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의 우연한 조우
1. 멈춰 선 쇠바퀴
요천(蓼川)을 따라 불어오던 눅눅한 안개가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좁은 처마들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을 막 넘긴 시각이었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 바로 위에서 허공을 찢어발길 듯한 쇠스랑 소리가 멎었다.
육중한 캐터필러를 단 세 대의 포클레인이 내뿜는 시커먼 디젤 매연이 좁은 골목길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거친 금속음 사이로 헛기침을 뱉어내던 배 대표가 흙투성이 전투화를 짓이기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손등에는 핏줄이 굵게 곤두서 있었고, 들고 있던 무전기 너머로는 거친 잡음만이 치직거렸다.
"야, 시동 꺼."
배 대표의 쉰 목소리가 포클레인 조종석을 향해 나지막이 떨어졌다.
거대한 쇠 버킷을 김밥집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두었던 중장비의 엔진이 가쁜 숨을 토해내며 잦아들었다.
요란하게 골목을 울리던 진동이 가라앉자, 지붕 위로 떨어지던 붉은 벽돌 부스러기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서늘하게 남았다.
가게 문지방 앞에는 한지유가 양손으로 부러진 대걸레 자루를 움켜쥔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깨진 유리창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만큼은 새벽 서릿발보다 더 매섭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유의 뒤편 카운터 그늘 아래에서는 최민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속의 비밀 취재 수첩을 꽉 쥐고 있었다.
민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지만, 그의 시선은 부서진 문틈 너머 골목길 어귀로 곧장 박혀 있었다.
골목 저편, 자욱한 매연을 뚫고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 두 줄기가 천천히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남원시장의 관용차인 검은색 로얄 살롱 세단이었다.
차량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는 민선 1기 남원시장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의 깃발이 작게 펄럭이고 있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칠흑색 차체는 남루한 골목의 흙먼지와 지독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단정한 정장 차림의 시청 비서실 수행원이 뛰어나와 뒷좌석 문을 공손히 열어젖혔다.
차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묵직한 가죽 구두 한 짝이 질척한 아스팔트 바닥을 딛었다.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이었다.
어제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72.4%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4년의 완전한 철권통치를 거머쥔 자였다.
요천각(蓼川閣)의 기생들이 따르는 독주를 새벽까지 들이켜고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잿빛 맞춤 정장 차림이었다.
다만 그의 깃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알싸한 시가 향과 묵은 술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은밀하게 찔렀다.
강태석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멈춰 선 포클레인과 위태로운 김밥집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각진 턱과 짙은 눈썹 밑으로 번득이는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그것은 사냥터에 들어선 맹수가 제 발밑에 놓인 작은 짐승의 덫을 내려다볼 때나 짓는 나태하고도 잔인한 권태였다.
"배 대표."
강태석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배 대표는 들고 있던 각목을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예, 시장님."
"새벽부터 동네가 참 요란스럽구나."
강태석은 손목에 찬 금장 롤렉스 시계를 흘끗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오늘 아침 여섯 시 반부터 구도심 민생 시찰 일정이 잡혀 있다고 분명 일렀을 텐데."
"그게…… 시청 도시과 놈들이 계고장 날짜를 칼같이 맞추는 바람에, 시찰 동선에 방해 안 되게 후딱 쓸어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배 대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강태석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른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배 대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후딱 치운다는 놈이 길 한복판에 흙먼지만 잔뜩 피워 올리고 있냐."
강태석이 혀를 차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반짝이는 구두코가 김밥집 앞바닥에 튀어 있는 붉은 페인트 낙서 위를 가볍게 짓밟았다.
'철거.'
거칠게 휘갈겨진 붉은 래커 글씨를 내려다보던 강태석의 시선이 문지방 너머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러진 대걸레 자루를 온몸으로 움켜쥐고 선 한지유와 마주쳤다.
2. 얼어붙은 문지방
새벽의 푸르스름한 박명이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을 비추고 있었다.
강태석의 걸음이 김밥집 문턱 바로 앞에서 딱 멎었다.
수행비서와 시청 수행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그의 뒤편으로 둥글게 도열했다.
골목길 전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 속에 갇힌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유는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에 선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골목길을 메운 삼십여 명의 어깨패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합법의 탈을 쓴 권력, 남원 전체의 운명을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하는 절대자의 서늘한 살기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어머니의 목을 조여오는 거대한 거미줄의 정점에 선 자.
카운터 밑바닥에 숨겨진 누런 서류철 위에서 붉게 번들거리던 그 이름, 강태석이 바로 지척에 서 있었다.
손바닥에 박힌 거친 나무가시가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지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턱을 치켜들었다.
지유의 이마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눈썹을 적시고 뺨을 지나 턱 끝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검은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자 특유의 비굴함이나 비명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침묵과 결기가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거센 강물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조약돌처럼 단단한 눈빛이었다.
강태석의 눈썹 한쪽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짓밟아왔다.
시청 공무원들은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조아렸고, 의회 의원들은 그의 술잔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철거 현장에서 마주친 상인들은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부짖거나 멱살을 잡고 악을 쓰다 경찰의 곤봉에 얻어맞고 끌려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눈앞의 어린 계집아이는 울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교복 블라우스 위에 걸친 낡은 앞치마는 기름때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녀의 등줄기는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상대를 향한 증오조차 정제하여 차가운 심연 속에 가두어둔 듯한, 기이할 정도로 맑고 단단한 시선이었다.
강태석의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생경함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그가 평생 동안 밟아온 진흙탕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어떤 순백의 불꽃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었다.
"……꼬마 아가씨."
강태석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그의 입가에 얇고 건조한 미소가 걸렸다.
"손에 든 건 내려놓는 게 좋을 텐데."
강태석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키가 드리운 육중한 그림자가 지유의 왜소한 어깨를 완전히 뒤덮었다.
"다치기 딱 좋은 물건이다."
지유는 대걸레 자루를 내리지 않았다.
자루 끝이 강태석의 비단 넥타이가 매어진 가슴팍을 향해 꼿꼿하게 겨눠져 있었다.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지유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골목길의 침묵을 명확하게 꿰뚫었다.
"행정대집행 영장도 없이 남의 가게 지붕을 부수는 건 명백한 불법이에요."
"불법이라."
강태석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것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아주 흥미로운 노리개를 발견한 사내의 유희에 가까운 미소였다.
"어린애 입에서 법 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강태석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지유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창백한 뺨, 밤샘 노동으로 검게 물든 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굽힘 없이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는 흑요석 같은 눈망울.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강태석의 뇌리를 스쳤다.
아주 오래전, 요천 변의 기름진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군청 계단 앞에서 온몸으로 버티던 어떤 고집스러운 사내의 얼굴.
한석규.
그러나 눈앞의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죽어간 사내의 울분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흙탕물 속에서도 결코 물들지 않는, 징그러울 정도로 순결한 생명력이었다.
"시장님, 제가 치우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배 대표가 험악한 낯짝으로 끼어들며 지유의 팔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비켜라, 이 계집애가 어디서 감히 시장님 앞을……!"
"손대지 마라."
강태석이 손을 들어 배 대표의 앞을 가로막았다.
배 대표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내가 치우라고 하지 않았다."
강태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담긴 서늘한 경고는 배 대표의 등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배 대표는 마른침을 삼키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강태석은 다시 시선을 돌려 지유의 얼굴을 깊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포식자의 탐색이었다.
3. 묵은 밥 냄새와 차가운 찻잔
"아침 밥 냄새가 참 구수하구나."
강태석이 문지방 너머 가게 안쪽을 불쑥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뜬금없는 말투에 지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장사하는 집이지?"
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태석은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구두를 신은 채 문턱을 성큼 넘어섰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그의 육중한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수행비서가 당황하여 뒤따라 들어오려 하자 강태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짓했다.
"너희는 밖에서 기다려라."
"하지만 시장님, 안전이……."
"이 조그만 계집애가 날 칼로 찌르기라도 하겠냐? 다들 나가 있어."
강태석의 서슬 퍼런 명령에 수행원들과 배 대표의 패거리들은 일제히 문밖으로 물러났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한 좁은 김밥집 안에는 오직 강태석과 지유, 그리고 카운터 뒤편에 숨죽인 민재만이 남았다.
강태석은 가게 한가운데 놓인 낡은 합판 식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칠이 벗겨진 의자가 그의 무게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양념통과 낡은 메뉴판을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메뉴판에는 지유의 어머니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넣은 '원조 김밥 오백 원, 계란찜 천 원'이라는 소박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기 앉아라."
강태석이 맞은편 의자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지유는 대걸레 자루를 문가에 비스듬히 세워두었지만, 결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카운터 앞 기둥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선 채로 강태석을 응시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지유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강태석은 그런 지유의 태도가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김밥집에 들어온 손님이 무슨 용건이 있겠냐."
그가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배가 고파서 들어왔다."
"……아침 장사는 안 합니다."
"김밥을 말고 있던 손으로 그런 거짓말을 하면 쓰나."
강태석의 시선이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인 김밥 재료들을 향했다.
방금 지유가 볶아둔 당근채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지단, 그리고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 병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지유의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투석을 받으러 갈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말아두었던 김밥이었다.
이 사내의 손에 더럽혀지고 싶지 않았다.
단 한 줄도, 이 자의 입에 넣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강태석은 주머니에서 두툼한 가죽 지갑을 꺼내더니,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툭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구겨진 김밥집 탁자 위로 신권 특유의 빳빳한 종이 냄새가 번졌다.
"새벽부터 동네 시끄럽게 한 찻값이다."
강태석이 턱을 괴며 말했다.
"김밥 한 줄 말아 와라. 시장의 명령이 아니라, 배고픈 손님의 주문이다."
지유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이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돈 몇 푼으로 삶의 터전을 짓밟으려던 자가, 이제는 그 돈으로 밥을 내놓으라 턱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운터 뒤편에서 민재의 간절한 시선이 지유의 등 뒤에 닿았다.
'참아야 해, 지유야. 지금 부딪히면 안 돼.'
민재의 무언의 외침이 지유의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지금 강태석을 자극해 충돌이 일어나면, 밖에서 대기 중인 중장비들이 가게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 뻔했다.
어머니의 병원비, 그리고 카운터 밑바닥에 숨겨둔 아버지의 억울한 원본 서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버텨야 했다.
지유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았다.
그리고 차가운 김발 위에 검은 김 한 장을 반듯하게 폈다.
4. 시선을 옭아맨 맑은 불꽃
밥주걱이 밥통 속을 파고드는 소리만이 조용한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지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슬고슬한 밥을 김 위에 얇게 폈다.
그녀의 손가락은 작고 거칠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노란 단무지와 붉은 당근, 초록색 시금치를 얹고 참기름을 묻힌 칼로 김밥을 썰어내는 손끝이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강태석은 식탁에 턱을 괸 채 그 모든 과정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은 김밥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있는 지유의 작은 손과 단정한 옆얼굴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쏟아져 들어와 지유의 뺨에 맺힌 미세한 솜털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화려한 보석이나 짙은 화장으로 치장한 요천각 기생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티 없이 맑고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짓밟으면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잡초의 억척스러움과, 높은 벼랑 끝에 홀로 핀 야생화의 기품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강태석의 심장 어딘가가 불쾌할 정도로 강하게 고동쳤다.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돈으로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저 투명한 결기.
남원의 모든 인간이 제 발밑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데, 저 조그만 아이만이 자신을 벌레 보듯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내로서의 지배욕과 정복욕을 가장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불씨였다.
탁.
지유가 썰어낸 김밥 한 접시를 강태석의 앞 식탁에 내려놓았다.
김밥 옆에는 작은 플라스틱 종지에 담긴 단무지 세 쪽이 곁들여져 있었다.
지유는 손을 모으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다 됐습니다."
강태석은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투박한 분식점 접시 위에 정갈하게 놓인 김밥.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는 젓가락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김밥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어 삼키는 동안,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유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맛이 제법이구나."
강태석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구 솜씨냐? 어머니가 가르쳐줬나?"
지유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강태석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손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상관할 일이지."
강태석이 남은 김밥 한 알을 마저 입에 넣으며 턱을 들었다.
"이 일대 땅이 곧 남원시의 새로운 얼굴이 될 곳이다."
그가 식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 쪽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수변 관광특구로 묶이고 나면, 이런 퀴퀴한 골목길은 전부 헐리고 번듯한 상가 타운이 들어선다. 도로도 넓어지고, 네가 상상도 못 할 만큼 큰돈이 오가는 중심지가 된다는 뜻이다."
강태석의 목소리에 거대한 권력자의 오만함이 다시 실리기 시작했다.
"그런 자리에 이런 허름한 김밥집이 버티고 있으면 되겠냐?"
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는 여기서 십 년 넘게 장사를 해왔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 꼬마야."
강태석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어제부로 남원의 법은 내가 정한다."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버틴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깨지는 게 아니라 계란이 썩는 법이지. 네 어미가 병원에 누워 있다지 않더냐?"
지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강태석이 어머니의 병환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았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어머니의 목숨을 쥐고 흔들겠다는 비열한 과시였다.
"어떻게……."
"남원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다."
강태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커다란 체구가 다시 한번 작은 식탁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신권 지폐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라."
강태석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지유를 제 손아귀에 쥐고 마음대로 주무르겠다는 뒤틀린 소유욕의 눈빛이었다.
"병실비든, 약값이든, 내가 남원시장 자리에 있는 한 너한테 부족하지 않게 해줄 수 있다. 어린애가 객기 부릴 자리가 아니야."
지유는 빳빳한 지폐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돈을 집어 들어 강태석의 정장 주머니 속으로 그대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손길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김밥값은 천오백 원입니다."
지유는 카운터 서랍에서 정확하게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내 식탁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그 외의 돈은 받지 않습니다. 동정이나 협박은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강태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장 주머니 속에 쑤셔 박힌 만 원짜리 지폐의 감촉이 불쾌하게 살을 찔렀다.
남원에서 감히 자신의 호의를, 아니 자신이 던져준 돈을 제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은 인간은 없었다.
수행비서가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오려 했다.
"이, 이 발칙한 년이……!"
"가만있어!"
강태석이 낮게 호통을 쳤다.
수행비서가 문가에서 굳어버렸다.
강태석은 식탁 위에 놓인 동전 세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유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유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
순간, 강태석의 입술 꼬리가 비틀리며 기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그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짓밟아 으깨버리기엔 너무나 아깝고, 곁에 두고 그 오만한 턱을 제 발밑에 꿇어앉히고 싶다는 지독한 갈증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독하구나."
강태석이 중얼거렸다.
"아주 지독해."
5. 골목길에 남겨진 불길한 그림자
강태석은 동전을 집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돌아아서서 김밥집 문지방을 넘었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 공기가 제법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과 배 대표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그를 맞았다.
강태석은 관용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수행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수행비서가 헐레벌떡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시장님, 저 계집애를 당장 공무집행방해로 경찰서에 쳐넣을까요?"
"멍청한 놈."
강태석이 비서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골목의 아침 공기를 가를 만큼 또렷했다.
"당장 저 계집애 인적사항 샅샅이 털어 와."
비서의 눈이 둥그레졌다.
"예? 인적사항 말씀이십니까?"
"그래."
강태석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비서가 재빨리 금빛 지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푸른 연기가 강태석의 각진 얼굴을 감싸 안으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름이 뭔지,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허름한 김밥집의 깨진 유리창을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지유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저 가게 터, 지번이랑 소유주 명의도 전부 확인해라."
강태석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성호석(成浩錫) 그 영감이 서울로 튀기 전에 저 땅에 무슨 짓을 해놨는지 알아봐야겠어. 뭔가 냄새가 나."
"예, 알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시청 지적과랑 남원여고 쪽에 사람 넣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비서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강태석은 배 대표를 돌아보았다.
"배 대표."
"예, 시장님! 말씀만 하십시오!"
"오늘은 철수해라."
"예? 하, 하지만 포클레인까지 다 끌고 왔는데……."
배 대표가 억울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강태석의 눈빛이 일순 서늘하게 굳었다.
"내가 오늘 민생 시찰 첫날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강태석이 시가 연기를 배 대표의 얼굴에 훅 뿜어냈다.
"아침부터 방송국 기자놈들 우르르 몰려올 텐데, 길 한복판에서 피 칠갑을 하고 포클레인질을 해대면 내 꼴이 뭐가 되겠냐?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하고 굴려."
"죄, 죄송합니다! 당장 차 빼겠습니다!"
배 대표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무전기를 쥐고 조종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차 빼! 전부 철수해!"
거대한 쇠바퀴들이 굉음을 내며 후진하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가득 메웠던 험상궂은 사내들도 욕설을 뱉어내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강태석은 관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며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는 차창 커튼을 살짝 젖히고 김밥집을 응시했다.
그의 뇌리에서 지유의 맑고 단단한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남원이라는 거대한 늪에서 평생토록 썩은 악취만을 맡아오던 그에게, 지유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이자 기묘한 갈증이었다.
'한지유라…….'
강태석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머금은 채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 연기는 새벽안개 속으로 흩어지며 김밥집 처마를 무겁게 짓눌렀다.
6. 찢겨진 새벽의 결의
중장비의 굉음과 사내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골목길에는 지독한 매연 냄새만이 남았다.
김밥집 안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지유는 강태석이 앉았던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올려두었던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만이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며 지유의 몸이 옆으로 비틀거렸다.
"지유야!"
카운터 뒤에 숨죽이고 있던 최민재가 튀어나와 지유의 팔을 부축했다.
민재의 손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민재의 떨리는 목소리에 지유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응…… 괜찮아."
지유는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녀의 앞치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강태석이 눈앞에 서 있던 그 몇 분 동안, 지유는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그 자의 눈빛에 서린 탐욕과 잔인함은 이 골목 전체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고 어두웠다.
민재는 이를 바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그 개자식…… 강태석 그놈 눈빛 봤어? 완전히 미친놈이야."
민재는 품속에서 손때 묻은 취재 수첩을 꺼냈다.
방금 전 강태석이 들어와 김밥을 먹고 지유를 협박하던 모든 정황이 민재의 볼펜으로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수습기자 신분이라 지금 당장 기사를 쓸 순 없지만, 이 수첩에 다 적어뒀어. 놈들이 어떻게 공권력을 휘두르고 상인들을 협박하는지 전부 다."
민재의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서울에 있는 재환이한테도 알릴 거야. 강태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안 돼, 민재야."
지유가 민재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재환이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지유야! 강태석이 네 인적사항을 털라고 비서한테 시키는 걸 나도 똑똑히 들었어! 저놈은 조폭 출신이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알아. 나도 들었어."
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재환이가 지금 이걸 알면 어떻게 되겠어? 고시 공부 다 집어치우고 당장 남원으로 내려올 거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너도 알잖아."
민재는 말문이 막혔다.
성재환.
서울 신림동 고시촌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법전을 파고들고 있을 친구.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고 검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스스로를 유폐시킨 재환이었다.
지금 재환이 남원의 참상을 알고 내려온다면,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수험생의 신분으로 강태석의 거대한 권력 앞에 계란처럼 깨져버릴 뿐이었다.
"재환이는…… 거기서 힘을 길러야 해."
지유는 카운터 서랍을 열고,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서울에서 날아온 재환의 관제엽서들과, 자신이 차마 부치지 못한 수많은 답장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재환이 남겨두고 간 학생증 증명사진이 놓여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흑청색 잉크로 새겨진 단단한 필체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동안, 지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말라붙었다.
"내가 여기서 버텨야 해."
지유는 증명사진을 가슴에 꼭 품었다.
"어머니 병원비도, 아버지의 억울함도, 그리고 재환이와의 약속도……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새벽의 폭풍우는 간신히 지나갔지만, 더 거대하고 음침한 먹구름이 남원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강태석이 보낸 비수가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날아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유는 부러진 대걸레 자루를 주워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다시 도마 앞에 섰다.
그녀의 손길이 칼을 쥐고 다시 김밥을 썰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깨진 유리창을 넘어 지유의 단단한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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