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 조사의 반격
1. 차가운 복도의 대치
남원지청 2층 복도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는 방금 전까지 청사 정문을 가득 메웠던 어용 시위대의 비명과 흩어지는 발소리가 빗물에 젖은 채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지청 1층 당직실 앞에는 강태훈 계장이 팔짱을 낀 채 서서 지유의 상처를 돌보는 의료진을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성재환은 계단을 천천히 밟고 2층으로 올라섰다.
그의 손에는 지유가 온몸으로 감싸 안아 지켜냈던 3단 알루미늄 보온 도시락과, 대검 중수부장의 직인이 선명히 날인된 특수수사 훈령 철이 들려 있었다.
도시락 뚜껑 안쪽에 흑청색 잉크로 정갈하게 적혀 있던 글귀,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라는 열두 글자가 재환의 손바닥 안쪽에서 심장 박동처럼 뜨겁게 고동쳤다.
복도 끝 204호 검사실 문 앞에는 대검찰청 감찰본부 감찰1과 소속의 검사와 수사관 세 명이 굳은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수장인 감찰1과장 정태섭은 1층 마당에서 당한 굴욕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태섭은 와이셔츠 깃을 거칠게 바로잡으며 성재환을 쏘아보았다.
"성재환 검사, 방금 정문 앞에서 벌인 그 오만한 행태를 감찰보고서에 한 줄도 빠짐없이 기록할 거요. 특임 검사 훈령 따위를 방패 삼아 직무감찰을 집행하러 온 본청 직속 상관의 손목을 꺾고 모욕한 죄, 검사징계법은 물론이고 형법상 특수공무집행방해로 반드시 구속영장을 청구할 테니 그리 아시오."
정태섭의 메마른 입술에서 튀어나온 침방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하얗게 튀었다.
그의 뒤에 선 젊은 감찰관 한 명은 정태섭의 살기등등한 기세와 성재환의 흔들림 없는 눈빛 사이에서 난처한 듯 서류철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안진우 검사였다.
재환은 정태섭의 서슬 퍼런 위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묵직한 가죽 구두 소리를 차분하게 울리며 204호 검사실 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정태섭 부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복도 벽면의 차가운 타일을 타고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서울에서 내려오실 때 법무부 기조실과 김문현 의원실에서 무엇을 약속받았는지 모르겠지만, 헛된 망상은 그쯤에서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공무집행방해를 운운하시기 전에, 부장님이 오늘 새벽 들고 오신 그 '긴급 직무정지 통보서'라는 종이 쪼가리가 대한민국 형법상 어떤 중대 범죄에 해당하는지부터 먼저 따져봐야 할 테니까요."
"종이 쪼가리?"
정태섭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주머니에서 직무정지 명령서를 다시 꺼내 흔들었다.
"이건 대검 감찰위원회 위원장과 감찰본부장의 전결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결재된 행정처분 공문이야! 자네는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사적 보복과 치정 관계에 얽혀 수사권을 남용했어! 이 공문이 도달한 순간부터 자네에겐 204호 검사실의 문을 열 권한도, 기록을 열람할 권한도 전혀 없어! 비키게! 당장 검사실 압수수색을 개시한다!"
정태섭이 검사실 손잡이를 거칠게 움켜쥐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문고리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단단히 멈춰 섰다.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정태섭의 손등을 꿰뚫듯 내리꽂히고 있었다.
"손 떼십시오, 정 부장님."
재환은 도시락을 옆에 선 김 경위에게 건네며, 품 안에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그리고 검찰사무보고규칙 제3조. 수사 중인 주임검사에 대한 직무 배제는 단순한 행정명령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피의자가 구속 수감 중이고 법정 구속적부심이 진행 중인 사건에서, 법원의 재판권 행사 직전에 주임검사를 강제로 배제하는 행위는 사법방해이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나아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범인도피죄의 공동정범에 해당합니다."
"뭐, 범인도피?"
정태섭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재환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정태섭의 손을 서류철 모서리로 툭 쳐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부장님이 그토록 덮고 싶어 안달이 난 그 사법 농단의 진실이 무엇인지, 제가 직접 작성한 법리 검토서와 증거 목록을 보며 법률가 대 법률가로서 한 조항씩 따져 묻겠습니다."
2. 법리 검토서의 칼날
204호 검사실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지독한 종이 냄새와 푸른 잉크 냄새가 훅 끼쳐왔다.
벽면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남원시 지적도와 12개의 차명 계좌 금융 추적도, 그리고 수백 권에 달하는 압수수색 바인더가 형광등 아래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요천 제방 제1공구 붕괴 현장에서 채취한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흙탕물이 튄 덤프트럭 살인미수 현장의 페인트 도막이 투명 증거물 봉투에 담겨 놓여 있었다.
정태섭은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수사 기록의 분량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지방 소도시의 토착 비리 수준이 아니었다.
서초동 대검 중수부 본청 8층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완벽하게 직조된 거대한 권력형 게이트의 해부도였다.
재환은 책상 상석으로 걸어가 정태섭의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정태섭은 자존심이 상한 듯 턱을 치켜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행한 안진우 검사와 두 명의 수사관은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정태섭의 등 뒤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재환은 책상 서랍에서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창가로 스며든 흐린 잿빛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번뜩였다.
탕.
재환이 두꺼운 녹색 표지의 문건 하나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
표지에는 흑청색 잉크로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대검 감찰1과의 표적 직무정지 명령에 대한 법리 검토 및 위법성 조각 사유 반박서 .
"부장님께서 본청에서 들고 내려오신 직무정지 통보서 제1항. '피의자 강태석과의 가문 간 사적 원한 및 치정으로 인한 표적 수사 의혹.'"
재환의 만년필 끝이 서류의 첫 문단을 짚었다.
"부장님, 감찰보고서에 그따위 허위 프레임을 기재하기 전에, 피의자 강태석의 전주교도소 접견 녹음테이프와 옥중 비밀 통화 일지부터 먼저 읽어보셨어야 했습니다."
재환은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철컥 소리와 함께, 전주교도소 보안과 교도관 이진택의 묵인 아래 강태석이 처남 조상태, 그리고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 보좌관과 나눈 통화 육성이 흘러나왔다.
-'어이, 성재환 그놈 손발 묶었어?
당장 감찰부장 내려보내서 기자회견 기사 빌미로 직무정지 치라고 해!
김문현 의원한테 전해라.
내가 입 열면 춘향 테마랜드에서 들어간 20억 무기명 CD 스무 장, 국회 의원회관 캐비닛 털어서 다 까발릴 테니까 알아서 수갑 채워 데려가라고!'-'시장님, 감찰1과 정태섭 부장이 새벽에 남원으로 내려갑니다.
성재환 그 자식 바로 대기발령 치고 검사실 봉인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지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정태섭 자신의 이름이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정태섭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등 뒤에 서 있던 안진우 검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재환은 녹음기를 끄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부장님이 말씀하시는 '적법한 감찰권 행사'입니까? 특가법상 뇌물수수 피의자이자 살인교사 피의자인 자의 협박과 사주를 받아, 그 피의자가 지정한 날짜와 시각에 정확히 맞춰 수사 검사의 목을 베러 내려온 것. 이것이 대검찰청 감찰본부의 공식 입장입니까?"
"이, 이건…… 날조야!"
정태섭이 다급하게 언성을 높였다.
"교도소 안에서 갇힌 자가 지껄인 헛소리를 어떻게 감찰관을 음해하는 증거로 삼는단 말인가! 피의자의 일방적인 진술일 뿐이야!"
"일방적인 진술이요?"
재환은 비웃음을 흘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비밀 대여금고에서 압수한 원천 비자금 분배 대장의 복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부장님, 남원 제1건설의 특별 대외 협력비 장부 48페이지를 보십시오. 1995년 11월 14일, 남원상록골프장에서 강태석이 건넨 현금 3천만 원. 수령자 란에 '대검 감찰 정'이라는 서명과 함께 차명 계좌 입금 전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남원시청에 접수되었던 춘향 테마랜드 입찰 담합 내사 청원서가 대검 감찰본부에서 '근거 없음'으로 전격 종결 처리되었죠."
재환의 만년필 끝이 정태섭의 코앞을 가리켰다.
"그 당시 그 사건을 종결 결재한 주임 감찰관이 누구였습니까, 정태섭 부장님?"
3. 흔들리는 저울
검사실 안은 얼어붙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정태섭의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배어 나와 눈썹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1년 전 은밀히 덮어주었던 지방 토착 비리의 뇌물 장부가, 이 남원의 외딴 지청 책상 위에 완벽한 전산 전표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재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정태섭의 왜소한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 형법 제151조 범인도피,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부장님이 오늘 저에게 강요하려는 직무정지는 직무상의 정당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뇌물 범죄와 배후 권력 김문현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감찰권을 남용한 명백한 사법 농단입니다."
재환은 책상 위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장 정종길 중수부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긴급 특별수사명령서 원본이었다.
"대검 훈령 제402호 제4조. '본 특별수사 주임검사의 직무에 대한 이의제기 및 감찰 조사는, 대검 감찰위원회의 단독 처분으로 갈음할 수 없으며, 중수부장과의 합의 및 검찰총장의 서면 재가를 요한다.' 부장님, 총장님의 서면 재가를 받아오셨습니까? 정종길 중수부장님과 사전 합의는 거치셨습니까?"
정태섭의 입술이 마른 낙엽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 그건…… 사안이 긴급하여…… 사후 추인을 받기로……."
"사후 추인이요?"
재환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절차를 어긴 권력 행사는 그 자체로 불법입니다! 감찰관이라는 자가 법률의 기본인 적법 절차의 원칙(Due Process of Law)조차 무시하고, 살인교사범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 지방 지청의 수사를 틀어막으려 든단 말입니까! 검찰청법 제7조 제2항에 따라, 본 검사는 부장님의 위법하고 부당한 직무정지 명령을 전면 거부합니다! 동시에, 이 시각부로 정태섭 부장검사를 특가법상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피의자로 정식 입건합니다!"
"뭐, 뭐라고?!"
정태섭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감히 일개 평검사가 본청 감찰부장을 입건해? 네놈이 제정신이냐!"
"특임 검사의 관할은 범죄가 있는 모든 곳입니다."
재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문가에 서 있던 수사관들을 향해 외쳤다.
"강태훈 계장!"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특수부 수사관 네 명이 검사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강태훈 계장의 손에는 번쩍이는 강철 수갑과 피의자 신문조서 서식철이 들려 있었다.
"정태섭 피의자의 소지품 일체와 서울에서 들고 온 감찰 서류를 즉시 압수수색하고, 신병을 제2취조실로 분리 인치하십시오. 김문현 의원실과의 사전 통화 내역이 담긴 무선전화기와 호출기는 긴급 압수물로 분류합니다."
"이, 이것들이 미쳤어! 손대지 마! 나 대검 부장이야!"
정태섭이 수사관들의 손을 뿌리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특수부 수사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태섭의 양팔을 단단히 꺾어 잡았다.
몸부림치던 정태섭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그 순간, 정태섭의 뒤에서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감찰관, 안진우 검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성 검사님."
안진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맑게 깨어 있었다.
재환은 수사관들에게 손짓하여 동작을 멈추게 한 뒤, 안진우를 묵묵히 응시했다.
안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정태섭의 가죽 가방을 내려다보더니, 결심한 듯 품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안 검사! 자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정태섭이 피를 토하듯 고함을 찔렀다.
그러나 안진우는 정태섭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성재환 검사의 굳은 얼굴과, 책상 위에 단정하게 놓인 지유의 보온 도시락으로 향해 있었다.
4. 내부자의 귀띔
안진우 검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재환 검사님. 저는…… 정태섭 부장의 지시로 이번 감찰에 실무 배속된 감찰1과 안진우 검사입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안진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안 검사님."
"저도 처음엔 본청에 접수된 첩보와 피의자 강태석의 기자회견 내용만을 보고, 남원에서 정말로 심각한 수사권 남용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정문 앞에서 그 여학생이 피를 흘리며 들고 온 도시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성 검사님이 제시하신 완벽한 금융 계좌 추적도와 법리 검토서를 보며, 제 자신이 법복을 입고 무슨 짓을 하러 이곳에 내려왔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안진우의 목소리에 진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정태섭이 꺾인 팔을 파들파들 떨며 저주를 퍼부었다.
"안진우! 네놈이 미쳤구나! 서울로 돌아가면 네놈 검사 생활은 끝장이야! 법무부 기조실에서 네놈 인사기록 카드에 빨간 줄을 긋게 만들 테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부장님."
안진우는 마침내 정태섭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도둑놈의 돈을 받고 살인범을 빼돌리기 위해 후배 검사의 등에 칼을 꽂는 조직이라면, 그런 곳에서 출세하는 것 자체가 치욕입니다."
안진우는 책상 위의 봉투를 재환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성 검사님, 이건 정태섭 부장이 본청 기조실장에게 올리려던 '남원지청 특별수사 무마 및 인계 계획서' 초안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서울 혜화동 청운각에서 있었던 긴급 대책 회의 메모가 들어 있습니다."
재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혜화동 청운각.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지방 자치단체의 공천 장사와 비자금을 주무르던 바로 그 본거지였다.
재환이 봉투를 뜯어 문건을 펼치자, 정태섭의 친필로 휘갈겨 쓴 메모가 드러났다.
'김문현 위원장 지침: 1. 성재환 즉시 직무 배제 후 대검 감찰본부로 압송 대기.
2. 남원지청 수사팀 해체 및 기록 일체 서울 중앙지검 특수1부로 이첩 후 기소유예 처리.
3. 강태석 시장 구속 취소 신청 인용 및 병보석 출소 조율.
4. 법무부 장관 결재 시한: 오늘 정오.'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정태섭의 감찰은 단순한 진상 조사가 아니라, 오늘 정오를 기점으로 남원의 수사팀을 완전히 공중분해시키고 기록을 빼앗아 서울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덮어버리려는 치밀한 사법 살해 작전이었다.
안진우가 덧붙여 말했다.
"성 검사님,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정태섭 부장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법무부 기조실은 정오에 장관 직권으로 성 검사님에 대한 면직 제청을 청와대에 올릴 예정입니다. 정오가 지나면 법적으로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중앙의 그 거대한 카르텔을 깨부수려면, 그 전에 강태석과 김문현을 완벽히 침몰시킬 수 있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증거'를 법원에 제출해야 합니다."
안진우의 진심 어린 경고에 재환은 서류를 덮으며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안 검사님. 법조인의 양심을 지켜주셔서."
재환은 결연한 표정으로 강태훈 계장을 돌아보았다.
"정태섭 피의자를 지하 취조실로 인치하고 외부와의 모든 통신을 차단하십시오. 안진우 검사님은 감찰본부 파견 수사 검사로서 본 특별수사팀에 정식 합류하도록 대검 중수부에 유선 승인을 요청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검사님!"
강태훈 계장이 정태섭을 끌고 나가자, 정태섭의 악에 받친 고함이 닫히는 철문 너머로 멀어져 갔다.
검사실 안에는 다시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남은 시간은 이제 불과 세 시간 남짓.
정오가 되기 전, 서울의 사법 권력이 움직이기 전에 이 남원의 부패를 영원히 끝장낼 최후의 한 방이 필요했다.
바로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지청 직통 내선 전화기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5. 빗속을 뚫고 온 전갈
재환은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낚아챘다.
"204호, 성재환 검사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다급한 비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극심한 흥분과 공포로 찢어질 듯 떨리고 있었다.
-'검사님! 저 남원의료원 3층 중환자실 담당의입니다!'-'선생님, 무슨 일입니까?'-'황선태 국장…… 의식불명이었던 황선태 국장이 방금 눈을 떴습니다!'-'황 국장이 깨어났다고요?!'
재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정리 삼거리에서 15톤 덤프트럭에 들이받혀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였다.
의사들은 뇌사 상태를 경고하며 소생 가능성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했던 자였다.
담당의의 다급한 설명이 이어졌다.
-'혈압이 급격히 오르더니 산소호흡기를 손으로 뜯어내며 검사님을 찾고 있습니다!
의식이 온전치 않은 상태인데도 계속해서 '성 검사를 불러달라', '지리산…… 지리산 장부를 찾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오셔야 합니다!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서 언제 다시 심정지가 올지 모릅니다!'-'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즉시 가겠습니다!
환자의 신변을 철저히 통제하십시오!
외부인의 출입을 절대 금지하십시오!'
철컥.
수화기를 내려놓는 재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리산 장부.
강태석이 황선태를 죽여서라도 빼앗으려 했던 자택의 업무 수첩 외에, 강태석의 30년 토건 권력이 축적된 '진짜 비밀 장부'가 지리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김문현과 강태석의 목줄을 동시에 끊어버릴 최후의 스모킹 건이었다.
재환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검은색 레인코트를 낚아채듯 걸쳤다.
그때, 검사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지유가 들어섰다.
이마에 하얀 거즈를 덧대고 손등에는 붕대를 감은 채였으나, 그녀의 얼굴은 새벽의 참극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단정했다.
지유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3단 보온 도시락의 뚜껑을 가리키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 한 숟가락도 못 떴지, 재환아?"
재환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지유의 그 따뜻하고 애절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지유야……."
"의사 선생님 전화 소리, 밖에서 다 들었어. 황 국장님이 깨어나신 거지?"
지유는 조용히 다가와 재환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두 손으로 반듯하게 매만져 주었다.
붕대 감긴 지유의 손가락 끝에서 풍겨오는 방앗간 참기름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재환의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어서 가 봐. 남원의 상처를 끝까지 치료해 줘야지. 난 여기서 계장님들과 함께 검사실을 지키고 있을게."
지유는 도시락 통에서 은박지에 정성스레 싼 김밥 한 줄을 꺼내 재환의 레인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가면서 꼭 씹어 먹어.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려면…… 밥심이 있어야 하잖아."
재환은 주머니 속 김밥의 묵직한 온기를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그 온기는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그리고 비 내리는 플랫폼에서 지유가 건네주었던 영혼의 온기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재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유의 어깨를 굳게 감싸 안았다.
"기다려 줘. 오늘 안에…… 모든 걸 끝내고 올게."
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사실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질주하는 그의 등 뒤로 안진우 검사와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빗물에 젖은 권총을 장전하며 뒤따랐다.
밖으로 나서자, 남원의 거친 가을비가 지청 앞마당의 핏자국과 계란 파편들을 맹렬하게 씻어내리고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대기하고 있던 검찰 승합차의 바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나갔다.
차창 밖으로 흐릿하게 멀어지는 남원의 거리 너머로, 짙은 비구름에 뒤덮인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이 사나운 맹수처럼 검푸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오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두 시간.
진실을 묻으려는 거악의 음모와, 그것을 파헤치려는 청년 검사의 서슬 퍼런 칼날이 남원의료원 3층 중환자실을 향해 빗속을 뚫고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