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의 수석
1. 붉은 줄과 푸른 잉크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사법연수원 본관 4층 대강의실의 공기는 언제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칠판을 가르는 백묵의 건조한 마찰음과 수백 장의 법률 문서가 일제히 넘어가는 파열음만이 규칙적인 숨소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제27기 사법연수원생들.
대한민국 사법시험이라는 잔혹한 관문을 통과한 수재들이 모인 공간이었지만, 그 안의 서열 다툼은 고시촌보다 훨씬 더 살벌했다.
판사냐, 검사냐, 아니면 대형 로펌이냐.
소수점 둘째 자리의 성적으로 평생의 보직과 권력의 궤도가 갈리는 냉혹한 정글이었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의 한가운데 성재환이 앉아 있었다.
재환의 책상 위에는 두꺼운 형사소송실무와 검찰 압수수색 및 계좌추적 실무 편람, 그리고 각 지방자치단체 관급 토목 공사 입찰 비리 판례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재환의 눈빛은 칠판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펼쳐진 '모의 계좌추적 및 자금세탁 역추적 분석표'의 수많은 차명 계좌 번호에 꽂혀 있었다.
재환의 손에 쥐어진 것은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었다.
금빛 닙 상단에 새겨진 '成宰桓'이라는 한자 이름과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문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 만년필 촉 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흑청색 잉크였다.
남원에서 지유가 눈물과 고통 속에서 아껴 보내주었던, 이제는 바닥을 드러내어 투명한 유리병 모서리를 기울여 간신히 채워 넣은 깊고 푸른빛의 잉크였다.
재환은 모의 기록 속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의 흐름을 날카로운 각도로 그어 내렸다.
‘토건 면허 대여, 지분 쪼개기, 허위 공사비 증액, 그리고 관공서 인허가 라인으로 흘러 들어간 약속어음.’
기록에 적힌 가상의 지명과 인물은 겉보기엔 단순한 교재용 연습 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환의 머릿속에서는 그 가상의 숫자들이 피비린내 나는 현실의 좌표로 치환되고 있었다.
남원군 동충리와 하정리 일대 4,500평.
삼거리 김밥집의 깨진 통유리창.
어머니를 잃고 삼베 상복을 입은 채 영안실에서 홀로 상주가 되었던 지유의 눈물.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뿌리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남원시장 강태석과, 자신의 부친 성호석.
재환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지유 어머니가 남원의료원에서 숨을 거둔 지 정확히 일 년 하고도 수개월이 흘렀다.
그 억겁 같은 시간 동안 재환은 단 하루도 발을 뻗고 자지 못했다.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르던 나흘 동안은 잠을 쫓기 위해 컴퍼스로 허벅지를 찔러 피를 흘렸고, 3차 면접을 전국 최고 득점으로 통과해 연수원에 입소한 뒤에도 그의 하루는 오직 법의 칼날을 벼리는 시간으로만 채워졌다.
남원을 떠나올 때 지유의 손을 잡으며 삼켰던 맹세, 그리고 남원의료원 빈소로 민재 편에 보냈던 '검사의 법복을 입고 돌아가겠다'는 서약이 심장 한구석에서 검붉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2. 특별강의실의 표적
"거기, 4분단 세 번째 줄 성재환 군."
대강의실 맨 앞 교탁에서 서류철을 넘기던 정종길 지도교수의 메마른 음성이 강의실 전체를 갈랐다.
정종길 교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2과장을 역임하고 사법연수원으로 파견 나온, 검찰 내에서도 가장 서슬 퍼런 칼잡이로 불리는 거물 검사였다.
강의실에 앉아 있던 이백여 명의 연수원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재환에게 쏠렸다.
사법시험 전국 수석 합격자이자, 연수원 입소 첫 학기부터 형사실무와 검찰조서 작성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없는 괴물.
사교 모임이나 동기회 술자리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 오직 도서관과 기숙사만을 오가며 얼음장 같은 침묵을 유지하는 사내.
원생들 사이에서 재환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법 기계'라 불리고 있었다.
재환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감청색 정장 차림이었다.
정 교수는 안경 너머로 재환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교탁 위의 모의 형사기록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번 주 과제로 내준 지방자치단체 관급 토목 공사 특별검찰 실무 기록 말이다. 다른 원생들은 대부분 건설산업기본법 위반과 단순 뇌물공여죄로 기소유예나 불구속구공판을 올렸더군. 그런데 성재환 군, 자네의 공소장 초안은 아주 흥미로워."
정 교수가 얇은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흑청색 잉크로 빈틈없이 채워진 재환의 친필 검찰 공소장이었다.
"자네는 단순 뇌물죄가 아니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및 뇌물수수, 여기에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교사죄까지 일괄 묶어 기소했더군. 특히 지방자치단체장이 민간 건설사와 체결한 '환지 처분 이면계약'을 배임수재의 공모 공동정범으로 엮어 구속영장을 청구했어. 형사소송법상 증거 법칙의 한계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공격적인 법리 구성이야. 이유가 뭔가?"
강의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동기생들은 숨을 죽인 채 재환을 바라보았다.
지방 권력과 건설 토건 세력의 유착 구조는 실제 검찰 실무에서도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영역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재량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버리면 직권남용의 고의를 입증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이다.
재환은 시선을 떨구지 않은 채 차분하고도 서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방 토착 권력의 본질은 부패의 단일성에 있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연대성에 있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의실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단순 뇌물 수수는 꼬리에 불과합니다. 지자체장이 행정 인허가권을 무기로 영세 소상공인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토건 세력이 용역 폭력을 대행하며, 그 대가로 관급 공사를 독점해 조성한 비자금을 다시 행정 권력자의 정치 자금으로 세탁하는 구조. 이것은 개별적인 범죄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범죄 단체에 준하는 포괄일죄의 구조입니다."
정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포괄일죄라... 자네는 토건 폭력배의 쇠파이프 테러와 시장의 행정지도가 하나의 의사 합치 아래 움직였다고 보는 건가? 지자체장의 사적 지시를 입증할 결정적 물증이 없다면 법원에서 단번에 기각될 텐데."
"물증은 바닥에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재환의 음성에 서릿발 같은 힘이 실렸다.
"관급 공사의 설계변경 내역서, 지적과 대장실의 측량 원본 봉인 내역, 그리고 표적 단속을 전후해 오간 비서실의 유선 통화 기록과 차명 약속어음의 만기일입니다. 권력자가 행정의 칼날을 사유화하여 약자의 목을 조를 때, 그들은 반드시 '합법의 껍데기'를 덧씌웁니다. 검찰의 사명은 그 껍데기를 법리로 찢어 발겨 살인과 강도에 다름없는 본질을 법정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 하는 것이 검찰의 존재 이유라면, 그 칼날은 반드시 지방 토착 카르텔의 가장 깊은 심장부를 겨누어야 합니다."
강의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의 기록을 넘어선, 무언가 생생한 현실의 피비린내를 직접 겪어낸 자만이 토해낼 수 있는 서슬 퍼런 살기였다.
원생들 몇몇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 교수는 한참 동안 재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 청년의 눈빛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학문적 열정이나 출세욕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 숫돌을 품고 칼을 갈아온 자의 집요하고도 시퍼런 원한이었다.
정 교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성재환 군. 자네가 왜 연수원에 들어와서 그 흔한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전부 거절하고, 판사 임용 면담에서도 검찰 특수부만을 고집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군."
정 교수는 서류를 덮었다.
"앉게. 훌륭한 법리 전개였네."
재환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 아래로 내려간 재환의 주먹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년필 캡에 각인된 라틴어 문구가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며 통증을 일깨웠다.
'지유야, 거의 다 왔다.'
'내가 쥘 칼자루의 날이, 이제 완전히 섰다.'
3. 지도교수의 연구실
오후 강의가 모두 끝난 뒤, 연수원 복도는 흩어지는 원생들의 발소리로 분주했다.
재환은 무거운 서류 가방을 챙겨 연구동 복도를 걸었다.
연구동 3층 복도 끝, '지도교수실 정종길'이라는 문패가 걸린 방 앞에 멈춰 섰다.
노크를 세 번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장 가득 꽂힌 형사 판례집과 공소장 편철 사이로 진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가 쪽에 서서 일산 호수공원 쪽을 내려다보던 정종길 교수가 돌아섰다.
재환을 향해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성재환 군."
재환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죽 소파 모서리에 단정하게 앉았다.
정 교수는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논문 심사철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논문 표지에는 정갈한 흑청색 잉크로 쓴 제목이 박혀 있었다.
[지방자치단체 토착 비리 수사에 있어서의 금융 추적과 직권남용죄 포섭에 관한 연구 - 성재환]
"이번 사법연수원 자치학술논문 공모전에서 자네 논문이 만장일치로 최우수 학술상으로 선정되었네."
정 교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재환의 눈빛에는 동요가 없었다.
그 논문은 상을 타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강태석과 성호석, 그리고 한양토건으로 이어지는 남원의 부패 네트워크를 어떤 법리로 옭아매어 법정에 세울 것인가를 치밀하게 연구한 사법 복수의 마스터플랜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단순히 감사하다고 끝낼 문제가 아니야."
정 교수가 찻잔을 밀어놓으며 재환을 응시했다.
"이 논문, 연수원생 수준의 글이 아니더군. 대검 중수부 특수수사관들이 십 년을 구르고 굴러야 겨우 체득할 수 있는 현장의 냄새가 나. 특히 남원상호신용금고와 토건 세력 간의 자금세탁 기법,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지방 구획 정리 사업에서의 환지 조작 수법에 대한 분석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어."
정 교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치 자네가 실제로 그 지역의 썩은 내를 직접 맡으며, 현장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추적한 사람처럼 썼더군. 성재환 군, 자네 고향이 전라북도 남원이지?"
재환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계시는 성호석 실장님이... 자네 선친이시고."
비로소 본론이 나왔다.
정 교수는 검찰 내 특수통이었다.
중앙 정계와 관료들의 인맥 지도,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거래들을 누구보다 꿰뚫어 보고 있는 사내였다.
재환은 피하지 않고 정 교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선친이신 것은 맞습니다만, 제 학문과 소신은 선친의 행적과는 무관합니다."
"무관하다?"
정 교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성호석 실장이 1993년 내무부 감사로 남원시장에서 물러나 서울로 차출될 당시, 검찰 특수부 안에서도 내사 기록이 돌았었네. 삼거리 토건의 강태석과 결탁해 거액의 비자금을 만졌다는 첩보였지. 하지만 중앙 정치권의 외압으로 수사는 흐지부지 덮였고, 강태석은 보궐선거를 거쳐 민선 남원시장 자리에 올랐어. 그리고 지금 남원은 강태석의 사유지가 되었지."
정 교수는 탁자 위의 논문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자네는 지금 자네 아버지의 목을 벨 칼을 스스로 갈고 있는 건가?"
연구실 안이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벽걸이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째깍 울렸다.
재환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절대적인 단죄를 향한 서늘한 결기만이 요동치고 있었다.
"교수님."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합니다. 피를 나눈 아비라 할지라도, 약자의 삶을 짓밟고 권력을 사유화한 죄악이 있다면 사법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법복을 입으려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정 교수는 숨을 들이켰다.
패륜의 광기가 아니었다.
가문의 죄악을 제 손으로 끊어내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처절한 구도자의 눈빛이었다.
정 교수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괴물이로군. 성호석이 호랑이 새끼를 낳았어."
4. 임관의 시간표
정 교수는 서랍에서 서류철 하나를 더 꺼냈다.
그것은 대검찰청과 법무부 검찰국이 작성한 '제27기 사법연수원 검찰 임관 예정자 보직 내정안'이었다.
"자네 성적은 압도적이야. 연수원 2년 차 종합 석차 1위. 판사 임용 1순위이고, 검찰을 지망한다 해도 서울지검 특수부나 형사1부의 꽃이라 불리는 요직이 보장되어 있네. 법무부에서도 자네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성호석 실장의 뒷배까지 있으니, 서울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건 떼어놓은 당상이지."
정 교수가 펜을 들어 서류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런데 자네가 제출한 지망서를 보고 검찰국장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더군. 도대체 성재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서류에는 재환의 친필 지망지가 적혀 있었다.
[1지망: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지망: 광주고등검찰청]
[3지망: 전주지방검찰청]
수석 임관자가 지방의 가장 작고 외진 지청을 자원하는 것은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중앙지검의 꽃길을 걷어차고,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원이라..."
정 교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거긴 검사 세 명, 수사관 십여 명이 전부인 깡촌 지청이야. 그곳에 가면 자네는 승진 코스에서 완전히 밀려나. 게다가 그 지역은 이미 민선 1기를 거쳐 재선까지 거머쥔 강태석의 왕국이다. 경찰서, 시의회, 지역 언론, 심지어 법원까지 토착 카르텔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어. 애송이 평검사 하나가 내려간다고 해서 깰 수 있는 판이 아니야. 자네가 내려가는 순간, 저들은 온갖 음해와 압박으로 자네를 매장하려 들 걸세."
"알고 있습니다."
재환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알면서도 가겠다는 건가?"
"남원이 아니면, 제가 검사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재환의 눈빛이 푸르게 빛났다.
"그곳에 제가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제가 갚아야 할 피눈물이 있습니다. 서울의 화려한 빌딩 숲에서 거물 정치인을 수사하는 것보다, 남원의 썩은 바닥을 파헤쳐 가문의 죄를 속죄하고 그 악귀를 감방에 처넣는 것이 제게는 더 절실합니다."
정 교수는 재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자네 고집이 정 그렇다면, 내 검찰국장을 설득해 보지. 대신 조건이 있네."
정 교수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남원에 가기 전, 연수원 수료 직후 서울지검 특수2부에서 6개월간 파견 근무를 마치고 내려가게."
재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서울지검 특수부 파견입니까?"
"그래. 강태석 같은 능구렁이를 잡으려면 단순한 형법 이론만으로는 어림없어. 대형 기업의 비자금 계좌추적, 압수수색 영장 집행의 실전 노하우, 그리고 피의자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는 특수부의 칼질을 완벽하게 익혀야 해. 내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자리를 만들어 놓으마. 거기서 가장 독하고 지독한 금융 비리 수사를 몸으로 배우고 내려가게. 그래야 남원의 카르텔과 맞닥뜨렸을 때 살아서 놈들의 목을 벨 수 있어."
재환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특수부의 실전 칼질.
강태석이 요천 변 개발정비사업과 관광단지 조성으로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주무르고 있는 지금, 금융 비리 추적 기법은 놈을 단죄할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터였다.
재환은 소파에서 일어나 정 교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완벽한 칼이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정 교수는 말없이 재환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려주었다.
5. 그리움의 기록들
자정이 넘은 시각, 연수원 기숙사 204호.
모두가 잠든 차가운 방 안에서 성재환은 홀로 스탠드 불빛을 켜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정 교수가 건네준 사법연수원 최우수 학술상 상장과 금빛 메달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재환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화려한 상장이 아니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 올린 낡은 갱지 묶음.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스케치북 조각이었다.
요천 둑길의 푸른 노을 아래,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자신의 뒷모습과 광한루원의 커다란 팽나무를 연필로 정성스레 그렸던 지유의 그림.
오랜 세월 동안 재환이 품속에 품고 다녀 모서리가 닳고 헤어진 그 종이 위를, 재환의 떨리는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름이 방 안의 적막을 갈랐다.
그 이름 하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지듯 저려왔다.
남원에 홀로 남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강태석의 비열한 위협에 맞서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기워가며 김밥집을 지키고 있을 아이.
자신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남원이 평화롭다는 거짓 편지만을 보내왔던, 그 바보같이 착하고 독한 아이.
재환은 책상 한편에 쌓여 있던 최민재의 비밀 서신들을 펼쳤다.
남원에서 민재가 은밀히 보내온 편지에는 지유의 소식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지유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영안실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강태석이 찾아와 협박했으나 지유가 방명록을 덮어버리며 쫓아냈다는 이야기.
지유가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30년 전 성호석과 강태석이 결탁한 1968년 이면계약서를 찾아내 목숨 걸고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강태석이 최근 남원 관광단지 리모델링 사업과 춘향 테마파크 조성을 핑계로 친인척의 페이퍼 컴퍼니를 끌어들여 거액의 비자금을 횡령하고 있으며, 지유의 김밥집을 고사시키기 위해 남원세무서를 움직여 전례 없는 정밀 세무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불길한 첩보까지.
재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세무조사... 합법의 탈을 쓴 깡패 새끼가 기어이 지유의 숨통을 조이려 드는구나.'
재환은 백부의 만년필을 쥐었다.
잉크병 바닥에 남은 마지막 흑청색 잉크 방울을 끌어모아 펜촉에 적셨다.
하얀 백지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유에게.
서울의 겨울은 유난히 시리지만, 내 심장은 남원의 요천 물길처럼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어.
내 사법연수원 수료가 이제 눈앞이다.
종합 1위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서울지검 특수부에서의 마지막 실무 훈련을 마치는 즉시 나는 남원지청으로 내려간다.
네가 겪은 모든 눈물과, 네 어머니 영정 앞에서 삼켰을 그 피맺힌 고통을 내가 다 알고 있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법복을 입고 내려가는 그날, 남원을 더럽힌 모든 악귀의 목에 정의의 밧줄을 걸어줄게.
네가 선물해 준 이 흑청색 잉크가 마르기 전에, 약속대로 반드시 너에게 돌아간다.
- 1997년 겨울, 신림동과 일산의 밤을 지나며.
재환.'
편지를 정갈하게 접은 재환은 봉투에 넣고 풀을 붙였다.
겉면에는 동문 우체국 사서함 번호와 민재의 가명이 적혔다.
재환은 교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자신의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내 보았다.
뒷면에 지유의 잉크로 적었던 서약.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글씨는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6. 서울에서 자라는 법
새벽 다섯 시, 일산 사법연수원의 교정에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 모의법정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재환은 모의법정의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법정 안, 정면에는 대한민국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차가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환은 검사석으로 걸어가 섰다.
칠흑처럼 어두운 검사석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이곳은 훈련의 장소였지만, 재환에게는 남원의 악을 베어낼 단두대나 다름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검찰 법복.
검은 비단 바탕에 짙은 자주색 깃이 덧대어진, 국가가 검사에게 부여하는 정의와 단죄의 갑옷이었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법복을 집어 들었다.
어깨에 걸치고 단추를 하나씩 채워 내려갔다.
묵직한 천의 무게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영광의 무게가 아니었다.
죄 없는 자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가문의 추악한 죄악을 제 손으로 처단해야 하는 속죄와 심판의 십자가였다.
법복을 입은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의법정 전면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고등학생 시절,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지유의 손을 잡고 수줍게 웃던 소년의 얼굴은 더는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법의 이름으로 악을 찢어 발길 준비를 마친, 서슬 퍼런 젊은 검사 한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재환은 품속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법복 가슴 안주머니에 꽂았다.
금빛 닙이 자주색 깃 사이로 날카롭게 빛났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재환의 머릿속에 과거 성북동 사저 서재에서 성호석이 냉혹하게 내뱉었던 권력관이 메아리쳤다.
'오직 중앙의 막강한 사법 권력을 손에 쥐어야만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당신이 가르쳐준 그 사법의 칼날이, 이제 어디를 향해 떨어지는지.'
탕-.
모의법정의 무거운 문이 닫히며 울려 퍼진 굉음은, 마치 훗날 남원 카르텔을 단죄할 준엄한 법봉의 소리처럼 차가운 침묵 속으로 번져나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