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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7화

그간의 상처를 마주하다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탕물 위의 정적

 

요천 제1공구 둑길을 가득 메웠던 흙탕물 냄새가 멎어가는 빗줄기 사이로 짙게 번져 올랐다.

 

남원경찰서 전경 버스의 번쩍이던 경광등 불빛도, 수갑을 찬 채 진흙탕 바닥에서 악을 쓰던 강태석의 비명도 대검 수사관들의 호송 차량 문이 닫히며 차단되었다.

 

수백 명의 남원 구도심 상인들과 시민들이 든 촛불과 손전등 불빛만이 요천 수면 위로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성재환은 젖어 흙 범벅이 된 구두를 딛고 서서, 멀어져 가는 호송차의 붉은 후미등을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숨 가쁘게 몰아쳤던 현장 검증과 체포의 난전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내려앉은 정적은 지독하도록 시렸다.

 

"성 검사님, 강태석과 조상태, 현장 책임자들은 남원지청 임시 취조실로 압송 조치했습니다."

 

검찰 특수본 수사관이 다가와 경례를 붙이며 보고를 올렸다.

 

"경찰서장 이한두에 대한 긴급 압수수색 및 출국금지 조치도 대검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채증한 콘크리트 시편과 절단 철근은 국과수로 즉시 이송하고, 요천 제방 통제선은 우리 수사관들이 직접 교대 근무로 봉쇄하십시오."

 

재환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남원경찰서 병력은 전원 현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금이라도 현장 훼손을 시도하는 자는 누구든 직무유기 및 증거인멸 현행범으로 입건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사관이 물러가자, 재환의 시선이 비로소 제방 아래 아스팔트 길가로 향했다.

 

우산도 받쳐 들지 못한 채, 머리칼이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한지유가 그곳에 오롯이 서 있었다.

 

빗물과 흙탕물이 튄 낡은 겉옷, 소매를 걷어붙인 채 주먹을 쥐고 있는 가녀린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 아래 위태롭게 흔들렸다.

 

재환의 서슬 퍼렇던 눈매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남원을 집어삼켰던 거대한 토착 권력의 거두를 꺾어 누르고 수갑을 채웠을 때도 한 치의 동요가 없던 심장이, 오직 저 여자를 마주하는 순간에만 거칠게 요동쳤다.

 

재환은 천천히 제방 비탈을 걸어 내려갔다.

 

질척이는 진흙탕이 정장 바짓단과 구두를 적셨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골목 상인들이 재환의 앞길을 트며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

 

"검사 양반, 참말로 고맙소."

 

"우리 지유랑 김밥집을… 이렇게 지켜줘서 고맙소."

 

구두 수선공 김 씨와 철물점 최 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으나, 재환은 그들에게 정중히 묵례를 건네면서도 시선만큼은 지유에게서 떼지 못했다.

 

마침내 지유의 서너 걸음 앞에 다다랐을 때, 재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칠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요천의 차가운 빗물 냄새가 두 사람 사이에 거짓말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이름은 검사의 서슬 퍼런 어조가 아닌, 칠 년 전 열여덟 소년의 떨림 그대로였다.

 

지유는 대답 대신 가만히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것이 멎어가는 빗물인지, 아니면 차마 삼키지 못한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억지로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왔구나, 재환아."

 

그 한마디에 재환의 가슴 밑바닥이 날카로운 비수로 베인 듯 아려왔다.

 

2. 침묵 속의 귀환

 

두 사람은 묵묵히 동문 우체국 뒷골목을 향해 걸었다.

 

상인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저마다 무너진 가게와 집안의 흙탕물을 퍼내기 위해 흩어졌고, 제방을 지키는 검찰 수사관들의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등 뒤에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빗방울은 이제 안개처럼 잘게 부서지며 골목길을 적시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다를 이루고 산을 쌓을 만큼 넘쳐났으나, 그 어떤 언어도 지난 칠 년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두 사람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재환은 곁에서 걷는 지유의 발걸음을 가만히 살폈다.

 

오른쪽 다리를 디딜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기우뚱거리는 그 걸음걸이가 재환의 눈에 시퍼렇게 밟혔다.

 

칠 년 전,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 위에서 서울로 끌려가던 관용차를 뒤쫓다 넘어졌던 그날의 상처.

 

피를 철철 흘리며 구 남원역 플랫폼으로 달려와 자신을 향해 울부짖던 열여덟 소녀의 무릎 흉터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녀의 걸음을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재환의 주먹이 외투 주머니 속에서 하얗게 쥐어졌다.

 

'네가 저 다리로… 저 다리로 나를 기다리고, 이 골목을 지켰구나.'

 

골목 모퉁이를 돌자, 어둠 속에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처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밤바람에 잘랑, 하고 청아한 울림을 냈다.

 

지유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손수 달아두었던, 그리고 조금 전 재환이 문을 밀고 들어설 때 울렸던 바로 그 소리였다.

 

가게 앞에 멈춰 선 지유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철커덕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들어와. 밖이 춥다."

 

지유가 미닫이문을 열며 말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하고도 아득한 냄새가 재환의 코끝을 찔렀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갓 지은 밥 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 판자와 젖은 흙벽에서 배어 나오는 삼거리 김밥집 특유의 온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가게였지만, 지유는 어머니의 흔적을 단 하루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살아 숨 쉬게 만들어 두고 있었다.

 

재환은 문턱을 넘으며 낮게 숨을 들이켰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칠 년 전의 아늑했던 기억과는 너무도 다른 처참한 상흔들이었다.

 

3. 흉터로 남은 가게

 

가게 벽면에 달린 낡은 형광등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이다가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그 빛 아래 드러난 삼거리 김밥집의 내부는, 그야말로 전쟁터의 참호와 다름없었다.

 

가장 먼저 재환의 눈을 찌른 것은 길 쪽으로 난 통유리창이었다.

 

투명해야 할 유리창 전면에 누런 박스 테이프가 'X' 자로 겹겹이 엮여 붙어 있었다.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져 금이 간 유리 조각들이 테이프의 접착력 하나에 의지해 위태롭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 간 틈새로 스며든 빗물이 유리창 안쪽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심야 쇠파이프 테러….'

 

최민재가 신림동으로 보내왔던 서신과 남원일보 취재 메모에 적혀 있던 그 참혹한 문구가 재환의 뇌리를 강타했다.

 

강태석의 사주를 받은 토건 조폭들이 야밤에 쇠파이프를 휘둘러 박살 냈던 바로 그 창문이었다.

 

유리를 통째로 갈아 끼울 돈이 없어서, 아니 언제 또다시 깨질지 몰라 지유가 제 손으로 테이프를 붙여가며 버텨낸 흔적이었다.

 

재환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시멘트 바닥 구석구석에는 지워지지 않은 검붉은 페인트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빨갱이', '철거' 따위의 폭력적인 낙서들을 솔로 문지르고 긁어냈으나, 깊게 파인 흠집 속에 스며든 붉은 안료는 흉측한 흉터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조리대 아래쪽 시멘트 바닥에는 푸르스름한 먹물 같은 자국이 넓게 번져 있었다.

 

재환의 숨이 멎었다.

 

그것은 칠 년 전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모아 자신에게 사주었던, 그 깊고 단정한 유리병에 담겨 있던 흑청색 잉크의 흔적이었다.

 

강태석이 제안을 거절당하자 격분해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 냈다던 그 잉크.

 

바닥에 튀어 굳어버린 검푸른 자국은, 마치 지유가 홀로 권력의 폭압 앞에서 흘려야 했던 피눈물처럼 선명했다.

 

"가게 꼴이 이래서… 앉으라고 하기도 미안하네."

 

지유가 젖은 외투를 벗어 걸이에 걸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주방 싱크대로 가 수건을 적셔왔다.

 

"비 많이 맞았잖아. 흙탕물 묻었어, 재환아. 이거라도 닦아."

 

지유가 내민 하얀 수면 손수건.

 

그 수건을 바라보던 재환은 손을 뻗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유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유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맑은 눈망울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볼살은 칠 년 전보다 홀쭉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열여덟의 곱고 단정했던 소녀의 생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어머니를 잃고 홀로 가혹한 세상을 버텨낸 소년 가장의 처절한 인내만이 그 얼굴에 각인되어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짓눌린 쇠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너,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냐."

 

지유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수건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4. 거칠어진 손마디

 

재환은 홀린 듯 지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부서질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지유의 손을 쥐었다.

 

"재환아…."

 

지유가 당황하며 손을 뒤로 빼려 했으나, 재환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지유의 작은 두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쥐며 손바닥을 천천히 펴 올렸다.

 

그 순간, 재환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손바닥 전체가 온통 굳은살투성이였다.

 

매일 새벽 차가운 수돗물에 수백 번 쌀을 씻고, 뜨거운 밥을 쥐며 칼질을 해온 탓에 엄지와 검지 안쪽은 두껍게 못이 박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겨울철 동상과 고된 노동으로 굵어져 있었고, 손등 곳곳에는 뜨거운 기름이 튀어 생긴 희끗희끗한 화상 자국과 깊게 베인 칼자국 흉터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칠 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수줍게 각인 만년필을 쥐여주던 그 부드럽고 맑던 소녀의 손이 아니었다.

 

세상의 온갖 풍파와 폭력을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며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피눈물의 노동이 굳어버린 손이었다.

 

재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서울 대치동의 안락한 학원가에서, 성북동의 따뜻한 사저에서, 그리고 신림동의 책상 앞에서 법조문을 외우고 있을 때.

 

자신이 사법시험 1차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연수원에서 최우수 학술상을 받으며 검사의 칼날을 갈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을 때.

 

이 아이는 남원의 차가운 바닥에서,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대입 원서를 제 손으로 찢어버리고, 조폭들의 쇠파이프와 시청 공무원들의 표적 단속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손이 부르트도록 김밥을 말고 있었던 것이다.

 

재환의 커다란 손이 지유의 거친 손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지유의 깊은 흉터 자리를 지날 때마다, 지유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손이 많이 거칠어졌지?"

 

지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감추려 했다.

 

"장사하는 손이 다 그렇지 뭐. 하루 종일 칼 쥐고 물 만지다 보니까… 예전처럼 곱지는 않아. 흉하지?"

 

그 태연한 목소리가 재환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지.

 

왜 이제야 왔느냐고, 왜 나를 이 지옥 속에 홀로 내버려 두었느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울부짖지.

 

어찌하여 이 아이는 아무런 탓도 하지 않은 채, 제 망가진 손을 부끄러워하며 웃고 있는 것인가.

 

"지유야."

 

재환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지유의 손등 위 흉터에 번졌다.

 

특수부 검사의 차갑고 냉철하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재환은 무릎을 꺾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유의 거친 두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댄 채, 재환은 억누를 길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미안하다, 지유야… 내가 너무 늦었어. 내가… 너를 여기에 이렇게 혼자 두고…!"

 

5. 빗장을 푼 슬픔

 

재환의 뜨거운 눈물이 지유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마를 맞대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재환의 모습에, 끝끝내 담담함을 가장하던 지유의 눈가에도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영안실의 차가운 냉동고에 누워 계실 때도 지유는 울지 않았다.

 

강태석이 빈소에 들이닥쳐 상속 포기 각서를 들이밀며 협박할 때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방명록을 내리치며 버텼다.

 

세무서 조사관들이 들이닥쳐 장부를 뒤흔들 때도, 조폭들이 밤중에 쇠파이프로 유리창을 깨부술 때도 지유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울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한 번이라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가 목숨 바쳐 지켜낸 이 작은 가게와, 아버지의 억울한 원혼이 담긴 서류들을 권력의 아가리에 통째로 빼앗겨버릴 것만 같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돌이 되고 쇠가 되어 버텨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 손을 붙잡고 아이처럼 흐느끼는 성재환의 온기 앞에서 지유의 단단했던 방어벽은 형체도 없이 허물어졌다.

 

"재환아…."

 

지유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재환의 젖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칠 년 동안 가슴 깊은 곳에 켜켜이 묻어두었던 비명과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나… 너무 무서웠어, 재환아."

 

지유의 작은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엄마가… 숨이 넘어가면서도 내 손을 붙잡고 가게를 뺏기지 말라고 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매일 밤 영안실 문이 잠길까 봐 피가 마르는데… 그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마다… 나 진짜 너무 무서웠어…."

 

"알아… 내가 안다, 지유야."

 

재환은 지유를 부서질 듯 품에 안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눈물이 서로의 뺨과 어깨를 적셨다.

 

지유는 재환의 젖은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목놓아 울었다.

 

그것은 칠 년 동안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했던 한 인간의 가장 처절한 고백이었고,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영혼의 오열이었다.

 

식탁 위에는 칠 년 전 재환이 건넸던 모서리가 닳아빠진 학생증 증명사진과, 옻칠이 벗겨진 검은 만년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새겨졌던 글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리고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차가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약속과 법언을 지키기 위해 두 청춘이 바쳐야 했던 대가는 너무도 혹독했고,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상흔은 너무도 깊었다.

 

재환은 품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우는 지유의 등을 단단히 토닥였다.

 

지유의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가게 밖의 바람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재환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6. 벽감의 비밀과 결의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지유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재환의 품에서 물러앉았다.

 

퉁퉁 부어오른 눈가였지만, 울음을 쏟아낸 지유의 눈빛에는 깊은 안도와 함께 맑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재환은 제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뺨에 묻은 눈물 자국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어머니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재환의 낮은 목소리에 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지막까지 날 걱정하셨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게를 지켰다고, 재환이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말씀드렸을 땐 조금 편안해 보이셨어."

 

지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방 안쪽, 낡은 찬장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낮에 재환이 들렀을 때 어머니의 1968년 이면계약서를 꺼내주었던 바로 그 흙벽이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찬장을 옆으로 밀어내고, 흙벽 틈새에 숨겨진 작은 쇠꼬챙이를 꺼내 홈을 깊숙이 찔렀다.

 

달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벽돌 사이로 숨겨진 서랍형 나무 벽감이 미끄러져 나왔다.

 

그 안에는 아직 꺼내지 않은 또 하나의 낡은 서류철과 빛바랜 양철 과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지유는 그 양철 상자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꺼내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녹이 슨 사탕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흰 봉투들이 가득했다.

 

수십, 아니 백 통은 족히 넘어 보이는 편지들이었다.

 

"이게 다 뭐냐?"

 

재환이 묻자, 지유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번졌다.

 

"…네가 신림동에서 보냈던 관제엽서 한 장을 받고 나서부터… 매일 밤마다 썼던 답장들이야."

 

재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유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 묶음을 쓸어내렸다.

 

"주소를 몰랐잖아. 광화문 우체국 소인만 찍혀 있고 네가 사는 고시원 주소가 없어서 부치지는 못했어. 그래도… 매일 밤 일이 끝나고 나면 여기에 편지를 썼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게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그리고 널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지유는 편지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재환아, 오늘은 비가 많이 왔어. 요천 둑길의 벚나무들이 푸른 잎을 틔웠더라. 네가 준 증명사진을 매일 밤 꺼내 보며 기도해. 밥은 굶지 않고 공부하는지….'

 

편지 봉투마다 적힌 글씨는 단정했으나, 곳곳에 눈물 자국으로 번진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편지들 어디에도, 강태석의 표적 단속이나 조폭들의 쇠파이프 테러,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에 대한 원망이나 고통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직 서울에서 고독하게 싸우고 있을 성재환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순수하고 애절한 안부와 사랑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재환은 양철 상자 속에 담긴 편지들을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았다.

 

지유가 홀로 견뎌낸 칠 년의 지옥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 준 유일한 닻이 바로 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었던 것이다.

 

"지유야."

 

재환이 편지 상자를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소년의 슬픔에 젖어 있지 않았다.

 

어둠을 가르는 서슬 퍼런 칼날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사법의 결의가 그의 눈동자에 타올랐다.

 

"강태석은 오늘 밤으로 끝났다. 그자가 요천 제방을 무너뜨려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너를 짓밟으려 했던 죄 대가를 낱낱이 치르게 할 거다."

 

재환의 어조는 단호했고 무거웠다.

 

"하지만 강태석 하나로 끝나지 않아. 그 뒤에 숨어 남원의 피를 빨아먹은 토착 토건 세력들, 뇌물을 받아먹고 증거를 덮은 경찰들, 그리고…."

 

재환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그의 시선이 조리대 위에 놓인 1968년 이면계약서 원본으로 향했다.

 

보증인 난에 선명히 찍혀 있던 친부의 이름, '成浩錫(성호석)'.

 

지유의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넣고, 남원의 땅을 강탈해 권력의 발판으로 삼았던 가문의 시발점.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내 아버지까지… 성호석 차관까지 법정에 세울 거다."

 

지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이 성재환이라는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하고 참혹한 형벌인지 지유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단죄해야 하는 검사의 숙명.

 

"재환아… 그건 너무… 너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지유가 재환의 주먹을 감싸 쥐며 애원하듯 말했다.

 

"난 괜찮아. 강태석이 죗값을 치르고, 우리 아버지의 억울함만 풀린다면… 굳이 네 손으로 네 아버지를…."

 

"아니, 지유야."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금빛 닙에 새겨진 법언이 백열등 불빛 아래 서늘하게 번뜩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한다. 백부님이 내게 주신 법언이고, 내가 검사 선서를 하며 맹세한 말이다. 가문의 죄를 덮고 세우는 정의는 가짜야. 내 손으로 도려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마주할 자격도, 이 땅 남원에 발을 디딜 자격도 없어."

 

재환의 눈빛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혈연을 끊어내고, 오직 완전무결한 정의의 심판관으로 거듭나겠다는 서슬 퍼런 각성이었다.

 

7. 밤안개 속의 경고

 

그때, 닫혀 있던 김밥집 미닫이문 밖에서 급박한 엔진 소리가 울리며 검은색 지프 한 대가 멈춰 섰다.

 

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최민재가 뛰어 들어왔다.

 

민재의 손에는 흙탕물이 튄 방수포 가방이 들려 있었다.

 

"재환아! 지유야!"

 

민재는 방수포 가방을 조리대 위에 내려놓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방 안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온 것은 푸석푸석한 모래 잡석 콘크리트 덩어리와, 규격 미달의 얇은 철근 토막, 그리고 두툼한 장부철이었다.

 

광한루원 완월정 뒤편 팽나무 고목 바위 틈에 숨겨두었던 바로 그 부실공사 시편과 한양토건의 설계 감리 보고서 원본철이었다.

 

"완월정에서 무사히 빼왔다! 강태석 놈들 부하 몇 놈이 어슬렁거리길래 뒤란 담장을 넘어서 따돌리고 가져왔어!"

 

민재가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외쳤다.

 

"그리고… 방금 남원지청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아!"

 

재환의 눈썹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무슨 일이지?"

 

민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태석이 유치장에 갇히면서 비서실 놈을 통해 서울 혜화동으로 긴급 전화를 넣었답니다.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이요!"

 

김문현.

 

과거 1993년 내무부 감사관실을 움직여 성호석을 축출하고 강태석을 시장 자리에 앉혔던 배후이자, 춘향 테마랜드 비자금 20억 원을 무기명 CD로 상납받았던 거악의 정점.

 

"벌써 중앙 정계 라인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서울고검이랑 법무부 쪽에서 남원지청장실로 직통 전화가 빗발치고 있답니다. 강태석에 대한 긴급체포 절차에 중대한 흠결이 있다면서, 영장 실질심사 전까지 일단 석방하고 수사를 임의수사로 전환하라는 외압이 내려오고 있대!"

 

민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재환아, 저놈들 남원에서 뼈가 굵은 놈들이야. 중앙에 줄만 닿으면 구속적부심이든 뭐든 써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놈들이라고!"

 

가게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칠 년 전,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을 이끌고 내려왔을 때 수뇌부의 긴급 수사 보류 명령 한 장으로 철수해야만 했던 그 악몽 같은 기억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성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와 콘크리트 시편을 담담히 손으로 쓸어내렸다.

 

"석방은 없다."

 

재환의 입술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저들이 잊은 모양이군. 이번엔 임시 파견 수사가 아니다."

 

재환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코팅된 대검찰청 공식 발령 사령장을 꺼내 식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붉은색 검찰총장 직인이 선명하게 날인된 공문서였다.

 

[발령: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사 성재환.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겸임 발령을 명함.]

 

민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남원지청으로 정식 부임한 거였어?"

 

"서울에서 내려올 때 이미 정종길 중수부장님과 총장님의 결재를 끝마쳤다."

 

재환은 외투를 집어 들어 걸치며 차갑게 덧붙였다.

 

"내일부터 나는 전주지검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의 주임검사다. 강태석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는 오늘 밤 내가 직접 작성해 법원에 접수한다. 김문현이든, 내무부든, 그 누구도 법원의 적법한 영장 발부를 막을 수는 없어."

 

재환은 조리대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 안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지유의 낡은 양철 편지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지유야."

 

재환이 문가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과 김밥집 백열등 불빛이 교차하는 문턱에서, 성재환 검사의 뒷모습은 거대한 폭풍을 마주한 바위처럼 웅장하고 단단했다.

 

"이 편지들은 내가 가져간다. 지난 칠 년간 네가 흘린 피눈물과 이 가게의 상처들… 내가 기소장에 한 글자도 빠짐없이 잉크로 새겨 넣어 법정에 던져줄 테니까."

 

지유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어, 재환아."

 

미닫이문이 열리고, 놋쇠 풍경이 맑은 쇳소리를 울렸다.

 

새벽을 향해 치닫는 남원의 밤안개 속으로, 성재환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거악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지유의 상처를 치유할 최후의 사법 심판이, 이제 막 서막을 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