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의 재회
1. 놋쇠 풍경 아래로 불어온 바람
법원 복도에 감돌던 서늘한 긴장감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성재환(成宰桓)은 남원지원의 육중한 현관 유리문을 밀고 계단을 내려왔다.
비구름이 걷힌 자리로 쏟아져 내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부서졌다.
수갑을 찬 채 호송차로 끌려가던 강태석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 비열한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던 저열한 협박이 귓전을 맴돌았다.
하지만 재환의 걸음걸이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품 안에서 묵직하게 심장을 짓누르고 있는 검은 옻칠 만년필과, 지유가 지켜낸 누런 계약서의 감촉이 그의 발걸음마다 단단한 쐐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공기는 7년 전 그가 떠나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흙내 섞인 강바람이 불어왔고, 골목 어귀의 담벼락에는 빗물에 쓸려 내려간 붉은 흙탕물의 흔적이 역력했다.
재환은 동문 우체국을 지나 낯익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남원지청의 관용차가 아닌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 모퉁이를 돌자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리창에는 지난밤의 참혹한 폭력을 증명하듯 투명 박스 테이프가 거대한 엑스(X) 자로 흉측하게 얽혀 붙어 있었다.
그 테이프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솥단지의 온기가 어슴푸레 비쳤다.
짤랑.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고 맑은 쇳소리를 울렸다.
7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매달아 두었던 그 작은 풍경이었다.
문틀을 잡고 안으로 들어서는 재환의 시야에, 붉은 플라스틱 상판의 식탁 너머로 주방에 서 있는 한지유(韓智由)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흰 광목 앞치마를 두른 지유는 정갈한 손놀림으로 도마 위에 참기름을 바른 김밥을 썰고 있었다.
칼날이 단단하게 말린 밥과 단무지를 써는 규칙적인 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문소리에 지유가 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요, 검사님."
지유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얇게 떨리는 속눈썹 끝에는 지난밤과 오늘 낮의 격랑이 고스란히 맺혀 있었다.
재환은 젖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고 주방 앞으로 다가갔다.
"검사님 소리는 집어치워."
재환의 입가에 7년 만에 비로소 사람다운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7년 동안 썩은 밥 먹어가며 법전을 씹어 삼켰는데, 남원 내려오자마자 그 차가운 직함을 들어야겠어?"
"법정에 선 모습이 워낙 서슬 퍼래서, 아직도 그 기운이 골목까지 쫓아온 줄 알았지."
지유가 썰어둔 김밥을 단정한 분식집 접시에 옮겨 담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뒤편에는 깊은 피로와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강태석의 영장실질심사가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 그리고 담당 판사가 구속영장 발부 절차를 밟고 있다는 소식을 지유 역시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재환은 주방 안쪽 조리대 위에 놓인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유가 7년간 밤마다 써 내려갔던, 수취인을 찾지 못해 차곡차곡 쌓여 있던 백여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잠들어 있던 그 상자였다.
그 편지들을 밤새 읽어 내려가며 흘렸던 피눈물이 여전히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재환은 거칠어진 지유의 손등 위로 자신의 단단한 손을 겹쳐 올렸다.
손등에 남은 덴 자국과 칼에 베인 흉터들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수고 많았어, 지유야."
재환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좁은 주방의 공기를 울렸다.
"정말 잘 버텨줬어. 네가 이 자리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난 오늘 법정에 서지 못했을 거야."
지유는 대답 대신 재환의 손가락을 조용히 맞잡았다.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인 두 사람의 손이 얽히는 순간, 7년이라는 잔혹한 세월의 공백이 눈 녹듯 허물어졌다.
2. 불청객의 요란한 노크
쾅, 하고 김밥집의 낡은 알루미늄 미닫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야! 성재환! 아니, 성 검사님!"
특유의 넉살 좋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가게 안을 뒤흔들었다.
어깨에 커다란 가죽 크로스백을 메고 한 손에 인쇄 냄새가 풀풀 나는 신문 뭉치를 든 최민재(崔民宰)가 들이닥쳤다.
그 뒤를 이어, 남원의료원 간호사 유니폼 위에 헐렁한 카디건을 걸친 윤하은(尹夏恩)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 들어왔다.
"최민재, 문 좀 살살 열어! 유리창 금 간 거 테이프로 겨우 붙여둔 거 안 보여?"
하은이 민재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이쿠, 마누라님 손매는 여전히 맵네. 야, 지금 유리창이 문제냐? 역사가 바뀌었는데!"
민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신문 한 뭉치를 붉은 플라스틱 식탁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남원일보 1면 머리기사였다.
[속보] '요천 제방 붕괴 참사는 명백한 인재(人災)'… 강태석 남원시장, 비자금 횡령 및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 청구!
큼지막한 활자 아래에는 수갑을 찬 채 남원지원으로 압송되는 강태석의 얼굴과, 붕괴 현장에서 채증된 규격 미달 철근의 적나라한 사진이 박혀 있었다.
민재는 식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재환을 발견하자마자 가죽 가방을 팽개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재환의 멱살을 잡듯 양어깨를 꽉 쥐어 흔들었다.
"성재환, 이 미련 곰탱이 같은 자식아!"
민재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기어코 해냈구나. 기어코 그 인간 손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법정에 끌고 들어갔어!"
"민재야, 숨 막힌다. 이거 좀 놓고 말해라."
재환이 헛기침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민재를 떼어내는 손길에는 반가움과 미안함이 깊게 묻어났다.
민재는 재환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치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내의 어깨가 거칠게 맞부딪히며 울컥하는 숨을 토해냈다.
7년 전, 구 남원역 승강장에서 기차가 떠나갈 때 창밖을 내다보던 소년과, 플랫폼 바닥에 주저앉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원을 지키겠다고 소리치던 소년이 마침내 한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것이었다.
하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조리대 옆으로 걸어가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유야. 고생했어, 정말. 우리 이제 한숨 돌릴 수 있는 거지?"
"하은아."
지유는 하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마침내 참아왔던 설움을 엷게 떨구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그 참혹한 밤부터, 강태석의 깡패들이 영안실을 가로막고 협박하던 그 순간까지 곁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남원 토착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도 결코 지유를 버리지 않았던 넷이었다.
세월은 그들의 앳된 얼굴에서 소년 소녀의 티를 지워버렸고, 가혹한 상처와 굳은살을 얹어주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7년 전 요천 둑길을 달리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자, 다들 눈물바람은 그만하고 앉아. 배고파 죽겠다."
민재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유야, 김밥 몇 줄 더 말아라. 나 어제오늘 남원일보 편집국 뒤집어엎느라 밥 한 톨도 못 넘겼다. 배도식 그 늙은 여우 국장 놈 멱살 잡고 호외 찍어내느라 창자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고."
"알았어. 금방 썰어줄 테니까 앉아."
지유가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웃었다.
네 사람은 좁고 삐걱거리는 사각 식탁을 둘러싸고 마주 앉았다.
3. 7년의 무게가 담긴 식탁
식탁 한가운데에는 갓 썰어낸 윤기 자르르한 김밥 세 접시와,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칼칼한 어묵탕이 놓였다.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좁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민재는 젓가락을 들자마자 김밥 꼬투리를 입안 가득 쑤셔 넣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이 맛이지! 서울 노량진이나 신림동 가봤자 이런 김밥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재환아. 너 서울서 고시 공부할 때 이 맛 생각나서 어떻게 버텼냐?"
"버티긴 뭘 버텨. 컵라면에 굳은 식빵 씹으면서 버텼지."
재환이 김밥 하나를 집어 천천히 씹어 삼켰다.
참기름의 진한 향과 아삭한 단무지, 짭조름하게 조려진 우엉의 맛이 혀끝을 타고 내려가며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7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그의 교복 주머니에 쥐여주곤 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어머니는 가고 없었지만, 지유의 손끝에서 그 맛과 정성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은은 뚝배기에서 어묵 국물을 국자로 떠서 재환의 앞접시에 정성스레 놓아주었다.
"재환아, 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서울서 고생 많았지? 테레비에 나오는 높은 양반들 상대하느라 속이 얼마나 썩었겠어."
"고생은 내가 아니라 남원에 남겨진 너희들이 다 했지."
재환의 눈빛이 식탁을 둘러싼 세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민재의 이마 한구석에는 3년 전 김밥집 앞에서 깡패들의 각목에 얻어맞아 찢어졌던 깊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은의 손가락마디는 야간 당직과 과로로 굵어져 있었고, 지유의 무릎은 날씨가 흐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 모든 상흔이 성호석이라는 자신의 아비와, 강태석이라는 토착 악마가 합작해 만들어낸 비극의 흔적이었다.
"미안하다."
재환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사죄가 흘러나왔다.
"내가 너무 늦었어. 조금만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자격을 갖추고 힘을 기른답시고 너희들을 사지에 방치해 뒀어."
"야, 성재환."
민재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딴 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왔냐? 네가 어설프게 칼자루도 못 쥐고 내려왔어 봐라. 강태석 그 인간이 시청 공무원에 경찰까지 쥐고 흔드는데,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요천 물속에 처박혔을 거다."
"민재 말이 맞아, 재환아."
지유가 나지막이 거들었다.
"우리가 버틴 건 네가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야. 네가 남원의 원수를 갚으러 오는 게 아니라, 바로잡으러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재환은 가슴이 먹먹해져 고개를 숙였다.
정의(正義)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신림동의 축축한 고시원 방에서 뼈를 깎는 고독을 견뎌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시절, 자신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오직 남원에서 보내온 지유의 자전거 스케치 한 장과, 흑청색 잉크의 서늘한 약속뿐이었다.
"그나저나 재환아, 이제 정말 끝난 거냐?"
하은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 영장 발부되면 강태석은 교도소로 들어가는 거지? 이제 김밥집 철거니 뭐니 하는 끔찍한 일은 다시 안 일어나는 거지?"
그 물음에 식탁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재 역시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재환의 안색을 살폈다.
재환은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고, 창밖의 어둑해지는 골목길을 응시했다.
"아니. 이제 겨우 첫 번째 고비를 넘겼을 뿐이야."
4. 가죽 가방에서 나온 진실의 파편들
재환의 냉정한 말에 민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첫 번째 고비라니? 강태석 그 인간을 현행범으로 잡아넣고 구속영장까지 쳤는데도?"
"강태석은 남원이라는 썩은 늪 위에 피어난 독버섯 하나에 불과해."
재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독버섯 밑바닥에는 30년간 얽히고설킨 거대한 뿌리가 있어. 남원시청의 도시과, 위생과, 소방과는 물론이고, 어제 우리가 봤듯이 남원경찰서 경비과와 서장까지 그자의 돈줄에 묶여 있다."
재환은 법정 복도에서 마주쳤던 강태석의 비릿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내 남원 권력망에 걸리면 네놈 뼈도 못 추려. 전주교도소 밥 몇 끼 먹고 나가면 그만이야.'
그 오만함은 허세가 아니었다.
강태석은 남원이라는 닫힌 사회 안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지워버린 절대 권력자였다.
"게다가… 강태석의 뒷배는 남원에만 있는 게 아니야. 서울의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그리고…"
재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 뒷말이 무엇인지, 지유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무부 차관으로 영전해 중앙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재환의 친부, 성호석(成浩錫)이었다.
가문의 죄악을 자신의 손으로 도려내야 한다는 비극적인 숙명이 재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민재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가죽 크로스백을 식탁 위로 끌어올렸다.
지퍼가 열리자, 누렇게 변색된 서류철과 두툼한 바인더, 그리고 빼곡하게 손글씨가 적힌 대학 노트 서너 권이 쏟아져 나왔다.
탁, 탁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쌓인 서류 뭉치들은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이게 다 뭐냐, 민재야?"
재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철 겉표지를 살폈다.
민재가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의 눈빛에 언론인다운 날카로운 집념이 번뜩였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남원일보 수습기자로 구르면서 신문사 캐비닛, 시청 기자실 쓰레기통, 그리고 군청 퇴직자들 술 사 먹여가며 모아둔 강태석 비리 특별 취재 파일이다."
민재는 가장 두툼한 파란색 바인더를 재환의 앞으로 밀어붙였다.
"남원 춘향 테마랜드 종합정비사업,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뿐만이 아니야. 강태석이 민선 시장 완장 차고 지난 수년간 남원 시내 관급 공사란 공사는 전부 처남 조상태의 동서개발이랑 박진철의 한양토건에 몰아준 입찰 담합 내역서다."
재환이 바인더를 넘기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서류 안에는 공사별 예정 가격과 낙찰 하한율, 그리고 들러리를 섰던 유령 건설사들의 명단이 정밀한 도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남원시청 계약계 실무자의 친필 메모 사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이걸… 네가 혼자 다 모았다고?"
재환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경탄이 묻어났다.
검찰 특수부의 베테랑 수사관들이 몇 달을 매달려도 쉽게 뽑아내지 못할 수준의 방대하고 정밀한 데이터였다.
"나 혼자 한 거 아냐. 지유가 김밥 말아서 시청 하위직 공무원들이랑 우체부 아저씨들 입을 열어줬고, 하은이가 병원 원무과 오가는 토건족들 뒷조사 도와줬다."
민재가 씩 웃으며 지유와 하은을 가리켰다.
"우린 7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너만 기다린 게 아니라고, 성재환 검사님. 네가 칼을 벼리고 내려올 때, 그 칼로 정확히 모가지를 벨 수 있게 좌표를 찍어두고 있었던 거지."
5. 새로운 전운(戰雲), 남원 제1건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민재의 취재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단순한 관급 공사 비리만이 아니었다.
노트 후반부에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재환아, 여기 47페이지를 봐라."
민재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붉은색 형광펜으로 굵게 밑줄이 그어진 업체명이 적혀 있었다.
[남원 제1건설(주)]
대표이사: 배동진.
실소유주: 강태석 차명 지분 45%.
"남원 제1건설?"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오늘 낮 남원지원 영장실질심사 대기실 복도에서 강태석의 곁을 맴돌며 귓속말을 주고받던 지역 유지 중 한 명이었다.
"그래. 이번에 무너진 요천 수변공원 제방 제1공구 있지? 겉으로는 한양토건이랑 동서개발이 시공한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 기초 토목공사랑 철근 배근, 레미콘 타설 하도급을 전부 독점해서 공사비를 빼돌린 핵심 몸통이 바로 이 남원 제1건설이다."
민재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강태석이 빼돌린 비자금 40억 중 상당 부분이 이 제1건설의 유령 하도급 계좌를 통해 남원상호신용금고로 흘러 들어갔어. 그리고… 결정적인 건 따로 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테이프 하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내가 법원 대기실 근처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들은 건데, 배동진 그자가 강태석 비서실장이랑 속닥거리더군. 강태석이 구속되더라도 다음 주말에 남원상록골프장에서 전주지검 간부들이랑 극비 골프 회동을 잡아놨다는 거야. 거기서 뇌물 장부 들고 판을 뒤집겠다고."
"골프 회동?"
재환의 눈가에 서슬 퍼런 냉소가 어렸다.
"조동식 남원지청장과 전주지검 차장검사를 움직여서 구속적부심으로 빠져나오려는 수작이군."
강태석은 여전히 자신이 남원의 왕이라 믿고 있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더라도, 검찰 간부들에게 뇌물과 향응을 베풀어 성재환을 수사에서 직무 배제시키고 풀려나면 그만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다면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야겠군."
재환이 단호하게 서류철을 덮었다.
식탁을 둘러싼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재환에게로 쏠렸다.
"남원 제1건설 본사. 그곳이 강태석 카르텔의 모든 검은 돈이 모이고 나가는 저수지다. 거길 치지 않고는 제방 붕괴 참사의 실체적 진실도, 서울 김문현에게 흘러 들어간 20억 무기명 CD의 자금 출처도 완벽히 입증할 수 없어."
재환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형형하게 번뜩였다.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남원 제1건설 본사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청구한다."
그것은 남원 토착 사법 카르텔의 심장부를 향해 정면으로 검을 찔러 넣겠다는 선언이었다.
조동식 지청장의 결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검 중수부와 전주지검장의 직통 전결 라인을 다시 한번 가동해, 남원의 모든 기득권 세력이 눈을 뜨기 전에 기습적으로 본사를 털어버릴 작정이었다.
6. 맹세의 밤, 다시 하나가 된 넷
지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찬장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던 물건 하나를 꺼내왔다.
묵직한 유리병에 담긴 흑청색 잉크였다.
비록 7년 전 고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샀던 그 첫 번째 잉크병은 강태석의 발길질에 깨져 바닥을 물들였지만, 지유는 재환이 검사가 되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 똑같은 흑청색 잉크를 구해 채워두고 있었다.
지유는 잉크병의 뚜껑을 열고, 재환의 정장 안주머니에 꽂혀 있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금빛 닙에 흑청색 잉크를 듬뿍 머금게 한 지유가 만년필을 재환의 손쥐에 쥐여주었다.
"재환아. 이 펜으로 네가 써 내려갈 공소장에, 남원의 모든 눈물과 한을 담아줘."
지유의 눈동자는 맑고 단단했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고, 가게를 부수려는 깡패들의 쇠파이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소녀는 어느덧 바위처럼 단단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재환은 묵직한 만년필을 쥐고 민재가 건넨 취재 파일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빈 여백에 흑청색 잉크로 굵고 힘차게 적어 내려갔다.
[피의자: 강태석, 배동진, 조상태, 박진철]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입찰방해, 직권남용]
서걱거리는 만년필 소리가 좁은 김밥집 안을 엄숙하게 메웠다.
민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고, 하은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듯 숨을 죽였다.
7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다시 모인 네 사람의 청춘.
그들은 더 이상 권력의 횡포에 짓밟히며 도망치던 나약한 소년 소녀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정의의 칼을 쥔 검사로,
한 사람은 진실을 기록하는 기자로,
한 사람은 생명을 보살피는 간호사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 모든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품어 안은 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터전 그 자체로 서 있었다.
"고맙다, 친구들아."
재환이 만년필 캡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 너희들이 내게 준 이 무기들로… 내일 아침 남원의 어둠을 완전히 찢어발기겠다."
창밖의 어둠이 더욱 짙어졌지만,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원 상공을 짓누르던 거대한 악의 카르텔을 향해, 네 사람의 운명을 건 거대한 반격의 서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