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개발중입니다! 오픈예정은 12월25일 예정하고 있습니다.
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5화

기억의 문을 열다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게 물든 요천의 황혼

 

남원 시내를 관통하는 요천(蓼川)의 물결 위로 핏빛에 가까운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워졌다.

 

검은색 대검찰청 지휘 세단의 뒷좌석 창문 너머로 비치는 풍경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처연했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요천 제방 길목에는 수해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뿌리째 뽑혀 나간 수양버들이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있었고, 붕괴된 제방 단면을 감추려는 듯 쳐놓은 경찰의 노란색 출입 통제선이 바람에 사납게 펄럭였다.

 

전경 버스 서너 대가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으나, 성재환(成宰桓)의 시선은 그 너머에 머물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이 백미러로 성재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사님, 후속 수사관들이 요천 제방 삼거리 통제선 외곽 500미터 지점에 전원 집결을 마쳤다고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경찰 측 경비과 병력이 생각보다 두텁습니다."

 

"남원경찰서장이 시장 관사의 직통 전화를 받고 강제 진입 시 물리적 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무전을 일선에 타전했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지금 바로 통제선으로 지휘 차량을 붙이시겠습니까?"

 

수사관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긴장감이 묻어났다.

 

남원 토착 권력의 우두머리인 강태석(姜泰錫)과 그 수하들이 경찰력을 방패막이 삼아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형국이었다.

 

하지만 성재환은 품속 양복 안주머니를 조용히 짚었다.

 

그곳에는 서울에서부터 한순간도 떼어놓지 않은 법원의 체포영장과, 캡 상단에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각인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재환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나직하고 차분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아니, 수사팀에는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전파해."

 

"어차피 저들이 제방을 메우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투입하려던 레미콘 차량들은 군산과 전주 길목에서 우리 계좌추적팀과 감사원이 이미 억류했어."

 

"단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제방의 잡석과 썩은 모래를 치울 수는 없다."

 

수사관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먼저 이동하십니까?"

 

재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망막 뒤편으로 7년 전, 서울행 완행열차의 붉은 벽돌 승강장과 아스팔트 바닥에서 무릎을 짓이기며 울부짖던 열여덟 살 소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피를 토하듯 고시촌의 단칸방에서 법전을 씹어 삼켰고, 연수원과 특수부의 살벌한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왔다.

 

이제 그 기나긴 형벌과도 같았던 세월의 매듭을 풀어낼 시간이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으로 가자."

 

재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수사관은 짧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차량이 서서히 방향을 틀어 요천 제방을 벗어나 낡은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2. 골목 끝에 멈춘 발걸음

 

동문 우체국을 끼고 도는 삼거리 골목길은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루아침에 닥친 수해로 구도심의 상점들은 대부분 셔터를 내리고 불을 끈 채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진흙을 퍼낸 웅덩이마다 붉은 노을빛이 고여 있었고, 퀴퀴한 흙탕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골목을 휘감았다.

 

지휘 세단이 골목 어귀의 낡은 버드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멈춰 섰다.

 

재환은 차 문을 열고 홀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검사님, 동행하겠습니다."

 

수사관이 급히 따라붙으려 하자 재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여기서 기다려."

 

"혼자 다녀오겠다."

 

단호한 목소리에 담긴 결기를 읽은 수사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골목길로 들어선 재환의 발걸음은 묵직하면서도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구두 밑창에 밟히는 자갈과 깨진 기와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자, 7년 동안 꿈속에서도 수천 번을 헤매었던 그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거리 김밥집.'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양철 간판 밑으로, 투명 박스 테이프가 'X' 자로 촘촘히 엮여 붙은 전면 통유리창이 보였다.

 

강태석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박살을 냈던 유리창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고 따스한 백열등 불빛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가게 처마 밑에는 7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매달아 두었던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맞으며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재환은 김밥집 맞은편 낡은 전신주 그늘 아래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거세게 요동쳤다.

 

사법시험 1차 수석 통지서를 받아 들었을 때도, 사법연수원 수석으로 검사 선서를 하던 날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떨림이었다.

 

유리창 안쪽 조리대 앞에 단정한 하얀 앞치마를 두른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묶어 올린 한지유(韓智由)였다.

 

그녀는 젖은 면포로 참기름이 배어 있는 도마를 묵묵히 닦아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시청의 가혹한 행정 탄압과 깡패들의 협박 속에서도 끝끝내 지켜낸 그녀의 성채이자 일터였다.

 

재환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녀린 어깨 위에 얹혀 있었을 그 가혹한 삶의 무게가, 7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가슴을 짓이겨 왔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재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그 통증이 비로소 자신이 현실의 남원에, 지유의 곁으로 돌아왔음을 일깨워주었다.

 

재환은 코트 자락을 정리하고 천천히 가게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3. 놋쇠 풍경의 울림

 

끼이익.

 

낡은 나무 미닫이문이 열리며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놋쇠 풍경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딸랑.

 

맑은 쇳소리가 적막한 가게 안의 공기를 흔들며 퍼져 나갔다.

 

도마를 훔치던 지유의 손길이 일순간 굳어졌다.

 

가게 안에는 갓 지은 밥 냄새와 고소한 방앗간 참기름 냄새가 옅게 감돌고 있었다.

 

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아냈다.

 

수해가 난 뒤로는 해가 지면 손님이 끊긴 지 오래였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라면 시청에서 나온 단속반이거나, 아니면 제방 붕괴 현장에서 주민 대피를 돕고 있을 민재뿐이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재료가 다 떨어져서 김밥을 더 말아드릴 수가 없……."

 

차분하면서도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맺으려던 지유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말문이 그 자리에서 턱 하니 막혔다.

 

가게 입구, 주황빛 백열등 불빛이 드리워진 문간에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구김 하나 없는 짙은 감색 정장 차림에 단정한 깃을 세운 코트.

 

비바람을 맞고 달려온 듯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깊고 서늘하면서도 지독하게 애절한 눈빛을 품은 사내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의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진, 완벽한 성인의 골격을 갖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굳게 다문 입매와 올곧은 눈매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의 것이었다.

 

"……."

 

지유의 손에 들려 있던 하얀 행주가 맥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시간이 통째로 멎어버린 것만 같았다.

 

골목 밖에서 들려오던 희미한 바람 소리도, 처마 끝의 풍경 소리도 일순간 아득한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좁은 김밥집 안을 무겁게 채웠다.

 

재환은 미동도 없이 서서 지유의 얼굴을 하나하나 시선에 담았다.

 

수척해진 볼, 입술 안쪽을 깨문 흔적, 그리고 소매를 걷어올린 손목에 굳은살이 박인 그 손.

 

그 모든 흔적들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것 같았다.

 

재환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지유야."

 

낮게 갈라진 음성이 적막을 깼다.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그리고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였다.

 

그 단 한마디에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투명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4. 7년의 침묵이 무너지는 순간

 

지유는 차마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조리대 모퉁이를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마디가 잘게 떨려왔다.

 

환영이 아닐까.

 

매일 밤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깡패들의 쇠파이프 소리에 숨을 죽이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천 번이고 꿈꾸었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재…… 재환이니?"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간신히 흘러나온 음성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재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구두 굽이 삐걱거리는 낡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7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의 간극이 한 걸음씩 좁혀졌다.

 

재환은 조리대 바로 앞까지 다가가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조리대 나무 상판 위에 올려놓았다.

 

달칵.

 

낡고 모서리가 닳아빠진 반명함판 증명사진 한 장.

 

7년 전 남원을 떠나기 직전, 광한루원 팽나무 아래에서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넸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사진 뒷면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로 쓰인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리고 그 옆에, 금빛 닙이 단정하게 빛나는 검은 옻칠 만년필이 함께 놓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지유의 시선이 사진과 만년필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7년 동안 가슴 깊숙이 짓눌러 두었던 모든 방파제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를 차가운 영안실에 홀로 두고 상주 완장을 찼던 날에도, 깡패들이 유리창을 깨부수고 식칼을 들이밀었을 때도, 시청 세무서 직원들이 들이닥쳤을 때도 악착같이 삼켜냈던 울음이었다.

 

"돌아왔어."

 

재환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들어갔다.

 

"지유야, 내가…… 너무 늦었지."

 

재환의 목소리가 젖어 떨려 나왔다.

 

지유는 조리대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둑이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늦지 않았다.

 

아니,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그 맹세를 잊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준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지유가 비틀거리며 조리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겨든 지유의 몸은 기억 속보다 훨씬 가냘프고 작았다.

 

그 가녀린 몸으로 남원의 거대한 악귀들과 홀로 맞서 싸워왔다는 사실에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피눈물 같은 비통함이 치밀었다.

 

"살아 있었구나……."

 

지유의 젖은 목소리가 재환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정말로…… 네가 돌아왔구나, 재환아……."

 

지유는 재환의 코트 자락을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마치 손을 놓으면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재환은 지유의 떨리는 등을 단단하게, 그러나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지유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자, 그리웠던 비누 냄새와 소박한 참기름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래, 내가 왔어."

 

"이제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

 

재환의 턱 밑으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려 지유의 젖은 어깨 위로 떨어졌다.

 

5. 마주 잡은 상처의 기억

 

한참 동안 쏟아지던 울음이 잦아들 무렵, 지유가 조심스럽게 재환의 품에서 물러섰다.

 

눈물로 범벅이 된 지유의 얼굴을 마주한 재환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눈물 자국을 쓸어내리는 재환의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지유는 눈시울을 붉힌 채 재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턱선, 고시촌의 형광등 불빛과 밤샘 수사로 다소 그늘진 눈가.

 

그가 걸어왔을 7년의 고독과 치열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유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민재한테 들었어."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붙었다고…… 연수원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섰다고."

 

재환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으나, 그 미소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정작 네가 이곳에서 피눈물을 흘릴 때, 난 서울에 틀어박혀 종이 위의 법조문이나 외우고 있었는데."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오른쪽 무릎으로 떨어졌다.

 

낡은 면바지 위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재환은 알고 있었다.

 

7년 전 그날, 서울로 향하는 자신을 태운 관용차를 뒤쫓다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짓이겨졌던 그 참혹한 상처를.

 

지유는 재환의 자책을 눈치채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재환아."

 

"네가 보낸 엽서 한 장, 네가 남겨두고 간 만년필…… 그것들이 없었으면 난 벌써 무너졌을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깡패들이 매일 밤 찾아와 문을 부술 때도 난 견딜 수 있었어."

 

"네가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지유의 눈빛은 비록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그 안에는 7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거목 같은 심지가 굳건히 박혀 있었다.

 

재환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거칠어진 손바닥의 굳은살이 재환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 손은 단순한 희생자의 손이 아니었다.

 

부패한 권력의 폭압 앞에서도 1원 한 장 틀리지 않는 장부를 써 내려가며 제 터전과 진실을 지켜낸,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고 고결한 손이었다.

 

"어머니 묘소에는…… 가보지 못했어."

 

재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유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머니도 다 이해하실 거야."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나한테 남기신 말씀이 있어."

 

"이 가게를 절대 빼앗기지 말라고, 그리고…… 아버지가 남기신 서류를 지켜내라고."

 

지유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그녀는 재환의 손을 이끌고 카운터 안쪽, 주방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로 향했다.

 

6. 흙벽 너머의 진실

 

주방 한구석, 낡은 찬장 뒤편의 흙벽은 겉보기에는 금이 가고 허름해 보였다.

 

지유는 찬장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벽면 아래쪽, 흙벽돌의 이음새 하나가 유독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지유가 주머니에서 작은 쇠꼬챙이를 꺼내 틈새를 찌르자, 흙벽의 일부가 덜컹하며 서랍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비밀 벽감 안에서 묵직한 기름종이에 겹겹이 싸인 서류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그 뭉치를 꺼내 재환에게 건넸다.

 

"이게……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지키셨던 거야."

 

"세무서 놈들이 들이닥쳤을 때도, 깡패들이 가게를 뒤집어놓았을 때도 이것만은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어."

 

재환은 엄숙한 표정으로 누렇게 바랜 기름종이를 벗겨냈다.

 

안에서 드러난 것은 1968년 5월 자로 작성된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및 지분 양도 이면계약서' 원본이었다.

 

서류를 펼친 재환의 시선이 하단의 서명 난으로 향했다.

 

'원소유자 한석규(韓錫奎).'

 

'공동 수탁인 강태석(姜泰錫).'

 

그리고 그 옆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입증 및 보증인의 이름.

 

'성호석(成浩錫).'

 

자신의 친부, 현재 내무부 차관으로 중앙 정계의 정점에 서 있는 성호석의 서명과 관인이었다.

 

30년 전부터 이 남원의 땅을 강탈하고 농민들의 피눈물을 빨아먹으며 권력의 사다리를 올랐던 추악한 카르텔의 뿌리가 그곳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재환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분노로 파르르 떨려왔다.

 

자신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해 온 죄악의 실체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유는 그런 재환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의 차가운 손등 위에 자신의 따뜻한 손을 얹었다.

 

"재환아."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그 안에는 원망이나 증오 대신, 재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난 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지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어."

 

"네가 이 만년필에 새겨진 글을 나한테 읽어줬던 날을 기억해?"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인 만년필을 가리켰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너는 성호석의 아들로 이곳에 온 게 아니잖아."

 

"남원의 무너진 둑을 바로잡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검사로 돌아온 거잖아."

 

지유의 목소리가 재환의 찢겨진 가슴에 박혀 들었다.

 

재환은 이면계약서를 가슴 깊숙이 품어 안았다.

 

그리고 만년필을 집어 들어 캡을 굳게 닫았다.

 

챙, 하는 맑은 금속음이 주방의 어둠을 갈랐다.

 

"그래."

 

재환의 눈빛에서 일말의 망설임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얼음장 같은 냉혹함과 결의가 차올랐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하늘이 내 아버지라 할지라도 난 베어낼 거다."

 

"그것이 내가 법복을 입은 이유이고, 너에게 돌아온 유일한 명분이니까."

 

7. 밤안개 속의 출진

 

가게 밖 골목길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과 지유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미닫이문이 벌컥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청년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 최민재(崔民宰)였다.

 

"지유야! 큰일 났다!"

 

민재는 가게 안에 서 있는 장신의 사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말을 쏟아냈다.

 

"강태석 그 개자식이 경찰서장 불러서 요천 제방에 레미콘을 강제로 밀어 넣으려고……!"

 

말을 잇던 민재의 시선이 재환의 얼굴에 멎었다.

 

민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너…… 너 설마……?"

 

재환이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민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민재야."

 

"재…… 재환이냐? 성재환?!"

 

민재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하며 재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진짜 너야? 진짜로 온 거야?!"

 

민재의 목소리가 경악과 벅찬 감격으로 뒤엉켰다.

 

재환은 민재의 머리에 감긴 피 묻은 붕대를 바라보며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고생 많았다, 민재야."

 

"네가 목숨 걸고 지켜낸 테이프, 그리고 네가 쓴 기사들…… 서울에서 다 보고 있었다."

 

민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주먹으로 재환의 가슴팍을 툭 쳤다.

 

"이자식아…… 얼마나 기다렸는데…… 진짜 검사가 돼서 나타났네."

 

민재는 품속에서 작은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강태석 육성이야."

 

"요천 제방 무너진 걸 300밀리 천재지변으로 조작하라고 배도식 국장 협박한 내용 전부 다 들어 있어."

 

"그리고 지유랑 내가 완월정 팽나무 바위 틈에 숨겨둔 게 또 있어."

 

"부실시공 현장에서 뜯어낸 모래 잡석 콘크리트 시편이랑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 원본철이야."

 

재환은 손안의 테이프를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30년 전의 토지 강탈 이면계약서, 춘향 테마랜드 40억 비자금 차명 계좌 내역, 남원일보 기사 조작 녹음테이프, 그리고 제방 붕괴를 입증할 부실 콘크리트 시편까지.

 

강태석과 그 일파,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중앙의 거악들을 단번에 단두대에 올릴 완벽한 사법의 칼날이 완성된 것이다.

 

그때, 가게 밖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요천 제방 쪽을 향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레미콘 차량의 육중한 엔진 소리와 확성기 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강태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민재가 긴장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놈들, 경찰 방패 세우고 밤새 붕괴 현장을 생시멘트로 덮어버리려는 속셈이야."

 

재환은 조용히 코트 단추를 채웠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당황도 없었다.

 

오직 거악을 향해 내려꽂힐 벼락같은 서슬만이 감돌았다.

 

재환은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 역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재환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심장에 닿아 있는 맹세였다.

 

"지유야, 잠깐만 기다려."

 

재환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 남원의 썩은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오작교의 봄바람을 맞으러 올게."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재환의 옷깃을 단정하게 매만져주었다.

 

"응. 기다릴게."

 

"다치지 말고…… 정의를 세우고 와."

 

재환은 뒤돌아서서 김밥집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딸랑.

 

처마 끝의 놋쇠 풍경이 밤바람을 가르며 다시 한번 맑고 드높은 쇳소리를 토해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삼거리 골목길 너머로, 성재환 검사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요천 제방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