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병환
1. 새벽 도마 위의 찬 바람
새벽 네 시의 공기는 언제나 비릿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남원(南原) 동문 우체국 뒷골목, 낮게 드리운 삼거리의 함석지붕 위로 서리가 내려앉는 소리가 서걱거렸다.
유리창 틈새로 스며드는 삭풍에 백열전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골목의 침묵을 쪼개고 있었다.
지유의 어머니는 허리를 잔뜩 웅크린 채 굳은살 박인 손으로 당근을 썰어 냈다.
타각, 타각,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던 칼소리가 이따금 불규칙하게 멎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앞치마 끝을 쥐어짜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을 짓누르는 통증 탓인지 마른 입술이 허옇게 부르터 있었다.
부엌 쪽문 너머 단칸방에서 책장을 넘기던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형광등 아래 펼쳐진 두꺼운 수능 참고서 위로 작은 한숨이 떨어졌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어제보다 한 뼘은 더 거칠어져 있었다.
지유는 덮고 있던 낡은 솜이불을 조용히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단무지 냄새와 고소한 방앗간 참기름 내음이 훅 끼쳤다.
하지만 그 익숙한 냄새 밑바닥에, 쇠 긁는 듯한 어머니의 밭은기침 소리가 무겁게 깔려 있었다.
"엄마, 내가 새벽엔 깨우라고 했잖아."
지유가 털양말을 끌며 조리대 곁으로 다가갔다.
칼을 쥔 어머니의 손등에는 푸르스름한 핏줄이 굵게 솟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찬물에 퉁퉁 부어 붉게 짓물러 있었다.
어머니는 지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칼을 멈추고 마른기침을 삼켰다.
"기집애가 잠도 안 자고 왜 벌써 나와. 고3이 잠을 푹 자야 눈이 밝아지는 법인데."
"잠은 무슨. 엄마 숨소리가 방 안까지 다 들리는데 어떻게 눈을 붙여. 얼른 이거 놔. 우엉 졸이는 건 내가 볼 테니까,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좀 누워 있어."
지유가 어머니의 손에서 칼자루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앙상한 손가락에 힘을 주며 도마 위를 가로막았다.
"됐다니까 그러네. 이건 결대로 얇게 쳐야 씹는 맛이 산단 말이다. 네가 썰면 굵어서 손님들이 단박에 알아채. 가서 단어장이나 한 자 더 들여다봐. 이제 모의고사도 얼마 안 남았잖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끝이 갈라져 바스락거렸다.
이마와 콧등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끈적한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지유는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닿는 옷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체온이 유난히 뜨거웠다.
단순한 과로의 열기가 아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 곪아 터진 독기가 살갗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듯한 불길한 열기였다.
"엄마 열 있잖아. 몸이 불덩이인데 김밥은 무슨 놈의 김밥이야. 오늘 하루만 가게 문 닫고 시내 병원 가자, 응?"
"장사하는 집이 하루 문을 닫으면 단골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법이야. 새벽 첫차 타는 일용직 양반들이랑 군청 직원들이 아침마다 들르는데, 문간이 썰렁하면 그 사람들이 어딜 가겠어."
어머니는 지유의 손길을 밀어내며 억지로 칼을 놀렸다.
타각, 타각.
그러나 칼날이 도마를 내리치는 힘은 이미 모래알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지유는 어머니 몰래 부엌 구석의 찬장을 힐끗 보았다.
찬장 구석 낡은 양념통 뒤편에, 약국에서 지어 온 진통제와 위장약 봉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통증을 억누른 지 벌써 몇 달째였다.
성호석 시장이 서울로 떠나고, 삼거리 토건의 강태석이 보궐선거로 새 시장에 당선되던 날부터 어머니의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검은 승용차 바퀴 소리만 들어도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방구석으로 숨어들곤 했다.
10년 전 과수원을 빼앗기고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던 아버지의 얼굴이, 강태석이라는 이름 석 자 위에 겹쳐진 탓이었다.
"그 인간이 시장이 됐으니…… 이제 우릴 가만둘 리가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유의 귓전을 맴돌았다.
지유는 어머니의 젖은 앞치마를 꼭 쥐었다.
"엄마, 강태석인지 뭔지 그 작자가 아무리 설쳐도 우리가 법대로 버티면 돼. 그 사람이 시장 됐다고 우리 땅, 우리 가게를 그냥 뺏어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어머니의 손이 뚝 멈추었다.
칼날이 당근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가른 채 박혀 버렸다.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유를 바라보았다.
핏발 선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처절한 공포와 해묵은 원망이 뒤엉켜 있었다.
"법……?"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깟 법이 우리를 살려줬더냐? 네 아버지가 왜 그 피를 토하고 선산도 없는 땅바닥에 묻혔는데. 법전 달달 외운 놈들이 도장 하나 찍어서 과수원을 통째로 들어내 갈 때, 법이 우리 편을 들어주던? 재환이 그놈도…… 그 잘난 시장 아들도 결국 똑같은 핏줄이야."
"엄마!"
지유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재환의 이름이 어머니의 메마른 입에서 불려 나오는 순간, 가슴속 깊이 묻어둔 상처가 날카롭게 덧났다.
어머니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유를 노려보다가, 이내 가슴을 쥐어잡으며 휘청거렸다.
"아니다……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어머니는 헐떡이며 조리대 모서리를 짚었다.
새벽바람이 다시금 창살을 흔들었다.
함석지붕 위로 마른 잎 하나가 굴러가는 소리가 지유의 귓가에 서늘하게 박혔다.
2. 깨어진 뚝배기와 쓰러진 어머니
아침 일곱 시가 가까워지자 골목길 너머에서 덜컹거리는 버스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우체국 집배원들과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청년들이 삼거리 골목길을 가로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게 안은 이미 김밥을 싸는 참기름 냄새와 멸치 육수 끓는 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유는 교복 블라우스 위에 어머니의 두 번째 앞치마를 겹쳐 매고 손님들의 김밥을 은박지에 말아 넣었다.
어머니는 가스 화구 앞에 서서 아침 손님들에게 내어줄 북엇국과 계란찜 뚝배기를 불에 올리고 있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어머니는 뚝배기 집게를 잡을 때마다 손을 파르르 떨었다.
"지유야, 저기 3번 테이블 순경각시한테는 단무지 넉넉하게 담아 드려라."
어머니가 벽에 걸린 주문 쪽지를 보며 쉰 목소리로 일렀다.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엄마는 저기 의자에 앉아 있어, 제발."
지유가 밥주걱을 놀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손님 세 명이 연달아 들어오며 좁은 홀 안이 금세 북적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찬 바람이 들이치며 뿌연 수증기를 흩어 놓았다.
"아따, 지유 어매! 오늘 국물이 유난히 구수하네잉. 날이 워낙에 쌀쌀해야 말이지."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김 씨 아저씨가 문간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털모자를 벗었다.
어머니는 억지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멸치 대가리 바짝 볶아서 국물 냈응게 따땃할 때 드시요."
어머니가 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뚝배기를 집게로 집어 올렸다.
뚝배기 가장자리로 하얀 거품이 넘쳐흐르며 가스 불꽃이 치익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나무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뚝배기를 쥔 어머니의 오른손에서 뚝, 하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지유의 시야에 잡혔다.
어머니의 동공이 풀리며 초점을 잃었다.
"엄마?!"
지유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펄펄 끓는 계란찜 뚝배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도자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뜨거운 계란과 국물이 바닥에 쏟아지며 자욱한 수증기를 뿜어 올렸다.
어머니의 몸은 마치 뿌리 뽑힌 고목처럼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조리대 옆에 쌓아 두었던 스테인리스 대야와 반찬 그릇들이 어머니의 몸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엄마! 엄마!"
지유는 쥐고 있던 참기름 솔을 내던지고 조리대를 뛰어넘다시피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깨진 사기 파편이 지유의 무릎을 찔렀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어머니의 뺨을 흔들었다.
어머니의 두 눈은 허공을 향해 반쯤 풀려 있었고, 입술은 시퍼렇게 질려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어매! 지유 어매! 이게 뭔 일이야!"
김 씨 아저씨가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달려왔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튕겨 나가듯 일어났다.
"숨을…… 숨을 제대로 못 쉬어! 김 씨 아저씨, 어떡해요, 엄마 숨이 넘어가요!"
지유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어머니의 가슴팍이 불규칙하게 들썩거리며 목구멍에서 꺽, 꺽 하는 거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지유는 어머니의 굳어 가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손바닥 한가운데, 10년 넘게 도마를 치며 박인 깊은 굳은살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빨리, 119 좀 불러주세요! 제발요!"
지유가 가게 안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손님 중 한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길 건너 공중전화로 질주했다.
가게 밖 골목길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지유는 바닥에 고인 뜨거운 국물과 깨진 파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마른 몸이 지유의 품 안에서 가늘게 경련했다.
어머니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꺼져가는 숨을 쥐어짜는 입모양이었다.
지유는 귀를 어머니의 입술 가까이에 바짝 가져다댔다.
"엄마…… 말하지 마, 숨 쉬어, 숨 크게 쉬어……."
"가…… 게……."
어머니의 거친 쇳소리가 지유의 귓바퀴를 긁었다.
"가게…… 뺏기면…… 안 된다……."
어머니의 앙상한 손가락이 지유의 교복 소매를 뜯어낼 듯이 움켜쥐었다.
손톱 밑이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유의 얼굴을 바라보려 애쓰며, 허공을 응시하는 탁한 눈으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놈들…… 강태석이…… 그리고…… 재환이 애비…… 성……."
말이 채 맺어지지 못했다.
어머니의 목구멍에서 꺽 하는 숨구멍 막히는 소리가 나더니, 잡고 있던 지유의 소매를 툭 떨어뜨렸다.
어머니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완전한 암전이었다.
"엄마! 엄마 눈 떠! 엄마!"
지유의 처절한 비명이 삼거리 김밥집의 좁은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 쏟아진 멸치 육수의 비릿한 김 너머로,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3. 응급실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남원의료원 응급실의 녹색 리놀륨 바닥은 소독약 냄새로 미끄러웠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복도를 울렸다.
산소마스크를 쓴 어머니의 들것이 응급 처치실의 두꺼운 고무 커튼 뒤로 사라졌다.
"보호자분은 밖에서 대기하세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가 지유의 어깨를 밀어내며 커튼을 홱 닫아걸었다.
철제 링이 레일을 긁는 쇳소리가 지유의 귓전을 날카롭게 베었다.
지유는 응급실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교복 치마와 스타킹은 어머니를 안아 올릴 때 묻은 참기름과 국물, 핏자국으로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무릎 쪽 스타킹이 찢겨 나가 살갗에 박힌 사기그릇 파편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유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채, 오직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계음과 다급한 고함만이 귓바퀴를 때렸다.
"혈압 60에 40으로 떨어집니다! 에피네프린 1앰플 정맥 주사해!"
"심전도 모니터 연결해! 석션 준비하고!"
의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벽을 뚫고 새어 나왔다.
삐-, 삐-, 삐- 하고 빠르게 울리던 모니터 경고음이 지유의 심장 박동과 겹쳐졌다.
지유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이마를 무릎에 파묻었다.
'하느님, 제발요.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요.
평생 고생만 하고, 아버지 잃고, 나 하나 키우겠다고 새벽마다 손 짓물러가며 산 사람인데…….'
눈물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피 묻은 바닥을 적셨다.
그때, 응급실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지유야! 한지유!"
윤하은이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쳐 멘 채, 하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복도를 질주해 왔다.
지유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은 하은이 지유의 차가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지유야! 아줌마는? 아줌마 어떻게 되신 거야?"
하은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유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술을 떼었다.
"안에서…… 의사 선생님들이……."
"세상에, 네 무릎은 이게 다 뭐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하은이 자신의 가방에서 휴지와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찢어진 스타킹 위를 덧댔다.
하지만 지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은의 손을 밀어냈다.
"내 건 됐어…… 엄마가…… 엄마가 숨을 안 쉬었어, 하은아. 가게 바닥에 쓰러지셨는데…… 손이 너무 차가웠어……."
지유의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들썩였다.
하은은 참지 못하고 지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소녀의 교복 위로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엉겨 붙었다.
"괜찮을 거야, 지유야. 아줌마 심지 굳은 분이잖아. 너 혼자 두고 어디 가실 분 아니야. 응? 정신 차려야 해, 지유야."
하은이 등을 쓸어내리며 울먹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응급 처치실의 녹색 커튼이 거칠게 젖혀지며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당직 의사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며 걸어 나왔다.
지유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선생님! 우리 엄마…… 우리 엄마 괜찮나요?"
지유가 의사의 소매를 붙잡았다.
의사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지유의 앳된 교복 차림과 피 묻은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급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폐에 물이 차고 급성 심부전 증세가 와서 심장이 멎을 뻔했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손을 쓰지 못할 뻔했습니다."
지유의 다리에서 힘이 털썩 풀렸다.
하은이 곁에서 지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절대 아닙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보호자 학생, 어머니 지병 있으신 거 몰랐어요? 심장 판막 쪽에도 문제가 있고, 만성 신부전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입니다. 이 정도면 몇 달 전부터 극심한 부종과 흉통이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참고 일을 하신 겁니까? 몸 상태가 완전히 바닥이에요. 당장 중환자실로 올려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중환자실이요……?"
지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예. 최소한 보름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 상태가 안정된다 해도 장기 입원과 투석 치료가 불가피합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해요. 만약 이번처럼 또다시 과로하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혈압이 치솟으면, 다음번엔 장담 못 합니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원무과 가서 중환자실 입원 수속부터 밟으세요. 보증금이랑 기본 처치 비용 납부하셔야 병실 배정이 떨어집니다."
의사가 차트를 옆구리에 끼고 응급실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홀로 남겨진 지유의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중환자실 입원 보증금.
집중 치료 비용.
장기 입원과 투석.
현실의 숫자들이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되어 열여덟 살 소녀의 가냘픈 어깨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4. 가난의 민낯과 내려앉은 침묵
원무과 접수 창구 유리벽 너머로 차가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탁탁탁 울렸다.
"보증금 오십만 원에 당일 응급처치 및 정밀 검사비 합쳐서 오늘 납부하셔야 할 금액이 팔십칠만 원입니다. 학생, 보호자 어른은 안 계셔요?"
창구 직원이 돋보기너머로 지유를 힐끔 보며 영수증 청구서를 툭 내밀었다.
팔십칠만 원.
김밥 한 줄에 천 원, 천오백 원을 받아 손에 쥐는 지유 모녀에게 그것은 아득한 금액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가 부서져라 일해도 쌀값과 재료비, 가게 월세를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늘 몇만 원의 푼돈뿐이었다.
지유의 손가락이 카운터 모서리를 하얗게 쥐어뜯었다.
"저……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서요. 가게에 가서 통장이랑 정리를 좀 해 와야 해서요……."
"학생 사정은 딱하지만 규정이 그래요. 보증금이 예치되어야 중환자실 병상이 정식으로 배정되고 투약 오더가 들어갑니다. 오늘 오후까지는 어떻게든 수납하셔야 해요."
직원의 말투는 모질지 않았으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지유의 가슴을 얼음 송곳처럼 찔렀다.
유리창에 비친 지유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하은이 곁으로 다가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유야, 나 통장에 용돈 모아둔 거 한 십오만 원 있어. 우리 엄마한테도 전화해서 사정 얘기하고 좀 빌려달라고 할게.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야."
"하은아……."
지유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친구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처참함보다, 당장 어머니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병원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뼈를 깎아 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최민재였다.
교복 셔츠 단추가 두 개나 뜯겨 나간 채, 땀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온 민재가 지유와 하은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지유야! 아줌마는! 아줌마 어떻게 되셨어!"
민재의 목소리가 텅 빈 원무과 로비에 쩌렁쩌렁 울렸다.
"민재야, 목소리 좀 낮춰. 병원이야."
하은이 민재의 팔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민재는 지유의 엉망이 된 옷차림과 원무과 창구 위에 놓인 청구서를 번갈아 보더니 상황을 단박에 알아챘다.
민재의 턱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굳어졌다.
"얼마야. 얼마 필요해?"
민재가 거칠게 지갑을 꺼냈다.
만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전부인 낡은 지갑이었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던 민재는 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제기랄…… 하필 이럴 때……."
"민재야, 그러지 마. 네 잘못 아니야."
지유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가게 금고에 이번 주 재료비 결제하려고 모아둔 돈이 좀 있어. 그거 가져오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야. 어머니 중환자실 올라가시는 거 보고 나 가게 잠깐 다녀올게."
"내가 같이 가, 지유야."
민재가 앞장서려 했다.
"아냐, 민재 너랑 하은이는 학교 가. 나 때문에 너희까지 결석하면 안 돼. 벌써 일교시 시작할 시간이야."
지유의 단호한 눈빛에 민재와 하은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쓰러질 수 없는 자의 악착같은 오기가 서려 있었다.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어머니의 침대를 배웅했다.
각종 튜브와 전선에 둘러싸인 어머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코에 꽂힌 산소 호스를 통해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며, 지유는 어머니의 차가운 발을 이불 속으로 꼭 밀어 넣어 주었다.
'엄마, 내가 지킬게.
가게도, 엄마도, 내가 다 지킬 테니까 죽지 마.
제발 눈만 감지 마.'
돌아서는 지유의 등 뒤로 중환자실 육중한 철문이 덜컥 닫혔다.
5. 텅 빈 교실의 책상과 찢겨진 원서
정오가 지나 남원여고 3학년 2반 교실 앞 복도는 적막했다.
중간고사를 앞둔 자습 시간, 연필 굴러가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복도 창가에 선 담임교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선 지유를 내려다보았다.
지유의 손에는 기름때가 묻은 종이봉투와 볼펜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교복 무릎에는 빨간 소독약이 얼룩져 있었고, 얼굴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퀭했다.
"지유야, 네 사정은 하은이한테 대강 들었다만……."
담임교사의 목소리에 난처함과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교탁 위에 놓인 지유의 진학 상담 카드에는 서울 소재 국립대 사범대학과 국문학과가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표의 백분위는 이미 합격 안정권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원여고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재였다.
가난한 김밥집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가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은, 지유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들에게도 오랜 자랑거리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수능이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어. 지금 휴학을 하거나 결석이 길어지면, 정시는 고사하고 수시 원서도 제대로 못 쓴다. 네 성적이 아깝지 않으냐? 너 서울 꼭 가고 싶어 했잖아."
담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유의 가슴을 짓이겼다.
서울.
그 단어가 심장을 꿰뚫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서울 성북동 사저로, 관악산 신림동 고시촌 헌책방 골목으로 홀로 끌려가 법전을 파고들고 있을 성재환.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찍힌 엽서 뒷면에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썼던 그의 필체.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
그 약속을 믿으며, 지유 역시 서울로 올라가 재환의 곁에서 당당히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내겠노라 다짐했었다.
그와 함께 걸을 서울의 거리를 상상하며, 밤마다 졸음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문제집을 풀었던 시간들이었다.
지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선생님…… 저 대학 진학 포기하겠습니다."
지유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담임교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포기라니? 지유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 병원비 때문이라면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을 알아볼 수도 있어. 선생님들이 도울 수도 있고……!"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지유가 담임의 말을 차분하게 끊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서글프게 들렸다.
"장기 입원을 해야 하고, 매주 투석을 받아야 한대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서 앞으로 가게 일은 영영 못 하십니다. 저마저 서울로 떠나버리면 우리 어머니는 누가 돌보고, 병원비는 어디서 벌며, 삼거리 김밥집은 누가 지킵니까?"
지유는 교탁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대입 모의 원서 출력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지유'라는 이름 석 자 위에 찍힌 붉은 도장이 유난히 시리게 빛났다.
"그 가게…… 저희 아버지가 남겨주신 마지막 숨구멍이에요. 그것마저 뺏기면 우리 엄마는 정말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요. 지금 제가 서울로 가면, 저는 살지 몰라도 우리 엄마는 죽어요."
지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마침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자신의 모의 원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쥐고 반으로 찢었다.
찌익,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교무실 복도의 침묵을 갈랐다.
담임교사가 경악하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원서는 네 조각으로, 다시 여덟 조각으로 찢겨 나갔다.
"지유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자퇴는 안 할게요. 수업 끝나고 야간 자율학습만 빼주세요. 학교 끝나면 바로 가게로 가서 일해야 합니다. 어머니 퇴원하실 때까지 제가 김밥 말고 배달도 해야 해요. 졸업장만 딸 수 있게…… 출석만 인정해 주세요."
지유는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모아 쥐고 담임교사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굽힌 채 떨리는 어깨를 보며, 담임교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교실 문 뒤편 창문 너머로 이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하은은 참지 못하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쥔 채 주저앉아 흐느꼈다.
꿈을 찢어 발겨 바닥에 묻어버린 열여덟 살 소녀의 등 뒤로, 봄날의 햇살이 무정하리만치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6. 홀로 짊어진 삼거리 김밥집
오후 네 시의 삼거리 김밥집은 황량했다.
아침에 쏟아졌던 계란찜 국물과 깨진 사기 파편은 김 씨 아저씨와 이웃 상인들이 대강 쓸어 담아 두었지만, 바닥에 밴 비릿한 탄 내와 기름 냄새는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유리 미닫이문에 걸린 낡은 팻말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영업합니다.'
지유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방구석에 던져두었다.
어머니의 때 묻은 앞치마를 목에 걸고 허리끈을 질끈 동여맸다.
끈을 묶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조리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큰 양푼에는 아침에 쓰다 남은 밥이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다.
지유는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를 들었다.
바닥에 굳어버린 국물 자국을 박박 문질러 닦아 냈다.
철수세미가 시멘트 바닥을 긁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피가 배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틀어막기 위해, 지유는 더 거칠게 바닥을 문질렀다.
"울지 마. 울면 지는 거야. 성재환도 서울에서 혼자 버티고 있잖아. 나까지 주저앉으면 다 끝장이야."
혼잣말을 내뱉으며 지유는 밥솥의 전원을 올렸다.
치익- 소리를 내며 거대한 업소용 밥솥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단무지를 건져 물기를 짜고, 햄을 썰고, 달걀을 풀어 팬에 올렸다.
어머니가 하던 동작을 수천 번, 수만 번 눈으로 보아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 모든 불을 켜고 칼을 쥐자, 칼날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지단이 팬 바닥에 들러붙어 찢어졌다.
"아……."
지유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팬을 든 손에 힘이 빠져 바들거렸다.
그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지유야!"
가방을 둘러맨 하은과 민재가 들이닥쳤다.
두 사람의 손에는 시장 골목에서 사 온 듯한 커다란 계란 판과 당근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 학교 끝났어?"
지유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손등으로 넘기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이라고 하냐? 종 치자마자 튀어왔지."
민재가 씩 웃으며 당근 자루를 부엌 구석에 쿵 내려놓았다.
교복 블레이저를 훌렁 벗어 의자에 걸친 민재는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야, 내가 힘쓰는 건 남원 시내에서 일등인 거 알지? 쌀 푸대 나르고 무거운 거 드는 건 다 나 시켜. 물 배달도 내가 자전거로 싹 돌릴 테니까 넌 김밥만 말아."
하은 역시 교복 치마 위에 지유의 여분 앞치마를 두르며 조리대 곁으로 바짝 붙었다.
"지유 너 혼자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해. 나 집에서 계란말이 천 번은 해봤어. 지단 부치는 건 나한테 맡겨. 얼른 비켜봐, 팬 달궈졌잖아."
하은이 능숙하게 기름을 두르고 계란물을 부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노란 계란물이 얇게 퍼져 나갔다.
지유는 멍하니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가슴속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목구멍을 꽉 막았다.
"너희들 공부해야 하잖아…… 수능이 코앞인데 이러면 어떡해……."
"시끄러워, 기집애야."
하은이 눈을 흘기며 주걱을 휘둘렀다.
"친구 엄마가 쓰러졌는데 공부가 손에 잡히겠냐? 우리 대학 좀 늦게 가면 어때. 너 혼자 이 고생 하게 둘 줄 알았어?"
민재도 쌀통 뚜껑을 열며 거들었다.
"재환이가 서울 가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지유 너 지키라고 했어. 지유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서울에서 몽둥이 들고 내려와서 내 대가리를 깨버리겠다고 했다고. 내가 그놈 무서워서라도 김밥집 망하게 못 둔다."
민재의 익살스러운 너스레에, 굳게 닫혀 있던 지유의 입가에 마침내 파리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 뒤편으로 툭, 눈물방울 하나가 도마 위로 떨어졌다.
지유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밥통에서 퍼 올린 뜨거운 밥을 양푼에 쏟아부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얘들아……."
세 소년 소녀의 손길이 분주하게 얽혔다.
민재는 쌀을 씻어 안치고 무거운 육수 솥을 가스대에 올렸으며, 하은은 얇고 노란 지단을 겹겹이 부쳐 냈다.
지유는 김발 위에 김을 얹고 밥을 얇게 폈다.
손끝이 데일 듯 뜨거웠지만, 친구들의 온기가 곁에 머물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어느덧 밖은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요천 둑길을 따라 붉게 번져가고 있었다.
7. 서랍 속의 흑청색 잉크병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마지막 손님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재료가 바닥나 일찍 셔터를 내린 김밥집 안은 기름 냄새와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지유의 성화에 못 이겨 하은과 민재는 막차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일 새벽에도 나올 테니까 문 열어둬라, 지유야!"
골목길 저편으로 멀어지는 민재의 외침을 뒤로하고, 지유는 가게 안쪽의 굵은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완벽한 어둠과 고요가 좁은 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차가운 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 손가락 끝마디가 퉁퉁 부어올라 욱신거렸고, 허리는 끊어질 듯 쑤셨다.
하지만 몸의 고통보다 더 지유를 짓누르는 것은 텅 빈 공간이 주는 막막함이었다.
늘 멸치 똥을 다듬으며 지유를 반겨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없는 집.
차갑게 식어버린 방바닥.
지유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방으로 기어들어가 형광등을 켰다.
방 한구석, 어머니가 덮던 낡은 요가 가지런히 개어 있었다.
그 요 위에 코를 묻자, 어머니 특유의 분 냄새와 파스 냄새, 그리고 참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지유는 요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쯤, 지유의 시선이 책상 밑 낡은 양철 과자 상자로 향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서울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찍힌 성재환의 첫 번째 관제엽서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지유가 매일 밤 써 내려갔으나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봉투 대여섯 장이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엽서를 꺼내 들었다.
거친 관제엽서 종이 위에 지유가 선물했던 남원 문구점의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재환의 반듯한 필체.
'지유에게.
서울의 밤하늘은 남원의 요천처럼 맑지 않고 매캐한 매연 냄새만 가득하다.
성북동 집의 높은 담장은 숨이 막히지만, 나는 매일 밤 관악산 신림동 고시촌 헌책방을 뒤지며 법전을 읽고 있다.
내 손에 쥔 이 펜 끝에 너의 푸른 잉크가 흐르고 있음을 안다.
너의 다친 무릎은 좀 어떠니.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멀리서 약 하나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내 무력함이 살을 엾는다.
지유야, 반드시 돌아간다.
너를 지킬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정의의 칼을 쥐고, 법복을 입고 네 앞에 설 것이다.
그날까지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해다오.'
재환의 글씨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던 지유의 눈에서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엽서 위로 눈물이 뚝 떨어지자, 흑청색 글씨의 모서리가 푸르스름하게 번져 나갔다.
지유는 화들짝 놀라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엽서를 가슴에 품었다.
'재환아…….'
입 밖으로 꺼내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이름이었다.
지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 깊은 곳, 자신이 재환에게 선물하고 남겨두었던 똑같은 흑청색 잉크병이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고 단정한 사각 유리병.
그 속에 담긴 깊은 푸른빛은 요천의 밤물결 같기도 했고, 재환의 서늘하면서도 올곧은 눈빛 같기도 했다.
지유는 백지를 한 장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모나미 볼펜을 쥐었다.
'재환아, 나 잘 지내.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우리 김밥집도 손님이 많아서 매일매일 바쁘게 지내고 있어.
너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편지는 자주 못 부치지만, 네 엽서 매일 밤 읽으면서 힘내고 있어.
남원의 요천 둑길엔 아직도 벚꽃 잎이 날리던 그 봄날의 바람이 부는 것 같아.
걱정하지 마.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널 기다릴 테니까.'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하루아침에 김밥집의 소년 가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강태석 일당이 가게를 부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사실도 단 한 줄 적지 못했다.
서울에서 홀로 가문의 억압과 싸우며 고시 공부에 피를 말리고 있을 그에게, 자신의 가난과 비극을 짐으로 얹어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유가 성재환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지유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유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수신인 란은 비워둔 채였다.
재환이 머무는 신림동 하숙집의 정확한 번지수를 알지 못했기에, 이 편지 역시 양철 상자 속으로 들어가 부치지 못한 채 잠들 운명이었다.
지유는 편지 봉투를 상자 맨 위에 얹고 뚜껑을 닫았다.
양철 뚜껑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8. 불 꺼진 요천각의 그림자
자정이 넘은 시각, 광한루원 뒤편 요천 변의 최고급 요정 요천각(蓼川閣)의 기와지붕 위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마당에 주차된 최고급 외제 세단과 검은색 그랜저들의 보닛이 식어 가고 있었다.
2층 난간 끝 밀실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병풍 앞 상석에는 붉은 벨벳 방석을 깐 강태석 남원시장이 양복 단추를 푼 채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기름진 얼굴에 얼큰한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번들거리는 눈빛만큼은 독사처럼 서늘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삼거리 토건의 심복 배 대표가 깍듯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서류철을 넘기고 있었다.
"그래, 시청 지적과 지하 금고는 확실하게 틀어막았냐?"
강태석이 크리스털 잔에 양주를 따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예, 시장님. 최영식 계장 그 새끼 처자식 목숨 줄까지 쥐고 흔들어 놨으니 혀를 깨물어도 입 밖으로 못 냅니다. 1991년도 구도심 환지 처분 원천 측량 대장이랑 이면 각서는 특수 금고에 넣고 납 봉인까지 끝냈습니다. 시장님 친필 결재 없이는 내무부 장관이 내려와도 절대 못 엽니다."
배 대표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했다.
강태석은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성호석이 그 여우 같은 새끼…… 서울 올라가서 내무부 기조실장 감투 쓰더니 아주 기세가 등등하더군. 지놈이 남원에서 해 처먹은 환지 비리 원본을 내가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서류만 내 손에 있으면 성호석이는 평생 내 충견 노릇을 해야 돼. 대선 자금이든 중앙 예산이든 내가 달라는 대로 토해내야 할 거다."
강태석이 목을 뒤로 젖히며 껄껄 웃었다.
요천각 밀실의 창호지가 그의 거친 웃음소리에 파르르 떨렸다.
웃음을 거둔 강태석의 시선이 배 대표의 서류철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삼거리 정비구역 철거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내가 취임 첫 결재로 도장 찍어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배 대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게…… 시장님, 삼거리 김밥집 그 과수원 한석규 마누라년 말입니다. 오늘 새벽에 가게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남원의료원 중환자실로 실려 갔답니다."
"뭐? 쓰러져?"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 심장이랑 신장이 다 망가져서 오늘내일한답니다. 동네 여론도 좀 그렇고 해서 당장 포클레인을 들이밀기가……."
"이런 멍청한 새끼를 봤나!"
강태석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양주잔이 튀어 오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배 대표는 화들짝 놀라 이마를 바닥에 조아렸다.
"그년이 뒈지든 말든 그게 포클레인 들어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잘된 거 아냐? 주인이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싹 밀어버려야 뒤탈이 없지! 언제부터 삼거리 토건이 남원 바닥에서 여론 눈치를 봤다고 헛소리야!"
강태석의 굵은 목덜미에 시퍼런 핏대가 솟구쳤다.
"삼거리 그 노른자위 땅을 밀어야 국책 쇼핑타운 인허가가 떨어지고, 내 선거 빚을 털어낼 거 아냐! 당장 내일이라도 용역들 풀어서 자진 철거 계고장 붙이고, 말 안 들으면 포클레인으로 차양부터 찍어 눌러! 알아들어?"
"예, 예! 시장님, 명심하겠습니다! 내일 날 밝는 대로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배 대표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강태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창밖의 요천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유유히 흐르는 요천의 물줄기 위로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남원은 이제 온전히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법도, 행정도, 돈도 그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신림동의 차가운 단칸방에서 자신을 단죄할 사법의 칼날이 갈리고 있다는 사실도, 삼거리 김밥집의 어린 소녀가 그 폭압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눈빛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였다.
9. 중환자실의 차가운 유리창
다음 날 이른 새벽, 남원의료원 3층 중환자실 앞 복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면회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지유는 소독 가운을 걸치고 비닐 덧신을 신은 채 조심스럽게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계들이 토해내는 규칙적인 비프음과 산소 공급기의 쉭쉭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괴물의 숨소리처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유는 6번 침대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는 수많은 호스를 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어제보다 더 노랗게 떠 있었고, 손발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머니의 부은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엄마…… 나 왔어."
지유의 떨리는 목소리가 산소마스크 너머로 전해졌는지, 어머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떠진 어머니의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지유를 응시했다.
마스크 속에서 가쁜 숨이 허옇게 서렸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여 지유의 손가락을 쥐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끝만 바들바들 떨릴 뿐이었다.
"엄마, 말하지 마. 그냥 듣기만 해."
지유가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물을 삼켰다.
"나 김밥 잘 말고 있어. 하은이랑 민재가 와서 도와줘서 어제 재료 다 팔았어. 단골손님들이 엄마 얼른 나으라고 응원도 많이 해줬어.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치료만 잘 받아, 응?"
어머니의 눈가로 굵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어머니는 무언가 다급하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산소마스크를 밀어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산소마스크 모서리 틈새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 유야……."
"엄마, 마스크 벗으면 안 돼!"
지유가 다급히 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심전도 모니터의 그래프가 가파르게 요동치며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유의 손을 부서져라 쥐며,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눈을 부릅떴다.
"가게…… 서랍…… 밑…… 낡은…… 봉투……."
"어? 서랍?"
"그거…… 절대로…… 뺏기면…… 안 된다……."
어머니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목구멍에서 피 끓는 소리가 넘어왔다.
어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찌르듯 굳어졌다.
"재환이…… 애비…… 성호석…… 그놈이…… 우리 과수원을…… 강태석이랑……."
그 순간, 중환자실 문이 벌컥 열리며 당직 간호사와 레지던트 의사가 뛰어 들어왔다.
"보호자분, 비키세요! 환자분 바이탈 흔들립니다!"
의사가 지유를 거칠게 밀어냈다.
"엄마! 엄마!"
지유는 뒤로 밀려나면서도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어머니는 산소마스크 속에서 '성호석'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되뇌며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
심전도 기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에피네프린 추가 투여해! 심장 마사지 준비! 보호자 나가세요, 빨리!"
간호사들이 지유를 중환자실 문밖으로 밀어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블라인드가 내려앉았다.
복도 바닥에 내팽개쳐진 지유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던 그 이름.
'재환이 애비…… 성호석…… 그놈이…….'
지유의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듯 하얗게 점멸했다.
성재환의 아버지, 성호석 전 시장.
10년 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과수원을 강탈해 간 배후가, 정말로 재환의 아버지였단 말인가?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남원을 지키는 법을 세우겠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그 소년의 아버지가?
지유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빙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10. 붉은 페인트와 찢겨진 아침
병원 밖으로 뛰어나온 지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삼거리 골목을 향해 달렸다.
아침 햇살이 차갑게 부서지는 요천 둑길을 지나, 동문 우체국 뒷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와 거친 쇳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이봐요! 아직 사람이 버젓이 장사하는 가게인데 이러면 어떡해!"
자전거포 김 씨 아저씨의 다급한 고함이었다.
"시끄러워, 영감탱이야! 시청에서 계고장 세 번이나 보냈는데 무단 점유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가죽점퍼를 입은 험상궂은 체구의 사내 서너 명이 삼거리 김밥집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시멘트 바닥을 긁어내는 쇠파이프와 각목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김밥집의 푸른색 플라스틱 차양과 유리 미닫이문 위에는, 피처럼 붉은 락카 페인트로 거대한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철거 대상 - 남원시청 도시환경정비구역]
[자진 퇴거 불응 시 강제 철거 집행]
빨간 페인트가 유리창을 타고 핏물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 놓아두었던 멸치 육수 솥과 양념통들이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깨져 있었다.
고소해야 할 참기름 냄새 대신 알싸하고 독한 페인트 냄새가 골목을 뒤덮고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지유가 핏발 선 눈으로 사내들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용역 사내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흉터투성이 사내가 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릿하게 비웃었다.
"아, 이 김밥집 딸년인가 보네. 야, 꼬맹아. 네 에미 병원에 누워서 오늘내일한다며? 장례 치를 돈 필요하면 시청 가서 보상금이나 몇 푼 타가. 괜히 여기서 알짱거리다간 네 대가리도 저 솥단지처럼 깨지는 수가 있으니까."
사내가 쇠파이프로 길바닥에 뒹구는 냄비를 깡 걷어찼다.
찌그러진 냄비가 굉음을 내며 지유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동네 상인들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서며 수군거릴 뿐, 감히 용역들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강태석이 시장이 된 이후 남원 바닥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폭력이었다.
지유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며 남겼던 마지막 유언 같은 말.
'가게만은 뺏기면 안 된다…… 절대로…….'
그리고 성호석과 강태석이라는 이름.
비극의 소용돌이가 지유의 온몸을 휘감아 도는 순간, 지유의 눈빛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서릿발보다 더 차갑고 단단한 결기가 서려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뒹구는 대걸레 자루를 낚아챘다.
그리고 용역 사내들의 코앞을 겨누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못 부숴."
지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골목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만큼 날카로웠다.
"내 목을 꺾기 전엔 이 문가에 손가락 하나 못 대. 다 나가. 나가라고!"
사내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굳어졌다.
열여덟 살 어린 여고생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에, 덩치 큰 사내들이 순간 움찔하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헐떡이며 달려오는 민재와 하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페인트로 난도질당한 김밥집의 유리창 너머로, 서랍 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낡은 토지 서류 봉투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남원의 잔인한 봄은 끝나가고 있었고, 피할 수 없는 가문의 업보와 진실의 폭풍이 지유의 메마른 등 뒤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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