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상주
1. 삼베옷과 하얀 리본
지하 1층 복도의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파리한 백색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 코를 찌르는 크레졸 소독약 냄새, 그리고 오래 닫혀 있던 철문에서 번져 나온 붉은 녹내가 뒤섞여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서늘하게 찔렀다.
한지유(韓智裕)는 콘크리트 벽면에 등을 기댄 채, 허리 아래로 길게 늘어진 거친 삼베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누런 삼베 올은 굵고 빳빳하여 마치 수십 개의 바늘이 손끝의 살갗을 찔러대는 것처럼 따가웠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상복을 입는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 세상천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찾을 수 없음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하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머리칼에 꽂힌 자그마한 하얀 모시 리본이 공기의 흐름조차 멈춘 복도 안에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지유야…… 고름 매줄게. 가만히 있어 봐."
뒤편에서 눈시울을 붉힌 채 코를 훌쩍이던 윤하은이 젖은 손을 뻗어 지유의 가슴 앞 저고리 고름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손을 대는 하은의 손가락 끝마디마디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친구의 떨림이 옷감을 타고 가슴뼈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고마워, 하은아."
지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목구멍 안쪽까지 까맣게 타버린 재가 빽빽하게 들어찬 것만 같아, 숨을 한 번 들이마실 때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유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거친 손이 힘없이 늘어지고 차가운 기계음이 심장의 정지를 알렸던 새벽 4시 48분 이후, 그녀의 눈물샘은 마치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있었다.
지금 울어버리면 안 되었다.
지금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려버리면, 품속에 숨겨둔 어머니의 유언도, 뼈를 깎아내며 지켜온 진실의 서류마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마 안쪽, 얇은 속적삼을 덧댄 가슴팍 안감에는 어머니가 속옷 허리춤에 낡은 옷핀으로 꿰매어 품고 있던 1968년 자 이면계약서 원본이 빳빳한 촉감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석규, 강태석, 그리고 성호석.
세 사람의 이름 석 자와 세월에 닳아 붉은빛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인주 도장이 찍힌 30년 전의 비극적인 약속.
그 차가운 종이의 모서리가 숨을 쉴 때마다 지유의 갈비뼈 안쪽을 날카롭게 옥죄어왔다.
'엄마, 내가 지켜낼게.'
'김밥집 터도, 아빠의 피눈물도…… 절대로 그 악귀 같은 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아.'
지유는 삼베 소매를 살며시 끌어내려 손등에 붉게 그인 생채기를 가렸다.
어머니의 숨이 멎자마자 영안실 구석으로 들이닥쳐 상속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시청 비서실 계장과 건달들의 손톱에 긁힌 상처였다.
그 파렴치한 자들은 오전 10시까지 도장을 찍지 않으면 병원 원무과를 압박해 시신 인도를 거부하고 영안실 셔터를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가혹한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7시 20분.
폭풍이 들이닥치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세 시간이 되지 않았다.
2. 쓸쓸한 빈소의 국화
남원의료원 장례식장 지하 1층 맨 구석자리에 위치한 제2호실.
작은 방 한가운데 놓인 초라한 상여 상 위에는 단 한 장의 사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젊은 시절,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정 앞 돌계단에서 아버지 한석규와 나란히 서서 수줍게 웃고 있던 어머니의 흑백 증명사진을 급히 확대해 플라스틱 액자에 끼운 것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고 흠집투성이인 영정이었지만, 사진 속 어머니의 눈빛만큼은 요천의 봄 물결처럼 더없이 맑고 따스했다.
영정 양옆으로 놓인 하얀 국화 두 다발이 이 텅 빈 빈소의 유일한 장식이었다.
남원 시내 유력자들의 상가처럼 화려한 조화 화환이나 권력자들의 이름이 적힌 리본 따위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초라한 국화마저도 하은이 얇은 주머니를 털어 병원 앞 허름한 꽃집에서 사 온 것이었다.
화환 하나 없이 서늘한 냉기만이 맴도는 빈소 입구 벽면에는, 갓 뜯어낸 마분지 위에 굵은 검은색 매직으로 쓴 글씨가 붙어 있었다.
'상주 한지유.'
열아홉 살의 여고생이 오롯이 혈혈단신으로 짊어져야 하는, 너무나 무겁고 시린 이름이었다.
지유는 상여 상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성냥을 켜 향로에 꽂힌 향에 불을 붙였다.
가느다란 잿빛 연기가 곡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은은하면서도 씁쓸한 향초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억누르고 억눌렀던 비통함이 명치를 사정없이 쥐어짰다.
가게 주방에서 솥뚜껑을 열 때마다 피어오르던 하얀 김,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김밥을 썰던 어머니의 작은 어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손바닥의 지문이 다 닳도록 새벽밥을 짓던 어머니였다.
자신은 낡은 털스웨터 한 벌로 겨울을 나면서도, 오직 딸아이의 대학 진학만을 바라보며 밤마다 장부를 적고 또 적던 그 가냘픈 손길이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알아서……."
지유의 턱 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두 손을 모아 바닥을 짚자, 차가운 장판의 냉기가 손바닥을 얼려왔다.
"그 악마 같은 인간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나 혼자 편하자고 서울 갈 생각만 했어. 엄마가 왜 그렇게 밤마다 아파하면서도 가게를 지키려 했는지…… 이제야 다 알았어."
곁에서 지켜보던 하은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지유의 여윈 어깨를 끌어안았다.
하은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지유의 삼베 소매를 적셨다.
"지유야, 제발 그런 자책하지 마. 아주머니가 하늘에서 들으시면 가슴 찢어져. 아주머니는 평생 너 하나 잘되는 것만 바라보고 사셨잖아. 네가 이렇게 혼자 아파하는 거 원치 않으셔……."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젖어 드는 소매를 거두고 허리를 곧게 폈다.
"아니야. 나 이제 울면서 숨지 않을 거야."
지유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던 슬픔의 파도가 서서히 굳어지며, 서슬 퍼런 쇳빛의 결기로 응결되기 시작했다.
"엄마가 목숨과 맞바꾸며 지켜낸 저 김밥집 터, 그리고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자들의 죄악…… 절대로 용서 못 해.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도장 찍어주는 일은 없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이 자리를 지킬 거야."
그것은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피를 토하듯 바치는, 상주 한지유의 첫 번째 맹세였다.
3. 닫힌 철문 밖의 그림자들
빈소 밖 지하 복도 저편에서 육중한 구두 굽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하은이 화들짝 놀라며 숨을 죽이고 문틈을 살폈다.
"지유야…… 저 사람들, 복도 끝에 버티고 서서 안 가고 있어."
지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빈소 입구의 얇은 합판 문을 살며시 밀어 열었다.
지하 1층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철문 앞,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홀 입구에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셋이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삼거리 토건과 한양토건의 하수인들이었다.
목덜미와 손등에 조잡한 문신을 드러낸 사내들은 병원 복도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그들의 험악하고 번들거리는 눈빛은 영안실 복도를 지나가는 병원 청소부나 간호사들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으며 위협을 가했다.
겁에 질린 병원 직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피했고, 다른 호실의 조문객들조차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감히 이쪽 복도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조문객의 발길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폭압적인 고립 작전이었다.
그때였다.
비상계단 쪽 철문이 덜컹거리며 열리더니,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쪽으로 쏠렸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한쪽 팔에는 석고 깁스를 한 채 피딱지가 말라붙은 점퍼를 걸친 청년이었다.
"지유야……! 지유야!"
최민재였다.
새벽에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성재환을 만나고, 첫차를 타고 남원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헐레벌떡 빈소를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민재야! 너, 너 몰골이 왜 이래!"
하은이 기겁하며 뛰어나가 쓰러지려는 민재의 성한 팔을 부축했다.
민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입술은 터져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고, 관자놀이 붕대 틈으로는 여전히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와 점퍼 깃을 적시고 있었다.
신림동 공중전화 부스에서 괴한들이 휘두른 각목에 무차별 난타를 당했던 참혹한 상흔이었다.
하지만 민재는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없는 듯 하은의 부축을 거칠게 뿌리치고 빈소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상여 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영정을 마주한 순간, 민재의 무릎이 꺾이며 시멘트 바닥 위로 털썩 곤두박질쳤다.
"아주머니…… 제가,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민재의 가슴팍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거친 오열이 터져 나왔다.
바닥을 짚은 그의 성한 왼손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맨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손등의 껍질이 벗겨지며 핏방울이 튀었지만 민재는 멈추지 않았다.
"제가 남원에 남아서…… 지유랑 아주머니를 끝까지 지켰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제가 천하의 몹쓸 놈입니다, 아주머니……."
지유는 조용히 다가가 민재의 성한 어깨 위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친구의 등은 피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분노로 인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민재야, 고마워.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지유야……."
민재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지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물 젖은 눈동자 속에는 뼈아픈 자책과 함께,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거대한 격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민재는 주위를 살피며 품 안쪽 가장 깊은 주머니로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비닐로 겹겹이 싸맨, 빳빳한 흰 편지봉투였다.
봉투를 쥐고 있는 민재의 손가락마디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이거…… 재환이가 보낸 거야."
'재환이……?'
그 두 글자가 귓전에 닿는 순간, 지유의 심장이 바닥 끝까지 쿵 하고 곤두박질쳤다.
얼어붙어 있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쩍 갈라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4. 신림동에서 온 전언
민재는 빈소 입구 쪽을 매섭게 쏘아보며 목소리를 귓속말처럼 낮추었다.
복도 밖 건달들에게 한 글자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는 필사적인 조심성이었다.
"신림동 9동 고시원 꼭대기 세 평짜리 단칸방으로 찾아갔었어. 재환이…… 거기서 피눈물을 흘리며 널 기다리고 있더라."
"재환이가…… 신림동에서?"
"그 자식, 공무원 시험 본다는 거 다 거짓말이었어. 부친 눈 피하려고 숨긴 거였어."
민재의 목소리가 젖어 들며 서슬 퍼런 전율이 실렸다.
"사법시험 1차에 전국 수석으로 붙었어. 최연소 수석이야. 그런데 그 좁은 방구석 벽마다 뭐가 붙어 있는지 알아? 남원시 정밀 지적도랑 강태석 비리 신문 스크랩, 그리고 네가 겪은 일들을 형법이랑 특가법 조항으로 낱낱이 엮어놓은 법리도가 도배되어 있었어. 졸음을 쫓겠다고 컴퍼스로 허벅지를 찔러대서 바지가 피투성이였어. 네가 공중전화에서 비명 지르고 끊겼을 때, 당장 남원으로 뛰쳐내려오겠다는 걸 내가 멱살을 잡고 겨우 말렸어."
지유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민재의 말이 한마디씩 이어질 때마다 심장에 굵은 대못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내려오면 시험도 다 날아가고, 개죽음당할 뿐이라고 내가 소리쳤어. 검사가 되지 못하면, 그 절대적인 사법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하면 강태석 저 악귀 같은 놈들과 그 뒤에 있는 성호석까지 아무도 법정에 세울 수 없다고……."
지유의 눈가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투명한 이슬이 흘러내렸다.
서울행 기차 창밖을 바라보며 피 흘리는 주먹을 쥐고 있던 소년의 모습.
각인 만년필 끝으로 써 내려갔던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는 그 서늘하고도 애절한 문장.
재환은 남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지유를 홀로 두고 편안히 서울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지독한 고독과 고통의 굴레 속에서, 스스로의 살점을 찢어가며 복수의 칼날을 벼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재는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손바닥 위에 흰 봉투를 얹어주었다.
"재환이가 직접 쓴 편지야. 그리고…… 그 봉투 안에 성호석 전 시장이 숨겨두었던 강태석 비자금 내사 문건 사본 일부가 들어 있어. 재환이가 이걸 무기로 써서 남원 놈들 발목을 30일 동안 묶어두라고 했어."
지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봉투를 열었다.
거친 갱지 한 장이 손끝에 닿았다.
종이 위에는 지유가 학창 시절 교과서 모퉁이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정갈하고 곧은 재환의 친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반듯하던 글씨는 종이를 찢을 듯 깊게 파고든 펜촉의 압력으로 울퉁불퉁하게 패어 있었다.
글쓴이의 살을 에는 듯한 분노와 피눈물이 글자마다 그대로 엉겨 붙어 있었다.
'지유야.
네 고통을 까맣게 몰랐던 내 죄가 하늘보다 무겁다.
너를 지옥 같은 남원에 홀로 버려두고 도망친 나를 결코 용서하지 마라.
하지만 맹세한다.
30일이다.
2차 시험이 끝나는 그날, 나는 반드시 법복을 손에 쥐고 남원으로 내려간다.
내 아비의 죄든, 강태석의 패륜이든, 법의 칼날로 그자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놓겠다.
그러니 제발, 30일만 버텨다오.
내 모든 목숨과 영혼을 걸고 너와 남원을 되찾겠다.
- 성재환'
지유는 편지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가슴 한가운데로 끌어당겼다.
종이 끝에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는 익숙한 냄새.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사주었던, 깊고 푸른빛이 감돌던 흑청색 잉크의 냄새였다.
차가운 삼베 저고리를 뚫고 재환의 뜨겁고 서슬 퍼런 심장 박동이 지유의 늑골을 뒤흔들며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재환아…….'
지유는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신림동의 차가운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법을 벼리는 재환이 있었고, 온몸이 부서져라 달려온 민재가 있었으며,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하은이 있었다.
이제는 버텨내야 했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그리고 저 멀리서 목숨을 걸고 있는 재환을 위해서라도.
5. 닥쳐오는 시한과 감시의 눈초리
오전 9시 10분.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아홉 번을 울렸다.
시계추가 흔들릴 때마다 빈소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복도 끝에서 풍겨오던 독한 담배 연기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쿵쿵거리는 거친 발소리가 제2호실 문 앞을 가로막았다.
마침내 얇은 합판 문이 덜컥거리며 사납게 열렸다.
얼굴 왼쪽에 길쭉한 칼자국 흉터가 파인 한양토건의 행동대장급 사내가 문틀을 짚고 흉흉한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어이, 상주 아가씨."
누런 이빨을 드러낸 사내의 비열한 눈동자가 텅 빈 빈소 안을 조롱하듯 훑었다.
"벽시계 봤지? 이제 딱 50분 남았어. 10시 정각이다. 시장님께서 결재하신 합의서에 고분고분 도장 안 찍으면, 당장 병원 전원 차단하고 영안실 셔터 통째로 내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비서실 계장님 서류 들고 곧 도착하신다."
바닥을 짚고 있던 민재가 성한 왼팔로 벽을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들이…… 사람이 죽어 나간 상가에서 무슨 개수작이야! 당장 그 더러운 주둥이 닥치고 꺼져!"
사내는 깁스를 하고 머리에 피를 흘리는 민재의 몰골을 보더니 턱을 치켜들며 낄낄거렸다.
"기자 양반, 어제 서울 골목길에서 덜 두들겨 맞았나 보네? 팔 한 짝 더 부러져야 정신을 차리려나? 남원 바닥에서 조용히 살고 싶으면 주둥이 닥치고 있어. 여기서 한 번만 더 짖어대면 아주머니 시체 옆에 네놈도 같이 눕혀서 요천 물에 던져버릴 테니까."
"당장 나가요."
지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유는 삼베 치마를 단정하게 가다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와의 거리는 불과 반 보 남짓.
사내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텁텁한 술 냄새와 담배 찌든 내가 얼굴을 덮쳤지만, 지유의 시선은 눈 깜빡임 하나 없이 사내의 흉터투성이 눈을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여긴 내 어머니를 모신 거룩한 빈소예요. 당신 같은 부역자 깡패들이 더러운 발을 디밀 곳이 아니야."
"허, 이 기집애 보소?"
사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바닥에 침을 뱉으려 했다.
하지만 지유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짓눌려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의 어린 소녀에게서 나올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오직 원수를 도륙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티는 자의 형형한 눈빛이었다.
"10시가 되든, 100년이 흐르든 당신들이 내민 피 묻은 종이에 도장 찍는 일은 영원히 없어. 내 손으로 당신들의 목줄을 죄어 법정에 세우는 날이 올 테니까, 강태석 시장실로 기어가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전해."
"이게 진짜 곱게 대해주니까 눈깔이 뒤집혔나……!"
사내가 살벌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커다란 손바닥을 번쩍 치켜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봐! 손 내려! 병원 복도에서 무슨 짓거리들이야!"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번지르르한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끼어들었다.
남원시청 비서실 계장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사내를 나무라는 척 제지했지만, 겨드랑이 밑에는 이미 지유의 목을 조르기 위해 준비된 묵직한 서류철이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6. 홀로 선 상주의 맹세
계장은 비열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사내들을 옆으로 밀쳐내며 빈소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상여 상에 모셔진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역겹다는 듯 코를 킁킁거리며 들고 온 서류철을 상주석 바닥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한지유 양. 오랜만이지? 강태석 시장님께서 마지막으로 베푸시는 특별한 아량이야. 밀린 중환자실 입원비 480만 원, 그리고 영안실 사용료에 장례비 일체까지. 시청에서 특별 구호 위로금 명목으로 전액 대납해 주기로 방금 시장실 최종 결재가 났어. 여기 인감도장 하나만 찍으면 돼. 인감이 없으면 오른손 엄지에 인주 묻혀서 지장이라도 찍어. 그러면 즉시 남원 시내에서 제일 양지바른 공원묘지에 호화롭게 모셔다 드릴 테니까."
계장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지유의 삼베옷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만약 끝까지 버티겠다면…… 당장 병원 원무과에 연락해서 치료비 미납에 따른 시신 인도 거부 처분을 내릴 거야. 장례? 어림도 없지. 법적으로 연고 없는 행려사망자 취급해서 영안실 냉동고 깊숙한 곳에 무기한 방치할 텐데, 그 꼴을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어머니의 주검을 인질로 삼아 패륜적인 항복을 강요하는 공권력의 잔혹한 민낯이었다.
듣고 있던 하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고, 민재는 부러진 팔의 고통도 잊은 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상주 한지유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손을 삼베 저고리 안쪽 품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가슴 한가운데에서는 재환이 목숨을 걸고 보낸 비자금 내사 문건 사본과 친필 편지가, 그리고 어머니가 남겨준 1968년 자 낡은 이면계약서가 그녀의 심장과 맞닿아 고동치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놓인 합의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씹어 뱉었다.
"계장님."
"어?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돼? 마음 바꿨어?"
"당신들이 강탈해 간 1991년 환지 대장, 그리고 1968년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 순간, 계장의 얼굴에서 번들거리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빛이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갔다.
'1968년…… 남원읍지구 이면계약서?!'
그것은 시청 말단이나 비서실 계장 따위는 언감생심 알 수도 없는, 강태석 시장과 전임 시장 성호석 두 거물만이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맹세했던 30년 전의 은밀한 치부였다.
어린 여고생의 입에서 그 오래된 연도와 지번이 정확하게 튀어나오자 계장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숨을 멈추었다.
"너……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따위 서류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이것도 똑똑히 보세요."
지유는 민재가 가져온 흰 봉투 안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갱지 사본 한 장을 꺼내 계장의 눈앞에 서늘하게 펼쳐 보였다.
내무부 기획조정실 감사관실의 붉은 극비 직인이 선명히 찍힌, 남원시 관급 공사 비자금 횡령 및 뇌물 상납 내사 보고서의 첫 페이지였다.
서류 맨 윗단에 적힌 '남원시장 강태석'이라는 활자를 확인한 순간, 계장의 턱관절이 덜덜 떨리며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빈소 안에 울려 퍼졌다.
남원의 권력 카르텔 전체를 단숨에 단두대로 보낼 수 있는 중앙정부의 극비 문건이 왜 이 초라한 영안실에 있는 것인가.
"30일이에요."
지유의 서늘한 목소리가 시멘트 바닥을 차갑게 내리쳤다.
"30일 뒤면 서울에서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검사가 법의 칼날을 쥐고 남원으로 내려와요. 당신들이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강태석 시장,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부역자들까지 모조리 쇠고랑을 차게 될 거야. 그때까지 이 빈소와 삼거리 김밥집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이 문건의 원본들이 대검찰청과 중앙 일간지 1면에 통째로 뿌려질 거예요."
"너…… 너 배후가 도대체 누구야?! 이 문서를 대체 어디서 빼돌린 거야?!"
계장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상주 한지유."
지유는 어머니의 영정을 가리키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선언했다.
"이 빈소를 지키는 상주이자, 30년 전 당신들이 토지를 빼앗고 짓밟아 죽인 한석규의 딸. 그게 내 이름이에요. 10시가 되기 전에 내 빈소에서 당장 꺼져요. 내 경고는 단 한 번뿐입니다."
계장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복도 문턱에 서 있던 흉터투성이 조폭 사내들도 지유가 뿜어내는 기괴할 정도의 살기에 압도당해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계장은 바닥에 떨어뜨릴 뻔한 합의서 서류철을 가슴에 품은 채, 허겁지겁 복도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시, 시장님께 보고해야 해……! 저년 보통이 아니야! 당장 시장님께……!"
계장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져 갔다.
소란이 휩쓸고 간 빈소 안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적들을 몰아냈지만, 그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거대하고 잔혹한 폭풍이 들이닥칠 것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7. 검은 관용차의 등장
오전 9시 55분.
남원의료원 장례식장 지상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가르며 육중한 배기음을 내뿜는 검은색 대형 세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로얄 살롱.
차량 보닛 앞부분에는 민선 1기 남원시장을 상징하는 금빛 봉황 깃발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차량이 멈춰 서자,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 비서관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뒷좌석 문을 공손히 열었다.
짙은 감색 고급 모직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맨 사내.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를 발밑에 두고 짓밟는 자 특유의 잔혹함과, 모든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다는 오만한 미소가 엷게 걸려 있었다.
"시, 시장님……! 계장의 보고에 따르면 저 안에서 계집애가 이상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고 합니다!"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 비서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강태석의 귀에 대고 조급하게 속삭였다.
강태석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손을 들어 비서관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린 계집애가 어미 잃고 벼랑 끝에 몰리니 눈깔이 뒤집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지. 호랑이 새끼 흉내를 내며 짖어봤자 발톱 다 빠진 길고양이에 불과해."
강태석은 금시계가 번쩍이는 손목을 들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장례식장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직접 가서 그 당돌한 턱주가리를 박살 내 주지. 시장이 친히 왕림하여 조문을 왔다는데, 감히 문전박대를 할 배짱이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지하로 내려가는 강태석의 육중한 구두 굽 소리가 텅 빈 계단실을 쿵, 쿵,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복도 끝자락, 초라한 삼베옷을 입고 홀로 빈소를 지키고 있는 상주 한지유를 향해, 마침내 남원의 최고 권력자가 직접 서슬 퍼런 발톱을 드러내며 다가서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