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장의 압박
1. 2층 집무실의 침묵
아침 여덟 시 이십 분의 전주지방검찰청(全州地方檢察廳) 남원지청(南原支廳) 복도는 서늘한 긴장감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밤안개가 낡은 청사 유리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렸고, 중앙 계단을 오르는 성재환(成宰桓)의 구둣발 소리만이 육중한 울림을 남겼다.
재환의 품 안에는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비밀 대여금고에서 압수한 가죽 서류철이 묵직하게 안겨 있었다.
요천(蓼川) 제방 붕괴 참사를 부른 공사비 40억 원 중 횡령된 20억 원의 세탁 경로와, 그 돈이 흘러 들어간 정치권과 사법부 실세들의 이름이 날인된 원천 비자금 대장이었다.
무엇보다 그 대장의 맨 뒷장에는 친부인 내무부 차관 성호석(成浩錫)의 이름과 20억 원권 약속어음 번호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피를 나눈 아비의 죄악을 가슴에 품은 채, 재환은 2층 지청장실 문 앞턱에 섰다.
문 옆 명패에는 '지청장 검사 조동식(趙東植)'이라는 다섯 글자가 차갑게 번쩍였다.
재환이 노크를 하기도 전에 육중한 목재 문이 안쪽에서 거칠게 벌컥 열렸다.
"들어와, 성 검사."
충혈된 눈의 조동식이 문가에 버티고 서서 재환을 노려보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새벽 남원상록골프장에서 강태석(姜泰錫) 일파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던 그 오만한 밀실의 주인이 아니었다.
성재환이 내민 현장 채증 사진과 압수수색 영장의 서슬에 짓눌려 하얗게 질린 채, 독기만을 겨우 품고 있는 늙은 맹수의 꼴이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짙은 담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재환은 미동도 없이 집무 책상 맞은편 가죽 소파 앞에 섰다.
조동식은 책상 뒤로 가 앉지도 못한 채 창가로 걸어가 창틀을 움켜쥐었다.
"자네, 기어이 남원상호신용금고까지 털었더군."
조동식의 음성이 잘게 떨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지청의 관할 금융기관을 사전 보고도 없이, 전주지법 본원에서 직통으로 영장을 받아 쑤셔 박아?"
재환은 손에 든 검은 가죽 서류철을 소파 앞 탁자 위에 단정하게 내려놓았다.
탁자가 묵직한 둔탁음을 내며 울렸다.
"긴급을 요하는 특수수사였습니다."
재환의 음성은 메마른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차갑고 흔들림이 없었다.
"지청 내부의 정보 누설 첩자가 발각되었고, 피의자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자금을 도피시키려는 정황이 명백했습니다."
조동식이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며 재환을 쏘아보았다.
"정보 누설? 첩자? 박영선 계장을 수갑 채워 조사실에 처박아 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 지청장까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겠다는 건가?"
"범죄 혐의가 있는 곳에 수사가 있고, 혐의가 드러난 자에게는 검사의 칼이 향할 뿐입니다."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조동식의 턱 끝을 정확히 겨누었다.
조동식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는 탁자 위의 가죽 서류철을 곁눈질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이름과 3억 원이라는 뇌물 액수가 적혀 있을 그 장부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 타협이라는 이름의 올가미
조동식은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책상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는 소파를 가리키며 부드러운 억양을 흉내 냈다.
"앉게. 성 검사, 일단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하세."
재환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대로 곧게 꼿꼿이 서 있었다.
조동식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마치 아끼는 후배를 타이르는 자애로운 선배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날리던 칼잡이라는 건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이번 요천 제방 붕괴가 얼마나 끔찍한 인재인지도 내 모르는 바가 아니야.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고, 남원 구도심이 물바다가 되었으니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겠지."
조동식이 천천히 걸어와 재환의 맞은편 소파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자네는 이미 충분히 해냈어. 민선 시장 강태석을 체포했고, 유성골재와 남원 제1건설의 배동진까지 신병을 확보했네. 부실 자재를 납품하고 제방 공사비를 가로챈 건설업자들과 현장 소장들, 그리고 시청 도로교통과 계장까지…… 이 정도면 대한민국 검찰 역사에 남을 만한 쾌거야."
재환은 침묵을 지켰다.
조동식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위선의 냄새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여기서 멈추게."
조동식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은밀하고도 끈적한 유혹의 속삭임이었다.
"구속된 강태석과 배동진, 그리고 현장 실무 책임자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매듭짓는 거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 걸 수 있는 죄목은 모조리 걸어서 기소해. 그놈들을 주범으로 세워서 징역 15년, 20년을 때려 박으면 남원 시민들도 박수를 칠 것이고 대검에서도 자네를 영웅으로 대우할 걸세."
조동식이 탁자 위의 장부를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재환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거두어들였다.
"성 검사, 검사는 정치가가 아니야. 세상의 모든 먼지를 다 털어낼 수는 없는 법일세. 적당한 선에서 실무자들과 토건업자들을 기소하고, 시청 결재 라인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조직을 지키고 자네 자신을 지키는 길이야."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어렸다.
"실무자 기소로 끝내라?"
재환의 나직한 반문에 조동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 수사가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남원상록골프장에 모였던 전주지검 간부들, 도청 실세들, 그리고 저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金文鉉) 의원실까지……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남원뿐만 아니라 전북 전체, 아니 대한민국 정관계가 뒤집혀. 감당할 수 있겠나?"
조동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재환의 얼굴을 살폈다.
"무엇보다 성 검사, 자네 선친…… 아니, 현직 내무부 차관이신 자네 아버님은 어찌할 텐가?"
비수 같은 질문이었다.
가장 약하고 아픈 곳을 찔러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늙은 권력의 비열한 계산이었다.
"그 장부 맨 뒤에 성호석 차관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자네가 그 장부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는 순간, 자네 아버지는 평생 쌓아 올린 관직에서 끌어내려져 포승줄에 묶이게 돼. 아비의 목을 베고 출세한 패륜아라는 낙인이 평생 자네 이마에 찍힐 텐데,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는 말일세!"
조동식의 목소리에 다시 위협적인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3. 흉터가 새겨진 기억
아비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고 시커먼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재환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7년 전 비 내리던 남원역 승강장의 풍경이 겹쳐 흐르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무릎으로 기차를 뒤쫓아 달려오던 열여덟의 지유.
동문 우체국 뒷골목에서 쇠파이프 테러와 표적 단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박스 테이프로 깨진 유리창을 엮어 붙이던 지유의 거친 손.
화상 흉터와 굳은살이 얽힌 그 손으로 부치지 못할 편지 백여 통을 7년간 써 내려갔던 그 순결한 인내.
그 모든 고통의 시작점에 바로 친부 성호석과 강태석의 추악한 야합이 있었다.
1968년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에서부터 시작되어, 1991년 과수원 강제 수용과 환지 조작, 그리고 마침내 요천 제방을 무너뜨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수마(水魔)로 몰아넣은 그 뿌리 깊은 원죄.
그것을 덮어두고 실무자 몇 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타협하라는 말은, 성재환이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과 같았다.
재환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황금빛 각인이 형광등 불빛 아래 서늘하게 번뜩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백부에게 물려받았고, 지유가 선물한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는 법조인의 맹세.
재환은 만년필의 금빛 닙을 조동식의 눈앞에 똑바로 겨누었다.
"지청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장내를 가르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검찰청법 제4조와 검사윤리강령을 기억하십니까?"
조동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뭐라고?"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고 형사사법의 정의를 실현함을 그 사명으로 합니다. 검사윤리강령 제3조, 검사는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고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압력에도 굴하지 아니하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재환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조동식의 귓전에 쐐기처럼 박아 넣었다.
"또한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검사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상급자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상부의 부당한 축소 지시, 명백한 외압과 야합에 근거한 실무자 꼬리 자르기 지휘는 적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조동식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성재환! 네가 감히 내 지휘권을 부정하겠다는 거냐?"
"부정한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범죄를 은폐하는 지휘는 지휘권이 아니라 공무집행방해이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범죄일 뿐입니다."
재환의 서슬 퍼런 일갈이 좁은 지청장실을 뒤흔들었다.
"저는 대검 특별수사본부 파견 주임검사이며, 전주지검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로 정식 겸임 발령을 받았습니다. 본 사건에 대한 독립적 수사권과 영장 청구권은 대검 중수부장과 검찰총장의 직인으로 저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지청장님의 사적 안위와 뇌물 수수 사실을 덮기 위한 부당한 지휘권 행사를, 저는 검사윤리강령에 의거해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4. 여덟 시 삼십 분의 팩스
조동식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치욕이 뒤엉킨 얼굴로 그는 책상 위의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네깟 놈이…… 네깟 애송이가 감히 누구 앞에서 법을 논해! 그래, 좋아. 네놈이 법대로 하겠다면 나도 법대로 하겠다!"
조동식은 벽에 걸린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초침이 여덟 시 이십구 분을 지나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지청장실 구석에 놓인 대형 팩스기가 삐익- 하는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조동식의 입가에 비열한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그는 허겁지겁 팩스기로 달려가 방금 출력된 공문을 낚아챘다.
공문 상단에는 선명한 붉은색 관인이 찍혀 있었다.
'대검찰청 기획조정부 - 수사 직무 배제 및 복귀 명령 통보'
조동식은 공문서를 번쩍 치켜들며 성재환의 면전에 내던지듯 흔들어댔다.
"보아라! 이게 뭔지 아느냐? 대검찰청 수뇌부에서 방금 내려온 직무 배제 명령서다! 네놈의 파견 주임검사 직무는 이 시각부로 정지되었고, 너는 즉시 서울 본청으로 원대 복귀해야 한다!"
조동식은 숨을 헐떡이며 악을 썼다.
"네 아버지가, 성호석 차관이 법무부 장관을 움직이고 대검 기조부를 움직여 내린 결정이다! 제 아비가 살기 위해 제 자식의 칼을 빼앗은 거란 말이다! 알겠느냐? 너는 이제 남원 사건의 담당 검사가 아니야! 당장 수사 기록과 압수한 물증을 전부 이 방에 두고 나가라!"
바람결에 나부끼듯 흔들리는 공문서를 보며, 재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더욱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친부 성호석이 기어이 중앙의 권력을 움직여 자신을 찍어누르려 했다는 사실.
자신의 죄악을 덮기 위해 아들의 신념마저 짓밟으려 했다는 참혹한 진실 앞에서도, 재환의 심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원으로 내려오던 날, 가문의 모든 굴레를 스스로 베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재환은 코트 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접힌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조동식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대검찰청 중수부장 정종길(鄭鍾吉)의 직통 서명과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장 직인이 날인된 긴급 특별수사명령서였다.
"지청장님, 팩스를 잘못 보셨습니다."
재환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조동식의 귓바퀴를 때렸다.
"그 직무 배제 공문은 기획조정부의 행정 결재에 불과합니다. 본 특별수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특별수사본부 훈령 제4호에 의거해 출범한 기구이며, 본건 수사 검사의 직무 배제 및 교체는 오직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장의 동의와 법원 영장전담재판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조동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뭐라고……?"
"정종길 중수부장님께서 서울에서 이미 김문현 의원과 성호석 차관의 직권남용에 대한 긴급 내사에 착수하셨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명령서가 바로 삼십 분 전, 본원 영장 청구와 동시에 효력을 발휘한 '남원 토착 비리 성역 없는 전면 수사권 보장 명령서'입니다."
재환은 조동식이 쥐고 있던 팩스 공문을 낚아채듯 거두어 탁자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지청장님."
재환의 시선이 탁자 위의 가죽 서류철로 향했다.
"이 대장 제14페이지, 1995년 8월 12일 자 남원상록골프장 클럽하우스 난초실. 강태석 시장 측근 배동진으로부터 '수사 무마 및 편의 제공 대가'로 수령한 현금 3억 원. 수령인 란에 날인된 지청장님의 인영과 친필 서명을 국과수에 필적 감정 의뢰했습니다."
조동식의 무릎이 꺾이며 뒤로 비틀거렸다.
그의 등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며 서류 파일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너…… 너 지금…… 나를 피의자로……?"
"공동정범입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그리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피의자 조동식."
재환은 만년필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으며 냉정하게 선언했다.
"오늘 오전 10시까지, 전주지검 남원지청 검사실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제 신문을 받으십시오. 불응 시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을 동원해 지청장실에서 즉각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5. 204호의 결의
지청장실 문을 닫고 나온 성재환은 복도를 가로질러 204호 검사실로 향했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남원 시내의 전경이 뿌옇게 펼쳐져 있었다.
요천 제방의 무너진 틈새를 복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포클레인들의 둔중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검사실 문을 열자, 밤을 새운 최민재(崔民在)와 강태훈(姜泰勳) 수사관, 그리고 계좌추적팀의 박철민(朴哲民) 수사관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판 가득 적혀 있던 비자금 자금 세탁 구조도는 이제 빈틈없이 완성되어 있었다.
시청 도로교통과 계장의 인척 명의로 분산된 6개의 차명 계좌,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금고로 흘러 들어간 20억 원의 현금, 그리고 그 돈을 나누어 먹은 관내 사법 카르텔의 명단이 붉은 줄로 엮여 있었다.
"재환아, 지청장 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민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손에 쥔 볼펜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실무자 선에서 꼬리를 자르라고 종용하더군."
재환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예상했던 대로야. 대검 기조부 이름으로 직무 배제 공문까지 날아왔다."
"뭐라고요?"
강태훈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럼 우리 수사가 막히는 겁니까? 그 빌어먹을 조동식과 서울 놈들이 기어이……!"
"아닙니다."
재환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수사관들을 둘러보았다.
"정종길 중수부장님께서 방패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판을 더 키워야 합니다."
재환은 탁자 위에 남원상호신용금고에서 압수한 비밀 비자금 대장을 올려놓았다.
두꺼운 가죽 표지가 넘어가자, 방 안에 있던 수사관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조동식 지청장의 3억, 고진태(高鎭泰) 차장검사의 5억, 김문현 의원의 10억,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성호석 차관의 20억 원권 약속어음.
민재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재환아…… 이건…… 너희 아버님……."
민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친구의 고통을 알기에, 그가 짊어져야 할 비극의 무게를 알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재환의 표정은 고요했다.
아비의 죄를 단죄해야만 하는 참담함이 왜 없겠는가.
살을 찢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이 가슴속을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그는 검사였다.
무엇보다 7년을 피눈물로 버텨낸 한지유(韓智由)와 남원의 억울한 시민들 앞에 선 사법의 집행자였다.
재환은 책상 서랍에서 백지 형태의 구속영장 청구서와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를 꺼냈다.
그리고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담긴 검은 만년필을 쥐었다.
사각, 사각.
펜촉이 종이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피의자 란에 세 사람의 이름이 정갈하고 단호한 필체로 적혀 내려갔다.
'피의자 1: 조동식 (남원지청장)'
'피의자 2: 조상태 (동서개발 대표)'
'피의자 3: 성호석 (내무부 차관)'
영장 청구서를 다 작성한 재환은 만년필의 캡을 닫았다.
"강 수사관님."
"예, 주임검사님!"
"지금 즉시 전주지법 남원지원 문성현(文成鉉) 판사님께 이 영장 청구서들을 들고 가십시오. 지청장 조동식에 대한 긴급 압수수색 및 체포영장, 그리고 서울 성북동 성호석 차관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강태훈 수사관의 눈에 전율 어린 결기가 서렸다.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강 수사관이 영장철을 품에 안고 바람처럼 검사실을 뛰쳐나갔다.
6. 김밥집의 아침과 새로운 폭풍
오전 아홉 시.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했다.
어제 정오의 굴착기 테러 위기를 넘긴 가게 안은 모처럼 평온한 온기가 감돌았다.
박스 테이프로 꼼꼼하게 'X' 자를 붙여놓은 통유리창 안쪽에서 지유는 묵묵히 밥을 푸고 있었다.
방앗간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골목 어귀까지 번져 나갔다.
가게 안에는 김 씨 아저씨와 배 씨, 최 씨 등 구도심 상인들이 모여 앉아 따뜻한 김밥과 보리차를 나누어 마시고 있었다.
"지유야, 어디 다친 덴 정말 괜찮은 거냐?"
김 씨 아저씨가 붕대를 감은 지유의 손목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제 그 굴착기가 대가리를 찍어 누르려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 성 검사가 안 나타났으면 끔찍한 일 났을 텐데."
"전 정말 괜찮아요, 아저씨."
지유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단정한 손길로 김밥을 썰어 접시에 담았다.
"재환이가…… 성 검사가 약속을 지켜줬으니까요."
지유의 시선이 조리대 옆 선반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7년 전 재환이 건넸던 학생증 증명사진이 놓여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흑청색 잉크로 적힌 그 글씨를 바라보는 지유의 가슴속에 깊은 안도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둑길을 함께 걸으며 어깨에 기댔을 때 느껴졌던 재환의 서늘한 떨림.
거악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그의 등 뒤에 얼마나 거대하고 끔찍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지 지유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유언처럼 남겼던 말.
'가게 마룻바닥과 벽지 틈새에 숨겨진 서류를 지켜라. 그게 네 아버지 한석규(韓碩奎)를 죽음으로 몬 원수들의 숨통이다.'
그 서류 속에 성재환의 아버지, 성호석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을 지유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재환이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때, 김밥집 미닫이문이 급하게 열리며 최민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는 민재의 손에는 카메라와 두툼한 취재 수첩이 들려 있었다.
"지유야!"
가게 안에 있던 상인들이 일제히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야, 무슨 일이야? 숨 좀 돌리고 말해."
지유가 물컵을 건네자, 민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청이 뒤집혔어. 성재환이가…… 재환이가 방금 남원지청장 조동식을 뇌물수수 피의자로 입건하고 체포 절차에 들어갔어!"
"뭐, 뭐라고?"
김 씨 아저씨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지청장을? 검찰 대가리를 검사가 잡는다고?"
"그뿐만이 아니야."
민재는 주위를 살피며 지유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환이가…… 서울 성북동에 있는 자기 아버지 사저에 대해서도 압수수색 영장을 쳤어. 제 손으로 제 아버지를 잡겠다고 나선 거야."
지유의 손에서 칼이 멈추었다.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조리대 위로 정적이 얼어붙었다.
지유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재환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나도 가혹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앞치마를 벗어 개어 놓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홀로 벼랑 끝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있다면, 자신 또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진실을 찾아 그의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
지유의 눈동자가 주방 안쪽, 어머니가 누워 계시던 낡은 단칸방 구석의 벽장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 미처 다 꺼내지 못했던 또 하나의 낡은 상자.
수십 년 전 강태석과 성호석이 아버지의 땅을 빼앗기 위해 조작했던 최초의 원천 서류가 잠들어 있는 그 어둠 속으로, 지유의 발걸음이 결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남원지청 정문 앞에는 문성현 판사가 긴급 발부한 체포영장을 손에 쥔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의 검은 차량들이 지청장실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