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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8화

첫 번째 행정지도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의 도마 소리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어둠은 언제나 눅진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환풍기는 쇳소리를 내며 헛돌았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도마를 울리는 칼질 소리만이 적막한 골목 안을 메우고 있었다.

 

한지유는 손목의 뻐근한 통증을 잊으려는 듯 부지런히 칼을 놀렸다.

 

단무지의 물기를 꽉 짜낸 뒤 노란 빛깔이 가지런히 결을 이루도록 써는 손길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제 오후, 시청의 관용차가 가게 앞을 가로막고 뿜어내던 매캐한 매연 냄새가 아직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빌미로 요천각 밀실로 불러들이려던 강태석의 비열한 눈빛과, 그가 내밀었던 흰 봉투를 밀어냈을 때 그의 얼굴에 스쳤던 살기 어린 수치심을 지유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겠지.'

 

지유는 도마 옆에 놓인 기름 붓을 들어 김밥 김 위에 참기름을 얇게 펴 발랐다.

 

방앗간에서 갓 짜온 고소한 참기름 향이 좁은 주방 안에 번졌지만, 가슴속을 짓누르는 서늘한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강태석은 결코 이대로 물러설 인간이 아니었다.

 

포클레인을 몰고 와 가게를 부수려던 무뢰한이, 이제는 남원시장의 명패를 달고 관용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그 자가 어제 모욕당했다고 느꼈다면, 그다음 차례는 눈에 뻔했다.

 

지유는 조리대 한구석, 교복 주머니에서 꺼내 정갈하게 세워둔 흑청색 잉크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재환이 보내온 관제엽서의 글귀들이 잉크빛 유리병 위로 어른거렸다.

 

'내려다보는 법이 아니라, 곁에 서는 법을 배운다.'

 

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칼을 쥔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재환이 그곳에서 고독하게 썩은 권력을 벨 칼을 갈고 있다면, 자신은 이곳 남원에서 아버지의 땅과 어머니의 터전을 온몸으로 지켜내야 했다.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절대로 부러지거나 흔들리지 않겠다는 맹세가 단단한 도마 위로 떨어지는 칼날 끝에 실렸다.

 

2. 시장의 아침과 친구의 온기

 

덜컹거리는 자전거 페달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며 숨 가쁜 목소리가 주방으로 파고들었다.

 

"지유야! 지유야, 나 왔어!"

 

커다란 비닐 보따리를 양손에 든 윤하은이 뺨을 붉힌 채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은은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주방 입구에 짐을 내려놓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침 시장에 들러서 제일 실한 당근이랑 우엉으로만 골라왔어. 아저씨한테 신선한 걸로 꼭 달라고 몇 번을 졸랐는지 몰라."

 

지유는 칼을 내려놓고 얼른 행주에 손을 닦으며 하은에게 다가갔다.

 

"하은아, 날도 추운데 이렇게 일찍부터…… 너 학교 갈 준비는 하고 온 거야?"

 

"내 걱정은 왜 해! 너 혼자 이 많은 재료를 어떻게 다 다듬어?"

 

하은은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지유의 붉게 튼 손등과 피로가 짙게 깔린 눈가를 훑어보더니 금세 목소리를 낮추며 눈시울을 붉혔다.

 

"너 얼굴이 반쪽이 됐어, 지유야. 어제 그…… 시청 차 왔었다면서? 민재한테 들었어. 그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돌려보냈어."

 

지유는 하은을 안심시키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으스대길래, 우리 힘으로 벌어서 낼 테니 참견 말라고 했어."

 

"잘했어. 정말 잘했어! 하지만 지유야, 그 강태석이라는 작자, 보통 지독한 인간이 아니잖아. 민재 말로는 신문사 안에서도 다들 그 인간 눈치만 살살 본대. 시청 공무원들도 그 앞에서는 파리 목숨이라던데, 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은의 목소리에는 친구를 향한 순수한 걱정과 두려움이 눅진하게 묻어 있었다.

 

지유는 하은의 차가워진 손을 꼭 쥐어주었다.

 

"겁낸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병원에 계신 엄마는 누가 지키고 이 가게는 어떻게 되겠어. 난 괜찮아, 하은아. 네가 이렇게 곁에 와서 도와주는데 내가 왜 무너지겠어."

 

"지유야……."

 

하은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 내가 끝까지 같이 있을 거야. 오늘은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올게. 이 당근 내가 다 볶아놓고 갈 테니까 넌 밥 앉혀!"

 

하은이 팔을 걷어붙이고 당근 채를 썰기 시작하자, 주방 안에는 다시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가마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수한 밥 뜸 들이는 냄새와 기름에 달달 볶이는 우엉 냄새가 섞이며 김밥집 안을 따스하게 채웠다.

 

지유는 갓 지어진 고슬고슬한 밥을 커다란 양푼에 퍼 담고 소금과 참기름을 둘러 주걱으로 비벼냈다.

 

아침 일곱 시가 넘어가자, 통학하는 학생들과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인부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와 김밥을 찾았다.

 

"학생, 김밥 두 줄만 얼른 말아줘. 어머니는 아직 병원에 계신가?"

 

"네, 삼촌. 그래도 어제보다 열은 많이 내리셨어요. 금방 말아드릴게요."

 

지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김 위에 밥을 고르게 펴고, 정성껏 볶아낸 속재료를 넉넉하게 얹어 단단하게 말아냈다.

 

참기름을 바르고 깨소금을 뿌려 은박지에 정갈하게 싸 올리는 손길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골목 사람들은 지유의 사정을 알기에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테이블 위에 두고 가거나, 힘내라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네고 갔다.

 

비록 낡고 초라한 골목 끝자락의 작은 가게였지만, 이곳은 지유에게 있어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보루이자 삶의 온기 그 자체였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은은 가방을 메고 아쉬운 듯 문밖을 나섰다.

 

"지유야, 점심때 도시락 챙겨서 꼭 올게! 문단속 잘하고 있어!"

 

골목길 저편으로 멀어지는 하은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시계의 시침이 아침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의 아침 출근 행렬이 잦아들고, 잠시 찾아온 고요 속에서 지유는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들을 씻어내기 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3. 들이닥친 불청객들

 

오전 아홉 시 정각.

 

골목 어귀에서 둔탁한 승합차 문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이어 규칙적이고 거친 구둣발 소리가 김밥집 유리문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드르륵!

 

문이 부서져라 거칠게 열리며 서늘한 바람과 함께 세 명의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남색 점퍼 차림에 가슴팍에는 '남원시청'이라는 자수가 선명히 박혀 있었고, 손에는 두툼한 서류철과 알루미늄 클립보드를 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남자는 기름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사나운 눈매를 번뜩이는 위생과 계장이었다.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사 한마디 없이 천장과 벽면, 카운터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여기가 삼거리 김밥집 맞지?"

 

위생과 직원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좁은 가게 안에 쨍하게 울렸다.

 

지유는 고무장갑을 벗고 조리대 앞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표정만큼은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네, 맞습니다만.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계장은 턱을 치켜들며 품 안에서 번쩍이는 공무원증을 꺼내 지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남원시청 위생과다. 최근 구도심 일대 무허가 조리 및 위생 불량에 대한 민원이 빗발쳐서 특별 위생 점검을 나왔다."

 

"위생 점검이요? 저희 가게는 매년 정기 검사를 정상적으로 받고 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지적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지유의 또박또박한 대답에 계장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아가씨. 정기 검사는 정기 검사고, 이건 민원에 따른 '불시 특별단속'이야. 그리고 영업주가 병원에 입원해서 미성년자가 조리를 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 식품위생법상 조리 및 위생 책임자 자격이 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뒤따라 들어온 두 명의 직원은 계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락도 없이 주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먼지 묻은 구두를 신은 채 주방 타일 바닥을 짓밟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잠깐만요! 신발을 신은 채 주방에 들어가시면 어떡합니까! 거긴 음식을 만드는 곳이에요!"

 

지유가 앞을 가로막아서자, 계장이 지유의 어깨를 툭 밀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공무 집행 중이야! 방해하면 공무집행방해죄로 경찰 부를 줄 알아! 비켜!"

 

그들의 눈빛에는 위생을 점검하려는 의도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가게 문을 닫게 만들겠다는 명백한 악의와 폭력성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4. 합법이라는 이름의 폭력

 

주방으로 난입한 직원들은 흡사 범죄 현장을 수색하는 수사관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찬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양념통 뚜껑을 열어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았다.

 

탁!

 

덜커덩!

 

그릇들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었다.

 

지유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들의 무도한 행태를 노려보았다.

 

계장은 클립보드에 볼펜을 딱딱거리며 주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이거 봐, 이거. 도마가 왜 나무 도마야?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교차 오염 방지를 위해 어류, 육류, 채소용 도마를 플라스틱 재질로 색상별로 구분해서 비치해야 하는 거 몰라? 나무 도마는 세균 번식의 온상이야. 즉시 폐기 대상이지."

 

지유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희는 고기나 생선을 전혀 쓰지 않습니다. 채소와 달걀만 쓰고 있고, 저 도마는 매일 밤 끓는 물로 열탕 소독을 하고 햇볕에 바짝 말려서 씁니다. 곰팡이나 흠집 하나 없는 거 직접 보셨잖아요."

 

"법 규정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말이 많아! 규정된 위생 용품을 구비하지 않은 건 명백한 관리 소홀이야! 적어, 목재 도마 사용으로 인한 교차 오염 위험."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냉큼 볼펜으로 적발 대장에 글자를 휘갈겼다.

 

계장의 횡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맨 위 칸에 놓인 반찬 통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담가둔 장아찌와 볶음 재료들이 든 통이었다.

 

"이 통들, 왜 라벨이 안 붙어 있어?"

 

계장이 트집을 잡으며 통 하나를 거칠게 꺼내 들었다.

 

"제조 일자, 소진 기한, 원재료 원산지 표기가 통마다 개별 부착되어 있어야지. 이렇게 보관하면 유통기한 지난 재료인지 썩은 재료인지 손님이 어떻게 알아?"

 

"그건 오늘 아침 새벽 시장에서 사 와서 방금 다듬어 넣은 신선한 재료들입니다! 원산지도 다 국산이고, 영수증도 다 보관하고 있어요!"

 

지유가 카운터에서 영수증 뭉치를 꺼내 들었지만, 계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영수증이 문제가 아니라 개별 용기 표기 의무 위반이야. 그리고 이거 봐, 냉장고 고무 패킹에 먼지 낀 거 안 보여? 적어, 식자재 보관 기준 위반 및 냉장 설비 청결 불량."

 

그들은 마치 미리 준비해 온 각본을 읽어 내려가듯 일사천리로 트집을 잡아 나갔다.

 

환풍기 날개에 묻은 엷은 기름때, 조리대 아래 타일 모서리에 물때가 조금 묻어 있는 것, 심지어 행주를 삶아 널어둔 건조대의 위치가 개수대와 너무 가깝다는 터무니없는 이유까지 전부 위반 사항으로 둔갑했다.

 

남원 시내 어떤 영세 식당을 털어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현미경을 들이댄 표적 단속이었다.

 

'이게 바로 강태석이 말한 방식이구나.'

 

지유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서늘한 깨달음이 스쳤다.

 

물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깡패를 보내 깽판을 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시장의 권력을 쥐고, 공무원이라는 합법적인 몽둥이를 앞세워 숨통을 조여오는 것.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무릎 꿇고 기어 나오게 만드는 잔인하고 치열한 고사 작전이었다.

 

5. 짓밟힌 참기름병

 

"어라, 이건 또 뭐야?"

 

양념 찬장을 뒤지던 직원이 구석에 놓여 있던 진한 갈색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남원 토박이 방앗간에서 갓 짜와 소주병에 담아둔 참기름이었다.

 

노란 테이프로 밀봉된 채 맑고 짙은 갈색빛을 띤 기름에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어머니가 단골손님들에게 최고의 맛을 대접하겠다며, 비싼 값을 치르고 오직 국산 통깨만을 고집해 짜온 정성이 담긴 기름이었다.

 

계장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무표시 식품이잖아? 정식 유통 경로를 거치지 않고 자가 제조되거나 무허가 업소에서 납품받은 부정·불량 식품 의심 물품이야."

 

지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닙니다! 시장 안 공설 방앗간에서 합법적으로 기름을 짜서 가져온 겁니다. 남원 사람들 누구나 다 그렇게 방앗간 기름을 사다 써요!"

 

"남들이 다 한다고 불법이 합법이 되나? 식품위생법상 영업소 내에서는 유통기한과 성분 분량, 제조원 허가 번호가 인쇄된 정규 규격 포장 제품만 사용하게 되어 있어. 이런 출처 불명의 기름은 즉시 압류 및 폐기 조치 대상이다."

 

계장은 기름병을 거칠게 흔들더니 싱크대 개수대를 향해 기울였다.

 

"잠깐만요! 손대지 마세요!"

 

지유가 사색이 되어 달려들었다.

 

그 기름은 어머니가 아픈 다리를 이끌고 방앗간을 지키며 받아낸 땀방울이었고, 쓰러지기 전날 밤까지도 소중히 닦아두었던 가게의 심장이었다.

 

"이거 놓지 못해? 공무원이 불량 식품을 폐기하겠다는데 어디서 행패야!"

 

계장은 지유를 뿌리치며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 순간, 직원의 손에서 미끄러진 참기름병이 시멘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병이 산산조각 났다.

 

황금빛 참기름이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왈칵 쏟아져 내렸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고소하고 맑아야 할 참기름 냄새가 짓밟힌 절망처럼 주방 바닥을 가득 메웠다.

 

"아……."

 

지유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 고인 참기름 위로, 흙먼지가 묻은 계장의 검은 구둣발이 무자비하게 짓밟고 지나갔다.

 

미끄러운 기름 위에 찍힌 더러운 발자국.

 

그것은 한 인간의 순수한 노동과 삶의 터전을 권력이라는 발 밑에 뭉개버리는 처참한 폭력의 각인이었다.

 

지유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파편 사이로 흘러내리는 기름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고, 목구멍 끝까지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지유는 울지 않았다.

 

여기서 눈물을 보인다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굴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악문 지유의 턱 끝이 하얗게 굳어졌다.

 

6. 첫 번째 시정명령서

 

계장은 바닥에 깨진 참기름병을 힐긋 내려다보더니, 일말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혀를 찼다.

 

"쯧, 위험하게 덤벼드니까 이런 사단이 나지. 위험물 방치 및 청결 유지 의무 위반도 추가해야겠군."

 

그는 클립보드에서 붉은 글씨가 인쇄된 두툼한 공문 한 장을 찍 찢어냈다.

 

탁, 소리가 나도록 카운터 유리 위에 거칠게 내리꽂힌 종이에는 '시정명령 및 과태료 부과 사전통지서'라는 위압적인 제목이 박혀 있었다.

 

"식품위생법 제36조 및 제44조 위반. 1. 조리용 도마 및 칼의 교차 오염 방지 기준 위반. 2. 식자재 보관 용기 표시 의무 위반. 3. 환풍기 및 조리 시설 위생 관리 불량. 4. 출처 미상의 무표시 원료 보관 및 사용 시도. 이상 네 가지 항목에 대해 1차 시정명령을 발부한다."

 

계장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처분 기한란에 날짜를 휘갈겨 썼다.

 

"기한은 딱 일주일 준다. 다음 주 수요일 오전까지 지적된 모든 항목을 법정 규격에 맞게 개선하고, 위생 시설 교체 증빙 서류를 시청 위생과로 제출해. 개선이 미비하거나 불응할 경우, 즉시 영업정지 15일 및 과태료 100만 원 처분이 내려질 거다."

 

지유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가 맺히도록 꽉 쥔 주먹을 등 뒤로 숨긴 채, 맑고 차가운 눈동자로 계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영세 김밥집에서 일주일 안에 이 모든 걸 플라스틱 규격품과 스테인리스 시설로 바꾸라는 건, 그냥 장사를 접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과태료 백만 원이면 저희 세 달 치 순이익입니다."

 

계장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지유에게만 들릴 만큼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가씨, 법이란 게 원래 그래. 알면 약이 되고 모르면 칼이 되는 거지. 억울하면 높은 곳에 사정이라도 해보든가. 우리 시장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 사정 딱한 시민들 민원은 아주 잘 들어주시거든? 시장실 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똑똑하게 처신해."

 

강태석의 이름이 노골적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비열한 말속에 담긴 본색은 명백했다.

 

무릎 꿇고 요천각으로 기어 들어와 자비를 구하라는 협박.

 

그렇지 않으면 이 좁은 골목 바닥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합법의 칼날로 난도질하겠다는 잔인한 경고였다.

 

"다 적었으면 철수해."

 

계장은 거만하게 손짓하며 돌아섰다.

 

세 명의 직원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골목길에서 웅성거리며 지켜보던 이웃 상인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문이 닫히고 마침내 적막이 찾아왔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과 흙탕물 섞인 참기름만이 흉물스럽게 번져 있었다.

 

7. 깨진 바닥을 닦으며

 

지유는 벽을 짚고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억누르고 있던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앞이 흐려졌다.

 

'엄마…….'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 병원비만 수만 원씩 깨져나가는 처지에, 시설 교체 비용에 과태료 백만 원이라니.

 

그것은 지유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나 다름없었다.

 

강태석은 처음부터 지유가 감당할 수 없는 덫을 놓은 것이었다.

 

"지유야! 지유야, 괜찮아?!"

 

문이 벌컥 열리며 하은이 달려 들어왔다.

 

학교로 가던 길에 시청 차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불안해서 다시 되돌아온 것이었다.

 

하은은 바닥에 깨진 기름병과 지유의 창백한 얼굴, 카운터에 놓인 붉은 공문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시청 놈들이 이런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이런……!"

 

하은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지유야, 어떡해…… 저놈들 진짜 미쳤나 봐. 너한테 왜 이래, 도대체 왜!"

 

친구의 울음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울음소리가 지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지유는 심호흡을 깊게 하고 하은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하은아, 울지 마. 울면 저 인간들이 이기는 거야."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깨진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손가락 끝이 베여 붉은 핏방울이 참기름 위로 뚝 떨어졌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유야, 손 베여! 내가 할게, 내가 치울게!"

 

"아냐, 내가 해야 해."

 

지유는 기름에 젖은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힘을 주어 문지를 때마다 흙먼지와 뒤섞인 참기름이 닦여 나가며 타일의 원래 흰색이 드러났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문지르는 지유의 눈빛 속에 서려 있던 흔들림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리도록 차가운 불꽃이 들어찼다.

 

'내가 무릎 꿇을 것 같아?'

 

지유는 카운터 밑바닥, 비밀 판자 속에 숨겨진 아버지의 환지 비리 서류철을 떠올렸다.

 

강태석과 성호석이 결탁해 아버지의 과수원을 빼앗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추악한 죄악의 기록.

 

그들은 10년 전에도 법을 무기로 아버지를 짓밟았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법의 탈을 쓰고 자신을 짓밟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만큼 힘없이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환이 서울에서 목숨을 걸고 사법의 칼을 벼리고 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그 어떤 칼바람이 불어와도 뿌리를 내리고 버텨낼 것이다.

 

지유는 깨끗해진 바닥을 걸레로 마지막까지 훔쳐낸 뒤 당당하게 일어섰다.

 

8. 창가의 결의와 또 하나의 그림자

 

주방 정리를 마친 지유는 카운터로 다가가 시정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붉은 글씨로 적힌 처분 조항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읽어 내려갔다.

 

도마 교체, 용기 라벨 부착, 위생 설비 정비.

 

돈이 들고 몸이 부서져라 일해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김밥을 말고 밤에는 하은과 함께 밤을 새워서라도 규정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면 되었다.

 

어디 한번 털어보라지.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닦고 또 닦아서, 저들이 내민 법이라는 잣대로 저들의 오만을 부끄럽게 만들어 주리라.

 

지유는 조리대 옆 창가로 다가갔다.

 

창틀 위에 놓인 흑청색 잉크병에 아침 햇살이 비쳐 들며 푸른빛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유는 품 안에서 재환이 보냈던 관제엽서를 꺼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재환아.'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입술 안에서 맴돌았다.

 

너는 지금 성북동의 차가운 저택을 벗어나 신림동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겠지.

 

가문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 가장 정의로운 법관이 되기 위해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겠지.

 

지유는 엽서 뒷면의 단정한 글씨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다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올 때까지, 난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지유가 엽서를 다시 품에 넣고 앞치마를 질끈 묶던 바로 그 시각.

 

골목 모퉁이에 세워진 채 엔진을 끄지 않고 있던 검은 승합차 안에서, 남원시청 소방과 직원이 무전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또 다른 결재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삼거리 구도심 노후 목조 상가 소방 시설 특별 안전점검 계획서'.

 

위생과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더욱 가혹하고 거대한 또 하나의 폭풍이 이미 똬리를 틀고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