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이별 통보
1. 새벽의 적막과 호출
동이 트기 전의 남원(南原) 시내는 차가운 물안개에 잠겨 있었다.
요천(蓼川) 수면 위로 피어오른 희뿌연 안개는 강둑을 넘어 시내 외곽의 시장 관사 붉은 벽돌담을 은밀하게 휘감았다.
2층 방 창틀에 기댄 성재환은 밤새 단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만년필과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흑청색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유리병은 마치 지유의 맑은 눈동자처럼 고요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었던 아버지 성호석(成浩錫)과 토건업자 강태석의 은밀한 거래, 1991년 토지 구획 정리 당시 벌어진 환지 비리의 추악한 진실들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소용돌이쳤다.
만년필에 채워진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 적었던 아버지의 비리 일지 노트는 교복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접혀 들어가 있었다.
심장 부근을 묵직하게 누르는 종이의 감촉은 죄책감이자 동시에 부패한 권력을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서슬 퍼런 맹세의 무게였다.
덜컥.
방문이 예고도 없이 거칠게 열렸다.
문턱에 선 인물은 남원시청 비서실장이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구김 하나 없는 감색 양복 차림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쫓기는 자 특유의 서늘한 긴장감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 계셨습니까."
재환은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직 학교 갈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시장님께서 아래층 서재에서 부르십니다. 즉시 채비를 마치고 내려오시랍니다."
"아버지가요?"
"예. 서울로 올라갈 짐은 제가 이미 기사들과 함께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도련님 개인 소지품만 챙겨서 속히 내려오십시오."
재환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서울로 올라갈 짐이라니? 다음 주 초가 아니었단 말인가?'
재환이 천천히 몸을 돌려 비서실장을 쏘아보았다.
"분명 다음 주라고 들었습니다. 왜 벌써 짐을 쌉니까?"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중앙의 정무라인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내무부 장관의 직인이 찍힌 영전 발령이 오늘 오전 관보에 게재됩니다. 기자들이나 감사반이 관사로 들이닥치기 전에, 해가 완전히 뜨기 전 남원을 떠나셔야 합니다."
비서실장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이미 성호석 시장의 완벽한 수족이자 냉혹한 집행관이었다.
재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깊게 박혀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다.
학교도, 친구들도, 그리고 어제 비 내리는 김밥집 처마 밑에서 손을 맞잡았던 지유에게조차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했다.
'어떤 비가 와도 내가 너를 지키는 처마가 되어줄게.'
어제 오후 지유의 작은 손을 쥐며 속삭였던 자신의 맹세가 귓가에서 찢어지는 비명처럼 맴돌았다.
"비서실장님. 잠깐이면 됩니다. 학교에 들러 교무실에 사물함이라도 비우고 오겠습니다. 딱 한 시간만 시간을 주십시오."
비서실장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장님의 엄명이셨습니다. 도련님의 외부 접촉은 전면 차단입니다. 특히 시내 쪽으로는 발걸음 하나도 딛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실장님!"
"내려가시지요. 시장님이 기다리십니다."
비서실장은 방문 옆으로 비켜서며 손짓했다.
복도에는 이미 건장한 체격의 시청 청원경찰 두 명이 차출되어 계단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완벽한 감금이자 강제 이송이었다.
재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책상 위의 만년필과 잉크병을 집어 들었다.
가방 깊숙이 그것들을 찔러 넣고 지퍼를 채웠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갈비뼈를 부술 듯 요동쳤다.
지금 이 문을 나서면, 지유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잔인한 예감이 가슴을 후벼 팠다.
2. 비정(非情)의 권력관
1층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짙은 시가 연기와 묵직한 서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호석 시장은 널찍한 오크 목재 책상 뒤에 서서 창밖의 짙은 안개를 응시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다려진 고급 모직 정장에 넥타이를 단단히 조여 맨 그의 뒷모습은 지방 소도시의 수장이 아니라 이미 중앙 권력의 중심부에 안착한 거물 정객의 서슬 퍼런 기세를 풍겼다.
탁자 위에는 서류 가방과 함께 결재가 끝난 서류 뭉치들이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왔느냐."
성호석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형형했고,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혈육에 대한 정보다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재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작별 인사도, 학교 전학 절차도 없이 이렇게 야반도주하듯 떠나는 게 시장님의 방식입니까?"
성호석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야반도주라니. 말을 삼가라.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겸 중앙 정무비서관실 차출이다. 국가가 나를 부른 것이고, 가문의 영광이다."
"도망치시는 거 아닙니까! 내무부 감사반이 내려오고, 10년 전 한석규 아저씨의 과수원을 빼앗아 강태석에게 넘긴 그 환지 비리가 터질까 봐 중앙 정무라인에 줄을 대서 도망치는 거잖아요!"
재환의 일갈이 서재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
서재 문가에 서 있던 비서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호석은 천천히 걸어 나와 재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키는 재환보다 컸고, 그가 내뿜는 권력의 위압감은 방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성호석은 손을 들어 재환의 교복 깃을 거칠게 바로잡았다.
"한석규? 강태석? 네놈이 어쭙잖은 정의감에 취해 지껄이는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성호석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았지만, 얼음송곳처럼 차가웠다.
"이 남원은, 아니 이 지방의 바닥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 무지몽매한 농민들과 제 잇속만 챙기려는 토착 토건 놈들이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곳이다. 법과 원칙? 핫소리 마라. 이 남원의 썩은 물속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함께 썩어 문드러질 뿐이야."
"그 썩은 물을 만든 게 바로 아버지와 강태석 같은 자들입니다! 남의 땅을 빼앗고, 공문서를 조작하고, 사람을 화병으로 죽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십니까!"
짝!
서재 안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재환의 고개가 왼쪽으로 매섭게 꺾였다.
뺨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성호석은 때린 손을 거두지도 않은 채 서슬 퍼런 눈으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
성호석이 또박또박 씹어 뱉듯 말했다.
"그 썩은 진흙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울부짖어 봐야 짓밟히는 개미 신세를 면치 못해. 세상을 바꾸고 통제하는 것은 바닥의 정의 따위가 아니다. 오직 중앙의 막강한 사법과 행정 권력을 손에 쥐어야만 비로소 세상을 통제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추악한 지배욕일 뿐입니다."
재환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터진 입술을 닦으며 아버지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뺨을 맞은 고통보다, 아버지라는 자가 품은 괴물 같은 신념에 대한 경멸이 더 컸다.
성호석은 잠시 아들의 눈을 응시하더니 차가운 비소를 흘렸다.
"네가 그렇게 법을 숭상한다면, 좋다. 서울로 가라. 서울 성북동 사저로 들어가 대치동에서 공부해라.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패스해라. 검사가 되든 판사가 되든, 그 막강한 칼자루를 손에 쥐어라. 그 힘을 갖기 전까지는 네놈이 지껄이는 모든 말이 하찮은 유충의 잠꼬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저는 아버지처럼 비겁하게 힘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짓밟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버지의 죄를 심판하는 진짜 법을 세울 겁니다."
"헛소리는 서울 가는 차 안에서나 곱씹어라. 비서실장, 차 대기시켜라. 즉시 출발한다."
성호석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외투를 집어 들고 서재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재환은 주먹을 쥐고 피 맛을 삼켰다.
부친의 냉혹한 뒷모습을 보며, 재환은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힘이 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저 괴물의 말이, 이 잔인한 현실에서는 뼈아픈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억울하게 죽어간 지유의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서울이라는 거대한 시험대에서 살아남아 부친의 권력을 능가하는 진짜 칼자루를 쥐어야만 했다.
3. 닫힌 철문과 마지막 시선
관사 현관 앞에는 검은색 고급 관용 세단이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배기가스가 새벽의 차가운 물안개와 뒤섞여 자욱한 연기를 뿜어냈다.
트렁크는 이미 육중한 여행 가방들로 가득 차 굳게 닫혀 있었다.
비서실장이 뒷좌석 문을 열고 재환을 재촉했다.
"도련님, 타십시오."
재환은 멈춰 서서 관사 높은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 요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달려가면 동문 우체국이 나오고, 그 골목길 안쪽에 불을 밝히기 시작할 삼거리 김밥집이 있었다.
지유는 지금쯤 일어났을까.
어머니를 도와 김밥에 들어갈 우엉을 조리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을 시간이었다.
'지유야.'
가슴이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려왔다.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이렇게 끌려가듯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도련님, 시간 없습니다."
비서실장의 손이 재환의 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재환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마세요. 내 발로 탑니다."
재환은 차 뒷좌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곧이어 성호석 시장이 조수석에 올라탔고, 비서실장이 뒷좌석 재환의 옆자리에 앉아 문을 쾅 닫았다.
찰칵, 하고 중앙 집중식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차 안을 무겁게 울렸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관사 철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경비실의 청원경찰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올렸다.
관용차는 붉은 벽돌담을 빠져나와 텅 빈 도로로 미끄러져 나갔다.
안개 속에서 차창 밖으로 익숙한 남원의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요천의 수양버들과 벚꽃 잎이 떨어진 둑길이 보였다.
지유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노을을 바라보던 그 길이었다.
'재환아, 나는 이 남원이 참 좋아. 아버지가 남겨주신 기억이 여기 다 있으니까.'
맑게 웃으며 바람에 머리칼을 흩날리던 지유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재환은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주먹을 쥐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조수석 백미러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눈물을 삼켰다.
울지 않을 것이다.
무력하게 눈물 따위를 흘리며 떠나지 않을 것이다.
관용차는 시내를 관통하지 않고 남원IC를 향해 외곽 국도로 우회했다.
지유의 김밥집과 학교가 있는 읍내 중심가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재환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광한루원의 팽나무 꼭대기를 응시하며 가슴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지유의 이름을 불렀다.
'기다려줘, 지유야.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차는 미끄러지듯 고속도로 진입로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4. 텅 빈 교실의 침묵
아침 7시 40분, 남원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맑은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길게 들이치고 있었지만, 교실 뒤편 성재환의 자리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가방도, 교과서도 없는 깨끗한 책상 위로 먼지만이 햇빛을 받아 부유하고 있었다.
최민재는 가방을 둘러맨 채 굳은 표정으로 재환의 빈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야, 성재환 왜 안 오냐? 오늘 아침 독서 시간인데, 걔가 지각할 놈이 아닌데."
옆 분단의 친구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민재는 입술을 짓씹었다.
불길한 예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제 방과 후, 삼거리 김밥집 앞에서 시청 관용차가 들이닥쳐 재환을 강제로 태워갔던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르륵.
앞문이 열리고 담임교사가 굳은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출석부 외에도 두툼한 서류철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담임은 교탁 앞에 서서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재환의 빈자리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조용히 해라. 조례 시작한다."
어수선하던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출석부를 펼치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릴 사항이 하나 있다. 성재환 학생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늘 자로 서울로 전학 처리가 되었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전학이요? 갑자기요?"
"어디로 가는데요, 선생님? 어제까지 멀쩡히 학교 다녔는데!"
아이들의 술렁이는 질문 속에서 민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요란한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선생님! 재환이가 전학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환이가 직접 와서 말한 겁니까?"
담임은 민재의 격앙된 반응을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민재, 앉아라."
"대답해 주십시오! 어제까지 축제 부스 준비하던 놈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전학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담임은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시장 관사에서 아침 일찍 시청 비서실 직원이 직접 와서 전출 서류를 접수하고 갔다. 부친의 중앙 부처 발령에 따른 가족 전체의 거주지 이전이다. 행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본인 의사나 내 권한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족 이전이라도 당사자가 와서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민재야, 그만해라. 이미 오늘 새벽에 서울로 출발했다고 들었다."
'새벽에 출발했다.'
담임의 그 한마디가 민재의 가슴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재환이는 쫓겨난 것이다.
어제 관사로 끌려가던 녀석의 절망 어린 눈빛, 그리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어둠.
민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책상에 놓인 가방을 낚아챘다.
"야, 최민재! 너 어디 가! 앉아!"
담임의 고함이 등 뒤에서 터져 나왔지만, 민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뒷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교문을 향해 질주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가장 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한 사람, 지유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5. 깨어진 빗발과 달리는 발걸음
같은 시각, 남원여자고등학교 앞 동문 우체국 골목길.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삼거리 김밥집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게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
한지유는 앞치마를 두른 채 도마 위에서 당근을 썰고 있었다.
칼질 소리가 일정하지 않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비를 피하며 자신에게 다정하게 손을 쥐어주던 재환의 온기.
그리고 그 평화를 산산조각 내며 가게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왔던 검은 양복의 시청 비서실장.
'도련님, 시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당장 관사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재환의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과, 끌려가듯 차에 오르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애처로운 눈빛이 밤새 지유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지유야, 손 베일라. 그만두고 가방 챙겨서 학교 가거라."
주방 안쪽에서 계란지단을 부치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짙은 불안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 들이닥친 사내들이 남원시장의 비서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재환이 바로 그 시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평생 잊지 못할 불길한 과거의 기억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나 괜찮아. 이것만 마저 썰고 갈게."
지유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칼질을 이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쿵쾅쿵쾅!
골목 저편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김밥집 유리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하악, 하악... 지유야!"
교복 차림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최민재였다.
민재의 교복 셔츠는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지유는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민재야? 네가 여길 왜... 학교는 어쩌고?"
민재는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때마침 지유를 데리러 김밥집 골목으로 들어서던 윤하은도 활짝 열린 문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민재야! 너 왜 남고에 안 있고 여기까지 뛰어왔어? 무슨 일인데 그래?"
민재는 고개를 들어 지유를 바라보았다.
그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담긴 절망과 슬픔을 본 순간, 지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환이가..."
민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재환이가 서울로 갔어."
"...뭐?"
지유의 손에서 칼이 툭 떨어져 도마 위에 굴렀다.
맑은 탁음이 좁은 주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침에 학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그러더라. 재환이 오늘 자로 서울로 전학 처리됐다고. 아침 일찍 시청 직원이 와서 서류 내고 갔대. 이미 새벽에... 서울로 떠났다고..."
민재의 목소리가 울분에 겨워 갈라졌다.
"거짓말이지?"
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거짓말이지, 민재야? 어제... 어제 분명 나한테... 비가 그치면 같이 축제 그림 완성하자고 했는데... 만년필 잉크도 채워 넣었다고 했는데..."
"거짓말 아니야, 지유야! 나도 믿기 싫어서 교무실 뛰쳐나와서 관사로 가봤는데...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경비 보던 아저씨가 시장님 차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지유의 귓가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멍하니 서 있던 지유는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지유야!"
어머니의 외침도, 하은이의 다급한 손길도 지유를 붙잡지 못했다.
지유는 미친 사람처럼 가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지유야! 어디 가!"
민재와 하은이 그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6. 닿지 못한 추격과 찢겨진 무릎
남원 시내의 아침 거리는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길 시민들로 붐비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유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만 보고 달렸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헐떡거렸고, 폐포마다 찬 공기가 들이닥쳐 피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재환아, 왜? 왜 말도 없이 가? 내가 널 어떻게 기다리라고...'
지유는 요천 둑길을 가로질러 시내 외곽의 남원 시장 관사로 내달렸다.
봄바람에 실려 온 벚꽃 잎들이 지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향기조차 칼날처럼 아팠다.
마침내 시야에 관사의 육중한 붉은 벽돌담과 철문이 들어왔다.
철문 앞에는 시청 마크가 찍힌 청원경찰이 완장을 차고 서성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지유가 비틀거리며 철문 앞으로 달려들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철창을 붙잡는 지유를 보고 청원경찰이 깜짝 놀라 막아섰다.
"학생, 여긴 민간인이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야! 왜 이래?"
"재환이... 성재환 학생 안에 있나요?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지유의 절규에 청원경찰은 혀를 차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 시장님 댁 도련님 말이냐? 여긴 없어. 벌써 한 시간도 더 전에 시장님 모시고 서울로 출발했다."
"서울이요? 어디로요? 어느 길로 갔는데요?"
"고속도로 타고 서울 올라갔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이미 남원 톨게이트 빠져나갔을 시간이다. 헛걸음 말고 학교나 가라, 학생."
청원경찰이 지유의 손을 철창에서 떼어내며 밀쳐냈다.
지유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남원 톨게이트... 고속도로...'
고속도로 진입로 쪽 외곽 도로가 머릿속을 스쳤다.
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유야! 한지유! 멈춰!"
뒤늦게 쫓아온 민재와 하은이 저 멀리서 지유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저 도로 끝을 지나가는 검은 차를 잡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절박함뿐이었다.
언덕길은 가팔랐고, 바닥에는 자갈과 아스팔트 부스러기가 널려 있었다.
다리가 풀려 후들거렸지만 지유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달리며 외쳤다.
"재환아! 재환아!"
그 순간, 언덕 너머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진입로 쪽에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지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재환아!"
지유가 손을 뻗으며 도롯가를 향해 내달렸다.
쿵!
발을 헛디딘 지유의 몸이 거칠게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거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몸이 쓸려 내려갔다.
스타킹이 처참하게 찢어지며 무릎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손바닥도 짓이겨져 모래와 피가 범벅이 되었다.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마비시켰지만, 지유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고속도로 진입로를 바라보았다.
검은 차는 이미 인터체인지의 곡선을 타고 넘어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피를 흘려도, 그 차는 멈추지 않았다.
"지유야!"
뒤따라온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지유의 곁으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너 미쳤어? 무릎이 이게 뭐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어떡해!"
하은이 울음을 터뜨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피투성이 무릎을 눌렀다.
민재 역시 헐떡이며 지유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어져 간 도로 끝을 바라보는 민재의 두 눈에서도 분통 터지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유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도로 끝을 응시했다.
무릎에서 흐르는 피가 아스팔트를 검붉게 적시고 있었다.
"갔어..."
지유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하고... 진짜로 가버렸어..."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지유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봄날의 찬란한 아침 햇살 아래,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은 그렇게 잔인하고 무력하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7. 팽나무 아래 남겨진 온기
오후가 되자 남원 시내에는 봄을 시샘하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지유는 양 무릎에 두꺼운 붕대를 감은 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광한루원(廣寒樓苑) 춘향관 뒤란으로 향했다.
하은과 민재가 부축하려 했지만, 지유는 혼자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친구들은 말없이 지유의 몇 걸음 뒤를 따르며 묵묵히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수백 년 묵은 팽나무 고목은 여전히 웅장한 가지를 드리운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벚꽃 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재환과 처음으로 마주 앉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자리였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거친 팽나무 등걸을 어루만졌다.
나무의 차가운 껍질 속에서 재환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하얀 면 손수건에 싸인 낡은 흑청색 잉크 뚜껑이 만져졌다.
재환의 만년필에 가득 채워주었던 그 깊고 푸른 잉크.
'성재환.'
각인 만년필에 새겨져 있던 그의 이름과, 그 옆에 새겨져 있던 라틴어 문장.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법언을 말할 때 재환의 눈빛은 한없이 슬프면서도 단단했었다.
왜 재환은 그토록 무거운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왜 자신의 어머니가 끓여준 계란찜을 보며 목이 메어 울컥했던 것일까.
지유는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재환의 떠남은 단순한 변심이나 이별이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는 가문의 거대한 굴레와 억압 속에서, 그 역시 처절하게 찢겨 나가며 끌려간 것이리라.
민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지유의 곁에 섰다.
"지유야. 내가... 내가 남원에 남는다고 했잖아."
민재의 목소리는 굳건했다.
비록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재환이가 나한테 그랬어. 자기는 남원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반드시 억울한 사람들을 지키는 법을 세워서 돌아올 거라고. 그 자식이 너한테 거짓말할 놈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지유는 고개를 들어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 말이 맞아, 지유야."
하은이도 지유의 손을 꼭 쥐며 거들었다.
"그 녀석 눈빛, 널 보던 눈빛은 진짜였어. 지금은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억지로 끌려갔지만, 성재환 걔는 반드시 너한테 돌아와."
바람이 팽나무 가지를 흔들며 잎사귀들을 파르르 떨게 했다.
지유는 눈물을 훔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절망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재환은 도망친 것이 아니다.
어제 그 비 내리던 처마 밑에서, 자신의 손을 잡으며 평생의 처마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던 그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재환아.'
지유는 팽나무 너머 요천의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여기서 도망치지 않고 기다릴게. 엄마의 김밥집을 지키고, 그림을 그리고, 네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
소녀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슬픔의 눈물은 어느덧 단단한 기다림의 결의로 변해가고 있었다.
8. 질주하는 고속도로와 맹세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서울 톨게이트를 향해 질주하는 관용차 내부는 무덤처럼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남도의 들판은 이미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빌딩 숲이 흉물스러운 회색빛을 뿜어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성호석은 시종일관 손에 쥔 서류철을 넘기며 중앙 정계의 인맥과 내무부 조직도를 훑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지방의 작은 영주에서 중앙 정계의 실세로 도약한다는 야심 찬 확신이 가득했다.
뒷좌석 구석에 앉은 재환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지나가는 표지판들을 바라보았다.
'판교, 양재, 서울.'
거리는 점점 남원과 멀어지고 있었다.
재환은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으로 쥐었다.
차가운 옻칠의 감촉 너머로 지유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
아침에 아버지가 서재에서 뱉어냈던 그 잔인한 말이 귓가에 쟁쟁거렸다.
맞다.
아버지가 지배하던 남원의 권력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썩은 권력의 정점에는 아버지가, 그리고 강태석 같은 부패한 무리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힘이 없이는 그 어떤 정의도 세울 수 없다.
힘이 없이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켜낼 수 없다.
재환은 품속의 일지 노트를 더 세게 쥐었다.
그 안에는 아버지와 강태석이 결탁해 빼앗은 땅의 목록과 조작된 환지 측량 대장의 기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 당신이 말한 그 힘을 제가 갖겠습니다.'
재환의 눈빛에서 소년의 나약함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서슬 퍼런 검사의 칼날 같은 냉혹함과 단단한 신념이 차올랐다.
'서울대 법대로 가겠습니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날카롭고 무자비한 법의 칼을 손에 쥐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지유가 있는 남원으로.
아버지가 더럽힌 그 땅을 가장 순수한 정의로 심판하고, 지유의 아버지 한석규의 빼앗긴 이름을 되찾아주기 위해.
관용차는 마침내 한남대교를 넘어 회색빛 서울의 거대한 심장부로 진입했다.
소년의 잔인했던 봄날은 끝이 났고, 권력과 정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준비할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