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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화

보궐선거의 승자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먼지 이는 남원역 광장

 

남원역 광장 너머로 칠월의 뙤약볕이 내려앉아 메마른 아스팔트 바닥에서 아지랑이가 이글거렸다.

 

붉은 벽돌 역사를 등지고 늘어선 선거 유세 차량 위에는 커다란 확성기가 매달려 있었다.

 

귀청을 찢는 노랫가락과 구호 소리가 삼거리 어귀의 나지막한 기와지붕들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기호 2번, 남원의 일꾼! 남원을 천지개벽시킬 진짜 토박이 강태석!'

 

청록색 어깨띠를 두른 운동원들이 땀에 전 장갑을 낀 채 지나가는 장꾼과 노인들의 손을 닥치는 대로 쥐어 흔들었다.

 

남원시장 보궐선거를 사흘 앞둔 장날의 오후였다.

 

성호석(成浩錫) 전임 시장이 내무부 중앙 요직으로 영전하며 남원을 떠난 지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관사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는 애초부터 정해진 주인을 기다리듯 순식간에 메워져 가고 있었다.

 

최민재는 짐 자전거의 녹슨 핸들을 꽉 쥔 채 인파 뒤편 전신주 그늘에 멈춰 섰다.

 

자전거 짐받이에는 삼거리 김밥집에서 부탁받은 단무지와 참기름 병이 담긴 사과 궤짝이 묶여 있었다.

 

민재의 시선은 유세 차량 위에서 마이크를 쥐고 포효하는 사내에게 꽂혔다.

 

삼거리 토건의 회장이자, 남원 전역의 관급 공사와 밤거리 이권을 쥐고 흔들어 온 강태석(姜泰錫)이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각진 턱, 번들거리는 이마, 몸에 맞지 않게 번쩍이는 남색 양복 조끼 위로 굵은 금줄 시계가 늘어져 있었다.

 

“존경하는 남원 군민 여러분! 우리 남원이 왜 이 꼴로 주저앉았습니까?”

 

강태석의 목소리가 찌그러진 앰프를 타고 찢어지듯 퍼졌다.

 

“서울서 온 양반들이 법전 들고 폼 잡는 동안, 우리 남원 땅에 공장 하나 들어왔습니까? 돈 한 푼 돌았습니까! 남원의 흙을 파먹고 자란 사람, 남원의 피를 아는 사람이 칼자루를 쥐어야 저 요천 변 썩은 갈대밭을 밀어내고 빌딩을 올리고 상가를 지을 것 아닙니까!”

 

차량 주변에 둘러선 청장년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박수를 유도하는 선두에는 시의회 의원들과 지역 농협 조합장, 토건업체 간부들이 도열해 있었다.

 

남원의 돈과 조직을 쥔 토착 세력들이 일제히 강태석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민재는 이를 바득 갈았다.

 

‘남원의 피를 아는 사람이라고? 네놈들이 흘리게 한 피겠지.’

 

열차 승강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지유의 무릎 상처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듯 끌려가며 자신에게 지유를 부탁했던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가슴을 찔렀다.

 

성재환이 떠나고 불과 한 달이었다.

 

그사이에 남원은 완전히 강태석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있었다.

 

성 시장 시절에는 그나마 중앙의 눈치를 보느라 수면 아래서 꿈틀대던 토착 폭력배와 업자들이 이제는 아예 시청의 정문을 열어젖히고 관사를 차지하려 들고 있었다.

 

“자, 보십시오! 저 요천 너머 삼거리 골목길,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들과 구멍가게들! 그대로 두면 거기가 썩어 문드러집니다! 이번에 제가 시정을 맡으면 삼거리 일대를 완전히 쓸어내고 남원 현대화의 관문으로 만들겠습니다!”

 

강태석이 굵은 주먹을 치켜들며 삼거리 쪽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민재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단순한 선거 공약이 아니었다.

 

저것은 삼거리 김밥집을 짓밟아 버리겠다는 공개적인 선전포고였다.

 

2. 어둠이 내린 삼거리 김밥집

 

해가 저물고 요천 둑길 너머로 어스름이 깔렸지만 삼거리 골목길은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민재는 자전거를 끌고 김밥집 미닫이문 앞에 섰다.

 

가게 안에서는 은은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멸치 육수 끓는 김이 유리창을 뿌옇게 적시고 있었다.

 

“이모, 저 왔어요.”

 

민재가 짐받이에서 사과 궤짝을 번쩍 들어 올리며 문을 밀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밀가루 반죽을 치대던 지유의 어머니가 황급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아이고, 민재야. 이 더운데 그 무거운 걸 다 싣고 왔어?”

 

“남원역 쪽에 나갔다가 상인회 삼촌이 부탁해서 가져왔어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요, 뭘.”

 

민재는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궤짝을 주방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유 어머니의 안색은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눈가에는 깊은 그늘이 져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성 시장이 떠나고 강태석이 들이닥쳐 상가를 비우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후로, 지유 어머니는 밤마다 헛소리를 하며 가위에 눌리곤 했다.

 

남편 한석규가 과수원을 강탈당하고 시름시름 앓다 떠나던 그 참담한 공포가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탓이었다.

 

“민재 너 저녁은 먹었니? 밥솥에 따뜻한 밥 있는데 한 줄 말아줄까?”

 

“아니에요, 이모. 하은이네 들러서 팥빙수 얻어먹고 와서 배불러요. 지유는요?”

 

“안방에서 책 본다. 며칠 전부터 밤마다 무슨 편지를 쓰는지 불을 통 끄지를 않네.”

 

지유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 애비 닮아서 고집이 여간 센 게 아니야. 남들은 다 도장 찍고 나갈 궁리 하는데, 지유 저것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버티니…… 내 속이 타들어 간다, 민재야.”

 

민재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방 문가로 다가가자 문틈 사이로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민재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지유야, 나 민재다.”

 

안쪽에서 잠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지유가 묶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은 핼쑥했지만 눈빛만큼은 요천의 깊은 물빛처럼 흔들림 없이 맑았다.

 

지유의 오른쪽 무릎에는 아직도 엷은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를 흘리던 그날의 흔적이었다.

 

“민재야, 더운데 들어와.”

 

작은 방 안에는 지유의 작은 책상이 벽에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양철 과자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성재환이 서울에서 보냈던 첫 관제엽서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지유야, 무릎은 좀 어떠니. 관악산 자락 헌책방 골목에서 법전을 찾았다. 부끄럽지 않은 칼이 되어 돌아가마.'

 

재환의 단정한 필체가 적힌 엽서 아래로 지유가 써 내려가던 푸른 잉크의 편지지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우체통에 넣지 못해 양철 상자에 모아둔 지유의 마음들이었다.

 

“선거판, 장난 아니더라.”

 

민재가 문지방에 기대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지유는 책상 위 편지지를 조심스레 상자 안에 갈무리하며 담담히 답했다.

 

“시내 나갔을 때 봤어. 사방에 강태석 이름만 붙어 있더라.”

 

“그놈이 연설하면서 아예 대놓고 삼거리 골목을 쓸어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어. 시의원 놈들도 다 뒤에 붙어서 박수나 치고 있고. 아무래도 이번 보궐선거는…… 저놈이 될 것 같다.”

 

민재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지유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어두운 골목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거야? 이모 안색 봤지? 강태석이 시장 명패 달고 완장 차면, 제일 먼저 여길 밀어버릴 텐데.”

 

“민재야.”

 

지유가 나직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민재의 말을 끊었다.

 

“우리가 겁먹고 도망치면, 여긴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아. 아버지 과수원 빼앗겼을 때도 그랬어. 법을 쥔 사람들은 서류 한 장으로 밀어붙였고, 힘없는 사람들은 겁에 질려 흩어졌지. 그래서 아버지가 혼자 울다 돌아가셨어.”

 

지유의 손이 책상 모서리를 꽉 쥐었다.

 

“재환이가 서울에서 싸우고 있어. 그 무거운 집안에서, 그 차가운 도시에서 혼자 법전을 파고 있다고. 그런데 내가 여기서 먼저 무너지면…… 재환이가 돌아왔을 때 남원에 지킬 게 뭐가 있겠니.”

 

지유의 눈동자에 맺힌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뿌리 깊은 팽나무처럼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겠다는 단단한 각오였다.

 

민재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성재환은 떠나면서 민재에게 지유를 지켜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작 이 위태로운 남원에서 가장 단단하게 서 있는 사람은 지유 자신이었다.

 

3. 개표장의 환호와 권력의 교체

 

사흘 뒤, 남원 실내체육관은 거대한 열기로 들끓었다.

 

투표함이 쏟아져 나오고 개표 사무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질수록 체육관 2층 관람석과 바닥을 메운 군중의 함성이 높아졌다.

 

남원시장 보궐선거 개표 방송이 체육관 대형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남원읍 제3투표구 개표 현황입니다. 기호 1번 1,240표, 기호 2번 강태석 4,890표!”

 

격차는 초반부터 압도적이었다.

 

성호석이 남겨두고 간 관망표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은 고스란히 강태석에게 흡수되었다.

 

거기에 삼거리 토건이 남원 시내 전역에 푼 막대한 현금과 청장년 조직표가 더해지며 승부는 개표 개시 두 시간 만에 사실상 결정되었다.

 

체육관 한편에 마련된 후보자 대기석에서 강태석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캠프 관계자들과 시청 간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강 시장님! 압승입니다, 압승!”

 

“역대 보궐선거 사상 최다 득표율입니다!”

 

강태석은 굵은 손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곁에 선 비서에게 턱짓했다.

 

“거 봐라. 남원은 말이다, 서울서 온 먹물들이 폼 잡는 동네가 아니야. 흙 묻은 돈 맛을 아는 놈이 쥐어야 돌아가는 판이지.”

 

그때 체육관 출입문 쪽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 몇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원시의회 의장 박동철과 남원 지역 유력 건설사 대표들이었다.

 

성호석 시장 시절, 까다로운 환경 규제와 도시계획 심의에 묶여 개발 인허가를 받지 못해 속을 끓이던 자들이었다.

 

“강 회장님, 아니 이제 강 시장님이라 불러야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동철 의장이 두 손으로 강태석의 손을 맞잡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박 의장,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성호석이가 서울 가기 전에 지 앞길 닦는다고 개발 인허가를 죄다 묶어놓고 갔잖아. 겉으로는 청렴한 척, 법치주의자 행세는 혼자 다 하면서 말이야.”

 

강태석이 비열한 조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그랬지요. 덕분에 우리 남원 건설사들이 반년 넘게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았습니까. 중앙 내무부로 가더니만 남원 바닥이야 죽든 말든 내팽개친 영감탱이 아닙니까.”

 

성일건설의 배 대표가 침을 튀기며 맞장구를 쳤다.

 

강태석은 굵은 시가렛을 하나 꺼내 물었다.

 

비서가 재빨리 황동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자욱한 연기를 허공으로 길게 내뿜은 강태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건설사 대표들을 훑어보았다.

 

“걱정들 붙들어 매. 내가 시장실 들어가는 순간, 제일 먼저 손댈 게 바로 그 개발 조례야. 성호석이가 묶어둔 요천 변 수변구역 개발 제한, 삼거리 일대 상업용지 용도 변경, 내가 싹 다 풀어버릴 테니까.”

 

“오오, 시장님! 정말이십니까?”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 대신 조건이 있어.”

 

강태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삼거리 그 썩은 판자촌과 김밥집 일대 말이야. 거기 철거 작업은 우리 삼거리 토건이 단독으로 맡는다. 알겠나?”

 

대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시장님 사업인데 누가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좋아. 그럼 오늘 밤은 요천각에서 거하게 목 좀 축이지. 남원의 새 주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강태석의 등 뒤로 플래시 세례와 함께 우레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남원의 권력이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성호석의 차갑고 은밀한 관료적 폭압이 물러간 자리에, 강태석이라는 거칠고 탐욕스러운 토착 야수가 남원의 맹주로 등극하고 있었다.

 

4. 요천각의 비밀 축배

 

자정이 가까운 시각, 광한루원 뒤편 요천 변에 자리 잡은 최고급 요정 요천각(蓼川閣)의 밀실 안은 술 냄새와 기름진 고기 냄새로 진동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십이첩 반상 위로 최고급 양주병들이 어지럽게 뒹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이 가야금을 뜯고 술을 따르는 가운데, 방 안에는 남원의 실세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강태석은 상석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양주잔을 빙빙 돌렸다.

 

그의 좌우에는 시의회 의장 박동철과 남원 도시과장, 그리고 지역 유력 건설사 대표 다섯 명이 도열해 있었다.

 

“자, 남원의 새 시대를 위하여!”

 

박동철 의장이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위하여!”

 

모두가 일제히 잔을 부딪치며 들이켰다.

 

술잔을 비운 배 대표가 입가를 닦으며 강태석의 눈치를 살폈다.

 

“시장님, 그런데 성호석 전 시장 쪽에선 연락이 좀 있었습니까? 그래도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자리면 중앙 실세 중의 실세인데…… 남원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진 않겠습니까?”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서늘해졌다.

 

모두가 내심 궁금해하면서도 두려워하던 대목이었다.

 

성호석은 떠났지만, 중앙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강태석은 코웃음을 치며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성호석이? 큭큭, 그 양반이 남원 일에 참견을 해? 배 대표, 자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강태석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양반이 왜 내무부로 영전해서 서울로 갔는지 알아? 10년 전 한석규 과수원 강제 환지 사건, 그거 내무부 불시 감사 나왔을 때 내가 덮어줬어. 내가 군청 퇴직자 매수해서 원천 측량 대장이랑 이면 합의 각서 원본 싹 쥐고 그 양반 살려준 거라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성호석이 목줄을 내가 쥐고 있단 말이야. 그 양반은 중앙에서 대선 자금 만지고 지 출셋길 닦느라 바빠. 남원에서 내가 뭘 하든, 지 비리 서류가 내 손에 있는 한 성호석이는 끽소리도 못 해. 오히려 우리가 남원에서 돈을 긁어모아 중앙으로 올려보내 줘야 그 양반도 대선 줄을 잡는 거지.”

 

강태석이 거칠게 술상을 내리쳤다.

 

“성호석이가 시장 완장 차고 있을 때는 지 고상한 척하느라 개발 인허가 틀어막고 있었지? 이제 그 방해꾼은 서울로 꺼졌어! 이제 남원은 우리 세상이야. 도시계획구역 확장하고, 수변 개발 풀어서 평당 수십만 원짜리 땅으로 뻥튀기하는 거다. 알겠어?”

 

“크으! 역시 강 시장님이십니다! 대장부십니다!”

 

박 의장이 침을 흘리며 술병을 들어 강태석의 잔을 채웠다.

 

그때 묵묵히 술을 마시던 도시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장님, 그런데 삼거리 골목 상인들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특히 그 한석규 마누라가 하는 김밥집…… 그 집 딸년이 보통 독종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한석규’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흘 전 김밥집 문지방을 밟았을 때, 자신을 서늘하게 노려보던 한지유의 눈빛이 떠올랐다.

 

계집애 주제에 성재환의 그 오만한 눈빛과 똑같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한석규 딸년?”

 

강태석이 비열하게 혀를 찼다.

 

“애비가 대가리 박고 뒈졌으면 딸년이라도 눈치를 채야지. 쥐뿔도 없는 것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계고장 보내고, 그래도 안 나가면 용역들 풀어서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려. 합의금 몇 푼 던져주면 나자빠질 것들이야.”

 

강태석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으며 잔인하게 짓씹었다.

 

“남원에서 내 길을 막는 놈은, 그게 법이든 사람이든 다 부숴버린다. 성호석이 아들놈도 지 아비 손에 끌려 서울로 도망친 마당에, 지까짓 것들이 누굴 믿고 버텨?”

 

요천각 밀실 안으로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남원의 지하에서 꿈틀대던 어둠의 유착은 마침내 시정(市政)이라는 합법의 탈을 뒤집어쓴 채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5. 요천 제방의 맹세

 

같은 시각, 요천 둑길의 바람은 서늘했다.

 

체육관의 열기와 요천각의 난잡한 축배가 닿지 않는 강변 제방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민재는 자전거를 제방 난간에 기대어 두고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은 요천 강물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며 남원벌을 적시고 있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얇은 카디건을 걸친 지유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낮에 다친 무릎이 아직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걸음걸이가 조금 조심스러웠다.

 

“지유야, 이 늦은 시간에 왜 나왔어? 바람 차다.”

 

민재가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유는 제방 난간을 잡고 서서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시내 쪽을 응시했다.

 

남원 실내체육관 쪽에서 쏘아 올린 축하 폭죽의 잔해가 밤하늘에서 희미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개표 끝났지?”

 

지유가 나직하게 물었다.

 

“응. 강태석이 압도적으로 됐어. 내일부터 시청으로 출근한다더라.”

 

민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시의원이고 건설사고 다 그놈 밑으로 들어갔어. 이제 남원에서 강태석을 막을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지유는 대답 대신 가슴 안주머니를 만졌다.

 

그곳에는 성재환이 남겨두고 간 학생증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그 글씨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덥혀주고 있었다.

 

“재환이가 떠나던 날 밤, 여기서 약속했어.”

 

지유의 시선이 요천 물줄기를 따라 아득한 북쪽 하늘을 향했다.

 

서울이 있는 곳, 재환이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을 그곳이었다.

 

“남원을 잊지 않겠다고. 억울하게 빼앗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법을 배워서 꼭 돌아오겠다고.”

 

“지유야……”

 

“강태석이 시장이 됐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은 법을 비웃고 돈으로 사람을 짓밟지만, 그렇다고 거짓이 진실이 되지는 않아.”

 

지유가 돌아보며 민재를 향해 희미하지만 흔들림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재야, 나 포기 안 해. 김밥집도 지킬 거고, 어머니도 지킬 거야. 그리고 재환이가 검사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이 요천 둑길을 지키고 서 있을 거야.”

 

민재는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재환이 떠나며 남긴 마지막 부탁이 귓전을 맴돌았다.

 

‘민재야, 지유 잘 좀 챙겨줘. 나 올 때까지 지유 곁에 꼭 있어 줘.’

 

민재는 자전거 핸들을 거칠게 움켜쥐며 가슴을 폈다.

 

“그래. 나도 남원에 뼈를 묻는다고 했잖아. 강태석이 용역을 끌고 오든 시청 깡패들을 끌고 오든, 내가 네 앞을 막아설 거야. 네 김밥집 문짝 하나도 함부로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두 사람의 다짐이 요천 강물 위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권력을 움켜쥔 자들의 오만한 축배가 요천각을 뒤흔들고 있을 때, 남겨진 둘은 어스름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함께 버텨내자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석의 시대가 열렸고, 그 잔인한 칼날이 삼거리 골목을 향해 서서히 겨눠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