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를 향한 노골적 협박
1. 어둠 속의 침탈자들
새벽 다섯 시의 어스름은 젖은 흙과 썩은 풀 냄새를 짙게 품고 있었다.
밤새 남원을 짓누르던 물안개가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좁은 처마 밑으로 뱀처럼 스며들었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은 지난밤의 폭우를 견뎌냈지만, 거미줄처럼 갈라진 금마다 빗물이 스며들어 위태롭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지유는 홑적삼 소매를 걷어붙인 채 조리대 위에 굵은 소금을 뿌려 도마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거친 소금 알갱이가 솔 끝에 쓸려 나갈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가게 안을 메웠다.
그녀의 손등에는 오랜 세월 기름 솥과 칼날에 덴 자잘한 흉터들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손가락 끝마디는 굳은살로 단단해져 있었으나, 행주를 쥐고 비틀어 짜는 힘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가 떠난 지 벌써 수많은 계절이 흘렀지만, 가게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온기와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참기름 병의 기름때를 닦아내던 지유의 시선이 조리대 한쪽 모퉁이에 멎었다.
그곳에는 7년 만에 돌아온 성재환이 두고 간, 닳고 닳은 학생증 사진 한 장이 투명한 유리 테이프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그 짧은 글귀는 지난 7년간 지유를 지탱해 준 유일한 기둥이었다.
지유는 차가운 손끝으로 사진 속 소년의 눈매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청 204호 검사실에서 피를 말리며 밤을 새우고 있을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낮게 깔린 디젤 엔진의 둔탁한 소음이 새벽공기를 찢으며 다가왔다.
한 대가 아니었다.
덜컹거리는 쇠붙이 소리와 함께 육중한 바퀴가 깨진 보도블록을 짓이기며 멈춰 섰다.
이어 거칠게 차 문이 열리고, 무거운 군화와 쇠징 박힌 안전화가 질척거리는 아스팔트를 짓밟는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지유는 행주를 쥐고 있던 손을 멈췄다.
가게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바람도 없는 새벽 공기 속에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짤랑, 쨍강.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어둠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노란색 안개등 불빛이 가게 안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불빛 속에 드러난 것은 남원시청 도로교통과의 표식이 찍힌 승합차 두 대와, 그 뒤를 받치고 선 짙은 청색의 2.5톤 카고 크레인 트럭이었다.
트럭 적재함에는 노란색 안전모를 쓴 장정 십여 명이 쇠지렛대와 전선 절단기, 대형 해머를 손에 쥔 채 걸터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공무를 집행하는 행정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이권을 뜯어먹고 자란 토건 폭력배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2. 노란 봉투와 도로 점용 취소
쾅, 쾅, 쾅!
가게의 얇은 양철 미닫이문이 부서져라 흔들렸다.
유리창에 붙여둔 박스 테이프가 비명을 지르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안에 사람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 도로교통과에서 나왔어!"
목을 긁는 듯한 탁하고 거친 목소리가 문풍지를 뚫고 들어왔다.
지유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세차게 뛰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쇠파이프를 든 괴한들이 창문을 깨부쉈을 때도 지유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는 순간 원수들이 빼앗아 가려 하는 아버지의 땅과 어머니의 넋이 바닥에 짓밟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유는 걸쇠를 풀어 문을 반쯤 열었다.
새벽의 축축하고 비릿한 바람과 함께 누린내 나는 담배 연기가 훅 끼쳐왔다.
문 앞에는 남원시청 도시국 도로관리계장 김상태가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문 채 서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는 양복 차림 밑에 문신이 언뜻언뜻 비치는 덩치 큰 사내 넷이 팔짱을 낀 채 골목길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한양토건과 삼거리 토건 잔당들이 분명했다.
"한지유 씨 맞지?"
김상태는 주머니에서 기름때 묻은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풍기는 싸구려 담배 냄새가 지유의 코를 찔렀다.
"무슨 일이시죠, 이른 아침부터."
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서늘했다.
김상태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무슨 일이냐고? 거 참, 남원 바닥에서 제일 바쁜 처자가 모르는 척을 하네. 이거 시청 직인 찍힌 공문이야. 정식 행정처분 통지서라고."
김상태는 노란 봉투에서 빳빳한 종이 두 장을 꺼내 지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붉은색 인주로 찍힌 남원시장 권한대행의 관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상단에는 굵은 고딕체로 검게 인쇄된 제목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도로법 제63조 및 제65조 위반에 따른 도로 점용 허가 직권 취소 및 원상복구 명령 통지서.'
그 뒤에 붙은 장에는 더 가혹한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행정대집행 계고서.'
"읽어봐. 네놈들 가게 앞 처마하고 저기 튀어나온 조리대, 그리고 연탄재 쌓아둔 저 좁은 골목길 바닥 말이야. 지난 10년간 시유지를 불법으로 무단 점유해 온 사실이 이번 요천 제방 수해 실태 조사에서 적발됐어."
김상태는 침을 퉤 뱉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오전 9시부로 도로 점용 허가는 완전 취소다. 그리고 오늘 정오 열두 시까지 이 튀어나온 처마, 바깥 조리대, 전면 덧대기 목조 구조물을 자진 철거해. 12시 정각까지 원상복구가 안 되면, 우리 시청 철거반과 중장비가 투입돼서 행정대집행으로 싹 밀어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
"정오요?"
지유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공문 송달 후 최소 열흘의 소명 기간과 계고 기간을 두어야 하는 것이 행정절차법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통지서를 들이밀고 일곱 시간 만에 가게를 부수겠다는 게 법입니까?"
지유는 지난 7년간 가게를 지키기 위해 헌책방을 뒤지며 읽었던 법전의 조항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반박에 김상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계장은 들고 있던 계고서를 지유의 가슴팍으로 거칠게 내던지듯 찔러 넣었다.
"법? 가소롭게 어디서 계집애가 법을 들먹여! 요천 제방이 터져서 남원 구도심 저지대가 물에 잠겼어. 지금 시 전체가 재난 비상사태야! 재난관리법상 긴급 통행로 확보를 위한 긴급 대집행은 유예 기간 따위 없어! 당장 저 포클레인 대가리가 이 썩은 판잣집을 짓이기기 전에 짐이나 싸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김상태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지유의 귓가에 낮고 음침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너 하나 때문에 남원시정이 멈출 것 같으냐? 옥중에 계신 시장님이 널 참 각별하게 생각하시더군. 그 새파란 풋내기 검사 놈 믿고 꼬리 흔들다가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어. 오늘 낮 열두 시다. 그 안에 네 손으로 저 간판 내리고 문 닫아. 안 그러면 이 흙벽 밑바닥까지 굴착기로 파헤쳐서 30년 전 시궁창 냄새를 온 동네에 풍겨줄 테니까."
3. 교도소의 독기
같은 시각, 전주교도소 미결수 특별 독방.
두꺼운 철문 아래로 난 배식구 틈새로 복도의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방 안은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힐 듯했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얇은 담요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강태석은 죄수의 몰골이 아니었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가슴에 붉은색 수형 번호표를 달았음에도, 그의 두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형형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덜컥.
철문 자물쇠가 조심스럽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교도관 제복을 입은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
사내의 손에는 검은색 소형 무선 전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교도관은 허리를 잔뜩 굽힌 채 강태석의 발치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시장님, 남원 시청 김 계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게는 곤란합니다. 5분 뒤에 보안과장이 순찰을 돕니다."
강태석은 대꾸도 없이 주머니에서 빳빳한 10만 원권 수표 서너 장을 꺼내 교도관의 가슴팍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교도관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망을 보았다.
강태석은 뼈마디가 굵은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나다."
그의 목소리는 지하 암반을 긁어내는 쇠꼬챙이처럼 낮고 음산했다.
- 시장님!
도로교통과 김상태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방금 삼거리 김밥집에 계고장 직접 꽂아 넣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상태의 비굴한 목소리가 숨 가쁘게 들려왔다.
"년의 반응은 어때."
- 아주 기가 차서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행정절차법이니 뭐니 지껄이길래, 재난지역 긴급 도로 복구 핑계 대고 정오에 포클레인 세 대로 밀어버리겠다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누런 이빨 사이로 역겨운 가래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귀를 알아듣는 년이 아니야. 그년의 애비 한석규도 그랬지. 대가리가 깨져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계약서 도장을 안 찍겠다고 버티던 독종이었어. 그 피가 어디 가겠나."
- 그럼 정오에 정말로 밀어버립니까?
"밀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밀어버려."
강태석은 주먹을 쥐었다.
손등의 굵은 정맥이 성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성재환 그 애송이 놈이 지금 지청 검사실에서 하도급 장부 쪼가리를 붙들고 밤을 새우고 있을 거다. 유성골재 계집년을 빼돌려놓고 신이 났겠지. 하지만 제 계집의 가게가 굴착기 삽날에 부서져 나가는 꼴을 보고도 그 차가운 주둥이로 법을 지껄일 수 있을지 어디 보자고."
- 하지만 시장님, 성재환 검사가 현장으로 직접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나오라고 해. 튀어나오면 더 좋지."
강태석의 눈에 서슬 퍼런 광기가 어렸다.
"검사 놈이 공무집행 중인 시청 행정인력과 용역들 앞을 막아서서 사적 감정으로 영장도 없이 깽판을 친다? 그 자리에서 전경 부르고 방송 기자들 불러 모아. 성호석의 아들놈이 권력을 남용해서 제 첫사랑 사유재산을 지키겠다고 공무원들을 폭행했다고 그림을 만들어. 중앙의 김문현 위원장에게도 이미 줄을 대 놨다. 검찰총장이든 법무부 장관이든, 사적 보복에 눈이 먼 칼잡이 새끼를 그대로 둘 수 없을 거다."
강태석은 이를 뿌득 갈았다.
"지유 그년을 인질로 잡아야 성재환의 칼끝이 꺾여. 그놈이 지청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순간, 그놈의 검사 인생도 끝장이다. 알겠나? 정오다. 1분도 늦추지 말고 포클레인 시동 걸어!"
- 예, 시장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강태석은 전화기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는 좁은 감방 벽면에 머리를 기대며 차가운 시멘트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성호석…… 네 아들놈이 내 목을 조르겠다고 날뛰어? 천만에. 남원은 내 땅이다. 내 피와 땀으로 굳힌 콘크리트 바닥이야. 그깟 붓두껍 하나로 내 왕국을 허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어둠 속에서 강태석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뱀 대가리처럼 감방 안을 맴돌았다.
4. 벽을 등진 결기
시청 공무원들과 용역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사라진 골목길에는 찢긴 계고서와 도로 점용 취소 통지서가 뒹굴고 있었다.
새벽 여섯 시.
동문 우체국 뒷골목 상인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나오다 김밥집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어진 붉은색 관인이 찍힌 공문을 주워 든 구두 수선공 김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여! 요천 둑이 무너진 게 지유네 김밥집 처마 때문이라는 게 말이 되간?"
남원일보 배달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최 씨도 자전거를 내동댕이치며 뛰어왔다.
"시장 놈이 감옥에 쳐박혀서도 대가리를 굴리는구먼! 이게 다 지유를 건드려서 재환이, 아니 성 검사님 손발을 묶어놓으려는 수작질이야!"
골목 상인 수십 명이 웅성거리며 김밥집 안으로 몰려들었다.
생선가게 배 씨는 앞치마에 묻은 비늘을 털어내며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지유야! 걱정 마라! 지난번 세무서 놈들 왔을 때도 우리가 막아냈잖여. 정오에 용역 놈들이 포클레인 끌고 오면 내가 이 대가리를 깨부숴버릴텡게!"
"맞아요! 지유 엄마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 가게를 포클레인으로 밀게 놔둔단 말이요!"
상인들의 격앙된 외침이 좁은 김밥집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계고서를 주워 모서리를 반듯하게 편 뒤,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아저씨, 아주머니들. 마음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절대 몸으로 막아서시면 안 돼요."
지유의 눈동자는 맑고 깊었으나, 그 안에는 거대한 바위 같은 단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들이 노리는 건 충돌이에요. 우리가 몽둥이를 들고 맞서는 순간, 공무집행방해로 경찰을 부르고 폭동으로 몰아갈 거예요. 그러면…… 재환이가 다쳐요."
재환의 이름이 나오자 상인들의 웅성거림이 일순간 멎었다.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인 낡은 학생증 사진을 바라보았다.
"재환이는 지금 법으로 싸우고 있어요. 30년간 이 남원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 그 거대한 도둑 떼들을 법정에 세우려고, 밤새 피를 토하며 조서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감정으로 부딪치고 폭력을 쓰면, 저들은 그걸 빌미로 재환이의 수사를 방해하고 검사복을 벗기려 들 거예요."
지유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핏자국이 뱄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가게는 제가 지켜요. 어머니가 물려주신 이 터전, 그리고 아버지의 억울함이 묻힌 이 땅은…… 피로 지키는 게 아니라, 진실로 지킬 거예요."
"하지만 지유야, 저놈들이 정오에 포클레인을 끌고 오면……!"
김 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유는 조용히 뒤돌아 주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찬장 뒤편, 어머니가 흙벽돌 틈새에 숨겨두었던 그 작은 비밀 벽감.
비록 1968년 이면계약서 원본은 재환에게 넘겨주었지만, 그 벽감 깊숙한 곳에는 아직 지유가 남겨둔 마지막 기록들이 있었다.
지난 7년간 강태석 일파가 삼거리 김밥집을 괴롭히며 발부했던 온갖 불법 과태료 고지서, 위생과 시정명령서, 그리고 어머니의 심장을 멎게 만들었던 협박의 날짜들이 낱낱이 적힌 지유의 현장 기록 수첩이었다.
"오라고 하세요."
지유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포클레인이 이 벽을 부수면, 저는 이 부서진 잔해 위에 앉아 있을 거예요. 제 몸을 밀어내지 않고는 단 한 치의 흙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예요."
5. 204호의 전율
오전 여덟 시 삼십 분,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방 안은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와 차갑게 식은 믹스커피 냄새로 지독하게 탁했다.
바닥과 책상 위에는 밤새 압수해 온 유성골재의 이중 비밀 장부와 출하 전표, 28개 하도급 업체의 허위 세금계산서 수천 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성재환 검사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친 채 책상에 엎드리듯 기대어 공소장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눈 밑은 짙은 피로로 검게 그늘져 있었으나, 종이를 넘기는 만년필 끝은 번개처럼 번뜩였다.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흑청색 잉크는 유성골재에서 빼돌려진 14억 원의 현금이 강태석 남원시장의 관사 판공비와 정치 자금으로 세탁된 경로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완벽했다.
이 공소장 하나면 강태석은 물론, 그를 비호하던 시청 결재 라인과 남원 제1건설 배동진까지 모조리 법정에 세워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게 할 수 있었다.
쾅!
그때 검사실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렸다.
대검 특수부에서 파견된 강태훈 수사관이 숨을 턱 끝까지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재환은 만년필을 멈추지 않은 채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미숙 주임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민재가 호송 중인 안가 위치가 노출됐습니까?"
"아닙니다! 정 주임은 전주 안가에 무사히 도착해 진술 조서를 작성 중입니다! 문제는…… 남원 시내입니다!"
강태훈은 떨리는 손으로 남원시청 도로교통과에서 긴급 발송한 팩스 한 장을 재환의 책상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오늘 새벽 다섯 시, 남원시청 도로교통과에서 삼거리 김밥집에 대해 도로 점용 허가 직권 취소 통보를 내렸습니다! 사유는 재난 긴급 복구 도로 확보 및 불법 건축물 철거입니다!"
재환의 손이 우뚝 멈췄다.
만년필 촉 끝에서 흑청색 잉크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하얀 공소장 여백을 검푸르게 물들였다.
"……뭐라고요?"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팩스 용지의 글귀를 훑어 내렸다.
'금일 12시 정각, 행정대집행 계고에 따른 강제 철거 집행 예정.'
"정오……? 오늘 낮 열두 시 말입니까?"
"예! 한양토건 소속 용역들과 중장비 기사 십여 명이 이미 시청 별관 주차장에 집결해 있습니다! 굴착기 두 대와 크레인이 동원됐답니다! 현장 지휘는 시청 도로관리계장 김상태가 맡았는데, 실질적으로는 옥중에 있는 강태석이 교도관을 매수해 비밀 지령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강태훈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강태석 이 악질 새끼가…… 검사님이 쥐고 있는 공소장을 흔들려고 한지유 씨를 인질로 삼은 겁니다! 검사님이 현장으로 뛰쳐나가길 유도해서 공무집행방해로 엮거나, 아니면 김밥집을 밀어버려 검사님의 멘탈을 박살 내겠다는 수작입니다!"
우지끈.
재환의 오른손에 쥐여 있던 검은 만년필의 배럴이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재환의 눈에 서슬 퍼런 핏발이 섰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어 올랐다.
7년 전, 서울로 끌려가던 기차 안에서 남겨두고 왔던 지유였다.
어머니를 잃고, 무릎에 피를 흘리며,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기우면서도 자신을 믿고 7년을 버텨준 사람이었다.
그런 지유의 목에, 강태석은 감옥에 갇힌 채로도 비열한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네가 가진 칼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네 계집의 숨통을 끊어버리면 그 칼을 휘두를 수 있겠느냐.'
강태석의 그 징글징글한 조소가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재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쇠소리를 냈다.
"검사님! 참으셔야 합니다!"
강태훈이 다급하게 재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검사님이 법복을 벗고 현장으로 달려가시면 강태석의 덫에 그대로 걸려드는 겁니다! 지청장 조동식이 지금 검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검사가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철거 현장에 개입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순간, 대검 감찰부가 내려오고 직무 배제 처분이 내려집니다! 그러면 이 모든 수사가 물거품이 됩니다!"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찢고 들어가 피가 배어 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오전 아홉 시 십오 분.
철거까지 남은 시간은 단 두 시간 사십오 분이었다.
6. 사법의 방패와 심장의 고동
검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성재환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지청 문을 박차고 나가 관용차를 몰고 삼거리 김밥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 비열한 계장 놈의 멱살을 잡고, 굴착기 앞을 막아서서 권총이라도 뽑아 들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재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남원에 버려졌던 열여덟 살의 무력한 소년 성재환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검사였다.
법을 농락하는 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기 위해 7년을 어둠 속에서 칼을 갈아온 법률가였다.
'피로 맞서면 피를 부르고, 폭력으로 맞서면 저들의 덫에 걸린다.'
지유가 7년간 지켜온 것은 단순한 김밥집 건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재환이라는 인간의 정의였고, 두 사람이 함께 꿈꾸었던 불변의 신념이었다.
재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붉은 분노가 일순간 차가운 빙하처럼 가라앉았다.
지독할 정도로 서늘하고 예리한 이성이 다시 그의 뇌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강 수사관."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은 방 안의 공기를 단숨에 짓눌렀다.
"예, 검사님."
"남원지원 당직 판사실로 갑니다."
"예? 법원으로요?"
"행정소송법 제23조."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형법전을 덮고, 두툼한 행정법 주석서를 집어 들었다.
"처분 등으로 인하여 생길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법원은 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처분의 효력정지를 결정할 수 있다."
재환의 손가락이 행정법 조항을 짚어나갔다.
"남원시청의 이번 도로 점용 허가 취소 처분은 행정절차법상 사전 통지 및 의견 청취 절차를 완전히 위반한 중대하고 명백한 위법 처분입니다. 또한 정오에 집행하겠다는 행정대집행 계고 역시 대집행법상 상당한 이행 기한을 부여하지 않은 불법 처분입니다."
강태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효력정지 신청서와 함께, 위법한 행정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긴급 결정을 받아낼 겁니다."
재환은 시계를 노려보았다.
"현재 시각 아홉 시 이십 분. 문성현 영장전담판사가 오늘 남원지원 당직 판사입니다. 문 판사는 법리와 절차를 엄격하게 따지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우리가 행정처분의 절차적 위법성과 회복할 수 없는 손해의 긴급성을 완벽하게 소명한다면, 정오 이전에 집행정지 인용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 검사 신분으로 개인의 행정소송 대리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청장과 변호사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내가 대리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환의 입술에 서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신청인은 한지유 본인입니다. 나는 한지유의 신청서 작성을 조력하고, 공익의 대표자이자 수사 검사로서 '행정청의 권한 남용 및 피의자 강태석의 증거 인멸 교사 행위'에 대한 의견서를 법원에 공식 제출할 겁니다."
재환은 부서진 만년필을 다시 쥐었다.
그는 백지 한 장을 꺼내 들고 흑청색 잉크로 맹렬한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청 취지, 신청 이유, 처분의 위법성, 긴급한 필요성.
단 한 자의 망설임도 없는 완벽한 문장들이 종이 위를 수놓았다.
"강 수사관은 지금 즉시 삼거리 김밥집으로 가십시오."
재환은 완성된 서류를 강태훈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유에게 이 서류를 건네고 인장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지유에게 전하십시오."
재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나약함이 아닌, 억누를 수 없는 맹세의 무게였다.
"절대 다치지 말라고. 문을 열어주지 말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고 기다리라고. 내가……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법의 철퇴를 들고 그곳으로 갈 테니, 조금만 버텨달라고 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검사님! 목숨을 걸고 다녀오겠습니다!"
강태훈이 서류를 품에 안고 검사실을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검사실에서 성재환은 벽면에 걸린 검사 법복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비단 위에 수놓인 무궁화 문양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은 가슴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7년을 버텼듯, 나 역시 7년을 준비했다. 너를 지키지 못하는 정의라면, 이 법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환은 자신의 명패를 집어넣고, 강태석의 비자금 수사 기록철을 가슴에 안은 채 남원지원을 향해 결연히 발걸음을 옮겼다.
7. 폭풍 전야의 삼거리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잿빛 먹구름으로 뒤덮여 대낮인데도 땅거미가 진 듯 어둑했다.
골목 양쪽 끝은 이미 시청에서 동원한 바리케이드와 모래주머니로 차단되어 있었다.
골목길에는 남원 구도심 상인 백여 명이 삼거리 김밥집 앞을 겹겹이 에워싸고 인간 띠를 형성하고 있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 신문 배달부 최 씨, 생선가게 배 씨 등 늙고 힘없는 상인들이 서로의 팔짱을 꼭 낀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나 쇠파이프 대신, '불법 철거 결사반대', '수해 원인 규명하라'는 조잡한 박스지 피켓이 들려 있었다.
김밥집 전면 통유리창 안쪽, 조리대 앞에 한지유가 서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흰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앞치마를 정갈하게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강태훈 수사관이 전해주고 간 집행정지 신청서 사본과, 가슴속에 품고 있던 어머니의 하얀 손수건이 쥐여 있었다.
지유의 시선은 깨진 유리창 너머, 골목 어귀를 응시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지면을 울리는 육중한 궤도 바퀴 소리와 함께 거대한 굴착기 두 대가 골목 입구의 바리케이드를 부수며 진입했다.
굴착기 뒤편으로는 노란색 안전모를 쓰고 쇠지렛대와 각목을 든 시청 철거반과 한양토건 용역 40여 명이 도열하듯 따라붙었다.
맨 앞에는 확성기를 든 도로관리계장 김상태가 비열한 독기를 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상인 여러분! 도로교통법 및 행정대집행법에 따른 적법한 공무집행입니다!"
김상태의 찢어지는 듯한 확성기 소리가 골목길을 뒤흔들었다.
"불법 건축물에 대한 강제 철거를 방해하는 자는 전원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현행범 체포될 것입니다! 즉시 해산하십시오!"
"이 개새끼들아! 물러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포클레인을 끌고 와!"
김 씨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상인들이 스크럼을 짜며 완강하게 버텼으나, 거친 용역들의 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밀어붙여! 싹 끌어내!"
김상태의 손짓 한 번에 건장한 용역들이 상인들의 팔을 꺾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인간 띠를 찢기 시작했다.
비명과 절규, 거친 욕설이 뒤엉키며 골목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늙은 상인들이 진흙 바닥에 나뒹굴고 피켓이 짓밟혔다.
마침내 김밥집 처마 앞까지 도달한 굴착기 한 대가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며 육중한 쇠 버킷을 높이 들어 올렸다.
버킷의 날카로운 쇠이빨이 김밥집의 낡은 처마와 간판을 겨냥했다.
"한지유! 마지막 경고다! 당장 나와!"
김상태가 김밥집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악을 썼다.
지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미닫이문을 열고 처마 밑으로 걸어 나왔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단발머리를 흩날렸다.
지유는 거대한 굴착기 삽날 바로 아래,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그 지점에 두 발을 딛고 섰다.
그녀의 두 눈은 분노와 살기로 번들거리는 김상태와 용역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부수세요."
지유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골목길의 소음을 단숨에 갈랐다.
"이 가게를 부수려면, 먼저 나를 짓밟고 가세요."
"뭐, 뭐야? 이년이 진짜 미쳤나! 야! 기사, 뭐 해! 처마부터 찍어 눌러!"
김상태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굴착기 기사가 머뭇거리다 레버를 당겼다.
쿠구구궁!
거대한 쇠 버킷이 굉음을 내며 지유의 머리 위로 육중하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지유야! 피해라!"
지유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품속의 하얀 손수건을 꼭 쥐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재환아.'
시계탑의 종소리가 정오를 알리기 직전이었다.
끼이이익-!
그 순간, 귓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이 골목길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검은색 관용 세단 한 대가 용역들의 대열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와 굴착기 앞을 가로막으며 멈춰 섰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고, 검은색 코트를 입은 성재환 검사가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푸른색 직인이 찍힌 법원의 결정문이 높이 들려 있었다.
"집행 중지!"
성재환의 서슬 퍼런 사자후가 남원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의 집행정지 명령이다! 전원 굴착기 시동 끄고 물러서라! 명령에 불응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직권남용 및 특수공무집행방해 교사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한다!"
시간이 멈춘 듯, 거대한 쇠 버킷이 지유의 머리 위 1미터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