥.
성재환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취조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강태석의 얼굴은 이제 잿빛을 넘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피의자 강태석."
재환의 음성이 한 옥타브 낮게 가라앉았다.
그 목소리 밑바닥에는 억누를 수 없는 살기와 슬픔, 그리고 사법관으로서의 서슬 퍼런 징벌 의지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형법 제250조 살인, 제31조 교사.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특수약취유인교사. 황선태 국장에 대한 살인미수 교사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이자 사건의 핵심 참고인인 한지유에 대한 조직적 납치 및 살해 교사 혐의."
성재환이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강태석의 떨리는 동공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피의자는 전주교도소 보안과 교도관 이진택을 매수해 불법 무선전화를 반입했고, 그 전화로 1996년 8월 23일 오후 2시 14분과 오후 5시 40분, 두 차례에 걸쳐 처남 조상태에게 한지유의 납치와 살해를 직접 지시했습니다. 교도관 이진택의 비밀 통화 일지와 한국통신 기지국 통화 내역이 1초의 오차도 없이 일치합니다."
성재환은 주머니에서 투명 비닐 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안에는 피 묻은 자신의 학생증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납치범들에게 짓밟히고 찢기면서도 지유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흑청색 잉크로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라고 적힌 7년 전의 사진.
사진 모서리에 말라붙은 지유의 붉은 선혈이 형광등 불빛 아래 처연하게 반짝였다.
강태석의 시선이 그 핏자국에 닿았다.
성재환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잔혹할 만큼 침착했다.
"어린아이의 목에 회칼을 들이대고, 흙바닥에 패대기쳐 피를 흘리게 만들며, 그 대가로 자신의 썩은 목숨을 연명하려 했던 자. 피의자, 이것이 당신이 말하던 '남원을 지켜온 힘'입니까?"
5. 30년 전의 악연, 성호석의 그림자
코너에 몰린 맹수는 마침내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다.
모든 증거가 완벽하게 목을 조여오고, 도망칠 구멍이 단 한 뼘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강태석의 눈빛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절망이 극에 달하자, 공포는 추악한 악의로 변질되었다.
"으…… 으하하하……!"
강태석이 별안간 고개를 젖히며 광기 어린 폭소를 터뜨렸다.
취조실 벽을 울리는 거친 웃음소리 끝에, 그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성재환을 노려보았다.
"정의? 사법 단죄? 꼴같잖은 소리 집어치워라, 성재환이! 네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는 거냐?"
강태석이 수갑 찬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쇠 테이블을 사납게 내리쳤다.
콰앙!
"네 아비 성호석이가 어떤 인간인 줄이나 알고 지껄여? 30년 전, 아니 1990년대 초 환지 사업 때 네 애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놈이 알기나 해?"
강태석의 침이 튀었다.
그의 비열한 입술이 성재환의 가장 깊은 상처를 향해 독니를 뻗었다.
"삼거리 김밥집 한석규! 그 과수원 부지를 공공용지로 강제 수용하고 길바닥으로 내쫓은 서류에 제일 먼저 도장 찍은 게 누구인 줄 아냐? 바로 네 애비 성호석이야! 군수 결재란에 떡하니 찍힌 붉은 인주, 그게 네 애비 손으로 찍은 거야!"
성재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강태석은 그 침묵을 동요로 착각했는지, 더욱 신이 난 듯 비열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계집애, 한지유가 왜 그 지경이 됐는데? 왜 애미는 신부전증으로 피를 토하고 죽고, 딸년은 대학도 못 가고 김밥이나 말면서 시궁창을 굴렀는데? 다 네 애비 성호석이 그 탐욕스러운 영감탱이가 권력에 눈이 멀어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야! 나와 삼거리 토건이 칼을 쥐었다면, 그 칼자루를 쥐여주고 등을 떠민 건 네 애비 성호석이었다고!"
강태석은 조롱하듯 낄낄거렸다.
"그런데 네놈이 감히 법복을 입고 내 앞에 앉아? 네 애비 죄는 덮어두고, 그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주제에 나만 잡으면 네가 정의로운 검사가 될 것 같으냐? 한지유 그 불쌍한 계집애가 네 애비가 지 집안을 도륙 낸 원수의 아가리라는 걸 알면, 네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나 있을 것 같아? 네놈은 정의를 세우는 검사가 아니야! 애비 죄를 덮으려고 날 제물로 삼으려는 위선자 새끼일 뿐이지!"
강태석의 폭언이 좁은 취조실을 가득 메웠다.
그는 성재환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아비의 이름 앞에서 젊은 검사가 평정심을 잃고 격분하여 폭력을 휘두르거나, 심문 절차를 망쳐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만이 이 취조실의 주도권을 빼앗아 올 마지막 밧줄이었다.
그러나.
성재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연민과 절대적인 확신만이 고여 있었다.
재환은 조용히 손을 뻗어, 테이블 맨 구석에 놓여 있던 누렇게 바랜 서류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탁.
서류철이 펼쳐졌다.
그것은 1989년 남원군수 성호석이 직접 작성했던 극비 친필 내사 보고서, 그리고 당시 국회 내무위원 김문현이 성호석에게 보냈던 피 묻은 협박장이었다.
강태석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이…… 이건……."
6. 진실의 무게, 무너진 괴물
"1989년 11월 14일."
성재환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그 울림은 강태석의 고막을 찢을 듯 육중했다.
"당시 남원군수였던 제 아버지는, 피의자 강태석이 군청 지적계장과 결탁해 한석규 씨의 과수원을 불법 강탈하려던 정황을 적발하고 특별 구속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이 서류가 바로 아버지가 직접 작성한 내사 보고서 원본입니다."
성재환은 서류를 강태석의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성호석의 강직한 필체로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불법 환지 사기 혐의에 대한 엄단 건의'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수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재환이 그 옆의 협박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1989년 김문현 의원이 성호석에게 보낸 편지가 붙어 있었다.
'군수 성호석 귀하. 남원중학교에 다니는 외아들 성재환의 하굣길 요천 둑길은 덤프트럭이 자주 다니는 위험한 곳이다. 자식의 목숨을 아끼려거든 강태석에 대한 내사를 당장 중단하고 조용히 덮어라.'
강태석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비겁했습니다."
성재환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곧 거대한 바위 같은 단호함으로 굳어졌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불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당신들의 협박에 굴복해 남원에서 쫓겨나듯 중앙의 허울 좋은 자리로 유폐되었습니다. 평생을 그 죄책감과 오욕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네, 제 아버지는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공직자로서 권력에 굴복하고 진실을 외면했던 그 죗값을,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서 만천하에 고백하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성재환의 손가락이 독일제 각인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그 만년필 끝이 강태석의 심장을 겨누듯 똑바로 향했다.
"하지만 강태석 씨. 아들의 목숨을 위협해 공권력을 무릎 꿇리고, 남의 피땀 어린 땅을 강탈해 30년간 시장 노릇을 해 먹으며, 마침내 그 억울한 유족의 목숨까지 앗아가려 했던 당신의 죄악은…… 아비의 굴복 뒤에 숨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재환은 테이블 위에 놓인 피의자 신문조서 맨 앞장을 넘겼다.
그리고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채워진 만년필로 강태석의 혐의 사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만년필 닙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숫돌에 갈리는 소리처럼 취조실을 울렸다.
"피의자 강태석.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횡령, 배임, 직권남용,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수살인교사, 특수약취유인교사. 이 조서에 적힌 모든 혐의에 대해, 자백하시겠습니까?"
강태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가 30년간 쌓아 올렸던 거대한 악의 성채는, 일개 여학생이 1원의 오차도 없이 지켜낸 가계부와, 청년 검사가 2561일간 갈고닦아 온 법리의 칼날 앞에서 완벽하게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피거품 섞인 체념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끝났어…… 다 끝났어……."
강태석의 고개가 꺾이듯 가슴팍의 수번 2104 위로 떨어졌다.
맹수는 죽었다.
그 자리에는 오직 사법의 지엄한 심판을 기다리는 늙고 추악한 죄인 한 명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7. 204호의 문이 열리고
성재환은 완성된 피의자 신문조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조서 끝자락, 피의자 서명 날인 란 앞에 인주와 함께 만년필을 밀어 놓았다.
넋이 나간 채 덜덜 떨리는 강태석의 손가락이 붉은 인주를 묻혀 조서 곳곳에 지장을 찍었다.
피처럼 붉은 지장이 찍힐 때마다, 30년간 남원을 짓누르던 어둠의 사슬이 하나씩 끊겨 나갔다.
성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카세트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탁.
"1996년 8월 24일 오후 1시 15분.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제1회 피의자 신문 조사를 종료합니다."
성재환은 법복을 단정하게 여민 뒤,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철저하게 정리해 가죽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지유의 피가 묻은 학생증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내 자신의 법복 안주머니,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품었다.
재환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철제 의자에 처박혀 있던 강태석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날 죽일 셈이냐, 성재환이……? 사형…… 사형을 구형할 거냐고……."
성재환은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남원의 모든 산천을 뒤흔들 만큼 서늘했다.
"내가 구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짓밟은 남원의 흙과, 당신이 흘리게 한 무고한 이들의 피가 법의 이름으로 당신을 심판할 것입니다."
철컥.
굳게 닫혀 있던 204호 취조실의 육중한 철문이 활짝 열렸다.
복도 가득 눈부신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밖에서 긴장 속에 대기하고 있던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 그리고 안진우 검사가 일제히 성재환을 향해 돌아섰다.
성재환은 품에서 완성된 피의자 신문조서와 구속영장 청구서를 강태훈 수사관에게 건넸다.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조사를 마쳤습니다. 전주교도소 미결수 독방으로 즉시 재압송하고, 법원에 특수살인교사 추가 구속영장을 접수하십시오."
"예, 주임검사님!"
수사관들이 경례를 붙이며 취조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때, 본관 계단 아래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남원지청 당직 수사관 하나가 손에 두툼한 서류 팩스 뭉치를 든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성 검사님! 성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아니, 큰일이 아니라……!"
성재환이 멈춰 서서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수사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팩스 문건을 내밀었다.
"방금 전부터 지청 1층 민원실에 남원 관내 건설업체 대표들과 구도심 상인 번영회 간부들이 줄을 지어 몰려들고 있습니다! 포목점 오 회장부터 시작해서 남원 제1건설 하도급 사장들까지, 전부 다요!"
성재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들이 왜 몰려옵니까?"
수사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자수하겠답니다! 강태석 시장에게 상납했던 뇌물 장부와 공사 입찰 담합 이면계약서 원본들을 들고 와서…… 자기들은 강태석의 협박에 못 이겨 돈을 줬을 뿐이라며, 처벌을 감면받으려고 자진해서 비리 증거를 제출하겠다고 청사 로비에 무릎을 꿇고 줄을 서 있습니다!"
남원을 지배하던 토착 권력의 거두 강태석이 무너지자, 그에게 기생하던 지역의 토착 유지들이 살아남기 위해 앞다투어 주인을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광경을 전해 들은 성재환의 눈빛에 차가운 결기가 어렸다.
마침내, 남원의 부패 카르텔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며 자멸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