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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9화

소방점검이라는 명목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은 관제 딱지

 

유리문 틈새로 스며든 새벽바람이 성에 낀 간판 모퉁이를 차갑게 긁어내렸다.

 

삼거리 김밥집 조리대 아래는 여전히 짭조름한 참기름 내와 옅은 락스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어제 남원시청 위생과 직원들이 군홧발처럼 짓밟고 간 자리였다.

 

깨진 참기름병 파편을 밤새 주워 담았던 한지유의 양손 끝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에는 밴드가 두 겹이나 덧대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쉴 틈 없이 나무 도마를 들어내고, 새로 사 온 얇은 플라스틱 도마를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에 얹었다.

 

일주일 안에 개선하지 않으면 영업정지 15일에 과태료 100만 원이라는 위생과의 1차 시정명령서가 벽면 낡은 달력 옆에 흉측하게 압정으로 박혀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해.’

 

지유는 차가운 수돗물에 손을 헹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남원의료원 3층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하루 입원비와 혈액투석 비용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맡을 짓눌렀다.

 

대입 모의 원서를 제 손으로 찢어버린 뒤로는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덜컹거리며 닫혀 있던 알루미늄 미닫이문이 거칠게 젖혀졌다.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지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어제의 위생과 직원들이 아니었다.

 

진회색 기동복 상의에 남원시청 자수가 선명히 박힌 점퍼를 걸친 장정 셋이었다.

 

가장 앞장선 사내는 각진 턱에 굵은 테 안경을 쓴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가슴팍 명찰에는 '소방과 이진구'라는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른 20대 후반의 김 주임은 손에 두꺼운 클립보드와 줄자를 쥐고 있었다.

 

"식품위생법 딱지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또 뉘쇼?"

 

골목 어귀에서 자재를 실어 나르다 황급히 뛰어 들어온 하은의 아버지, 목공소 윤 씨가 굳은 얼굴로 앞을 가로막았다.

 

이진구 계장은 윤 씨를 힐끗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코팅 공무원증을 꺼내 보였다.

 

"남원시청 소방과 특별안전점검반입니다. 방해하지 마시고 비키세요."

 

"소방과요? 우리 가게는 재작년 가을에 정기 점검 다 받고 필증까지 벽에 붙여 놨는디요! 저기 번듯하게 붙어 있는 거 안 보이시오?"

 

윤 씨가 벽면에 걸린 빛바랜 목재 액자를 가리켰다.

 

이진구는 코방귀를 뀌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건 1993년도 정기 점검이고요. 지금은 민선 1기 출범에 따른 '남원 구도심 노후 목조 상가 소방 시설 특별 안전점검' 기간입니다."

 

이진구의 목소리는 한 치의 온기도 없이 메말라 있었다.

 

"삼거리 일대는 1970년대에 지어진 노후 목조 건물 밀집 구역입니다. 화재 발생 시 대형 참사 위험이 극도로 높아 시정 방침에 따라 전수 조사를 실시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따르던 김 주임이 줄자를 탕 하고 튕기며 주방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안전화가 지유가 새벽 내내 닦아놓은 타일 바닥을 짓밟았다.

 

"잠깐만요! 신발은 벗고 들어가셔야죠! 여긴 음식을 만드는 주방이에요!"

 

지유가 두 팔을 벌려 막아서자, 김 주임은 들은 척도 않고 지유의 어깨를 툭 밀치며 조리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비키세요, 학생. 공무집행 방해로 고발당하고 싶습니까? 이봐, 김 주임. 가스 배관부터 재 봐."

 

이진구의 서늘한 지시에 김 주임이 가스레인지 뒤편을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계장님, 가스 연결 호스가 고무호스로 되어 있습니다. 노출 길이가 1미터를 초과했고, 중간 밸브 자동 차단 장치도 없습니다."

 

"적어라. 액화석유가스 안전관리 기준 위반. 금속 배관 교체 및 상업용 주방 자동소화장치 미설치."

 

이진구가 기계적으로 읊조렸다.

 

지유는 기가 차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저씨! 남원 시내 어떤 영세 식당이 백만 원도 넘는 자동소화장치를 달고 장사를 해요? 시장 통 통닭집도, 국밥집도 다 저 주황색 고무호스 써요!"

 

"다른 집은 다른 집이고, 여긴 오늘 점검 대상입니다."

 

이진구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누렇게 바랜 베니어합판 천장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자 푸석한 톱밥 가루가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천장 내장재 방염 처리 전무. 노후 목재 서까래 그대로 노출. 벽체 합판 방염 페인트 미도포. 화재 시 3분 내 전소 위험."

 

김 주임의 볼펜이 클립보드 위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살을 도려내는 칼소리처럼 날카로웠다.

 

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의 생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위생과가 휩쓸고 가더니, 오늘은 소방과였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정당한 법 집행도 아니었다.

 

어제 귓전을 맴돌던 강태석 남원시장의 비열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되살아났다.

 

'남원에서 내 호의를 걷어찬 대가가 어떤 건지,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내 똑똑히 봐주마.'

 

권력이라는 거대한 맷돌이 삼거리의 작은 김밥집 하나를 가루로 빻아버리기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2. 5일의 유예, 사형선고

 

"다 적었습니다, 계장님."

 

김 주임이 서류철을 넘기며 보고했다.

 

이진구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능숙하게 결재란에 서명하더니, 지유의 코앞으로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새하얀 갱지에 붉은 관인이 찍힌 공문서였다.

 

맨 윗줄에 굵은 고딕체로 박힌 글자가 지유의 눈을 찔렀다.

 

'소방 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에 따른 시설 개수명령서.'

 

지유의 시선이 아래로 빠르게 떨어졌다.

 

'1. 주방 가스 배관 전면 금속관 교체 및 상업용 자동소화장치 설치.'

 

'2. 영업장 내부 천장 및 벽체 전면 방염 내장재 시공.'

 

'3. 피난 유도등 및 비상 탈출 통로 확보.'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적힌 문구가 지유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개수 기한: 교부일로부터 5일 이내. 위 기한 내에 명령을 이행하지 아니할 시, 소방기본법 및 행정대집행법에 의거하여 즉각적인 영업장 폐쇄 처분 및 300만 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함. 남원시장 강태석.'

 

"5일이요?"

 

지유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나왔다.

 

"이 오래된 건물의 벽과 천장을 다 뜯어내고 방염 공사를 하라면서, 기한을 5일을 줘요? 주방 배관 공사만 해도 인부 부르고 자재 대려면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데!"

 

"규정이 그렇습니다."

 

이진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조리대 위에 탁 내려놓았다.

 

"요즘 삼거리 일대 개발 때문에 시정 감사가 엄격합니다. 특히 이 건물은 노후 목조 구조라 화재 취약 등급 D등급입니다. 불나서 옆 건물까지 다 태워 먹고 사람이라도 죽으면 학생이 책임질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참다못한 목공소 윤 씨가 이진구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섰다.

 

"내가 이 동네에서 목공일만 삼십 년을 했어! 이 천장 방염 공사하고 금속 배관 새로 짜 넣으려면 아무리 싸게 잡아도 삼백만 원이 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어린애한테 삼백만 원을 닷새 안에 구해다 공사를 하라는 게, 그게 나가 죽으라는 소리지 무슨 안전점검이야! 이 도둑놈들아!"

 

"공무원한테 도둑놈이라니, 말씀 삼가세요!"

 

이진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우린 법대로 집행할 뿐입니다. 5일 뒤인 금요일 오후 다섯 시, 현장 확인하러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시정 완료 안 되어 있으면 그 즉시 문 닫고 쇠사슬 채울 테니 그리 아세요."

 

이진구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뒤를 돌아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갔다.

 

김 주임도 줄자를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덜컹거리며 문이 닫히고, 적막이 덮쳐왔다.

 

조리대 위에는 붉은 관인이 찍힌 개수명령서가 흉터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삼백만 원.

 

지금 어머니 병원비도 내지 못해 매일 밤 원무과에 불려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루 동안 김밥을 백 줄, 이백 줄 말아 팔아봐야 손에 쥐는 돈은 고작 몇만 원이었다.

 

닷새 안에 삼백만 원을 구해 주방을 뜯어고치지 못하면 가게 문에 쇠사슬이 채워진다.

 

가게가 닫히면 어머니의 투석 치료는 그날로 중단된다.

 

그것은 곧 어머니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지유야……."

 

가게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하은이 바닥에 주저앉은 지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지유의 어깨를 적셨다.

 

"어떡해, 지유야…… 저 나쁜 놈들이 정말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했나 봐…… 위생과에 소방과까지…… 저게 시장이야? 저게 깡패지, 어떻게 시장이야!"

 

하은의 울음소리가 좁은 김밥집 안을 울렸다.

 

하지만 지유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말라붙은 눈동자는 오히려 차갑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유는 조리대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무릎을 곧게 폈다.

 

교복 치마 밑으로 감겨 있던 붕대 위로 핏물이 옅게 번져 나왔지만, 지유는 고통을 짓눌렀다.

 

"울지 마, 하은아."

 

지유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끝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원하는 게 바로 이거야. 내가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살려달라고 무릎 꿇는 거."

 

강태석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자비를 구하길 기다리는 그 잔인한 얼굴.

 

지유는 조리대 위의 개수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구겨지지 않게 반듯하게 접어 앞치마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절대 무릎 안 꿇어."

 

지유는 조리대 위로 손을 뻗어 단무지와 당근을 도마 위에 올렸다.

 

"닷새 남았어. 아직 닷새나 있어."

 

3. 추적하는 펜촉

 

남원 시내 동문 우체국 골목을 빠져나온 최민재는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채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의 가슴팍 안주머니에는 남원일보사 수습기자 신분증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신문사 편집국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사주와 편집국장은 강태석 시장의 '구도심 대개조 프로젝트'를 찬양하는 전면 기사를 1면에 싣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청 공보실에서 내려온 광고비 수천만 원이 인쇄 용지 대금으로 입금되었다는 소문이 복도에 파다했다.

 

민재는 구역질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소방 시설 특별 안전점검.’

 

오늘 아침 시청 출입 기자실 칠판에 적혀 있던 그 짤막한 한 줄을 본 순간, 민재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대상 상가 목록 맨 위에 적혀 있던 지번.

 

남원시 동충동 182번지, 삼거리 김밥집이었다.

 

민재는 시청 3층 복도 구석, 소방과 캐비닛 뒤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고참 주임 박영선이 담배를 태우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영선 주임은 민재의 외삼촌과 과거 남원 군청 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내던 인물이었다.

 

민재는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박 주임님."

 

박영선이 화들짝 놀라며 담뱃재를 털었다.

 

기자 완장을 찬 민재를 보자 그의 눈가에 짙은 경계심이 스쳤다.

 

"민재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신문사 들어갔단 소린 들었다만."

 

"주임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민재는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벽마다 귀가 달린 것처럼 살벌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늘 아침 삼거리 김밥집으로 나간 소방 특별점검, 과에서 정식으로 입안한 겁니까?"

 

박영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황급히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민재의 팔을 낚아채 계단 밑 어두운 보일러실로 끌고 들어갔다.

 

철문이 쾅 닫히고, 어두컴컴한 주황색 백열등 아래서 박영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 미쳤냐? 거길 네가 왜 들쑤셔! 그 집이 지금 어떤 집인데!"

 

"어떤 집이긴요! 부모 없이 아픈 어머니 모시고 하루하루 버티는 어린 여학생 집입니다!"

 

민재의 목소리에 서슬 퍼런 분노가 실렸다.

 

"어제는 위생과가 털더니 오늘은 소방과가 들이닥쳐서 5일 안에 300만 원짜리 공사를 하라고 개수명령을 때렸다면서요! 닷새 안에 공사 못 하면 강제 폐쇄라고요! 이게 정당한 행정지도입니까? 이건 살인이에요!"

 

"쉿! 목소리 낮춰, 이 자식아!"

 

박영선이 민재의 입을 틀어막을 듯 손을 뻗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 정년 1년 남았다. 내 연금 날아가고, 우리 애 대학 등록금 끊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주임님!"

 

민재가 떨리는 눈으로 박영선을 응시했다.

 

"주임님 10년 전에 남원군청 계장님 시절,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공무원은 법을 지키는 방패지, 힘센 놈들의 몽둥이가 아니라고요. 그 말 다 거짓말이었습니까?"

 

박영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잘게 떨렸다.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보일러 배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한참 뒤, 박영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의 손끝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노란색 메모지 한 장이 나왔다.

 

시청 시장실 직통 전화 메모지였다.

 

박영선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민재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이거, 내가 과장 책상 정리하다가 파쇄기 들어가기 직전에 주운 거다."

 

민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메모지를 펼쳤다.

 

거친 붓펜 글씨로 휘갈겨 쓴 메모였다.

 

'소방과장 앞. 삼거리 김밥집(동충동 182). 노후 목조 구조 소방법 엄격 적용할 것. 시설 개수명령 5일 기한 엄수. 미이행 시 즉각 행정대집행 계고 및 폐쇄 조치. 시장실 직접 보고. 7. 18. 강태석.'

 

우측 하단에는 강태석의 기괴하게 꺾인 친필 서명과 시장실 직통 내선 번호 '101'이 붉은 펜으로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합법을 가장한 표적 단속, 시장의 직권을 남용한 사적 보복의 움직일 수 없는 스모킹 건이었다.

 

"이거……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민재가 메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박영선이 고개를 돌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모르는 일이다. 내 이름 석 자 나오면 난 그 자리에서 목 매달아야 해. 절대 들키지 마라, 민재야. 강태석 그 인간…… 사람 목숨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는 놈이야."

 

"감사합니다, 주임님. 절대로 주임님께 피해 안 가게 하겠습니다."

 

민재는 메모를 취재 수첩 맨 안쪽 비밀 포켓에 찔러 넣었다.

 

지유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 훗날 재환이 법복을 입고 돌아왔을 때 강태석의 목을 벨 날카로운 칼날 하나를 손에 쥔 순간이었다.

 

4. 관제엽서와 침묵의 무게

 

정오가 지나자 김밥집 골목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위생과와 소방과의 연이은 단속 소문이 구도심 골목에 삽시간에 퍼져나간 탓이었다.

 

단골손님들은 행여 불똥이 튈까 발길을 끊었고, 유리창 너머로 흘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가게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지유는 홀로 식탁을 훔치고 있었다.

 

행주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작은 방울이 울리며 우체부 아저씨가 들어섰다.

 

"지유 학생, 서울서 편지 왔네."

 

우체부는 동네 사정을 아는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보며 두툼한 가죽 가방에서 관제엽서 한 장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지유는 두 손으로 엽서를 받았다.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히 찍힌 관제엽서.

 

뒷면에는 정갈하고 힘찬 필체의 글씨가 흑청색 잉크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그 잉크, 백부에게 물려받았다는 각인 만년필의 금빛 닙이 종이를 누르며 새겨 넣은 재환의 글씨였다.

 

지유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식탁 의자에 앉아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지유에게.

 

신림동 고시촌의 여름은 아스팔트 열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녹두거리 헌책방에서 손때 묻은 형법총론과 민법 강의록을 구해 밤낮없이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네가 주었던 흑청색 잉크의 냄새가 번져 나와, 메마른 방 안에서도 남원의 바람을 느낀다.

 

남원의 요천 둑길은 여전히 푸르겠지.

 

너의 무릎 상처는 덧나지 않고 잘 아물었는지 매일 밤 기도를 드린다.

 

지유야, 이곳에서 법전을 파고들수록 세상의 법이 얼마나 약자에게 가혹하고 강자에게 관대한지 뼈저리게 느낀다.

 

내 아버지가 저지른 죄, 강태석이 저지른 불의를 내 손으로 직접 단죄하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펜을 쥔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반드시 사법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가문의 부끄러운 족쇄를 끊어내고 검사의 법복을 입고 네 앞에 서겠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가 너의 영원한 처마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밥 거르지 말고, 어머니 잘 보살펴 드려라.

 

신림동 단칸방에서, 재환.'

 

글자 하나하나마다 재환의 뜨거운 숨결과 결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재환아…….’

 

지유는 엽서를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었다.

 

그의 글씨가 닿은 가슴팍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지금 남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재환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둔 권력의 찌꺼기 위에서 강태석이 괴물이 되어 날뛰고 있다는 것을, 그 괴물이 지유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지유는 카운터 서랍에서 낡은 편지지 한 장과 볼펜을 꺼냈다.

 

답장을 써야 했다.

 

펜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재환아, 사실은 나 너무 무서워.’

 

‘위생과가 들이닥쳐 엄마 참기름병을 깨뜨렸고, 오늘은 소방과가 와서 닷새 안에 가게를 닫으래.’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고, 나는 대학도 포기했어.’

 

마음속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매달려 엉엉 울며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유는 펜촉을 멈추었다.

 

그의 엽서에 적힌 문장이 눈앞을 스쳤다.

 

'내 손으로 직접 단죄하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펜을 쥔다.'

 

재환은 지금 가문의 죄악과 싸우며 자신의 영혼을 깎아 고시 공부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 가혹한 현실을 알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책을 덮고 당장 남원으로 내려올 것이다.

 

성호석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고등학생의 몸으로 내려와 강태석의 주먹 앞에 무력하게 짓밟힐 것이다.

 

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에 담담히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재환아, 편지 고마워.

 

내 무릎은 하은이가 약을 잘 발라줘서 이제 흉터만 조금 남고 다 나았어.

 

요천 둑길의 수양버들은 매미 소리와 함께 아주 푸르단다.

 

남원은 아무 걱정 없어.

 

엄마도 가게 일 도우시며 건강히 잘 계시고, 김밥도 매일 완판이야.

 

네가 준 학생증 증명사진, 매일 앞치마 안주머니에 품고 일해.

 

뒷면에 네가 적어준 '약속'이라는 두 글자가 내게는 가장 큰 힘이야.

 

그러니 넌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

 

네가 법복을 입고 당당히 오작교를 건너올 그날까지, 난 여기서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

 

남원을 지키고, 우리 가게를 지키고, 너를 기다리는 것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니까.

 

남원에서, 지유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종이 귀퉁이에 툭 떨어졌다.

 

지유는 얼른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잉크가 번질까 두려워 입김으로 후후 불어 말렸다.

 

거짓말로 가득 찬 편지.

 

그러나 그것은 재환을 지키기 위한 지유만의 처절하고 숭고한 침묵이었다.

 

지유는 편지를 정갈하게 접어 봉투에 넣고 풀을 붙였다.

 

단칸방 양철 과자 상자 속에 부치지 못하고 쌓여가는 편지들과는 달리, 이 편지는 붉은 우체통에 넣어 서울로 보낼 편지였다.

 

그의 등을 떠밀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기 위한, 어린 소녀의 처절한 방패였다.

 

5. 밤의 사투

 

어둠이 짙게 깔린 밤 10시.

 

삼거리 김밥집의 셔터는 절반쯤 내려와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거친 톱질 소리와 망치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차! 하은아, 저쪽 합판 모퉁이 좀 꽉 잡아라!"

 

목공소 윤 씨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천장 서까래에 방염 석고보드를 덧대고 있었다.

 

낮에 소방과가 들이닥친 뒤, 윤 씨는 자신의 목공소 창고를 털어 쓸 만한 내장재와 방염 페인트 통을 리어카에 싣고 김밥집으로 달려왔다.

 

"삼백만 원짜리 정식 공사는 못 해줘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저 시청 놈들한테 이 가게 못 내준다!"

 

윤 씨의 고함에 하은과 민재가 부지런히 못을 나르고 페인트를 개었다.

 

지유는 조리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얇은 플라스틱 배관 덮개를 닦아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지적받은 항목들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때워보려는 눈물겨운 사투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지어진 흙벽과 노후 서까래는 덧대는 족족 부스러져 내렸다.

 

석고보드를 고정하려 못을 박으면 회벽이 와르르 쏟아졌다.

 

"젠장…… 벽체 기둥 자체가 삭았어."

 

윤 씨가 망치를 내리치며 탄식했다.

 

"전문 설비업자 불러서 가스 배관 전체를 스텐 관으로 새로 매립하고 천장을 철골로 보강하지 않으면, 저놈들이 시비 걸었을 때 무조건 걸려 넘어갈 텐데…… 자재비만 최소 150만 원은 현금으로 들어가야 해."

 

150만 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손이 멈추었다.

 

하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민재는 주머니 속 취재 수첩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강태석의 보복 지시 메모가 있으면 뭐 한단 말인가.

 

당장 닷새 뒤면 공무원들이 몰려와 쇠사슬을 감고 문을 닫아걸 텐데.

 

그때, 지유가 조용히 앞치마를 벗어 개었다.

 

"아저씨, 오늘 여기까지 해 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요."

 

지유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지유야, 너 어디 가려고? 이 밤중에?"

 

하은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남원의료원."

 

지유가 낡은 겉옷을 걸쳐 입으며 말했다.

 

"엄마 면회 시간은 지났지만…… 원무과 야간 당직실에 가보려고. 낮에 간호사실에서 들었는데, 야간에 병원 병동 청소랑 세탁실 야간 당직 인부를 구한대. 새벽 네 시까지 일하면 하루에 3만 원씩 쳐준다고 했어. 가게 일 시작하기 전까지 뛰면 닷새 동안 15만 원은 벌 수 있어. 그리고…… 병원장님께 사정해서 엄마 진료비 납부를 보름만 유예해 달라고 빌어볼 거야."

 

"지유 너 제정신이야?"

 

민재가 앞을 가로막았다.

 

"너 지금 낮에도 김밥 말고 장사하느라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잖아! 밤새 병원 청소를 하고 새벽에 나와서 또 김밥을 만다고? 그러다 네가 먼저 쓰러져! 무릎 상처도 아직 안 아물었잖아!"

 

"쓰러져도 병원에서 쓰러지는 게 나아, 민재야."

 

지유가 민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떤 슬픔도, 절망도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켜내야 한다는 무서운 생명력만이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게 문 닫히면 우리 엄마 죽어. 재환이가 돌아왔을 때, 내가 이 자리에 없으면 안 돼. 내 몸 좀 부서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 절대로 안 쓰러져."

 

지유는 민재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셔터 문을 올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삼거리 골목으로 지유의 작은 그림자가 걸어 나갔다.

 

절뚝이는 걸음걸이였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대지를 단단하게 딛고 있었다.

 

민재와 하은은 멀어지는 지유의 뒷모습을 보며 숨죽여 눈물을 삼켰다.

 

6. 어둠 속의 포식자

 

새벽 네 시 삼십 분.

 

남원의료원 세탁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피 묻은 시트를 빨고 탈수기를 돌린 지유는 퉁퉁 부은 손으로 병원 후문을 나섰다.

 

락스 물에 절어 손끝의 감각이 없었다.

 

원무과 당직 주임에게 무릎 꿇고 사정한 끝에 간신히 어머니의 투석비 납부를 3일간 유예받았지만, 손에 쥔 야간 일당 봉투는 너무나 가벼웠다.

 

밤공기는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지유는 숨을 헐떡이며 삼거리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밥을 안치고 우엉을 볶아야 아침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동문 우체국 모퉁이를 돌아 김밥집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지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골목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김밥집 앞에 거대한 검은 쇳덩어리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새까만 대형 세단, 로얄 살롱이었다.

 

보닛 앞부분에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남원시 상징 봉황 깃발이 서늘하게 꽂혀 있었다.

 

헤드라이트는 꺼져 있었지만, 차창 너머로 붉은 담뱃불 하나가 주기적으로 타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태석이었다.

 

그가 직접 이곳에 와 있었다.

 

차량 뒷좌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매캐한 고급 시가 연기가 새벽 공기 속으로 피어올랐다.

 

연기 너머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번뜩이는 강태석 남원시장의 거구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는 턱을 괸 채, 피투성이 붕대를 감고 흙먼지와 락스 물에 절어 걸어오는 지유를 조소 띤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마실이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지, 한지유 학생?"

 

강태석의 굵고 탁한 음성이 골목의 적막을 찢었다.

 

그 목소리에는 먹잇감을 구석에 몰아넣고 서서히 숨통을 끊어가는 맹수의 오만함과 잔인한 유열이 가득 차 있었다.

 

지유는 숨이 턱 끝까지 막혀왔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손바닥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주머니 속에는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과, 소방과의 붉은 개수명령서가 맞닿아 있었다.

 

지유는 턱을 치켜들고, 차창 너머의 포식자를 향해 차갑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남원의 새벽을 집어삼킨 거대한 권력과, 그 권력에 온몸으로 맞서는 한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