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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4화

편지에 담긴 침묵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은 낙인과 가시돋친 침묵

 

새벽 비가 그친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은 비릿한 페인트 냄새와 기름때 섞인 흙먼지로 질척거렸다.

 

찌그러진 셔터 문과 흰 벽면에는 시뻘건 래커로 휘갈겨 쓴 '철거'라는 두 글자가 흉측한 상처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손에 쥔 대걸레 자루의 거친 나뭇결이 지유의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었다.

 

손잡이 끝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땀과 뒤섞여 손목을 적셨다.

 

골목 어귀를 가득 메웠던 험악한 덩치들의 욕설과 서슬 퍼런 쇠파이프 소리는 이웃들의 아우성과 고함에 밀려 일단 물러갔지만, 그들이 남겨놓고 간 살기 어린 공기는 유리창 틈새를 뚫고 좁은 가게 안으로 끈적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지유야, 손 줘봐. 피나잖아, 얘 좀 봐."

 

가게 문을 닫아걸고 빗장을 지르던 윤하은이 헐레벌떡 다가와 지유의 손을 낚아챘다.

 

대걸레 자루를 부러뜨릴 듯 움켜쥐고 있던 지유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벌겋게 찢겨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골목 맞은편 자전거포에서 쇠스랑을 들고 뛰쳐나왔던 최민재는 씩씩거리며 셔터 틈새로 밖을 내다보다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 개잡놈들…… 시청 강태석 밑에 있는 깡패 새끼들이 분명해. 아줌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민재의 목소리가 억눌린 분노로 찢어지듯 갈라졌다.

 

지유는 하은이 물수건으로 손을 감싸 쥐는 동안에도 붉은 래커가 흘러내린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눈동자에는 눈물 대신 시리도록 차가운 불꽃이 박혀 있었다.

 

그 불꽃 뒤편에는 남원의료원 중환자실 6번 침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어머니의 산소마스크가 겹쳐 있었다.

 

'지유야…… 카운터…… 밑에 서류…… 절대 빼앗기면 안 된다…… 우리 과수원…… 네 아버지 피눈물…… 성…… 성호석이가…….'

 

산소마스크 안에 허옇게 김이 서리던 어머니의 떨리는 입술.

 

그 입에서 튀어나왔던 이름 석 자가 지유의 심장 한가운데를 비수처럼 후벼 파고 있었다.

 

성호석.

 

남원군 시절부터 군정을 주무르고 시장 자리까지 올랐다가 서울 내무부의 막강한 요직으로 차출되어 올라간 사람.

 

그리고 지유가 요천 둑길에서 온 마음을 내어주었던 소년, 성재환의 아버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하은이 걱정스런 눈으로 지유의 얼굴을 살폈다.

 

"지유야, 괜찮아? 어디 다른 데 다친 덴 없어? 응?"

 

"……응,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하은아."

 

지유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그 담담한 어조에 오히려 민재와 하은이 숨을 죽였다.

 

지유는 벽면에 기대어 놓았던 대걸레를 정갈하게 세워두고는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계란 껍데기와 참기름 냄새 밴 행주를 주워 올리는 지유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민재야, 셔터 바깥에 칠해진 페인트…… 신나 좀 구해다 지울 수 있을까? 손님들이 보면 놀라실 거야."

 

"지유 너…… 지금 페인트 지우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줌마는 병원에 계시고, 그 깡패 놈들이 내일 또 포클레인이라도 끌고 오면 어쩌려고 그래! 경찰에 신고부터 하고……!"

 

"경찰은 안 와, 민재야."

 

지유가 싱크대에서 걸레를 빨며 나직하게 잘라 말했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지하수가 붉은 핏자국과 기름때를 씻어 내렸다.

 

"아까 신고 전화했을 때 파출소에서 뭐라 그랬는지 들었잖아. 시청에서 정당하게 계고장 붙이러 나간 공무집행인데 상인들이 폭력을 행사하면 업무방해로 잡아넣겠다고 했어. 강태석이 시장이 된 이상, 이 바닥 법은 다 그 사람 손바닥 안에 있어."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열여덟 소년의 거친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굳어졌다.

 

지유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이미 온 남원 시내가 삼거리 토건 출신 시장 강태석의 발아래 엎드려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떡해…… 지유 너 혼자 이걸 다 어떻게 감당해? 학교도…… 담임 선생님한테 원서 찢어버렸다며?"

 

하은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서울 가야지. 재환이 있는 서울로 가서 시험도 보고, 대학도 가야지…… 왜 네가 여기서 다 짊어지고 주저앉아? 왜!"

 

지유는 빨아놓은 걸레를 꽉 짜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나무 식탁의 모서리를 훔치는 손끝이 굳은살처럼 단단했다.

 

"나 안 주저앉아."

 

지유가 뒤를 돌아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울음을 삼키느라 입술 안쪽을 깨물어 피 맛이 났지만, 눈빛만은 봄날 팽나무 고목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병원비 벌어야 해. 중환자실 하루 입원비랑 약값이 얼만지 알아? 하루에 김밥 백 줄을 넘게 말아 팔아도 모자라. 나 서울 못 가, 하은아. 아니, 안 가."

 

"지유야……."

 

"그리고 여긴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가 피땀 흘려 지킨 자리야. 저 깡패 새끼들한테, 썩은 권력자들한테 한 뼘도 못 내줘. 절대로."

 

지유의 단호한 선언 앞에 민재와 하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2. 단칸방의 양철 상자

 

가게 안팎의 붉은 낙서를 신나와 솔로 벅벅 문질러 지우고, 깨진 화분을 치우고 나자 시계는 어느덧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민재는 밤새 가게 앞을 지키겠다며 자전거포 평상에 자리를 잡았고, 하은은 내일 새벽 시장에서 쓸 단무지와 김을 떼어다 주겠다며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김밥집 안채 단칸방.

 

지유는 굳게 걸어 잠근 방문 앞에 앉아 멍하니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빛바랜 체육복 바지를 걷어 올리자, 오른쪽 무릎에 깊게 박힌 검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서울로 재환을 싣고 떠나던 그 검은 관용차를 쫓아가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갈려 나갔던 상처.

 

새살이 돋아났지만 날이 궂거나 찬 바람이 불면 여전히 뼛속까지 시큰거리는 그 흉터는, 지유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맹세의 낙인이었다.

 

지유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익숙하고 단정한 묵향과 종이 냄새가 방 안을 메웠다.

 

그 안에는 차곡차곡 포개어진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맨 위에는 며칠 전 서울에서 날아온 관제엽서가 놓여 있었다.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그 엽서.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엽서 표면을 쓸어내렸다.

 

종이 위에는 깊고 그윽한 흑청색 글씨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유 자신이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사주었던 바로 그 흑청색 잉크.

 

백부에게 물려받았다는 재환의 검은 옻칠 만년필 닙이 종이를 누르며 지나간 자국이 오롯이 만져지는 듯했다.

 

'지유에게.

 

신림동 고시촌의 밤은 관악산 바람 때문에 생각보다 차갑다.

 

헌책방 골목을 지나며 두꺼운 민법과 형법전을 사 들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네 생각이 났다.

 

남원의 봄바람은 아직 따뜻하겠지.

 

네가 준 흑청색 잉크를 만년필에 채울 때마다, 오작교 위에서 날리던 벚꽃 잎과 네 하얀 손수건이 떠오른다.

 

무릎에 난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는지 몹시 걱정스럽구나.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내 부주의와 모자람 탓에 네게 평생 지지 않을 짐을 지운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이곳에서 오직 법전만을 파고들고 있다.

 

가문의 이름도, 아버지가 깔아놓은 안락한 길도 모두 거부했다.

 

세상의 가장 추악한 권력을 내 손으로 심판할 수 있는 가장 서슬 퍼런 칼날이 되기 위해, 매일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줄이며 글자를 삼키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다오.

 

반드시 당당한 법복을 입고 네 앞에 서겠다.

 

네가 스케치해 준 요천 둑길의 자전거 풍경은 내 책상 가장 앞에 붙어 있다.

 

그림 속의 나와 팽나무를 볼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어머니의 안부를 전해주렴.

 

가게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문득 그립다.

 

성재환.'

 

글자 하나하나마다 지유를 향한 애틋한 염려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청년의 서슬 퍼런 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지유는 엽서를 가슴에 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엽서 모서리를 적실 뻔했지만,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재환아…….'

 

소리 없는 부름이 목구멍을 태웠다.

 

너는 그곳에서 홀로 가문과 싸우며 고결한 정의의 칼을 갈고 있구나.

 

하지만 이곳 남원은…… 너의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거대한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

 

어머니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사경을 헤매고 있고, 네 아버지가 강탈해 간 우리 집 과수원 땅 위에는 피눈물이 고여 있으며, 시장이 된 강태석은 우리 가게를 때려 부수려 용역들을 보냈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나러 서울로 가겠다던 그 꿈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어.

 

이 비참하고 처절한 현실을 네가 안다면 너는 어떻게 할까.

 

책을 덮고 당장이라도 남원으로 내려오겠지.

 

아버지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강태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네 미래를 통째로 내던지겠지.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지유는 눈물을 훔치며 양철 상자 옆에 놓인 편지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모나미 볼펜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굳어 있었다.

 

3. 전하지 못할 진실과 차가운 먹물

 

방바닥에 엎드린 지유는 펜촉을 종이에 대었다.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쓰러졌다고 쓸까.

 

병원비가 없어 매일 밤 피눈물을 흘린다고 쓸까.

 

아니면, 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원수라는 사실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쏟아낼까.

 

'말하면…… 너는 무너져 버릴 텐데.'

 

재환은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던 아이였다.

 

오작교 아래에서, 팽나무 그늘 밑에서 고개를 떨구며 괴로워하던 재환의 그늘진 눈빛이 떠올랐다.

 

만약 지금 남원의 모든 참상이 자신의 집안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재환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사법시험이고 뭐고 제 삶을 망가뜨릴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유에게 있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유일하게 비치는 북극성이었다.

 

남원의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순수하고 올곧게 빛나야 할 별빛이었다.

 

그 별빛마저 진흙탕 속으로 끌어내려 함께 파멸할 수는 없었다.

 

지유는 첫 문장을 썼다가 줄을 좍좍 그어 지웠다.

 

'재환아, 사실은…….'

 

찢어낸 종이를 구겨 방구석에 던졌다.

 

다시 새 종이를 꺼냈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

 

그 문장 역시 펜 끝으로 까맣게 칠해 지워버렸다.

 

재환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픔'이나 '고통', '가난' 같은 단어는 단 한 글자도 허락될 수 없었다.

 

그것은 재환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짓이었다.

 

지유는 심호흡을 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과 외로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가장 평온하고 단정한 글씨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재환에게.

 

보내준 엽서는 잘 받았어.

 

신림동의 밤바람이 차갑다니 걱정이다.

 

헌책방 골목에서 산 책들이 네 꿈을 밝혀주는 단단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 무릎 상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약도 잘 바르고 있고, 이제는 흉터도 거의 흐려져서 하나도 아프지 않아.

 

자전거도 예전처럼 잘 타고 다니니까 마음 쓰지 마.

 

남원은 여전히 평화롭단다.

 

요천 변의 수양버들은 푸른빛을 더해가고 있고, 저녁마다 노을이 강물을 붉게 물들이는 풍경은 네가 자전거를 타던 그날과 똑같아.

 

광한루원 팽나무도 푸른 잎을 무성하게 피워 올리며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어.

 

가게 일도 아주 순조로워.

 

어머니의 손맛이 워낙 좋으셔서 단골손님들이 김밥을 사러 길게 줄을 서곤 해.

 

아침마다 참기름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하은이와 민재도 매일 들러서 활기차게 웃고 간다.

 

어머니는 네 안부를 물으실 때마다 늘 기특한 학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

 

그러니 내 걱정은 손톱만큼도 하지 말고, 너는 오직 네가 가야 할 길에만 온 힘을 쏟으렴.'

 

거짓말.

 

종이 위를 채워가는 모든 문장이 처절하고 시린 거짓말이었다.

 

평화롭다는 남원은 토건 깡패들의 쇠파이프와 붉은 래커로 뒤덮여 있었고, 멀쩡하다는 무릎은 뼈마디가 시려 잠을 설쳤으며, 번창한다는 김밥집은 강제 철거 위기 속에서 손님이 끊겨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강하시다는 어머니는 차가운 기계음에 둘러싸여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유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평화롭단다'라는 글자 위로 툭 떨어졌다.

 

파란 잉크가 번져나갔다.

 

지유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 번진 자국마저 재환에게 의심을 살까 두려워, 종이를 입술로 불며 말렸다.

 

4. 가장 쉬운 일

 

지유는 펜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골목 저편에서 삐걱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이 떠나던 날, 남원역 승강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무릎으로 주저앉아 외쳤던 말.

 

'백 년이 걸려도 기다릴게!'

 

그것은 치기 어린 소녀의 감상이 아니었다.

 

지유에게 있어 재환을 기다리는 것은, 이 비정하고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순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쌀을 안치고, 취객들의 주정과 용역들의 협박을 견뎌내며, 대학의 꿈을 포기하고 기름때 묻은 칼을 쥐는 이 참혹한 일상 속에서……

재환을 향한 마음마저 무너진다면 지유는 단 하루도 버텨낼 수 없었다.

 

지유는 다시 펜을 잡았다.

 

망설임 없이, 가슴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가장 진실한 고백을 써 내려갔다.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파도가 밀려오지만,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저 널 기다리는 것만이 내게 가장 쉬운 일이니까.

 

그러니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렴.

 

네가 법복을 입고 오작교 위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이곳에서 널 기다릴 테니까.

 

성재환의 영원한 친구, 한지유.'

 

마침표를 찍은 지유는 편지지를 반듯하게 세 번 접었다.

 

봉투에 넣고 풀을 붙인 뒤, 겉면에 재환의 서울 하숙집 주소를 단정한 글씨로 적었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성재환 앞.'

 

그것은 침묵으로 쌓아 올린 지유의 성벽이었다.

 

자신의 모든 고통과 비극을 완벽하게 가두어 숨겨둔 채, 오직 재환을 향한 믿음과 온기만을 내보내는 새하얀 성벽.

 

지유는 봉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체온이 식어가는 차가운 방 안에서, 그 얇은 종이 한 장만이 지유의 유일한 난로였다.

 

5. 카운터 밑의 비밀

 

편지를 머리맡에 올려둔 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어가며 당부했던 마지막 말.

 

'카운터…… 밑에 서류…… 절대 빼앗기면 안 된다…….'

 

지유는 촛불을 켜 들고 불 꺼진 홀 카운터로 향했다.

 

어둠 속에 잠긴 김밥집은 낮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적막했다.

 

카운터 뒤편으로 들어선 지유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낡은 나무 서랍장 맨 밑바닥.

 

평소에는 거스름돈 통과 영수증 뭉치만 들어 있던 그 서랍을 완전히 앞으로 잡아당겨 밖으로 빼냈다.

 

서랍이 빠져나간 빈 공간, 먼지가 뽀얗게 쌓인 바닥 판자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덜컹.

 

판자 한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나무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 좁은 틈새에 누렇게 변색된 서류 봉투 하나가 비닐에 꽁꽁 싸인 채 숨겨져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굵은 매직으로 '한석규'라는 아버지의 함자가 적혀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서류 봉투를 꺼냈다.

 

비닐을 벗겨내고 내용물을 꺼내자, 1990년대 초반 남원군 시절의 관인이 찍힌 낡은 서류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원군 토지 구획 정리 및 환지 처분 이의신청서'

'소유권 변동 확인서 및 원천 측량 대비표'

지유의 눈동자가 서류의 행간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열 살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매일 밤 술에 취해 통곡하며 들여다보던 바로 그 서류들이었다.

 

서류에는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구었던 남원 요천 변 비옥한 과수원 부지 수천 평이 도로 개설과 공공용지 수용이라는 명목으로 헐값에 강제 수용된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받아야 할 대토(代土)와 환지 처분이 엉뚱하게도 자갈만 무성한 산비탈로 뒤바뀌어 버린 기막힌 조작의 흔적들.

 

그런데 그 서류의 맨 뒷장, 도청 감사관실에 제출하려다 기각당했던 탄원서 사본의 결재 라인에 지유의 시선이 멎었다.

 

'남원군 환지조정위원장 군수 성호석'

선명하게 찍힌 붉은 인주 도장.

 

성호석.

 

그 이름 석 자 옆에는 또 다른 이름 하나가 날카롭게 적혀 있었다.

 

'시행 대행사 삼거리 토건 대표 강태석'

지유의 숨이 턱 막혀왔다.

 

어머니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과수원을 빼앗긴 채 피눈물을 흘리며 이 삼거리 골목으로 쫓겨나 김밥을 말아야 했던 어머니의 한.

 

그 모든 비극의 뿌리에 성호석과 강태석이라는 두 거대한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성호석은 행정의 칼날로 아버지의 땅을 도려냈고, 강태석은 폭력과 조작으로 그 땅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강태석이 그 대가로 바친 검은 자금은 성호석을 군수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서울 내무부의 핵심 실세로 밀어 올리는 발판이 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유의 손에서 서류가 파르르 떨렸다.

 

재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맑고 단정한 이마, 팽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 깊고 슬픈 눈망울.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의 만년필에 새겨져 있던 그 고결한 법언이 떠오르는 순간, 지유는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그 만년필을 쥐여준 가문이 바로 자신의 가정을 도륙 낸 살인자나 다름없었다는 이 참혹한 운명의 장난.

 

서랍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지유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원망하고 싶었다.

 

재환을, 그 가문의 아들을 저주하고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유는 품속에 간직해 둔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내 보았다.

 

흑청색 잉크로 적힌 단정한 필체.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글씨는 거짓이 아니었다.

 

재환은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의 사슬을 끊기 위해 서울의 차가운 고시촌 골목에서 피를 토하듯 법전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소년 역시 피해자였다.

 

가문의 죄악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채,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가련한 영혼이었다.

 

지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손등으로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지유는 서류를 다시 비닐에 싸서 카운터 밑 비밀 공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킬 거야.'

 

지유는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도, 이 서류도, 그리고…… 너와의 약속도.'

 

이 서류는 강태석과 성호석을 무너뜨릴 유일한 칼날이었다.

 

강태석이 왜 그토록 이 김밥집을 부수지 못해 안달하는지, 왜 용역들을 동원해 어머니를 압박했는지 이제 명백해졌다.

 

강태석은 이 서류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시장 자리에 올랐어도, 성호석이 서울 요직에 앉았어도, 이 원본 대조 서류가 세상에 드러나는 날 두 사람의 제국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유는 판자를 덮고 서랍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진실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다.

 

6. 붉은 우체통 앞의 맹세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다섯 시.

 

요천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골목길을 지유가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밥주걱을 쥐어 살갗이 튼 손이, 다른 한 손에는 밤새 품에 안고 있던 하얀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동문 우체국 앞, 붉은 우체통이 아침 안개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은 붉은 철판 표면에 지유의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지유는 우체통 투입구 앞에 섰다.

 

봉투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손끝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

 

이 편지가 서울에 닿으면 재환은 안도할 것이다.

 

남원이 평화롭다고 믿으며, 지유가 웃고 있다고 믿으며, 마음 놓고 고시 공부에 전념할 것이다.

 

그 침묵의 대가로 지유는 홀로 이 거대한 지옥을 견뎌내야 한다.

 

매일 밤 들이닥칠지 모르는 깡패들의 공포와, 어머니의 생사를 넘나드는 절망과, 가문의 원수와 첫사랑 사이에서 찢겨 나가는 영혼의 고통을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

 

"……감당할게."

 

지유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다 감당할게, 재환아."

 

툭.

 

하얀 편지 봉투가 어두운 우체통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닿는 그 작은 소리가, 지유에게는 자신의 청춘과 안락을 모두 바치는 거대한 서약의 징소리처럼 울렸다.

 

지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광한루원의 팽나무 고목 실루엣이 푸른 새벽하늘 아래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아래 오작교에서 나누었던 봄날의 온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시리도록 아프게 번져왔다.

 

가게로 돌아온 지유는 앞치마를 질러 매었다.

 

새벽밥을 안치기 위해 쌀을 씻는 맑은 물소리가 텅 빈 가게에 울려 퍼졌다.

 

그때, 닫힌 셔터 문 밖에서 거친 엔진 소리가 멈추어 섰다.

 

끼익―

육중한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불길한 소리.

 

지유는 쌀을 씻던 손을 멈추었다.

 

셔터 틈새로 검은 고급 세단 한 대가 비쳐 들었다.

 

차 문이 열리고, 흙탕물을 튀기며 내린 사내들의 육중한 그림자가 김밥집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강태석의 부하들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골목길에, 또다시 피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