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증인의 등장
1. 빗길을 가르는 사이렌
와이퍼가 유리창을 거칠게 긁어내렸지만, 앞을 가로막는 폭우는 쉴 새 없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남원지청 정문을 빠져나온 검찰 승합차는 요천 둑길을 따라 맹렬한 속도로 내달렸다.
차창 밖으로 성난 황톳빛 요천의 물결이 제방 옹벽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수면 위로 허옇게 부서지는 물보라는 며칠 전 부실공사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던 제1공구의 처참한 상흔을 떠올리게 했다.
성재환은 조수석 손잡이를 굳게 쥔 채 계기판의 시계를 노려보았다.
오전 9시 42분.
초침이 사정없이 째깍거리며 심장을 옥죄어 왔다.
서울 법무부 기획조정실과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예고한 정오의 직무 면직 제청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두 시간 남짓이었다.
단 1분 1초라도 지체된다면, 저들이 기안한 초법적 면직 안건이 국무회의를 거쳐 청와대로 직행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성재환이라는 이름 석 자에 쥐어진 합법적인 수사의 칼날은 흔적도 없이 부러지고 말 터였다.
"검사님, 남원의료원 앞 교차로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수사관이 비상등을 켜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를 돌았다.
타이어가 빗물 고인 아스팔트를 미끄러지듯 긁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차체가 좌우로 크게 요동쳤으나, 성재환의 단단한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정면만을 꿰뚫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안진우 검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품속의 청운각 회의 메모를 매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 검사님, 황선태 국장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의료원 안팎으로 이미 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태석 쪽이나 김문현 쪽 하수인들이 병원에 손을 쓰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만약 저들이 한발 먼저 손을 뻗는다면……."
재환은 품속 양복 안주머니를 짚었다.
그곳에는 지유가 새벽 찬바람과 계란 세례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건네준 3단 보온 도시락 뚜껑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흑청색 잉크로 정갈하게 새겨진 그 한 줄이 심장 박동과 함께 뜨겁게 고동쳤다.
손톱 밑이 찢겨 피를 흘리면서도, 차가운 붉은 페인트를 맨손으로 문질러 지워내면서도 지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도시락을 건네던 그 맑고 결연한 눈동자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남원에 홀로 남아 7년의 세월 동안 온갖 멸시와 협박을 견뎌낸 지유가 지켜낸 약속이었다.
검사인 자신이 이깟 권력의 외압 따위에 밀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한 걸음도 늦출 수 없습니다. 황선태는 강태석의 비자금뿐 아니라 지난 수년간 남원에서 자행된 정경유착의 모든 실무를 집행한 산증인입니다. 그 입이 열려야 정오 전에 저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습니다."
재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는 서릿발 같은 결기가 배어 있었다.
승합차는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남원의료원 응급센터 현관 앞에 급정거했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빗물 냄새와 뒤섞였다.
성재환은 차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순식간에 어깨와 뺨을 두드렸지만, 젖어 드는 바짓단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뒤이어 차에서 뛰어내린 안진우 검사와 두 명의 수사관이 재환의 뒤를 바짝 쫓아 병원 로비로 질주했다.
2. 사선(死線)을 넘은 자의 눈빛
의료원 3층 중환자실 앞 복도는 서늘한 소독약 냄새와 기계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복 형사 두 명이 다가오는 성재환을 보고 흠칫 놀라며 길을 비켰다.
형사들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남원지청 정문에서 대검 감찰부장을 역으로 입건하고, 돈에 매수되어 난동을 부리던 어용 상인회를 단칼에 해산시켰다는 소식이 관내 경찰 조직에도 파다하게 퍼진 탓이었다.
검찰청법과 법리를 완벽하게 꿰뚫고 휘두르는 젊은 검사의 기세 앞에서, 경찰들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역력했다.
재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철제 미닫이문을 밀어젖혔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자 방호복을 입은 담당의가 굳은 얼굴로 재환을 맞이했다.
의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마스크 너머의 숨소리 또한 가쁘게 떨리고 있었다.
"성 검사님, 오셨습니까."
"황선태 국장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재환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담당의가 차트를 손에 쥔 채 재환의 곁을 나란히 걸으며 다급히 보고했다.
"뇌부종 수치가 기적적으로 내려앉으면서 40분 전쯤 완전히 자가 호흡을 시작했습니다. 산소포화도도 90% 이상으로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경추 골절과 늑골 다발성 골절로 통증 쇼크가 극심합니다.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뼈마디가 폐를 찌르는 고통일 겁니다. 진통제를 투여하려 했으나, 환자가 검사님을 뵙기 전까지는 마취제를 일절 놓지 말라고 발작에 가깝게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라며 울부짖더군요. 지금 환자는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재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환자실 안쪽 깊숙한 격리 병상으로 걸어 들어갔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링거 줄과 바이탈 모니터 선을 주렁주렁 매단 사내가 누워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실에서 거들먹거리며 인허가 도장을 찍어 누르던 권력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호리호리한 체구는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얼굴 전체는 시퍼런 멍과 부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머리에는 피가 배어 나온 두꺼운 거즈가 감겨 있었고, 핏기 없는 입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르르 떨렸다.
침대 옆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규칙적인 경고음만이 사내가 아직 숨을 쉬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황선태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짓무른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충혈된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가, 마침내 침대 곁에 우뚝 선 성재환의 단정한 정장과 가슴팍의 검사 신분증에 멎었다.
그 순간, 사내의 동공이 거칠게 수축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쉰 쇳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서…… 성 검사……."
재환은 침대 곁으로 바짝 다가가 마스크 옆으로 귀를 기울였다.
소독약 냄새 사이로 쇠비린내 나는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황선태 국장님, 성재환 검사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황선태의 메마른 손가락이 허공을 긁으며 재환의 소매 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에는 덤프트럭 유리 파편에 찢긴 상처가 흉측하게 꿰매져 있었다.
그 손아귀의 힘은 죽음의 문턱을 간신히 넘어온 자의 처절한 집착이었다.
"살려…… 주시오…… 제발…… 성 검사……."
황선태의 눈가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한 육체적 통증의 눈물이 아니었다.
평생을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뒷바라지했던 권력의 수괴에게 철저히 버림받고, 쓸모를 다한 사냥개처럼 도로 위에서 도륙당할 뻔했다는 참담한 배신감과 공포의 발로였다.
3. 버림받은 사냥개의 절규
"강태석…… 그 개새끼가…… 날 죽이려 했어……."
황선태의 입술 사이로 피거품 섞인 가래가 끓어올랐다.
말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가슴팍의 늑골이 뒤틀리는지, 사내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모니터의 심전도 그래프가 가파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삐- 삐-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자 담당의와 간호사가 다급히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황선태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휘둘러 의료진을 밀어냈다.
"비켜…… 저리 가…… 난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어……! 저놈들이 날 죽일 거야…… 성 검사…… 저놈들이……!"
재환은 황선태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단단히 맞잡았다.
차가운 손가락 사이로 검사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환은 흔들림 없는, 나지막하지만 병실 안의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황 국장님. 알고 있습니다. 하정리 삼거리 교차로에서 당신의 승용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덤프트럭 운전자는 한양토건 행동대장 박철구였습니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경계석을 타고 넘은 계획적 살인미수였습니다."
황선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환의 서늘한 서술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배후는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강태석과 그의 처남 조상태입니다. 박철구는 요천 하류 송동면 갈대밭에서 증거 차량을 불태우고 밀항하려다 대검 특수부 수사팀에 의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이미 박철구의 입에서 조상태의 살인교사 전모가 낱낱이 자백되었습니다."
황선태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벌어졌다.
경악과 허탈함, 그리고 뼛속까지 시려 오는 분노가 뒤섞인 거친 숨소리가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
"역시…… 그랬군…… 내 집 벽장에 숨겨둔 업무 수첩을 가져간 것도…… 그놈들이지?"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고사로 위장해 영구히 입을 막은 뒤, 집안을 수색해 당신이 남긴 불법 지시 수첩을 털어갔습니다. 경찰 수뇌부 역시 단순 교통사고로 덮기 위해 현장의 핏자국까지 살수차로 지워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이렇게 눈을 뜰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황선태는 침대 시트를 찢어발길 듯 움켜쥐었다.
핏줄이 터진 눈에서 시뻘건 눈물이 배어 나왔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 거친 기침이 쏟아져 나오며 산소마스크 내벽을 붉게 물들였다.
"내가…… 내가 7년 동안 그 인간 밑에서 똥오줌을 다 받아냈어……! 선거 때마다 건설업자들 멱살을 잡아서 뭉칫돈을 걷어다 바쳤고…… 시의원들 룸살롱 접대하고 뒤표를 사 모았단 말이다! 도청 감사관들이 내려오면 군산 앞바다 배 띄워서 술 먹이고 입을 틀어막았어! 요천 제방 공사? 철근 빼돌려서 비자금 만들라고 지시한 게 누군데…… 전부 강태석이야! 멀쩡한 남원 시민들 땅을 관광특구니 뭐니 헐값에 도로 부지로 묶어서 지놈들 배를 불려줬는데……! 그런 나를…… 내 등에 칼을 꽂아? 내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버려?!"
배신당한 사냥개의 울부짖음이 중환자실의 차가운 타일 벽을 때렸다.
그것은 평생을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악행을 일삼아 온 자가 마주한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파멸의 자화상이었다.
재환은 사내의 분노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오직 실체적 진실을 향한 냉정한 사법적 시선만이 빛나고 있었다.
"황 국장님, 당신이 남원시민들에게 지은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요천 제방 부실공사로 수많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온 영세 상인들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유 어머니를 비롯한 무고한 이들이 그 악랄한 행정 폭압 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신 역시 법정에 서서 죗값을 엄정하게 치러야 합니다."
황선태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자신이 저지른 7년간의 죄악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목을 조여오는 듯했다.
그러나 재환은 사내의 턱밑을 향해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을 던졌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저 거대한 악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데 협조하십시오. 당신을 사냥개처럼 부리다 버린 자들에게 법의 엄중한 칼날을 꽂아 넣으십시오. 그것만이 당신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4. 마지막 거래
황선태가 떨리는 눈으로 성재환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일말의 의구심과 절박함, 그리고 깊은 고뇌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성 검사…… 당신 아버지가 성호석 전 시장이지?"
"그렇습니다."
재환은 피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황선태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난 알고 있어…… 당신 아버지가 7년 전 왜 중앙으로 쫓겨나듯 올라갔는지……. 강태석 그놈은 보통 인간이 아니오. 서울의 여당 실세 김문현 의원과 완벽하게 한 몸으로 묶여 있단 말이오. 김문현이 뒤를 봐주고, 강태석은 남원에서 수십억씩 비자금을 짜내서 서울로 트럭째 올려보냈어. 그자들의 줄이 대검찰청과 법무부, 심지어 청와대 문턱까지 닿아 있단 말이오. 그런데…… 고작 일개 평검사인 당신 혼자서 그 거대한 괴물들을 감당할 수 있겠소?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당신도 저들의 손에 목이 날아갈 거요!"
재환은 품속에서 서류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대검 중수부장 정종길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독립 수사 지휘 훈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금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에서 작성된 대검 감찰1과장 정태섭에 대한 피의자 입건 조서였다.
재환은 그 서류들을 황선태의 눈앞에 똑똑히 들이밀었다.
"보십시오. 오늘 아침 나를 직무에서 배제하고 수사를 해체하려 서울에서 급파된 대검 감찰부장은 지금 남원지청 취조실에 피의자로 갇혀 있습니다.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혐의입니다. 내 뒤에는 썩은 정치 권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저들의 폭압과 불의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피눈물로 터전을 지켜온 남원시민들이 서 있습니다. 누구도 이 수사를 멈출 수 없고, 나 역시 멈추지 않습니다."
서류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인주와 정태섭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한 황선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대검 감찰부장을 현장에서 피의자로 입건해 가두어버리는 검사.
그것은 중앙 정계의 외압이나 눈치를 보며 보신에 급급하던 기존의 관료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던 토착 관료의 오만과 체념이 완전히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성재환이라는 젊은 검사의 눈빛에서, 어떠한 타협도 모르는 서슬 퍼런 사법의 칼날을 똑똑히 보았다.
"내…… 내 처자식이 있소."
황선태가 마침내 참아왔던 오열을 터뜨리며 본심을 토해냈다.
사내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아비로서의 처절한 공포였다.
"서울 방배동에 대학 다니는 딸아이가 하나 있어……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오. 집사람도 심장이 약해서 내가 시청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다 불고 나면…… 강태석과 조상태 놈들이 교도소 밖의 조폭들을 풀어 내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쥐도 새도 모르게 교통사고를 내든, 집에 불을 지르든 할 놈들이오. 그것만…… 그것만 약속해 주시오, 성 검사. 내 죄는 감옥에서 10년이든 20년이든 평생 썩어도 달게 받겠소. 하지만 내 딸과 아내만큼은…… 검찰의 명예를 걸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주겠다고 맹세해 주시오!"
사내는 침대에서 상체를 억지로 일으키려다 늑골의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재환을 붙잡은 손만큼은 결코 놓지 않았다.
재환은 황선태의 거친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눈빛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검찰청법과 특정강력범죄처벌법상 특별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즉시 발동하겠습니다. 내 동행 검사인 안진우 검사를 통해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을 즉각 방배동 자택에 급파하겠습니다. 당신 가족들의 신변을 24시간 철통같이 밀착 경호할 것을 약속합니다. 내 이름을 걸고, 내 직을 걸고, 그 어떤 위협도 당신 가족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재환의 단호하고 진실한 음성이 중환자실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빈말이 아닌, 한 남자의 영혼이 담긴 엄숙한 서약이었다.
황선태의 굳어 있던 어깨가 비로소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빛에 마지막 결단이 서려 있었다.
"고맙소…… 성 검사…… 고맙소……."
5. 지리산의 비밀
황선태는 링거 바늘이 꽂힌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목덜미 쪽을 더듬었다.
환자복 목덜미 안쪽, 목뼈 바로 아래 살갗에 살구색 의료용 반창고가 겹겹이 덧대어져 봉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덤프트럭에 받혀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올 때도, 응급실 의료진의 가위질 속에서도 기적처럼 발견되지 않고 사내의 피부에 들러붙어 있던 마지막 보물이었다.
황선태는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거칠게 반창고를 뜯어냈다.
사내의 땀과 피로 얼룩진 손바닥 위에 아주 작은 금속 물체가 툭 떨어졌다.
길이 3센티미터 남짓한 정교한 특수 합금 열쇠였다.
일반적인 열쇠와는 달리 원통형 몸체에 십자 홈과 입체적인 톱니가 미세하게 가공되어 있는 최고급 외제 특수 금고용 열쇠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재환이 그 차가운 금속을 응시하며 묻자, 황선태가 거칠게 가래를 뱉어내며 입을 열었다.
"강태석 놈이…… 시청 벽장에 숨겨둔 내 업무 수첩을 가져가고 이제 모든 증거를 없앴다고 안도하고 있겠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오. 그 수첩은 내가 매일매일 시정 지시를 받을 때 적어둔 개인적인 메모일 뿐이야. 법정에 가면 변호사들이 개인 일기장에 불과하다고 우기면 그만이지."
황선태의 짓무른 눈가에 번뜩이는 서슬 퍼런 독기가 어렸다.
자신을 죽이려 한 주인을 향해 맹독을 품은 사냥개의 눈빛이었다.
"강태석의 진짜 목줄은…… 다른 곳에 있소. 지리산 뱀사골 초입, 산내면 부운리 산 14번지……. 외딴 계곡 깊은 곳에 겉으로는 평범한 송판 버섯 재배사처럼 위장해 둔 2층짜리 통나무 별장이 있소."
안진우 검사가 재빨리 품에서 수첩을 꺼내 받아 적기 시작했다.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산내면 부운리 산 14번지…… 버섯 재배사 위장 별장……."
"그 별장 지하 1층 보일러실 안쪽에…… 폐유 기름 탱크로 위장된 육중한 방화 철문이 있소. 기름 탱크 밸브를 왼쪽으로 세 바퀴 돌리면 비밀 걸쇠가 풀리지. 그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독일제 바우어(Bauer) 특수 방화 금고가 콘크리트 벽체에 통째로 매립되어 있소. 이 열쇠가 바로…… 그 특수 금고의 1차 다이얼을 해제하는 마스터키요."
황선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격정에 겨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금고 안에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강태석이 삼거리 토건과 남원 제1건설, 동서개발을 통해 조성한 비자금 140억 원의 원천 회계 장부 원본이 고스란히 들어 있소. 시청 공무원들 뇌물 장부 따위가 아니오. 도지사 선거 자금, 여당 중앙당 공천 헌금, 그리고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에게 흘러 들어간 수십억의 현금 다발 내역이 적혀 있소. 어느 놈에게 몇 년 몇 월 몇 일에 무슨 명목으로 얼마를 찔러줬는지,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번호와 돈세탁용 약속어음 배서 사본까지 단 한 장도 빠짐없이 연도별로 철철이 정리되어 있지."
재환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140억 원대의 비자금 원천 장부.
그것은 남원 지역의 부패 토건 세력뿐 아니라, 중앙 정계의 거악 김문현과 법무부, 대검찰청 내부의 사법 로비 카르텔 전체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거대한 뇌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황선태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마치 지옥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금고 안쪽 벽면을 자세히 보면, 은색 볼트 세 개가 박혀 있소. 그중 가운데 볼트를 시계 방향으로 누르면…… 비밀 격벽이 열리며 검은색 벨벳 상자가 하나 튀어나올 거요. 그 안에…… 강태석이 자신의 옥중 결재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모든 비자금 계좌 내역과 뇌물 수수 녹음파일을 백업해 둔 '비밀 USB 메모리'가 들어 있소."
"USB 메모리……?"
안진우 검사가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최신 디지털 보안 저장 매체에 정관계 로비의 핵심 파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황선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컴퓨터 전문가를 거액에 매수해 스위스 은행 차명 계좌 흐름과 김문현 의원실에 전달된 현금 배달 일시, 그리고 국회와 법무부 고위직들에게 뿌린 뇌물 청탁 통화 녹음 파일들을 전부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 저장해 둔 거요. 강태석은 아날로그 장부도 믿지 못해 그 조그만 칩 속에 모든 걸 복사해 숨겨두었지. 그 USB만 손에 넣으면…… 강태석은 물론이고 서울의 김문현까지 그 자리에서 정치적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거요."
6. 정오의 시한폭탄
황선태는 떨리는 손으로 성재환의 손을 잡고 그 차가운 특수 합금 열쇠를 쥐여주었다.
모서리가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이 재환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사내의 전 생애와 목숨이 실린 묵직한 무게였다.
"금고의 전자 비밀번호는…… 강태석이 남원에서 첫 관급 토목 공사를 불법 수주했던 날짜요. '0-5-1-6-8-8'. 이 여섯 자리 번호를 누르고, 빨간 불이 초록 불로 바뀌면 이 열쇠를 오른쪽으로 두 번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돌리면 열리오."
"051688……."
재환은 여섯 자리 숫자를 뇌리에 또렷이 새기며 열쇠를 주머니 깊숙이 갈무리했다.
황선태가 경고하듯 재환의 옷깃을 다시 꽉 붙잡았다.
사내의 눈에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조심하시오, 성 검사. 그 별장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오. 조상태의 직계 폭력배 네다섯 명이 엽총과 사냥총을 들고 상주하고 있소. 멧돼지 잡는 대형 맹견 대여섯 마리도 마당에 풀어놓았지. 별장 진입로 초입에 사설 적외선 감지 센서까지 깔려 있소. 외지 차량이 접근하면 즉각 교도소의 강태석이나 서울의 김문현 쪽에 무전으로 암호 보고가 들어가게 되어 있소. 만약 저들이 검찰의 접근을 눈치채고 별장에 시너를 뿌려 불을 지르면…… 그 안의 모든 장부와 USB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거요."
재환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가혹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15분.
남원의료원에서 지리산 뱀사골 산내면 부운리까지는 빗길 국도로 아무리 밟아도 4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정오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1시간 45분.
서울 법무부 청사에서는 김문현의 지시를 받은 기획조정실 간부들이 성재환에 대한 면직 제청 서류에 장관 직인을 찍어 청와대로 출발할 시간표를 째깍째깍 죄어오고 있을 터였다.
그 전에 지리산 별장의 비밀 금고를 기습하여 140억 비자금 장부와 비밀 USB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 물증을 확보해 서울 대검 중수부와 방송사 언론에 동시 타전해야만 정오의 사법 살해 음모를 완벽히 분쇄하고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
"황 국장님, 진술 감사합니다. 당신 가족의 안전은 내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겠습니다."
재환이 침대 곁에서 몸을 돌려 돌아서려 하자, 황선태가 침대 난간을 붙잡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성 검사! 반드시…… 반드시 그 악마 같은 놈들을 지옥 밑바닥까지 처넣어 주시오! 남원을 피눈물로 물들인 그 살인자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마시오!"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병실 안에 메아리쳤다.
재환은 뒤돌아보지 않고 격리 병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재환의 눈빛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는 곁을 따르는 안진우 검사와 대기 중이던 수사관들에게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안 검사님, 즉시 공중전화로 서울지검 특수부 강인철 부장님께 직통 유선을 연결하십시오. 황선태 국장 가족에 대한 긴급 신변보호조치를 요청하고, 방배동 자택에 무장 수사관들을 즉각 배치하라고 하십시오. 한 치의 빈틈도 없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성 검사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안진우 검사가 복도 끝 행정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재환은 무전기를 든 수사관을 향해 명령을 이어갔다.
"그리고 강태훈 계장에게 즉시 무전을 치십시오. 남원지청에 대기 중인 특수수사팀 전원과 지원 요청한 무장 기동 수사관들을 전원 비상 소집하십시오. 관용 승합차 세 대를 나누어 타고 즉시 지리산 산내면 부운리로 집결하라고 하십시오. 타깃은 강태석의 비밀 별장입니다. 방탄복을 착용하고 가스총과 삼단봉, 진압 장비를 전원 휴대하라고 전하십시오."
"예, 검사님!"
수사관이 다급히 무전기 안테나를 뽑아 올리며 지청 당직실 주파수를 맞추었다.
7. 폭풍 속으로
의료원 1층 로비를 가로지르는 성재환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등 뒤로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이 넋을 잃고 그 서슬 퍼런 기세를 바라보았다.
병원 현관 유리문을 밀고 나서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센 폭우가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원을 집어삼킬 듯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가 지리산 능선 너머에서부터 우르릉 쾅쾅 울려 퍼졌다.
먹구름이 지상 낮게 깔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사위는 짙은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승합차에 다시 올라탄 재환은 빗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운전석의 수사관을 향해 낮게 명령했다.
"지리산 뱀사골, 산내면 부운리로 달립니다. 사이렌 켜고, 신호 무시하고 최고 속도로 밟으십시오."
"예, 검사님! 꽉 잡으십시오!"
붉은 경광등이 번쩍이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를 찢고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승합차 바퀴가 거대한 물보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아스팔트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차량은 미끄러운 빗길을 가르며 지리산 자락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재환은 품속 양복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금빛 닙과 캡 상단에 새겨진 선명한 라틴어 법언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리고 그 곁에 자리한, 지유가 새벽 찬바람 속에서 전해준 하얀 종이쪽지.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재환은 손안에 쥔 특수 합금 열쇠를 힘주어 쥐었다.
열쇠의 날카로운 톱니가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며 서늘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 통증은 피로에 지친 신경을 얼음물처럼 차갑고 명징하게 각성시켰다.
7년 전, 열여덟 소년의 가슴에 새겨졌던 통한의 눈물과 남원의 비극.
과수원을 빼앗기고 억울하게 피를 토하며 죽어간 지유의 아버지.
남편의 한을 품은 채 끝내 차가운 영안실로 떠나야 했던 지유의 어머니.
그리고 권력의 칼날 아래 신음하면서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김밥집의 불을 밝혔던 구도심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태석과 김문현이라는 거대한 거악의 사슬이 마침내 그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차가운 폭우를 뚫고, 거악을 단죄할 검사의 서슬 퍼런 칼날을 실은 승합차가 지리산의 깊은 어둠 속을 향해 번개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