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의 춘향 테마랜드 비리
1. 요천각의 비밀 장부
남원 시내를 굽어보는 요천 변의 유서 깊은 요정 요천각(蓼川閣) 난초실에는 초가을의 눅진한 밤공기 대신 에어컨 냉기와 시가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옻칠을 한 커다란 자개상 위에는 쇠고기 육사시미와 최고급 양주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상석에는 남원시장 강태석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삼거리 토건의 오랜 하청 업체이자 최근 남원 일대 관급 공사를 싹쓸이하고 있는 동서개발 대표 조상태가 깍듯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조상태는 다름 아닌 강태석의 처남으로, 강태석이 어둠의 세계에서 토건 주먹으로 군림하던 시절부터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온 심복이었다.
강태석은 얼음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그래서, 도청 관광개발과에서 내려보낸 예산 배정 공문은 확실히 손을 탔단 말이지?"
조상태가 양손으로 비단 표지의 서류철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매형. 아니, 시장님. 도청에는 남원 춘향 테마랜드 전통문화단지 조성 공사비로 총사업비 백팔십억 원을 승인받았습니다. 기존의 노후된 어사또 테마관과 춘향전 야외무대 보수, 그리고 인공폭포 부지 정비까지 몽땅 하나로 묶었습니다. 일반 경쟁입찰로 공고를 내되, 남원 지역에 본사를 둔 종합건설 면허 업체로 실적 기준을 까다롭게 걸어두었으니 관내에서는 저희 컨소시엄 말고는 단 한 군데도 입찰 서류조차 못 냅니다."
강태석이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뒤 허공으로 푸른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내가 묻는 건 겉포장이 아니다, 상태야. 실제로 내 손에 쥐어지는 현찰이 얼마냐는 거야. 선거 치르며 빚진 놈들 입막음해야 하고, 내무부랑 도청 줄 대는 데 들어갈 기름값이 한두 푼인 줄 알아?"
조상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상체 전체를 바짝 수그렸다.
"본 공사는 총액 백팔십억 중 저희 동서개발이 백이십억에 단독 낙찰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실제로 공사를 진행할 하도급은 평당 단가를 삼분의 일로 후려쳐서 광주 쪽 영세 토공 업체에 털어 넘길 겁니다. 그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액 육십억 원이 돕니다. 그중 사십억은 제가 지난달에 페이퍼 컴퍼니로 설립해 둔 세창물산과 호남엔지니어링 명의로 자재 납품비와 설계 감리 용역비로 빼돌릴 겁니다. 세창물산 명의로 남원상호신용금고에 차명 계좌 열두 개를 이미 분산 개설해 두었습니다. 어음 할인 형식으로 세탁해서 매달 오억씩 현금 다발과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로 시장님 관사 특수 금고에 차곡차곡 넣어 드리겠습니다."
강태석의 두툼한 입술 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호남엔지니어링 대표 명의는 누구 걸로 돌려놨어?"
"제 외사촌 동생 명의입니다. 평생 면서기 하다가 퇴직한 놈이라 군소리 하나 못 하고 도장만 찍어주는 놈입니다. 장부상으로는 특허받은 방수 암반 공법과 전통 한옥 목재를 최고급 육송으로 직수입해 납품한 것으로 꾸며두었습니다. 도 감사나 감사원 감사가 나와도 현장에 콘크리트만 두껍게 치고 겉에 흙손질만 그럴듯하게 발라놓으면 속을 파보지 않는 한 귀신도 모릅니다."
강태석은 자개상 위에 놓인 세창물산의 거래 내역 장부와 차명 통장 사본을 굵은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남원 시내를 발아래 두고 주무르는 권력의 맛이 그의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독선과 불안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 남원의료원 지하 영안실에서 있었던 굴욕적인 광경이 떠오른 탓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삼베 상복을 입고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한지유의 얼굴.
그 가녀린 손에 들려 있던 내무부 극비 비자금 내사 문건과, 30년 전 자신의 모가지에 밧줄을 걸 수 있는 1968년 한석규와의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의 그림자.
강태석은 쥐고 있던 유리잔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상태야."
"예, 시장님."
"춘향 테마랜드 공사로 들어오는 비자금 사십억은 내년 봄 서울 중앙 정계 라인을 새로 까는 총알로 쓴다. 그놈의 성호석이가 내무부에서 기고만장하게 날뛰며 아직도 날 하수인 취급하려 드는데, 그 영감탱이 숨통을 끊어놓으려면 나도 독자적인 실탄이 넉넉해야 해. 그리고 또 하나."
강태석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삼거리 김밥집, 그 당돌한 계집애 말이다."
조상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한석규 딸년 말씀이십니까? 장례식장에서 시장님께 감히 방명록을 던지고 대들었다는 그년 말입니다."
"그 계집애가 들고 있는 서류가 보통 물건이 아니야. 섣불리 칼잡이들을 보냈다가는 그 서류가 어디로 튈지 몰라.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내무부 감사관실이나 검찰 특수부가 냄새를 맡고 들이닥칠 위험이 있어."
강태석은 시가 연기를 천장으로 뿜어내며 잔인한 냉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내가 아주 합법적이고 숨 막히는 올가미를 하나 준비했다. 내일 아침 남원세무서 조사과장에게 직접 전화를 넣어라."
"세무서 말입니까?"
"그깟 손바닥만 한 김밥집이 무슨 세금 장부를 제대로 썼겠느냐? 무자료 식자재 거래, 현금 매출 누락, 탈세 제보 접수를 핑계로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을 삼거리 김밥집에 들이닥치게 해라. 가게에 있는 영수증, 간이장부, 종이쪽지 하나까지 싹 다 압수수색해서 탈탈 털어버리라고 해. 세무서 놈들이 장부를 턴다는 구실로 가게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면, 그년이 카운터 밑바닥이든 벽지 틈이든 숨겨둔 아버지 서류 원본을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조상태가 감탄 어린 표정으로 무릎을 탁 쳤다.
"과연 시장님이십니다! 세무조사로 장부를 털며 서류를 합법적으로 압수해 오고, 덤으로 수천만 원짜리 세금 폭탄까지 때려버리면 그년은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이번엔 피를 흘릴 필요도 없다. 법과 행정의 몽둥이로 뼈를 으스러뜨려 놓는 거다. 그년 손에서 서류만 빼앗아 불태워버리면, 그땐 삼거리 일대를 포클레인으로 통째로 밀어버려도 아무도 찍소리 못 해."
요천각 방 안에는 두 남자의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웃음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2. 어둠 속의 기록자
요천각의 높은 담장 밖, 요천 변을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 고목 뒤편 짙은 어둠 속에 한 청년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야전점퍼를 걸친 최민재였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양토건 괴한들에게 각목으로 무참히 난타당했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부근에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민재는 턱을 굳게 다문 채 고통을 짓씹으며 오른손에 쥔 소형 일제 망원경을 요천각 2층 난초실 창문으로 바짝 들이댔다.
살짝 젖혀진 커튼 틈새로 강태석과 조상태의 모습이 뚜렷하게 잡혔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들, 그리고 붉은색 결재 도장이 찍히는 순간들이 민재의 눈동자에 날카롭게 각인되었다.
민재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낡은 취재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민재의 손가락은 익숙하게 수첩 위에 글자를 꾹꾹 눌러 새겼다.
'1996년 9월 3일 22시 40분.
요천각 난초실.
강태석 남원시장 및 동서개발 조상태 회동.
테이블 위 서류: 춘향 테마랜드 종합정비사업 세부 내역서, 세창물산 명의 남원상호신용금고 계좌 목록 확인.'
민재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남원일보사에서 부당하게 쫓겨나기 전, 편집국 윤전실 캐비닛 깊은 곳에서 몰래 필사했던 관급 공사 서류들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하나로 꿰어맞춰졌다.
남원시가 도비와 시비를 합쳐 백팔십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춘향 테마랜드 리모델링 사업.
그 핵심 공사가 일반 경쟁입찰의 탈을 쓴 채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운영하는 동서개발로 내정되었고, 그 뒤편에서 세창물산이라는 유령 회사를 통해 막대한 공사비가 비자금으로 빼돌려지고 있었다.
'친인척을 내세운 페이퍼 컴퍼니와 차명 계좌 세탁…….'
민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수첩장을 넘겼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성재환이 남겨주었던 그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민재야, 토건 깡패들이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관급 공사의 흙과 시멘트에 손을 댄다.
지자체 발주 공사의 하도급 단계와 자재 납품 회사를 파고들어야 해.
거기에 저놈들의 목을 벨 치명적인 자금줄이 숨어 있다.'
재환의 예측은 단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강태석은 시장이라는 공적 권력을 이용해 남원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 사업마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거대한 돈세탁 기계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그때, 요천각 방 안에서 조상태가 붉은색 플라스틱 서류 가방을 열어 강태석에게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추가로 넘겨주는 모습이 보였다.
가방 옆면에 선명하게 박힌 글자.
'남원세무서 세원관리과.'
민재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강태석이 서류를 넘겨받으며 조상태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모습이 망원경 렌즈 너머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강태석의 입모양이 또렷하게 읽혔다.
'김밥집…… 싹 다 털어.'
민재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세무서? 저 악귀 같은 놈들이 지유의 가게에 세무조사를 붙이려는 건가?'
어머니의 삼우제를 갓 마치고 아직 피눈물도 마르지 않은 지유였다.
그런 지유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이번에는 조폭의 각목이 아니라 국가의 공권력인 세무서의 칼날을 들이밀려는 것이었다.
순간 요천각 현관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담배를 피우러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어이, 저기 버드나무 밑에 누구 있는 거 아니야?"
자갈을 밟는 거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손전등 불빛이 수양버들 가지를 사납게 훑기 시작했다.
민재는 재빨리 취재 수첩을 품속 깊이 찔러 넣고 몸을 낮추었다.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이 비명처럼 치밀어 올랐지만, 민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어두운 요천 둑길 비탈을 따라 기어가듯 빠져나갔다.
손전등 불빛이 허공을 가르는 사이, 민재는 자전거를 숨겨둔 갈대숲으로 몸을 던졌다.
'지유에게 알려야 해.
그리고 신림동의 재환이 형에게도 이 추악한 자금 흐름과 세무서의 음모를 반드시 전해야 한다.'
민재는 피 묻은 붕대를 고쳐 매며 페달을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전거 체인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3. 새벽의 도마 소리
남원 동문 우체국 안쪽 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새벽은 언제나처럼 정직하고 서늘한 소리로 밝아오고 있었다.
타악,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도마를 울리는 칼질 소리가 텅 빈 골목의 고요를 깨뜨렸다.
가게 전면의 통유리창은 지난번 쇠파이프 습격으로 거미줄처럼 박살 난 자리에 투명 박스 테이프가 'X' 자로 촘촘하게 덧발라져 있었다.
그 흉터 같은 유리창 너머로, 하얀 소복 위에 낡은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의 야윈 모습이 비쳤다.
지유는 밤새 불려둔 쌀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섞어 주걱으로 정갈하게 식히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강조하던 그 방식 그대로였다.
'지유야, 밥은 거짓말을 안 헌다.
세상이 아무리 흙탕물이어도 우리가 마는 김밥 한 줄에는 티끌 하나 들어가선 안 되는 법이여.'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지유는 소매로 눈가를 훔쳐내며 턱을 바짝 치켜올렸다.
어머니를 선산에 묻고 돌아온 지 고작 사흘째였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가게, 그리고 카운터 밑바닥과 벽지 틈새에 숨겨진 아버지 한석규의 억울한 죽음과 30년 전 이면계약서를 지켜내려면 지유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말아야 했다.
조리대 한구석에는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검푸른 얼룩이 번져 있던 자리가 깨끗이 닦여 있었다.
강태석이 내던져 산산조각 났던 흑청색 잉크병의 파편들은 지유가 정성스레 수습해 작은 양철 상자 속, 재환의 학생증 사진 곁에 고이 묻어두었다.
비록 잉크병은 깨졌지만, 그 깊고 푸른 빛은 지유의 심장 속에 더 짙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달그락.
가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유가 식칼을 쥔 채 날카롭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지유야…… 헉, 헉…… 나다."
문턱을 넘어선 사람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최민재였다.
머리의 붕대는 땀과 피로 누렇게 배어 있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지유는 깜짝 놀라 칼을 내려놓고 민재에게 달려갔다.
"민재야! 너 몸도 성치 않은 애가 이 새벽에 어떻게 된 거야? 병원에 누워 있으랬더니 왜 또 이러고 돌아다녀!"
민재는 지유의 부축을 받으며 간이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흙먼지가 묻은 야전점퍼 안주머니를 뒤져 볼펜 자국이 빼곡한 취재 수첩을 꺼내 지유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유야…… 들을 시간 없어. 숨 쉴 틈도 없다고. 강태석 그 개자식이…… 이번엔 세무서를 움직였다."
지유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세무서?"
"조금 전 요천각에서 강태석이랑 동서개발 조상태가 밀담을 나누는 걸 내가 직접 보고 적어왔어. 그놈들이 춘향 테마랜드 공사비 백팔십억 중에서 사십억을 유령 회사로 빼돌려 비자금을 만들고 있어. 남원상호신용금고에 차명 계좌까지 열두 개나 파놓고 돈세탁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 돈으로 서울에 줄을 대는 것과 동시에, 널 짓밟으려고 남원세무서에 지시를 내렸어."
민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지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오늘 아침이야. 아침 아홉 시가 되자마자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이 네 가게로 들이닥칠 거다. 무자료 거래니 탈세니 하는 명목을 붙여서 가게 장부랑 영수증을 몽땅 압수수색하겠다고 덤벼들 거야. 하지만 진짜 목적은 탈세 조사가 아니야. 세무조사를 핑계로 이 가게 바닥과 벽을 샅샅이 뜯어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1968년 이면계약서 원본이랑 내무부 내사 문건을 강탈하려는 속셈이야!"
지유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공포나 당혹감 대신, 맹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서슬 퍼런 냉기가 지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유는 조용히 카운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삐걱거리는 낡은 마룻바닥 밑,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속에 보관되어 있던 낡은 서류철.
강태석이 왜 그토록 이 손바닥만 한 김밥집에 집착하는지, 왜 합법의 탈을 쓴 공권력의 칼날을 끊임없이 들이미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 서류야말로 강태석의 목줄을 단번에 끊어버릴 단두대이기 때문이었다.
"그자들이…… 내 어머니의 영결식 흙도 마르기 전에, 이제는 세무서 완장을 차고 도둑질을 하러 오겠다는 거구나."
지유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민재가 다급하게 지유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유야, 일단 서류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해. 내 자전거에 실어서 광주에 있는 아는 선배 신문사나, 아니면 서울 신림동 재환이 형한테 당장 특송으로 부치자. 여기 뒀다간 공무원 놈들이 영장 들고 들이닥쳤을 때 빼앗겨!"
그러나 지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민재야. 서류를 밖으로 빼돌리다 길거리에서 강태석의 조폭들에게 가로채이면 그땐 끝장이야. 그리고 이 서류는…… 내가 재환이에게 직접 두 손으로 건네주기로 어머니 영전 앞에서 맹세했어."
지유는 단호한 동작으로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벽 모퉁이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낡은 쌀독과 소금 자루를 걷어냈다.
그 뒤편, 1970년대 지어진 흙벽의 미장 틈새 안쪽 깊숙한 곳에는 사람 손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비밀 홈이 파여 있었다.
지유는 품속에서 비닐로 꽁꽁 싸맨 1968년 이면계약서 원본과 내무부 내사 문건 사본을 꺼냈다.
그리고 그 깊은 어둠 속에 서류를 밀어 넣은 뒤, 흙벽과 똑같은 색깔의 회반죽 판자로 입구를 완벽하게 봉인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수십 년 된 낡은 벽면의 균열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유는 돌아선 뒤, 낡은 카운터 서랍에서 분홍색 표지의 조잡한 가계부와 영수증 모음철을 꺼내 조리대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았다.
매일 아침 공설시장에서 참기름 한 병, 당근 한 단, 계란 한 판을 사며 손글씨로 삐뚤빼뚤 적어둔 영세 상인의 소박한 가계부였다.
"올 테면 오라고 해."
지유는 다시 식칼을 쥐고 당근을 일정한 굵기로 채 썰기 시작했다.
칼날이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가 새벽 골목을 단호하게 울렸다.
"우리는 법을 어긴 적도 없고, 도둑질을 한 적도 없어. 피눈물 흘리며 장사한 이 작은 가게에서 먼지 한 톨이라도 털어낼 수 있는지, 그 썩은 공무원 놈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할 거야."
민재는 그런 지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전율을 느꼈다.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겨진 열아홉의 소녀는 이미 피해자가 아니었다.
남원의 거대한 부패 카르텔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고결하고 서슬 퍼런 투사였다.
4. 거대한 비리의 윤곽
동이 트기 시작하자 민재는 김밥집 뒷골목을 빠져나와 읍내 외곽의 낡은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더 이상 남원 시내의 우체국이나 일반 전화는 안전하지 않았다.
도청 장치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털어 넣고 익숙한 번호를 다이얼로 돌렸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 사법연수원 기숙사의 공용 수신처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차분한, 그러나 칼날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재환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밤새 긴장으로 굳어 있던 민재의 어깨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뻔했다.
"……재환이 형. 나야, 민재."
수화기 너머의 침묵이 일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재환의 호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민재냐. 몸은…… 몸은 좀 어때? 머리 다친 곳은 치료받았어?"
자신의 부상부터 염려하는 형의 목소리에 민재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 몸은 상관없어, 형. 나 멀쩡해. 뼈마디 몇 개 부러진 걸로 안 죽어. 그것보다……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민재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었다.
그리고 지난밤 요천각에서 직접 목격하고 취재한 내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태석이 남원 춘향 테마랜드 전통문화단지 조성 공사를 빌미로 거대한 비자금을 만들고 있어. 총사업비 백팔십억 중 백이십억을 처남 조상태의 동서개발에 몰아줬고, 그 밑에 세창물산이랑 호남엔지니어링이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서 사십억 원을 빼돌렸어. 남원상호신용금고에 차명 계좌 열두 개를 파서 자재 대금 허위 청구로 세탁하고 있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이 만년필로 메모를 적어 내려가는 소리였다.
재환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옥의 업화 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동서개발, 세창물산, 호남엔지니어링…… 그리고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열두 개. 관급 공사비 횡령에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업무상 배임, 금융실명제 위반, 그리고 조세포탈까지 완벽하게 걸려드는 구조다. 내가 연수원 논문에서 분석했던 지자체 토착 비리의 전형적인 자금 세탁 모델이야."
재환은 단 몇 초 만에 강태석 일파가 저지른 범죄의 법리 구성을 머릿속에 완성해 내고 있었다.
그의 서슬 퍼런 천재성과 집요함이 수화기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민재는 숨을 들이쉬며 가장 긴급한 소식을 덧붙였다.
"그리고 형…… 그게 다가 아니야. 강태석이 오늘 아침 아홉 시에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을 삼거리 김밥집으로 보낸다고 했어. 지유 가게를 탈세 혐의로 털어서, 가게 안에 숨겨진 서류들을 합법적으로 압수해 가려는 수작이야!"
탁.
수화기 너머에서 만년필이 책상 위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짧은 찰나의 정적 속에서, 민재는 재환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분노의 파동을 느꼈다.
"……어머니의 피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국가 공권력으로 지유의 목을 조르겠다?"
재환의 목소리가 짓씹히듯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결코 흥분으로 이성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운 냉혹함이 그의 목소리를 지배했다.
"지유는 지금 어때? 서류는?"
"지유가 가게 벽 깊숙한 곳에 숨겨뒀어. 벽을 통째로 부수지 않는 한 찾지 못할 거야. 지유는…… 도망치지 않겠대. 자기는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까, 세무서 놈들이 오면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당근을 썰고 있어."
재환의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를 적셨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죄책감, 그리고 지유를 향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이 그의 영혼을 난타하고 있었다.
'지유야…… 네가 홀로 그 가혹한 흙탕물 속에서 칼바람을 맞고 있구나.'
재환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민재야, 내 말 똑똑히 들어."
재환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울렸다.
"세무조사가 시작되면 너는 절대로 물리적으로 개입하지 마. 공무집행방해로 엮이면 너까지 구속된다. 너는 신문사 기자 신분을 최대한 이용해서 세무서 직원들의 관등성명, 조사 명령서의 결재 라인, 그리고 압수 목록을 낱낱이 기록해 둬. 저놈들이 절차적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위반하는 순간, 그 모든 게 훗날 직권남용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알았어, 형. 내 목숨을 걸고 기록할게."
"그리고…… 네가 불러준 춘향 테마랜드의 페이퍼 컴퍼니 명단과 남원상호신용금고 계좌 정보. 내가 지금 즉시 서울지검 특수2부 선배 검사들과 금융감독원 내사 라인에 비공식 첩보로 던져 넣겠다. 강태석이 파놓은 그 차명 계좌 열두 개가, 결국 저놈들의 무덤을 파는 삽자루가 되게 만들 거야."
재환의 맹세는 단단한 바위처럼 무거웠다.
"조금만 더 버텨줘, 민재야. 지유 곁을 지켜줘. 내 연수원 수습과 서울지검 파견 실무가 이제 마지막 고비다. 내가 법복을 입고 남원에 내려가는 날, 저 부패한 카르텔의 심장에 가장 날카로운 사법의 비수를 꽂아 넣을 테니까."
"응, 형! 믿고 있을게!"
전화가 끊겼다.
민재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멀리 요천 너머로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햇살은 따스한 축복이 아니었다.
곧 남원 시내를 피비린내 나게 뒤흔들 거대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핏빛 신호탄이었다.
5. 폭풍 전야의 골목
오전 8시 40분.
남원 동문 우체국 앞 삼거리 골목은 기이할 정도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평소 같으면 이른 아침 통학하는 학생들과 출근길 시민들이 김밥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웅성거리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골목 어귀에는 낯선 긴장감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골목 입구의 점포 상인들은 가게 문을 반쯤 닫아건 채, 불안한 눈빛으로 삼거리 김밥집 쪽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이봐, 칠기사 양반. 오늘 세무서에서 김밥집 털러 나온다는 소문 진짜요?"
철물점 최 씨가 담배를 비벼 끄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칠기사 배 씨가 혀를 끌끌 차며 주위를 살폈다.
"시청에 줄 댄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파다해. 강 시장이 그 어린 처자를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지. 어머니 삼우제 치른 지가 엊그제인데, 세무서 조사반을 보내서 가게를 통째로 털어버리겠다니……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라고."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들으면 우리 가게까지 세무조사 들어와! 시장 눈 밖에 나면 남원에서 숨도 못 쉬는 거 몰라?"
상인들은 분노하면서도 강태석의 서슬 퍼런 공권력 앞에 숨을 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민선 1기 남원을 지배하는 폭압적인 침묵의 룰이었다.
오직 구두 수선공 김 씨 아저씨만이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김밥집 앞으로 다가왔다.
김 씨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유 학생……."
김밥을 말고 있던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에 하얀 소복, 그리고 낡았지만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앞치마.
지유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만은 맑고 투명했다.
"아저씨, 아침 일찍 오셨네요."
"지유 학생…… 오늘 세무서 놈들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파다해. 가게 문 닫고 어디 친척 집이라도 피신해 있어. 그 흉악한 놈들이 오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김 씨의 투박한 손이 걱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유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김밥 한 줄을 정성스럽게 썰어 은박지에 쌌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하지만 도망치지 않아요. 제가 문을 닫고 도망치면, 저들이 파놓은 탈세범이라는 누명을 그대로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요. 저는 여기서 떳떳하게 김밥을 말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평생 그래오셨던 것처럼요."
지유는 은박지에 싼 따뜻한 김밥을 김 씨의 손에 쥐여주며 돈을 밀어냈다.
"오늘 아침은 그냥 드세요, 아저씨. 어머니 가시는 길에 따뜻한 눈물 흘려주신 은혜, 제가 평생 잊지 않을게요."
김 씨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지유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가 돌아섰다.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끼이익-!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선 차량은 회색 승합차 두 대였다.
차량 옆면에는 선명한 글씨가 박혀 있었다.
'남원세무서.'
차 문이 열리며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굳은 표정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굵은 서류 가방과 압수물 보관용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가 들려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장 한기철 계장이었다.
그는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공문서를 꺼내 들었다.
골목의 모든 시선이 숨을 멈추었다.
한기철은 박스 테이프로 기워진 김밥집 유리문을 거칠게 밀치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쾅-!
"삼거리 김밥집 대표자 한지유 씨!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에서 나왔습니다. 국세기본법 및 부가가치세법 위반 혐의로 긴급 세무조사 및 현장 장부 압수를 집행합니다!"
쩌렁쩌렁한 고함이 좁은 김밥집 안을 뒤흔들었다.
골목 구석에서 카메라를 든 최민재가 굳은 표정으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고, 조리대 앞의 지유는 천천히 칼을 내려놓으며 서슬 퍼런 눈으로 세무서 조사반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마침내, 합법의 탈을 쓴 또 다른 거대한 폭력이 삼거리 김밥집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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