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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8화

전주지검 남원지청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낯선 청사의 새벽

 

새벽 다섯 시의 남원 하늘은 잿빛 먹물을 듬뿍 머금은 솜뭉치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리산 서쪽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이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의 낡은 붉은 벽돌 외벽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수령 수십 년은 족히 넘은 향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비명을 지르듯 몸을 뒤틀었고, 정문 기둥에 박힌 푸른 동판만이 서슬 퍼런 칼날처럼 차갑게 번쩍였다.

 

검은색 지휘 세단이 빗물을 튀기며 청사 앞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량이 멈추어서자마자 운전석의 수사관이 황급히 내려 우산을 받쳐 들었으나, 뒷좌석 문을 열고 내린 성재환(成宰桓)은 그 우산을 가볍게 밀어냈다.

 

물방울이 어깨선이 반듯하게 떨어지는 짙은 감색 정장 위로 튀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굳건했다.

 

재환의 품 안에는 방금 전 삼거리 김밥집에서 안고 나온 지유의 양철 편지 상자가 묵직하게 안겨 있었다.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양철 모서리가 갈비뼈를 단단히 눌러왔다.

 

7년이라는 아득한 세월 동안, 밤마다 홀로 눈물을 삼키며 써 내려갔을 지유의 부치지 못한 백여 통의 고백과 절규.

 

그것은 단순한 연서가 아니었다.

 

남원의 썩어 문드러진 토착 권력이 한 여린 소녀의 삶과 영혼을 어떻게 난도질했는지를 낱낱이 증명하는 가장 처절하고도 숭고한 피해자의 기록이었다.

 

본관 중앙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자 특유의 서늘한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서류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당직 근무 중이던 청원경찰과 총무과 서기 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로비 소파에서 일어서려다, 재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누, 뉘시길래 이 꼭두새벽에……."

 

서기가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말을 맺지 못했다.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 공무원증과 법무부 인사 발령 통지서가 서기의 코앞에서 번쩍였다.

 

금빛 검찰 표식 아래에 선명하게 박힌 이름 석 자.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

 

그리고 그 뒤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특별수사본부 파견 주임검사 겸임 도장이 붉은 인주 빛을 선연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서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서, 성재환 검사님……?"

 

"남원시장 강태석이 지금 어디 수감되어 있습니까."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청사 로비의 서늘한 대리석 바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살벌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서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을 달달 떨었다.

 

"지, 지하 1층 특별 임시 취조실에 계십니다…… 아니, 수감되어 있습니다! 지청장님 지시로 일단 보안 유지를 위해 아래쪽에……."

 

"취조실 열쇠와 피의자 신병 인수서, 그리고 지난밤 작성된 임시 조서 일체를 들고 5분 내로 204호 검사실로 올라오십시오."

 

재환은 더는 서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구둣발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리며 2층을 향해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로비에 남겨진 서기는 멍하니 재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수화기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남원 공직 사회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지진의 첫 진동이 바로 그 새벽, 낡은 청사 복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2. 술렁이는 관사

 

같은 시각, 남원 시내 외곽 요천 변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관사 단지.

 

전주지검 남원지청장 조동식(趙東植)은 침실 협탁 위에서 요란하게 울려 대는 유선 전화벨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창밖에서는 거센 비바람이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조동식은 찌푸린 얼굴로 수화기를 낚아채 귀에 가져다 댔다.

 

"누구야, 이 야밤에 예의도 없이!"

 

"지, 지청장님! 큰일 났습니다! 청무과 당직실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온 서기의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음성에 조동식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 강태석 시장 건은 중앙에서 연락 올 때까지 조용히 독방에 모셔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나!"

 

"그게 아닙니다! 성재환 검사가…… 성재환 특별수사전담 검사가 방금 청사에 도착했습니다!"

 

순간 조동식의 뇌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 둔탁한 충격이 번졌다.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앉았다.

 

"뭐라고? 성재환이 벌써 내려왔다고? 오늘 정오나 되어야 본청에서 정식 부임 절차를 밟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닙니다! 대검 특별수사본부 발령장과 신분증을 들고 방금 2층 검사실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당장 강태석 시장 신병 인수서와 지난밤 기록 일체를 올리라고 길길이…… 아니, 아주 서슬이 퍼렇습니다!"

 

조동식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성재환.

 

지난 수년간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대기업 비자금과 정관계 게이트를 거침없이 도려내며 '특수부의 면도날'이라 불리던 괴물.

 

사법연수원 27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검 중수부장 정종길의 비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

 

하지만 조동식에게 성재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바로 7년 전, 이 남원을 호령했던 전임 남원시장 성호석(成浩錫)의 외아들이었다.

 

'성호석의 아들이…… 제 아비가 빼앗겼던 이 남원에 검사의 칼을 쥐고 돌아왔단 말인가?'

 

조동식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강태석 남원시장이 요천 제방 붕괴 현장에서 대검 특별수사팀에 의해 긴급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조동식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겼다.

 

서울의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 측으로부터 이미 긴급 무마 청탁이 들어와 있었고, 적당히 조사를 진행하는 시늉만 하다가 절차적 하자를 구실로 긴급 체포를 취소하고 풀어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성재환이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라는 정식 직함을 차고 내려왔다.

 

이것은 단순한 파견이 아니었다.

 

중앙 정계와 검찰 수뇌부의 외압을 원천 차단하고 남원 관내의 모든 영장 청구권과 지휘권을 자신이 직접 행사하겠다는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딸깍.

 

그때 통화 중이던 전화선으로 또 다른 호출음이 끼어들었다.

 

조동식은 서기와의 통화를 끊고 곧바로 다른 내선을 연결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굵직하고 거만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조 지청장, 나요. 김문현 의원실 박철우 실장이오."

 

국회 내무위원장의 수석 보좌관이자 여당 정무라인의 실세, 박철우였다.

 

조동식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아, 박 실장님! 이 새벽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남원 꼴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요? 강태석 시장이 아직도 청사에 갇혀 있다면서?"

 

박철우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원장님 심기가 아주 극도로 불편하십니다. 성호석 차관 그 늙은 여우의 아들놈이 서울에서 제멋대로 영장을 들고 내려가 날뛰고 있다는데, 관할 지청장이라는 양반이 그걸 손 놓고 보고만 있어요?"

 

"그게…… 방금 성재환 검사가 남원지청으로 정식 부임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검 특수본 겸임이라 지휘 계통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박 실장님."

 

"애매하긴 뭐가 애매해! 관할 영장 청구 최종 결재권자는 지청장인 당신이오!"

 

박철우가 쏘아붙였다.

 

"어디 햇병아리 같은 놈이 감히 시장을 긴급 체포해? 즉시 긴급 체포 불승인 때리고 석방 명령서에 도장 찍으시오. 위원장님이 대검 차장하고 법무부 기조실장 쪽에 이미 손을 써 뒀으니까, 당신은 절차대로만 밀어붙이면 뒤는 우리가 다 알아서 봐줄 테니!"

 

"하지만 성재환 검사 뒤에 정종길 중수부장이 버티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장에서 수거된 부실공사 물증이 워낙 확실해서……."

 

"물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흙탕물에 쓸려나간 잡석 쪼가리가 무슨 대수요? 백 년 만의 기습 폭우로 인한 천재지변이라고 언론에도 다 깔아뒀는데!"

 

박철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명심하시오, 조 지청장. 다음 정기 인사 때 서울중앙지검 차장 자리로 영전하고 싶으면 이번 판에서 확실하게 줄을 타야 할 거요. 강태석 시장 옷 벗겨지면, 당신 목줄도 무사하지 못해."

 

뚝.

 

일방적으로 끊겨버린 수화기에서 공허한 기계음만이 삐-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조동식은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중앙 정계의 최고 실세인 김문현과, 전임 시장의 아들이자 검찰의 떠오르는 칼잡이 성재환.

 

두 거대한 암초 사이에 끼어버린 남원지청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제길……! 옷을 입어야겠어. 당장 청사로 간다!"

 

조동식은 비명을 지르듯 관사 집사를 부르며 허둥지둥 양복을 꿰입기 시작했다.

 

3. 204호의 침묵

 

남원지청 본관 2층 복도 맨 끝, '204호 검사실'.

 

문패에 덧씌워진 먼지를 털어내고 문을 열자,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 차갑게 식은 공기가 밀려 나왔다.

 

철제 책상 두 개와 캐비닛, 그리고 낡은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단출한 공간.

 

재환은 들고 온 양철 편지 상자를 책상 정중앙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곁에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나란히 놓았다.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리고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빛의 흑청색 잉크병.

 

비록 잉크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어 맑은 유리벽에 검푸른 얼룩만을 남기고 있었지만, 펜촉 끝에 맺힌 기운은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벌컥.

 

거친 숨을 몰아쉬며 204호의 문이 열렸다.

 

총무과 서기와 당직 계장이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서류 바인더 서너 권을 안고 들어왔다.

 

"검, 검사님…… 가져오라 하신 강태석 피의자 신병 인수서와 지난밤 현장 체포 보고서입니다."

 

재환은 말없이 손짓했다.

 

서기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재환은 만년필을 집어 들지 않은 채, 차가운 눈길로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피의자 성명 강태석(姜泰錫).

 

적용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그러나 보고서 말미에 적힌 남원경찰서와 지청 당직 검사의 종합 의견란은 가관이었다.

 

'피의자는 현직 남원시장으로서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의 우려가 없으며, 요천 제방 붕괴는 기록적인 집중호우에 기인한 천재지변의 성격이 짙으므로 긴급체포의 요건을 결여함. 조속한 석방 지휘 건의.'

 

피식.

 

재환의 입가에서 서늘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도주의 우려가 없다? 천재지변?"

 

재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서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변공원 1공구 제방 50미터가 터져 나가 하정리와 동충동 상가 수백 채가 흙탕물에 잠겼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완월정 언덕으로 피난을 가다 다리가 부러지고, 터전을 잃은 상인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천재지변이라?"

 

재환이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 서슬 퍼런 소리에 서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서기님."

 

"예, 예! 검사님!"

 

"강태석 시장을 지금 당장 이 방으로 인치하십시오."

 

"예? 그, 그렇지만 지청장님께서 아직 출근 전이시고, 정식 배당 절차가……."

 

"배당?"

 

재환이 품 안에서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대검찰청 훈령 공문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대검 특별수사본부 제1호 지침입니다. 남원 요천 제방 붕괴 및 토착 정경유착 사건에 대한 수사 지휘권 및 피의자 신문권은 파견 주임검사인 저 성재환에게 전속되어 있습니다. 지청장의 결재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3분 드립니다. 피의자를 데려오십시오."

 

서기는 재환의 눈빛에 완전히 압도당해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검사실 안, 재환은 창가로 다가섰다.

 

비구름 사이로 먼동이 터오고 있었지만, 남원 시가지는 여전히 짙은 안개와 흙탕물 냄새에 뒤덮여 있었다.

 

저 멀리, 요천 둑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동문 우체국 뒷골목.

 

그곳에서 테이프로 기운 유리창을 닦으며 밤을 지새웠을 지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유야.'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둔탁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네가 흘린 피와 눈물, 네 어머니의 한, 그리고 이 땅의 죄 없는 이들이 당한 고통……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모조리 셈을 치러주마.'

 

4. 시청 파견관의 헛기침

 

쿵, 쿵, 쿵.

 

복도를 울리는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204호의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남원시청 기획예산과장이자 강태석의 최측근 행정 복심인 시청 파견관 오득만(吳得萬)이 헐레벌떡 들어섰다.

 

그의 뒤로는 정장을 입었으나 구겨진 셔츠 차림의 수행 비서관들과 사복 경찰관 둘이 안절부절못하며 따르고 있었다.

 

오득만은 문가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204호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책상 뒤에 서늘한 눈빛으로 버티고 선 젊은 검사를 발견하자, 특유의 노회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고, 성 검사님! 이게 참 얼마 만입니까!"

 

오득만은 양손을 비비며 다정다감한 척 인사를 건넸다.

 

"제가 누군지 기억하시겠습니까? 7년 전 성호석 시장님 모실 때 시청 총무계장으로 도련님…… 아니, 검사님을 몇 번이나 뵈었습지요! 그때 참 훤칠하시더니, 이렇게 어엿한 검사님이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실 줄이야!"

 

오득만의 입술 사이로 번지르르한 기름기가 흘렀다.

 

그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대하듯 친근감을 가장하며 헛기침을 흠흠 해댔다.

 

"남원에 오셨으면 시청에 먼저 기별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시장님께서도 검사님 오신다는 소식 들으셨으면 버선발로 마중을 나가셨을 텐데, 어젯밤 일은 참…… 서로 간에 큰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허허."

 

재환은 오득만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오득만을 내려다보았다.

 

"오득만 과장님."

 

"예, 예! 성 검사님, 말씀하십시오."

 

"7년 전 제 부친 밑에서 총무계장을 하실 때, 군청 퇴직자들을 매수해 1991년 환지 처분 원천 측량 대장을 빼돌려 강태석에게 넘긴 실무자가 바로 당신이었지요."

 

순간, 오득만의 얼굴에서 기름진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턱이 덜덜 떨리며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그리고 3년 전, 강태석이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시청 지하 1층 지적과 특수 금고에 그 대장을 영구 비공개로 봉인하고 열쇠를 넘겨준 자도 당신이었습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수사 기록 철을 툭 쳤다.

 

"공소시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오 과장님. 특가법상 뇌물 방조 및 공문서 은닉,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내가 오늘 당신을 이 자리에서 피의자로 긴급 체포해 수갑을 채워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득만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연신 목덜미를 닦아내며 헛기침을 토해냈다.

 

"크흠! 흠! 성, 성 검사님! 왜 이러십니까, 정말! 우리가 남도 아니고…… 성호석 차관님과 강태석 시장님은 지난 세월 남원의 발전을 위해 함께 손을 맞잡았던 동지이자 어르신들입니다!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이런 패륜적인……!"

 

"패륜?"

 

재환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오득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문틀에 등을 부딪쳤다.

 

"사리사욕을 위해 제방 공사비 40억을 빼돌려 저지대 주민 수백 명을 흙탕물에 수몰시킨 자를 감싸는 것이 충성입니까? 아니면 법의 이름으로 그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패륜입니까?"

 

재환의 서늘한 질타에 오득만은 혀가 굳어버렸다.

 

"오 과장님, 헛소리 집어치우고 강태석을 데려오십시오. 1초라도 지체하면 당신부터 저 아래 유치장에 처넣겠습니다."

 

오득만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의 다급한 비명과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멀어져 갔다.

 

5. 피의자 강태석

 

철커덕.

 

묵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수갑을 찬 사내가 204호 검사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

 

지난밤 요천 제방 붕괴 현장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채 체포되었던 그의 몰골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고급 맞춤 양복은 흙탕물에 절어 흉측하게 구겨져 있었고,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백발은 땀과 비에 젖어 이마에 흉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 서린 맹수 같은 살기와 오만함만은 여전히 꺾이지 않고 번뜩였다.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두 팔을 거칠게 흔들어 수사관들을 밀쳐내더니, 검사실 한가운데 놓인 조사용 철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턱을 치켜들었다.

 

"허, 성재환이……."

 

강태석의 입술 틈새로 비릿하고 탁한 가래 끓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놈이 기어코 남원에 기어들어 왔구나. 성호석 그 늙은 여우의 핏줄 아니랄까 봐, 뒷구멍으로 영장이나 파서 애비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러 와?"

 

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책상 앞 의자에 단정하게 앉았다.

 

그리고 만년필을 집어 들어 백지 조서 위에 잉크를 살짝 묻혔다.

 

"피의자 강태석. 성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진술하십시오."

 

"하! 피의자?"

 

강태석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크게 비웃었다.

 

"새파란 애송이 놈이 검사 완장 하나 찼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야, 성재환. 내가 누군지 잊었냐? 내가 이 남원에서 30년을 군림한 강태석이야! 네 애비 성호석이도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다 서울로 도망치듯 쫓겨갔어! 알아들어?"

 

강태석은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재환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가 감히 날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서울에서 김문현 위원장님이 대검과 법무부를 쥐고 흔들고 계셔! 당장 한 시간 뒤면 네놈 상판대기에 긴급 체포 불승인 서류가 날아와 꽂힐 거다! 그 잘난 검사 배지 떼이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얌전히 무릎 꿇고 수갑 풀어라. 그러면 네 애비 얼굴을 봐서 서울 구석자리 검찰청으로 쫓겨나는 선에서 끝내줄 테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강태석의 협박과 광기 어린 포효.

 

검사실 밖 복도에 서 있던 수사관들과 행정관들이 그 살벌한 기세에 질려 침을 삼켰다.

 

하지만 성재환의 표정에는 눈곱만큼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는 만년필을 든 채, 차분하고 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김문현 위원장?"

 

재환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어렸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청운각 난초실. 그곳에서 1억 원권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 20장과 요천 수변 상업지구 지분 30%를 건네며 살려달라 읍소했던 그 김문현 말입니까?"

 

쿵.

 

강태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동서개발 조상태, 한양토건 박진철. 당신의 충견들이 이미 서울지검 특수부 취조실에서 자백서에 지장을 찍었습니다."

 

재환이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강태석의 코앞에 던졌다.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12개의 거래 내역 원장 사본과, 세창물산 및 호남엔지니어링의 허위 세금계산서 일체였다.

 

"춘향 테마랜드 정비사업 공사비 180억 중 횡령한 40억 원의 자금 세탁 경로. 그리고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제방 옹벽을 시공하며 기준치 3분의 1로 축소한 고장력 철근 납품 비리. 전부 당신 처남과 박진철의 친필 진술로 확보되었습니다."

 

강태석의 얼굴이 서서히 잿빛으로 질려갔다.

 

"그, 그까짓 진술 번복하면 그만이야! 물증이 없어! 제방은 비가 많이 와서 무너진 천재지변이야!"

 

"물증?"

 

재환은 조용히 일어나 책상 한구석에 놓인 방수포를 걷어냈다.

 

그 안에서 푸석푸석하게 바스러진 모래 잡석 콘크리트 덩어리와, 규격 미달 철근 시편, 그리고 40억 횡령 내역이 붉은 인주로 날인된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 원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태석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완월정 팽나무 뒤란에 숨겨두라고 지시했던, 아니 지유와 민재가 목숨을 걸고 빼돌렸던 바로 그 결정적 물증이었다.

 

"당신이 레미콘을 들이부어 인멸하려 했던 현장의 진실입니다."

 

재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으며 비수처럼 꽂혔다.

 

"뿐만 아닙니다. 남원일보 배도식 국장을 협박해 호외 1면을 천재지변으로 조작하라 지시했던 당신의 육성 녹음테이프도 이미 국과수로 넘어가 성문 분석을 마쳤습니다."

 

강태석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철옹성이, 발밑에서부터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 이 빨갱이 같은 자식……! 감히 네놈이 나를……!"

 

강태석이 거품을 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재환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양옆에 버티고 서 있던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러 철제 의자에 쾅 소리가 나도록 처박았다.

 

"앉으십시오, 피의자 강태석."

 

재환이 차갑게 명령했다.

 

"당신이 30년간 남원을 짓밟으며 휘둘렀던 그 폭력의 시대는, 어젯밤 요천 제방과 함께 완전히 끝났습니다."

 

6. 지청장의 난입

 

쾅!

 

검사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남원지청장 조동식이 들이닥쳤다.

 

넥타이를 삐뚤어지게 맨 채 숨을 헐떡이는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성 검사!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짓인가!"

 

조동식은 책상 위에 펼쳐진 물증들과 수갑을 찬 채 씩씩거리는 강태석을 번갈아 보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지청장인 내 결재도 없이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을 검사실로 인치해 취조를 해? 자네 제정신인가! 절차적 정당성을 완전히 무시한 불법 수사야! 당장 중단하게!"

 

조동식이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 위의 서류를 낚아채려 했다.

 

탁.

 

재환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조동식의 손목을 가로막았다.

 

검사와 지청장.

 

조직의 위계질서상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하극상의 대치가 204호 한가운데서 벌어졌다.

 

서릿발 같은 재환의 눈빛에 조동식은 숨이 턱 막히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조동식 지청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형사소송법 제200조의3, 그리고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훈령 제4조에 의거한 적법한 피의자 신문입니다. 지청장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수사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뭐, 훈령? 훈령 따위가 검찰청법상 지휘 통솔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나!"

 

조동식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서울에서 김문현 위원장님이 직접 전화하셨네! 이번 사안은 중앙 정계와 얽힌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일이야! 강 시장을 일단 석방하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전환해 불구속 수사로 전환하라는 중앙의 지침이 내려왔단 말일세!"

 

'중앙의 지침'.

 

그 추악하고 비겁한 단어가 검사실 공기를 더럽히는 순간, 재환의 입가에 멸시가 담긴 냉소가 어렸다.

 

"중앙의 지침이라……."

 

재환은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그것은 30분 전,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당직 판사실로 접수된 문서의 사본이었다.

 

'구속영장 청구서'.

 

피의자: 남원시장 강태석.

 

청구자: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

 

조동식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구, 구속영장……? 자네, 내 결재도 없이 법원에 영장을 접수했단 말인가?!"

 

"전주지검 검사장님의 직통 전결 승인을 받았습니다."

 

재환이 똑똑 분질러지듯 말했다.

 

"남원 관할 사건이라 할지라도, 대검 특수본 겸임 검사는 중수부장 및 관할 검사장의 승인으로 단독 영장 청구가 가능합니다. 조 지청장님께서 김문현 의원의 청탁을 받고 사건을 뭉개려 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사전 조치를 마쳤습니다."

 

"성재환……!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네 아비 성호석 차관의 목줄까지 죄어 들어갈 텐데, 감히 이런 짓을 벌여?!"

 

조동식이 이성을 잃고 악을 썼다.

 

그때, 재환의 시선이 조동식의 멱살 부근을 서늘하게 꿰뚫었다.

 

"제 아비의 죄가 있다면, 그 역시 제 손으로 단죄할 것입니다."

 

단 한마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그 무거운 선언에 검사실 안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에 뚝 끊겼다.

 

의자에 묶여 있던 강태석조차 멍하니 재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비까지 제물로 바치겠다는 검사.

 

그것은 권력이나 야망에 눈이 먼 칼잡이가 아니었다.

 

오직 정의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절대적인 살기였다.

 

"지청장님."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더 이상 공무집행을 방해하시면, 지청장님 또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으로 간주하여 즉시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나가 주십시오."

 

조동식은 입을 뻐끔거리다, 끝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검사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7. 무너지는 철옹성

 

오전 아홉 시.

 

남원 시내 전역에 벼락같은 소식이 퍼져나갔다.

 

시청과 경찰서, 상인회와 시장 바닥, 요천 변 복구 현장까지 남원 땅 전체가 거대한 충격 속에 들끓기 시작했다.

 

'강태석 남원시장, 대검 특수본에 구속영장 청구! 결재 검사는 전임 시장 성호석의 아들 성재환!'

 

남원시청 본관 2층 시장실 앞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비서실 직원들과 몰려든 취재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복도에는 파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으나, 들이닥친 대검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며 캐비닛을 통째로 봉인했다.

 

"손 떼! 서류에 손대는 놈은 증거인멸 현행범으로 전부 체포한다!"

 

수사관들의 서슬 퍼런 고함에 시청 공무원들은 사색이 되어 손을 들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

 

비는 어느덧 가랑비로 잦아들었지만, 골목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가 라디오를 귀에 바짝 댄 채 소리쳤다.

 

"나왔다! 뉴스에 나왔어! 강태석 그놈한테 구속영장이 떨어졌단다!"

 

"진짜여? 정말로 그놈이 감옥에 들어간단 말이여?!"

 

철물점 최 씨가 망치를 내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서울서 내려온 젊은 검사님이…… 성재환 검사님이 영장을 직접 쳤다는구먼! 그분이 바로 7년 전 성 시장님 아들이라네!"

 

"세상에…… 그 도련님이 검사가 되어 돌아와 지유네를 지켜주고 그 악당 놈을 때려잡았단 말인가!"

 

상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수년간 강태석 일파의 폭압과 횡포에 숨죽이며 살아왔던 세월.

 

포클레인에 밀려 터전을 잃을 뻔하고, 쇠파이프 테러와 억지 세무조사 앞에서도 눈물만 삼켜야 했던 소시민들의 가슴속에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순간이었다.

 

가게 안, 테이프로 기운 통유리창 너머로 지유는 묵묵히 도마 위에 칼을 대고 있었다.

 

탁, 탁, 탁.

 

일정한 리듬으로 당근을 써는 지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가게 한구석에 서 있던 최민재가 남원일보 호외 교정지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지유야! 봤어? 배도식 국장이 결국 손들었어! 강태석 협박 테이프 넘기니까 사색이 돼서 1면 머리기사를 전면 교체하기로 했어! '요천 제방 붕괴, 40억 비리 부실공사가 빚은 인재! 강태석 시장 전격 구속영장!' 오늘 낮 12시에 남원 전역에 뿌려질 거야!"

 

민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지유는 칼을 내려놓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잿빛 하늘 아래 솟아 있는 남원지청의 붉은 벽돌 건물.

 

그 차갑고 외로운 방에서, 홀로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고 있을 재환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재환아…….'

 

지유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가슴속에 품은 닳고 닳은 학생증 증명사진을 지그시 눌렀다.

 

그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약속.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는 약속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가문마저 불태워야 할 가장 가혹한 형벌의 칼날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지유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도마 위로 툭 떨어졌다.

 

8. 만년필의 서약

 

오전 열한 시,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강태석은 남원지원 영장 실질심사 출석을 위해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호송차로 향했다.

 

검사실을 나서는 강태석의 뒷모습은 완전히 허물어진 폐허와 같았다.

 

애송이라 비웃던 전임 시장의 아들이 내민 서류와 물증 앞에, 30년 토착 권력의 철옹성은 단 몇 시간 만에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텅 빈 검사실 안, 적막이 찾아왔다.

 

재환은 책상에 홀로 앉아 지유의 양철 상자 뚜껑을 열었다.

 

빛바랜 편지 봉투들이 정갈하게 묶여 있었다.

 

그중 맨 위에 놓인, 7년 전 재환이 신림동에서 보낸 첫 엽서에 대한 지유의 첫 번째 답장을 꺼내 들었다.

 

'재환아.

 

남원의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나는 네가 남겨준 잉크의 온기로 매일 밤을 버틴다.

 

네가 법을 세우러 간 그 먼 길 위에서 다치지 않기만을 빈다.

 

나는 여기서 우리 김밥집을 지키고 있을게.

 

네가 돌아오는 날, 가장 따뜻한 밥 한 줄을 말아줄 수 있도록…….'

 

삐뚤빼뚤하지만 한 글자마다 영혼을 담아 꾹꾹 눌러쓴 지유의 필체.

 

재환은 편지지를 어루만졌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이 뜨거운 고통으로 요동쳤다.

 

탁, 탁.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잦아들고, 먹구름 틈새로 한 줄기 가느다란 햇살이 204호 검사실 바닥을 비추기 시작했다.

 

재환은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꺼낸 또 다른 기소 대상자 명단을 펼쳤다.

 

그 종이의 맨 윗자리, 피의자 성명 난.

 

'내무부 차관 성호석(成浩錫)'.

 

자신의 친부이자, 30년 전 이 비극의 씨앗을 뿌렸던 원죄의 장본인.

 

재환의 만년필 끝이 가늘게 떨렸다.

 

가문을 도려내야 하는 형벌 같은 숙명.

 

그러나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그의 눈동자를 차갑게 꿰뚫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스스슥.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가르며 흑청색 잉크로 묵직한 서명을 남겼다.

 

피할 수 없는 거악과의 전면전, 그 두 번째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