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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3화

강태석의 조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지하로 번지는 구둣발 소리

 

남원의료원 지하 복도의 공기는 늘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 사이로 젖은 시멘트 특유의 곰팡내와 향 연기가 뒤엉켜 숨통을 죄어왔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바닥에 깔린 녹색 우레탄 장판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잘게 흔들렸다.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은 계단 위쪽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 거친 발소리였다.

 

단단한 통가죽 밑창이 콘크리트 계단을 짓이기며 내려오는 묵직하고 규칙적인 울림이었다.

 

한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앞서 걷는 자의 거침없는 보폭 뒤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뒤따르는 육중한 파열음이 지하 1층 영안실 복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제2호실 빈소 문가에 서 있던 최민재가 붕대를 감은 이마를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지유야."

 

민재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복도 끝, 비상계단 방화문 쪽으로 꽂혔다.

 

어둠침침한 계단참을 지나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원시청 비서실 계장이었다.

 

불과 십여 분 전, 지유가 꺼내 든 서류의 정체를 확인하고 사색이 되어 도망쳤던 그 계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계장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경악 대신, 거대한 뒷배를 등에 업은 자 특유의 비굴하고도 비열한 안도감이 엷게 번져 있었다.

 

계장은 문가에 서서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뒤로, 칠흑처럼 검은 맞춤 모직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이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남원시를 상징하는 붉고 푸른 봉황 문양의 금빛 배지가 번쩍이고 있었다.

 

손에는 하얀 국화꽃 다발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시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자애로운 목민관의 가면 같은 그윽한 비통함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묵직한 눈꺼풀 아래 번뜩이는 눈빛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의 것이 아니었다.

 

먹잇감을 완벽히 몰아넣었다고 확신하는 맹수의 서늘한 탐욕과 잔인함이 그 눈동자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강태석의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시청 수행원들과 어깨가 떡 벌어진 한양토건 사내들이 복도를 메우며 늘어섰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빈소의 유족들이 질겁하며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어디냐."

 

강태석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예, 시장님. 바로 여깁니다. 제2호실입니다."

 

비서실 계장이 비굴하게 손을 뻗어 빈소 문을 가리켰다.

 

강태석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번쩍이는 검은 구둣발이 빈소 입구의 낡은 문턱을 거칠게 넘어섰다.

 

2. 위선의 국화꽃

 

빈소 안으로 들이닥친 강태석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제단 중앙에 놓인 영정 사진이었다.

 

남원 공설 방앗간의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늘 주방을 지키던, 고단한 삶의 주름이 옅게 드리워진 지유 어머니의 흑백 사진.

 

그 영정 앞에 한지유가 서 있었다.

 

거친 삼베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하얀 소복 댕기를 단 지유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강태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로와 눈물로 붉게 충혈되었을 법도 한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맑았다.

 

그것은 어머니를 잃은 고아의 유약한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과 터전을 짓밟으러 온 원수를 향해 날을 바짝 세운 검사의 서슬 퍼런 칼날과도 같았다.

 

지유의 곁에서 떨리는 손으로 상복 치맛자락을 쥐고 있던 윤하은이 강태석의 거대한 풍채에 짓눌려 숨을 헐떡였다.

 

그러나 민재는 깨진 이마의 통증을 억누르며 지유의 한 걸음 뒤로 다가서서 강태석의 진입을 온몸으로 가로막듯 버텼다.

 

강태석은 민재의 이마에 감긴 피 묻은 붕대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비틀어 올렸다.

 

"허허, 꼴들이 말이 아니구나. 상가에 젊은 놈들이 이리 기운이 없어서야 쓰나."

 

강태석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울림이 컸다.

 

그는 손에 든 국화꽃 다발을 제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향 연기가 강태석의 얼굴을 희미하게 가렸다.

 

그는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영정을 향해 허리를 깊이 굽혀 두 번 절을 올렸다.

 

너무나도 정중하고, 흠잡을 데 없이 공손한 예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유의 입술 안쪽에서 피 맛이 번졌다.

 

'네놈이 죽였다.'

 

'위생과와 소방과의 칼날로 피를 말리고, 깡패들을 보내 새벽의 유리창을 깨부수고, 병원비를 빌미로 목을 졸라 네놈이 내 어머니를 죽였다.'

 

지유는 삼베 소매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점을 파고들며 찌릿한 고통을 토해냈지만, 지유는 결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1968년의 이면계약서와, 재환이 보내온 비자금 내사 문건 사본이 가슴 안쪽에서 서늘한 무게로 박동하고 있었다.

 

절을 마친 강태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슬픔에 겨운 자애로운 눈빛을 지어 보이며 지유를 마주 보았다.

 

"지유 양."

 

강태석이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으려 했다.

 

지유는 차갑게 반 발자국 물러서며 그 손길을 허공에 못 박았다.

 

강태석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지만, 그는 노련한 정객답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어 뒷짐을 졌다.

 

"남원의 어미 하나가 이리 허망하게 세상을 떴으니, 십만 남원 시민의 살림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내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네. 참으로 고생이 많았지."

 

"어머니의 빈소입니다."

 

지유의 메마른 음성이 빈소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원시장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이 자리에서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것이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인 줄 압니다."

 

강태석의 눈가에 파충류 같은 차가운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너그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혀를 찼다.

 

"어린것이 홀로 상주 노릇을 하느라 속이 바짝 탔겠지. 가시가 돋치는 것도 당연하다. 이해한다, 지유 양.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강태석이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 계장이 기다렸다는 듯 가죽 서류가방을 열고 하얀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서류 표지에는 굵은 고딕체로 인쇄된 글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남원 구도심 관광특구 개발정비사업 상속 재산 처분 및 조기 이주 합의서]

 

3. 맹독을 품은 자비

 

"내가 여기 온 것은 시장으로서의 공무 때문만은 아니야."

 

강태석은 한층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은밀하고 축축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내가 자네 선친인 한석규 씨와 젊은 시절 어떤 인연이었는지, 자네도 대강은 들었을 게다. 한 시대를 같이 뒹굴었던 동지의 핏줄이 이리 비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내 어찌 눈 뜨고 보겠나."

 

지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동지?'

 

아버지를 배신하고 비옥한 땅을 헐값에 빼앗아 자갈밭으로 내몰았던 원흉이, 망자의 영정 앞에서 감히 동지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강태석은 계장이 내민 만년필을 받아 들고는, 서류를 빈소 바닥의 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여기 적힌 금액을 보거라. 법적으로 책정된 보상금의 두 배다. 거기에 더해 자네 모친이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 남겨두고 간 수백만 원의 밀린 병원비와 약값, 그리고 오늘부터 치러질 3일간의 장례 비용 일체를 내가 사비로 전액 대납하마. 남원에서 가장 큰 장지까지 내 직접 마련해 주마."

 

강태석의 두터운 손가락이 서류의 날인란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요천 변에 새로 올라갈 테마 상가 1층 노른자위 코너 자리. 거기 자네 명의로 점포 하나를 무상으로 넘겨주겠다고 지난번에 약속했지? 그 약속, 지금도 유효하다. 여기 서명 하나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네는 고등학교 졸업장만 쥐고 빈손으로 쫓겨나는 불쌍한 고아가 아니라, 남원 최고의 요지에서 어엿한 건물주로 새 출발을 하는 게야. 네 어머니도 하늘에서 그걸 바랄 게다. 찢어지게 가난한 김밥집 마룻바닥을 지키다 피를 토하고 죽는 것보다, 딸년이 번듯하게 사는 걸 바라는 게 어미의 마음 아니겠나?"

 

그것은 달콤한 꿀을 바른 거대한 독배였다.

 

지유가 펜을 잡는 순간, 삼거리 김밥집 터는 합법적으로 강태석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버지 한석규의 억울한 죽음과 30년 전의 진실은 영원히 역사의 장부 뒤로 묻혀버릴 터였다.

 

곁에 서 있던 민재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더러운 주둥이 닥치지 못해! 네놈이 깡패들을 풀어 우리 가게를 박살 내고 지유 어머니를 사지로 몬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개수작이야!"

 

"민재야, 물러서!"

 

지유의 서늘한 호통이 민재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강태석의 등 뒤에 서 있던 한양토건 사내들이 험악한 기세로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강태석이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강태석은 민재 따위는 시야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오직 지유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꺾이지 않는 여학생을 반드시 무릎 꿇리고야 말겠다는 집요한 정복욕이었다.

 

"어떠냐, 지유 양. 이건 내 마지막 호의다. 이 자리에서 서명을 거부한다면, 당장 이 병원 원무과에서 밀린 병원비 청구 소송이 들어갈 게다. 저 차가운 냉동고에 누워 계신 자네 모친의 시신은 무연고 변사자로 분류되어 압류될 것이고, 장례는커녕 관 뚜껑도 덮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될 게야. 그 꼴을 보고 싶으냐?"

 

강태석의 목소리에서 마침내 부드러운 가면이 벗겨져 나갔다.

 

남원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독재자의 날것 그대로의 폭압이 빈소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은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글썽이며 지유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지유는 떨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태석의 번들거리는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4. 닫히는 방명록

 

지유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제단 옆, 조문객들의 이름이 적히는 낡은 방명록으로 향했다.

 

강태석이 들어오기 전, 그의 수행비서가 보란 듯이 첫 줄에 굵은 매직으로 적어둔 글자가 선명했다.

 

[남원시장 강태석]

 

남원의 주인이자 하늘이라는 오만이 그 여덟 글자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지유는 그 낡은 방명록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거침없는 손길로, 방명록의 두꺼운 표지를 탕 소리가 나도록 덮어버렸다.

 

먼지 낀 종이 냄새와 함께 매캐한 향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비서실 계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뒤에 서 있던 조폭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강태석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지유는 덮인 방명록 위에 단정하게 양손을 얹은 채,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평생 남원을 사랑하셨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허공을 쪼개듯 또박또박 울려 퍼졌다.

 

"요천의 물길을 사랑하셨고, 광한루의 바람을 사랑하셨으며, 새벽마다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문을 열던 삼거리 골목의 이웃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지유의 눈동자가 강태석의 가슴팍, 번쩍이는 시장 배지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하지만 강태석 시장님."

 

지유의 입술 끝이 가늘게 비틀렸다.

 

"어머니는 당신을 단 한 번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빈소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강태석의 얼굴에서 자애로운 표정이 완전히 지워졌다.

 

그의 턱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뒤틀렸고, 굵은 목덜미를 따라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뭐라?"

 

"어머니의 유언이셨습니다. 탐욕으로 남원을 더럽힌 자에게 단 한 평의 땅도, 단 한 줄의 서명도 넘겨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유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을 이었다.

 

"남원의 시장이 아니라 그 어떤 권력을 가져와도 당신은 그저 남의 피눈물을 빨아먹고 자란 토건 깡패일 뿐입니다. 나가세요. 내 어머니의 영정 앞에 당신 같은 살인자의 국화꽃은 단 한 송이도 필요 없습니다."

 

"이 건방진 계집년이!"

 

뒤에 서 있던 한양토건 사내가 참지 못하고 각목을 쥐려는 듯 앞으로 튀어나왔다.

 

"가만있어!"

 

강태석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낮고 굵은 고함에 빈소 천장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내들은 짓눌린 채 걸음을 멈추었다.

 

강태석은 핏발이 선 눈으로 지유를 노려보았다.

 

지금껏 남원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면전에서 이런 치욕을 안긴 자는 없었다.

 

시의원도, 경찰서장도, 내로라하는 토착 유지들도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자비를 구했었다.

 

그런데 고작 고등학교 교복을 갓 벗은 영세 김밥집의 계집아이가, 그것도 어머니의 시신이 채 식지도 않은 빈소에서 자신을 살인자라 부르며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다.

 

모멸감과 살의가 강태석의 뇌수를 뒤흔들었다.

 

5. 장부의 그림자

 

강태석은 천천히 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거칠게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네년이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강태석의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가 여기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네년은 오늘 밤으로 저 요천 바닥의 물고기 밥이 될 수도 있어. 병원? 장례? 당장 1시간 뒤에 영안실 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고 네 어미 시신을 길바닥에 패개쳐 주마. 그때 가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늦을 게다."

 

"그렇게 해보십시오."

 

지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녀의 손이 서서히 상복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품속에서 얇은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방금 전 비서실 계장의 사색이 된 얼굴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문서였다.

 

강태석의 시선이 그 종이 뭉치로 쏠렸다.

 

가장 위쪽에 찍힌 붉은색 타원형 관인.

 

[내무부 감사관실 극비(極秘)]

 

강태석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지유가 차분한 음성으로, 그러나 비수처럼 날카롭게 문건의 첫 문장을 읊기 시작했다.

 

"'1993년 남원시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 및 요천 수변 정비사업 특별내사 보고서. 대상자: 삼거리 토건 대표 강태석, 남원시청 도시과장 및 지적과장. 비자금 조성처: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14개.'"

 

"...네년이 그걸 어디서 났어."

 

강태석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덜덜 떨려 나왔다.

 

그 문건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3년 전, 성호석을 중앙으로 축출하고 자신이 남원의 권력을 장악할 때 내무부 고위 라인을 통해 영구 파기하기로 약조했던 바로 그 내사 보고서였다.

 

어떻게 성호석의 서재 깊숙한 금고에 박혀 있어야 할 이 문건이, 이 시골 영안실의 어린 계집 손에 들려 있단 말인가.

 

지유는 문건을 거두지 않은 채, 서늘한 눈빛으로 강태석의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응시했다.

 

"이게 끝인 줄 아십니까?"

 

지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태석의 고막을 찢을 듯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1968년 5월. 동충리와 하정리 일대 4,500평을 가로채기 위해 당신이 아버지 한석규에게 써주었던 이면계약서 원본. 그리고 성호석 전 시장이 보증인으로 서명한 친필 날인. 그게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강태석의 숨이 턱 막혔다.

 

1968년의 이면계약서.

 

자신이 깡패 시절, 성호석과 결탁해 남원의 노른자위 땅을 집어삼키며 오늘의 거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최초의 범죄 원천.

 

한석규가 죽으면서 불태워 없앤 줄로만 알았던 그 망령 같은 서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사본들은 이미 서울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유가 거짓을 섞어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신림동에서 30일 뒤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던 재환의 얼굴이 지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재환아,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이 악귀의 발목을 묶어둘게.'

 

"시장님, 당신이 오늘 이 영안실의 문을 닫는 순간, 그리고 내 머리칼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이 문건들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서울의 모든 언론사 데스크 위에 올라갈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갈망하던 민선 1기 남원시장의 자리가, 감방의 썩은 마룻바닥으로 바뀌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강태석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허세가 아니었다.

 

눈앞에 선 계집아이의 눈빛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상대를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게다가 내무부 극비 문건의 실물 사본이 실제로 그 손에 들려 있었다.

 

성호석.

 

'성호석 그 교활한 늙은 여우 놈이 기어이 나를 치려고 이 계집에게 패를 넘겼단 말인가?'

 

강태석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저 계집을 찢어 죽이고 서류를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저 문건이 이미 서울의 사법 당국이나 언론에 복사되어 넘어가 있다면?

 

섣불리 칼을 휘둘렀다가는 자신이 쌓아 올린 남원의 제국 전체가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6. 차가운 맹세

 

"...좋다."

 

강태석이 마침내 피를 토하듯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조기 이주 합의서를 구겨 쥐며 지유를 노려보았다.

 

"아주 당돌하구나, 한지유. 네년이 성호석 그 늙은 여우의 줄을 잡고 내 목을 옥죄려 드는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라."

 

강태석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에 서린 살기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음산해져 있었다.

 

"남원은 내 땅이다. 내 허락 없이는 바람 한 점, 풀잎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네 어미의 뼈를 어디에 묻든 상관없다. 하지만 네년이 쥔 그 종이 쪼가리가 네 목숨을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마."

 

강태석은 홱 몸을 돌렸다.

 

"철수한다!"

 

그의 벼락같은 호령에 굳어 있던 수행원들과 조폭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었다.

 

강태석의 거대한 그림자가 빈소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뒤이어 쿵쿵거리며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가 지하 복도를 울리더니, 이내 계단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폭풍이 휩쓸고 간 빈소 안에는 오직 향로에서 타들어 가는 향 연기만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유야...!"

 

하은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민재 역시 긴장이 풀린 듯 벽을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깨진 이마에서 붉은 피가 다시 배어 나와 붕대를 적셨다.

 

그러나 지유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내사 문건을 정갈하게 갈무리해 상복 깊숙이 갈무리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영정을 향해 돌아섰다.

 

'엄마.'

 

'엄마가 지키려 했던 것, 내가 지켜냈어. 그리고 앞으로도 지켜낼 거야.'

 

지유는 가슴팍을 가만히 짚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1968년 이면계약서와 함께, 민재가 서울에서 목숨을 걸고 가져왔던 성재환의 친필 서신이 닿아 있었다.

 

'지유야. 30일만 버텨줘. 내가 반드시 검사가 되어, 법복을 입고 너에게 돌아갈게.'

 

재환의 그 글씨가, 살을 에는 듯한 결기가 지유의 심장을 뜨겁게 덥혀주고 있었다.

 

지유는 덮어버린 방명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떨어진 국화꽃 잎 하나를 손끝으로 집어 향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불꽃이 꽃잎을 삼키며 타닥 소리를 냈다.

 

"민재야. 하은아."

 

지유가 두 친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는 슬픔이나 두려움의 그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시퍼렇게 날이 선 결의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어머니 입관 준비하자. 우리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게 보내드리자."

 

남원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을 향해, 소년과 소녀들이 마주 잡은 손끝에서 지워지지 않을 복수의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