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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3화

의문의 교통사고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팩스 용지 위의 그림자

 

새벽 네 시의 공기는 유리창 틈새로 스며드는 서리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전주지방검찰청(全州地方檢察廳) 남원지청(南原支廳) 204호 취조실 안에는 형광등의 가느다란 떨림음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성재환(成宰桓)은 손에 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닙 끝에 맺혀 있던 흑청색 잉크 방울이 백지 모서리에 작은 점 하나를 찍으며 굳어갔다.

 

맞은편에 앉은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는 핏발 선 눈을 연신 깜빡이며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냈다.

 

"성 검사님, 약속하신 겁니다."

 

황선태의 떨리는 음성이 방 안을 메웠다.

 

"제 딸아이 유학 비자 취소 안 되게 손써 주시고, 집사람 아파트는 추징에서 빼주셔야 합니다. 수첩은…… 그 수첩만 손에 쥐시면 강태석(姜泰錫)이 그 인간뿐 아니라 서울 놈들까지 싹 다 목을 딸 수 있습니다."

 

성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황선태의 초조한 얼굴을 꿰뚫었다.

 

"조건은 법과 원칙 안에서만 유효합니다. 하지만 황 국장이 제공하는 증거가 요천(蓼川) 제방 붕괴 참사와 비자금 상납의 고의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스모킹 건이라면, 형법상 자수 감경과 증인 보호 프로그램은 주임검사의 권한으로 철저히 보장하죠."

 

황선태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책상 앞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제 남원 집 안방 벽장 뒤편…… 한옥 기둥 밑에 흙벽을 파낸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 방수 테이프로 감싼 양철 통 안에 강 시장이 취임 첫날부터 제게 내렸던 결재 메모와 친필 지시 수첩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요천 제방 철근을 규격 이하로 줄이라고 한 날짜, 유성골재 가짜 전표로 14억 빼돌려 시장 관사로 직접 나른 일시까지 분초 단위로 다 적혀 있습니다."

 

그때였다.

 

취조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태훈 수사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강태훈의 손에는 방금 팩스기에서 토해져 나온 긴 감열지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강태훈이 숨을 몰아쉬며 감열지를 성재환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용지 상단에는 선명하게 찍힌 관인과 함께 굵은 고딕체의 문구가 박혀 있었다.

 

[법무부 기획조정실 통보 - 긴급 인사 발령 및 직무 배제 명령서]

 

성재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움직였군.'

 

내용은 노골적이었다.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에 대해 피의자 불법 감금 및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대검 감찰본부 대기발령을 명하며, 즉시 남원 관내 모든 사건의 수사 지휘권을 지청장에게 인계하고 서울로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발신 명의에는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의 비호 아래 움직이는 법무부 고위 간부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황선태가 그 팩스 문구를 훔쳐보더니 낯빛이 하얗게 질려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이, 이게 뭡니까? 직무 배제라니요? 성 검사님 옷 벗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럼 날 지켜주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단 말입니까?"

 

공포에 질린 황선태가 취조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강태석이가 교도소에서 날 죽이려고 사람을 풀었는데, 검사님이 쫓겨나면 난 어쩌라고요! 나 여기서 못 나갑니다! 아니, 차라리 서울로 도망쳐야 해!"

 

"진정하십시오, 황 국장."

 

성재환이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으로 황선태의 어깨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재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팩스 용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팩스 용지를 반으로 찢었다.

 

찌익 소리가 새벽 취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

 

"검사님!"

 

강태훈이 경악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성재환은 두 조각 난 종이를 다시 겹쳐 네 조각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상급자의 지휘·감독에 대한 이의제기권입니다. 법무부 장관이라 할지라도 개별 구체적 사건의 수사에 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중수부장의 특별수사명령서가 살아 있는 한, 이따위 불법적인 인사 팩스는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성재환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만년필을 다시 집어 들고 품 안주머니에 꽂았다.

 

"황 국장, 당신의 유일한 생명줄은 저 종이쪽지가 아니라 내가 쥔 공소장입니다. 수첩을 확보하기 전까지 당신은 검찰의 특별 보호 대상입니다."

 

2. 도주와 오판

 

성재환의 추상같은 기세에도 불구하고, 황선태의 동공은 이미 이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30년간 남원 토착 권력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그였다.

 

중앙 정계의 실세가 법무부를 통해 검사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그가 평생 맹신해 온 '권력의 법칙'이 공포가 되어 뇌수를 갉아먹었다.

 

'성재환 저놈은 미쳤어.

 

아무리 설쳐봐야 서울 본청의 칼자루를 무슨 수로 이겨?

 

저놈 뒤만 믿고 있다간 난 오늘 밤 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로 발견될 거야.'

 

황선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검사님, 그럼 일단 제 집에 가서 수첩부터 꺼내오시죠. 제가 직접 가야 기둥 밑 비밀 벽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성재환이 단호하게 잘랐다.

 

"강 수사관과 지원 병력을 황 국장 자택으로 급파해 수색 영장을 집행할 겁니다. 당신은 수첩이 이곳 검사실로 도착해 대조를 마칠 때까지 204호 취조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조상태 잔당들이 지청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재환은 곧바로 강태훈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 수사관, 정예 수사관 세 명을 대동하고 즉시 황선태 국장 자택으로 이동해 안방 벽장 뒤 양철 통을 압수하십시오. 남원경찰서에는 일절 알리지 마세요."

 

"예, 검사님!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강태훈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성재환은 취조실 문을 잠그기 전, 입구에 배치된 방호원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내가 지청장실에서 본청 팩스 건으로 담판을 짓고 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취조실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피의자의 외부 통신도 전면 차단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검사님."

 

성재환이 복도를 따라 지청장실로 향하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취조실 안에는 홀로 남겨진 황선태의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황선태는 쇠창살이 박힌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희뿌연 새벽안개가 밀려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수첩이 검찰 손에 넘어가면 난 강태석의 손에 죽고, 수첩이 없으면 성재환 손에 감옥에서 썩는다.

 

하지만 그 수첩을 내가 먼저 챙겨 들고 부산으로 튀면?

 

김문현 쪽에 줄을 대고 밀항 자금을 뜯어낼 수 있어.'

 

극단적인 탐욕과 공포가 뒤엉키며 그의 눈을 멀게 했다.

 

황선태는 가슴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상록골프장에서 체포될 당시 미처 압수당하지 않았던 비상용 승용차 열쇠가 손끝에 잡혔다.

 

어제 저녁 시청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개인 차의 열쇠였다.

 

그는 문가로 다가가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취조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지만, 배식용으로 뚫려 있는 작은 창구 틈새로 복도가 보였다.

 

마침 입구를 지키던 방호원이 교대 시간을 앞두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황선태는 문틈에 달린 간이 걸쇠를 향해 떨리는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철컥.

 

기적처럼 걸쇠가 풀리며 문이 반쯤 열렸다.

 

황선태는 신발 끄는 소리조차 죽이며 복도로 빠져나왔다.

 

남원지청의 새벽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타고 지하 주차장 배수로 통로를 통해 지청 담장을 넘었다.

 

새벽 찬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내가 먼저 수첩을 빼내야 해!'

 

황선태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느끼며 어스름한 구도심 골목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3. 짙은 안개 속의 엔진음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남원 시내를 감싸 안은 요천 변에는 젖은 흙냄새와 함께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서진 제1공구 제방 너머로 흐르는 탁한 강물은 아직도 수해의 상처를 토해내듯 사납게 출렁였다.

 

황선태는 지청에서 불과 일 킬로미터 떨어진 시청 뒤편 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은색 프린스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 문을 잠그고 시동을 걸자, 낡은 엔진이 덜덜거리며 진동을 일으켰다.

 

"제발, 제발…… 십 분이면 돼. 십 분만 있으면 수첩을 챙겨서 순천 쪽으로 빠질 수 있어."

 

그는 백미러를 연신 살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량은 젖은 아스팔트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하정리 방면 왕복 4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닿는 거리는 불과 십여 미터 앞에 불과했다.

 

와이퍼가 유리창에 맺힌 축축한 안개 입자를 삐걱거리며 훑어냈다.

 

황선태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하정리 삼거리 교차로가 전방에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시간대라 신호등은 황색 점멸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가려면 이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틀어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황선태가 방향지시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는 순간이었다.

 

어둠과 짙은 안막 너머에서, 땅바닥을 뒤흔드는 듯한 기괴한 중저음의 굉음이 들려왔다.

 

우우웅- 쾅, 쾅, 쾅.

 

단순한 승용차의 엔진 소리가 아니었다.

 

육중한 강철 프레임과 거대한 바퀴가 아스팔트를 짓이기며 질주하는 소리였다.

 

황선태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좌측 합류 도로 쪽으로 향했다.

 

안개 속에서, 두 개의 거대한 원형 불빛이 번쩍였다.

 

상향등이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백색 광선이 프린스 승용차의 운전석 유리창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어……?"

 

황선태의 입에서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빛의 장막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15톤 대형 덤프트럭이었다.

 

번호판은 진흙과 검은 래커로 두껍게 덧칠해져 번호를 식별할 수 없었고, 앞 범퍼에는 불법으로 용접된 두꺼운 강철 H빔이 흉기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덤프트럭은 브레이크를 밟기는커녕, 오히려 풀 액셀을 밟아댄 듯 시커먼 매연을 하늘로 뿜어 올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시속 80킬로미터.

 

아니, 1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괴물 같은 속도였다.

 

황선태의 뇌리에 전주교도소에서 들려왔던 강태석의 서늘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네놈이 딴마음을 품는 순간, 네 식구고 뭐고 남원 바닥에서 통째로 갈려 나갈 줄 알아.'

 

살인 덫이었다.

 

조상태 잔당들은 황선태가 지청에서 탈출하기만을, 아니 지청을 벗어나는 동선을 처음부터 훤히 꿰뚫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악!"

 

황선태가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려 발악했다.

 

그러나 젖은 노면 위에서 승용차 바퀴는 헛돌았고, 거대한 덤프트럭의 강철 범퍼는 자비 없이 은색 프린스의 운전석 측면을 직격했다.

 

4. 박살 난 파편

 

콰아아앙-!

 

새벽의 정적을 찢어발기는 끔찍한 금속 파열음이 남원 구도심 전체를 뒤흔들었다.

 

은색 승용차의 문판은 종이 장막처럼 구겨지며 차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황선태의 늑골과 쇄골이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금속 굉음에 묻혔다.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덤프트럭은 승용차를 들이받은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며 도로변 콘크리트 가로등 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쿠구구구궁!

 

가로등 기둥이 힘없이 꺾여 쓰러지며 스파크를 사방으로 튀겼다.

 

프린스 승용차는 완전히 반파되어 차체 높이가 절반으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유리창 파편이 비산하며 새벽 도로 위에 다이아몬드처럼 흩뿌려졌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덤프트럭의 육중한 문이 덜컥 열렸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사내는 군화 발로 젖은 아스팔트를 짓밟으며 찌그러진 승용차 운전석 곁으로 다가갔다.

 

피투성이가 된 황선태는 깨진 앞유리에 머리를 처박은 채 가느다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검붉은 피가 거품처럼 솟구쳐 올랐다.

 

"허억…… 컥…… 살…… 살려……."

 

사내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황선태의 맥박을 짚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쇠지렛대를 꺼내 황선태의 양복 안주머니와 조수석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서류 가방이나 비밀 장부가 없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낮게 혀를 찼다.

 

"지청에 두고 나왔나 보군."

 

사내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침을 뱉은 뒤, 덤프트럭 대신 뒤따라오던 번호판 없는 검은색 봉고차의 조수석으로 뛰어 올랐다.

 

봉고차는 굉음을 내며 미등조차 켜지 않은 채 짙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현장에는 찌그러진 트럭의 라디에이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수증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만이 짙게 진동하고 있었다.

 

5. 파열된 새벽

 

남원지청 204호로 돌아온 성재환은 텅 빈 취조실을 마주하고 차갑게 굳어 있었다.

 

열려 있는 배식구 창구와 풀려 있는 걸쇠.

 

방호원은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검사님!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피의자가……."

 

성재환의 눈빛이 북극의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탓하는 대신 시계를 보았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황선태가 나간 지 십오 분 안팎이다.

 

공포에 질린 자가 갈 곳은 정해져 있어.

 

자택으로 가서 수첩을 직접 챙기려 할 것이다.'

 

성재환이 수화기를 들어 강태훈의 무전 호출을 연결하려는 찰나, 지청 당직실의 직통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어 지청 당직 계장이 사색이 되어 2층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성 검사님! 112 상황실에서 긴급 무전이 떴습니다! 하정리 삼거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답니다! 피해 차량 탑승자가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입니다!"

 

순간, 취조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성재환의 턱관절이 꽉 다물어졌다.

 

'사고가 아니다.

 

입막음이다.'

 

재환은 코트를 집어 들며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관용차 대기시켜! 국과수 현장 감식반과 남원의료원(南原醫療院) 응급실로 즉시 연락해! 황선태의 신병을 그 어떤 누구에게도 넘겨선 안 된다!"

 

지청 마당을 박차고 나간 검찰 관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안개 낀 남원 시내를 질주했다.

 

삼거리 김밥집 앞을 지날 때, 성재환의 눈에 불이 켜진 김밥집 유리창이 스쳐 지나갔다.

 

투명 박스 테이프로 촘촘히 보수된 유리창 너머로, 하얀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韓智裕)가 새벽 김밥을 말다 말고 사이렌 소리에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재환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통한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쥐었다.

 

'지유야, 이 도시의 악마들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결코 그자들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6. 핏빛 아스팔트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하정리 삼거리 도로는 반파된 승용차와 쓰러진 가로등 기둥, 흩어진 파편들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남원경찰서 교통계 경찰관들이 경광봉을 흔들며 서둘러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성재환이 차에서 내리자, 매캐한 타이어 탄내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현장 보존해!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성재환의 서슬 퍼런 호통이 안개를 갈랐다.

 

경찰관들이 흠칫 놀라며 경례를 붙였다.

 

교통계 경위가 다가와 난처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성 검사님, 신호 위반으로 인한 단순 추돌 사고 같습니다. 가해 트럭 운전사는 차를 버리고 도주했고……."

 

"단순 추돌?"

 

성재환이 아스팔트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닥에는 덤프트럭의 급제동 흔적인 스키드 마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충돌 지점 직전에서 타이어가 노면을 강하게 짓누르며 가속한 검은 마찰흔만이 깊게 패어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풀 액셀을 밟아 들이받았습니다. 전면 범퍼에는 용접된 H빔이 장착되어 있고, 번호판은 고의로 훼손되었어요. 이게 단순 과실입니까?"

 

성재환의 서늘한 반문에 경찰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환은 찌그러진 차체 틈바구니로 다가갔다.

 

소방서 구조대원들이 유압 절단기로 차 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황선태의 신체가 들것으로 옮겨졌다.

 

가슴팍은 비정상적으로 함몰되어 있었고, 의식은 전혀 없었다.

 

맥박은 가늘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맥박 백사십, 혈압 육십에 사십으로 급격히 떨어집니다! 혈흉과 복강 내 출혈이 의심됩니다! 즉시 남원의료원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구급대원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황선태가 구급차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성재환은 황선태의 축 늘어진 손끝을 바라보았다.

 

손톱 밑까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주머니 어디에도 비밀 수첩은 없었다.

 

그때, 황선태의 자택으로 출동했던 강태훈 수사관이 숨을 헐떡이며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검사님! 황 국장 자택 안방 벽장을 확인했습니다!"

 

"수첩은?"

 

강태훈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벽장 뒤 흙벽이 이미 뜯겨져 있었습니다. 양철 통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수사팀이 도착하기 불과 십여 분 전에 누군가 먼저 털어간 흔적입니다!"

 

성재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상태의 잔당들, 아니 강태석이 심어둔 또 다른 하수인이 황선태가 지청에서 탈출하자마자 자택을 급습해 수첩을 가로채고, 황선태를 덤프트럭으로 들이받아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비자금 장부와 불법 지시가 적힌 비밀 업무 수첩은 사라졌고, 유일하게 입을 열어줄 증인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다시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묻힐 위기였다.

 

7. 응급실 앞의 대치

 

남원의료원 응급실 앞 복도는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 형광등 불빛 아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술실 문 상단에 붉은색 '수술 중'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윤하은(尹夏恩) 간호사가 피 묻은 거즈를 가득 담은 트레이를 들고 수술실에서 뛰어나오다 성재환과 마주쳤다.

 

"재환아……!"

 

하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갈비뼈 여섯 개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렀고, 간 파열로 출혈이 멈추질 않아. 원장님이 직접 집도하고 계시는데……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대. 의식이 돌아올 확률은 십 퍼센트도 안 된다고……."

 

성재환은 수술실 문을 묵묵히 응시했다.

 

의식불명.

 

증인이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면, 황선태의 취조실 구두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잃는다.

 

전문증거의 한계와 위법수집증거 배제의 원칙.

 

강태석과 김문현의 노련한 변호인단은 이를 빌미로 공소사실 전체를 뒤흔들 것이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육중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원경찰서 형사과장과 시청 비서실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형사과장이 거만한 태도로 성재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성 검사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관내에서 발생한 중대 교통사고 피의자 및 피해자 신변 관리는 경찰 소관입니다. 황 국장의 소지품과 사고 차량 블랙박스, 아니 현장 잔해물 일체는 저희 형사과에서 인계받아 정밀 감식하겠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명백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황선태의 입을 영원히 막고, 사고 현장의 살인교사 증거를 '단순 빗길 졸음운전'으로 둔갑시켜 덮어버리려는 시도였다.

 

성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물러서십시오."

 

"예?"

 

"본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닙니다. 형법 제30조 공동정범, 제250조 살인미수 및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에 해당하는 계획적 청부 테러 사건입니다. 대검 특별수사본부 주임검사의 권한으로 이 시간부로 본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지휘권을 전면 회수합니다."

 

성재환은 코트 안쪽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캡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빛났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수술실 앞 반경 십 미터 이내에 접근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범인도피죄 현행범으로 즉각 체포하겠습니다. 강 수사관, 무장 수사관들을 배치해 수술실 입구를 전면 봉쇄하십시오."

 

"예, 검사님!"

 

강태훈이 수사관들을 대동하고 수술실 문 앞을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경찰들과 시청 직원들은 성재환의 살벌한 기세에 질려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이를 갈며 물러섰다.

 

8. 비를 맞으며 지키는 것

 

아침 일곱 시.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던 해는 먹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남원 하늘에서는 차가운 늦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병원 정문을 나선 성재환의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밤을 꼬박 새운 그의 눈가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어깨는 바위처럼 꼿꼿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요천 둑길을 지나 동문 우체국 뒷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삼거리 김밥집 처마 밑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맞아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냈다.

 

딸랑, 딸랑.

 

가게 안에서는 구수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밥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유가 조리대 앞에서 김밥을 썰다 말고 멈칫 돌아보았다.

 

지유의 눈가에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듯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재환아……."

 

지유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하게 데운 보리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

 

"뉴스 들었어. 시청 국장님이…… 큰 사고를 당하셨다고. 남원일보에선 벌써 졸음운전이라고 떠들어대던데…… 아니지?"

 

성재환은 보리차 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었던 손바닥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재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강태석의 짓이야.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사람을 통째로 밀어버렸어. 증거가 든 수첩도 사라졌고, 국장은 의식불명이다."

 

지유의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테이프로 기워진 통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권력의 폭압 앞에서 평생을 짓밟히다 숨을 거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빗물처럼 겹쳐 흘렀다.

 

"그럼…… 또다시 진실이 묻히는 거야?"

 

지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이내, 지유는 재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에는 절망 대신 굳건한 결기가 서려 있었다.

 

지유는 조리대 밑에서 정갈하게 싼 김밥 세 줄과 하얀 면 손수건을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재환아.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문을 부수고 온다고. 저들이 트럭으로 사람을 치고 증거를 훔쳐 가도, 네가 쥔 법과 우리가 겪은 진실까지 지울 수는 없어."

 

지유는 재환의 젖은 코트 깃을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절대 무너지지 마. 내가 여기서 김밥을 말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 너는 가서…… 반드시 죗값을 물어."

 

재환은 손수건에 싸인 김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나누었던 맹세, 서울 신림동 고시촌 단칸방에서 흑청색 잉크로 벼려왔던 사법 정의의 칼날.

 

그것은 결코 한갓 협박이나 살인 따위에 꺾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힘주어 감싸 쥐었다.

 

"그래. 반드시 그렇게 할게."

 

9. 심연의 미소

 

같은 시각, 전주교도소 미결수 특별 독방.

 

두꺼운 철문 너머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강태석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복도를 지키던 매수된 교도관이 살금살금 다가와 철창 틈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밀어 넣었다.

 

강태석이 쪽지를 펼쳤다.

 

[작업 완료.

 

황선태 의식불명, 뇌사 가능성 90%.

 

수첩 자택에서 안전하게 회수하여 소각 대기 중.

 

남원경찰서 단순 교통사고로 초동 조서 마감 예정.]

 

쪽지를 다 읽은 강태석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지며 낮고 거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흐흐…… 으하하하!"

 

그는 쪽지를 구겨 입속에 넣고 씹어 삼켰다.

 

"새파란 검사 놈이 대검 완장을 차고 날뛰더니 꼴좋구나. 아가리를 찢어발겨 놨으니, 이제 뭘로 날 기소할 테냐?"

 

강태석은 벌떡 일어나 철창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핏발 선 그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황선태 그 간나새끼는 지 무덤을 지가 팠어. 김문현 위원장에게 줄을 대서 법무부 직무 배제까지 떨어졌으니, 성재환 저 애송이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다."

 

그는 복도 밖을 향해 오만하게 소리쳤다.

 

"어이, 교도관 양반! 내 변호인한테 전해. 당장 구속적부심 청구서 넣으라고 해! 오늘 안으로 내가 이 썩은 문을 열고 나갈 테니까!"

 

강태석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음습한 교도소 복도를 메아리치며 흩어졌다.

 

10. 부활하는 칼날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방 안에는 성재환 검사와 강태훈 수사관, 그리고 남원의료원에서 급히 달려온 최민재(崔民在)가 마주 서 있었다.

 

최민재가 거친 숨을 내쉬며 가죽 점퍼 안쪽에서 소형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쾅 내려놓았다.

 

"재환아, 아니 검사님!"

 

민재의 목소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고 현장 인근 주유소 직원이 몰래 찍어둔 사설 CCTV 테이프를 입수했습니다. 경찰 놈들이 수거하기 십 분 전에 내가 먼저 빼돌렸어요!"

 

성재환의 눈빛이 번쩍였다.

 

"내용은?"

 

"덤프트럭이 교차로에서 라이트를 끄고 십 분 동안 잠복하고 있던 장면, 황 국장의 차가 나타나자마자 라이트를 켜고 가속해서 직격하는 장면이 초 단위로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트럭에서 내려 도주차량으로 갈아탄 놈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잡혔습니다."

 

최민재가 인화된 거친 흑백 사진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성재환의 시선이 사진 속에 꽂혔다.

 

조상태의 최측근이자 한양토건(漢陽土建) 행동대장 박철구의 얼굴이었다.

 

명백한 살인교사와 특수살인미수의 현장 증거였다.

 

강태훈 수사관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습니다.

 

"검사님! 이걸로 조상태와 한양토건 잔당 전원에 대한 긴급체포영장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재환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냉혹했다.

 

"아닙니다. 조상태와 졸개 몇 놈을 잡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황 국장의 목숨과 수첩이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재환은 자신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을 열었다.

 

그곳에는 7년 전, 그리고 어제 황선태를 신문하기 전 복사해 두었던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유 어머니의 유품 양철 궤짝에서 나왔던 '1989년 성호석 친필 내사 보고서'와, 어제 황선태의 비자금 가방 세 개에서 분류해 둔 '춘향 테마랜드 하도급 자금 흐름 원천 전표' 사본이었다.

 

성재환이 검은 만년필의 캡을 벗겼다.

 

금빛 닙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냈다.

 

"황선태의 수첩은 원본이 불탔을지 몰라도, 그 수첩에 적힌 모든 계좌와 날짜는 이미 이 비자금 전표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황 국장이 의식을 잃기 직전 남긴 자백 녹음테이프가 제게 있습니다."

 

성재환의 음성이 검사실의 적막을 엄숙하게 울렸다.

 

"저들은 살인을 통해 진실을 묻었다고 안도하며 구속적부심으로 빠져나오려 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이 저들의 목을 벨 가장 완벽한 타이밍입니다."

 

성재환은 백지 공소장 상단에 단호한 필체로 피고인의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고인 강태석, 피고인 김문현.'

 

만년필 끝에서 흘러나온 흑청색 잉크가 종이를 파고들며 굳건한 정의의 활자로 새겨졌다.

 

검사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 너머, 거악을 향한 최후의 심판이 서서히 그 거대한 서막을 드러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