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뿌리
1. 어둠을 뚫고 멎어 선 바퀴
푸르스름한 새벽안개가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좁다란 골목길을 짓누르고 있었다.
남원의료원 세탁실에서 밤새 락스와 피비린내에 절어 돌아온 한지유의 두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무장갑 속에서 땀과 차가운 물에 퉁퉁 불어터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낡은 판잣집 삼거리 김밥집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젖은 흙먼지 냄새를 뚫고 묵직한 디젤 엔진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광택을 번쩍이는 육중한 검은색 로얄 살롱 세단 한 대가 김밥집 차양 바로 앞을 비스듬히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보닛 앞머리에 번쩍이는 남원시 상징 봉황 문양 깃발이 새벽 찬바람에 날카롭게 파닥였다.
지유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뒷좌석의 짙게 선팅된 유리창이 천천히, 모터 돌아가는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어둠에 잠긴 차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번듯하게 빗어 넘긴 반백의 머리칼과 서슬 퍼런 눈빛을 번뜩이는 남자, 남원시장 강태석이었다.
강태석은 한 손에 불이 붙지 않은 굵은 시가를 만지작거리며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지유의 흙투성이 운동화와 락스 냄새가 진동하는 남루한 옷자락을 훑어 내렸다.
마치 발밑의 하찮은 벌레가 바둥거리는 꼴을 구경하는 듯한 조소와 기괴한 만족감이 그의 입꼬리에 번졌다.
지유는 숨을 들이켜며 턱을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피로로 충혈된 눈동자였지만, 그 속에 담긴 빛은 단 한 치도 흐려지지 않고 얼음송곳처럼 서늘했다.
"밤이슬을 꽤나 험하게 맞고 다니는구나."
강태석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차창 틈새로 고급 스킨 냄새와 눅눅한 담배 향이 지유의 코끝을 찔렀다.
"시정명령에 소방 점검까지 떨어졌으면 제 분수를 깨달을 줄 알았더니, 고작 계집애 혼자서 밤거리 막일을 뛰어?"
강태석의 입가에 비틀린 비웃음이 짙어졌다.
"내가 분명히 요천각에서 기회를 줬을 텐데. 내 손을 잡으면 네 어미 병원비는 물론이고 이 썩어빠진 판잣집 열 배도 넘는 상가를 남원 시내 복판에 얹어주겠다고."
"길을 막고 계십니다, 시장님."
지유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놀라울 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찢어질 듯 아려오는 무릎을 빳빳이 세운 채 차창 안의 강태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무로 오신 게 아니라면 제 집 앞 골목에서 관용차를 빼 주십시오.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원 천지에서 감히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자신의 관용차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은 자는 없었다.
하물며 손바닥만 한 김밥집의 핏덩이 같은 계집아이가 저토록 또렷하게 자신의 길을 비키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방진 것."
강태석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차창 틀을 탁탁 두드렸다.
"닷새다. 소방과 놈들이 네년 손에 쥐여준 계수명령서 기한이 이제 나흘 남았지. 금속 가스 배관에 자동소화기, 벽체 방염포까지 싹 갈아엎으려면 돈 삼백은 우습게 깨질 텐데. 피고름 묻은 환자복 빨아서 그 돈을 채우겠다고?"
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잔인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 애비 한석규가 왜 요천 둑에서 피를 토하고 뒈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은 정직하게 버틴다고 봐주는 곳이 아니다. 힘없는 자의 오기는 그저 개죽음의 밑거름일 뿐이야."
아버지의 이름이 강태석의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지유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지만,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 여기서 감정을 터뜨리는 것은 저자가 가장 바라는 굴복의 시작이었다.
지유는 한 걸음 다가가 차 문 바로 앞에 섰다.
"저희 아버지는 남에게 손 벌리거나 도둑질하지 않고 흘린 땀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아버지의 딸로 살아갈 겁니다."
지유의 맑고 서슬 퍼런 눈동자가 강태석의 얼굴에 꽂혔다.
"나흘 뒤에 소방과를 데리고 다시 오십시오. 법이 정한 기준이 무엇이든, 저는 제 힘으로 이 문을 지킬 테니까요."
강태석의 눈동자에 섬뜩한 경악과 모멸감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 깊은 밑바닥에서 어두운 정복욕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꺾이지 않는 풀잎을 기어이 짓밟아 으스러뜨리고 싶다는 가학적인 충동이었다.
"좋다. 어디 네년의 그 대단한 뼈대가 언제까지 버티는지 내 똑똑히 보마."
강태석이 창문을 올리라는 듯 손짓을 까딱했다.
스르륵 창문이 닫히며 묵직한 로얄 살롱은 좁은 골목길을 거칠게 빠져나갔다.
매캐한 매연이 새벽안개 속에 흩어졌다.
홀로 남겨진 지유는 다리가 풀려 차양 기둥을 붙잡았지만,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2. 문간에 모인 온기
덜컹거리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한 백색의 목공 냄새와 톱밥 가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지유야!"
안쪽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윤하은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하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뺨에는 하얀 석고 가루가 묻어 있었다.
하은의 뒤편으로는 목공소 윤 씨 아저씨가 굵은 뿔테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묵직한 대패와 방염 합판을 맞추고 있었다.
가게 구석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최민재가 낡은 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불을 피우고 있었다.
"너 괜찮아? 밖에서 웬 차 소리가 크게 나길래……."
하은이 지유의 얼음장 같은 손을 덥석 쥐었다.
밤새 세탁실 락스 물에 절어 하얗게 트고 갈라진 지유의 손을 본 하은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떻게 해…… 손이 이게 뭐야. 그 독한 병원 빨래를 기어이 혼자 다 하고 온 거야?"
"괜찮아, 하은아. 돈 받았어. 급전으로 야간 수당까지 쳐서 칠만 원 먼저 주셨어. 이거면 당장 방염 도료랑 가스 밸브 살 수 있어."
지유는 젖은 점퍼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일곱 장을 꺼내 보이며 애써 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공소 윤 씨가 대패질을 멈추고 거친 손으로 지유의 어깨를 툭 쳤다.
"바보 같은 녀석. 그런 돈 벌자고 몸을 버려?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시면 피눈물을 흘린다, 지유야."
윤 씨는 굵은 주름이 패인 얼굴로 혀를 찼지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연민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걱정 마라. 내가 목공소 구석에 처박아 뒀던 방염 석고보드 석 장이랑 규격 각목은 다 챙겨왔다. 요천 변 목재상 박가 놈이 시청 눈치 보느라 자재를 안 내주길래, 내가 읍내 건재상까지 리어카 끌고 가서 방염 페인트 두 통을 구해왔어."
윤 씨가 턱짓으로 주방 안쪽을 가리켰다.
이미 주방 천장의 낡은 합판은 뜯겨 나가 있었고, 그 자리에는 불에 타지 않는 회색 방염 석고보드가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난로 곁에 서 있던 최민재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민재의 점퍼 안쪽 주머니에는 전날 소방과 박영선 주임에게서 빼돌린 강태석의 친필 메모가 숨겨져 있었다.
민재는 지유의 핼쑥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강태석 이 개자식…… 널 기어이 파멸시키고 말겠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민재가 가방에서 두꺼운 철물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차디찬 쇳소리를 내며 쏟아진 것은 주방 가스 배관에 쓰이는 정품 금속 플렉시블 배관과 황동 차단 밸브였다.
"이건…… 민재야,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야?"
지유가 놀란 눈으로 묻자 민재가 머리를 긁적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우리 신문사 공판부 형님 중에 가스 배관 자격증 있는 분이 계셔. 시청 놈들이 꼬투리 잡을 수 없게 한국가스안전공사 검인 필증 찍힌 정품 자재로만 골라왔다. 오늘 점심때 그 형님이 직접 와서 배관 용접이랑 차단기 설치까지 해주시기로 했어. 시공 확인서까지 완벽하게 끊어줄 거다."
"민재야……."
"고마워할 거 없어. 강태석 그 인간이 남원을 다 집어삼킨 것 같아도, 이 골목 사람들 전부가 그놈 발밑에 엎드린 건 아니니까."
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비록 신문사 안에서는 수습기자라는 미명 아래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고 있었지만, 민재는 밤낮으로 강태석의 비리 장부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지유를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남원에 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하은이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지유의 손에 쥐여주며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지유야, 오늘은 가게 문 열지 마. 우리 넷이서 오늘 안에 주방 다 뜯어고치자. 시청 놈들이 흠잡을 곳 하나 없게 아주 번쩍번쩍하게 만들어 놓자고."
지유는 손에 쥔 따뜻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도망칠 줄 알았던 이 좁고 누추한 김밥집에, 여전히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흔들리던 무릎에 다시금 단단한 힘이 차올랐다.
"아니야, 문은 열 거야."
지유가 찻잔을 단숨에 비우고 결연하게 말했다.
"아침 김밥을 기다리는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들이랑 정미소 삼촌들이 있어. 장사를 멈추면 우리가 시청의 겁박에 밀려 문을 닫았다고 생각할 거야. 김밥 말면서 공사도 같이 할게."
윤 씨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지 애비를 쏙 빼닮았어. 성깔 하나는 남원 제일이야. 좋다! 하은이 너는 지유 김밥 마는 거 거들고, 민재 너는 나랑 저 천장 모서리 각목 좀 잡아라!"
새벽 6시, 낡은 김밥집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와 목공 톱밥의 쌉싸름한 냄새가 뒤섞이며 삼거리 골목의 아침을 깨우기 시작했다.
3. 흙먼지와 방염 페인트
오전 내내 김밥집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출근길에 김밥 두 줄을 사러 들른 동문 우체국의 늙은 집배원은 주방 천장에 매달려 각목을 덧대고 있는 윤 씨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지유야. 시청 놈들이 또 몹쓸 짓을 한 게로구나? 온 동네에 소방 점검이니 뭐니 소문이 파다하더니만."
"괜찮아요, 아저씨. 손볼 때가 돼서 고치는 중이에요. 오늘 김밥은 밥이 아주 고슬고슬하게 잘 됐어요."
지유는 정갈하게 만 김밥을 호일에 싸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손가락 끝이 욱신거렸지만 칼을 쥔 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굵기로 김밥을 썰어냈다.
손님들이 혀를 차며 동정 섞인 응원을 건넬 때마다 지유는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동정을 바라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민재가 데려온 가스 설비 기사가 묵직한 공구함을 들고 도착했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기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낡은 고무호스를 뜯어냈다.
"남원시청 소방과 놈들 아주 작정을 했구먼. 이 정도 영세 식당에 고압 금속 배관에 자동누설차단기까지 달라고 명령서를 내? 이게 어디 법대로 하는 짓인가, 사람 말려 죽이려는 짓이지."
"기사님, 법 조항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규정보다 더 엄격하게 해 주십시오."
가스 렌지 옆을 걸레로 닦아내던 지유가 고개를 들며 부탁했다.
기사는 지유의 결연한 눈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아가씨. 내가 가스안전공사 기준치보다 두 배는 굵은 주름관으로 돌려줄 테니까. 시청 놈들이 돋보기를 들이대도 트집 못 잡게 아주 자물통을 채워버릴 테니."
치이익, 푸른 불꽃을 뿜는 토치가 쇠 배관을 달구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주방 안은 금세 매캐한 금속 타는 냄새와 석고 가루로 뒤덮였다.
하은과 지유는 마스크를 쓴 채 붓을 들고 벽면 전체에 회색 방염 페인트를 덧칠했다.
페인트 특유의 시큼하고 톡 쏘는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러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지유야, 눈 따가워. 내가 벽 칠할 테니까 넌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하은이 눈물을 글썽이며 지유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같이 해야 해. 모서리 틈새 하나라도 방염 처리가 덜 되면 그 핑계로 영업정지를 때릴 거야."
지유는 까치발을 들고 손이 닿지 않는 환풍기 뒤편 벽체 구석까지 붓을 밀어 넣었다.
팔이 마비된 것처럼 저려왔고, 병원 세탁실에서 얻은 무릎의 통증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으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지유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민재였다.
"무리하지 마, 지유야. 여긴 내가 칠할게."
민재는 지유의 손에서 붓을 넘겨받아 묵직하게 벽을 쓸어내렸다.
민재의 이마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민재야, 신문사는 어쩌고…… 너 수습 기간이잖아. 이러다 선배들한테 찍히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남원일보 따위, 강태석이 돈 뿌려서 기사 사 먹는 쓰레기통인데 거기서 점수 따서 뭐 하겠냐."
민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벽을 칠했다.
"재환이한테 편지는 보냈어?"
민재의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지유의 붓질이 멈칫했다.
주방 구석에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지유는 더러워진 앞치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응. 어제 보냈어."
"설마…… 이번에도 아무 일 없다고 쓴 건 아니겠지? 가게가 이 꼴이 나고, 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데, 그걸 다 숨겼다고?"
민재의 목소리에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재환이한테 알려야 해, 지유야. 그 자식이 알아야 서울에서 무슨 수를 쓰든……!"
"재환이가 알면 어떻게 하겠어?"
지유가 민재의 말을 끊었다.
지유의 눈동자는 물기 하나 없이 맑고 단단했다.
"책 다 덮어두고 첫차 타고 남원으로 내려올 거야. 내려와서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든, 강태석을 찾아가든 길바닥에서 소리를 지르겠지. 그러면 뭐가 달라져, 민재야? 재환이는 아직 학생이야. 아무 힘도 없는 수험생이라고."
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성재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림동의 좁은 고시촌 단칸방에서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그의 엽서.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법언을 가슴에 품고 이를 악물고 있을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재환이는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해. 그곳에서 법복을 입고,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온전한 법의 칼을 쥐고 돌아와야 해. 그게 재환이의 싸움이야. 그리고 여길 지키는 건…… 내 싸움이고."
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지유의 말이 맞았다.
지금 재환이 남원으로 내려와 봤자 성호석의 아들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날개만 꺾일 뿐이었다.
민재는 입술을 깨물며 붓을 힘차게 놀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대신 똑똑히 봐 둬라. 네가 이 가게를 지키는 동안, 나도 저 개 같은 놈들의 목줄을 끊을 밧줄을 꼴 테니까."
주방 한편에서 말없이 파이프를 조이던 가스 기사가 땀을 닦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다 됐다. 아가씨, 메인 밸브 한번 열어봐."
치익, 밸브가 열리고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정확히 녹색 정상 수치에 안착했다.
배관 어디에서도 미세한 가스 누출음은 들리지 않았다.
주방 벽면은 불길이 닿아도 그을리지 않을 두꺼운 회색 방염 도료로 빈틈없이 코팅되어 있었다.
4. 양철 상자 속의 기도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목공소 윤 씨와 기사가 떠났다.
하은 역시 녹초가 된 몸으로 지유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가게 안에는 희미한 백열전구 불빛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홀로 남은 지유는 대걸레를 빨아 바닥에 떨어진 톱밥과 페인트 자국을 훔쳐냈다.
몇 번을 닦고 또 닦아냈는지 허리가 끊어질 듯 쑤셨다.
마침내 타일 바닥이 거울처럼 맑은 빛을 낼 때쯤, 지유는 카운터 구석의 낡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조용한 밤의 적막 속에서 요천 변의 바람 소리가 창문을 덜컹거렸다.
지유는 손을 뻗어 카운터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서울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관제엽서들이 정갈하게 묶여 있었다.
지유의 떨리는 손가락이 엽서의 거친 모서리를 매만졌다.
신림동 헌책방 골목에서 사법시험 1차 수험서를 뒤적이며, 좁은 단칸방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을 성재환.
지유는 교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냈다.
남원을 떠나던 날, 재환이 오작교 아래에서 잘라 건네주었던 사진.
뒷면을 돌리자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로 쓰인 글씨가 지유의 가슴을 저릿하게 적셨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는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사진 속 재환의 눈빛은 너무나도 곧았고, 그 눈빛이 지금의 지유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맨 밑바닥으로 걸어갔다.
발로 밟으면 삐걱거리는 들린 판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어둡고 눅눅한 틈새 속에 비닐로 꽁꽁 싸맨 누런 서류철이 얌전히 숨겨져 있었다.
'1991년 남원군 토지 환지 처분 이의신청서 및 원천 측량 대비표 원본.'
그 표지 위에는 성호석 전 시장의 직인과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시뻘건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 비옥했던 요천 과수원을 자갈밭으로 바꿔치기한 피 묻은 증거물.
강태석이 그렇게도 찾아서 불태워 없애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목줄이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어가며 남겼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았다.
'절대…… 빼앗기면 안 된다, 지유야…….'
지유는 서류철을 다시 비닐로 단단히 감싸 바닥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판자를 덮었다.
그 위에 굵은 쌀가마니를 올려 완벽하게 위장했다.
"아버지……."
지유는 텅 빈 가게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저 도망치지 않아요. 아버지 명예도, 재환이의 약속도, 그리고 우리 가게도…… 제가 다 지켜낼게요."
그녀는 붓을 들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재환에게 보내지 못할, 양철 상자 속에 차곡차곡 쌓여갈 또 한 장의 일기였다.
'재환아, 오늘 남원에는 별이 참 맑게 떴어.
요천 둑길의 수양버들은 여전히 푸르고, 바람은 네가 자전거를 몰던 그날처럼 시원해.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네가 돌아올 길목을 환하게 비춰두려고 가게를 더 예쁘게 단장했단다.
너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
내가 여기서, 네 뿌리가 되어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테니까.'
편지를 접어 양철 상자 맨 위에 얹어둔 지유는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웅크린 채 낡은 간이침대에 누워 흩어지는 새벽빛을 맞이했다.
5. 다시 울리는 군홧발
닷새의 유예기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약속된 금요일 오전 10시.
동문 우체국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과 함께 남원시청 관용 승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감청색 제복을 차려입은 소방과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서류철을 겨드랑이에 낀 소방과 검사계장 이진구가 서 있었다.
이진구의 얼굴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는 오만한 조소가 가득했다.
영세한 김밥집 따위가 닷새 만에 수백만 원짜리 소방 설비를 마쳤을 리 만무했다.
그의 서류철 안쪽에는 이미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영업장 사용 금지 및 폐쇄 계고서'가 끼워져 있었다.
시장실 직통 보고를 마치고 곧바로 포클레인을 부를 생각에 이진구의 걸음걸이는 의기양양했다.
"계장님, 정말 바로 폐쇄 딱지 붙입니까?"
뒤따르던 김 주임이 조심스레 묻자 이진구가 콧방귀를 뀌었다.
"시장실 특명이야, 김 주임. 법대로 원칙대로 털어서 1mm라도 규정 미달이면 즉시 문 닫게 해. 저 어린것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꼭대기에 대들더니 꼴좋게 됐지."
이진구는 구두코로 김밥집의 낡은 나무문을 거칠게 걷어차듯 밀고 들어갔다.
"소방과에서 개수명령 이행 실태 확인 나왔습니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들이닥친 이진구의 시선이 실내를 훑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가게 안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얀 앞치마와 위생모를 단정하게 착용한 한지유가 카운터 뒤에 꼿꼿한 자세로 서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유의 곁에는 작업복 차림의 목공소 윤 씨와,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빛으로 수첩을 쥐고 있는 최민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검 나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유의 음성은 맑고 차분했다.
이진구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서류철을 펼쳤다.
"흠! 흠!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넘어갈 줄 아나? 김 주임, 측정기 꺼내. 주방 가스 배관부터 샅샅이 뒤져!"
김 주임이 탐지기를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진구 역시 도끼눈을 뜨고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트집을 잡으려던 이진구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주방 벽면 전체가 틈새 하나 없이 완벽한 방염 규격 도료로 매끄럽게 마감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긁어보아도 가루 하나 묻어나지 않는 1등급 난연 마감이었다.
"이, 이게 뭐야……?"
이진구가 당황하여 턱을 떨었다.
천장 역시 노후 목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소방법 규격을 상회하는 불연 석고보드가 반듯하게 시공되어 있었다.
모서리 이음매마다 꼼꼼하게 알루미늄 방염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계장님! 여기 좀 보십시오!"
김 주임이 가스 렌지 아래쪽을 가리켰다.
벽을 뚫고 나온 가스 배관은 시중의 조잡한 관이 아니었다.
한국가스안전공사의 황금색 합격 필증 라벨이 선명하게 붙은 최고급 스테인리스 주름 금속 배관이었다.
그 위쪽 천장에는 화재 발생 시 자동으로 약제를 분사하는 원형 자동소화장치가 번쩍이는 금속 광택을 뽐내며 매달려 있었다.
가스 누출 감지기의 전원 램프에는 영롱한 초록색 불빛이 정상 작동 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누출 수치…… 제로입니다. 누설 경보기 연동 차단 밸브도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김 주임이 기계 판독기를 보며 얼떨떨하게 보고했다.
이진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마, 말도 안 돼…… 닷새 만에 이걸 다 했다고? 자격증도 없는 놈들이 야매로 붙여놓은 거 아니야?! 시공 확인서 내놔! 공인 면허 업체 확인서 없으면 전부 무효야!"
이진구가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때 뒤편에 서 있던 최민재가 품속에서 파란색 압인이 찍힌 두툼한 서류 한 장을 꺼내 이진구의 가슴팍에 탁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계장님."
민재의 입꼬리에 서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남원 1호 가스안전 1급 시공업체 '대륙설비' 대표 직인 찍힌 시공 증명서와 가스안전공사 검사 필증입니다. 자재 납품서부터 소방 약제 형식승인 번호까지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첨부해 뒀으니 꼼꼼히 확인해 보시죠."
이진구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가짜 서류가 아니었다.
남원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한 공인 설비 업체의 진짜 날인이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오히려 시청 청사 주방 설비보다 더 완벽하고 철저한 시공 상태였다.
6. 차가운 도장, 꺾이지 않는 눈빛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진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손에 쥐고 있던 폐쇄 계고서가 무색하게 구겨졌다.
시장실에서는 '무조건 흠을 잡아 당일 폐쇄 스티커를 붙이라'는 엄명이 내려와 있었다.
만약 이대로 그냥 돌아간다면 시장 강태석의 불같은 분노를 자신이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
이진구는 주방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며 환풍기 철망을 손톱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이, 환풍기! 환풍기 모터 쪽에 기름때가……!"
"계장님."
최민재가 나직하지만 뼈 있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남원일보 기자 수첩과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철컥, 셔터 장전음이 좁은 주방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9조와 시행령 별표를 다 뒤져봐도, 배기용 환풍기 날개의 유증기 흔적만으로 영업장 폐쇄 처분을 내릴 수 있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지금 계장님이 하시는 행위가 정당한 공무집행인지, 아니면 특정 상인을 표적으로 삼은 직권남용인지…… 사진 몇 판 찍어서 월요일 자 남원일보 1면에 올리면 되겠습니까?"
"뭐, 뭐라고?! 너 지금 공무원 협박하는 거야?!"
이진구가 새파랗게 질려 펄쩍 뛰었다.
"협박은 그쪽이 먼저 하셨죠."
민재가 한 걸음 다가서며 이진구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시장실 내선 101번. '삼거리 김밥집 노후 목조 구조 소방법 엄격 적용, 미이행 시 즉각 대집행 및 폐쇄 조치할 것. 7월 18일 강태석.'…… 이 메모, 어디서 많이 보던 문구 아닙니까?"
쿵, 이진구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장실에서 은밀히 내려온 하명 메모의 문구를 수습기자 애송이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읊고 있었다.
이 비밀이 새어 나갔다는 것은, 만약 자신이 여기서 무리하게 딱지를 붙였다가는 언론 폭로는 물론이고 정권이 바뀌는 날 자신 혼자 직권남용의 독박을 쓰고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진구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 너희들……."
"법대로 하러 오셨으면, 법대로 결재해 주십시오."
한지유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유는 카운터 위에 소방 점검 결과표를 반듯하게 펼쳐놓았다.
지유의 눈빛은 너무나도 투명하고 고요했다.
분노도, 원망도 없이, 오직 자신이 정당하게 일구어낸 진실만을 증명하겠다는 당당함이었다.
"모든 지적 사항을 법정 기준 이상으로 개수 완료했습니다. 확인 필증에 날인해 주십시오, 계장님."
이진구는 숨을 헐떡이며 지유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맑고 거대한 바위 같은 눈빛 앞에서, 시청 계장의 권력은 한낱 초라한 모래성에 불과했다.
뒤에서 김 주임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계장님…… 다른 상가 점검 일정도 밀려 있습니다. 여긴…… 흠잡을 게 정말 없습니다."
이진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치욕과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꺼내 점검표 하단의 '적합' 란에 거칠게 갈겨쓰듯 서명하고, 붉은색 확인 도장을 쾅 내리찍었다.
쾅!
붉은 인주 자국이 점검표 위에 선명하게 박혔다.
'1995년 7월 23일. 남원시청 소방과. 시설 개수 완료 확인. 적합.'
서류를 집어 던지듯 카운터에 내려놓은 이진구는 핏발 선 눈으로 지유를 노려보며 짓씹어 뱉었다.
"계집애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구먼…… 그래, 이번엔 용케 빠져나갔다 치자. 하지만 똑똑히 알아둬라. 시장님이 이 땅을 눈여겨보고 계신 이상, 네년이 여기서 밥장사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살펴 가십시오, 계장님."
지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진구는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승합차가 굉음을 내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7. 폭풍의 언저리에서
승합차 소리가 완전히 멎자, 가게 안을 짓누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일순간 풀렸다.
"해냈다…… 우리가 해냈어! 지유야!"
하은이 울음을 터뜨리며 지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은의 눈물이 지유의 어깨를 흠뻑 적셨다.
목공소 윤 씨 아저씨도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빌어먹을 놈들……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라고. 앓던 이가 다 빠진 것 같네."
윤 씨는 땀에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껄껄 웃었지만, 눈가에는 맺힌 눈물이 번졌다.
민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카운터 위에 놓인 '적합' 판정 서류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도장이 찍힌 서류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손끝에 묻어나는 붉은 인주가 차가웠다.
이겼다.
합법의 탈을 쓰고 목을 조여오던 거대한 권력의 횡포를, 오직 땀과 정직함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지유의 가슴속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쳐놓은 수많은 덫 중 겨우 하나를 걷어냈을 뿐이었다.
"민재야."
지유가 고개를 들어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 메모…… 시장실 직통 메모라는 거, 정말이야?"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태석이 소방과장한테 직접 지시한 친필 메모다. 그자가 널 노리고 있어, 지유야. 위생과도, 소방과도 전부 강태석이 네 숨통을 끊으려고 보낸 사냥개들이었어."
하은이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시장이…… 시장이 대체 왜 지유한테 그러는 건데? 지유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한 건 없어."
민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지유가 그자의 더러운 돈을 거절했고, 그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민재는 차마 카운터 밑바닥에 숨겨진 1991년 환지 비리 서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지유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알기에, 더는 하은까지 공포에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유는 조용히 카운터 뒤로 걸어가 앞치마를 고쳐 매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밤샘 노동과 공사로 상처투성이였지만, 김밥을 써는 도마를 행주로 닦아내는 손길은 정갈하고 단호했다.
"괜찮아. 내가 잘못한 게 없다면, 난 여기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
지유는 유리창 너머 맑게 갠 남원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요천을 지나 지리산 자락으로 뻗어 나가는 푸른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비바람이 아무리 사납게 몰아쳐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고목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직함과, 재환이 남겨준 법의 약속이 자신의 뿌리였다.
그 시각, 남원시청 2층 시장 집무실.
쾅!
육중한 참나무 집무용 책상이 부서질 듯 울렸다.
강태석은 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벽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쨍그랑하는 파열음과 함께 벽에 걸려 있던 남원시 지도 액자의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적합?! 소방 검사를 통과해?!"
강태석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떠는 이진구 계장과 소방과장을 향해 강태석의 구두발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이진구가 나뒹굴었다.
"밥통 같은 새끼들! 계집애 하나를 못 털어서 도장을 찍어줘?! 쥐새끼만도 못한 놈들!"
"시, 시장님…… 그게 아니라, 남원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게다가 시장님 친필 메모 이야기까지 흘러나와서……."
이진구가 피를 흘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읍소했다.
강태석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남원일보? 그리고 내 직통 메모……?'
시청 내부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태석의 뇌리를 더 강하게 후려친 것은, 자신의 권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한 덫을 온몸으로 깨부수고 당당히 살아남은 한지유의 얼굴이었다.
'내 손바닥 안에서 으스러질 줄 알았더니…….'
굴복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는 그 어린 계집아이의 서늘한 눈빛.
강태석의 입술 사이로 기괴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정복욕과 뒤틀린 살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따위 잔챙이 행정으로는 안 넘어오신다 이거지……?"
강태석은 깨진 유리 파편을 짓밟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남원 구도심의 낡은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강태석은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그의 잔혹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도시과장 불러와."
강태석이 비서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개별 상가 단속 따위 집어치워. 삼거리 일대 전부를 묶어버린다. 동충동부터 요천 변까지 통째로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해. 시의회 조례안 당장 통과시키고, 보상금 몇 푼 던져줘서 상인들끼리 물어뜯게 만들어."
강태석의 입꼬리가 흉측하게 찢어졌다.
"나무 한 그루를 못 뽑겠다면, 숲 전체를 불태워버리면 그만이야. 어디 그 알량한 뿌리가 타죽지 않고 배겨내는지 보자꾸나."
남원의 하늘 위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참혹한 먹구름이 소리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