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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7화

법조인의 탄생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흑청색 선서문

 

법무부 대회의실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겁고 차가웠다.

 

단상 정면에 걸린 거대한 태극기 아래로 은빛 독수리 흉장이 박힌 짙은 남빛의 검찰 깃발이 서슬 퍼런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검은색 제복과 목깃을 빳빳하게 세운 흰색 와이셔츠 위로 신임 검사들의 긴장된 숨결이 엷은 안개처럼 감돌았다.

 

사법연수원 27기 수료식과 신임 검사 임관식.

 

그 길고 험난했던 수험의 터널과 지독했던 2년간의 연수원 과정을 최우수 성적으로 통과한 성재환(成宰桓)은 가장 앞줄 정중앙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방금 수여된 은빛 검사 배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장내에 도는 침묵은 숨이 막힐 듯 팽팽했다.

 

"신임 검사 성재환. 대표 선서."

 

사회자의 절도 있는 목소리가 장내의 적막을 엄숙하게 갈랐다.

 

재환은 구두 굽 소리 하나 허투루 내지 않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단상 위에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그리고 대검찰청과 서울지검의 실세 간부들이 일제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어렸다.

 

중앙 정계의 거물로 군림하며 차기 장관직을 넘보고 있는 내무부 차관 성호석의 장남이라는 화려한 배경, 그리고 연수원 전 과정을 수석으로 돌파하며 교수진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던 괴물 신인을 향한 호기심과 은밀한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재환은 그들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오른손을 귀 높이로 곧게 쳐들었다.

 

수련 기간 내내 밤을 새워 쥔 펜대와 수험서 때문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그의 손끝이 창백하리만치 희게 빛났다.

 

단전에 모인 서늘한 기운이 그의 성대를 타고 터져 나왔다.

 

"선서.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한 음절, 한 단어가 대회의실의 높은 대리석 천장을 때리며 묵직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관례처럼 읊어대는 의전용 낭독이 아니었다.

 

남원의 피눈물 나는 골목길에서, 깨진 유리창을 투명 박스 테이프로 기워 붙이며 홀로 버텨낸 한지유에게 바치는 처절한 속죄의 고백이자, 썩은 권력을 향해 던지는 선전포고였다.

 

재환은 품속 양복 안주머니를 은밀히 짚었다.

 

그곳에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심장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빛 닙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리고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마지막 동전을 털어 사주었던, 이제는 바닥을 드러내 말라붙은 그 흑청색 잉크의 냄새가 옷감 너머로 번져오는 듯했다.

 

선서문 종이를 쥔 손가락 끝에 핏줄이 곤두섰다.

 

'지유야. 마침내 내가 법의 칼을 쥐었다.'

 

신림동 9동 비탈길 꼭대기 세 평 단칸방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컴퍼스로 찔러대던 수많은 밤들.

 

살갗을 뚫고 흐르던 피를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이 은빛 배지와 합법적으로 거악의 목을 벨 수 있는 검사의 기소독점권 때문이었다.

 

임관식이 끝나자 장내에는 우레와 같은 축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화사한 꽃다발을 든 동기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로비로 쏟아져 들어오며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그러나 부모도, 친척도 부르지 않은 재환의 곁으로 다가오는 인영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완벽하게 풀을 먹인 이탈리아제 고급 양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 성호석 차관의 비서실장이었다.

 

비서실장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용히 다가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임관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성 검사님."

 

그의 목소리에는 권력자의 최측근다운 은근한 오만함과 도련님을 향한 계산된 예우가 섞여 있었다.

 

"차관님께서 오늘 저녁 성북동 사저에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님과 법무부 검찰국장님을 모시고 축하 만찬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재환은 장갑을 벗어 쥐며 차가운 눈빛으로 비서실장을 응시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눈매에 비서실장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비서실장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법무부 검찰국이나 서울지검 특수1부 보직도 차관님께서 이미 수뇌부와 조율을 마치셨습니다. 검사로서 첫 단추를 가장 화려하게 꿸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오늘 밤에는 집안 어른들의 배려를 거스르지 마시고 사저로 들어오시지요."

 

재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라 얼음장 같은 조소였다.

 

성호석이 베푸는 호의의 본질을 재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정권의 가장 충실한 사냥개로 길들여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남원에서 저지른 과거의 추악한 환지 비리를 영구히 덮기 위한 족쇄였다.

 

"차관님께 전하십시오."

 

재환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공무로 바빠 사적인 만찬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비서실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예? 검사님, 차관님께서 정계와 검찰 수뇌부의 핵심 인사들을 직접 부르신 자리입니다! 게다가 신임 검사의 첫 발령지는 평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법인데, 차관님의 뜻을 거역하시면……."

 

"제 발령은 법무부 인사위원회의 공적인 절차에 따를 뿐입니다."

 

재환은 말을 자르고 비서실장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내무부 차관의 사적 권력이 검찰의 인사권에 개입하는 것은 직권남용에 해당합니다. 전하십시오. 두 번 다시 이런 불미스러운 접촉을 시도하지 마시라고."

 

"성 검사님!"

 

비서실장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등 뒤에 남았지만, 재환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검은 제복의 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단단한 등을 감쌌다.

 

권력의 온실에서 자라난 화초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 거악을 물어뜯는 검찰의 사냥개가 되겠다는 결연한 선언이었다.

 

2. 서초동 1142호, 특수2부의 사냥개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1142호 검사실.

 

서초동 검찰청사 본관 서편 복도 끝,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그곳은 대한민국 권력형 비리와 정관계 게이트의 심장을 도려내는 최정예 특수통들의 요새였다.

 

두꺼운 철제 방화문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캐비닛 철문 소리와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복사기 소음, 그리고 진득하게 찌든 담배 연기가 복도 바닥까지 낮게 깔려 있었다.

 

"쾅!"

 

육중한 서류 뭉치가 낡은 철제 책상 위에 사정없이 내리꽂히며 둔탁한 파열음을 일으켰다.

 

종이 먼지가 방 안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따위 쓰레기를 수사 보고서라고 들고 와? 자금 추적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잖아! 금감원에서 넘어온 50억 원짜리 무기명 CD(양도성예금증서) 추적이 여기서 왜 끊겨? 차명 계좌 실소유주 명단 다시 따오라고 했잖아!"

 

특수2부를 이끄는 강인철(姜寅徹) 부장검사의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면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턱밑이 거뭇거뭇한 강인철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수사관들을 사정없이 쏘아보고 있었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는 삐뚤어져 있었고,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에는 굵은 핏줄이 성난 뱀처럼 솟아 있었다.

 

그는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야를 막론해 재벌과 권력 실세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 '서초동 미친개'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검찰 내 전설적인 특수통 칼잡이였다.

 

공포에 질린 계장들과 실무관들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1142호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복도 공기와 함께 성재환이 걸어 들어왔다.

 

양손에는 조금의 구김도 없이 정갈하게 정돈된 인사발령 통지서와 배당 사건 기록철이 들려 있었다.

 

소음으로 가득 찼던 집무실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에 휩싸였다.

 

강인철이 거칠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발이 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재환의 단정한 얼굴과 가슴에 박힌 검사 배지, 그리고 티끌 하나 없는 제복을 훑어 내렸다.

 

"네놈이 그 성호석 아들이냐?"

 

인사도, 형식적인 환영도 없는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집무실에 흩어져 있던 선배 검사들과 수사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환에게 집중되었다.

 

실내의 기압이 급격히 내려앉았다.

 

강인철은 피우던 담배꽁초를 유리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며 비릿한 실소를 흘렸다.

 

"사법연수원 전 과정 수석에, 학술상까지 독식하고 서울지검 특수부를 1지망으로 썼다지? 네 애비가 내무부에서 대선 자금 떡고물 만지작거리는 실세 차관인데, 그 잘난 성골 도련님께서 왜 이런 시궁창에 기어들어 왔어? 편하게 법무부 검찰국이나 기획조정실 가서 에어컨 바람 쐬며 엘리트 코스나 밟지 그러셨나."

 

뼈를 깎아내는 듯한 독설과 모욕이었다.

 

어지간한 초임 검사라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며 목소리를 높였을 터였다.

 

그러나 재환의 눈동자는 거대한 빙하 아래 가라앉은 심연처럼 고요했다.

 

눈꺼풀 하나 파르르 떨리지 않았다.

 

재환은 일정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강인철의 어지러운 책상 모서리에 발령 통지서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내려놓았다.

 

"신임 검사 성재환, 서울지검 특수2부 배속을 명받았습니다."

 

"대답이 빗나갔잖아, 이 자식아."

 

강인철이 상체를 불쑥 앞으로 기울이며 으르렁거렸다.

 

담배 찌든 내와 며칠 묵은 땀 냄새가 훅 풍겨왔다.

 

"왜 왔냐고 물었다. 네 애비가 뒤를 봐주는 꽃길을 걷어차고, 매일 밤 코피 터지며 사기꾼 깡패 새끼들이랑 뒹굴어야 하는 이 개잡부 소굴에 왜 기어들어 왔냐고."

 

재환은 부장검사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꿰뚫어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집무실 구석구석까지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썩은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칼을 잡았습니다."

 

"뭐?"

 

"그 환부가 권력의 정점이든, 부패한 재벌이든, 설령 제 살붙이라 할지라도 주저 없이 베어내기 위해 왔습니다. 칼을 쥐는 자가 피를 두려워한다면 검사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순간, 강인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한 객기나 갓 법전을 덮은 서생의 치기 어린 정의감이 아니었다.

 

재환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거대하고 처절한 상흔과, 그 상흔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 서슬 퍼런 사법적 결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반드시 파멸시켜야 할 대상을 위해 목숨을 건 자만이 품을 수 있는 독기였다.

 

강인철은 잠시 재환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헛웃음을 훅 내뱉었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로군. 제 살붙이라도 베겠다? 좋아. 네놈의 그 서슬 퍼런 칼날이 진짜인지, 아니면 주둥이로만 썰어대는 녹슨 쇠꼬챙이인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고."

 

강인철은 발밑 캐비닛 서랍을 발로 차듯 열어 먼지가 뽀얗게 쌓인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재환의 가슴팍을 향해 거칠게 내던졌다.

 

서류철 모서리가 묵직하게 가슴을 때렸다.

 

표지에는 붉은색 고무인으로 '극비(極秘) - 한림건설 비자금 및 건교부·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수도권 신도시 기반 공사를 독점한 한림건설이 비자금 200억을 조성해 여당 중진들과 건설교통부 고위직들에게 뿌렸다. 시중은행과 사채 시장을 넘나들며 쪼개진 차명 계좌만 80개가 넘어. 금감원 놈들도 6개월째 손을 놓고 있고, 우리 부 3년 차 검사 놈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자빠진 사건이다."

 

강인철이 턱을 치켜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3일 준다. 200억의 최종 종착지와 자금 세탁 구조도를 완벽하게 그려 와. 계좌 하나라도 구멍이 나거나 법리 구성이 허술하면, 짐 싸서 네 발로 기어 나가 공판부 잡범 사건이나 처리해라. 알겠나?"

 

재환은 가슴에 닿은 묵직한 서류철을 두 손으로 단단히 받아냈다.

 

그는 서류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지도 않은 채 강인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부장님."

 

"……뭐?"

 

강인철뿐만 아니라 문가에 서 있던 수사관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3일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방대한 금융 기록이었다.

 

그런데 초임 검사가 이틀을 부른 것이다.

 

강인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재환을 노려보았다.

 

"네 입으로 이틀이라고 했다. 모레 아침 8시까지 내 책상에 완벽한 계통도가 올라오지 않으면, 네 애비 얼굴에 먹칠하고 즉시 쫓겨날 줄 알아라."

 

"모레 아침에 뵙겠습니다."

 

재환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서류철을 품에 안고 뒤돌아섰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3. 200억의 실타래를 찢다

 

이틀 동안 재환의 검사실 불은 단 1초도 꺼지지 않았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바닥과 보조 테이블, 심지어 소파 위까지 수천 장에 달하는 금융 전표, 마이크로필름 인쇄본, 은행 거래 원장, 그리고 약속어음 배서 사본들이 빼곡하게 널려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지독하게 얽혀 있는 다단계 돈세탁의 그물망.

 

한림건설의 법인 계좌에서 인출된 비자금 200억은 그대로 정치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유령 페이퍼 컴퍼니 세 곳을 거쳐 세금계산서를 허위로 발행하고, 명동 사채 시장의 전주들을 통해 당일 결제 수표로 세탁된 뒤, 다시 건교부 공무원들과 국회의원들의 처가, 사돈, 운전기사 명의로 개설된 80여 개의 차명 계좌로 잘게 쪼개져 분산 입금되어 있었다.

 

다른 검사들이라면 몇 주를 매달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을 복잡한 구조였다.

 

하지만 재환에게 이 구조는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익숙했다.

 

남원에서 강태석이 춘향 테마랜드 종합정비사업비 180억 중 40억 원의 공사비를 횡령할 때 썼던 수법.

 

처남 조상태의 동서개발을 앞세우고 세창물산과 호남엔지니어링이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자재비를 부풀린 뒤, 남원상호신용금고의 차명 계좌 12개로 분산 은닉했던 바로 그 토건 비리의 뼈대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규모만 커졌을 뿐이다. 토건 자본이 권력의 비호 아래 세금을 훔쳐내는 수법은 본질적으로 같다.'

 

재환은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책상 위에 거대한 백지를 펼쳤다.

 

양복 상의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고,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에는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형광펜과 각인 만년필을 번갈아 쥐며 자금의 흐름을 쫓아갔다.

 

금융실명제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입금과 출금 시각을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0.1초 단위의 전산 타임스탬프를 대조하고, 수표 뒷면에 흐릿하게 찍힌 배서인의 도장들을 확대경으로 확인했다.

 

사채업자들이 거래 장부에 은어로 기록해 둔 '상투', '꺾기', '통장치기'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나갔다.

 

재환의 손놀림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신경외과 의사의 수술도처럼 냉정하고 정교했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시야가 흐려질 때마다, 재환은 책상 모서리에 놓인 지유의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지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남원에서 지유는 쇠파이프와 포클레인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원의 오차도 없는 장부로 부패한 공무원들을 쫓아냈다. 내가 이깟 종이 쪼가리 앞에서 지칠 수는 없다.'

 

연수원 시절, 대검 중수부 출신 정종길 교수의 극찬을 받았던 그의 학술 논문 '지방자치단체 토착 비리 및 금융 세탁 법리'가 실전의 무기로 완벽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단순한 계좌 추적이 아니었다.

 

재환은 자금의 흐름 끝마다 관련 형법 조항을 쐐기처럼 박아 넣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뇌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횡령),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그리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이틀째 되던 날 밤, 동틀 녘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창문을 두드릴 무렵.

 

재환은 마침내 마지막 수표의 배서 경로를 밝혀내고 백지 위에 마지막 굵은 선을 그었다.

 

책상 위에는 가로 2미터에 달하는 완벽한 자금 세탁 계통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한림건설 비자금 200억이 사채 시장을 거쳐 여당 실세 원내총무의 동서 계좌와 건설교통부 국장의 내연녀 명의 통장으로 흘러 들어간 최종 종착지가 붉은 화살표로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어떤 일류 변호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구속영장 청구서의 골격이었다.

 

오전 7시 50분.

 

강인철 부장검사가 텁텁한 입을 다시며 어제와 똑같은 구겨진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믹스커피가 들려 있었다.

 

강인철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1142호 검사실 안으로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재환은 이미 말끔하게 면도를 마치고 흐트러짐 없는 정복 차림으로 결재판을 들고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단 한 장의 흐트러진 종이도 없이, 완벽하게 제본된 두 권의 분석 보고서와 대형 자금 흐름도가 정렬되어 있었다.

 

강인철은 믹스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재환이 내민 결재판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기던 강인철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강인철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돈이 오간 날짜와 시각, 환전 수수료율, 배서인의 위조 필적 분석, 그리고 돈을 건네받은 정관계 인사들의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을 입증하는 판례와 법리가 물샐틈없이 결합되어 있었다.

 

대검 중수부의 10년 차 베테랑 검사가 몇 달을 매달려도 뽑아내기 힘든 압도적인 완성도였다.

 

강인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특유의 삐딱한 빈정거림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걸…… 네놈 혼자서 이틀 만에 다 털었다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금융실명제를 피하기 위해 사채 시장의 당일 결제 어음을 교차 할인한 수법입니다."

 

재환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토건 세력들이 관급 공사비를 빼돌릴 때 흔히 쓰는 전형적인 우회 세탁 방식입니다. 80개 계좌 중 72개가 3단계 만에 하나의 차명 풀(Pool)로 모입니다. 최종 수취인은 건교부 주택도시국장과 여당 원내총무의 처남입니다. 입증 자료와 압수수색 대상 지번, 물건 목록까지 전부 정리해 두었습니다."

 

강인철은 서류를 내려놓고 말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꽃이 흔들렸다.

 

연기를 길게 내뿜은 강인철의 눈동자에 신임 검사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전율과 깊은 경외가 스쳐 지나갔다.

 

"진짜 괴물 새끼가 들어왔군. 연수원 놈들이 천재가 나왔다고 떠들어댄 게 허풍이 아니었어."

 

강인철은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수사관들 전부 비상 소집해! 압수수색 영장 법원에 바로 넣는다. 오늘 오후 2시, 한림건설 본사와 건교부 국장실, 원내총무 처남 사무실까지 동시에 친다!"

 

부장검사의 불호령에 집무실 전체가 벌집을 쑤신 듯 뒤흔들렸다.

 

강인철이 돌아서려는 재환의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은 남달랐다.

 

"현장 지휘는 네가 맡아, 성재환 검사. 이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네 칼로 직접 베어라."

 

"예, 부장님."

 

재환이 묵직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강인철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성 검사."

 

재환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강인철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은 눈으로 재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칼끝이 지금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 네가 왜 그렇게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드는지 난 묻지 않겠다. 하지만 하나만 명심해라. 특수부 검사의 칼은 거악을 베기 전에 제 손부터 베는 법이다. 그 칼자루를 쥔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쳐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끝까지 물어뜯어라. 네 뒤는 내가 막아줄 테니까."

 

재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고 묵직한 무언가가 용솟음쳤다.

 

부친 성호석이 베풀려던 비열한 권력의 온실과는 전혀 다른, 거친 야생에서 마주한 진짜 칼잡이의 인정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장님."

 

그날 오후 2시.

 

서울지방검찰청 서초동 청사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수십 대의 검찰 호송차와 승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아스팔트를 박차고 쏟아져 나왔다.

 

푸른 하늘 아래 번뜩이는 수사 차량들의 거대한 행렬.

 

그 행렬의 가장 맨 앞자리, 선두 지휘차의 조수석에 성재환이 꼿꼿이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빌딩 숲 너머로, 불의와 부패가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의 심장부가 보였다.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번뜩였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4. 관사의 벽면, 남원의 붉은 핀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각.

 

한림건설 본사와 건교부 국장실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 쏟아져 들어온 수십 상자의 비밀 회계장부 압류, 그리고 심야까지 이어진 피의자 신문을 마친 재환은 마침내 서초동 청사 인근의 검사 독신자 관사로 돌아왔다.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차단된 듯 지독한 적막이 방 안을 메웠다.

 

열 평 남짓한 단출한 공간.

 

가구라고는 낡은 목제 책상 하나와 삐걱거리는 싱글 침대, 그리고 제복을 걸어둘 철제 옷걸이가 전부였다.

 

내무부 차관이자 차기 정권의 실세로 불리는 성호석의 장남이 머무는 곳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하고 황량한 방이었다.

 

그것은 세속의 안락을 철저히 거부한 채 스스로를 유폐시킨 사법 수도승의 독방과도 같았다.

 

재환은 피로와 땀에 젖은 제복 상의를 벗어 걸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수돗물을 틀었다.

 

얼음장 같은 물을 거칠게 얼굴에 끼얹자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창백한 얼굴.

 

낮 동안 피의자들을 서슬 퍼렇게 몰아세우며 자백을 받아내던 냉혈한 검사의 가면 뒤로, 지독한 고독과 뼈를 깎는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환은 마른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방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형광등 스위치를 켜자, 낡은 책상 앞 하얀 콘크리트 벽면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 벽면에는 커다란 대한민국 전도(全圖)가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영남, 호남…….

 

팔도의 수많은 도시와 군, 면이 촘촘한 활자로 인쇄된 그 거대한 지도 위에서, 유독 단 한 곳만이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지리산 자락 아래 요천의 푸른 물줄기가 가늘게 굽이치는 그 작은 분지 한가운데.

 

선혈처럼 붉은 플라스틱 핀 하나가 벽지 속 콘크리트까지 뚫어버릴 듯 깊숙하게 내리꽂혀 있었다.

 

지도 위의 수많은 지명 중 오직 그곳에만 박혀 있는 붉은 표식.

 

그것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었다.

 

재환의 영혼과 심장이 박혀 있는 곳이자, 그가 특수부의 칼을 갈아 반드시 돌아가 모든 죄악을 도려내야 할 숙명의 좌표였다.

 

재환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가락이 남원 위에 꽂힌 차가운 붉은 핀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플라스틱의 서늘한 감촉 너머로, 벚꽃 잎이 분분히 흩날리던 광한루원의 봄날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완월정 처마 끝에 스치던 바람 소리, 오작교 돌다리 위에서 수줍게 마주치던 지유의 맑은 눈망울.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떠나기 전, 광한루원 팽나무 그늘 아래서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넸던 그 반명함판 사진.

 

그리고 남원역 플랫폼에서 피 흘리는 무릎으로 덜컹거리는 기차를 쫓아 달려오며 울부짖던 지유의 처절한 얼굴이 망막에 선명히 박혀 떠나지 않았다.

 

"지유야……."

 

혼자만의 방 안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재환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을 열었다.

 

자물쇠를 돌려 낡은 오동나무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정갈하게 네모나게 접힌 하얀 면 손수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처마 밑에서 지유가 자신의 뺨에 흐르던 차가운 빗물을 닦아주었던 그 온기의 손수건이었다.

 

그 곁에는 지유가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자신의 뒷모습과 광한루원 팽나무를 연필로 꾹꾹 눌러 그렸던 작은 스케치북 조각이 소중히 놓여 있었다.

 

종이의 네 모서리는 서울로 올라오던 통일호 열차 안에서부터 신림동 고시촌의 밤들까지, 재환이 수없이 어루만진 탓에 닳고 닳아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떨리는 연필 선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단칸방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법전을 파고들 때도, 사법연수원에서 수백 장의 모의 수사 기록을 분석하며 한계를 시험할 때도,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지유라는 존재 하나뿐이었다.

 

최민재가 목숨을 걸고 전해주었던 남원의 참혹한 소식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대입 원서를 스스로 찢어버리고 새벽 청소 노동으로 내몰렸던 지유의 눈물.

 

강태석 일파가 자행한 위생과와 소방과의 비열한 표적 단속.

 

심야에 들이닥친 쇠파이프 테러와 붉은 페인트 낙서.

 

어머니의 비극적인 임종 앞에서 영안실을 봉쇄하겠다며 협박하던 조폭들의 패륜.

 

그리고 기어이 포클레인을 끌고 와 김밥집을 통째로 밀어버리려 했던 그 잔혹한 야간 철거 공작까지…….

 

그 모든 폭압의 칼날 속에서 지유는 홀로 피를 흘리며 자리를 지켜냈다.

 

손등이 찢어지는 부상 속에서도 투명 박스 테이프로 깨진 유리창을 기워 붙였고, 1원의 오차도 없는 장부를 내밀어 부패한 세무 공무원들의 목을 죄어 쫓아냈다.

 

그리고 아비 한석규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목숨보다 소중한 1968년의 토지 이면계약서를 품에 안은 채 홀로 거대한 악의 카르텔에 맞서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줘. 내 칼이 거의 다 벼려졌어.'

 

재환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검은 옻칠 위로 금빛 닙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는 만년필의 잉크 통을 돌려보았다.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그 맑고 깊은 흑청색 잉크는 이제 완전히 바닥나, 닙의 미세한 홈 사이에만 마른 흔적으로 굳어 있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백지 한 장을 펼쳤다.

 

말라붙은 닙을 종이 위에 대고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서걱, 서걱거리는 날카로운 쇠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닙 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마른 잉크 가루가 종이의 결을 찢으며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획을 새겨 넣었다.

 

'남원의 모든 부패를 베어낼 칼을 벼리고 있다. 네가 피로 지켜낸 그 자리로, 내가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간다.'

 

재환의 눈빛에 다시금 서릿발 같은 냉기와 광기가 어렸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대형 정관계 비리의 숨통을 끊어놓는 이 시간은 단순한 출세의 사다리가 아니었다.

 

남원을 집어삼키고 있는 강태석의 폭압적인 토건 카르텔, 그리고 그 배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며 괴물을 키워낸 제 아비 성호석의 목줄을 완벽하게 끊어놓기 위한 가장 치명적인 사냥의 기술을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벽면에 박힌 붉은 핀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핏빛으로 번뜩였다.

 

맹세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자비 없는 사법의 심판뿐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