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연줄
1. 어둠 속의 비밀 요정
서울 종로구 혜화동 외곽, 높다란 붉은 벽돌 담벼락에 둘러싸인 한옥 요정 청운각(靑雲閣)의 정원은 깊은 밤의 정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수령 백 년은 족히 넘은 적송들이 서치라이트 불빛을 받아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처마 밑마다 청사초롱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번호판에 푸른색 관용 휘장이 찍힌 최고급 세단들이 검은 맹수처럼 늘어서 있었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골목 어귀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남원에서 네 시간을 꼬박 달려 서울에 당도한 강태석(姜泰錫)은 관용차 로얄 살롱의 뒷좌석에서 묵직한 가죽 서류 가방을 끌어안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에서 박진철과 한양토건 용역들이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에게 현행범으로 압송되었다는 긴급 비보가 전주 요금소를 통과할 무렵 그의 휴대전화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성재환… 그 애송이 검사 놈이 기어코 남원에 칼을 들이밀었단 말이지.'
강태석의 굵은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남원 땅바닥에서 아무리 젊은 검사 놈이 영장을 휘두르고 날뛰어 봐야, 결국 검찰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진짜 권력은 이 서울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는 법이었다.
성호석을 남원에서 내무부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을 민선 시장으로 앉힌 것도 바로 이 집 후원의 은밀한 식탁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차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강태석은 보디가드가 받쳐 든 우산 아래로 몸을 숙이며 청운각의 육중한 목조 대문을 넘어섰다.
자갈이 깔린 정원 디딤돌을 밟을 때마다 구두 밑창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복도를 안내하던 한복 차림의 여종업원이 본채 가장 깊숙한 난실(蘭室)의 미닫이문 앞에 멈춰 서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시장님 모셔왔습니다."
"들라 해라."
낮게 깔리는 굵직한 음성이 문살을 뚫고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자 자욱한 시가 연기 사이로 최고급 나전칠기 탁자와 푹신한 보료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자 상석에는 여당의 4선 중진이자 국회 내무위원장인 김문현(金文顯) 의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출신의 현직 여당 정책조정실장 박철우가 다리를 꼰 채 얼음이 담긴 양주잔을 흔들고 있었다.
남원의 피비린내 나는 골목길과는 완전히 단절된, 대한민국 최상층부의 거대한 권력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2. 거물들의 만찬과 상납의 대가
강태석은 방문을 닫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꺾어 깊숙이 숙였다.
"위원장님, 그리고 실장님. 야심한 시각에 남원 촌놈이 불쑥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김문현은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가볍게 비벼 끄며 특유의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어허, 강 시장. 촌놈이라니 섭섭한 소릴 다 하는구먼. 자네가 일군 남원의 춘향 테마랜드며 요천 수변 관광특구가 중앙 당사에서도 얼마나 큰 화제인지 아는가? 어서 앉게나."
박철우 실장은 양주병을 들어 강태석의 잔에 독주를 채웠다.
황금빛 액체 위로 얼음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강태석은 양손으로 잔을 받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태우는 독한 알코올 기운이 곤두선 신경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듣자 하니 남원에서 요 며칠 소란이 좀 있었다더군."
김문현이 무심한 어조로 운을 뗐다.
그의 눈동자는 웃고 있었으나, 눈꼬리 끝에 서린 시선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강태석은 곧바로 들고 온 악어가죽 서류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탁자 위로 묵직한 두 개의 물건이 올라왔다.
하나는 서울 신탁은행과 제일은행의 1억 원권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 스무 장이 묶인 두툼한 봉투였고, 다른 하나는 남원 요천 수변 상업지구와 춘향 테마랜드 리조트 부지의 지분 30%가 명시된 양도 증서였다.
"소란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파리 몇 마리가 꼬인 것에 불과합니다."
강태석은 공손한 손길로 서류 봉투를 김문현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이건 지난 분기 남원 개발지구 토지 처분과 테마랜드 조성 공사에서 확보된 특별 당비입니다. 그리고… 내년 도지사 경선과 총선 대비용으로 중앙 당정에 따로 배정해 둔 종잣돈입니다."
김문현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봉투를 열어 CD의 권면 금액과 발행 은행 인장을 흘끗 확인한 뒤, 옆에 앉은 박철우에게 고갯짓을 했다.
박철우는 능숙한 솜씨로 서류를 자신의 서류철에 집어넣었다.
"역시 강 시장이야. 손이 커서 아주 마음에 들어. 지방 자치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결국 중앙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없으면 군수나 시장 놈들은 그저 바람 앞에 등불 신세지. 안 그런가, 박 실장?"
"그렇고말고요. 위원장님께서 지난 1993년 성호석이를 내무부 감사로 찍어 눌러 서울로 치워버리지 않으셨다면, 강 시장이 오늘날 민선 남원시장의 영화를 어찌 누렸겠습니까."
박철우의 웃음 섞인 한마디에 강태석의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두운 기억이 섬뜩하게 되살아났다.
그랬다.
3년 전 성호석 남원시장을 축출했던 내무부의 전격적인 불시 감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강태석이 바친 거액의 뇌물과 토지 이권, 그리고 중앙 집권을 노리던 김문현의 정무적 야심이 맞아떨어져 기획된 잔혹한 사정 공작이었던 것이다.
성호석을 서울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의 허울 좋은 감투로 묶어두고 남원의 모든 개발 이권을 통째로 집어삼킨 뒷배가 바로 눈앞의 김문현이었다.
3. 조여오는 올가미와 사법의 복병
"그런데 강 시장, 자네가 가져온 종잣돈은 참 달고 고마운데 말이지."
김문현이 다시 잔을 채우며 표정을 굳혔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오늘 밤 남원에서 서울지검 특수2부 놈들이 들이닥쳐 한양토건 대표를 체포하고 압수수색을 벌였다는 소식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네. 그게 사실인가?"
강태석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 송구합니다, 위원장님. 서울지검에 갓 임관한 송사리 검사 하나가 제멋대로 튀어 보겠다고 법원 당직 판사를 쑤셔 영장을 받아온 모양입니다."
"송사리?"
박철우 실장이 비릿한 냉소를 흘렸다.
"강 시장, 자네 상황 파악이 영 안 되는구먼. 그 칼을 쥔 검사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예?"
강태석이 눈을 크게 떴다.
박철우는 서류철 한구석에서 팩스로 전송받은 문건 하나를 툭 던졌다.
거기에는 성재환의 이름 석 자와 그의 사법연수원 27기 수석 이력, 그리고 현 서울지검 특수2부 배속 내역이 선명히 인쇄되어 있었다.
"성재환. 3년 전 자네가 중앙 라인을 동원해 쫓아낸 성호석 차관의 외아들일세. 연수원 수석에, 서울지검 특수부 저승사자로 불리는 강인철 부장의 직계 칼잡이로 들어간 괴물이지. 자네는 지금 성호석의 아들이 칼을 갈고 복수하러 내려간 줄도 모르고 송사리 타령을 한 건가?"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강태석은 눈앞의 문건을 멍하니 응시했다.
성재환.
삼거리 김밥집에서 그 당돌한 계집애 한지유가 입에 올렸던 그 이름.
깨진 흑청색 잉크병 위로 붉은 피를 흘리며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사내.
그놈이 성호석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그 어린놈이… 감히 내 등에 칼을 꽂으러 검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왔단 말인가!'
강태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김문현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묵직한 경고를 던졌다.
"성호석 그 능구렁이 같은 자식은 지금 중앙에서 숨을 죽이고 있지만, 그 아들놈이 특수부 영장을 쥐고 남원을 헤집고 다니면 자네만 죽는 게 아니야. 자네가 춘향 테마랜드와 수변지구에서 빼돌려 우리 당정에 상납한 그 비자금 장부까지 통째로 검찰 손에 넘어간단 말일세."
"위원장님, 그럴 리는 없습니다. 남원상호신용금고 계좌는 전부 삼중 차명으로 철저히 세탁되어 있습니다. 절대 중앙으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제가 목숨 걸고 막겠습니다!"
강태석이 다급히 읍소했다.
그러나 김문현의 반응은 싸늘했다.
"목숨? 자네 목숨값 따위는 이 판에서 십 원 한 장어치도 안 돼. 우리가 필요한 건 완벽한 차단벽이야."
김문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강태석의 귓가에 낮고 은밀한 독기를 불어넣었다.
"차기 전북도지사 공천? 국회의원 배지? 좋아, 남원의 그 알짜배기 땅을 다 쓸어 담아서 우리에게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안겨주지. 하지만 그전에 그 칼잡이 애송이와 김밥집 계집애를 완전히 묻어버려야 해. 자네 손으로 남원의 그 오래된 서류들과 증거들을 흔적도 없이 소각하게. 만약 그 불길이 한강을 넘어 이곳 서초동이나 여의도로 번지는 날엔… 자네는 남원 바닥에 시체도 못 추릴 줄 알게."
4. 파멸의 카운트다운과 남원으로 향하는 차바퀴
청운각의 무거운 미닫이문이 닫히고, 강태석은 비틀거리며 요정 복도를 빠져나왔다.
밤하늘에는 먹구름이 낮게 깔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음산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중앙 정계의 거물들이 요구하는 것은 명확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남원의 모든 흔적을 피로 지우라는 것.
만약 실패한다면 성재환의 법적 칼날에 목이 베이기 전에, 김문현과 중앙 권력의 손에 의해 먼저 버려진 사냥개 꼴이 될 것이 자명했다.
관용차로 돌아온 강태석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시, 시장님. 남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원지청과 서울지검 수사관들이 시청 비서실과 도시개발과, 그리고 동서개발 조상태 대표의 사무실까지 전면 압수수색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상태 그 머저리 같은 놈은 어디 있어!"
강태석이 고함을 질렀다.
차량 내부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서개발 경리 장부를 챙겨서 급히 피신했다고는 하는데… 차명 계좌 원장 일부가 이미 검찰에 압수된 것 같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강태석은 주먹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앞뒤로 사면초가였다.
중앙의 거물들은 자신을 협박하며 증거 인멸을 명령하고 있었고, 남원에서는 성재환이라는 맹수가 자신의 숨통을 향해 특수수사의 이빨을 박아 넣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합법의 탈을 쓴 행정 지도니, 세무조사니 하는 우아한 수단은 이제 끝났다.
오직 삼거리 김밥집 주방 흙벽 속에 숨겨져 있다는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 그리고 1991년 환지 처분 대장과 관련된 모든 증거를 통째로 불태워 없애야만 했다.
그것만이 성호석의 아들과 한석규의 딸을 동시에 무덤으로 보내고, 중앙의 묵인 아래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남원으로 차 돌려."
강태석의 입술 사이로 서슬 퍼런 살기가 배어 나왔다.
"네? 지금 바로 내려가시겠습니까? 장거리 야간 운전은…."
"당장 차 돌리라고, 이 새끼야!"
강태석의 서슬에 질린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검은색 대형 세단 로얄 살롱은 혜화동 어둠을 가르며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응시하며 강태석은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둔 시청 금고 열쇠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성재환… 네놈이 감히 아비의 죄를 덮겠다고 내 목을 조르러 와?'
강태석의 입가에 광기 어린 조소가 걸렸다.
'좋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꾸나. 네놈의 그 고결한 법복이 남원의 흙탕물 속에서 어떻게 찢겨 나가는지 내 똑똑히 보여주마.'
5. 빗속의 맹세와 다가오는 폭풍
같은 시각,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처마 밑.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팽팽한 살기는 검찰 호송차들이 떠나간 뒤 기묘한 고요 속으로 잦아들어 있었다.
깨진 유리창을 기워 붙였던 투명 테이프 위로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가게 안쪽 간이 테이블에는 성재환이 단정하게 개어 둔 검찰 수사관 잠바를 옆에 둔 채, 지유가 내어온 따뜻한 보리차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삼베 상복 차림의 한지유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삼우제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위고 파리해진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요천의 깊은 물처럼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 위에는 3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나누었던 성재환의 반명함판 학생증 사진과, 검은 옻칠이 반짝이는 각인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만년필 캡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형광등 불빛 아래 선명한 금빛을 뿜어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토록 냉철하게 한양토건 용역들을 제압하고 영장을 집행하던 특수부 검사의 서슬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유의 상처 입은 손등과 수척한 볼을 바라보는 청년의 애통함만이 가득했다.
"내가… 너무 늦었지. 어머니 가시는 길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네가 이 모진 풍파를 다 겪는 동안 서울에 틀어박혀 책장이나 넘기고 있었어."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재환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얹었다.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3년 전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며 나누었던 푸른 노을의 온도 그대로였다.
"아니야, 재환아. 넌 약속을 지켰어.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던 그 약속,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내게 와줬잖아."
지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나긴 인내 끝에 찾아온 연대의 눈물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말씀하셨어. 절대 악귀 같은 자들에게 무릎 꿇지 말고, 아버지의 억울한 명예를 되찾으라고. 이 가게는 단순한 밥벌이 터가 아니야. 남원의 힘없는 이웃들이 기대어 살아온 삶의 증거야."
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오래된 흙벽 모퉁이, 낡은 시멘트 덧칠로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던 작은 홈에서 지유는 누렇게 변색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 유품으로 남겼던, 1968년 5월 자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및 지분 양도 이면계약서' 원본이었다.
지유가 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순간, 성재환의 시선이 계약서 하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재환의 숨이 멎었다.
계약서 맨 밑바닥, 공동 수탁인 강태석의 도장 옆에 너무도 익숙한 필체의 서명과 붉은 관인이 찍혀 있었다.
[입증 및 인허가 보증인: 남원군 농지계장 성호석(成浩錫)]
아버지.
자신에게 강태석의 비자금 내사 문건을 건네며 사법의 칼날이 되라던 부친 성호석의 이름이, 30년 전 지유의 부친 한석규를 파멸로 몰아넣은 원천 계약서에 주범의 도장으로 선명히 날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재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가슴을 찢는 듯한 참담한 충격과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지유야… 이건…."
재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재환의 떨리는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알고 있었어, 재환아. 어머니 유품을 열어본 그날부터."
"그런데 왜… 왜 나한테 숨겼어? 왜 이런 나를… 네 원수의 아들을 마주 보고 있는 거야!"
재환의 눈에서 기어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유는 단호하고 맑은 목소리로 재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죄고, 너는 너야. 넌 그 죄를 덮으러 온 게 아니라, 바로잡으러 온 거잖아. 이 만년필에 새겨진 말처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기 위해 검사가 되어 돌아온 거잖아."
지유의 한마디가 재환의 심장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재환은 눈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고통의 잔재가 사라지고, 차갑고 서슬 퍼런 사법의 결기만이 칼날처럼 벼려졌다.
그렇다.
진정한 참회와 사랑은 가문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환부를 제 손으로 도려내어 법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재환이 만년필을 쥐고 1968년 이면계약서를 가슴에 품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가게 밖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남원경찰서 순찰차와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의 승합차가 김밥집 앞을 에워쌌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울지검 수사계장이 빗속을 뚫고 뛰어 들어왔다.
"성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재환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강태석 시장이 서울 혜화동에서 여당 실세들과 긴급 회동을 마치고, 지금 고속도로를 타고 남원으로 직행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 서울지검 수뇌부로부터 특수2부에 긴급 수사 보류 및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중앙에서 영장 집행을 직권 취소하라는 압력이 내려왔습니다!"
가게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강태석이 뿌려둔 중앙 정계의 거대한 연줄이 마침내 검찰의 목줄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재환은 테이블 위의 각인 만년필을 움켜쥐며 차갑게 읊조렸다.
"수사 보류는 없다. 압수수색을 즉각 속행한다. 시장 관사와 시청 지적과 대장실 특수 금고를 오늘 밤 안에 전부 딴다."
남원의 밤하늘 위로 마침내 거대한 천둥이 울부짖으며 폭풍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