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라인에 선 권력
1. 쏟아지는 섬광
짙푸른 차광 필름이 빈틈없이 둘러쳐진 대형 교도소 호송 버스의 육중한 철문이 둔탁한 공기압 소리와 함께 열렸다.
푸쉬익 하는 메마르고 거친 공압 마찰음이 축축한 새벽안개를 가르고 터져 나오는 순간, 남원지청 앞마당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서늘한 적막이 일순간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초가을 아침의 공기를 찢으며 사방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온 것은 수백 대의 취재진 카메라가 토해내는 기계적인 모터음과 눈을 멀게 할 듯한 백색 섬광이었다.
번쩍, 번쩍이며 쉴 새 없이 허공을 난사하는 플래시 세례가 호송차 계단 아래로 내딛는 첫 번째 발자국 위로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
계단 바로 아래의 아스팔트 바닥에는 형광 노란색 청테이프로 꺾인 모서리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었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그리고 이 완고하고 유서 깊은 남원 땅에서는 단 한 번도 허용된 적이 없었던 치욕의 경계선.
바로 부패하고 폭압적인 피의자의 오만한 발걸음을 온 세상의 눈앞에 강제로 멈춰 세우는 공개 포토라인이었다.
호송 교도관들의 거칠고 단호한 손길에 이끌려 계단 난간을 짚고 내려선 사내의 어깨가 볼품없이 기우뚱거렸다.
카키색 미결수 수의를 걸친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이었다.
가슴팍 왼쪽 주머니 부근에는 붉은색 실로 굵고 투박하게 수놓아진 수번 '2104'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선명히 박혀 있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남원 시내 전역을 자신의 사병처럼 거느리며, 금빛 봉황 깃발이 나부끼는 대형 로얄 살롱의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군림하던 그 오만방자한 토착의 제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양 손목에는 햇빛을 받아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은색 강철 수갑이 이중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차가운 쇠사슬 위를 친친 동여맨 옥색 나일론 포승줄은 팔뚝을 파고들며 어깨와 가슴팍을 짐승처럼 옥죄고 있었다.
밤새 전주교도소 독방 바닥을 손톱이 닳도록 긁어대며 악을 썼던 탓인지, 그의 눈자위는 핏발이 곤두서다 못해 거무튀튀하게 짓물러 있었다.
깎지 못해 지저분하게 돋아난 턱수염과 뼛골이 흉하게 드러날 정도로 핼쑥해진 양 볼은 그가 맞닥뜨린 사법의 철퇴가 얼마나 가혹하고 거침없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란색 테이프가 직사각형으로 그어진 사각 구역 한가운데에 두 발이 멈춰 섰을 때, 강태석의 퀭한 눈동자 안에서 꺼져가던 맹독 같은 안광이 다시금 꿈틀거리며 솟구쳤다.
남원역 뒷골목의 삼거리 토건 깡패로 시작해 시의회를 집어삼키고 마침내 민선 남원시장의 옥좌에 오르기까지,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피와 침묵을 거름 삼아 남원을 통째로 사유화했던 자의 악착같은 밑바닥 생존 본능이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믿지 않았다.
서울의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있고, 남원 시내 곳곳에 거미줄처럼 심어둔 토착 카르텔의 끄나풀들이 살아있는 한, 어떻게든 이 지옥 같은 올가미를 찢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라 맹신하고 있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가슴팍 앞으로 결박된 강태석의 두 손은 핏줄이 곤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수치심과 살기 어린 적의에서 비롯된 경련이었다.
감히 자신을, 이 남원 땅의 법이자 하늘이었던 자신을 시청 앞마당도 아닌 지청 마당 바닥에 죄인처럼 세워두고 플래시를 터뜨려대다니.
강태석의 시선이 취재진 너머, 경찰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정문 철창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른 새벽부터 소식을 듣고 몰려든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이 빽빽하게 모여 서 있었다.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하정리와 동충동의 상인들,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제방 복구 현장을 지키던 노무자들, 그리고 동문 우체국 골목의 영세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살인마 강태석 구속', '부실공사 횡령범을 법정 최고형에 처하라'는 삐뚤빼뚤한 손피켓이 쥐여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관용차가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굽히며 눈치를 보던 무지하고 가련한 개미들이었다.
그런 개미들이 지금은 피를 토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집혔다.
이 모든 지옥을 만들어낸 원흉은 단 한 명, 7년 전 자신의 손에 의해 아비와 함께 남원에서 쫓겨났던 성호석의 아들 성재환이었다.
"강태석 시장님!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납치범들에게 삼거리 김밥집 피해자를 살해하라고 직접 옥중 지령을 내리신 것이 사실입니까!"
"요천 제방 붕괴 참사가 40억 원의 공사비 횡령에 의한 명백한 인재라는 사실을 여전히 부인하십니까!"
"지리산 부운리 별장 지하 특수 금고에서 쏟아져 나온 140억 원대 비자금 장부와 정관계 로비 녹음파일에 대해 시민들께 해명해 주십시오!"
전국 각지에서 첫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내려온 중앙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사 기자들의 마이크 수십 개가 맹수의 주둥이처럼 강태석의 턱밑까지 사납게 들이닥쳤다.
스펀지가 씌워진 마이크 헤드가 뺨과 입술을 스칠 때마다 훅 끼쳐오는 취재진의 가쁜 숨결과 분노 섞인 질문 하나하나가 강태석의 숨통을 정밀하게 겨눈 비수였다.
마이크가 그의 턱을 찌를 듯 다가설 때마다 강태석의 굵은 목줄기에 굵직한 푸른 힘줄이 핏빛으로 돋아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턱을 바짝 치켜들며 포토라인 둘레를 세 겹 네 겹으로 가득 메운 취재진과, 정문 철창 너머에서 숨을 죽인 채 피눈물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수백 명의 남원 시민들을 향해 피 묻은 늑대처럼 번뜩이는 시선을 내던졌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흡사 거대한 기관총 연사처럼 청사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차라리 바닥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강태석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목구멍을 긁고 터져 나온 것은 억눌린 울분과 가래 끓는 악에 받친 파열음이었다.
"전부…… 날조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호통에 마당을 메우고 있던 셔터 소리가 찰나의 순간 숨을 멈추듯 잦아들었다.
기자들의 눈빛이 특종을 예감하며 번뜩였고, 방송 카메라의 거대한 줌 렌즈가 강태석의 핏발 선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두 주먹을 바들바들 떨며, 정문 밖 허공과 취재진을 향해 온몸을 비틀어대며 삿대질하듯 소리쳤다.
"이건 사법의 심판이 아니야! 과거 7년 전, 이 남원에서 비리를 저지르다 중앙으로 쫓겨났던 전임 군수 성호석의 아들이 완장을 차고 내려와 벌이는 추악하고 비열한 사적 보복이란 말이다! 성재환이가 저 혼자 출세하겠다고, 저 옛날 가문의 원한을 갚겠다고 시정(市政) 전체를 난도질하고 있어!"
그는 핏방울이 섞인 침을 사방으로 튀겨대며 말을 이어갔다.
"백 년 만에 쏟아진 천재지변으로 무너진 제방을 가지고 나한테 살인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있지도 않은 삼거리 계집애를 들먹이면서 정치 공작을 벌이고 있다! 나 강태석이는 남원 시민들의 손으로 정정당당하게 뽑힌 민선 1기 시장이다! 서울 놈들의 정치 공작에, 애송이 검사 놈의 개인적인 치정과 복수극에 나 강태석이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진실은 법정에서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이다!"
처절하다 못해 광기에 찌든 외침이었다.
자신을 여전히 거대한 정치 공작의 무고한 희생양으로 포장하려는 파렴치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포토라인 주변에 포진해 있던 한양토건 측 끄나풀 몇몇과 번영회 잔당들이 그 틈을 타 웅성거리며 동요를 일으키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추악한 궤변이 정적을 가르고 청사 앞마당을 더럽히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2. 침묵의 계단
타악.
본관 현관 대리석 바닥을 딛는 구두 굽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으나, 광기 어린 강태석의 고함을 단칼에 베어 넘길 만큼 서늘하고 단호했다.
웅성거리던 수백 명의 취재진과 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본관 현관 계단 위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쏠렸다.
검은색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걸쳐 입은 한 남자가 계단 꼭대기에 우뚝 서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깃을 빳빳하게 세운 법복 자락이 지리산 능선에서 불어오는 찬 새벽바람에 잔잔하게 펄럭였다.
그의 얼굴은 밤을 지새운 탓에 창백할 정도로 희었으나, 안광만큼은 숫돌에 갈아낸 도검의 칼날보다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지난밤 남원의료원 3층 격리 병실 침상 곁을 지키며, 피투성이가 된 지유의 다친 손을 쥐고 홀로 어둠 속에서 삼켜야 했던 통한의 눈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눈두덩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오직 흔들림 없는 법의 지엄함과 거악을 향한 타협 없는 결기만이 서슬 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재환의 품 안에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과,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선물했던 깊고 어두운 흑청색 잉크로 직접 서명한 한 장의 백색 공문서가 쥐여 있었다.
'피의자 출석요구서(1996형제 4108호)'.
피의자 강태석의 이름 석 자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뇌물수수, 업무상횡령 혐의가 붉은 압인과 함께 선명히 새겨진 법무부 공식 문서였다.
재환은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만 오차 없는 일정한 보폭으로 대리석 계단을 밟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몸짓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사적인 분노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냉철하게 벼려진 공권력의 화신 그 자체였다.
수백 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방향을 틀어 계단을 내려오는 청년 검사를 향해 다시금 셔터를 터뜨렸다.
철컥, 철컥, 철컥.
그 무수한 셔터의 파도와 눈이 시린 플래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재환의 시선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오직 하나, 노란색 포토라인 안에 갇혀 핏대를 세우고 있는 강태석의 두 눈을 정면으로 꿰뚫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선 재환이 포토라인 불과 세 걸음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사방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성난 파도처럼 출렁이던 취재진의 움직임마저 일순간 멈춰 섰고, 마당을 울리던 숨소리마저 얼어붙었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그 팽팽한 대치 속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충돌했다.
강태석의 턱이 치미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7년 전, 저 붉은 벽돌의 남원역 플랫폼에서 매캐한 디젤 연기를 마시며 서울행 통일호 열차에 강제로 실려 올라가던 열여덟 살의 힘없던 소년.
가문의 죄악을 등에 진 채 피눈물을 흘리며 쫓겨나듯 남원을 떠났던 그 애송이가, 지금은 온몸에 서슬 퍼런 검은 법복을 두르고 자신의 목덜미에 단두대의 칼날을 들이대는 검사가 되어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강태석은 끓어오르는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성재환…… 네놈이 기어이 이 따위 광대놀음으로 날 능멸하려 드는구나. 감히 네깟 놈이 누굴 가르치려 들어? 네 아비 성호석이도 7년 전에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고 도망치듯 서울로 기어 올라갔거늘, 제 애비 죄악도 모르는 핏덩이 새끼가 검사 완장 하나 찼다고 하늘 높은 줄을 몰라?"
그 독기 어린 도발에도 성재환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재환의 표정은 마치 영겁의 빙하를 깎아 만든 석상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강태석의 비열한 폭언 대신, 지난밤 남원의료원의 차가운 알코올 냄새 속에서 가늘게 떨리던 지유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약속 지키러 온 사람인데 내가 다치면 안 되지.'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오는 와중에도 자신을 안심시키려 희미하게 미소 짓던 지유의 얼굴.
그 지유의 등 뒤에 서 있는 수많은 남원의 약자들.
그들을 짓밟고 피를 빨아 만든 140억 원의 돈더미 위에서 호의호식하던 짐승이 지금 제 눈앞에서 법을 능멸하고 있었다.
재환은 손에 들린 서류철을 들어 올리지도 않은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피의자 강태석."
나지막하지만 청사 앞마당 구석구석까지 명징하게 파고드는 음성이었다.
"너는 지금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엄정한 사법 절차의 포토라인 위에 서 있다."
"뭐라? 사법?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하지 마라!"
강태석이 턱을 바짝 쳐들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 남원은 내가 30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군 내 왕국이야! 네놈이 멋대로 써 갈긴 날조 조서 따위로 날 옭아맬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누군지 잊었나 본데, 난 남원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뽑아 올린 시장이다! 네깟 풋내기 검사 놈이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강태석의 목소리가 청사 마당을 찢어발기듯 높아질수록, 마이크를 쥐고 있던 기자들의 손놀림도 덩달아 바빠졌다.
지청 앞마당을 가득 채운 긴장감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화약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3. 법복의 선언
그러나 성재환의 눈빛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분노에 차서 날뛰는 피의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미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진 나뭇가지를 내려다보는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시민의 손으로 뽑힌 권력이기에, 그 죄가 더욱 무겁고 추악한 것이다."
재환은 품 안에서 백색 서류 한 장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펄럭이는 종이 위로 '출석요구서'라는 검붉은 제목이 백열등 같은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났다.
"피의자 강태석. 너는 남원시장이라는 직위를 악용하여 총공사비 180억 원의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 사업에서 40억 원의 공사비를 횡령했다."
기자들의 숨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재환의 목소리는 대법정에서 준엄하게 공소장을 낭독하는 재판관의 그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규격 미달의 불량 골재와 저질 잡석을 사용하도록 강요해 50미터의 제방을 붕괴시켰고, 수많은 남원 구도심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진흙탕에 수몰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부실시공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건설교통국장 황선태를 15톤 덤프트럭으로 살해하려 교사했다."
"거짓말 마라! 증거 있어? 그깟 빗길 단순 교통사고를 왜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냐!"
강태석이 결박된 몸을 뒤틀며 발악했으나, 성재환의 선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음성은 한 옥타브 낮아지며 뼈를 에는 한기(寒氣)를 뿜어냈다.
"그리고 어젯밤. 너는 전주교도소 독방에서 교도관을 매수해 비밀 지령을 내렸다. 네 죄악을 덮고 지리산 부운리 별장의 140억 비자금 장부를 맞교환하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영세 상인 한지유를 전문 해결사들을 사주해 납치하도록 지시했다."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거대한 해일처럼 마당 전체로 번져나갔다.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이밀며 취재 수첩 위에 펜을 내달렸고, 정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원 시민들의 눈동자에 경악과 억눌렸던 분노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강태석의 마른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지리산 부운리 별장, 140억 원의 비자금, 한지유 납치 교사.
자신의 가장 깊숙한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맹독의 비수들이 청년 검사의 입을 통해 백주 대낮의 허공에 낱낱이 해체되어 흩뿌려지고 있었다.
강태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교도소 독방에서 내린 은밀한 지령이었는데…… 저놈이 벌써 해결사 놈들의 입을 열었단 말인가?'
공포가 독기 서린 눈동자 뒤편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태석은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남원의 제국이, 일개 스물다섯 살 애송이 검사의 말 몇 마디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꼴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소설 쓰지 마라! 증거도 없는 헛소리를 언론 앞에서 지껄여서 날 매장하려는 수작이지? 네놈이 파놓은 함정에 내가 걸려들 줄 알고!"
강태석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으나, 재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문의 원한도, 개인적인 복수도 아니다."
성재환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검은 법복 자락이 포토라인의 노란 테이프 경계선 바로 코앞에 닿았다.
재환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가 강태석의 일그러진 동공을 정면으로 직격했다.
"권력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30년간 남원 땅을 유린하고, 힘없는 상인들의 고혈을 짜내며, 살인과 납치마저 서슴지 않았던 한 파렴치한 토착 흉악범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의 지엄한 단죄다."
"성재환…… 네놈이 감히……!"
"포토라인은 거짓을 토해내는 정치 유세장이 아니다. 네가 지은 죄악의 무게를 온 세상 앞에서 증명받는 심판의 문턱일 뿐이다."
재환의 손끝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피의자 강태석을 204호 검사실로 인치하라!"
서슬 퍼런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송을 맡았던 강태훈 수사관과 건장한 검찰 수사관 넷이 강태석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쥐었다.
"이거 놔! 놓지 못해! 내가 남원시장이야! 서울에 김문현 위원장님이 계셔! 너희들 다 파면이야,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강태석이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으나, 훈련된 수사관들의 강철 같은 완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결수 수의를 입은 시장의 몸뚱이가 질질 끌려가듯 계단 위로 거칠게 끌어올려졌다.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 나갔다.
번쩍이는 백색 광망 속에서 수갑을 찬 채 굴욕적으로 끌려 들어가는 강태석의 뒷모습이 전국의 언론사 필름 위에 잔혹할 정도로 선명하게 박제되었다.
정문 밖에서는 시민들의 거대한 환호성과 울분이 뒤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30년간 남원을 짓누르던 폭압의 우상이 마침내 흙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4. 닫히는 철문
쿵.
남원지청 본관의 육중한 유리문이 닫히자, 바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취재진의 아우성과 셔터 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두꺼운 강화유리 너머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득한 수족관 속 풍경처럼 멀어졌다.
본관 2층으로 이어지는 중앙 계단 복도에는 수사관들의 무거운 군화 소리와 강태석의 거친 숨소리만이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성재환…… 네놈이 후회할 거다.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끌려가는 내내 강태석은 뒤를 돌아보며 피 섞인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날, 네놈이고 그 계집년이고 남원 땅에 뼈도 못 추리게 갈아 마셔 줄 테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이러는 거냐? 네 애비 성호석이 목줄을 쥔 어르신들이 가만히 계실 것 같으냐고!"
그러나 재환은 그의 저주를 귓등으로도 흘려보내지 않은 채, 묵묵히 그 뒤를 밟으며 2층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환의 발걸음은 고요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복도 벽면에 걸린 역대 지청장들의 빛바랜 사진들이 서늘한 눈빛으로 두 남자의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진들 속 인물들 중 태반이 과거 강태석의 돈을 받아먹고 비리를 눈감아주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썩어빠진 침묵의 고리가 마침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204호.
문패에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이라는 정갈한 글씨가 박힌 철문 앞에 다다랐다.
강태훈 수사관이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거칠게 떠밀려 들어간 강태석이 중심을 잃고 철제 취조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좁고 메마른 취조실 안에는 단 하나의 창문도 없었다.
벽면은 소음을 흡수하는 짙은 회색 방음 보드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었고,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린 백열등 하나만이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를 백색으로 내리비추고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이미 둔탁한 가죽 바인더 다섯 권과, 황선태의 비밀 수첩 복사본, 밤재 터널 납치범들의 자필 진술서, 그리고 소형 카세트 녹음기가 정돈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리산 부운리 별장 지하 특수 금고에서 캐낸 140억 비자금의 원천 기록들이었다.
검은색 표지 위로 '남원 특별 대외관리 원부'라는 굵은 글씨가 백열등 불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강태석의 숨이 턱 막혔다.
그 장부들은 자신이 지난 6년간 목숨처럼 아끼며 금고 바닥에 숨겨두었던 절대적인 비밀이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의 바로 눈앞에 태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덜컹.
성재환 검사가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로 강태훈 수사관이 문을 닫았다.
철컥, 묵직한 빗장이 걸리는 쇳소리가 방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
남원을 30년간 쥐고 흔들던 절대 권력의 수장과, 그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났다가 사법의 칼을 쥐고 돌아온 청년 검사가 마침내 단둘이 마주 앉는 순간이었다.
재환은 천천히 법복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단정한 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두 번 걷어붙인 그는 품 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탁.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금빛 글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 백열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강태석의 눈동자가 그 만년필을 보는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와 삼거리 김밥집을 잇던 그 가문의 물건이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아 가문의 규율을 상징하던 만년필.
그리고 지유가 사준 흑청색 잉크로 채워진 그 만년필이 지금 피의자의 목줄을 겨누고 있었다.
재환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강태석의 핏발 선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카세트 녹음기의 붉은색 녹음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깊숙이 눌렀다.
딸깍.
테이프가 돌아가는 미세한 기계음이 침묵을 갈랐다.
"1996년 8월 24일 오전 9시 22분."
성재환 검사의 낮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취조실의 적막을 엄숙하게 깨뜨렸다.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뇌물수수, 업무상횡령 및 직권남용 혐의 제1차 피의자 신문을 시작한다."
마주 앉은 맹수의 턱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고, 타협 없는 사법의 혈투가 마침내 그 서막을 열어젖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