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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화

작은 김밥집의 온기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돌담길의 엇갈림과 발걸음

 

광한루원 서문 쪽문 밖으로 터져 나온 거친 숨결이 사월의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하얗게 부서져 흩어졌다.

 

성재환은 무릎을 짚은 채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귓전을 때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요천의 물소리마저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교복 재킷 안주머니를 뒤집어 까듯 헤집던 그의 손끝이 허탈하게 떨렸다.

 

텅 빈 안감의 감촉만이 서늘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하, 제발…… 딴 데 있겠지 가방 안쪽이나, 아니면 아까 겉옷 벗었을 때……."

 

재환은 길바닥에 가방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지퍼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두꺼운 법학 입문서와 스프링 연습장, 문제집들이 뒤엉킨 채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를 뒤져도 그 묵직하고 매끄러운 옻칠의 질감은 만져지지 않았다.

 

백부 성진혁이 서울 명문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첫 판사 임용을 받던 날, 어린 재환의 손을 잡으며 쥐여주었던 물건이었다.

 

'재환아, 법을 다루는 자는 어떤 순간에도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 펜에 새겨진 글귀를 심장에 새겨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하는 법이다.

 

우리 성씨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법조인이 되거라.'

 

귓가에 맴도는 백부의 낮고 엄중한 음성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명치를 찔러왔다.

 

남원시장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보다 더 무겁게 짓눌러오던 명문 법조 가문의 기대와 규율, 그 모든 것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징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야! 성재환! 너 미쳤어? 갑자기 왜 뒤돌아 뛰고 난리야!"

 

저만치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온 최민재가 무릎을 잡고 헐떡였다.

 

"학주 떴다니까! 지금 정문 쪽으로 순찰차 돌고 있어 여기서 잡히면 우리 둘 다 야간 자율학습 무단이탈로 생활관 반성문 삼 일 치야, 임마!"

 

"만년필……."

 

재환이 핏기가 가신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뭐?"

 

"백부님이 주신 만년필이 없어졌어 아까 그 팽나무 밑에서 떨어뜨린 게 분명해 다시 가봐야겠어."

 

"야, 너 제정신이야? 지금 광한루원 문 다 잠겼어! 관리인 아저씨들 순찰 돌면서 쪽문 빗장까지 다 걸어 잠갔다고 그리고 학생부 주임이 그 근처 지키고 섰다니까? 지금 들어가면 그냥 자폭이야!"

 

민재가 기겁을 하며 재환의 팔을 낚아챘다.

 

하지만 재환의 시선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광한루원 돌담 너머를 향해 있었다.

 

그 펜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아니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백부가 알게 된다면 단순한 꾸지람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혈관 속에 독처럼 퍼져 있었다.

 

성재환이라는 인간의 가치는 그 흠결 없는 완벽함에서만 증명되는 것이었으니까.

 

"놓아봐, 민재야 담이라도 넘어야 해."

 

"야, 이 미련한 놈아! 너 담 넘다 걸리면 시장님 얼굴에 먹칠하는 꼴밖에 더 돼? 내일 아침 개장하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가서 샅샅이 뒤지면 되잖아! 밤에는 잔디밭에 떨어져 있어도 까매서 안 보여!"

 

민재의 악에 받친 외침이 재환의 굳어버린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맞는 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천 평에 달하는 누원 잔디밭을 뒤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만약 야간 무단침입으로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내일 아침 지역 신문 한구석을 장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재환은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서늘한 통증이 번졌다.

 

그때, 바람에 실려 온 벚꽃 잎 하나가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찰나의 순간, 팽나무 아래에서 마주쳤던 한 소녀의 맑은 눈동자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분홍 꽃잎을 머리에 얹은 채 조용히 미소 짓던 한지유

'……혹시 그 아이가?'

 

흩날리던 벚꽃 속에서 스케치북을 안고 서 있던 지유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킬 때 발끝에 채이듯 스쳐 지나갔던 희미한 금속성 마찰음

생각의 실마리가 엉킨 실타래를 풀듯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유는 자신이 뛰쳐나간 뒤에도 한동안 돌담길 쪽에 머물러 있었다.

 

"민재야."

 

"왜, 또 뭔 헛소리하려고? 담 넘겠다고 하면 진짜 한 대 칠 거다."

 

"아까…… 하은이랑 같이 있던 그 애 말이야 한지유라고 했지?"

 

"지유? 걔는 왜 갑자기?"

 

"어디 산다고 했어? 집이 어디야?"

 

민재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재환을 쳐다보았다.

 

"너 진짜 정신 나갔냐? 이 판국에 웬 여자애 호구조사야? 지유네 집? 아까 하은이가 말했잖아 동문 우체국 골목 안쪽에 있는 삼거리 김밥집이라고 하은이가 거기 김밥 귀신이라 내가 몇 번 포장 심부름도 갔었거든 근데 걔는 왜 묻는데?"

 

재환은 대답 대신 팽개쳐두었던 책과 공책들을 가방 속에 마구 쑤셔 넣었다.

 

지퍼를 거칠게 올리고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거기 가봐야겠어."

 

"야! 삼거리 김밥집을 지금 왜 가는데! 배고프냐? 만년필 잃어버려서 돌아버린 줄 알았더니 야식 땡겨서 그러냐?"

 

"혹시 몰라 그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게 그 애였어 떨어뜨린 걸 봤거나, 주웠을지도 몰라."

 

재환의 눈빛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이 어렸다.

 

만약 누군가 주워 갔다면, 옻칠에 순금 닙이 박힌 고가의 물건이라 영영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맑고 곧은 눈을 가졌던 아이라면, 만약 그 아이의 손에 닿았다면 조금은 다른 결말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야, 성재환! 같이 가! 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난리야!"

 

민재의 투덜거림을 뒤로한 채, 재환은 남원 시내 동문 우체국을 향해 밤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2. 고소한 참기름 내음과 작은 유리문

 

동문 우체국을 지나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들자, 낡은 백열등 불빛이 드문드문 보도블록을 비추고 있었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구도심의 골목은 고요했고, 담벼락 너머로 밥 짓는 냄새와 텔레비전 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어둠 속에서 유독 따스한 주황빛을 뿜어내는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간판에는 정갈하지만 투박한 글씨로 '삼거리 김밥'이라 적혀 있었다.

 

가게 앞 유리창 너머로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고, 틈새로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방앗간에서 갓 짜낸 참기름의 진한 향과 달콤 짭조름하게 조려진 우엉 냄새, 그리고 갓 지어낸 쌀밥의 구수한 김이 뒤섞인 온기였다.

 

재환은 가게 문 앞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골랐다.

 

차가운 밤바람에 얼어붙었던 뺨 위로 온기가 닿자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미세하게 이완되는 기분이었다.

 

드르륵—

유리문이 열리며 단발머리의 윤하은이 입에 어묵 꼬치를 문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유야, 나 내일 아침에 독서실 가기 전에 들를게! 참치김밥 한 줄만 미리 싸놔 줘!"

 

문 안쪽을 향해 손을 흔들던 하은은, 가게 앞 가로등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재환과 헐레벌떡 쫓아온 민재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씹고 있던 어묵이 목에 걸릴 뻔했는지 켁켁거리며 가슴을 쳤다.

 

"쿨럭! 어? 너희가 여길 왜……? 최민재? 그리고…… 성재환?"

 

"하은아, 살려줘라 나 오늘 마라톤 뛴 것 같아……."

 

민재가 하은의 어깨를 짚으며 주저앉을 듯 숨을 헐떡였다.

 

하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재환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너희 광한루에서 도망쳐놓고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학주가 여기까지 쫓아왔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재환이 입을 열려던 찰나, 반쯤 열린 분식집 미닫이문 틈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허리에 네이비색 면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지유였다.

 

지유의 손에는 행주가 들려 있었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가느다란 팔목이 조명을 받아 유난히 희게 빛났다.

 

"하은아, 두고 간 거 있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지유의 시선이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재환과 마주쳤다.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놀라움이 번졌다.

 

낮에 광한루원 팽나무 그늘 아래서 보았던 그 맑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성재환?"

 

지유의 맑은 음성이 조용한 골목길에 울렸다.

 

재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교복 차림이었지만, 땀에 젖은 앞머리와 헝클어진 옷매무새가 그의 다급했던 처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항상 차분하고 완벽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그에게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낯설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저…… 한지유 맞지?"

 

"응, 맞는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어떻게……."

 

지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유는 자신의 앞치마 깊숙한 주머니로 슬그머니 한쪽 손을 집어넣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재환은 놓치지 않았다.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아까…… 광한루원 팽나무 밑에서 내가 뭘 떨어뜨리지 않았나 해서 쪽문으로 도망칠 때 흘린 것 같은데……."

 

재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자존심 강한 그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듯 매달리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지유는 재환의 굳은 표정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항상 교단 위나 조회 시간마다 전교 1등, 모범생, 시장의 장남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던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재환은 그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어쩔 줄 모르는 평범한 열여덟 살 소년일 뿐이었다.

 

지유의 입가에 엷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만년필 말이지?"

 

그 한마디에 재환의 굳어 있던 호흡이 일순간 멎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

 

"응 네가 떨어뜨리고 뛰어가는 걸 보고 불렀는데, 워낙 급하게 도망쳐서 못 들었나 봐 다시 찾으러 올 줄 알고 가지고 있었어."

 

지유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검은 벨벳 파우치 대신 깨끗한 손수건에 소중하게 감싸둔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낡았지만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나는 손수건이 조심스럽게 펼쳐지자, 가로등 불빛 아래서 묵직한 흑색 옻칠의 바디와 금빛 클립이 찬란하게 드러났다.

 

캡 상단에 새겨진 선명한 한자 성명, '成宰桓'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재환은 온몸에서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벼랑 끝에 서 있다가 단숨에 평지로 끌어올려진 듯한 아득한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3. 손끝에 남은 온기와 식탁의 풍경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재환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메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는 손수건 위에 올려진 만년필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고 재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많이 찾았나 보네 숨도 못 쉴 정도로 뛰어온 걸 보니까 여기 있어."

 

재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만년필을 쥐었다.

 

그 묵직한 금속의 무게와 차가운 옻칠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차가워야 할 펜의 표면에 지유의 주머니 속에 머물렀던 체온이 스며들어 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펜을 건네받는 찰나, 재환의 손가락 끝이 지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끝을 스쳤다.

 

찌릿한 전율 같은 온도가 손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두드렸다.

 

재환은 흠칫 놀라 손을 멈칫거렸지만 지유는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한지유 이건…… 나한테 그냥 펜이 아니었거든 잃어버렸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펜에 이름이 새겨져 있더라 그리고 그 옆에 멋진 라틴어도 있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맞지?"

 

지유의 물음에 재환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걸…… 읽었어?"

 

"아까 가게로 걸어오면서 하은이한테 물어봤거든 하은이가 사전 찾아보더니 대단한 말이라고 하더라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말 같았어 늘 당당하고 올곧아 보였으니까."

 

지유의 칭찬은 어떠한 아첨이나 계산도 섞이지 않은, 밤하늘의 별처럼 투명한 진심이었다.

 

'늘 당당하고 올곧아 보였다'

가문이 요구하는 완벽함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버텨내던 재환에게, 그 말은 뜻밖의 위로로 다가왔다.

 

언제나 남들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연기하듯 살았던 자신을, 이 아이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 것만 같았다.

 

"지유야! 문 열어놓고 누구랑 그렇게 이야기하누? 밖에 손님 오셨니?"

 

가게 안쪽 주방에서 카랑카랑하지만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유의 어머니였다.

 

"아, 엄마! 학교 친구들이에요!"

 

지유가 고개를 돌려 안을 향해 소리쳤다.

 

주방 쪽 가림막 커튼이 젖혀지며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밀가루와 참기름 자국이 희끗희끗 묻은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는, 문가에 서 있는 세 남녀 학생을 보더니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하은이 친구들이야? 야자 끝날 시간도 안 됐는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 총각들이 키도 훤칠하니 뉘 집 자식들인지 참 잘생겼네 밖에 서서 뭐 해, 밤바람 차다 얼른 들어와라!"

 

"아, 아닙니다, 어머님 저희는 물건만 전해 받고 가려던 참이어서……."

 

재환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지유 어머니의 손길은 단호하면서도 따스했다.

 

어머니는 재환의 뻣뻣한 소매를 덥석 쥐며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 애들 얼굴이 허옇게 질려가지고 땀범벅인데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공부했을 거 아니냐 얼른 들어와서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가 지유야, 문 닫아라, 바람 든다."

 

거절할 틈도 없이 재환과 민재는 분식집 안쪽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가게 안은 네 개 남짓한 낡은 원목 사각 테이블이 전부인 작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손님들이 남겨둔 낙서와 학교 축제 포스터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일일 연속극 소리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이며 의자는 손때가 타 반질반질 윤이 났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야, 성재환, 그냥 먹고 가자 나 진짜 배가죽이 등가죽에 붙었어 이모님 김밥 냄새 맡으니까 미치겠다."

 

민재가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의자를 뺐다.

 

재환은 어색하게 교복 재킷을 여미며 민재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가문에서 운영하는 대저택의 차갑고 정제된 대리석 식탁과는 완전히 다른, 낯설지만 묘하게 마음을 놓이게 만드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4. 뚝배기 계란찜과 방앗간 참기름

 

지유 어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마 위에 칼을 놀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경쾌하고 일정한 칼질 소리가 좁은 분식집 안을 가득 채웠다.

 

지유는 익숙하게 물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 재환과 민재의 앞에 한 잔씩 놓아주었다.

 

물컵 표면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처럼 지유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작게 맺혀 있었다.

 

"물 마셔 숨 좀 가라앉히고."

 

"고마워……."

 

재환은 물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타는 듯했던 갈증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지유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옆으로 가 도마 옆에 놓인 단무지와 시금치나물을 그릇에 덜어 담았다.

 

모녀가 손을 맞춰 일하는 모습은 말 한마디 없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듯한 그 다정함이 재환에게는 몹시도 낯설고 신기했다.

 

재환의 집안 식사 시간은 언제나 무거운 침묵과 긴장만이 감돌았다.

 

엄격한 아버지는 늘 시정 현안이나 가문의 체면, 재환의 모의고사 성적만을 화두로 올렸고, 어머니는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시중을 들기 바빴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씹히던 그 냉랭한 식탁과 비교하면, 이 작고 낡은 분식집 주방에서 피어오르는 온기는 거의 마법처럼 느껴졌다.

 

"자, 배고픈 도령들, 얼른 먹어봐라 남원에선 우리 집 김밥이 제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지유 어머니가 널찍한 접시 두 개를 테이블 위에 탕,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접시 위에는 방금 썰어낸 윤기 자르르한 김밥 세 줄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참기름이 듬뿍 발라져 반짝이는 검은 김 위로 볶은 참깨가 아낌없이 뿌려져 있었다.

 

김밥의 꽁지 밖으로 튀어나온 큼직한 계란지단과 짙은 갈색의 우엉, 주황빛 당근, 초록의 시금치, 붉은 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뒤이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가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노란 계란찜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송송 썬 쪽파와 고춧가루가 살짝 얹혀 있었다.

 

"와! 이모님, 오늘 계란찜 폭탄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민재는 기다렸다는 듯 젓가락을 들어 김밥 한 개를 통째로 입에 쑤셔 넣었다.

 

볼이 미어터져라 우물거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음! 역시 이 맛이야! 야, 성재환, 멍하니 있지 말고 얼른 먹어봐 진짜 쓰러진다."

 

지유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뚝배기 옆에 숟가락을 놓아주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총각,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귀티가 자르르 흐르는 게 험한 음식 안 먹어봤을 것 같은데 우리 집 음식은 조미료 안 쓰고 시골 방앗간 기름에 직접 담근 매실액으로만 간을 해서 담백할 게야 어서 들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재환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김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첫맛은 진하고 고소한 참기름의 향미였지만, 씹을수록 감탄이 흘러나왔다.

 

밥알 하나하나가 으깨지지 않고 살아있으면서도, 짭조름하고 달착지근하게 졸여진 우엉의 깊은 맛이 아삭한 당근과 부드러운 계란지단과 어우러져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끝 맛은 더없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재환은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맛있네요."

 

"호호, 그렇지? 내 저 총각 입맛에 맞을 줄 알았지 지유야, 너도 옆에 앉아서 애들 목 안 막히게 국물 좀 챙겨줘라 난 저 안쪽 냉장고 재료 좀 다듬고 올 테니 편하게들 먹어라."

 

어머니는 허허롭게 웃으며 다시 주방 안쪽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방 구석으로 들어간 어머니가 부스럭거리며 재료 상자를 정리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5. 스케치북 너머의 눈동자

 

테이블에는 재환과 지유, 그리고 정신없이 김밥을 흡입하는 민재만이 남았다.

 

지유는 재환의 옆쪽 의자를 빼고 조용히 앉았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아까 광한루원에서 들고 있던 두툼한 하드커버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재환은 뜨끈한 계란찜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지유의 스케치북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게 일…… 매일 돕는 거야?"

 

재환이 묻자 지유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혼자 하시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가니까 학교 끝나면 와서 재료 손질하고 설거지 돕는 게 내 일과야 아까 광한루원 갔던 것도 하은이가 잠깐 바람 쐬러 가자고 해서 몰래 나갔던 거였거든 안 그랬으면 너도 못 만났겠지만."

 

지유가 배시시 웃었다.

 

그 꾸밈없는 미소에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또래 아이들이 학원과 과외로 쳇바퀴를 돌거나 PC방과 노래방으로 몰려다닐 시간에, 이 아이는 좁은 주방에서 묵묵히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그늘 하나 없이 맑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그림 실력이 대단하던데."

 

재환의 말에 지유가 놀란 듯 스케치북을 매만졌다.

 

"그걸 봤어?"

 

"팽나무 밑에서 바람 불 때…… 스케치북 살짝 넘어갔잖아 오작교랑 완월정을 그린 것 같았는데, 빛이 물 위에 부서지는 모습이 진짜 같았어 미술 전공하려고 준비하는 거야?"

 

지유의 눈빛에 찰나의 망설임과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미술학원 같은 데 다녀본 적 없어 그냥…… 좋아하는 거야 종이랑 연필만 있으면 어디서든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영원히 남겨둘 수 있잖아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쉬워서 그리는 것뿐이야."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쉬워서.'

 

그 담담한 고백이 재환의 폐부를 찔렀다.

 

재환에게 있어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암기이거나, 누군가를 단죄하고 통제하기 위한 법조문의 축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기록이란 따스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사랑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어?"

 

재환이 묻자 지유는 조금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지만, 이내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에 펼쳐 들었다.

 

거친 도화지 위에는 연필과 엷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남원의 풍경들이 가득했다.

 

노을 지는 요천의 은빛 갈대밭, 낡은 돌담을 타고 오른 능소화 넝쿨, 비 내리는 광한루원 완월정의 처마, 그리고 시장 골목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의 옆모습까지

그림 하나하나에 대상을 향한 다정하고 애정 어린 시선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 잘 그린다……."

 

입안 가득 김밥을 씹던 민재마저 젓가락을 멈추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재환은 페이지를 넘기는 지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손끝에 묻은 연필 흑연 자국마저 마치 빛나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너는 만년필로 글을 쓰고, 나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둘 다 뭔가를 남기는 거네."

 

지유가 고개를 들어 재환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마주친 시선 사이로 봄밤의 알싸한 설렘이 흘렀다.

 

재환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문의 규율도,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아닌, 오직 열여덟 성재환이라는 소년의 심장이 지유를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6. 낡은 서랍과 붉은 인장의 그림자

 

그때였다.

 

주방 안쪽 창고에서 덜컹거리며 낡은 가구가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이고, 이게 어디 갔누…… 돋보기를 어디다 뒀는지 통 보이질 않네."

 

지유 어머니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내가 찾아줄게! 카운터 서랍에 둔 거 아니야?"

 

"아니다, 주방 선반 위 약상자 옆에 뒀던 것 같은데…… 네가 좀 봐주련?"

 

"응, 잠깐만 있어 봐."

 

지유가 주방 안쪽으로 바쁘게 뛰어 들어갔다.

 

좁은 홀에는 김밥 한 줄을 마저 먹어 치운 민재가 배를 두드리며 물을 마시는 소리만 남았다.

 

"아, 배 터지겠다 재환아, 너 만년필 찾았으니까 이제 살았네 내일 학주한테 걸려도 반성문 한 장으로 퉁치자 넌 시장님 아들이라 봐줄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재환은 재킷 안주머니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손수건에 싸여 돌아온 만년필이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방금 지유와 나누었던 대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시선을 돌리던 재환의 눈에 카운터 뒤편 낡은 원목 서랍장이 들어왔다.

 

주방 문이 열리며 바람이 통했는지 카운터 아래 나무 서랍 하나가 삐걱거리며 반쯤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덜컹—

선풍기 바람과 출입문의 틈새바람이 맞물리며 서랍 안쪽에 꽂혀 있던 낡은 서류 봉투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누렇게 바랜 갱지 재질의 대봉투였다.

 

"어? 떨어진 거 주워드려야겠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올리려 허리를 숙인 순간, 재환의 시선이 봉투 전면에 인쇄된 빛바랜 붉은 글씨와 관공서 직인에 멎었다.

 

'남원군(南原郡) 토지 소유권 확인서 및 분할 측량 열람부'

족히 십수 년, 아니 이십 년은 훌쩍 넘은 듯 종이 가장자리가 삭아 노랗게 바스러져 있었고, 굵은 붓글씨로 적힌 지번과 소유자 명의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봉투 입구가 낡아 벌어진 틈 사이로 접힌 서류의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재환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 서류 상단, 붉은 인감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수신인 및 공동 권리자 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익은 필체와 한자 이름이 박혀 있었다.

 

'成浩錫(성호석)'

현 남원시장이자, 바로 재환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피를 나눈 동업자나 혈족의 자리처럼 나란히 기재된 또 하나의 이름

'韓錫奎(한석규)'

한씨(韓氏) 성을 가진 낯선 이름 아래에는 붉은 사선과 함께 거칠게 날인된 취소 도장이 찍혀 있었고, 그 위에 굵은 만년필 글씨로 날짜와 사유가 적혀 있었다.

 

'소유권 전부 이전 및 환지(換地) 완료 - 성호석 단독 소유'

날짜는 1990년대 초반, 재환이 태어나기도 전이거나 갓난아기였을 무렵의 시기였다.

 

'이게 왜…… 지유네 가게 낡은 서랍 속에 있는 거지?'

 

재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듯했다.

 

한석규라는 이름

지유의 성씨와 같은 그 이름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왜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지유네 집안의 빛바랜 토지 서류 한가운데 찍혀 있는 것인가

백부가 늘 강조하던 '정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청렴한 가문'의 이면에 도대체 어떤 어둡고 깊은 비밀이 묻혀 있단 말인가

"엄마, 찾았어! 싱크대 밑 서랍에 있었네!"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지유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재환의 귓전을 찢듯 울렸다.

 

서랍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재환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황급히 봉투를 원래 서랍 틈새로 밀어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세차게 고동쳤다.

 

지유가 돋보기를 손에 든 채 미소를 지으며 주방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어? 재환아, 거기서 뭐 해?"

 

지유의 투명하고 의문 없는 눈동자가 재환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설렘과 온기로 가득 찼던 그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재환은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불길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주워 담은 만년필의 무게가, 가슴 안쪽에서 천 근의 쇳덩이처럼 무겁게 그의 숨통을 죄어왔다.

 

진실을 품은 서랍은 닫혔지만, 비극의 문이 비로소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