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개발중입니다! 오픈예정은 12월25일 예정하고 있습니다.
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6화

끝까지 남는 이유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은 흔적과 남은 냄새

 

깨진 유리창 틈새로 불어닥치는 아침 바람에는 여전히 독한 석유 냄새와 유성 페인트 특유의 역한 쇠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골목 어귀를 휘감아 도는 칼바람이 성긴 판자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지유(池幽)의 앙상한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러나 지유는 손가락 끝이 얼얼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물기 밴 행주를 조리대 위에 다시금 단단히 쥐어 올렸다.

 

손톱 밑은 이미 새벽 내내 긁어낸 붉은 안료와 까만 석유 찌꺼기가 엉겨 붙어 살갗이 벌겋게 짓무른 채 피고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거친 철 수세미질로 문질러 댄 손등 곳곳은 허옇게 일어나 껍질이 벗겨졌고, 찢어진 상처 틈으로 스며드는 독한 기름기 때문에 뼈마디까지 시큰거리는 통증이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뼘도 조리대 앞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놋쇠 솥을 화구 위에 얹고 파란 가스 불꽃을 지폈다.

 

공설 방앗간에서 마지막으로 짜왔던 통깨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솥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와 한데 뒤섞여 가게 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바깥에서 맴돌던 매캐하고 폭력적인 악취가 아주 조금씩 뒤로 물러앉았다.

 

양철 밥솥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젖히자 차진 쌀밥의 구수한 온기가 지유의 창백한 뺨과 이마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소금 한 꼬집과 볶은 참깨, 그리고 아껴둔 참기름을 두 주걱 푹 떠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위에 고루 둘렀다.

 

나무 주걱을 쥔 지유의 손마디가 떨릴 때마다 찢어진 살갗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주걱을 눕혀 밥알을 가르고 알알이 기름 코팅을 입히는 손길만큼은 생전의 어머니가 곁에서 가르쳐 주던 그 정갈한 모습 그대로였다.

 

"지유야, 손 좀 봐. 피가 뚝뚝 떨어지잖아. 일단 이거 내려놓고 약부터 바르자. 응? 붕대라도 칭칭 감고 해, 제발."

 

가게 한구석에서 물걸레로 부서진 의자 다리를 닦아내던 윤하은이 참지 못하고 헐레벌떡 달려와 지유의 여윈 팔목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하은의 두 눈은 간밤의 끔찍했던 기억과 새벽 내내 흘린 눈물 탓에 붉게 충혈되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은의 시선은 지유의 짓무른 손톱 밑과 붉은 페인트로 물든 앞치마에 가닿아 있었다.

 

"괜찮아, 하은아. 밥알을 주무르다 보면 기름기가 돌아서 금방 아물어. 지금 뜸이 막 들었을 때 비벼놓지 않으면 밥알이 굳어서 김밥 옆구리가 다 터져 나가."

 

지유는 애써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는 처연했으나, 그 어떤 비명이나 악다구니보다도 깊은 고요함과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지유는 대나무 김발 위에 바삭한 김을 펴놓고, 그 위에 온기 품은 밥을 한 움큼 덜어내어 얇고 고르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단무지와 당근, 곱게 부쳐낸 달걀지단을 올리는 손놀림에는 티끌만 한 망설임조차 깃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도마 위에 칼이 닿을 때마다 맑고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 바람벽에 덧댄 덜컹거리는 출입문 문풍지를 거칠게 밀치며 누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남원지원 법정 복도에서 성재환 검사를 배웅하고 곧장 구도심 골목길을 사력을 다해 내달려온 최민재였다.

 

2. 서울행 기차표 두 장

 

민재의 낡은 갈색 코트 자락은 이른 아침의 흙먼지와 진땀으로 엉망진창 얼룩져 있었다.

 

가게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찔러오는 독한 석유 냄새와, 회색 블록 벽면에 허옇게 흉터처럼 남은 붉은 페인트의 잔해를 본 민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 피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불태워 죽인다'는 협박 글자의 획들이 여전히 섬뜩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지유야……."

 

민재는 목구멍이 턱 하니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지유의 피투성이가 된 손등과 짓무른 손톱, 그리고 그 처참한 손으로 묵묵히 밥을 말고 있는 모습에 멎었다.

 

민재의 거친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렸고, 외투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에서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민재야, 숨 좀 돌려. 재환이는? 법정에 무사히 들어갔어?"

 

지유가 김밥을 말아 쥐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 서리처럼 서늘하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검은 눈동자만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등대 불빛처럼 또렷했다.

 

"어. 들어갔어. 강태훈 수사관이랑 김 경위, 박 경사까지 전부 붙었어. 어제 박철구 놈 갈대밭에서 때려잡아 받아낸 자백 조서랑 현장 타이어 스키드 마크, 덤프트럭 페인트 시편, 주유소 CCTV 영상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서류 상자에 쑤셔 넣고 들어갔어. 문성현 부장판사 앞이니까…… 강태석 그 살인마 새끼 구속적부심은 무조건 기각이야. 재환이가 법정에서 그놈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겠다고 했어."

 

민재는 가슴을 쥐어뜯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더니 깊숙한 코트 안주머니에서 땀에 젖어 구깃구깃해진 얇은 녹색 전표 종이 두 장을 꺼내 조리대 모퉁이에 거칠게 탁 내려놓았다.

 

철도청 특유의 녹색 활자가 선명하게 박힌 열차 승차권이었다.

 

남원발 서울행,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무궁화호.

 

"이게 뭐야, 민재야?"

 

지유가 밥풀 묻은 손을 허공에 멈추고 조리대 모퉁이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서울 가는 차표야. 두 장 끊었어. 너랑 하은이 거다."

 

민재의 목소리가 짓눌린 쇠소리처럼 다급하게 떨려 나왔다.

 

"지금 당장 가게 문 닫고 짐 챙겨. 다른 건 다 내버려 두고 옷가지만 가방에 몇 개 쑤셔 넣고 나랑 같이 남원역으로 가자. 내가 역 플랫폼 안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서울 영등포역에 내리면 내 대학 선배가 하는 출판사 사무실이 있어. 내가 이미 전화해서 방 한 칸 비워달라고 다 얘기 끝내놨어. 거기서 숨어 있어. 아니, 재환이가 이 썩어빠진 남원 바닥 싹 다 뒤집어엎고, 강태석이랑 한양토건 조폭 놈들 전부 쇠고랑 채워서 감옥에 처넣을 때까지 거기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

 

지유는 아무런 대답 없이 민재의 충혈된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왈칵 솟구치는 공포나 동요 대신, 바닥 모를 서글픔과 시린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민재야."

 

"지유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민재가 참지 못하고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굵은 핏대가 시퍼렇게 솟구쳐 올랐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저 바깥 벽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저 붉은 글씨가 안 보여? '불태워 죽인다'고 써놨잖아! 저놈들은 시늉만 하는 양아치들이 아니야! 진짜로 신나 들고 와서 불을 지르고도 남을 놈들이라고! 도로 한복판에서 덤프트럭으로 승용차를 밀어버려서 시청 국장 하나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놈들이야. 다음 차례가 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어? 재환이가 법정에서 이기면 이길수록, 강태석 저 악귀 같은 놈들은 벼랑 끝에 몰려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유야, 제발 도망쳐!"

 

3. 도망치지 않는 이유

 

민재의 핏발 선 절규가 비좁은 김밥집 안을 찌렁찌렁 울렸다.

 

가게 구석에서 걸레를 쥐고 있던 하은이 와락 눈물을 쏟아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은 역시 새벽 내내 붉은 페인트를 철 수세미로 긁어내며, 언제 등 뒤에서 쇠파이프를 든 괴한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에 오금을 떨었던 터였다.

 

그러나 정작 테러의 표적이 되어 피 흘리는 손으로 칼을 쥔 지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유는 칼끝을 도마 위에 살포시 얹고 숨을 골랐다.

 

서슬 퍼런 칼날이 단단하게 말아 쥔 김밥의 허리를 일정한 두께로 베어낼 때마다 사각, 사각 하는 서늘한 파열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미친 듯이 요동치던 가게 안의 시간을 차분하게 정돈하는 무거운 시계추의 진동 같았다.

 

지유는 썰어낸 김밥 한 줄을 정갈하게 은박지 위에 눕히며, 아주 낮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민재야."

 

"어?"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재환이는 어떻게 돼?"

 

민재는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지유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 깊게 스며든 붉은 페인트는 비누로 문지르고 솔질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짓무른 살갗 아래에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칼을 쥐며 다져온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7년 동안 묵묵히 새벽밥을 안치며 버텨온 삶의 뿌리가 박혀 있었다.

 

"내가 여기서 무섭다고 짐을 싸서 도망치면, 저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거야. 삼거리 김밥집 문을 닫아걸게 만드는 거. 저 벽에 칠해진 붉은 글씨는 나 한 사람 겁주려고 칠한 게 아니야. 남원 사람들 전부 보라고 칠해놓은 거지."

 

지유의 시선이 깨진 유리창 틈새를 지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고 골목길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구도심 상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저 사람들은 지금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어. 시장이라는 자가 깡패들을 앞세워 힘없는 사람 하나를 어떻게 짓밟는지,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공포 앞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지 도망치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고. 내가 오늘 이 차표를 쥐고 서울로 숨어버리면, 저 사람들은 영원히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해. '거봐라, 결국 도망쳤잖아. 권력에 거스르면 저 꼴 나는 거야' 하면서 평생을 저 비열한 놈들의 발밑에서 개 돼지처럼 기어 다니겠지."

 

지유는 은박지의 네 모서리를 꼼꼼하고 반듯하게 여몄다.

 

그 손길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리고 재환이……."

 

재환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는 순간, 지유의 목소리에 깊고 묵직한 물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눈물이 아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얼음물에 처박을 때 피어오르는 서슬 퍼런 담금질의 수증기였다.

 

"재환이는 지금 남원지원 법정에서 혈혈단신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어. 서울에서 대검찰청 감찰반 놈들이 내려와서 재환이 숨통을 틀어쥐려 하고, 지청 안에도 강태석의 돈을 받아먹은 첩자들이 우글거려. 그 살얼음판 같은 곳에서 재환이가 무엇을 믿고 버티겠어?"

 

지유는 제 왼쪽 가슴 옷섶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눌렀다.

 

그 얇은 무명옷 안쪽에는 7년 전 재환이 구 남원역 플랫폼에서 떠나기 직전 건네주었던, 모서리가 닳고 닳은 학생증 증명사진이 숨 쉬고 있었다.

 

지유가 모아둔 흑청색 잉크로 뒷면에 꾹꾹 눌러썼던 서약.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여덟 글자의 필적이 지금도 지유의 심장 박동을 따라 뜨겁게 맥동하고 있었다.

 

"재환이가 목숨 걸고 검사 법복을 입고 이 진흙탕 같은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 건,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가 여기 있기 때문이야. 내가 이 자리를 버리고 도망치는 순간…… 재환이의 싸움도 도망치는 게 돼. 재환이가 법정에서 휘두르는 칼은 단순히 자기 가문의 죄를 씻기 위한 복수의 칼이 아니야. 나를 지키고, 우리 어머니의 한을 풀고, 이 썩어빠진 남원을 바로잡겠다는 신념이지. 그런데 내가 무섭다고 숨어버리면, 재환이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 위험한 싸움을 계속해야 해?"

 

4. 흔들리지 않는 뿌리

 

민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 끝까지 턱턱 차올랐던 수많은 설득과 이성적인 논리들이, 지유의 맑고 서늘한 눈빛 앞에서 힘없이 바스라져 내렸다.

 

기자랍시고 남원시청과 남원일보사를 들쑤시며 세상의 온갖 더러운 권력 구조를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이 작은 김밥집 조리대 앞에서 피투성이 손으로 서 있는 지유보다 한참이나 비겁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지유야…… 하지만 넌 너무 위험해. 저놈들이 오늘 밤에 진짜 횃불을 들고 오면……."

 

"민재야, 나 7년 동안 이 자리에서 어머니 피토하는 거 보면서 버텼어."

 

지유의 눈동자가 깊고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에는 지난 2,560일 동안 삼거리 김밥집을 스쳐 간 모진 풍파의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성호석 전 시장이 서울로 도망치듯 떠나고, 강태석이 시장실을 차지하고 조폭 놈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행패를 부릴 때도 난 도망치지 않았어. 시청 위생과 놈들이 들이닥쳐 참기름병을 깨부수고, 소방과가 영업을 정지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도 도망 안 갔어. 어머니 장례식장에 깡패들이 진을 치고 시신을 빼돌리겠다고 협박할 때도…… 난 이 가게를 지켰어."

 

지유는 조리대 모퉁이에 놓인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표 두 장을 가만히 집어 들었다.

 

초록색 활자로 인쇄된 '남원-서울'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유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차권을 두 손으로 쥐고 단숨에 반으로 찢었다.

 

차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에 잠긴 가게 안을 갈랐다.

 

지유는 찢어진 종이를 겹쳐 쥐고 다시 한번 가로질러 찢었다.

 

네 조각으로 너덜너덜해진 기차표 조각들이 조리대 모퉁이로 힘없이 흩뿌려졌다.

 

"내가 지켜야 할 건 이 낡은 판잣집이 아니야. 재환이가 돌아올 자리,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그 약속이야. 난 여기서 김밥을 쌀 거야. 오늘 아침에도, 내일 아침에도. 저들이 불을 지르면 물을 뿌려 끌 거고, 쇠파이프로 때려 부수면 박스 테이프로 다시 붙일 거야. 재환이가 법정에서 그놈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내고 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올 때까지, 난 여기서 따뜻한 밥을 짓고 있을 거야."

 

민재는 바닥에 떨어진 기차표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눈앞의 한지유는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괴물 앞에서, 성재환 검사가 사법의 칼을 쥐고 전방에서 돌격하는 장수라면, 한지유는 그 장수의 등 뒤를 지키며 단 한 뼘도 물러서지 않는 가장 견고하고 웅장한 성벽이었다.

 

"……알았다."

 

민재는 떨리는 손을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더는 도망치라는 말 안 해. 대신, 나도 여기서 안 나가. 신문사고 뭐고, 나도 이 골목에서 뼈를 묻을 거야."

 

"민재야, 넌 네 싸움을 해야지."

 

지유가 찢어진 표 조각들을 쓸어 담으며 민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재환이가 법정에서 싸우는 동안, 바깥에서 그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지. 강태석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려 했는지, 왜 저들이 내 가게에 붉은 페인트를 칠했는지 네가 세상에 소리쳐야 해. 그게 네가 할 싸움이잖아."

 

민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유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자신이 쥐어야 할 것은 비겁한 도피용 기차표가 아니라, 부패를 찢어발길 펜과 취재 수첩이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접촉했던 지역 방송사 탐사보도팀이 남원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현장을 보여주어야 했다.

 

피 흘리는 손으로 김밥을 마는 지유와, 붉은 페인트로 협박당한 구도심 상인들의 참상을 온 천하에 생중계해야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지유야."

 

민재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반드시 방송 중계차를 이 골목으로 끌고 올게. 강태석 그 살인마 새끼의 목줄을 전국 방송 뉴스에 걸어버릴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줘."

 

5. 법정으로 향하는 바람

 

민재가 출입문을 열고 골목 밖으로 내달린 뒤, 김밥집 안에는 다시 무거운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는 아까의 불안하고 숨 막히던 침묵이 아니었다.

 

어떤 폭풍우가 들이닥쳐도 꺾이지 않을 대지(大地)의 굳건한 숨결이었다.

 

지유는 조리대 옆 작은 나무 선반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곳에는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간신히 건져낸, 강태석이 내던져 깨뜨렸던 흑청색 잉크병의 둥근 주둥이 조각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지유는 검푸른 잉크 얼룩이 말라붙은 그 서늘한 유리 조각을 손끝으로 가만히 어루만졌다.

 

'재환아.'

 

지유의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부름이 흘러나왔다.

 

지금쯤 남원 시내 외곽, 지리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법정의 육중한 문이 열렸을 것이다.

 

그 차갑고 엄숙한 법정 안에서, 재환은 검은 법복을 입고 홀로 우뚝 서서 피고인석의 강태석과 그를 비호하는 거대한 사법 카르텔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재환의 품속에는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검은 옻칠 만년필이 꽂혀 있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그 라틴어 법언처럼, 재환은 지금 무너진 요천 제방과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눈물을 가슴에 품고 분노를 벼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유는 앞치마에 묻은 밥풀을 털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게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불태워 죽인다'는 붉은 페인트 낙서를 보고 기겁하며 문을 걸어 잠그거나 도망쳤던 구도심 상인들이, 하나둘 골목 모퉁이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김밥집을 엿보고 있었다.

 

가게 문이 굳게 닫혀 있거나 지유가 피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 있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눈에, 환하게 켜진 백열전구와 그 아래서 단정하게 서서 김밥을 말고 있는 지유의 모습이 비쳤다.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여전히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 그 작은 여인의 모습을 본 상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건어물가게 배 씨도, 방앗간 김 씨도, 굳게 닫힌 제 점포 문틈으로 지유를 바라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공포가 물러간 자리에, 지독한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은아, 문 활짝 열어."

 

지유가 맑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 좀 통하게. 우리 오늘 평소보다 밥 두 솥 더 안쳐야 해."

 

"……응, 지유야!"

 

하은이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게 문을 양옆으로 활짝 젖혔다.

 

아침 햇살이 깨진 유리창을 통과해 참기름 냄새 가득한 조리대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6. 대검 감찰반의 그림자

 

같은 시각,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앞마당.

 

성재환 검사가 박철구의 자백 조서와 현장 감식 결과가 담긴 육중한 서류 상자를 든 강태훈 수사관과 함께 제1호 법정 출입문 계단을 밟으려는 찰나였다.

 

남원지원 정문 앞 흙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길목에 서울 번호판을 단 검은색 대형 세단 두 대가 거친 브레이크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며 짙은 남색 버버리 코트를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굳은 표정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번쩍이는 황금빛 대검찰청 감찰본부 표식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선두에 선 사내는 대검 감찰2과 소속의 부장검사이자, 과거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의 직속 사법 라인으로 검찰 내부에서 악명을 떨치던 자였다.

 

사내는 계단 위에 선 성재환을 향해 하얀 공문서 한 장을 치켜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원지원 법정 복도를 지키고 있던 청원경찰들과 일선 경찰관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성재환 검사!"

 

감찰부장의 서슬 퍼런 고함이 남원지원 뜰을 뒤흔들었다.

 

"법무부 장관의 직무 배제 명령과 대검 감찰본부의 즉각 대기발령 공문을 전달받았을 텐데,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자가 감히 법복을 입고 어디를 들어가는 건가? 즉시 서류를 인계하고 본청 감찰부로 동행하라!"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 박 경사가 본능적으로 성재환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일촉즉발의 대치 구도를 형성했다.

 

"물러서십시오! 주임검사의 정당한 공판 출석을 방해하는 행위는 공무집행방해입니다!"

 

강태훈 수사관이 서류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나 성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성재환의 시선은 감찰부장의 손에 들린 하찮은 종이 쪼가리 따위가 아니라, 가슴 안쪽 주머니에 꽂힌 검은 옻칠 만년필의 서늘한 촉감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는 방금 전 최민재가 법정 문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전해주었던 지유의 소식이 거대한 파도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유가 맨손으로 붉은 페인트를 다 지워냈습니다. 손톱 밑이 다 짓물러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성 검사님 흔들리지 말고 법정 들어가시라고, 자기는 여기서 밥 짓고 김밥 말고 있을 테니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성재환의 입가에 차갑고 서늘한 조소가 번졌다.

 

그것은 사법의 칼을 쥔 자가 마침내 온전한 확신을 얻었을 때 짓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자의 표정이었다.

 

성재환은 수사관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치고 천천히 감찰부장을 향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 굽 소리가 팽팽한 침묵을 깼다.

 

"대검 감찰본부가 언제부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살인교사 피의자의 구속을 돕는 사설 경호대가 되었습니까?"

 

재환의 나직하지만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남원지원 앞마당을 칼날처럼 베어냈다.

 

"이 법정 문은 대한민국 형사소송법과 헌법이 열어둔 문입니다. 날 막고 싶다면, 내 손목에 수갑을 먼저 채우고 이 자리에서 긴급 체포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썩 비키세요."

 

성재환의 서슬 퍼런 살기에 짓눌린 감찰부장의 발걸음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리산 자락에서 불어온 거센 삭풍이 성재환의 검은 코트 자락을 거칠게 펄럭였다.

 

남원의 30년 토착 거악을 단죄할 최후의 법정이, 마침내 그 거대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