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금고 급습
1. 뱀사골의 빗길을 가르며
거센 폭우가 윈드실드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와이퍼가 좌우로 미친 듯이 왕복하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지만, 쏟아붓는 장대비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뱀사골로 접어드는 굽이진 비탈길은 온통 붉은 황톳물로 뒤덮여 있었다.
타이어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헛돌 때마다 둔중한 마찰음과 함께 차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조수석에 앉은 성재환(成宰桓)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0시 42분.
법무부 기획조정실과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정오를 기해 청와대에 올리기로 한 검사 면직 제청 시한까지는 불과 1시간 18분이 남아 있었다.
재환의 품속 안주머니에는 황선태 국장에게서 건네받은 차갑고 묵직한 3센티미터짜리 특수 합금 열쇠가 심장을 찌르듯 닿아 있었다.
'051688.'
머릿속에 새겨진 여섯 자리 암호가 서슬 퍼런 뇌관처럼 맴돌았다.
"검사님, 앞쪽입니다. 저기 계곡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비포장 샛길이 보입니다."
운전대를 꽉 쥐고 있던 김 경위가 윈드실드 너머 자욱한 안갯속을 가리켰다.
잡목과 칡넝쿨이 우거진 가파른 오르막길 끝자락에,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2층짜리 송판 버섯 재배사 건물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숨겨진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의 은밀한 요새, 부운리 비밀 별장이었다.
"차량 엔진 끄고 관성으로 진입합니다. 전조등 끄세요."
재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김 경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트를 내렸다.
뒷좌석에 탑승해 있던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과 남원지청 지원 인력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긴장으로 가늘어졌다.
안진우 검사는 젖은 안경을 닦아 쓰며 서류 가방에서 정식 압수수색 검증 영장을 꺼내 손에 쥐었다.
"성 검사님, 황 국장 진술대로라면 이곳에 상주하는 경비 인력들이 사냥용 엽총과 맹견을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멈춰 설 1분 1초의 여유도 없습니다."
재환은 자신의 품속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잠시 어루만졌다.
뚜껑 상단에 새겨진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라틴어 법언이 손끝을 통해 뜨거운 온기로 전해졌다.
지청 204호 검사실에 홀로 남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한지유(韓智宥)의 맑고 결연한 눈동자가 눈앞을 스쳤다.
그녀가 온몸으로 오물과 계란 세례를 받아내며 건네준 3단 보온 도시락, 그 뚜껑 안쪽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쪽지의 글귀가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오늘 이 지리산 골짜기에 파묻힌 부패의 뇌관을 통째로 뜯어내야만 했다.
2. 침묵을 깨는 수색영장
덜컹거리며 미끄러지던 승합차가 잡목 숲 뒤편 공터에 바짝 멈추어 섰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눅눅하고 서늘한 산바람과 함께 비릿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환이 먼저 차에서 뛰어내리자, 방탄조끼를 착용한 수사관 다섯 명이 일사불란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버섯 재배사 입구는 높이 3미터에 달하는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붉은색 글씨로 '사유지 무단출입 시 맹견 주의 및 고발'이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철문 안쪽 공터에서 굵은 쇠사슬에 묶인 대형 로트와일러 두 마리가 빗속에서 으르렁거리며 붉은 잇몸을 드러냈다.
콰르릉!
천둥이 울리자 개들이 일제히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2층 목조 건물 처마 밑 판자문이 덜컥 열리며 우비를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키가 크고 턱에 굵은 흉터가 있는 사내의 손에는 검은 총열의 2연발 수렵용 엽총이 들려 있었다.
"어떤 놈들이야! 여그가 어디라고 함부로 대가리를 들이밀어! 썩 꺼지지 못해?"
사내가 엽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하며 거칠게 호통을 쳤다.
장전 레버가 찰칵거리며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수사관들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가스총과 삼단봉을 쥐며 전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재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진흙탕을 밟으며 철문 앞으로 한 걸음 성큼 걸어 나갔다.
폭우가 재환의 검은 코트와 단정한 이마를 사정없이 적셨지만, 그의 서슬 퍼런 눈빛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재환은 품속에서 푸른색 표지의 서류를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발부, 압수수색 검증 영장 집행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재환의 일갈이 계곡의 빗소리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사내들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영장이고 지랄이고 여긴 개인 사유지여! 시장님 허락 없이는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못 들어온다! 당장 차 돌려 나가!"
"강태석 시장은 이미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수살인교사 혐의로 구속 수감된 피의자다. 그리고 너희가 지금 영장 집행관을 상대로 총기를 겨누는 행위는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위반 현행범 체포 사유에 해당한다."
재환의 차가운 시선이 엽총을 쥔 사내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남원경찰서 타격대와 검찰 기동타격대가 이미 이 계곡 진입로를 봉쇄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너희는 단순 관리인이 아니라 강태석의 살인 범죄와 140억 비자금 횡령의 공동정범으로 평생 교도소에서 썩게 될 것이다. 3초 준다. 총 버리고 엎드려."
재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는 서늘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엽총을 쥐고 재환과 수사관들의 삼엄한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대는 겁을 집어먹고 물러설 풋내기 공무원이 아니었다.
총구 앞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다가오는 재환의 압도적인 기세에 질린 사내의 손가락이 마침내 방아쇠에서 미끄러졌다.
"하나."
재환이 낮게 카운트를 셌다.
"쳇! 제길!"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엽총을 진흙 바닥에 내던졌다.
뒤이어 다른 사내 하나도 두 손을 번쩍 들며 무릎을 꿇었다.
"문 열어!"
강태훈 수사관이 철문을 걷어차며 진입해 사내들의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요란하게 짖어대던 맹견들은 수사관들이 능숙하게 동물 포획용 올가미를 씌워 견사 안으로 밀어 넣자 낑낑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시계는 11시 0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57분이었다.
3. 버섯 재배사 지하의 비밀 통로
"안 검사님, 이자들을 승합차에 결박하고 통신 차단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성 검사님! 외부 유선 전화선은 이미 절단했습니다."
재환은 곧장 2층 목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부는 겉보기와 완전히 달랐다.
바깥은 낡고 썩어가는 송판 벽체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매캐한 표고버섯 포자 냄새가 아니라 차가운 기계식 환풍기 소리와 서늘한 냉기였다.
바닥에는 두꺼운 방수 우레탄이 깔려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최신형 디젤 발전기와 공기정화 설비가 육중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재환은 황선태가 병상에서 피를 토하듯 알려주었던 동선을 되짚었다.
'1층 안쪽, 보일러실로 들어가는 철문 뒤에 기름때 묻은 작업복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 옷걸이 선반 밑바닥 콘크리트를 들추면 지하로 내려가는 유압식 비밀 리프트가 나옵니다.'
재환은 주저 없이 보일러실로 향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컴컴한 보일러실 구석, 낡은 방한복과 작업복 대여섯 벌이 벽면 파이프에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강태훈 수사관이 작업복을 젖히고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바닥 모퉁이에 철판으로 마감된 미세한 틈새가 드러났다.
"이겁니다, 검사님!"
"선반 옆 배전반 뚜껑을 여십시오."
재환의 지시에 따라 배전반 덮개를 젖히자, 두꺼비집 스위치 사이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붉은색 토글스위치가 나타났다.
딸깍.
스위치를 올리자 위이잉 하는 묵직한 모터 구동음과 함께 바닥 철판이 서서히 아래로 하강하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 통로를 열어젖혔다.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는 지상의 눅진한 습기와 달리 건조하고 서늘했다.
온도와 습도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항온항습 장치가 가동되고 있는 증거였다.
"진입합니다. 손전등 켜고 안전 확보하세요."
재환이 앞장서서 가파른 철제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두께 2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특수 방폭 철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중앙에는 번쩍이는 디지털 키패드와 함께, 황선태가 건네준 열쇠가 들어맞을 아날로그 특수 열쇠 구멍이 위아래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 바우어(Bauer) 사의 최고급 특수 금고 도어였다.
재환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품속에서 3센티미터 합금 마스터키를 꺼냈다.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자, 딸깍하며 부드럽게 맞물려 들어갔다.
이어 키패드에 차례로 손가락을 얹었다.
0, 5, 1, 6, 8, 8.
삐빅, 삐-익.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육중한 유압 실린더가 풀리는 둔탁한 금속음이 지하 밀실에 울려 퍼졌다.
철컥!
육중한 방폭 문이 앞으로 서서히 밀려 나오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강태석의 최후 비밀 요새가 마침내 그 흉측한 민낯을 드러냈다.
4. 쏟아져 나온 검은돈과 금고의 심연
손전등 불빛이 지하 15평 남짓한 공간을 훑고 지나가자, 뒤따르던 수사관들의 입에서 일제히 억눌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게 다 뭡니까……."
방 한가운데에는 대형 마트 카트 크기의 철제 선반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 선반 위에는 한국은행 띠지가 그대로 둘러진 1만 원권 신권 다발이 벽돌처럼 빈틈없이 쌓여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선반 반대편에는 미합중국 100달러 지폐 다발이 투명 아크릴 박스에 빽빽하게 담겨 있었고, 엔화와 스위스 프랑까지 어지럽게 쟁여져 있었다.
사과 상자 스무 개는 족히 채우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금과 외화 다발이었다.
남원시의 1년 예산에 맞먹는 규모, 지난 6년간 강태석이 관급 공사와 토지 강탈,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 공사비를 횡령해 축적해 온 140억 원대의 검은돈 저수지가 지리산 땅밑에서 고스란히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압수 목록 작성 준비하십시오. 외화 및 현금 전액 봉인 조치 들어갑니다."
재환은 산더미처럼 쌓인 지폐 다발 앞에서도 눈길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종이돈 따위가 아니었다.
이 돈을 움직이고, 정관계에 뿌리내리게 만들었으며, 죄 없는 이들의 피눈물을 쥐어짜 낸 '기록'이었다.
재환의 시선은 방 안쪽 가장 깊숙한 벽면에 매립된 2중 내화 금고로 향했다.
금고 문은 마스터키를 돌리자 힘없이 열렸다.
그 안에는 벨벳으로 감싸인 검은 가죽 바인더 다섯 권과, 손바닥만 한 철제 틴케이스 하나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재환이 조심스럽게 철제 틴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황선태가 말했던 바로 그 물건, 은색 메탈 재질의 대용량 디지털 저장 매체가 파란색 완충재 속에 꽂혀 있었다.
강태석이 스위스 비밀 계좌 흐름과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에 상납한 10억 원의 녹음파일, 그리고 사법부 로비 정황을 백업해 둔 디지털 스모킹 건이었다.
"확보했습니다."
재환은 USB 메모리를 방수 지퍼백에 밀봉해 가슴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선반에 놓인 다섯 권의 가죽 바인더를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금박으로 '南原 特別 對外管理 原簿(남원 특별 대외관리 원부)'라는 오만한 글씨가 박혀 있었다.
첫 번째 바인더를 펼치자, 1990년대 초반부터 1996년 최근까지 강태석이 민선 남원시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 시청 공무원, 경찰 간부, 도의원, 그리고 전주지검과 법원 인사들에게 살포한 뇌물 상납 일시와 계좌, 수령자 친필 서명이 날짜별로 낱낱이 적혀 있었다.
금고 문을 열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악취가 진동했다.
재환의 손가락이 바인더를 빠르게 넘기던 중, 두 번째 권의 갈색 내지 한가운데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1991년 1993년 남원 구도심(하정리·동충동) 토지 강제 수용 및 특혜 환지 실무 집행 내역.'
재환의 동공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5. 붉은 줄 아래 새겨진 이름
지하 밀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란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누런 갱지 위에는, 남원 구도심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삼거리 토건과 강태석이 강탈했던 수십 필지의 토지 지번과 원소유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옆에는 잔혹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붉은색 수기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동의 거부. 1차 조폭 위협 완료.'
'위생 점검 및 소방 점검 릴레이 압박.'
'가압류 및 경매 유도.'
그것은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
남원의 힘없는 영세 상인들과 농민들의 숨통을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서서히 옥죄어 파멸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학살의 일지였다.
재환의 떨리는 손가락이 페이지 맨 아랫단, 붉은 만년필로 두 줄이 그어진 특정 항목에 닿았다.
그곳에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먹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동충동 182번지 삼거리 김밥집(구 과수원 부지 잔여 토지)]
원소유주: 한석규(사망)
실점유 및 관리자: 박순례(한석규 처)
집행 내역:
- 1991. 4. 환지 무효 확인 소송 청구자.
삼거리 토건 행동대 투입, 과수원 창고 강제 철거 및 물리적 제압(남편 한석규 뇌출혈 사망).
- 1994. 8. 미망인 박순례, 삼거리 일대 조기 이주 및 보상 협의 전면 거부.
- 1995. 11. 시청 위생과 3차례 과태료 폭탄 및 소방과 영업장 폐쇄 계고 발부.
- 1996. 7. 시장 특명.
남원의료원 치료비 체납 압박 및 신부전증 악화 유도.
상속인 한지유 고립 작전 개시.
- 비고: 박순례 사망 시 즉각 상속 포기 각서 징구 및 강제 대집행 단행할 것.
"……아."
재환의 목구멍에서 짓이겨진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박순례.
한지유의 어머니.
그토록 인자한 미소로 남원 동문 우체국 골목에서 김밥을 말아주며, 서울로 떠나던 어린 재환의 손에 따뜻한 은박지 도시락을 쥐여주었던 그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앓았던 만성 신부전과 급성 심부전, 남원의료원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어야 했던 그 처절한 비극이 우연한 병마 때문이 아니었다.
강태석과 그 토건 카르텔이 5년 동안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했던 잔혹한 살인 행정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남원을 사랑하셨지, 시장님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상복을 입은 채 강태석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던 지유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가게 벽면의 붉은 페인트를 석유로 닦아내던 지유의 피 묻은 손가락이 뇌리를 스쳤다.
그 모든 고통의 배후에 적힌 악마의 기록이, 지금 재환의 두 손에 들려 있었다.
재환의 눈시울이 붉게 타올랐다.
이마에 굵은 핏줄이 곤두서고, 장부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부들부들 떨렸다.
"강태석…… 네놈이 기어이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까지……."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지하 밀실의 공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서슬이 퍼랬다.
옆에서 장부를 함께 들여다보던 강태훈 수사관조차 말을 잇지 못한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사님…… 이건,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완전히 살인입니다."
"살인이지. 국가의 공권력과 조폭의 폭력을 동원해 일가족을 도륙한 특수연쇄살인이다."
재환은 바인더를 거칠게 덮어 가슴에 품었다.
장부의 모서리가 재환의 갈비뼈를 아프게 찔렀지만, 그 통증은 지유가 지난 7년간 겪었을 지옥 같은 고통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6. 벼랑 끝의 시계, 서울을 향한 일격
재환은 손목시계를 치켜들었다.
오전 11시 28분.
정오까지 남은 시간은 32분이었다.
"전원, 철수 준비! 비자금 장부 5권과 디지털 USB, 외화 및 현금 원형 보존 박스를 최우선으로 승합차에 적재한다! 5분 안에 이 산을 빠져나간다!"
"예, 검사님!"
수사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압수물 상자를 날랐다.
재환은 계단을 박차고 1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바깥은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안진우 검사가 무전기를 쥐고 빗속을 뚫고 달려왔다.
"성 검사님! 서울 방배동 황 국장 자택,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도착해 가족들 안전가옥으로 완벽히 피신시켰답니다! 조상태가 보낸 청부 폭력배 두 놈도 현장에서 긴급 체포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안 검사님, 대검 중수부 직통 유선 전화 연결 가능한 가장 가까운 파출소가 어디입니까?"
"여기서 산길을 10분만 내려가면 산내파출소가 있습니다! 암호화 팩스와 비상 유선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산내파출소로 달립니다. 타이어가 터져도 상관없으니 밟으세요!"
승합차의 육중한 디젤 엔진이 굉음을 내뿜으며 흙탕물을 튀겼다.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차 안에서 재환은 무릎 위에 가죽 바인더를 펼쳐놓고, 자신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흑청색 잉크가 펜촉 끝으로 흘러내렸다.
재환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그리고 대검 중앙수사부장 정종길 앞으로 보낼 긴급 수사 결과 보고서 및 긴급 체포 승인 요청서 양식을 거침없이 채워나갔다.
[피의자 강태석,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횡령), 형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결정적 물증인 140억 비자금 원부 및 디지털 녹음파일 전량 압수 완료.]
[본 검사는 피의자 김문현에 대한 긴급 체포영장 청구 및 강태석의 지리산 비자금 전액 국고 환수 몰수보전 절차에 착수함.]
[만약 오늘 정오를 기해 본 주임검사에 대한 부당한 직무 면직이나 외압이 실행될 경우, 본 검사는 형사소송법과 헌법이 보장한 검사의 독립성에 의거하여 이 압수물 원본 일체와 녹취 파일을 전국 언론 및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즉각 공개할 것임을 엄중히 통고함.]
마지막 문장을 써 내려간 재환의 서명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종이를 갈랐다.
成 宰 桓.
시계 침이 11시 45분을 지나고 있었다.
승합차가 빗길을 드리프트하듯 꺾으며 산내파출소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재환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파출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검찰 특수부의 난입에 파출소 당직 순경들이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상 팩스기 비키십시오!"
강태훈 수사관이 권총 벨트를 찬 채 팩스 앞을 확보했고, 재환은 품속에서 꺼낸 보고서와 지리산 비자금 장부의 핵심 뇌물 상납 페이지(김문현 10억, 성호석 협박 및 조작 내역, 남원 구도심 살인 행정 일지) 복사본을 대검 중수부 팩스 번호로 밀어 넣었다.
삐이이- 찌이익.
팩스 신호음이 적막한 파출소를 가득 채웠다.
이어 파출소 벽면에 걸린 비상 직통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지상 8층, 중앙수사부장실 직통 번호였다.
신호가 두 번도 채 가기 전에 묵직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터져 나왔다.
- 나 정종길이다.
재환인가?
"성재환 검사입니다, 부장님."
재환의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지리산 부운리 비밀 별장, 2중 방폭 금고 압수수색 완료했습니다. 140억 원대 비자금 원부 전량, 김문현 의원실 10억 뇌물 상납 녹음파일이 담긴 디지털 USB, 그리고 강태석의 토지 강탈 및 살인 행정 일지 일체를 온전히 확보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정종길 중수부장의 거친 숨소리가 멈칫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책상을 쾅 내리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해냈구나.
성재환.
"지금 대검 팩스로 장부 사본과 보고서 1차분 송출 중입니다. 법무부 기조실과 김문현이 꾸미고 있는 정오 면직 제청, 총장님께 직보하시고 즉각 파기하십시오."
- 파기 수준이 아니다.
총장님께서 방금 중수부 회의실로 들어오셨다.
네가 보낸 팩스 들어오는 즉시, 김문현에 대한 전격 출국금지와 의원회관 사무실 압수수색 영장 법원에 접수한다.
성 검사, 고생했다.
정말 큰일을 해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거세게 쏟아지는 남원의 빗줄기를 향했다.
"강태석의 공소장에 피고인의 잔혹성과 살인 혐의를 1원의 누락도, 하루의 오차도 없이 전부 적어 넣을 것입니다. 남원으로 즉시 복귀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파출소 벽시계가 정오를 알리는 12시 정각의 시보를 둔중하게 울렸다.
권력의 흉계가 멈추고, 사법의 칼날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7. 빗속을 뚫고 지유에게로
오후 12시 30분, 남원 시내로 접어드는 요천 제방 둑길은 여전히 황토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비구름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 한 줄기가 비치기 시작하며 지리산 능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지청 204호 검사실로 향하는 관용 승합차 뒷좌석에서, 재환은 품속에서 한지유의 흑청색 잉크병을 꺼내 들었다.
남아 있는 잉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깊고 푸른빛은 오늘 지리산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진실의 무게만큼이나 짙었다.
재환은 어머니 박순례의 이름이 붉은 줄로 그어져 있던 장부의 페이지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지유야.'
그 이름을 속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너를 지켜주지 못했던 세상의 불의를, 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뻔뻔하게 활개 치던 저 거악의 무리를 이제 내 손으로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피비린내 나는 장부를 마주해야 할 지유의 찢어질 듯한 슬픔을 생각하면, 재환의 심장은 칼로 베어내는 듯 저려왔다.
승합차가 남원지청 정문을 통과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계란을 던지며 악을 쓰던 어용 시위대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 있었고, 깨진 계란 껍데기와 쓰레기만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현관 로비로 들어선 재환은 곧장 2층 204호 검사실 문을 열었다.
탁자 위에 단정하게 놓인 3단 보온 도시락 옆에서, 한지유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흙탕물투성이가 된 검은 코트, 비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칼, 그러나 어둠을 찢어발기고 돌아온 맹수의 눈빛을 한 성재환이 그곳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재환은 품속에서 검은 가죽 바인더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30년간 남원을 짓눌러온 거악의 숨통이 끊어지는 소리가 검사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지유야."
재환의 갈라진 목소리가 지유의 귓가에 닿았다.
"가져왔다. 너와 네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낼…… 마지막 증거를."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맑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이 탁자 위의 낡은 바인더를 향해 조심스럽게 뻗어나갔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의 심판, 그 마지막 결전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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