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옛 서류
1. 단칸방의 먼지 낀 기억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격자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어 들고 있었다.
낮 동안 골목을 뒤흔들던 소란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으나, 내려앉은 침묵은 오히려 폭풍이 지나간 자리보다 더 무겁게 짓눌러 왔다.
가게 안 공기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늘 그러하셨듯 정성스럽게 볶아낸 통깨의 고소한 내음과 갓 지은 쌀밥의 더운 김이 여전히 엷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 포근한 냄새조차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먹먹한 통증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불과 한 시간 전, 남원지청에서 전해진 소식은 동문 우체국 뒷골목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성재환(成宰桓) 검사가 남원지청장 조동식을 뇌물수수 피의자로 전격 입건한 데 이어, 자신의 친아버지인 내무부 차관 성호석(成浩錫)의 서울 사저에까지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비의 죄를 묻기 위해 검사가 스스로 제 가슴에 서슬 퍼런 칼날을 꽂아 넣은 셈이었다.
한지유(韓智由)는 붉은색 플라스틱 조리대 앞에 멍하니 멈춰 서서 제 가슴팍을 꾹 쥐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심장의 박동이 마치 살점이 저며져 나가는 통증처럼 시리고 아팠다.
'재환아, 너 혼자 그 시퍼런 칼을 쥐고 피를 흘리게 둘 수는 없어.'
지유는 하얀 면 앞치마에 묻은 밥풀과 밀가루를 천천히 털어냈다.
손등에 남은 크고 작은 화상 자국과 칼에 베인 흉터들이 붉은 노을빛을 받아 유독 짙은 빛을 띠었다.
지유는 발소리를 죽인 채 주방 안쪽의 좁은 단칸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신 이후, 방 안은 오직 어머니의 유품들과 희미해진 분향 냄새만이 덩그러니 주인을 대신하고 있었다.
벽지 모서리가 누렇게 바랜 방구석,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낡은 붙박이 벽장이 지유를 내려다보듯 서 있었다.
벽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지유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산소호흡기 아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유의 손을 꼭 쥐었던 그 새벽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지유야, 네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 건 그저 병 때문이 아니었다. 삼거리 토건 강태석(姜泰錫) 그자가 군청 벼슬아치들과 결탁해 장부를 위조하고, 우리 요천 과수원을 송두리째 도둑질해 갔어. 벽장 깊은 곳에 내가 평생 목숨처럼 숨겨둔 궤짝이 있다. 세상이 뒤집히더라도 그 상자는 함부로 열지 마라.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공명정대한 법의 칼이 우리 손에 쥐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세상 밖으로 꺼내선 안 돼."
어머니는 그 유언을 끝으로 눈을 감으셨다.
지유는 굳은 결의로 떨리는 손을 뻗어 삐걱거리는 벽장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었다.
어두컴컴한 벽장 구석, 켜켜이 쌓인 낡은 목화솜 이불과 어머니가 생전에 아껴 입으시던 흰 모시 적삼 밑바닥에서 마침내 차가운 쇳덩이가 만져졌다.
모서리마다 붉은 녹이 슬어 삭아 내린 양철 궤짝 하나였다.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굵은 짚 노끈이 십자 형태로 단단하게 동여매여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지유는 궤짝을 조심스럽게 꺼내 방바닥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궤짝 틈새에서 묵은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서랍에서 작은 과도를 꺼내 든 지유는 푸석하게 바스러지는 노끈을 단칼에 끊어냈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양철 뚜껑을 들어 올리자,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곰팡내와 묵은 한지 특유의 메마른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상자 맨 위에는 어머니가 손수 지어 두었던 지유의 연분홍빛 배냇저고리와,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빛바랜 뿔테 안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유는 아버지의 안경을 집어 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복숭아를 따다 지유의 손에 쥐여주던 젊은 아버지의 거친 손바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입술을 깨문 지유는 배냇저고리와 안경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웠다.
그 아래, 기름먹인 누런 포장지에 단단히 싸인 세 묶음의 묵직한 서류철이 웅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맨 위 서류철 표지에는 먹물이 짙게 밴 단정한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남원군 남원읍 하정리 토지 원천 측량 및 소유권 이동 대장(1968 1975).'
서류철을 집어 든 지유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2. 날조된 도장과 빼앗긴 과수원
지유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방바닥에 단정히 엎드려 첫 번째 서류철의 끈을 풀었다.
종이가 바스러지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넘긴 첫 장에는 1970년대 초반 군청 지적과의 공식 압인이 찍힌 지적도면이 붙어 있었다.
요천의 맑은 물줄기를 끼고 완만하게 펼쳐진 비옥한 충적토 지대, 바로 지유의 부친 고(故) 한석규(韓錫奎)가 청춘을 바쳐 개간했던 복숭아 과수원 부지였다.
지번과 면적, 경계선마다 아버지가 직접 붉은 잉크로 그어놓은 경작선이 선명했다.
도면 면적은 4,200평에 달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을 넘긴 지유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공공용지 수용에 따른 대체 환지 처분 동의서'라는 제목 아래, 믿을 수 없는 문구들이 정갈한 타자체로 적혀 있었다.
'본인 한석규는 남원읍 도시계획 도로 확장 및 하천 정비 사업에 적극 협력하고자, 본인 소유의 하정리 과수원 전답 4,200평을 군청에 무상 양도하고, 그 대토로 교룡산 비탈 잡종지 500평을 단독 환지받는 처분에 하등의 이의가 없음을 확인하며 이를 승낙함.'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었다.
남원에서 가장 기름진 평지 과수원 4,200평을 공짜로 관청에 헌납하고, 농작물은커녕 잡초조차 자라기 힘든 가파른 돌산 자갈밭 500평을 대신 받겠다는 조항이었다.
어느 제정신인 농민이 평생을 일군 땅을 이따위 조건으로 맞바꾼단 말인가.
지유는 동의서 맨 밑, 신청인 한석규의 이름 석 자 옆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인주 도장을 매만졌다.
"틀렸어. 이건 아버지의 도장이 아니야."
지유는 벽장 안쪽 서랍에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손때 묻은 유품, 진짜 옥돌 인장을 꺼내 종이 위의 도장 자국과 겹쳐 보았다.
글자의 굵기는 물론이고, '규(奎)' 자의 마지막 받침 획이 전혀 달랐다.
문서에 찍힌 것은 싸구려 회양목을 칼로 대충 파내 급조한 조잡한 가짜 목도장이었다.
더욱 파렴치한 증거는 그 뒤에 첨부된 군청 제출용 대리인 위임장이었다.
위임장 서식 한가운데에는 '수임인: 삼거리 토건 대표 강태석'이라는 이름이 굵은 만년필 글씨로 떡하니 적혀 있었다.
강태석이 한석규를 대리해 군청에 모든 환지 권한을 행사한다는 위임장이었고, 그 문서의 증인 난에는 '입증인: 남원군청 지적계장 최인규'의 직인이 날인되어 있었다.
토건 깡패 강태석과 부패한 군청 공무원이 짜고 가짜 도장을 새겨 문서를 날조한 뒤, 아버지를 대리해 제멋대로 땅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었다.
뒤이어 철된 서류에는 당시 상황의 처참한 진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뒤늦게 환지 처분 결과를 통보받고 사기를 당했음을 깨달은 아버지가 피를 토하듯 작성해 제출했던 '토지 수용 무효 확인 청구 및 이의신청서' 원본이었다.
서류 곳곳에 아버지의 떨리는 필체와 억울함에 젖은 눈물 자국이 얼룩덜룩 번져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규 어린 신청서 위에는 붉은색 먹물로 '각하(却下)'라는 두 글자가 잔인하게 찍혀 있었다.
각하 사유 난에는 '신청인의 자진 기부채납 의사가 명백하고 대리인 날인이 유효하므로 민원 이유 없음'이라는 군청의 냉혹한 결재문이 덧붙어 있었다.
그 밑에는 군청 경비 일지 사본 한 장이 무심하게 끼워져 있었다.
'1974년 10월 12일. 군수실 앞 복도에서 소란을 피우며 도장 위조를 주장하는 민원인 한석규를 삼거리 토건 직원들과 합동으로 청사 밖으로 강제 퇴거 조치함.'
지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빛바랜 종이를 적셨다.
아버지는 관청에 찾아가 가짜 도장이라고, 내 땅을 돌려달라고 울부짖다가 개처럼 끌려 나가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홧병과 피멍으로 자리에 누웠고, 시름시름 앓다가 지유가 채 자라기도 전에 각혈을 쏟으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강태석은 그렇게 강탈한 4,200평의 알짜 과수원을 군청 공공용지로 묶어두었다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시계획을 슬그머니 변경해 제 처남 명의의 유령 회사로 헐값에 불하받았다.
그 땅을 쪼개 상가를 짓고 택지를 분양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피 묻은 돈이 바로 삼거리 토건의 밑천이 되었고, 마침내 오늘날 남원을 집어삼킨 거대한 권력자 강태석을 탄생시킨 뿌리가 되었다.
30년간 이 고장을 호령해 온 민선 남원시장 강태석의 화려한 제국은, 실상 힘없는 한 농민의 삶을 짓밟고 피고름을 빨아먹으며 세워진 사기극의 탑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피를 흘리며 쓰러지셨는지 이제야 똑똑히 알겠어요. 강태석 그자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 거였어요."
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가슴속을 태우는 분노에 비하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3. 성호석의 서명과 드러난 반전
지유는 떨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두 번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서류철이 1970년대의 피 맺힌 토지 강탈 기록이었다면, 두 번째 서류철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의 공문서들이었다.
표지 겉면에 적힌 글귀를 확인한 순간, 지유의 숨이 턱 막혀왔다.
'남원군 구도심 환지 비리 특별조사 보고서(1989년 남원시장 성호석 친필 기안)'.
"성호석…… 시장님?"
재환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지유의 머릿속이 거대한 혼란으로 하얗게 번져나갔다.
그동안 재환과 지유가 알고 있던 진실은, 성호석이 1991년 환지 비리 당시 강태석과 야합하여 단독 환지를 눈감아주고 그 대가로 중앙 정계로 영전해 갔다는 것이었다.
재환이 그토록 아버지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제 손으로 법정에 세우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 가문의 파렴치한 원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유의 손에 들린 이 비밀 보고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유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한 장 한 장 보고서를 넘겨 읽어 내려갔다.
보고서 본문은 1989년 남원시장으로 부임했던 성호석이 직접 작성한 특별 감사 문서였다.
성호석 시장은 부임 직후, 군청 지적과 문서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1970년대 환지 대장을 비밀리에 전수 조사했다.
그리고 강태석이 가짜 목도장으로 한석규의 과수원 4,200평을 편취하고 사유화한 전모를 정확히 밝혀내고 있었다.
성호석의 친필 메모에는 푸른색 잉크로 서슬 퍼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삼거리 토건 강태석 일파가 자행한 본건 토지 강탈은 단순한 사기 배임의 차원을 넘어, 국가 행정 권력을 사적으로 농단하고 힘없는 농민의 생존권을 유린한 중대한 관권 유착 범죄이다.
피해자 한석규의 원통한 권리를 행정 직권으로 즉각 원상 복구하고, 범죄자 강태석과 공모 공무원들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즉각 구속 수사 의뢰할 것을 엄명함.'
지유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성호석은 처음부터 강태석과 한패가 아니었다.
그는 8년 전, 남원에 시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 억울한 죽음과 비리를 바로잡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던 강직하고 정의로운 공직자였다.
그런데 왜 이 수사 의뢰서는 집행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단 말인가.
지유는 다급하게 다음 장을 넘겼다.
보고서 말미, 군수의 정식 관인이 찍혀야 할 결재 난 위에는 붉은색 사인펜으로 거칠게 '보류(保留)'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공식 문서 철에 들어가서는 안 될 사적인 편지 한 장이 클립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봉투에서 꺼낸 듯한 서신지 위에는, 당시 여당의 핵심 실세이자 국회 내무위원이었던 김문현(金文鉉)의 오만하고 위압적인 친필이 갈겨써져 있었다.
'성호석 시장 보게.
자네가 남원에 내려가더니 지방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모양이군.
강태석 회장은 당의 대선 조직과 호남 총선 자금을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우리의 핵심 동지요 귀중한 자산일세.
그런 인물의 십수 년 전 사소한 흙먼지를 털겠다고 검찰을 부르고 칼을 휘두르려 드는가?
자네 혼자 깨끗한 척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서 남원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가.
경고하건대, 당장 그 망령된 특별 조사를 덮고 관련 서류를 파기하게.
만약 내 말을 듣지 않고 강 회장의 털끝이라도 건드린다면, 자네의 관직은 물론이거니와 서울에 있는 자네 아들 성재환의 앞날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이네.
자네 자식이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들었네만, 대한민국 사법부가 중앙의 뜻을 거역한 자의 자식을 법조인으로 받아줄 만큼 녹록한 곳인 줄 아는가?
자식의 목숨과 인생을 걸고 도박할 자신이 없다면, 즉각 서울로 올라와 중앙의 지시를 따르게.'
서신의 마지막 줄을 읽는 순간, 지유는 심장이 멎는 듯한 전율과 함께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김문현의 살벌한 협박.
그것은 성호석 시장 개인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열여덟 살 어린 아들 재환의 목숨과 미래를 정조준한 잔혹한 인질극이었다.
보고서 맨 뒷장에는 성호석 시장이 밤을 새워 번민하며 적어 내려간 것으로 보이는 짤막한 일기 형식의 메모가 떨리는 필체로 덧붙어 있었다.
'1989년 11월 4일.
새벽.
하늘이 무너진다.
남원의 썩은 악을 도려내려 했으나, 그 뿌리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중앙의 거대한 심장에 닿아 있었다.
김문현 그자가 재환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내 아들의 목숨을 걸고 싸울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비겁한 아비다.
나는 법의 정의를 버리고 내 자식의 안위를 택했다.
남원의 바닥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지방의 미약한 힘으로는 개미처럼 밟힐 뿐이다.
재환아, 용서하지 마라.
훗날 네가 장성하여 더 거대한 힘, 중앙의 사법 권력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이 아비의 치욕을 부디 알지 말기를.'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성호석의 친필 메모 위를 흠뻑 적셨다.
지유는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성호석이 남원을 떠나며 아들 재환에게 그토록 차갑고 잔인하게 내뱉었던 말.
"남원의 힘은 썩었다. 바닥의 정의에 매달려서는 개미처럼 밟힐 뿐이야. 오직 중앙의 막강한 사법 권력을 장악해야만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은 타락한 권력자의 변명이 아니었다.
아들을 지키지 못할 뻔했던 나약한 아비의 피눈물 나는 절규였고, 거대한 악에 무릎 꿇어야만 했던 자의 처절한 통한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성호석은 스스로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오물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강태석과의 타협이라는 가면을 쓴 채, 뒤로는 이 결정적 내사 문건을 목숨처럼 숨겨두고 언젠가 법의 심판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를 파렴치한 부패의 주범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제 손으로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친부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재환아…… 안 돼. 그 칼을 아버지에게 겨눠서는 안 돼.'
지유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서류철 세 권을 낡은 보자기에 단단히 싸매어 가슴에 품었다.
단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 비통한 어둠 속에서 홀로 피를 흘리고 있을 성재환을 향해, 지유는 단칸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4. 204호 검사실의 서슬 퍼런 침묵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층 복도는 묘지처럼 적막했다.
관내 사법 카르텔의 비호를 받던 지청장 조동식이 뇌물수수 피의자로 입건되어 집무실에 사실상 연금되자, 지청의 모든 행정 기능은 얼어붙은 듯 마비되어 있었다.
그 침묵의 중심에 위치한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창문 너머로 지리산 자락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빛이 완전히 사위어 가고, 차가운 푸른 어둠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성재환 검사는 책상 앞에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흰 셔츠 소매는 거칠게 걷어 올려져 있었다.
눈빛은 칼날처럼 서슬 퍼렇게 벼려져 있었으나, 입술은 핏기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수백 장에 달하는 계좌 추적 내역서와 압수수색 결과 보고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서류더미의 맨 꼭대기, 백색의 정갈한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피의자 성호석(내무부 차관)에 대한 주거지 및 집무실 압수수색 검증 영장 청구서.'
그 문서의 맨 아랫단, 붉은색 결재 도장이 찍혀야 할 주임검사 난 위에 재환은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쥔 채 멈춰 서 있었다.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금빛 글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백부에게 물려받은 이 만년필을 쥐고 신림동 고시촌의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듯 법전을 파고들던 지난 7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세월 동안 재환을 버티게 한 것은 오직 하나, 가문의 추악한 죄악을 제 손으로 단죄하고 지유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서늘한 집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칼날 끝을 자신의 피와 살을 물려준 친아버지의 목전에 겨누어야 하는 순간이 닥쳐오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과 고통이 온몸의 신경을 찢어발겼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사저를 부수고, 아버지의 손목에 쇠사슬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 검사 성재환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성 검사님."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대검 특수부 파견 수사관 강태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문성현 영장전담판사님께서 퇴근을 미루고 남원지원 집무실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조동식 지청장에 대한 긴급체포 사후 승인서와 함께…… 차관님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도 지금 함께 올리시겠습니까?"
강태훈의 목소리에도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아무리 냉철한 특수부 검사라 한들, 제 아비를 제 손으로 도륙 내는 패륜 같은 사법 집행 앞에서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재환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어린 시절 남원 관사의 풍경이 떠올랐다.
서재에서 묵묵히 책을 읽다 아들이 들어오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버지의 따뜻했던 손길.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던 통일호 기차 안에서 차갑게 등을 돌리며 냉혹한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낯선 얼굴.
그 모든 기억들이 뒤엉켜 심장을 짓이겼다.
"성역은 없습니다."
재환이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피의자가 검사의 아비라 하여 법의 칼날이 무뎌진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협잡입니다. 올립니다."
재환은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만년필을 쥐어짜듯 잡았다.
촉 끝에서 검푸른 잉크 한 방울이 영장 청구서의 결재 난 위로 툭 떨어졌다.
지유가 7년 전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였다.
정의를 지키라며 건네주었던 그 순수한 마음의 잉크로, 재환은 마침내 아버지의 이름을 베어내기 위해 펜촉을 내리누르려 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쾅!
204호 검사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부딪히며 활짝 열렸다.
강태훈 수사관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가죽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가며 외쳤다.
"누굽니까!"
그러나 문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인물을 확인한 강태훈은 멍하니 손을 멈추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거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지유였다.
5.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검사실 안의 차가운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지유는 삼거리 김밥집에서 이곳 지청 언덕길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헐떡이는 가슴팍에는 거친 무명보자기에 싸인 묵직한 서류 뭉치가 마치 갓난아이처럼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손에서 만년필이 멈추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유를 바라보는 재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긴 어떻게…… 무슨 일이야?"
지유는 대답 대신 거친 숨을 고르며 성큼성큼 검사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실무관들과 수사관들이 당혹감에 휩싸여 길을 비켜섰다.
지유의 시선은 오직 책상 뒤에 창백하게 질려 서 있는 성재환만을 향하고 있었다.
지유는 책상 앞까지 다가가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 매듭을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풀어헤쳤다.
탁, 쿵.
세 권의 두툼한 한지 서류철이 재환이 서명하려던 영장 청구서 위를 덮치듯 내려앉았다.
"재환아, 서명하지 마."
지유의 목소리는 거칠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한 결기는 검사실 전체를 뒤흔들 만큼 서늘했다.
"이걸 봐. 네 아버지를 베어내기 전에, 어머니가 평생 목숨 걸고 지켜온 이 서류부터 먼저 읽어봐."
재환은 멍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삭아 내린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재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을 뻗어 맨 위의 서류철을 열었다.
거기에는 1970년대 초반 군청 공문서들과 함께, 조잡하게 위조된 한석규의 가짜 목도장 날인이 찍힌 환지 동의서가 펼쳐져 있었다.
강태석의 친필 위임장과, 요천 변 과수원 4,200평을 도둑질해 간 사기 행각의 전모였다.
"이건……?"
"강태석이야."
지유가 피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강태석이 오늘날 남원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그 모든 피 묻은 돈의 시작이 바로 여기 있어. 우리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가짜 도장을 새겨 과수원을 강탈해 간 원천 서류야. 강태석의 30년은 사기와 살인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어."
재환의 턱관절이 부르르 떨렸다.
강태석이라는 자의 죄악이 이미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참혹한 원죄에서 출발했음을 확인하자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지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서류철을 열어 재환의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남원군 구도심 환지 비리 특별조사 보고서(1989년 남원시장 성호석 친필 기안)'.
아버지의 단정하고 굳센 필체를 마주한 순간, 재환의 호흡이 턱 멎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글씨야. 이게 왜 여기에……."
"네 아버지는 비리의 공범이 아니었어, 재환아."
지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읽어봐. 네 아버지가 8년 전 남원에 시장으로 오셔서 무슨 일을 하려 하셨는지, 직접 네 눈으로 확인해 봐!"
재환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건을 넘겼다.
강태석의 사기 강탈을 밝혀내고 구속 수사를 지시했던 성호석 시장의 서슬 퍼런 친필 기안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첨부된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의 협박 편지.
'만약 내 말을 듣지 않고 강 회장의 털끝이라도 건드린다면, 자네의 관직은 물론이거니와 서울에 있는 자네 아들 성재환의 앞날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이네.'
'자식의 목숨과 인생을 걸고 도박할 자신이 없다면, 즉각 서울로 올라와 중앙의 지시를 따르게.'
그 잔혹한 협박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재환의 귓가에서 거대한 이명이 울렸다.
눈앞이 캄캄하게 암전되었다.
뒤이어 이어진 아버지의 새벽 메모.
'김문현 그자가 재환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내 아들의 목숨을 걸고 싸울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비겁한 아비다. 나는 법의 정의를 버리고 내 자식의 안위를 택했다…… 재환아, 용서하지 마라.'
아버지는 타락한 관료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불의와 결탁한 괴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직 하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열여덟 살 어린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들의 미래가 짓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진흙탕 속으로 몸을 던졌던 것이었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불의의 오명을 뒤집어썼고, 아들에게조차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평생을 파렴치한 부패 관료라는 경멸과 증오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자신은 지난 7년간 무슨 짓을 했던가.
신림동 고시촌 골목에서 아버지를 저주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날 아버지가 내민 축하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쳤으며, 검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온 첫날부터 아버지를 감옥에 처넣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칼을 갈지 않았던가.
"아버지…… 아버지가…… 나 때문에……."
재환의 손에서 완전히 힘이 풀렸다.
손에 쥐고 있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힘없이 책상 위로 굴러떨어졌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간 만년필에서 검푸른 잉크가 번져 나왔다.
재환은 무너지듯 의자 뒤로 물러서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으흑…… 으아아아-!"
참아왔던 통곡이 그의 가슴을 찢고 터져 나왔다.
204호 검사실 전체를 뒤흔드는 청년 검사의 처절한 오열이었다.
7년간 벼려왔던 서슬 퍼런 칼날이 산산조각 나며 가슴속을 난도질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되어야 했던 아버지의 굽은 등과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유는 책상 너머로 다가가, 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재환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힘주어 감싸 안았다.
"재환아…… 울지 마."
지유의 목소리도 눈물에 젖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널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널 살리기 위해 모든 걸 짊어지신 거야. 그러니까 이제 네가 아버지의 그 부러진 칼을 다시 이어 붙여야 해. 네 아버지가 끝내 베어내지 못했던 그 진짜 괴물들을, 이제 검사가 된 네가 법정에 세워야 해."
지유의 따뜻하고 거친 손바닥이 재환의 차가운 손등을 덥혀왔다.
어머니의 유품에서 나온 30년 전의 진실이, 마침내 두 가문을 옭아매고 있던 참혹한 비극의 사슬을 풀어내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꽉 쥔 채 한참을 흐느꼈다.
검사실 안에 감돌던 살얼음 같은 냉기는 사라지고,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통한과 참회의 눈물이 두 사람의 손등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낸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이전의 비통함과 혼란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지리산의 차가운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서슬 퍼런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적이 누구인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해졌다.
힘없는 농민을 짓밟고 피를 빨아 남원의 왕으로 군림한 강태석.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한 가정을 파탄 내고 의로운 아버지를 꺾어 괴물로 만들어버린 중앙의 거악, 김문현.
재환은 바닥에 굴러떨어졌던 검은 만년필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영장 청구서의 첫 장을 과감하게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재환은 새로운 공문서 양식을 꺼내 들고,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를 듬뿍 머금은 만년필로 거침없이 글자를 써 내려갔다.
'피의자 김문현(국회 내무위원장) 및 피의자 강태석(남원시장)에 대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구속영장 청구서.'
만년필 닙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서명을 마친 재환은 지유의 젖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유야, 네 아버지의 원통한 피눈물과, 내 아버지가 짊어져야 했던 8년간의 치욕. 내가 이 두 자루의 칼로 전부 갚아줄게."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의 창문 너머로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지만, 그 어둠을 찢어발길 사법의 거대한 폭풍이 마침내 중앙 정계를 향해 닻을 올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