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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75화

어둠 속의 그림자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셔터를 내리는 시간

 

골목길 끝에서 불어오는 늦여름의 밤바람은 끈적거리면서도 서늘했다.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어스름이 깔린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에 붉게 번졌던 페인트 자국은 지유의 짓무른 손끝으로 문지른 석유 냄새를 여전히 품고 있었다.

 

낮 동안 퍼부었던 빗줄기는 잦아들었으나, 낮게 내려앉은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다시 장대비를 쏟아낼 듯 하늘을 무겁게 짓눌렀다.

 

유리창에 테이프로 'X' 자를 덧댄 출입문 안쪽에서 지유는 마지막 플라스틱 의자를 차곡차곡 포개어 벽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양은 쟁반을 행주로 훔쳐내는 그녀의 손마디는 유난히 창백했다.

 

달그락거리는 식판 소리와 칼도마에 닿는 조용한 소리가 텅 빈 점포 안을 메웠다.

 

지유는 조리대 한쪽 모서리에 놓인 작은 탁상달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빨간 모나미 볼펜으로 하루하루 그어 내려간 동그라미들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영안실의 차가운 냉동고로 떠나간 그 비극의 날부터, 사흘 전 수백 명의 시위대가 지청 정문을 에워싸고 날달걀을 집어던지던 그 아침까지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보온 도시락 뚜껑 안쪽에 재환이 남겨두었던 흑청색 잉크로 직접 적어 건넸던 문장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도시락을 품에 안고 남원지청 정문 계단을 오르던 순간, 계란 파편이 이마를 찢고 흙탕물이 원피스 자락을 더럽혀도 지유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재환이 그 도시락을 품에 안고 흘리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너를 두고 도망치지 않아, 재환아.'

 

지유는 앞치마 끈을 풀어 정갈하게 개어 선반에 얹었다.

 

가게 안쪽 찬장 뒤, 비밀 벽감의 흙벽돌 틈새를 무심코 돌아보았다.

 

30년 전 아버지가 피눈물로 지켜내려 했던 1968년 토지 이면계약서 원본은 이미 재환의 품으로 건너가 사법의 단죄를 준비하는 칼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낮, 재환은 지리산 자락에 숨겨져 있던 강태석의 140억 비자금 금고와 어머니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간 잔혹한 살인 행정의 장부까지 모두 찾아내 대검찰청에 올렸다고 했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잔인하고 추악했던 토건 조폭 시장의 권력이 마침내 법의 심판대 아래 무릎을 꿇을 시간이 머지않았다고 믿었다.

 

지유는 가방에서 어머니의 유품인 하얀 면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찍어냈다.

 

벽걸이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밤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재환은 조금 전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7시 반까지 가게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단단히 일렀다.

 

'지유야, 혼자 있지 마. 내가 갈 때까지 가게 문 꼭 걸어 잠그고 안에 있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재환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폭풍이 바로 등 뒤까지 닥쳐온 사람처럼 다급하고 위태로웠다.

 

지유는 재환이 올 시간에 맞춰 가게 밖 처마 밑의 형광등을 끄기 위해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나섰다.

 

낡은 철제 셔터를 잡고 아래로 힘껏 잡아당기자, 녹슨 쇠톱 긁히는 소리가 적막한 골목길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철컹.

 

셔터가 바닥 홈에 걸리는 순간,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놋쇠 풍경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신경질적으로 흔들리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딸랑.

 

지유는 셔터 자물쇠에 쇠막대를 꽂으려 허리를 숙였다가, 등 뒤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한기에 본능적으로 동작을 멈추었다.

 

골목 안쪽,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스름한 모퉁이에서 낮게 깔린 디젤 엔진의 진동음이 웅웅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2. 번호판 없는 승합차

 

골목길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동문 우체국 앞 공영주차장 쪽에서 뻗어 나오는 희미한 주황색 나트륨등 불빛 아래로 짙은 어둠이 길게 드리워졌다.

 

지유는 쇠막대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골목 어귀에 낮게 도사리고 있던 육중한 검은색 차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전조등을 꺼버린 채, 미등의 붉은 불빛만을 음침하게 번뜩이는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였다.

 

앞뒤 범퍼는 거친 충돌로 찌그러져 있었고, 번호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뜯겨나간 철판 자국과 함께 흙탕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끼이익.

 

승합차는 삼거리 김밥집 바로 앞 좁은 보도블록 경계석에 타이어를 거칠게 걸치며 비스듬히 멈춰 섰다.

 

엔진은 꺼지지 않은 채 낮게 가르랑거렸고, 빗물 젖은 머플러에서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기름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태석의 하수인들이 삼거리 골목을 덮칠 때마다 풍기던 그 익숙하고 비열한 악취였다.

 

'재환이가 오기 전에…….'

 

공포가 발목을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지유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오히려 쥐고 있던 묵직한 무쇠 셔터 막대를 가슴 앞으로 비스듬히 세워 올렸다.

 

철커덕.

 

승합차의 슬라이딩 도어가 사납게 열리며 어둠 속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 넷이 진흙탕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검은색 가죽점퍼와 방수 작업복을 걸친 사내들의 얼굴에는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눈빛에서는 짐승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

 

그들의 손에는 굵은 마대자루와 공업용 청테이프, 그리고 번쩍이는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야, 이 계집애 맞지?"

 

가장 덩치가 크고 목덜미에 짙은 칼자국 흉터가 드러난 사내가 거친 쇳소리로 뇌까렸다.

 

"맞습니다, 형님. 사진하고 똑같습니다. 가게 문 닫고 나오는 길목입니다."

 

조수석에서 내린 또 다른 사내가 품에서 구겨진 흑백 사진 한 장을 확인하며 턱짓을 했다.

 

지유는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동선을 쏘아보았다.

 

사내들은 지유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려는 듯, 부채꼴 모양으로 거리를 좁혀오며 김밥집 앞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골목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사내가 망을 보듯 팔짱을 낀 채 서성이고 있었다.

 

치밀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남원 시내를 주무르던 단순한 양아치들이 아니었다.

 

이권 다툼 현장에서 수없이 사람을 담그고 증거를 인멸해 온, 조상태와 삼거리 토건이 숨겨둔 전문 해결사들이었다.

 

"너희들 누구야. 여기가 어디라고 또 발을 들여."

 

지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결코 떨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고, 붉은 페인트를 맨손으로 벗겨내며 다져진 내면의 결기가 서슬 퍼런 칼날처럼 사내들을 향했다.

 

"당장 물러서. 검찰 수사관들이 이 근처를 지키고 있어. 5분도 안 돼서 경찰차와 검찰청 차가 들이닥칠 거야."

 

목덜미에 흉터가 있는 우두머리 사내가 기괴하게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검찰 수사관? 주차장에서 알짱거리던 그 형사 놈들 말하는 거냐? 아까 우리 덤프가 옆구리를 시원하게 들이받아 줬으니 지금쯤 찌그러진 보닛 밑에서 피나 닦고 있을 거다."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충격적인 말에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가 당했다는 뜻이었다.

 

재환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영주차장에 배치해 두었던 그 든든한 방패막이가 이미 무력화된 것이었다.

 

사내는 품에서 묵직한 쇠파이프를 가볍게 털어내며 지유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성재환 그 새끼가 지리산 금고를 홀랑 털어먹는 바람에 우리 회장님 목줄이 간당간당해졌거든. 순순히 타라, 아가씨. 네 몸뚱이에 생채기 하나 없이 지리산 골짜기로 모셔가야 우리도 그 장부랑 맞바꿔 먹을 거 아니냐."

 

강태석.

 

옥중에 갇혀서도 끝끝내 핏빛 마수를 뻗어오는 그 맹수의 발악이 지유의 숨통을 조여왔다.

 

비자금 장부와 자신을 맞교환하려는 인질극.

 

만약 자신이 이들의 손에 넘어가 지리산 골짜기로 끌려간다면, 재환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사법 정의의 칼날을 제 손으로 꺾어야만 할 것이었다.

 

'절대로 안 돼.'

 

지유의 눈빛에 푸른 불꽃이 일었다.

 

'재환이의 손을 더럽히게 둘 수는 없어. 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의 손에 끌려가지 않아.'

 

지유는 들고 있던 쇠막대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3. 빗속의 필사적인 저항

 

"아가씨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계집애가 쇠꼬챙이 하나 들었다고 호랑이라도 된 줄 아나."

 

우두머리 사내가 혀를 차며 손짓했다.

 

"아가리 닥치게 테이프부터 붙이고 자루 씌워. 소리 새어나가면 귀찮아진다. 1분 안에 싣고 17번 국도로 잰다."

 

좌우에 서 있던 사내 둘이 지유의 양팔을 낚아채기 위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거친 군화 소리가 튀었다.

 

지유는 망설이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뻗어 나오는 사내의 손목을 향해 셔터 쇠막대를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퍽!

 

"악! 이 미친년이!"

 

묵직한 쇠막대가 사내의 손목뼈를 강타하자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지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가게 옆 좁은 배수구 골목으로 내달리려 했다.

 

그러나 뒤쪽에 버티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번개처럼 팔을 뻗어 지유의 어깨를 낚아챘다.

 

우두둑.

 

얇은 카디건이 찢겨 나가며 거친 손아귀가 지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딜 도망쳐, 이년이!"

 

지유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

 

손에 쥐고 있던 쇠막대 끝으로 사내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깡!

 

"크아악!"

 

사내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은 틈을 타 지유는 필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빗물에 젖은 노면은 미끄러웠다.

 

발을 헛디딘 지유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 위로 거세게 넘어졌다.

 

쿵!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살갗이 찢어지는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7년 전,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재환의 관용차를 뒤쫓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서 짓이겨졌던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의 흉터였다.

 

살점이 터져 나가며 붉은 피가 스타킹을 적시고 빗물 웅덩이로 번져나갔다.

 

"잡아! 팔다리 꺾어서라도 처넣어!"

 

우두머리 사내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덮쳐왔다.

 

사내 셋이 쓰러진 지유를 에워싸고 거친 발길질과 함께 억센 손탄을 뻗었다.

 

지유는 바닥을 구르며 김밥집 앞마당에 놓여 있던 빈 플라스틱 맥주 상자들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플라스틱 상자들이 사내들의 정강이를 가로막았다.

 

"사람 살려요! 강도야!"

 

지유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처마 밑 조리대 기둥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손톱이 나무 기둥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기둥 표면에 길게 긁혔다.

 

어둠 속에서 이웃 상인들의 창문이 하나둘 덜컹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쇠파이프를 든 거구들의 살벌한 고함 앞에 아무도 섣불리 뛰쳐나오지 못했다.

 

공포가 삼거리 골목을 완벽하게 옥죄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유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두피가 뜯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지유는 뒤를 돌아보며 사내의 손등을 이빨로 힘껏 물어뜯었다.

 

"아악! 놔! 이 독한 년이!"

 

사내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둔탁한 충격이 지유의 뺨을 강타했다.

 

퍼억.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며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차올랐다.

 

고개가 꺾이며 바닥으로 쓰러진 지유의 품속에서, 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품고 다니던 작은 물건 하나가 튕겨져 나갔다.

 

쨍그랑.

 

작은 아크릴 액자가 돌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재환이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네주었던 반명함판 증명사진이었다.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고 적혀 있던, 지유의 영혼이자 버팀목이었던 그 사진이었다.

 

지유가 뺨을 맞고 튀긴 핏방울이 깨진 유리 파편과 사진 속 열여덟 살 재환의 맑은 눈등 위로 붉게 번져 굳어갔다.

 

"안 돼……!"

 

지유는 찢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깨진 사진을 향해 피 묻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내의 육중한 군화가 지유의 손등을 잔인하게근 밟아 뭉갰다.

 

지옥 같은 고통이 뼈마디를 부러뜨릴 듯 밀려왔다.

 

"닥치고 차에 타!"

 

사내들이 지유의 머리 위로 두꺼운 황마 마대자루를 씌우려 덮쳐드는 그 순간이었다.

 

4. 민재의 돌진과 붉은 피

 

"이 개자식들아! 그 손 치워!"

 

골목길 어귀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어깨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우체국 쪽에서 달려오던 남원일보 최민재였다.

 

취재 수첩을 품에 넣고 JBS 강혁 기자와의 후속 보도 회의를 마치고 김밥집을 향해 걸어오던 민재는, 번호판 없는 승합차와 지유를 짓밟고 있는 괴한들의 참상을 목격하자마자 이성을 잃고 질주해 왔다.

 

"뭐야, 저 새끼는?"

 

망을 보던 사내가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민재를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민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자신의 몸무게 전체를 실어 카메라 가방을 사내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집어던졌다.

 

퍽!

 

묵직한 망원렌즈가 사내의 안면을 직격하며 코뼈가 내려앉는 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쳤다.

 

"크아악!"

 

사내가 피를 뿜으며 나뒹굴자, 민재는 주저 없이 지유를 둘러싸고 있던 우두머리 사내를 향해 몸을 던졌다.

 

태클처럼 파고든 민재의 어깨가 우두머리의 복부를 강타했다.

 

쿵!

 

"민재야, 안 돼! 도망쳐!"

 

마대자루 밑에서 피투성이가 된 지유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민재는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지유 건드리지 마, 이 살인마 새끼들아!"

 

민재는 넘어진 우두머리의 멱살을 쥐고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퍽!

 

수습기자로 일하며 강태석 일파의 온갖 패악질과 덤프트럭 테러, 제방 붕괴 참사를 눈앞에서 목도하며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청년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칼밥을 먹고 자란 잔혹한 전문 폭력배들이었다.

 

뒤에서 자세를 추스른 덩치 큰 사내가 굵은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쥐고 민재의 등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쿠웅!

 

둔탁하고 끔찍한 파열음이 골목길의 공기를 찢었다.

 

"커억……!"

 

민재의 입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등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에 민재의 상체가 앞으로 꺾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민재야! 민재야!"

 

지유가 짓밟힌 손을 바닥에 비비며 절규했다.

 

우두머리 사내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피 묻은 입술을 닦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완연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이 신문사 끄나풀 새끼가 겁도 없이 끼어들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놔야 정신을 차리지."

 

우두머리가 쇠파이프를 거꾸로 쥐고 바닥에 쓰러진 민재의 관자놀이를 향해 내리찍으려 했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등이 꺾여 피를 토하던 민재가 초인적인 힘으로 손을 뻗어 우두머리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지유는…… 못 데려간다…… 이 개새끼들아……."

 

민재의 손가락마디가 사내의 바지를 찢을 듯 움켜쥐었다.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사내 둘이 달라붙어 민재의 옆구리와 머리를 군화발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퍽!

 

퍽!

 

콰직!

 

빗물 웅덩이 위로 민재의 붉은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처참한 폭력의 소리가 빗소리를 집어삼켰다.

 

민재의 의식이 흐려지며 손아귀의 힘이 풀려나갔지만, 그의 부릅뜬 두 눈은 피범벅이 된 채 끝까지 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저항 덕분에 지유는 마대자루를 벗겨내고 일어설 수 있는 몇 초의 시간을 벌었으나, 부상당한 몸으로 장정 넷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시간 없다! 저 새끼는 내버려 두고 가시나부터 실어! 17번 국도로 튀어!"

 

우두머리의 다급한 호통에 사내 둘이 피투성이가 된 지유의 양팔을 뒤로 꺾어 결박했다.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몸부림쳤으나, 사내가 거친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고 청테이프로 얼굴을 칭칭 감아버렸다.

 

"읍! 읍……!"

 

비명조차 질식당한 지유의 몸이 공중으로 들려 올려졌다.

 

사내들은 지유를 짐짝처럼 들어 올려 그레이스 승합차의 뒷좌석 바닥으로 내던졌다.

 

쿵!

 

차가운 철판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지유의 시야가 핑글 돌았다.

 

어둠 속으로 닫히기 직전, 승합차 슬라이딩 도어의 틈새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경련하는 민재의 모습과, 김밥집 앞마당 깨진 유리 액자 속에서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이 마지막 잔상처럼 박혀 들어왔다.

 

쾅!

 

육중한 차 문이 닫히며 칠흑 같은 암흑이 지유를 집어삼켰다.

 

5. 핏자국이 남은 자리

 

끼이익, 콰아앙!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는 빗물 고인 삼거리 골목길을 광기 어린 속도로 후진한 뒤, 보도블록 경계석을 거칠게 타고 넘으며 요천 둑길 방면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짙은 매연만이 텅 빈 골목길에 가라앉았다.

 

지유가 사라진 삼거리 김밥집 앞은 처참한 살육의 현장과 다름없었다.

 

부서진 셔터 막대와 널브러진 플라스틱 맥주 상자들, 그리고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못한 붉은 핏자국이 골목길 아스팔트를 처연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민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흙탕물에 손가락을 묻었다.

 

"검사님…… 성…… 검사님……."

 

혼절하기 직전의 민재의 시야 저편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전조등 불빛 두 개가 어둠을 찢으며 골목길로 미친 듯이 질주해 들어왔다.

 

남원지청의 번호판을 단 검은색 관용 세단이었다.

 

끼이이익-!

 

ABS 브레이크가 비명을 지르며 김밥집 앞마당 불과 1미터 앞에서 멈춰 섰다.

 

엔진이 채 꺼지기도 전에 운전석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성재환이 튀어나왔다.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칼은 빗물과 땀에 젖어 이마에 헝클어져 있었고, 목을 조이던 넥타이는 삐뚤게 풀려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부르짖음은 찢어지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당에 서 있어야 할 지유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최민재와, 난장판이 된 김밥집의 참상이었다.

 

재환의 심장이 바닥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한 공포가 척수를 타고 뇌리를 때렸다.

 

"최 기자! 민재야!"

 

재환은 무릎을 꿇으며 민재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민재의 입가와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재환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민재는 풀려가는 눈을 간신히 치켜뜨며 재환의 옷깃을 떨리는 손으로 움켜쥐었다.

 

"검…… 사님…… 지유가……."

 

"말하지 마라. 숨 쉬어. 민재야, 정신 차려!"

 

"강태석…… 그놈들…… 번호판 없는…… 검은색 승합차…… 17번 국도…… 지리산으로……."

 

민재는 마지막 단어를 토해내듯 쥐어짜고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며 의식을 잃었다.

 

"강태훈! 김 경위!"

 

뒤따라 도착한 또 다른 수사 차량에서 피를 흘리며 머리에 붕대를 감은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가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공영주차장에서 덤프트럭 테러를 당하고도 지유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차를 몰고 온 자들이었다.

 

"검사님! 죄송합니다…… 주차장에서 기습을 당해……!"

 

강태훈이 무릎을 꿇으며 피눈물을 삼켰다.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유령처럼 자리에서 일어선 재환의 시선이 김밥집 처마 밑 조리대 기둥으로 향했다.

 

기둥 표면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 긁힌 자국과 붉은 핏빛 얼룩.

 

그리고 그 아래, 빗물 웅덩이에 깨진 채 뒹굴고 있는 작은 액자 파편 하나.

 

재환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진흙탕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든 것은, 자신이 7년 전 건넸던 바로 그 반명함판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뒷면에 지유가 정갈한 글씨로 적어두었던 맹세.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약속의 글귀 위로 지유의 뜨거운 선혈이 튀어 굳어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며 7년의 세월을 견뎠고, 어머니를 잃고도 끝내 버텨냈으며,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도시락을 싸 들고 왔던 지유였다.

 

그 지유가 자신 때문에, 자신이 파헤친 비자금 장부와의 맞교환 인질이 되어 짐승들의 손에 끌려간 것이었다.

 

우두둑.

 

재환의 주먹 속에서 깨진 유리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자신의 피와 지유의 피가 사진 위에서 한데 뒤섞였다.

 

절망과 자책의 심연을 뚫고, 재환의 눈동자 속에 전례 없는 거대한 살기와 광기가 서려 차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법조문의 한계 안에 갇힌 차분한 검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전부를 빼앗긴 맹수가 내뿜는 처절한 응징의 포효였다.

 

6. 17번 국도의 광기

 

재환은 피 묻은 증명사진을 왼쪽 가슴, 심장 바로 위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품속에서 묵직하게 만져지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의 금빛 닙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아니, 지금 이 순간 하늘은 이미 무너졌다.

 

하늘이 무너졌다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라도 그놈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뿐이었다.

 

"김 경위."

 

재환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듣는 이의 뼈마디를 시리게 할 만큼 서늘했다.

 

"예, 검사님!"

 

"최 기자를 즉시 남원의료원 응급실로 후송해. 그리고 남원경찰서 전 병력에 1급 비상경계를 발령시켜. 전북경찰청과 전남경찰청 고속도로 순찰대까지 전부 동원해. 지리산으로 진입하는 17번 국도와 모든 샛길, 임도를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차단선 쳐."

 

"알겠습니다!"

 

"강 수사관은 관할 지청 무전기 챙겨서 조수석에 타."

 

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관용 세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흙탕물이 튄 검은색 정장 코트 자락이 밤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검사님, 혼자는 위험합니다! 전주 본원에서 기동타격대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20분만 기다리시면……!"

 

강태훈이 절뚝거리며 소리쳤으나, 재환은 이미 운전석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있었다.

 

"20분? 그 20분이면 지유의 숨이 끊어질 수도 있어."

 

재환의 눈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그놈들은 장부와 지유를 맞바꾸려는 게 아니야. 날 지리산 깊은 곳으로 유인해 영구히 암매장하려는 거다. 강태석의 발악을 내 손으로 끝장내지 않으면 이 지옥은 끝나지 않아."

 

재환은 시동을 걸었다.

 

크르릉-!

 

6기통 엔진이 굉음을 토해내며 타코미터 바늘이 레드존을 향해 치솟았다.

 

기어를 거칠게 넣은 재환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타이어가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사납게 할퀴며 연기를 뿜어냈고, 차체는 어둠이 짙게 깔린 요천 둑길을 향해 총알처럼 튕겨져 나갔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를 미친 듯이 걷어내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17번 국도의 아스팔트는 뱀의 가죽처럼 번들거리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빗길 위로 시속 140킬로미터가 넘는 위험천만한 속도가 찍혔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대형 화물트럭들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스쳐 지나갔으나, 재환의 시선은 오직 저 멀리 지리산 능선을 향해 뻗은 굽이진 도로만을 꿰뚫고 있었다.

 

'지유야, 조금만 버텨라.'

 

스티어링 휠을 쥔 재환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슴팍 안주머니에서 전해져 오는 피 묻은 사진의 감촉이 심장을 칼로 베어내듯 아려왔다.

 

'내가 간다. 하늘이 무너져도 널 찾아낼 테니, 제발 살아만 있어라.'

 

칠흑 같은 어둠 속, 지리산 노고단 자락을 향해 뻗은 17번 국도의 굽잇길 위로, 번호판 없는 검은색 승합차의 희미한 붉은 미등이 빗줄기 너머로 아스라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재환의 눈에 서슬 퍼런 맹수의 살기가 폭발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