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버린 통화
1. 신림동의 차가운 빗줄기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골목은 해질 무렵부터 눅눅한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백조당 인쇄소 앞마당에는 갓 찍어낸 모의고사 문제집과 고시 잡지 냄새가 눅진한 기름내와 뒤섞여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좁은 차도를 따라 늘어선 헌책방 처마 밑으로 빗물이 굵은 방울을 이루며 뚝뚝 떨어졌다.
성재환(成宰桓)은 젖은 어깨를 털지도 않은 채 주머니 속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녹색 공중전화기 앞에 서 있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신림동 9동 산복도로 아래, 세 평 남짓한 단칸 고시원에서 보낸 칠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단 하루도 만년필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만년필의 금빛 닙은 이미 종이 위를 수없이 긁어대며 미세하게 닳아 있었고, 손가락 셋째 마디에는 단단하고 거친 굳은살이 옹이처럼 박혀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에 새겨진 그 서슬 퍼런 라틴어 법언은 그가 관악산 칼바람을 버티게 한 유일한 닻이었다.
부친 성호석(成浩錫)이 남원을 짓밟고 중앙의 권력자가 되기 위해 내던진 피 묻은 땅, 그 환지의 악업을 단죄하기 위해 재환은 스스로를 이 메마른 책의 감옥에 유폐시켰다.
하지만 방금 전, 인쇄소 주인아저씨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급히 그를 불러 세웠을 때 재환의 심장은 얼어붙듯 멎는 것 같았다.
"학생, 아까부터 남원에서 전화가 계속 와. 전라북도 남원 국번인데, 세 번이나 끊기더니 또 울리네."
남원이라는 두 글자는 재환의 굳은 심장에 곧장 서슬 퍼런 칼날을 꽂아 넣는 소리와 같았다.
지유였다.
언제나 관제엽서의 하얀 여백에 맑은 먹물 같은 글씨로 '남원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라고만 적어 보내던 사람.
어머니의 병환도, 기울어가는 가세도 한 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서울의 바람이 차갑지 않기만을 빌어주던 지유가 먼저 이곳 인쇄소로 전화를 걸어올 리 없었다.
재환은 숨을 죽인 채 공중전화기의 육중한 주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동전 투입구에 백 원짜리 주화를 밀어 넣자,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긴 신호음이 관악산 기슭의 빗소리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2. 피 묻은 아스팔트와 떨리는 숨결
같은 시각, 남원 동문 우체국 앞 공중전화 부스는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부스 안쪽 벽에는 붉은 페인트가 짓이겨진 자국과 함께 최민재가 흘린 선혈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며 검붉은 물길을 만들고 있었다.
지유는 무릎이 꺾인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손등은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기우며 베였던 상처가 덧나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지유는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민재의 머리에서 쏟아진 피가 빗물과 뒤섞여 지유의 신발 코를 적시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신문사에서 기사를 찢기고 쫓겨난 민재가 공중전화 부스에 뛰어들어 다이얼을 돌렸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튀어나온 한양토건 사내들의 굵은 각목이 부스의 전면 유리를 그대로 박살 냈다.
민재는 수화기를 손에 쥔 채 바닥에 고꾸라졌고, 피를 흘리면서도 헐떡이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지유야…… 재환이…… 재환이한테……."
사내들은 인기척이 나자 피 묻은 각목을 챙겨 골목 너머로 달아났고, 뒤이어 달려온 지유는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를 온몸으로 움켜쥐었다.
덜렁거리며 허공을 맴돌던 검은 수화기에서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뚜- 뚜- 하는 연결 신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귀를 에는 듯한 잡음 너머로, 칠백여 일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 나직하고 서늘한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남원입니까."
재환의 목소리였다.
남원을 떠나던 날,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푸른 노을을 바라보며 속삭이던 그 다정함 대신, 관악산의 칼바람과 수천 권의 법전을 홀로 삼켜낸 청년의 메마르고 단단한 숨결이 묻어 있었다.
지유는 목구멍을 틀어막는 오열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 안쪽이 터지며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지유니? 지유야, 너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단번에 흔들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재환의 음성에 균열이 일어났다.
지유는 부스 바닥에 피를 흘리며 밭은 숨을 내쉬는 민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삼거리 김밥집 주방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흑청색 얼룩을 남겼던 잉크병을 떠올렸다.
'내 사람이 되라'며 비열하게 턱을 치켜들던 민선 시장 강태석(姜泰錫)의 번뜩이던 안광과, 병원의 어머니를 내쫓겠다고 으르렁거리던 살기 어린 협박.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재환아, 남원은 지옥이야.
네 아버지가 빼앗아 간 과수원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죽었고, 강태석은 우리 집을 부수려 하고, 민재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
제발 돌아와 줘.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비명이 혀를 마비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지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수화기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신림동 단칸방에서 뼈를 깎으며 법을 세우려던 성재환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남원으로 달려올 것이다.
법복도, 정의도, 그가 가슴에 품은 서슬 퍼런 만년필의 맹세도 모두 무너진 채, 성호석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쓰고 강태석의 발밑에 내던져질 터였다.
3. 빗소리에 묻어난 거짓말
"……재환아."
마침내 지유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빗물과 피 냄새가 뒤섞인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지유는 온 힘을 다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아랫배에 힘을 주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숨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배어 있었다.
"지유야!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어디야? 숨이 왜 그렇게 거칠어?"
재환의 목소리는 이미 다급함을 넘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서울의 공중전화 부스 유리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환은 남원에서 걸려 온 이 전화가 결코 평범한 안부일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평소의 지유라면 절대 인쇄소 전화를 통해 불시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우체국 앞을 지나다가 동전이 있어서 걸었어."
지유는 피 흘리는 민재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거짓말을 지어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빗물과 함께 뚝뚝 떨어졌다.
"거짓말하지 마. 너 지금 울고 있잖아."
재환의 서늘한 질책이 수화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수천 번의 판례를 읽고 인간의 심연을 파헤치는 법리를 파고들던 그였다.
지유의 숨결 한 토막, 떨리는 음절 하나만으로도 재환은 수화기 반대편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유야.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어머니는 편찮으신 데 없어? 삼거리 가게는…… 강태석 그자가 찾아왔니?"
강태석이라는 이름이 재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지유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재환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미 남원의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부친의 비리 수첩을 품에 안고 남원을 떠났던 소년은, 이미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죄악의 구조를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재환아. 정말 아니야……."
지유는 가슴을 쥐어짜며 억지웃음을 흘려보냈다.
그 웃음소리는 처연하게 부서져 오히려 재환의 폐부를 잔인하게 찔렀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계셔. 가게도…… 하은이랑 민재가 많이 도와줘서 아무 문제 없어. 오늘 비가 와서…… 손님이 일찍 끊겼거든. 그래서 그냥 네 생각이 났을 뿐이야. 정말이야, 재환아."
"그럼 왜 손을 떨고 있어."
재환의 단호한 목소리가 지유의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지유야. 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숨을 참는다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재환의 목소리에 처절한 고통이 묻어났다.
서울 신림동의 축축한 골목길, 녹색 공중전화기를 쥔 재환의 이마에는 핏줄이 굵게 솟아 있었다.
그는 지유가 자신을 위해 진실을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명백히 깨닫고 있었다.
남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유가 얼마나 끔찍한 진흙탕 속에 홀로 서 있는지 알면서도 당장 달려갈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재환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4. 끝나가는 공부, 차오르는 시간
공중전화기의 계수기가 덜컥거리며 백 원짜리 주화가 소진되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을 울렸다.
삐- 삐- 삐-.
야속한 기계음이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재환은 주머니를 뒤졌지만 더 이상 동전이 만져지지 않았다.
비에 젖은 바지 주머니 안쪽에는 닳아빠진 법전 요약집과 백부의 각인 만년필만이 묵직하게 잡힐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환은 수화기를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던 불안과 슬픔이 일순간 서늘하고 거대한 결의의 빛으로 굳어졌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력한 동정이 아니었다.
지유를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영원히 건져 올리고, 부친과 강태석의 추악한 카르텔을 단숨에 목 베어버릴 절대적인 힘이었다.
"지유야, 내 말 잘 들어."
재환의 음성이 낮고 깊게 가라앉았다.
신림동의 차가운 빗소리조차 그의 단단한 목소리를 가로막지 못했다.
"조금만 더 버텨줘. 내 공부가 거의 끝나가."
지유의 숨이 멎었다.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재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유의 가슴속에 뜨거운 쇳물처럼 흘러들었다.
"1차 시험은 이미 수석으로 통과했어. 이제 다음 달이면 2차 마지막 시험이야. 내가…… 내가 반드시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내려갈게."
재환은 가슴 안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그 만년필 닙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남원여고 앞 문구점의 흑청색 잉크가 여전히 마르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겠다던 그 맹세는, 이제 재환에게 단순한 법조인의 사명이 아니었다.
남원에 홀로 남아 피눈물을 삼키고 있는 단 한 사람, 한지유를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숨줄이었다.
"내가 내려갈 때까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자들이 어떤 협박을 하든, 어떤 미끼를 던지든 절대 흔들리지 마. 네 아버지가 빼앗긴 땅, 네 어머니의 눈물, 그리고 네가 겪은 모든 굴욕…… 내가 전부 다 법정에 세워 단죄할 거야."
재환의 서늘한 선언에 지유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오열이 입술을 짓이기며 흘러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비치는 지유의 그 가녀린 떨림을 느끼며, 재환은 주먹을 세게 쥐어 피가 배어 나오도록 손톱을 살 속에 파묻었다.
"지유야. 약속했잖아. 광한루 오작교에서 내가 준 사진 뒤에 적힌 말, 기억하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의 뇌리에 흑청색 잉크로 정갈하게 새겨졌던 재환의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응…… 기억해, 재환아. 기억하고 있어."
지유는 깨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남원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버텨줘. 날 믿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줘."
5. 비명과 함께 끊어진 선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에게 안도의 숨을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경고음이 더욱 빨라지던 그 찰나, 남원의 공중전화 부스 밖 빗속에서 거친 엔진 소리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찢으며 깨진 부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양토건의 검은 승합차였다.
골목 너머로 달아났던 조폭들이 민재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어이, 저기 가시나 하나가 수화기 붙잡고 지랄하고 있네!"
"전화선 당장 뜯어버려! 번영회 서류도 저년 김밥집에 있어!"
육중한 쇠파이프를 든 사내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진흙탕을 튀기며 다가오는 거친 발자국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지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민재가 희미하게 눈을 뜨며 지유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지유야…… 도망쳐……! 전화 끊어……!"
"민재야!"
지유의 비명이 수화기를 뚫고 서울 신림동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둔탁한 쇠붙이가 부스 철골을 후려치는 파열음이 고막을 찢었다.
쾅-!
"지유야! 지유야, 무슨 일이야! 지유야!"
재환이 미친 듯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지유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쇠파이프로 유리를 때려 부수는 굉음, 민재의 처절한 비명, 그리고 거친 남자의 걸걸한 전라도 사투리 욕설이었다.
"이 년이 어디다 대고 꼬바르고 지랄이야? 전화선 끊어!"
뚝-.
거친 파열음과 함께 수화기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조차 사라졌다.
완벽한 정적.
그리고 차가운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뚜- 뚜- 뚜- 뚜-.
선이 끊겼다.
물리적으로 전화선이 절단된 완벽한 단절이었다.
재환은 끊겨버린 수화기를 손에 쥔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빗물이 처마를 타고 흘러내려 그의 이마와 뺨을 적셨지만, 재환은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던 지유의 마지막 비명.
민재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
그리고 남원을 집어삼킨 토건 폭력배들의 쇠파이프 소리.
모든 정황이 벼락처럼 재환의 뇌리를 강타했다.
지유가 보내왔던 그 모든 평화로운 엽서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삼거리 김밥집은 이미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지유는 피 흘리는 전장에서 홀로 그 썩은 권력의 아가리를 맨몸으로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서울에서 편안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 지유는 홀로 죽어가고 있었다.
"……크윽."
재환의 입에서 짐승의 신음 같은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는 쥐고 있던 수화기를 공중전화 박스 벽면에 거칠게 내리찍었다.
쾅-!
플라스틱 수화기가 깨져 나가며 파편이 튀었고, 재환의 주먹에서 붉은 피가 터져 흘러내렸다.
그러나 주먹의 고통 따위는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죄책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 안주머니의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담긴 만년필.
그 차가운 금빛 닙을 응시하는 재환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어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사법시험 2차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한 달.
그 한 달을 버텨내어 합격증을 쥐는 것만이 남원으로 내려가 합법의 칼날로 그자들의 목을 벨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재환은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쥐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신림동 고시촌의 좁은 언덕길을 오르는 그의 등 뒤로, 서울의 차가운 빗줄기가 장검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6. 어둠 속의 결의
남원 동문 우체국 앞.
전화선이 끊겨 덜렁거리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지유는 온몸을 던져 바닥에 쓰러진 민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지유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찍으려던 찰나였다.
"야, 이 개자식들아! 게서 뭣들 허냐!"
골목 저편에서 굵직한 호통 소리와 함께 남원 공설시장 야채 트럭의 경적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새벽 경매를 준비하러 가던 시장 상인들의 트럭 두 대가 라이트를 상향등으로 켠 채 골목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사내들은 혀를 차며 쇠파이프를 거두었다.
"쳇, 재수 없는 년. 시장님이 오늘 안에 끝내라고 하셨으니, 내일 날 밝으면 네년 김밥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아라!"
우두머리 사내가 침을 뱉고는 승합차에 올라타 빗길을 찢으며 사라졌다.
시장 상인들이 황급히 트럭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가 된 민재와 지유를 둘러쌌다.
지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빗속에서 부축을 받았다.
머리카락은 빗물과 눈물로 엉망이 되어 뺨에 들러붙어 있었고, 빗물에 젖은 옷자락에서는 쇠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풍겼다.
민재는 상인들의 손에 이끌려 야채 트럭 조수석에 실려 남원의료원 응급실로 긴급히 옮겨졌다.
지유는 홀로 비를 맞으며 끊어진 공중전화 부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매달려 빗물을 맞고 있는 검은 전화선.
그 선 너머로 들려오던 재환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유의 귓가를 맴돌았다.
'조금만 더 버텨줘. 내 공부가 거의 끝나가.'
그 한마디가 지유의 심장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폈다.
재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숨기려 했던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먼 서울의 차가운 단칸방에서도 이미 다 느끼고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교복 주머니 안쪽에 소중히 간직해 둔 하얀 손수건을 만졌다.
비록 빗물에 젖었을지언정, 그 속에는 재환이 남겨두고 간 학생증 사진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지유는 깨물었던 입술을 닦아냈다.
손등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빗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강태석은 오늘 밤 김밥집을 부수고 어머니를 쫓아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유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카운터 밑바닥에 숨겨진 아버지의 환지 비리 서류, 그리고 재환이 돌아올 때까지 지켜내야 할 삼거리 김밥집의 터전.
지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삼거리 골목을 향해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남원을 뒤덮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