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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1화

구도심 정비구역 지정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짓밟힌 찻잔과 새로운 흉계

 

남원시청 2층 시장 집무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출입문 너머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바닥에 나뒹군 청자 찻잔의 파편 사이로 뜨거운 작설차가 누런 웅덩이를 그리며 카펫을 적셔 들어갔다.

 

소방과 이진구 계장은 무릎을 꿇은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떨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양복 소매를 걷어붙인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이 핏발 선 눈을 부라린 채 서 있었다.

 

"뭐라꼬? 적합?"

 

강태석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집무실 공기를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원바닥에서 내 말 한마디면 기어가던 개새끼도 대가리를 박아야 정상인데, 쥐구멍만 한 분식집 하나를 못 털어? 닷새 시간을 줬더니 영업정지는커녕 합격 도장을 턱 찍어 바치고 와?"

 

강태석은 신고 있던 악어가죽 구두 끝으로 이진구의 턱 밑을 툭툭 찼다.

 

비열하면서도 잔혹한 폭력이 몸에 밴 자의 서슬 퍼런 위압감에 이진구는 연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시, 시장님! 그게 아니오라…… 삼거리 그 집이 목공소 윤가 놈이랑 합세해서 규격도 넘치는 난연 석고보드에 방염 도료를 싹 다 발라놨습니다."

 

"그래서? 털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구멍가게가 천지에 어디 있다고 변명을 지껄여!"

 

"거기다가…… 가스안전공사 1급 시공 증명서까지 완벽하게 끊어와서 버티는 바람에 현장에서 도저히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진구의 목소리는 공포로 울먹이고 있었다.

 

강태석의 눈썹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고작 여고 갓 졸업한 가시나 하나가 그 막대한 자재비랑 공사비를 하룻밤 사이에 어디서 끌어와?"

 

"그, 그게…… 신문사 수습기자 놈이 현장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 강태석의 동작이 굳어졌다.

 

"신문사 기자?"

 

"남원일보 완장을 찬 젊은 놈인데, 시장님께서 소방과장 앞으로 친필로 메모 남기신 걸 지 품속에서 꺼내 보였습니다."

 

이진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실토했다.

 

"시장실 내선 번호 백일 번에 시장님 서명까지 박힌 메모지를 들이대면서…… 직권남용에 표적 단속으로 내일 자 조간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박아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대는 통에……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장님!"

 

집무실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강태석의 거친 숨소리만이 책상을 뒤흔들었다.

 

시청 내부의 비밀 결재 라인 메모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는 것은, 자신의 발밑에 쥐새끼가 웅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직통 메모가 빠져나갔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비틀렸다.

 

시청 위생과와 소방과를 몽둥이 삼아 그 어린것의 숨통을 합법적으로 죄어주려 했건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자신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강태석은 바닥에 엎드린 이진구를 매섭게 노려보며 침을 뱉었다.

 

"누구냐. 그 메모지 넘긴 놈이 누구야."

 

"소, 소방과 내부를 은밀히 뒤지고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한 물증은……."

 

"당장 찾아내. 그 새끼 손모가지를 잘라서 시청 정문에 걸어놓기 전에 네놈 선에서 모가지를 따든가 파면을 시키든가 해!"

 

"예! 예, 시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썩 꺼져!"

 

강태석의 일갈에 이진구는 부서진 찻잔 파편에 손바닥이 찢기는 것도 잊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집무실 문을 빠져나갔다.

 

문이 쾅 닫히자 강태석은 목을 조여오던 넥타이를 거칠게 낚아채 풀었다.

 

그의 머릿속에 삼거리 김밥집 앞에서 마주했던 한지유(韓智裕)의 형형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남원의료원 병원비를 대납해 주겠다는 제안을 깍듯한 모욕으로 되돌려주며 돌아섰던 계집아이.

 

포클레인을 들이밀어도, 위생과를 풀어 기름병을 깨부숴도, 소방과를 동원해 닷새의 시한폭통을 안겨주어도 저 계집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잡초처럼 더욱 질기게 뿌리를 박고 서서 자신의 오만을 조롱하고 있었다.

 

'건방진 년. 시장 자리에 오른 이 강태석이를 상대로 잔머리를 굴려?'

 

그는 김밥집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지유의 꼿꼿한 허리와, 자신을 꿰뚫어 보던 차가운 눈빛을 곱씹었다.

 

억누를 수 없는 지배욕과 잔혹한 파괴 충동이 혈관을 타고 솟구쳤다.

 

개별 상가를 상대로 행정지도를 걸어 압박하는 방식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어설픈 잔매질은 오히려 언론의 먹잇감이 되거나 반발만 키울 뿐이었다.

 

상대를 확실하게 숨통 끊어놓으려면, 나무 한 그루를 도끼로 찍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산자락 자체를 불태워버려야 했다.

 

강태석은 책상 위의 인터폰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비서실. 박 회장 들어오라고 해."

 

2. 요천각 밀실의 결탁

 

남원 시내를 굽어보는 광한루원(廣寒樓苑) 뒤편, 울창한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요천각(蓼川閣)의 가장 깊숙한 안채 '매화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에는 기름진 얼굴에 금반지를 낀 사내, 토착 건설사인 한양토건의 박진철 회장이 비단 방석 위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강태석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 회장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강 시장님! 재선 취임하시고 시정 챙기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 이런 누추한 곳까지 친히 행차하셨습니까."

 

강태석은 대답 없이 털썩 상석에 앉아 양주잔을 채웠다.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가는 독한 알코올이 그의 끓어오르는 속을 짓눌렀다.

 

"박 회장. 쓸데없는 낯간지러운 소리는 집어치우고."

 

강태석이 얼음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박 회장을 쏘아보았다.

 

"지난번 지방선거 때 자네가 밀어 넣은 선거 자금, 이번에 몇 배로 불려서 챙겨주겠다고 내가 약속했었지?"

 

박 회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강태석의 안색을 살폈다.

 

"물론입니다, 시장님. 시장님께서 남원의 맹주로 계시는 한 저야 시장님 그림자만 밟고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 요천 변 수변 상업지구 건은 의회 조례 통과가 확실시되는 겁니까?"

 

"요천 변 수변 지구? 그딴 푼돈 장난질로 자네 배가 차겠어?"

 

강태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품속 안주머니에서 붉은색 결재인이 찍힌 기밀 서류 한 부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서류 표지에는 굵은 고딕체로 '남원 구도심 동충동 및 요천 변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 지정 기본계획(안)'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박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어 첫 장을 넘겼다.

 

"이, 이건……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일대부터 요천 제방까지 구도심 전체를 통째로 묶는 거 아닙니까?"

 

"그래. 면적만 삼만 평이다."

 

강태석은 시가에 불을 붙이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민선 1기 남원시의 최대 치적으로 포장할 거다. 춘향제와 연계한 대규모 전통 한옥 쇼핑 타운과 현대식 테마 상가를 유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거야. 도지사 결재 라인은 내가 이미 손을 써뒀고, 남원시의회 박동철 의장 패거리들한테는 상가 분양권 지분 떼어주기로 사전 입을 맞춰놨다."

 

"그렇다면…… 여기에 들어가는 토목과 기반 공사는 전부 저희 한양토건에?"

 

"관급 입찰은 형식일 뿐이야. 자네 컨소시엄에 단독 배정한다."

 

박 회장은 턱이 빠질 듯한 희열에 차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원 구도심의 노른자위 땅을 통째로 밀어버리고 현대식 상업 지구를 세우는 사업이었다.

 

공사비와 토지 차익만 따져도 수백억 원대의 천문학적인 이권이 걸린 판이었다.

 

"시, 시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성호석 그 샌님 자식이 시장으로 있을 때는 문화재 보호구역이니 뭐니 하면서 꽁꽁 묶어두던 걸, 시장님께서는 단칼에 풀어버리시는군요!"

 

성호석(成浩錫)의 이름이 나오자 강태석의 입가에 흉포한 미소가 걸렸다.

 

"성호석 그 인간은 지 손에 흙 묻히는 걸 무서워하던 위선자였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남원의 법은 내 주먹이고 내 결재 도장이야."

 

강태석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비벼 끄며 얼굴을 박 회장 쪽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하지만 박 회장,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서늘한 살기가 감돌자 박 회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정비구역 안에는 삼거리 일대 낡은 목조 상가 백여 개가 포함되어 있어. 그중에는 대대로 터를 잡고 장사해 온 똥고집 상인들이 수두룩하지."

 

강태석의 목소리가 뱀처럼 스산하게 기어 나왔다.

 

"그 구역 한가운데에 삼거리 김밥집이 있다."

 

박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원 바닥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었다.

 

강태석이 그 어린 여학생 하나를 꺾으려고 위생과와 소방과를 연달아 풀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물러섰다는 치욕적인 소문 말이다.

 

"그 김밥집 가시나 하나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졌어. 털끝 하나 못 건드리고 물러섰다고 뒤에서 수군대는 쥐새끼들이 있더군."

 

강태석의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가 어렸다.

 

"그래서 판을 뒤엎기로 했다. 개별 상가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시계획법과 공익사업법을 앞세워 합법적으로 동네 전체를 쓸어버릴 거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완장을 차면 저항하는 놈들은 전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파렴치한 알박기 빨갱이가 되는 거야."

 

박 회장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권력을 쥔 조폭이 법과 제도를 무기로 휘두를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되는지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시장님, 그럼 제가 움직여야 할 부분은……."

 

"상인회를 갈라쳐."

 

강태석이 잔인하게 웃으며 지시를 내렸다.

 

"자네 밑에 있는 용역 놈들 풀어서 상인회 감투 쓴 영감탱이들부터 은밀히 포섭해. 평당 보상금을 시세보다 삼십 퍼센트 더 얹어주고,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을 주겠다고 쑤셔 넣으란 말이다. 돈 냄새를 맡으면 늙은 쥐새끼들은 알아서 꼬리를 흔들게 되어 있어."

 

"아…… 상인들 스스로 내분을 일으키게 만들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이주 대책 위원회를 어용으로 꾸려서 찬성 도장을 찍게 만들어. 그렇게 여론을 몰아가면, 끝까지 버티는 놈은 이웃들의 밥그릇을 가로막는 역적이 되는 거다. 그 삼거리 김밥집 가시나를 동네 전체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서 사방에서 돌을 던지게 해."

 

강태석은 주먹을 쥐어 탁자 위의 서류를 쾅 내리찍었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그년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거다. 지가 아무리 악을 쓰고 버텨봤자, 함께 살던 이웃들이 손가락질하고 문을 닫으라고 꽹과리를 쳐대면 제풀에 지쳐 울면서 기어나올 수밖에 없어. 내 발밑으로 기어 와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때까지,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짓밟아라."

 

박 회장은 소름 돋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과연 시장님이십니다. 법과 돈으로 포위망을 치면 그 어린 계집이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내일부터 당장 상인회 회장놈부터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단단히 해. 이번 일에 빈틈이 생기면, 박 회장 자네 목숨줄도 장담 못 하니까."

 

강태석의 서슬 퍼런 경고에 박 회장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맹세를 올렸다.

 

밀실 밖 요천의 밤물결 위로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3. 시청 대회의실의 선전포고

 

이튿날 오후 두 시, 남원시청 본관 3층 대회의실은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인파와 취재진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단상 위에는 붉은색 플래카드가 위압적인 자태로 걸려 있었다.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춘향골 남원! 구도심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 지정 및 도시환경 정비사업 주민설명회'

회의실 앞자리에는 번쩍이는 금배지를 단 남원시의회 의원들과 지역 건설사 임원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영문도 모른 채 불려 나온 삼거리와 동충동 일대 상인 백여 명이 불안한 눈빛으로 웅성거렸다.

 

기자석 구석, 낡은 펜과 취재 수첩을 쥔 남원일보 수습기자 최민재(崔民在)의 시선이 단상 위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민재의 손에 쥐인 수첩 귀퉁이에는 '강태석 시장의 사적 보복'이라는 문구가 깊게 파여 있었다.

 

소방과의 표적 단속을 시장의 친필 메모 폭로 위협으로 무력화시킨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시장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터뜨린 안건이 바로 이 대규모 구도심 강제 수용 계획이었다.

 

'소방과로 털지 못하니, 이제는 도시계획법으로 동네 자체를 지워버리겠다는 건가.'

 

민재의 턱관절이 바짝 긴장으로 굳어졌다.

 

오후 두 시 정각, 회의실 문이 활짝 열리며 남원시장 강태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감청색 정장에 봉황 문양 시 배지를 가슴에 단 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나왔고, 앞자리에 앉은 관변 단체 회원들과 용역 세력들이 요란한 박수를 쏟아냈다.

 

강태석은 단상 중앙의 마이크를 잡고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객석 중간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구도심 상인들의 얼굴을 훑었다.

 

"존경하는 남원 시민 여러분, 그리고 유서 깊은 구도심을 지켜오신 상인 여러분."

 

강태석의 목소리는 시청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조폭 출신의 거친 음색을 감추고 지극히 정중하고 공익적인 정치인의 가면을 쓴 목소리였다.

 

"우리 남원은 춘향의 얼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구도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삼거리와 요천 변 일대는 칠십년대 지어진 낡은 목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화재와 붕괴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비가 오면 하수가 넘치고, 도로는 비좁아 소방차 한 대 제대로 지나가지 못하는 낙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객석 뒤편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언제까지 이 위험천만한 폐허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저 강태석은 민선 1기 시장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동충동 삼거리 일대 삼만 평을 '남원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으로 전격 지정 고시합니다!"

 

벽면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화려한 조감도가 비쳤다.

 

낡은 김밥집과 목공소, 쌀가게가 있던 자리는 온데간데없고, 유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현대식 쇼핑몰과 고급 한옥 식당가가 번쩍이고 있었다.

 

"이곳에 총사업비 육백억 원을 투입하여 최신식 상업 테마 타운을 조성할 것입니다. 낡은 상가를 허물고 남원의 백년 미래를 열겠습니다. 이를 위해 다음 달부터 해당 구역 내 모든 토지와 건축물에 대한 보상 감정 평가 및 강제 수용 절차에 착수할 것입니다!"

 

순간 회의실 뒤편에서 날카로운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시장님! 수용이라니!"

 

삼거리에서 30년 넘게 포목점을 해온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여기서 뼈를 묻고 평생 장사해 온 사람들이오! 수용을 당하면 우린 어디로 가란 말이요!"

 

술렁임이 순식간에 분노로 번져나갔다.

 

"맞소! 상인들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구역을 묶어버리는 법이 어디 있소!"

 

"우린 못 나갑니다! 당장 철회하시오!"

 

상인들의 격렬한 항의가 쏟아지자, 앞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벌떡 일어나 상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강태석은 여유롭게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상인 여러분, 흥분하지 마시고 제 말씀을 끝까지 들으십시오."

 

강태석의 입가에 교활한 독사가 똬리를 틀 듯 미소가 번졌다.

 

"남원시는 여러분의 희생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법이 정한 토지보상금 외에 남원시 특별 지원금을 평당 시세의 백삼십 퍼센트까지 파격적으로 책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조기 이주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 분들에게는 새로 들어설 관광 타운의 일층 핵심 상가 우선 분양권을 무상 수준으로 배정해 드릴 것입니다!"

 

'백삼십 퍼센트의 보상금과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

 

그 한마디에 소리를 지르던 상인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평생 쥐꼬리만 한 매상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영세 상인들에게 그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대한 유혹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상인들의 눈빛에 당혹과 흔들림,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강태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오늘 즉시 구도심 번영회장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비사업 주민추진위원회'가 발족합니다. 이미 대다수 상가 대표들께서 찬성 서명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강태석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지며 서늘한 칼날을 드러냈다.

 

"전체 남원 시민의 번영과 발전을 가로막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끝까지 사업을 방해하며 버티는 자가 있다면…… 남원시는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토지수용위원회의 강제 수용 재결과 행정대집행을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행할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억지 때문에 남원의 미래가 발목 잡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 회장의 사주를 받은 건달들과 관변 단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기자석에 앉은 민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버티는 단 한 사람.'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너무나도 명백했다.

 

강태석은 공권력과 거대한 자본, 그리고 '공공의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칼을 휘두르며 지유를 겨누고 있었다.

 

이것은 행정이 아니었다.

 

한 소녀를 사회적으로 말살하고, 이웃들의 손을 빌려 난도질하려는 가장 추악한 형태의 선전포고였다.

 

4. 갈라진 골목의 공기

 

주민설명회가 끝난 직후의 삼거리 골목은 기이한 침묵과 술렁임에 휩싸였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좁은 아스팔트 길 위로 낯선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한양토건의 박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 상인회 간부들이 서류철을 옆에 끼고 상가들을 하나하나 방문하기 시작했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문 너머로 그 광경이 고스란히 내다보였다.

 

한지유는 단정한 흰 앞치마를 두른 채 도마 위에서 당근을 채 썰고 있었다.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주방의 고요를 깨뜨렸다.

 

밤샘 병원 청소와 가게 일로 손끝이 부르터 있었지만, 칼을 쥔 지유의 손길은 흔들림 없이 정갈했다.

 

카운터 옆 작은 나무 의자에는 남원여고 교복을 입은 윤하은(尹夏恩)이 안절부절못하며 앉아 있었다.

 

하은은 김밥 포장용 은박지를 접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며 발을 굴렀다.

 

"지유야, 어떡해…… 방금 떡방앗간 김 씨 아저씨도 상인회 사무실로 불려 들어갔대. 벌써 절반 넘게 조기 이주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소문이 파다해."

 

하은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두려움이 가득했다.

 

"우리 아빠 목공소에도 아까 한양토건 사람들이 찾아왔었어. 보상금 후하게 쳐줄 테니까 지유네 김밥집 설득하는 데 앞장서라고…… 아빠가 소금 뿌려서 쫓아내긴 했는데, 다른 가게들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지유는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탁, 탁, 탁, 도마를 울리는 일정한 소리만이 지유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 김밥집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최민재가 뛰어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는 민재의 손에는 시청에서 배포된 정비구역 지정 고시문 사본이 쥐여 있었다.

 

"지유야!"

 

민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강태석 그 인간, 완전히 미쳤어. 소방 점검이 막히니까 아예 동충동 삼거리 전체를 관광특구로 묶어버렸어. 시의회까지 한통속으로 조례를 통과시켰다."

 

지유는 손을 멈추고 젖은 행주로 도마를 닦아낸 뒤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요천의 밤물결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관광특구 정비구역……?"

 

"그래. 도시환경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수용 권한을 따낸 거야."

 

민재는 이를 악물며 분통을 터뜨렸다.

 

"보상금 삼십 퍼센트를 더 얹어주고 신축 상가 분양권을 준다고 미끼를 던졌어. 상인들이 지금 눈이 뒤집혔다. 상인회장 그 인간은 벌써 찬성 추진위원장 감투를 썼고, 골목 전체가 너더러 왜 혼자 버텨서 동네 사업을 가로막느냐고 수군대기 시작했어."

 

하은이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유네 엄마 병문안 가자고 손 모으던 사람들이, 위생과랑 소방과 들이닥쳤을 때 같이 분통 터뜨려주던 이웃들이잖아! 어떻게 하루아침에 지유를 욕할 수가 있어?"

 

"그게 돈의 힘이고, 권력이 사람을 조종하는 방식이야."

 

민재가 쓰게 내뱉었다.

 

"강태석은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야. 지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웃들의 입을 틀어막고 손가락질하게 만들어서 지유를 고립시키려는 수작이라고."

 

지유는 카운터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탁자 위에 놓인 고시문을 집어 든 지유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서류 한가운데 박힌 대상 지번 목록.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182번지, 삼거리 김밥집.'

 

그 낡은 번지수 위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피땀 흘려 지켜냈던 과수원을 강탈당하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어머니의 삶의 터전마저 '공공'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지유는 카운터 아래 맨 밑바닥 들린 판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1991년 환지 처분 당시 성호석과 강태석의 비리를 증명하는 아버지의 피맺힌 서류철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의 수법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토지를 빼앗고, 명분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비열한 칼질.

 

그 칼끝이 10년 전에는 아버지를 찔렀고, 이제는 어머니와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지유야……."

 

민재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유를 불렀다.

 

"내가 남원일보 윗선 눈치 안 보고 기사 쓸게. 강태석이 과거에 성호석 전 시장이랑 짜고 친 환지 비리부터, 이번 정비구역 지정이 개인적인 보복이라는 의혹까지 다 파헤쳐서……."

 

"안 돼, 민재야."

 

지유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신문사에서 네가 그 기사를 쓰면, 기사는 나가지도 못하고 너만 잘려. 강태석은 신문사 광고비랑 사주를 쥐고 흔드는 사람이야. 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럼 가만히 앉아서 당하라는 거야? 저놈들이 다음 주부터 감정평가사들 끌고 와서 가게에 붉은 딱지를 붙일 텐데!"

 

"당하지 않아."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비쳐 드는 오후의 햇살이 지유의 맑고 서늘한 눈동자에 맺혔다.

 

"도망치지도 않을 거고, 그 사람들이 던져주는 피 묻은 돈에 도장을 찍지도 않을 거야."

 

"지유야……."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위해 남겨준 마지막 집이야. 그리고……."

 

지유는 교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품어둔 물건을 손끝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서울로 떠나기 직전,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재환이 건네주었던 학생증 증명사진.

 

그 뒷면에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새겨져 있던 단단한 맹세.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재환은 서울 신림동의 차디찬 고시촌 단칸방에서 법전을 파고들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재환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가 법복을 입고 당당히 돌아와 이 거대한 불의를 심판하는 그날까지, 자신이 이 남원의 뿌리를 지켜내야만 했다.

 

"재환이가 돌아올 자리를 지켜야 해."

 

지유의 담담한 고백에 민재와 하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공포나 슬픔을 뛰어넘은, 지독할 정도로 단단한 신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5. 고립의 서막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자 삼거리 골목의 공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낮 동안 상인회를 다녀온 이웃 상인들의 태도는 싸늘하게 돌변해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지유와 마주친 건어물전 아주머니는 눈길을 피하며 황급히 셔터를 내렸다.

 

지유 어머니와 함께 십수 년간 계를 하던 쌀가게 영감은 길 건너편에서 혀를 차며 침을 뱉었다.

 

"쯧쯧, 어린년이 독종도 유만부동이지. 지 혼자 잘났다고 버티다가 동네 사람 다 굶겨 죽일 작정인가."

 

"그러게 말여. 시에서 보상금을 삼십 퍼센트나 더 쳐준다는데, 저 가시나 하나 때문에 전체 사업이 묶이면 어쩔 뻔했어?"

 

"어미는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데, 딸년이 저리 눈치가 없어서야 원……."

 

수군거리는 칼날 같은 말들이 골목의 차가운 밤바람을 타고 지유의 귓전을 후벼 팠다.

 

어제까지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던 이웃들이었다.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잡아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탐욕과 공포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인정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유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삼거리 김밥집의 셔터를 내렸다.

 

철컹, 쇳소리를 내며 닫히는 셔터 문 뒤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어둠이 찾아왔다.

 

가게 안에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작은 식탁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지유는 낡은 의자에 앉아 품속에서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신림동에서 날아왔던 재환의 첫 번째 관제엽서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엽서에 적힌 재환의 단정한 필체를 쓸어내렸다.

 

'지유야.

 

관악산 자락에는 벌써 찬 바람이 분다.

 

너의 무릎 상처는 좀 아물었는지 매일 밤 걱정으로 잠을 설친다.

 

이곳 고시촌 헌책방 골목에서 나는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을 법의 칼을 갈고 있다.

 

반드시 합격하여 남원으로 돌아갈 테니,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다오.'

 

재환의 다정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지유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병원비와 핏빛 가득한 세탁실 청소 노동의 고통보다,

위생과의 폭력과 소방과의 협박보다,

지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웃들의 차가운 배신과 고립이 지유의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녀는 찢겨진 가슴을 부여잡고 책상 서랍에서 하얀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연필을 쥐었다.

 

'재환아.

 

남원은 여전히 평화롭고, 요천의 물결은 오늘도 맑게 흐르고 있어.

 

어머니의 건강도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보내준 엽서를 등불 삼아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어.

 

네가 돌아오는 날, 가장 따뜻한 김밥을 말아주마.

 

너는 그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너의 길만을 향해 나아가렴.'

 

거짓말로 가득 찬,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랑과 인내가 담긴 편지였다.

 

지유는 눈물로 얼룩진 편지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양철 상자 속에 넣었다.

 

부칠 수 없는 편지가 또 한 장 늘어났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풍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창밖 너머로 요천 제방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가물거렸다.

 

저 불빛 너머, 남원시청의 거대한 권력과 탐욕에 눈먼 상인들이 자신을 향해 벼랑 끝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유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또렷하게 빛나는 법이었다.

 

지유는 앙다문 입술로 어둠을 응시하며, 다가올 가혹한 겨울을 향해 홀로 발을 내디뎠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