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덮으려는 손
1. 흙탕물 속의 사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요천(蓼川)의 성난 파도가 포효하듯 대지를 사정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붕괴된 제1공구 콘크리트 제방의 거대한 파열구 틈새로 터져 나온 누런 흙탕물은 남원 구도심 하정리와 동충동의 비탈진 골목길을 삽시간에 집채만 한 탁류로 뒤바꾸어 놓았다.
지리산 골짜기에서부터 밀려든 거센 수마는 수십 년 된 전신주를 사정없이 들이받아 삐걱거리는 비명을 토해내게 했고, 빗물받이를 단숨에 집어삼킨 물길은 낡은 목조 상가 건물의 유리창과 문턱을 굉음과 함께 들이받아 부수었다.
골목 어귀마다 쌓여 있던 연탄재와 목재 합판, 부서진 평상 조각들이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타고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녔다.
물줄기는 단순한 빗물이 아니라 기름때와 흙모래, 하수관의 썩은 오물이 뒤섞여 숨이 턱 막힐 듯한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르신!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어서요!"
한지유(韓智柔)는 턱밑까지 사납게 튀어 오르는 진흙탕 물보라 속에서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거센 물살은 이미 무릎을 훌쩍 넘어서서 그녀의 허벅지 언저리까지 휘감아 돌며 중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칠기사 안쪽의 비좁고 눅눅한 문간방에서, 거동조차 힘들어 다리를 절며 떨고 있던 구두 수선공 김 씨의 노모는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지유의 소매를 밀쳐내려 했다.
누렇게 바랜 장판 위로 이미 시커먼 흙물이 장딴지 높이까지 차올라 방구석의 낡은 가재도구들을 둥둥 띄워 올리고 있었다.
"지유야, 나 같은 늙은 것 때문에 네가 다친다……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그냥 두고 가…… 어서 너라도 먼저 뛰어……."
노모의 갈라진 음성은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파묻혀 가냘프게 흩어졌다.
하지만 지유는 눈을 부릅뜨며 노모의 여윈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런 모진 말씀 마세요! 제가 어르신을 두고 어떻게 혼자 도망칩니까! 저 혼자는 절대 안 갑니다! 어서 제 목을 꽉 끌어안으세요! 절대 손 놓으시면 안 돼요!"
지유는 앙상한 노모의 두 다리를 제 허리 양옆으로 단단히 끌어올려 업었다.
등 뒤에서 전해지는 노인의 메마른 체온과 두려움에 찬 떨림통이 지유의 심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문간방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거센 물살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며 지유의 하체를 강타했다.
순간 휘청하며 무릎이 꺾일 뻔했으나, 지유는 옆집 함석 벽을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짚으며 버텨냈다.
차오른 탁류 아래는 보이지 않는 덫투성이였다.
깨진 기와장과 부서진 사기그릇,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곤두선 못 대가리들이 지유의 장딴지와 정강이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피가 배어 나와 흙탕물에 씻겨 내려갔고, 과거 서울로 떠나는 관용차를 뒤쫓다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 아스팔트에서 깊게 패었던 오른쪽 무릎의 흉터가 얼음장 같은 흙탕물 속에서 칼로 에이는 듯 쑤셔왔다.
하지만 지유는 이를 악물고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완월정(翫月亭) 고지대를 향해 진흙탕을 한 발 한 발 헤쳐 나갔다.
골목 저편, 뿌연 빗줄기 사이로 꽹과리를 쇠막대기로 미친 듯이 내리치는 찢어지는 쇠붙이 소리가 거센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대피하십시오! 주민 여러분! 요천 제방이 완전히 터졌습니다! 삼거리 골목이 물에 잠기고 있어요! 지체하지 말고 완월정 언덕으로 올라가세요! 집안간 살림 챙기지 마시고, 아이들과 어르신들 먼저 데리고 고지대로 뛰세요!"
온몸이 비와 진흙, 식은땀으로 얼룩진 최민재가 쇠막대기로 찌그러진 꽹과리를 내리치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거칠게 갈라져 있었지만, 골목길 곳곳을 뛰어다니며 굳게 닫힌 가옥들의 사립문과 덧문을 발길질로 쾅쾅 차서 부수듯 열어젖혔다.
잠결에 날벼락을 맞고 놀라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상인들과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들이 젖은 옷가지를 부여안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민재는 어린아이 둘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앞장서서 길을 텄고, 상인들은 지유와 민재의 뒤를 따라 줄지어 완월정 언덕길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중턱에 다다라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지유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빠져나온 구도심 저지대를 내려다보았다.
뿌연 폭우의 장막 너머로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양철 처마와 '삼거리 김밥'이라 적힌 빛바랜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이미 가게 마루 높이까지 들이닥친 누런 흙탕물이 박스 테이프로 얼기설기 메워두었던 통유리창을 맹렬한 기세로 두드리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세무조사반의 폭압 앞에서도 떳떳하게 지켜냈던 3개년 치 결산 장부와, 흙벽 깊숙이 모셔둔 1968년 토지 이면계약서 원본이 숨겨져 있었다.
지유는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가슴속으로 되뇌었다.
'어머니, 부디 하늘에서 지켜봐 주세요. 탐욕에 눈먼 자들이 무너뜨린 이깟 흙탕물 따위에, 우리의 눈물겨운 터전도, 어머니가 남겨주신 진실도 결코 쓸려 내려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2. 무너진 제방의 상흔
새벽 세 시가 넘어선 시각, 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정 대청마루와 완만하게 솟아오른 누원 언덕 잔디밭은 대피해 온 이백여 명의 구도심 주민들로 흡사 피난민 수용소처럼 변해 있었다.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한 노인들과 젖먹이를 안은 아낙들의 울음소리, 거친 신음과 기침 소리가 쉼 없이 내리는 빗소리와 뒤섞여 처량한 소음을 빚어냈다.
지유는 업고 온 김 씨의 노모를 마을 이장이 깔아준 멍석 자리에 조심스레 뉘었다.
노모의 흙 묻은 뺨을 자신의 젖은 소맷자락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내는 지유의 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민재가 다가왔다.
민재는 온몸이 물미역처럼 젖어 있었고, 그의 오른쪽 어깨와 팔뚝은 날카로운 철근에 긁힌 듯 시뻘건 핏물이 빗물과 함께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품속에는 진흙이 떡처럼 엉겨 붙어 묵직한 무게감을 풍기는 검은 비닐 보따리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지유야, 다친 데는 없냐? 정강이는 왜 그래,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
민재가 기겁하며 지유의 다리를 살피려 하자, 지유는 황급히 치맛자락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긁힌 것뿐이야. 그것보다 민재 너, 팔에 그 상처는 대체 뭐야? 그 손에 든 건 또 뭐고? 설마 너…… 그 무너진 제방 현장에 다시 들어갔다 온 거야?"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콘크리트 벽체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던 사지(死地)였다.
민재는 사방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누각 기둥 뒤편 어둠 속으로 지유를 이끌었다.
주변에 다른 피난민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민재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비닐 보따리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보따리 안에서 둔탁한 잿빛 콘크리트 덩어리 서너 개와, 누렇게 변색되어 흙탕물이 번진 두툼한 서류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방 제1공구 옹벽 무너진 단면 쪽으로 목숨 걸고 기어들어 갔다 왔어."
민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만져봐, 지유야. 이게 댐이나 제방을 쌓을 때 쓰는 수중 콘크리트 덩어리 같아 보여?"
지유가 손을 뻗어 콘크리트 파편 하나를 조심스레 쥐었다.
단단해야 할 암석 덩어리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마자 푸석거리며 굵은 모래와 자갈 알갱이로 힘없이 부스러져 내렸다.
시멘트의 접착력은 온데간데없고, 저가의 잡석과 진흙 모래를 마구잡이로 버무려 겉포장만 번지르르하게 굳혀놓은 가짜 콘크리트였다.
"시멘트 배합 비율을 삼분의 일도 안 맞춘 거야. 게다가 이 안에 박혀 있던 철근 꼬락서니를 봐. 직경 25밀리 고장력 철근을 써야 하는 자리에, 하치장에서 굴러다니던 녹슨 10밀리짜리 연성 철근을 듬성듬성 엮어 놨더군. 손으로 흔들어도 뽑힐 지경이었어."
민재는 이를 갈며 품 안주머니에서 투명 랩으로 대여섯 겹 꽁꽁 싸매어 물기를 차단한 서류철을 꺼내 지유의 눈앞에 펼쳤다.
"그리고 이건…… 한양토건 현장 사무소로 쓰던 컨테이너가 급류에 휩쓸려 뒤집히기 직전, 흙탕물 속에 처박혀 있던 현장 감독관 가방에서 건져낸 진짜 설계 감리 보고서 원본이야."
비닐 랩 사이로 드러난 누런 갱지 위에는 붉은색 결재 인주와 함께 충격적인 수치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요천 수변공원 1공구 제방 옹벽 기초 자재 절감 내역서.'
동서개발과 세창물산, 한양토건이 공사비 40억 원을 비자금으로 빼돌리기 위해 철근 규격을 고의로 축소하고 방수 시멘트를 불량 잡석 골재로 둔갑시킨 현장 내역이, 감리원의 묵인 서명과 함께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지유의 차가운 시선이 서류의 날인들을 훑어 내렸다.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야. 비가 많이 와서 무너진 게 아니라, 탐욕으로 제방의 뼈대를 갉아먹어서 무너진 명백한 살인이야. 사람이 저지른 학살극이라고."
"맞아. 하지만 저놈들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아까 완월정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시청 도로과 놈들이랑 어용 상인회 간부 몇 놈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강태석 시장 관용차가 관사에서 빠져나와 남원일보사 쪽으로 급하게 내달렸다고 하더군. 강태석 그 악마 같은 인간, 이 참극을 '백 년 만의 기록적 천재지변'으로 둔갑시켜 통째로 덮어버릴 작정이야."
민재의 손이 서류를 쥔 채 바들바들 떨렸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 분노와 허탈함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지유는 민재의 떨리는 어깨를 두 손으로 지그시 눌러 잡았다.
지유의 눈빛은 한겨울 요천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흔들림이 없었다.
"민재야, 흥분하면 안 돼. 이 증거들을 지금 당장 거리에 들고 나가서 외쳐봤자, 시청 관변 세력과 경찰들이 달려들어 빼앗은 뒤 기름을 부어 태워버릴 거야. 강태석의 손이 절대로 닿지 않는 곳,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은밀한 곳에 숨겨야 해."
지유의 시선이 완월정 뒤편 둔덕, 칠흑 같은 빗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령 수백 년 된 거대한 팽나무 고목으로 향했다.
봄날 재환과 처음 마주쳐 비밀스러운 온기를 나누었고, 가문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 고목이었다.
고목의 뒤란 바위 틈새에는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깊숙하고 단단한 석혈(石穴)이 숨겨져 있었다.
지유와 민재는 완월정 처마 밑에서 주워 온 두꺼운 농업용 방수포로 불량 콘크리트 시편과 랩에 싸인 설계 감리 보고서를 세 번, 네 번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폭우 속을 뚫고 팽나무 밑둥으로 다가가, 억센 바위 틈 깊숙한 어둠 속에 그 묵직한 증거물들을 밀어 넣고 넓적한 덮개돌로 완벽하게 위장했다.
그것은 훗날 이 참혹한 범죄의 흑막을 법정에 세워 일망타진할 가장 날카롭고 치명적인 사법의 뇌관이었다.
3. 편집국의 칼바람
새벽 네 시가 막 지나던 시각, 남원 시내 동충동 로터리 모퉁이에 자리 잡은 남원일보사(南原日報社) 3층 편집국.
지하 윤전기실의 거대한 쇠바퀴가 멈춰선 신문사 건물 전체는, 기괴할 정도의 적막과 코를 찌르는 인쇄 기름 냄새,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짓눌려 있었다.
쾅-!
견고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편집국장실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려 젖혀졌다.
진흙투성이가 된 검은 장화를 신은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이 장검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비에 흠뻑 젖은 짙은 감색 레인코트 자락에서 흙탕물이 뚝뚝 떨어져 편집국의 낡은 리놀륨 바닥을 더럽혔다.
관사 2층 집무실에서 공사 장부를 소각하던 도중, 서울지검 특수부 성재환 검사 일행이 관사 정문을 강습하기 직전 가까스로 뒷문 비밀 통로로 빠져나온 강태석이었다.
비서실장을 방패막이로 내던져두고 피신해 온 그의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통에는 밤샘 도주의 피로와 함께, 권력을 빼앗길 수 없다는 광기 어린 독기가 시퍼렇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붉은색 펜을 든 채 원고를 들여다보던 편집국장 배도식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구부렸다.
"시, 시장님……! 이 야심한 시각에 전화도 없이 어찌 직접 여기까지……."
배도식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태석은 대답 대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쇳소리가 섞여 긁히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배 국장. 오늘 아침 남원 전역에 뿌려질 조간 호외 1면 탑기사 대장 교정지, 지금 당장 내놔."
배도식은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조판용 대형 인쇄 대지를 집어 강태석에게 내밀었다.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굵은 활자가 백지 위에 선혈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제방 옹벽 붕괴 참사!
부실공사 의혹 일파만파, 하정·동충동 구도심 상가 전면 침수]
기사 본문 밑에는 무너져 내린 제방 단면의 앙상한 모습과 함께, 흙탕물이 들이닥쳐 아수라장이 된 저지대 상가의 참상이 현장 취재기자의 날카로운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시공사인 한양토건과 감리를 맡은 동서개발의 자재 횡령 의혹, 그리고 남원시청의 관리 감독 부실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문단들이 굵은 밑줄과 함께 편집되어 있었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한 살기가 서린 조소가 터져 나왔다.
찌이익-!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거친 손길이 대장 교정지를 단숨에 두 동강으로 찢어발겼다.
찢겨 나간 종이 파편이 허공으로 흩날리는 순간, 편집국장실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부실공사 의혹? 남원시청의 관리 부실? 배 국장, 네놈이 드디어 간깔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제정신을 잃었구나."
"시, 시장님! 하지만 현장에 나간 취재기자들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요천 제방 콘크리트에 철근이 절반도 안 들어갔고, 골재 대신 썩은 잡석이 채워져 있었다는 상인들의 증언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이걸 전부 모른 척 덮었다가는 남원일보의 공신력이……."
"아가리 닥치지 못해!"
강태석이 찢어발긴 종이 뭉치를 주먹으로 구겨 배도식의 안면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구겨진 종이 뭉치가 배도식의 이마를 강타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공신력? 펜대 굴리는 먹물 찌꺼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강태석은 성큼 다가가 배도식의 양복 깃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그의 코앞까지 시퍼런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인코트에서 풍기는 비린 흙냄새와 강태석의 살기 어린 입김이 배도식의 숨통을 죄어왔다.
"남원에 비가 얼마나 퍼부었는지 네놈 눈깔로는 안 보여? 시간당 90밀리미터야! 지리산 노고단 일대에 300밀리미터가 넘는 물폭탄이 쏟아져 내렸다고! 이건 단군 이래 남원에 닥친 백 년 만의 천재지변이야! 하늘이 노해서 퍼부은 물난리를 두고, 감히 시정이 부실하니 토건이 썩었니 떠들어대? 네놈이 정녕 남원 땅에서 신문사 간판 내리고 관 속에 대가리 처박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4. 진실을 바꾸는 활자
배도식의 턱밑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와이셔츠 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강태석이라는 인간이 과거 삼거리 토건 시절부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배도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반대파 유지의 다리를 쇠파이프로 부러뜨리고, 이권에 방해되는 상인들을 합법의 탈을 쓴 용역과 조폭을 동원해 파멸시켰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역사가 강태석의 등 뒤에 서려 있었다.
배도식은 사시나무 떨듯 무릎을 떨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압니다, 시장님…… 시장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압니다…… 하지만 구도심 이재민들이 수백 명이고, 벌써 완월정에 모인 상인들이 시청으로 몰려가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판국이라…… 완전히 없던 일로 덮는 건 언론사로서도 감당이……."
"누가 아예 덮어버리라고 했어? 대가리를 굴려서 프레임을 통째로 바꾸라는 거다!"
강태석이 배도식의 멱살을 팽개치듯 밀쳐냈다.
책상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친 배도식이 끙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강태석은 자신의 축축한 레인코트 안주머니에서 붉은색 결재 직인이 찍힌 남원시 재난안전대책본부 명의의 두툼한 공식 보도자료 문건을 꺼내 책상 위에 탕 소리 나게 내리쳤다.
"기사 제목 처음부터 다시 뽑아. 1면 머리기사 활자 크기 제일 큰 걸로 박아라."
강태석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냉혹했다.
"[지리산 일대 300mm 유례없는 기습 폭우! 남원시, 전 공무원 비상 총동원령으로 대형 인명 피해 막아냈다]로 가."
배도식이 찢어진 눈으로 강태석을 올려다보았다.
강태석은 책상 위로 몸을 숙이며 시퍼런 검지손가락으로 보도자료의 문장들을 짓눌렀다.
"제방이 부실해서 무너진 게 아니야. 요천 상류 댐의 방류량이 한계치를 초과한 상태에서, 산사태로 떠내려온 거대한 유목과 바위 덩어리들이 요천 수문을 막아서 빚어진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라고 써. 그리고 시장인 내가, 자정도 되기 전에 장화를 신고 진흙탕에 뛰어들어 새벽 내내 비를 맞으며 주민 대피를 진두지휘했다고 대문짝만하게 박아 넣어. 알겠어?"
"시, 시장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셨다고요……?"
"그래! 시장이 구둣발에 진흙을 묻혀가며 이재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다고 미담을 만들어 내란 말이다! 현장 사진은 내가 아까 관사 앞에서 찍어둔 시찰 사진 있지? 그거 적당히 비 맞은 걸로 골라서 1면 정중앙에 큼지막하게 올려!"
강태석의 눈빛이 살의와 조소로 번들거렸다.
그는 배도식의 어깨를 묵직하게 툭툭 치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배 국장, 남원일보사 윤전기 돌리는 신문 용지 납품권, 남원시청과 산하기관 계도지 구독료 수억 원, 그리고 다음 주 의회 통과 예정인 시정 발전 홍보비 3억 원…… 그 돈줄을 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해. 펜대 굴리는 놈들 밥줄 끊어놓고, 신문사 윤전기 압류 딱지 붙여서 멈추게 만드는 건 내 손가락 까딱 하나면 충분해."
"명, 명심하겠습니다, 시장님…… 말씀대로 즉시 전면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태석이 돌아 나가려다 멈칫 서며, 고개를 돌려 배도식의 정수리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어용 상인회 추진위 놈들이랑 번영회 간부들, 당장 새벽 안으로 불러 모아 입 단속시켜. 제방 붕괴 현장에서 철근이니 부실공사니 헛소리 지껄이는 놈은, 향후 신축 테마 상가 입주권 박탈은 물론이고 허위사실 유포 및 내란 선동 혐의로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처넣겠다고 전해. 특히…… 최민재 그 어린놈의 새끼가 카메라 들고 신문사 주변을 얼씬거리거나 잡동사니 서류 쪼가리를 흘리고 다니면, 즉시 내 직통 비서실로 넘겨. 허튼수작 부리다간 그놈 목숨줄도 여기서 끝장날 테니까. 알겠나?"
"예, 예! 일점일획도 어긋남 없이 조판실에 지시해 인쇄 걸겠습니다!"
배도식이 사색이 되어 인터폰을 낚아채듯 들고 조판실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강태석은 피비린내 나는 만족감을 머금은 채, 깨진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조롱하듯 응시했다.
성재환 검사가 아무리 대검 영장을 들고 자신을 옭아매려 해도, 지방 언론이 천재지변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중앙의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이 검찰 수뇌부의 목줄을 죄어오면, 이까짓 수해 참사 따위는 한낱 지나가는 여름 소나기로 묻혀버릴 터였다.
진실은 언제나 힘을 쥔 자의 손끝에서 조작되는 법이었다.
강태석은 그렇게 확신하며 썩은 미소를 흘렸다.
5. 어둠 속의 추적자
편집국장실 바깥,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3층 복도 끝 자료실 캐비닛 뒤편의 비좁은 틈새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에 흠뻑 젖은 작업복 차림의 최민재가 벽면에 온몸을 바짝 밀착한 채 서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손바닥만 한 일제 휴대용 카세트 녹음기가 쥐어져 있었고, 빨간색 녹음 표시등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소형 고성능 외장 마이크가 캐비닛 환기창 틈새를 통해 편집국장실 방향으로 정확히 향해 있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미세한 모터 회전음조차 창밖을 때리는 거센 폭우 소리에 완전히 묻혀 있었다.
'이 천벌을 받을 살인마 새끼…….'
민재는 관자놀이에 푸른 핏대를 세우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태석이 배도식의 멱살을 잡고 기사 조작을 협박하던 서슬 퍼런 음성, 시정 홍보비 3억 원으로 언론사를 매수하던 파렴치한 거래의 현장, 제방 붕괴 참사를 지리산 300밀리미터 천재지변으로 날조하라고 윽박지르던 살벌한 육성이, 마그네틱 테이프의 검은 띠 위에 일 초의 오차도 없이 낱낱이 각인되고 있었다.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밤중에 들이닥친 흙탕물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겼고, 평생을 바쳐 일군 삼거리 골목 상인들의 터전이 수마 속에 진흙탕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가증스러운 권력자는 한 치의 반성도 없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탐욕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진실을 압살하고 있었다.
쾅!
편집국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태석이 장화를 쿵쾅거리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의 뒤편으로 검은 우산을 받쳐 든 한양토건의 우람한 덩치 둘이 바짝 달라붙었다.
"차는 정문 앞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회장님. 남원경찰서장실로 곧바로 가셔야 합니다."
부하의 낮은 보고에 강태석이 장갑을 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래. 남원경찰서장 놈에게 즉시 전경 중대를 풀라고 해. 수해 복구와 도로 통제 명목으로 요천 수변공원 일대와 광한루원 진입로를 빈틈없이 전면 봉쇄하라고. 검찰 수사관 놈들이든 외부 기자 놈들이든, 영장이 있건 없건 남원 땅에서 단 한 발자국도 함부로 기어 다니지 못하게 틀어막아. 내 허락 없는 쥐새끼 한 마리도 현장에 들여보내지 마라."
"예, 회장님! 서장에게 시장님 특명으로 즉각 하달하겠습니다."
육중한 발소리가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 계단 아래로 멀어져 갔다.
신문사 1층 현관문이 덜컹 닫히고, 이내 요란한 배기음과 함께 검은색 로얄 살롱 관용차가 빗속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붉은 후미등 불빛이 창틀에 번졌다.
민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찰칵.
가슴속 깊숙이 녹음기를 찔러 넣은 민재의 눈동자가 서슬 퍼런 결기로 불타올랐다.
'재환이 형에게 가야 한다.'
강태석이 경찰 공권력까지 총동원해 요천 일대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언론을 완전히 조작해 버리기 전에, 이 피 묻은 녹음테이프와 완월정 팽나무 고목에 숨겨둔 감리 보고서 원본을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성재환 검사에게 반드시 넘겨야 했다.
민재는 흙탕물에 젖어 무거워진 운동화 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동여맸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세차게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어두컴컴한 폭풍우의 장막 너머로 거대한 심판의 새벽이 소리 없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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