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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2화

빈 상자와 증거 인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타버린 금고와 남겨진 온기

 

매캐한 기름내가 눅눅한 빗물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들이친 비바람이 대표실 카펫을 질척하게 적시고 있었다.

 

전북 남원시 하정동, 남원 제1건설 본사 3층 대표실은 폭격을 맞은 듯 아수라장이었다.

 

책상은 엎어져 있었고, 서랍들은 모조리 뽑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벽면 한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육중한 철제 비밀 금고는 육중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부는 휑뎅그렁했다.

 

성재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금고 안쪽에 손을 뻗었다.

 

장부가 꽂혀 있었을 칸막이 자리는 서늘하지 않았다.

 

미지근했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체온이었다.

 

"검사님, 이쪽입니다!"

 

특수부 수사관 강태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표실 안쪽 화장실과 이어진 탕비실 구석, 커다란 공업용 드럼통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불씨가 종이의 숨통을 마지막까지 갉아먹는 중이었다.

 

재환은 주저 없이 탕비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바가지로 싱크대 물을 받아 드럼통 안에 끼얹었다.

 

치이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하얀 수증기와 유독한 회색 연기가 일시에 치솟았다.

 

재환은 연기를 들이마시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드럼통 안을 응시했다.

 

바닥에 가라앉은 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까맣게 숯이 되어버린 종이 찌꺼기뿐이었다.

 

타다 남은 모서리 몇 조각에 파란색 인주 자국과 '원천...', '...지분'이라는 활자의 일부가 간신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서류의 시체였다.

 

"제길, 간발의 차였습니다."

 

강태훈이 이를 갈며 주먹으로 드럼통 테두리를 내리쳤다.

 

"우리가 정문을 통과해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불을 지른 게 아닙니다. 이건 최소한 삼십 분 전부터 작정하고 태운 겁니다. 출입구 비상계단 쪽에 젖은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지하 주차장 쪽으로 트럭 한 대가 빠져나간 걸 인근 주민이 봤다고 합니다."

 

재환은 대답 대신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손을 뻗어 아직 식지 않은 드럼통 속의 잿더미를 조심스럽게 건져 올렸다.

 

검은 그을음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어나며 흉터처럼 번졌다.

 

그의 품속, 정장 안주머니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를 채운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에 각인된 그 문구가 살갗을 파고드는 듯했다.

 

지유는 삼거리 김밥집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7년을 버텼다.

 

어머니를 잃고, 가게 유리창이 박살 나고, 부패한 경찰과 조폭들의 쇠파이프 난동 속에서도 1원의 오차도 없는 장부를 지켜내며 견뎠다.

 

그런데 겨우 한 발 늦었다는 이유로 이 거악의 흔적을 잿더미 속에 묻어둘 수는 없었다.

 

"강 계장."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분노로 떨릴 법도 했지만, 오히려 기이할 만큼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검사님."

 

"국과수에 즉시 연락하세요. 현장 화재 감식팀과 문서 감정 전문가들을 본사 대표실로 전원 소환합니다. 드럼통 통째로 밀봉해서 압송하세요. 재 한 톨, 바닥에 떨어진 종이 가루 하나까지 증거물 봉투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검사님, 완전히 소각된 재에서 활자를 복원하는 건 현실적으로..."

 

"탄화된 종이라도 적외선 분광 분석과 정전기 복원 기법을 쓰면 압인과 필흔의 굴곡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단 하나의 직인이라도 살려내면 공소장에 적시할 증거 능력이 생깁니다. 지문 채취반도 부르세요. 금고 손잡이, 책상 모서리, 탕비실 수도꼭지에 묻은 지문을 모조리 떠야 합니다."

 

재환은 천천히 일어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뿌연 빗줄기 너머로 남원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요천 제방이 터져 흙탕물에 잠겼던 구도심 하정리와 동충동의 지붕들이 처연하게 젖어 있었다.

 

그곳에는 비를 맞으며 가게를 지키고 있을 지유가 있었다.

 

재환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배동진과 비서실장, 두 놈입니다. 이 건물을 빠져나간 화물 트럭은 남원 시내를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특수부 차량 두 대를 즉시 외곽 도로로 돌리세요. 순천 방면, 전주 방면 국도 요금소에 검찰 수사관을 배치하고, 관내 폐차장과 폐창고를 샅샅이 뒤집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무전 때리겠습니다!"

 

강태훈이 무전기를 들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홀로 남은 대표실에서 재환은 텅 빈 철제 금고 안을 다시금 쏘아보았다.

 

금고 바닥에는 가죽 바인더가 놓여 있던 자리만 먼지가 묻지 않은 채 사각형 모양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세 권.

 

최민재의 취재 수첩에 적혀 있던, 강태석과 남원 제1건설의 차명 지분 및 시청·법조계 뇌물 원장이 꽂혀 있던 자리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검찰이 이 비밀 금고를 정확히 열어젖힐 거라는 사실을.

 

그것도 분초를 다투는 정확한 타이밍에.

 

2. 새어나간 칼날

 

지청 지휘 세단이 빗물을 튀기며 남원지청 정문을 통과했다.

 

성재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젖은 코트를 벗어 팔에 걸치고 청사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남원지청 수사계장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검사님, 본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중수부 정종길 부장님께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보고는 내가 직접 합니다."

 

재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가는 지청 직원들이 재환의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켰다.

 

어제 새벽 기습 부임하여 현직 시장 강태석에게 구속영장을 들이밀고, 지청장의 결재를 우회해 전주지검장 전결로 영장을 법원에 쳐 넣은 미친개 검사.

 

그가 남원 제1건설을 들이쳤으나 장부가 불타버렸다는 소식은 이미 청사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204호 검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탁자 위에는 남원 제1건설 대표실에서 수거해 온 타다 남은 드럼통 잔해 사진과, 현장 약도가 어지럽게 펼쳐졌다.

 

재환은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벽면에 걸린 수사 상황판 앞으로 다가갔다.

 

상황판 중앙에는 붉은 매직으로 굵게 쓰인 '남원 제1건설(배동진)'이라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재환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돌렸다.

 

금빛 닙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탁, 소리가 나도록 만년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재환이 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검사실 문가에 서 있던 남원지청 수사계장에게 꽂혔다.

 

"수사계장님."

 

"예, 예? 검사님."

 

지청 토박이로 십수 년을 근무해 온 쉰 살 언저리의 박 계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굽혔다.

 

재환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아서 오히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오늘 오전 아홉 시 십오 분. 남원지원 문성현 판사님 집무실에서 남원 제1건설 본사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영장 원본을 손에 쥐고 지청을 출발한 시각이 아홉 시 삼십 분. 남원 제1건설 본사에 들이닥친 시각이 아홉 시 사십오 분입니다."

 

"예, 저도 그렇게..."

 

"그런데 말입니다."

 

재환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키는 컸고, 어깨는 단단했으며,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본사 3층 대표실의 드럼통에서 종이가 타들어 가던 상태,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트럭이 빠져나간 시각을 역산하면 정확히 아홉 시 삼십 분에서 삼십오 분 사이입니다. 우리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던 바로 그 순간에, 배동진은 금고를 열고 장부를 챙겨 불을 질렀다는 뜻입니다."

 

검사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타자기를 치던 실무관도, 서류를 정리하던 여직원도 숨을 멈추었다.

 

재환의 시선은 박 계장의 얼굴 근육 하나,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하나까지 낱낱이 해부하듯 훑어내렸다.

 

"남원 제1건설과 지청의 거리는 차로 십오 분입니다. 우리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연기는 이미 탕비실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이건 현장에 도착한 뒤 사이렌 소리를 듣고 급조한 인멸이 아닙니다. 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장이 실제로 발부되어 수사팀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타이밍입니다."

 

"그, 그건... 법원 쪽에서 샜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박 계장이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남원지원에도 직원이 수십 명이고, 영장이 발부되면 접수계나 송달계를 거치면서 소문이 돌 수도..."

 

"문성현 판사님은 영장전담판사실에서 단독으로 심리하셨습니다. 영장 청구서는 제가 직접 들고 들어갔고, 발부된 영장 원본도 제 손으로 직접 받아 나왔습니다. 접수계를 거치지 않았어요."

 

재환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돋았다.

 

"그렇다면 남은 경로는 둘 중 하나입니다. 문 판사님의 집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법원 행정처 사무관실. 아니면... 영장 청구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던 이곳, 남원지청 내부."

 

박 계장의 무릎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재환은 그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류철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서류철은 최민재가 3년간 목숨을 걸고 작성했던 남원 카르텔의 인맥도였다.

 

거기에는 남원시청, 남원경찰서는 물론이고, 법원과 검찰의 하위직 공무원들의 이름까지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강태석 장학생'.

 

토건 깡패 출신의 강태석이 민선 시장이 되기 전부터 남원 일대 관공서에 뿌려둔 검은 장학금과 향응의 수혜자들.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음주운전 사고를 무마해 주며 사조직처럼 부려온 내부 첩자들의 명단이었다.

 

"계장님."

 

"예, 예, 검사님!"

 

"강태석 시장이 남원상록골프장에서 전주지검 간부들과 치려던 골프 모임, 취소된 거 아십니까?"

 

"예? 그, 글쎄요... 저는 그쪽 일은 잘..."

 

"아니,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재환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강태석은 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람을 시켜 골프장 예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속적부심으로 곧 풀려날 거라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그 오만함이 어디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재환은 서류철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들이 비명처럼 흩어졌다.

 

"바로 이 청사 안, 그리고 저 법원 청사 안에 자기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개들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뇌물을 먹인 공무원들이 수사 기밀을 실시간으로 물어다 바치고 있으니, 법 따위는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박 계장은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서류 중 '지청 서무계 및 수사과 연락망'이 적힌 페이지에 닿았다가 황급히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재환은 그 찰나의 시선 이동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너였구나.'

 

재환의 내면에서 차가운 확신이 섰다.

 

조동식 지청장은 무능하고 보신주의에 찌든 관료일 뿐, 직접 발로 뛰어 배동진에게 전화를 걸 만큼 담이 크지 못하다.

 

실제로 영장 청구 시점과 수사관들의 출동 차량 번호, 이동 경로를 꿰뚫고 배동진에게 직통 전화를 걸 수 있는 자는 지청 내부의 동향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는 수사계장급 토박이뿐이었다.

 

물론 법원 내부에도 공범이 있을 것이다.

 

문성현 판사의 집무실 복도를 서성이며 영장 결재가 떨어지는 순간 밖으로 삐삐를 쳤을 협조자.

 

하지만 지청 내부의 첩자를 도려내지 않고서는 향후 어떤 강제수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3. 놋쇠 풍경과 따뜻한 김밥

 

정오가 지나자 빗줄기는 한풀 꺾였으나, 하늘은 여전히 잿빛 구름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고 맑은 소리를 냈다.

 

딸랑, 딸랑.

 

가게 안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쌀밥의 단내가 가득했다.

 

한지유는 붉은색 플라스틱 도마 위에 김을 펴고 밥을 가지런히 펴 바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7년의 세월이 남긴 크고 작은 칼자국과 데인 흉터들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지유의 시선은 조리대 한쪽에 놓인 작은 물건에 닿아 있었다.

 

모서리가 닳고 닳은 반명함판 증명사진.

 

성재환의 열여덟 살 적 앳된 얼굴, 그리고 그 뒷면에 적혀 있던 글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어루만졌다.

 

비가 오는 날이면 7년 전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갈려 나갔던 무릎 흉터가 시큰거리며 쑤셔왔다.

 

하지만 그 통증은 고통이 아니었다.

 

재환이 살아 돌아왔다는, 그가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증표였다.

 

드르륵.

 

가게 미닫이문이 열리며 놋쇠 풍경이 다시 한번 청아하게 울렸다.

 

문가에 선 인물을 본 지유의 눈이 커졌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코트 차림, 그러나 어깨와 구두는 진흙과 빗물로 얼룩져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재환아..."

 

지유는 쥐고 있던 참기름 솔을 내려놓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재환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새벽보다 더 깊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손끝에 묻은 거뭇한 그을음이 지유의 눈에 들어왔다.

 

지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따뜻한 물을 적신 행주를 가져와 재환의 앞에 섰다.

 

"손 줘봐."

 

재환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두 손을 내밀었다.

 

지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환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은 검은 그을음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7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광한루원 처마 밑에서 하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튄 빗물을 닦아주던 그 손길 그대로였다.

 

따뜻하고, 단단하며, 흔들림 없는 온기.

 

재환의 굳어 있던 턱관절이 미세하게 풀렸다.

 

"...남원 제1건설에 갔었어."

 

재환의 목소리가 텅 빈 가게 안에 낮게 울렸다.

 

"금고가 비어 있더군. 장부는 드럼통 안에서 불타고 있었고, 배동진은 도망쳤어."

 

지유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행주를 꾹 짜서 재환의 엄지손가락 안쪽에 묻은 그을음을 마저 닦아낼 뿐이었다.

 

"누군가 미리 알려준 거지?"

 

지유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법원이든, 지청이든... 내 등 뒤에 강태석의 눈과 귀가 붙어 있어. 내가 칼을 뽑아 드는 순간을 저들이 먼저 보고 있었던 거야."

 

재환의 주먹이 떨렸다.

 

분노와 자책이 뒤섞인 떨림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치밀했더라면, 관내 카르텔의 뿌리를 더 일찍 경계했더라면 그 장부를 온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 회한.

 

그때, 지유의 부드럽고 거친 손이 재환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지유는 재환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재환아.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 도둑놈들은 제 발이 저려서 언제나 불부터 지른다고.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까, 종이 쪼가리라도 없애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지유는 조리대로 돌아서서 칼을 들었다.

 

참기름을 바른 김밥을 일정한 두께로 썰어내는 경쾌한 소리가 도마 위에 울렸다.

 

탁, 탁, 탁, 탁.

 

그녀는 김밥 한 줄을 정갈한 접시에 담아 재환의 앞에 놓았다.

 

단무지, 시금치, 계란, 당근, 그리고 우엉.

 

화려하지 않지만 단 한 치의 속임도 없는, 지유의 7년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었다.

 

"그 사람들이 장부를 태웠다고 해서 지은 죄가 사라지니?"

 

지유가 맑은 눈으로 재환을 응시했다.

 

"요천 제방은 실제로 무너졌고, 하정리 사람들의 집은 물에 잠겼어. 우리 가게 유리창은 깨졌었고, 내 무릎엔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어. 세상 모든 종이를 다 태워 없애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증거는 절대로 못 태워."

 

지유는 재환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밥 먹어. 배가 고프면 눈이 흐려지고, 눈이 흐려지면 도둑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너는 남원의 법을 세우러 온 검사잖아. 그깟 종이 몇 장 불탔다고 네가 멈추면, 저 사람들은 진짜로 이긴 줄 알 거야."

 

재환은 멍하니 접시에 담긴 김밥을 내려다보았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신림동 고시촌 단칸방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형법전을 외우던 수많은 밤들.

 

지유가 겪었을 지옥 같은 고통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렸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의 답이 지금 이 작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재환은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과 밥알의 온기가 메마른 식도를 타고 내려가 차갑게 식어 있던 오장육부를 덥혔다.

 

씹을수록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재환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김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피가 돌고, 멎었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 증거가 불탔다면, 불탄 잿더미 밑에서 다시 파내면 된다.'

 

'본류가 막혔다면, 지류를 모조리 틀어막아 저놈들의 숨통을 끊어놓으면 된다.'

 

재환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회한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혔다.

 

오직 검사 성재환으로서의 서슬 퍼런 투지만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4. 숨통을 조이는 그물

 

오후 세 시,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방 안의 공기는 오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비장한 침묵 대신, 날카로운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성재환은 코트를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책상 위에 거대한 차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 차트는 남원 제1건설의 법인 등기부 등본과, 지난 3년간의 관급 공사 수주 내역, 그리고 동서개발과 세창물산으로 이어진 하도급 거래처 28곳의 명단이었다.

 

최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남원일보사 자료실에서 빼내 온 두툼한 서류 봉투가 안겨 있었다.

 

"재환아! 아니, 검사님!"

 

민재가 서류를 탁자 위에 쏟아냈다.

 

"배도식 국장 놈 방류 책상 밑에서 찾아냈습니다. 강태석이 시장 취임하고 나서 남원 제1건설에 몰아준 관급 공사 설계 변경 승인 내역서 사본입니다. 원래 공사비가 80억이었는데, 착공 석 달 만에 설계 변경을 세 번이나 거치면서 140억으로 뛰었습니다. 그 차액 60억이 어디로 흘러갔는지에 대한 남원시의회 내사 자료도 들어 있습니다!"

 

재환은 서류를 훑어내리며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민재야, 고생했다."

 

"하지만 제1건설 본사 장부가 불탔다면서요? 배동진은 도망치고... 지청 안에 첩자가 있다는 게 진짜입니까?"

 

민재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재환은 조용히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민재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검사실 구석에서 눈치를 보며 서 있던 박 계장을 차갑게 응시했다.

 

박 계장은 재환의 시선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류철을 고쳐 쥐었다.

 

"수사계장님."

 

"예, 예! 검사님."

 

"지금 즉시 지청 수사관 전원과 파견 경찰 인력을 소집하세요."

 

재환의 목소리는 명료했고, 검사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본사 비밀 금고의 회계장부가 소각되었다고 해서 수사가 끝난 게 아닙니다. 돈은 흐르면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저들이 본류 장부를 태웠다면, 우리는 바닥에 흩어진 잔가지부터 모조리 긁어모아 거꾸로 올라갈 겁니다."

 

재환은 형광펜을 들어 수사 상황판의 하도급 업체 명단에 붉은 줄을 좍좍 그었다.

 

"남원 제1건설에 자재를 납품했다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준 골재상 다섯 곳. 덤프트럭과 포클레인을 위장 임대해 주고 허위 용역비를 챙긴 중기 회사 세 곳. 그리고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에 참여했던 현장 십장과 철근 노무자 대표 전원에게 소환장을 발부합니다."

 

"그, 그 많은 인원을 전부 소환한단 말씀이십니까?"

 

박 계장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지청 조사실이 모자라면 강당을 비우세요. 오늘 밤 안으로 28개 하도급 업체 대표들의 자택과 사무실에 대한 동시다발적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청구합니다. 문성현 판사님께는 제가 직접 갑니다."

 

재환은 박 계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번 압수수색 대상지 목록은 오직 저와 강태훈 계장, 둘만 압니다. 타자기로 영장을 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직접 손으로 작성해서 판사님께 가져갈 테니까요. 만약 이번에도 정보가 사전에 새어 나간다면..."

 

재환은 말을 멈추고 만년필을 들어 자신의 책상 한구석을 톡톡 쳤다.

 

그곳에는 형법 제127조(공무상비밀누설)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수뢰후부정처사) 조항이 적힌 노란색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그때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 숨어 있는 첩자의 손목에 가장 먼저 수갑을 채울 겁니다. 내부 공범은 긴급 체포 대상이며, 영장 없는 현행범 체포도 불사합니다. 제 말뜻, 알아들으셨습니까 계장님?"

 

박 계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즉시 인력을 소집하겠습니다."

 

박 계장이 허겁지겁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민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인간이 맞습니까? 저자가 배동진한테 불을 지르라고 찌른 놈입니까?"

 

"아직 물증은 없어. 하지만 저자는 지금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지."

 

재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쥐새끼는 도망갈 구멍이 막히면 제 발로 덫을 찾아 들어가는 법이야. 박 계장의 통화 내역과 삐삐 착신 기록을 강 계장 직속 팀에게 극비로 추적하라고 지시해 뒀다. 저자가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누구를 만나는지가 곧 강태석의 마지막 사법 로비망을 밝혀낼 스모킹 건이 될 거다."

 

5. 빗속의 추격과 불타는 찌꺼기

 

남원 시내 외곽, 지리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는 세찬 빗줄기로 시야가 십 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와이퍼가 미친 듯이 유리창을 긁어댔지만, 쏟아지는 폭우를 감당하지 못했다.

 

진흙투성이가 된 낡은 2.5톤 타이탄 화물 트럭 한 대가 미끄러운 아스팔트 위를 위태롭게 질주하고 있었다.

 

트럭 조수석에 탄 남원 제1건설 대표 배동진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구리에는 빗물에 젖지 않도록 두꺼운 비닐로 꽁꽁 싸맨 검은색 가죽 바인더 세 권이 들려 있었다.

 

강태석 남원시장이 지난 5년간 지역 토착 유지들과 시청 공무원들, 그리고 전주지검과 남원지원 하위직들에게 뿌린 뇌물 내역이 1원 단위까지 기록된 비밀 회계 원장이었다.

 

"야, 속도 더 내! 밟으라고, 이 새끼야!"

 

배동진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비서실장에게 악을 썼다.

 

"대표님, 빗길이라 차가 돕니다! 앞이 안 보여요!"

 

"뒤에서 검찰 놈들이 따라붙으면 우린 다 끝장이야! 폐차장까지 앞으로 십 분이면 가. 거기 소각로에 이 장부 세 권만 집어넣으면, 강태석 시장님이 구속적부심으로 나오고 우리는 살 수 있어! 밟아!"

 

비서실장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트럭의 낡은 엔진이 굉음을 내지르며 빗길을 갈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트럭의 룸미러로 날카로운 상향등 불빛 두 개가 들이쳤다.

 

어둠과 빗줄기를 뚫고 검은색 현대 쏘나타 세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트럭의 뒤꽁무니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지청 소속 차량이 아니었다.

 

서울 대검 특별수사본부에서 성재환 검사가 직접 끌고 내려온 직속 수사 차량이었다.

 

"대, 대표님! 뒤에 차 붙었습니다!"

 

비서실장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뭐야?! 경찰은 다 막아놨다고 송 계장 그 새끼가 장담했잖아!"

 

"경찰차가 아닙니다! 검찰 놈들입니다!"

 

추격 차량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확성기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앞서가는 전북 8바 3412 화물 트럭, 즉시 갓길로 정차하십시오! 대검 특별수사본부입니다! 정차하지 않을 경우 특수공무집행방해로 간주하여 강제 진압하겠습니다!"

 

배동진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세우지 마! 밀어버려! 그냥 들이받고 폐차장 철문 안으로 밀고 들어가!"

 

트럭이 차선을 넘나들며 지그재그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수사 차량이 트럭의 측면을 바짝 압박하며 가드레일 쪽으로 몰아붙였다.

 

쾅!

 

사이드미러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폭우 속에서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비명 같은 굉음이 국도 위에 울려 퍼졌다.

 

전방 삼백 미터 앞, 녹슨 철조망과 폐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외곽 폐차장의 입구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배동진은 비닐에 싸인 가죽 바인더를 품에 꽉 껴안았다.

 

'이것만 태우면 된다.'

 

'이것만 불속에 던져 넣으면 성재환이든 대검이든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해!'

 

그러나 그들의 트럭이 폐차장 정문으로 꺾어 들어가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폐차장 입구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며 길목을 대각선으로 가로막았다.

 

끼이이익-!

 

비서실장이 기겁하여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젖은 노면 위에서 트럭의 바퀴는 통제력을 잃고 미끄러졌다.

 

트럭은 반 바퀴를 빙글 돌며 폐차장 외벽의 폐타이어 더미를 들이받고서야 멈추어 섰다.

 

푸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보닛에서 라디에이터 증기가 치솟았다.

 

"커헉!"

 

배동진은 이마를 유리창에 부딪쳐 피를 흘리면서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는 가죽 바인더를 품에 안고 진흙탕 바닥을 기어가듯 폐차장 안쪽 소각로를 향해 달렸다.

 

"거기 서!"

 

수사관들의 고함과 함께 발소리가 진흙을 튀기며 뒤쫓아왔다.

 

소각로에는 폐자재를 태우기 위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배동진은 미친 듯이 웃으며 비닐을 찢어 발겼다.

 

"성재환, 이 새끼야! 못 가져가! 아무도 못 가져가!"

 

그가 첫 번째 가죽 바인더를 시뻘건 불길 속으로 내던졌다.

 

화르륵!

 

종이가 불길을 머금으며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동진이 두 번째 바인더를 던지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날아든 육중한 그림자가 그의 등을 덮쳤다.

 

"크악!"

 

진흙탕 바닥에 처박힌 배동진의 손목에 차가운 쇠고리가 스냅을 주며 감겼다.

 

철컥!

 

특수부 수사관 강태훈이었다.

 

"남원 제1건설 대표 배동진, 증거인멸 및 특수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놔! 이거 놓으라고, 개새끼들아!"

 

배동진이 진흙을 뱉어내며 발악했다.

 

다른 수사관이 소각로로 달려들어 쇠갈고리로 불속에 들어간 첫 번째 바인더를 끄집어냈지만, 이미 표지와 주요 내역의 절반 이상이 새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하지만 배동진의 품에서 튕겨져 나와 진흙탕 위에 떨어진 두 번째, 세 번째 가죽 바인더는 온전했다.

 

빗물에 젖은 가죽 표지 위로 '남원 제1건설 1994 1996 특별 대외 협력비 정산서'라는 금박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강태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검사실, 검사실 나와라! 여기는 외곽 폐차장 현장! 피의자 배동진 및 비서실장 전원 검거 완료! 증거물 회계장부 바인더 두 권, 완벽하게 확보했습니다! 검사님께 전하십시오, 길목을 잡았습니다!"

 

6. 어둠 속의 밀실

 

같은 시각,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1층 서무과 복도 끝 탕비실.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남원지청 수사계장 박영선은 떨리는 손으로 공중전화 수화기를 쥐고 있었다.

 

그의 주머니 속 삐삐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011-XXX-XXXX. 긴급. 배 대표 연락 두절.'

 

박 계장은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세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거칠게 수화기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박 계장이야? 어떻게 됐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행정처의 송진호 계장이었다.

 

"송 계장님... 끝난 것 같습니다."

 

박 계장의 목소리는 울음 섞인 비명에 가까웠다.

 

"성재환 그 미친놈이... 하도급 업체 스물여덟 군데를 오늘 밤 전부 압수수색하겠다고 영장을 치러 법원으로 갔습니다. 목록을 우리한테도 안 보여줘요. 직접 손으로 써서 문 판사한테 들고 들어갔다고요!"

 

"뭐, 뭐라고?! 자재 납품업체까지 다 털겠다고?!"

 

"배동진이 쪽도 연락이 안 됩니다. 특수부 놈들이 직속 차량으로 뒤를 밟았다고요. 만약 배동진이가 잡히고 그 장부가 성재환 손에 들어가면... 우리도 끝장입니다! 강태석 시장님한테 닿는 줄은 다 끊어졌어요! 어떡합니까, 송 계장님?!"

 

"입 닥쳐, 이 등신 같은 자식아!"

 

송 계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성재환 그 애송이가 날뛰어봤자 전주지검 간부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다음 주말에 남원상록골프장에서 부장님들 모시고 회동하기로 약속이 다 잡혀 있어! 김문현 위원장실에서도 대검에 외압을 넣고 있다고! 성재환은 며칠 못 가 직무 배제당해! 알아서 기어,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하지만 성재환이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눈치를 챘습니다! 제 목을 죈다고요!"

 

"증거 있어? 그 새끼가 네가 전화한 증거 있냐고! 장부만 다 탔으면 아무것도 못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입 닫고 있어!"

 

탁!

 

송 계장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 뚜- 뚜- 소리만이 차갑게 식어버린 탕비실 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박 계장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통화는 잘 끝내셨습니까, 박 계장님?"

 

"히익-!"

 

박 계장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어두운 탕비실 문가에 성재환 검사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바닥에 쓰러진 박 계장을 거대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재환의 손에는 작은 카세트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빨간색 녹음 램프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재환의 뒤편으로 최민재와 서울에서 파견된 특수부 수사관 두 명이 서늘한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검, 검사님... 이게 무슨..."

 

박 계장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덜덜 떨렸다.

 

재환은 천천히 걸어와 박 계장의 발치 앞에 섰다.

 

그의 구두 끝에 박 계장의 손가락이 닿을 듯했다.

 

"송진호 계장이라. 남원지원 문성현 판사님 집무실 바로 옆방에 있는 그 송 계장 말씀이시죠?"

 

재환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워서 오히려 살인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남원상록골프장에서 전주지검 간부들과의 극비 회동. 그리고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좋은 정보를 많이도 불어주셨군요."

 

"아, 아닙니다! 검사님,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안부를..."

 

"방금 외곽 폐차장에서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재환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끝으로 톡, 튕겼다.

 

"배동진 대표와 비서실장을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목숨 걸고 태우려 했던 뇌물 원장 바인더 두 권도 완벽하게 압수했습니다."

 

검사실 복도 너머에서 천둥 번개가 번쩍하며 탕비실 안을 하얗게 밝혔다.

 

박 계장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장부가 살아남았다.

 

그 장부 안에 적혀 있을 자신의 이름 석 자와 강태석으로부터 받아먹은 검은돈의 액수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박영선 계장."

 

재환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공무상비밀누설, 증거인멸교사,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당신을 긴급 체포합니다."

 

특수부 수사관들이 다가와 바닥에 쓰러진 박 계장의 팔을 꺾어 올리며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철컥!

 

쇳소리가 탕비실을 울렸다.

 

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복도로 걸어 나갔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거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던 사법의 칼날은, 이제 거악의 심장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지유와의 약속, 7년의 기다림, 그리고 무너진 요천의 눈물을 닦아낼 진짜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