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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2화

상인회의 분열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밥물 끓는 새벽의 불협화음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어둠은 늘 쌀뜨물 냄새와 참기름 타는 구수한 냄새로 먼저 지워지곤 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백열전구가 젖은 흙바닥을 주황빛으로 희미하게 물들이는 새벽 네 시 반.

 

한지유는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지하수에 쌀을 씻어 무쇠 솥에 안쳤다.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간 뒤로 벌써 여러 날이 지났지만, 솥뚜껑을 닫을 때의 묵직한 손맛만큼은 어머니의 손길 그대로여야 했다.

 

단 한 톨의 밥알이라도 설익거나 타면 단골들의 혀끝이 먼저 알아채고 말 터였다.

 

부엌 쪽문 너머로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가 삐걱거리며 요란하게 다가왔다.

 

신문 배달 자전거가 아니었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거친 발걸음 소리가 삼거리 김밥집 쪽으로 꺾여 들었다.

 

"지유야! 지유 있냐?"

 

유리창을 거칠게 두드리는 손길에 지유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홀 쪽으로 걸어 나갔다.

 

출입문을 열자 들이닥친 사람은 길 건너편에서 남원 칠기사를 운영하는 배 씨였다.

 

새벽 찬바람에 벌겋게 튼 뺨을 한 배 씨는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밀지도 않은 채 문지방만 딛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아저씨, 이 새벽에 어쩐 일이세요? 아직 밥 뜸 들이는 중인데요."

 

지유의 담담한 목소리에도 배 씨는 낯빛을 굳힌 채 연신 골목 양쪽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양 불안에 쫓기는 눈동자였다.

 

"밥 사러 온 게 아니여. 너, 오늘 아침 번영회 사무실에 갈 거지? 아니, 가야 혀. 꼭 가야 써."

 

배 씨의 메마른 입술 틈으로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번영회요? 상인회 임시총회는 내일모레로 잡혀 있지 않나요?"

 

"임시총회고 나발이고 간에 날이 밝으면 구도심 상인들 죄다 회관 2층으로 모이기로 방금 연락이 돌았단 말이다. 한양토건 박 회장 그 양반이 어제저녁에 번영회 임원들 싹 불러다가 밥을 거하게 샀다는디…… 시장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다는구나."

 

배 씨는 지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흙바닥에 박힌 신발 코만 내려다보며 말을 짓씹었다.

 

"평당 백삼십 프로 보상금에 새 건물 상가 우선 입주권 준다는 거, 그거 이번 주 안으로 도장 안 찍으면 국물도 없다고 못을 박았대. 시청에서 강제 수용 공람 공고를 띄워버리면 그땐 감정평가 금액대로 헐값에 쫓겨난다고…… 다들 눈이 뒤집혔어."

 

지유는 조용히 배 씨를 응시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소방과 놈들이 억지를 부린다며 함께 분통을 터뜨려주고, 주방 방염 작업을 할 때 목공소 윤 씨와 함께 팔을 걷어붙였던 이웃이었다.

 

그러나 지금 배 씨의 목소리에는 연대감 대신 은근한 원망과 초조함이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지유 너, 끝까지 버틸 생각은 아니지? 네 사정 딱한 거야 온 동네가 다 알지만서도…… 이 골목 삼만 평이 관광특구로 묶여서 천지개벽을 한다는데, 네가 알박기처럼 버티고 서 있으면 우리더러는 다 같이 굶어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냐?"

 

"아저씨."

 

"네 아부지 일은 참으로 안됐고 원통한 일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네 어머니 병원비도 그렇고…… 시에서 줄 때 챙겨서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너한테도 수지맞는 장사여. 괜히 어린것이 고집 피우다가 온 동네 원망 한 몸에 다 살라 그러냐?"

 

배 씨는 쏘아붙이듯 말을 뱉어놓고는 제 발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황망히 골목 저편으로 달아나 버렸다.

 

닫히지 않은 알루미늄 문틈으로 날카로운 골목 바람이 밀려들었다.

 

지유는 한동안 문고리를 잡은 채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슴속 깊은 곳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보상금 백삼십 프로.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

 

강태석이 던진 그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미끼는 수십 년 동안 끈끈하게 이어져 온 골목의 온기를 하룻밤 사이에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강태석의 불의나 과거의 조작된 환지 비리를 탓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앞을 가린 것은 오직 내 눈앞의 이익을 가로막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살기등등한 셈법뿐이었다.

 

2. 번영회 2층의 아수라장

 

아침 여덟 시 반, 남원 구도심 번영회 사무실이 위치한 낡은 2층 건물 계단은 이른 시각부터 상인들의 발길로 삐걱거렸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사무실 안쪽은 이미 백여 명의 상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벽면에는 전날 시청에서 보내온 '남원 구도심 동충동 및 요천 변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 지정 열람 공고' 대형 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공고문 한가운데 박힌 남원시장 강태석의 굵직한 직인이 마치 점령군의 깃발처럼 번들거렸다.

 

"조용들 하쇼! 다들 자리에 앉으란 말이요!"

 

상인회 번영회장이자 중앙통에서 포목점을 크게 하는 오 씨가 단상의 탁자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그의 양옆으로는 한양토건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빛으로 상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동충동 구도심 상인들의 백년대계가 걸린 날이요. 시청에서 강태석 시장님이 특별히 우리 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파격적인 보상 대책을 들고나왔단 말이요. 평당 백삼십 프로 현금 보상! 요천 변에 새로 들어설 지상 5층짜리 현대식 테마 상가에 평수 그대로 1순위 분양! 이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단 말이요?"

 

오 회장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맞소! 이 썩어빠진 목조 판잣집에서 쥐새끼들하고 언제까지 비비고 살 거여! 이번 기회에 싹 밀고 새 점포 받아서 장사해야지!"

 

기름집을 하는 김 씨가 목청을 돋우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시장님이 선거 때 공약하신 걸 이렇게 화끈하게 지켜주는데 우리가 발목을 잡아서 쓰겠소? 지체되면 보상금이고 뭐고 다 날아간답디다!"

 

찬성 측 상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들 뒤편, 수십 년째 흙 묻은 채소를 팔아온 노점상들과 골목 안쪽 세입자 상인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이보쇼, 오 회장님! 말은 똑바로 해야지!"

 

철물점을 하는 늙은 최 씨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평당 백삼십 프로 주는 건 자기 땅 가진 건물주들 이야기지, 우리 같은 영세 세입자들은 어쩌란 말이요? 이주대책비 고작 석 달 치 쥐여주고 나가라는데, 그 돈 들고 남원 시내 어디 가서 가게 문을 연단 말이요! 새 상가 분양권? 거기는 평당 건축비가 얼만데 우리 같은 푼돈 장사꾼들이 거길 들어가요! 그건 들어가서 죽으라는 소리지!"

 

"최가놈 저거 또 헛소리하네!"

 

맞은편에서 떡집 주인 박 씨가 핏대를 세우며 맞받아쳤다.

 

"대세를 따라야지, 대세를! 법으로 정비구역 묶여서 수용 재결 떨어지면 세입자 보상금이고 나발이고 한 푼도 못 건지고 쫓겨나는 거 몰라서 그래? 시에서 개발해 준다 할 때 엎드려 절하고 받아먹어야지, 뭔 놈의 앙탈이여!"

 

"뭐라고? 네놈은 건물주 밑에서 뒷돈이라도 처먹었냐? 어찌 그리 사람 목을 졸라!"

 

욕설과 고성이 뒤엉키며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치달았다.

 

멱살을 잡으려는 상인들과 이를 뜯어말리는 이들 사이로 거친 밀침이 오갔다.

 

그때, 삐걱거리는 나무 문이 열리며 단정한 남색 코트 차림의 한지유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취재 수첩을 쥔 최민재와 굳은 표정의 윤하은이 뒤따랐다.

 

순간, 들끓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순 고요해졌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지유에게로 꽂혔다.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 죄책감을 감추려 일부러 독기를 품은 눈, 동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비겁한 눈동자들이 여린 여학생의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어, 지유 왔냐? 안 그래도 네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지유야, 너도 여기 삼거리 상인회 정식 회원이니 내가 어른으로서 좋게 타일러주마. 네 어머니 병원 계신 건 온 동네가 다 알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니 더더욱 이번 보상 협의에 네가 앞장서서 도장을 찍어야 혀. 김밥집 그 낡은 땅뙈기 팔면 어머니 수술비 대고도 서울 가서 보란 듯이 대학 등록금까지 다 댈 수 있잖냐. 안 그러냐, 여러분?"

 

"그렇지! 어린것이 영악하게 굴면 못써!"

 

"지유야, 네가 도장을 찍어야 우리 블록 전체가 일괄 보상 대상이 된단다! 네가 버티면 우리까지 보상금 지급이 무기한 연기된대!"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압박과 회유의 목소리가 지유를 에워쌌다.

 

그것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건네는 조언의 탈을 쓴 가장 잔인하고 비열한 폭력이었다.

 

지유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신발 밑창이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누르는 소리만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울렸다.

 

"회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어르신들."

 

지유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자욱한 담배 연기를 가르고 사무실 구석구석까지 얼음장처럼 차갑고 맑게 박혔다.

 

"시청에서 내건 보상 계획서 뒷면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지유는 코트 주머니에서 전날 밤새 꼼꼼히 붉은 줄을 쳐가며 분석했던 시청 공람 문서 사본을 꺼내 들었다.

 

"토지보상법상 협의 보상은 전체 토지주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시에서는 왜 굳이 일주일이라는 기한을 정해두고, 개별적으로 동의서를 내지 않으면 공탁을 걸어 강제 수용하겠다고 협박하는 걸까요? 법적으로 정비구역 지정 공람 기간은 최소 14일 이상 주민 의견을 수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원시는 지금 단 사흘 만에 상인들의 도장을 걷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왜겠습니까?"

 

상인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오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 이 계집애가 어디서 어설픈 법조문을 주워듣고 와서 어른들 모인 자리에서 말대꾸질이야! 시장님이 특별히 배려해서 빨리 돈을 쥐여주겠다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여!"

 

"배려가 아닙니다. 속임수입니다."

 

지유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남원시청이 제시한 보상 감정평가 기준일은 3년 전 기준입니다. 3년 전 공시지가에 백삼십 프로를 얹어봐야, 지금 요천 변 실제 거래 시세의 70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은 공짜로 주는 게 아닙니다. 평당 6백만 원이 넘는 추가 건축 분담금을 내야만 입주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그 분담금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이 대체 몇 분이나 계십니까? 땅과 가게를 헐값에 넘겨주고 나면, 결국 이 자리에 남는 것은 한양토건의 고층 빌딩뿐이고 우리 상인들은 남원 외곽 자갈밭으로 쫓겨날 뿐입니다."

 

사무실 안이 일렁였다.

 

개발의 환상에 들떠 있던 몇몇 상인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뭐, 뭐라고? 추가 분담금이 평당 6백이라고?"

 

"그게 정말이여? 오 회장, 그게 사실이요?"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자, 오 회장의 옆에 버티고 서 있던 한양토건의 떡대 사내가 거칠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 맹랑한 년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야, 네가 뭘 안다고 주둥이를 놀려? 네년 집안이 원래 남원 땅 갈취당했다고 시청에 앙심 품은 집구석인 거 모를 줄 알아?"

 

사내의 육중한 손이 지유의 멱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지유의 뒤에 서 있던 최민재가 몸을 날려 사내의 팔을 낚아채며 앞을 가로막았다.

 

3. 칼날 위의 대치

 

"손 치워!"

 

최민재의 서슬 퍼런 일갈이 사무실 천장을 때렸다.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다. 한양토건 직원들이 왜 정당한 주민 의견 수렴 자리에 들어와서 폭력을 행사합니까? 취재 중인 카메라와 수첩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한 행동, 시청과 결탁한 건설사의 상인 협박 혐의로 내일 자 사회면에 그대로 실어드릴까요?"

 

민재가 목에 건 기자증과 비밀 수첩을 치켜들자, 떡대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내는 혀를 차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살기 띤 눈빛으로 지유와 민재를 짓씹듯 노려보았다.

 

단상 위의 오 회장이 삿대질을 하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최 기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야, 한지유! 너 똑똑히 들어라. 네가 여기서 아무리 바른 척 주둥이를 털어도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이 자리에 모인 상인들 80프로가 이미 찬성 서명지에 지장 찍었어! 너 혼자 끝까지 버텨서 우리 다 같이 망하게 만들 셈이냐? 네깟 년 하나 때문에 국책 사업이 엎어지면 그 원망을 네가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오 회장의 독기 어린 고함에, 찬성 측 상인들이 다시금 험악한 기세로 지유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맞아! 네가 뭔데 우리 밥줄을 쥐고 흔들어!"

 

"어린 게 귓구멍이 막혔나, 당장 도장 찍어!"

 

"네 엄마 살리고 싶으면 곱게 처신해! 동네 망신 그만 시키고!"

 

수십 명의 손가락질과 침 튀기는 비난이 지유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어릴 적부터 지유를 보며

"우리 동네 효녀"

 

라고 칭찬하던 방앗간 아주머니도, 김밥 속재료를 덤으로 얹어주던 채소가게 할머니도 차갑게 고개를 돌리거나 비난의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인간의 선의와 정이란 탐욕과 공포라는 거대한 맷돌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게 부서지는 것이었다.

 

하은이 지유의 팔을 꼭 붙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유야, 나가자…… 응? 여기서 이러다 무슨 일 나겠어……."

 

지유는 떨리는 하은의 손등을 가만히 덮어 쥐었다.

 

그리고 단상을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광한루원 오작교 아래를 흐르는 맑고 차가운 겨울 요천 물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도장 안 찍습니다."

 

지유의 단호한 선언이 아수라장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이 가게는 제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군 터전이고, 제 어머니의 목숨이 붙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훗날 반드시 정의를 세우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사람과의 맹세가 깃든 곳입니다. 불법과 속임수로 빼앗으려 드는 권력 앞에는, 단 한 뼘의 땅도, 단 한 조각의 흙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야! 한지유! 거기 안 서? 이 독한 년! 너 가만 안 둬! 내일부터 네 가게에 손님 한 발짝도 못 들어가게 할 테니 그리 알아!"

 

등 뒤로 쏟아지는 오 회장의 저주와 상인들의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지유는 계단을 내려왔다.

 

겨울 찬바람이 계단 입구로 몰아치며 지유의 코트 자락을 사납게 흔들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민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유를 불러 세웠다.

 

"지유야,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응, 괜찮아, 민재야.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험한 꼴 당할 뻔했어."

 

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쥐고 있던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재는 이를 악물며 번영회 건물 2층을 쏘아보았다.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 강태석이가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도 모르고 저러고 있어. 지유야, 저놈들 말 신경 쓰지 마. 내가 신문사에서 강태석이랑 한양토건 유착 관계 반드시 파헤칠 테니까."

 

"민재야."

 

지유가 민재의 옷소매를 살며시 잡았다.

 

"너도 조심해야 해. 아까 보니까 한양토건 사람들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어. 신문사 안에서도 네가 이런 일 취재하는 거 알면 위험해져."

 

"난 괜찮아. 기자 밥 먹으면서 이 정도 각오도 안 했겠냐. 그보다 지유 너…… 당장 오늘부터 가게가 걱정이다. 저 작자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민재의 우려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골목의 분위기는 이미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4. 차가운 골목, 얼어붙은 발길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삼거리 김밥집의 문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적막했다.

 

평소 같으면 우체국 직원들과 인근 상인들, 장을 보러 나온 손님들로 좁은 홀이 꽉 차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김밥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게 밖 골목길 건너편에는 오 회장의 사주를 받은 상인회 청년 둘이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며 김밥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사람들을 은근히 막아서고 있었다.

 

"어이, 김 주임! 오늘 점심 딴 데 가서 먹어. 저 집 김밥 먹었다가 동네 재수 옴 붙는다고 번영회에서 말 나왔어."

 

우체국 직원이 머뭇거리며 돌아서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똑똑히 보였다.

 

가게 안에는 참기름 냄새 대신 서글픈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은이 삶은 달걀을 썰다 말고 도마 위에 칼을 털썩 내려놓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제까지 다들 지유 너한테 고맙다, 대견하다 하던 사람들이잖아. 어떻게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변해? 저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어?"

 

지유는 묵묵히 썰어놓은 우엉조림을 통에 담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하은아, 울지 마. 저분들이 나빠서 그러는 게 아니야."

 

"뭐가 나빠서가 아니야! 저러는 게 악마지 뭐야! 지유 너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돈 때문이야. 그리고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지유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굳게 닫힌 건너편 상가들의 셔터로 향했다.

 

"강태석 시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다들 아니까…… 그 사람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10년 전부터 봐왔으니까 그래. 그래서 자기들이 살려고, 자기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나를 밀어내는 거야. 저분들도…… 겁이 나는 거야."

 

남을 원망하기보다 그들의 비겁함 이면에 숨겨진 공포를 먼저 헤아리는 지유의 말에, 하은은 더더욱 가슴이 미어지는지 앞치마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 드르륵 소리와 함께 가게 출입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지유와 하은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은 뜻밖에도 골목 어귀에서 구두 수선을 하는 지체장애인 김 씨 아저씨였다.

 

김 씨는 낡은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지, 지유야…… 김, 김밥 두 줄만…… 말아주라."

 

김 씨의 어눌한 말투에는 미안함과 따스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아저씨……."

 

"나, 난…… 땅도 없고, 가, 가게도 없어…… 그, 그렇지만 난 안다…… 네 아부지가…… 어, 어떤 분이었는지…… 너, 넌 잘못한 거 없다…… 기, 기운 내라……."

 

김 씨가 떨리는 손으로 건넨 그 거친 손길에, 지유의 눈가에 기어이 맑은 이슬이 맺혔다.

 

온 세상이 등을 돌리고 등을 떠밀어도, 진실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의 온기만 있다면 버텨낼 수 있었다.

 

지유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김 씨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지유는 가장 크고 실한 계란말이와 단무지를 듬뿍 넣어 정성스럽게 김밥 두 줄을 말았다.

 

그리고 참기름을 바른 뒤 호일에 정갈하게 싸서 김 씨의 품에 안겨주었다.

 

돈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김 씨는 한사코 세 장의 지폐를 카운터 위에 남겨둔 채 절룩이며 문밖으로 나섰다.

 

골목 건너편에서 감시하던 청년들이 김 씨를 향해 혀를 차며 째려보았지만, 김 씨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목발을 짚고 사라졌다.

 

지유는 카운터 위의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가만히 매만졌다.

 

이 돈은 단순한 밥값이 아니었다.

 

불의한 권력의 폭풍 속에서도 끝내 부러지지 말라는, 이 땅의 가장 낮고 힘없는 이가 건넨 거룩한 연대의 징표였다.

 

5. 은밀한 봉투와 검은 거래

 

어스름한 땅거미가 요천 변을 타고 내려앉을 무렵, 최민재는 남원일보사 기자실에서 빠져나와 구도심 상인회 사무실 뒤편 골목에 몸을 숨겼다.

 

오 회장이 낮 총회가 끝난 뒤 한양토건 사람들과 은밀히 저녁 자리를 갖는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번영회 사무실 뒷골목에 번쩍이는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인물은 한양토건의 박진철 회장이었다.

 

박 회장은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본 뒤 번영회 건물 지하 다방으로 들어갔다.

 

민재는 코트 깃을 바짝 올리고 발소리를 죽여 다방 입구 계단 참으로 접근했다.

 

지하 다방 구석의 밀폐된 칸막이 방에서 나직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민재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조심스럽게 작동시켰다.

 

"오 회장, 오늘 낮에 수고 많았소."

 

박진철의 기름진 목소리였다.

 

"아이고, 박 회장님. 말씀도 마십시오. 그 빌어먹을 김밥집 계집애가 어디서 법 조항을 달달 외워가지고 와서는 훼방을 놓는 바람에 간이 콩알만 해졌지 뭡니까."

 

"허허, 어린 계집애가 짖어봐야 며칠이나 가겠소? 중요한 건 상인들 동의서요. 몇 장이나 걷혔소?"

 

"지금 75프로 걷혔습니다. 내일모레까지 85프로 채워서 시청에 일괄 접수시킬 겁니다. 다만…… 그 노점상 늙은이들하고 세입자들이 아직도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하겠다고 지랄들을 해서……."

 

탁자 위에 묵직한 물건이 툭 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민재는 문틈의 좁은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박진철이 누런 서류봉투 하나를 오 회장의 가슴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봉투 입구가 살짝 벌어지며 그 안에 가득 찬 빳빳한 만 원짜리 돈다발이 드러났다.

 

"이건 강태석 시장님께서 특별히 전해드리라 하신 정성이요. 상인회 간부들 다섯 놈, 입 싹 씻고 끝까지 총대 매는 대가요. 계집애 가게는 우리가 사람을 써서 며칠 내로 물리적으로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 오 회장은 내일 아침 동네 방송으로 김밥집 불매운동이나 확실하게 밀어붙이쇼. 알겠소?"

 

"아이고! 시장님께서 이런 것까지……! 걱정 마십시오, 박 회장님! 그 계집애, 지 애미 병원비 바닥나서 길바닥에 나앉을 때까지 이 골목에서 물 한 모금 못 사 먹게 말려 죽이겠습니다!"

 

오 회장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지하실 벽을 타고 흉물스럽게 울려 퍼졌다.

 

민재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다.

 

이것이었다.

 

상인회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한지유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붙인 진짜 이유.

 

그것은 지역 발전도, 상인들의 미래도 아니었다.

 

강태석 남원시장과 한양토건이 던져준 검은돈에 영혼을 팔아넘긴 어용 간부들의 추악한 배신극이었던 것이다.

 

민재는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어둠 속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이 증거를 쥐고 있어야 했다.

 

지금 섣불리 터뜨렸다가는 시청과 언론을 쥐고 있는 강태석의 손에 증거가 인멸될 뿐이었다.

 

신림동에서 칼을 갈고 있을 성재환에게 전달되어, 마침내 법의 심판대 위에서 강태석의 목을 벨 결정적인 비수가 되어야 했다.

 

6. 밤의 고독과 흑청색 맹세

 

밤 열한 시.

 

모든 가게가 셔터를 내리고 불을 끈 삼거리 골목은 얼음장 같은 적막에 갇혔다.

 

오직 삼거리 김밥집의 조그만 창문만이 희미한 주황빛을 내뿜고 있었다.

 

지유는 하은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뒤, 홀로 남아 주방 바닥을 닦아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가게는 유난히 넓고, 유난히 시렸다.

 

낮 동안 이웃들에게 들었던 모진 말들이 귓가에 맴돌며 가슴을 후벼 팠다.

 

'네깟 년 하나 때문에 우리 다 망하게 생겼다.'

 

'어린 게 영악해가지고…….'

 

'네 엄마 살리고 싶으면 곱게 도장 찍어.'

 

지유는 대걸레 자루를 쥔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툭툭 떨어졌다.

 

열아홉 살 소녀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었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매일 날아드는 병원비 청구서는 숨통을 조여왔다.

 

그리고 이제는 평생을 믿고 살아온 이웃들마저 등을 돌린 채 자신을 괴물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포기해 버릴까.

 

시장이 내민 손을 잡고, 돈을 받아 어머니를 더 좋은 병원으로 모시고, 이 지옥 같은 남원을 떠나버릴까.

 

마음 한구석에서 검은 유혹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유는 비틀거리며 카운터 뒤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서울 신림동에서 재환이 보내온 관제엽서들과 지유가 차마 부치지 못하고 써 내려간 수십 장의 답장 편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맨 위에 놓인 재환의 첫 관제엽서를 꺼내 들었다.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찍힌 엽서 뒷면, 지유가 선물했던 바로 그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재환의 반듯한 필체가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

 

'지유야, 신림동의 밤은 차갑지만 내 가슴속은 광한루원의 그 봄날처럼 뜨겁다.

 

나는 여기서 법을 배우고, 정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어떤 어둠이 너를 덮쳐도 두려워하지 마라.

 

반드시 법복을 입고 너의 곁으로, 남원으로 돌아가겠다.

 

나의 신념은 오직 너다.'

 

지유는 엽서를 가슴에 품어 안았다.

 

차가웠던 심장에 뜨거운 온기가 차올랐다.

 

재환은 지금도 서울의 좁은 고시원 단칸방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책과 싸우고 있을 터였다.

 

부친의 죄악을 짊어진 채,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청춘을 불사르고 있을 재환이었다.

 

그런 그에게 남원의 비극을 짐으로 얹어줄 수는 없었다.

 

그가 돌아올 자리를 지켜내는 것, 부친들의 죄악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 정직한 삶의 터전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만이 자신이 재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자 약속이었다.

 

지유는 눈물을 닦아내고 책상 서랍에서 하얀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지유의 손수건으로 곱게 싸두었던 흑청색 잉크병을 열었다.

 

펜촉에 잉크를 듬뿍 묻혀 사각거리며 글자를 써 내려갔다.

 

'재환아.

 

남원의 겨울밤은 요천 물소리와 함께 평화롭게 깊어가고 있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계시고, 삼거리 김밥집은 여전히 따뜻한 밥 냄새로 가득하단다.

 

오늘 낮에는 단골손님들이 찾아와 어머니의 쾌유를 빌어주셨어.

 

너의 빈자리가 문득문득 시리도록 그립지만, 네가 서울에서 보내준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내 안의 뿌리가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껴.

 

그러니 재환아, 뒤돌아보지 말고 너의 길을 가.

 

네가 가장 정의롭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나는 이곳 삼거리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게.

 

백 년이 걸려도 나는 여기서 널 기다릴 거야.'

 

거짓말로 가득 찬 편지였지만, 그 속에 담긴 지유의 순정과 결기만큼은 세상 그 어떤 진실보다 순결했다.

 

지유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려 편지를 정성스레 접어 양철 상자 속에 넣었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닫는 순간, 가게 밖 골목길에서 묵직한 쇠파이프가 바닥을 긁는 듯한 기괴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7. 찢겨진 천막 너머의 그림자

 

지유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자박, 자박.

 

거친 군화를 신은 서너 명의 발걸음 소리가 김밥집 유리창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이어지는 낮은 욕설과 함께 무언가 둔탁한 것이 가게 앞 처마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콰직!

 

천막이 찢어지고 나무 간판이 부서지는 비명 같은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지유는 반사적으로 부엌으로 달려가 식칼 대신 몽둥이처럼 굵은 대걸레 자루를 움켜쥐었다.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지만, 지유는 이를 악물고 홀로 나섰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셋이 쇠파이프를 든 채 가게 앞 천막을 난도질하고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가게 정면 유리창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큼지막한 글씨가 흘러내리듯 칠해지고 있었다.

 

'알박기 빨갱이 계집년, 동네 망치지 말고 썩 꺼져라.'

 

"누구야!"

 

지유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새벽을 가르는 맑고 날카로운 외침에 사내들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얼굴은 낯선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상인들이 아니었다.

 

한양토건 박 회장이 부린다던 음지의 용역 깡패들이었다.

 

사내 하나가 쇠파이프를 바닥에 탕탕 치며 비열하게 쪼개듯 웃었다.

 

"어쭈, 계집년이 겁도 없이 기어 나오네? 야, 좋은 말로 할 때 짐 싸서 꺼져라. 오늘 밤은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번엔 네년 대가리가 이 유리창처럼 박살 날 줄 알아."

 

사내는 들고 있던 페인트 통을 가게 문지방을 향해 내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페인트가 지유의 신발 코와 문짝에 피처럼 튀었다.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골목길 양옆의 상가 창문들에서 불이 하나둘 켜졌지만, 그 누구도 문을 열고 나와 지유를 도와주거나 깡패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창살 너머로 숨죽여 내다보는 차가운 눈동자들만이 붉은 피칠갑을 한 김밥집 앞의 어린 소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방조이자, 침묵으로 가담한 집단적인 린치였다.

 

지유는 대걸레 자루를 쥔 채 홀로 붉은 페인트 웅덩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밤바람이 찢겨진 천막 자락을 사납게 펄럭였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지유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바닥에 버려진 쇠파이프 조각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눈물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공포를 집어삼킨 지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거목의 뿌리 같은 서늘하고 거대한 분노가 똬리를 틀었다.

 

너희가 이 골목을 어둠으로 채운다면, 나는 기필코 이 어둠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너희의 죄악을 증언하리라.

 

지유는 대걸레를 들어 붉은 페인트가 튄 유리창을 묵묵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달빛조차 숨어버린 남원의 밤, 홀로 선 소녀의 싸움은 이제 막 진정한 사투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