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축복 속에
1. 새벽을 여는 꽃가마
동트기 전의 남원 삼거리 골목은 유난히 푸르고 서늘한 안개에 싸여 있었다.
동문 우체국 붉은 벽돌 담벼락을 스치는 바람결마다 알싸한 늦가을 새벽의 공기가 묻어났다.
삼거리 김밥집 처마 밑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딸그랑,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내며 새벽바람을 맞이했다.
지유는 일찍부터 불을 켠 김밥집 주방에 서서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솥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쌀을 안치고 단무지와 시금치를 무치며 손님맞이를 시작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도마 위에는 정갈하게 접힌 흰 광목천과 어머니의 낡은 가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지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튕겨냈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라틴어 'Mane nobiscum', 그리고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라는 문구가 손가락 살갗을 통해 서늘하고도 따뜻한 온기로 전해져 왔다.
골목 밖에서 덜컹거리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이, 박 씨! 이쪽 모서리를 좀 더 높이 들어요. 지리산 육송이라 제법 묵직하단 말이요."
"윤 목수님, 걱정도 팔자요. 내가 이 골목에서 편지만 삼십 년을 배달한 놈인데 이 가마 하나를 똑바로 못 잡겠소?"
목공소 윤 씨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우체국 집배원 박 씨의 넉살 좋은 대꾸가 골목의 고요를 경쾌하게 깨뜨렸다.
지유가 앞치마를 풀고 가게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가게 앞 골목길 한가운데에는 짙은 붉은빛과 청색 비단으로 단정하게 단장된 전통 목조 가마 한 채가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모서리마다 섬세하게 깎아 올린 모루 조각과 네 귀퉁이에 매달린 금빛 술이 새벽안개 속에서 화사하게 흔들렸다.
가마를 메고 온 목공소 윤 씨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유야, 나왔냐? 어젯밤에 옻칠 말리느라 아주 혼났다. 지리산 육송(陸松) 좋은 놈으로만 골라다 대패질을 쳤으니, 오늘 완월정 들어갈 때 끄떡도 없을 게다."
"아저씨…… 이걸 정말 직접 다 짜신 거예요?"
지유가 떨리는 손으로 가마의 앞 기둥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는 나무 결은 거친 티 하나 없이 비단처럼 매끄러웠고, 은은한 소나무 향과 맑은 옻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기둥 밑단에는 작은 글씨로 '만복(萬福)'이라는 길상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내가 순례 형수님한테 신세 진 밥이 몇 그릇인데 이 정도도 못 해주겠냐.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어도, 네 어머니가 계셨어도 오늘 같은 날엔 이 동네 최고 가마를 태워 보냈을 거다. 남원 목수 윤가 놈 솜씨가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온 동네에 보여줘야지."
윤 씨의 투박한 말 뒤로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철 함을 품에 안고 헐레벌떡 골목을 뛰어왔다.
"비켜요, 비켜! 아이고, 지유야! 가마만 오면 뭐 하냐, 신부 단장을 해야지!"
배 씨 아주머니의 양철 함 안에는 붉은 모란과 봉황이 수놓아진 눈부신 활옷과 영롱한 구슬이 달린 족두리가 정갈하게 싸여 있었다.
"아주머니, 이건……."
"남원 읍내 한복방 김 여사가 너 준다고 지난 보름 동안 밤을 새워 지은 활옷이다. 네 어머니가 처녀 적에 수놓아 뒀던 옛 자수 보자기에서 모란 도안을 그대로 따다가 가슴팍에 박았단다. 어디 한번 대보자꾸나."
배 씨 아주머니가 활옷을 펼쳐 지유의 어깨에 살포시 걸쳐주었다.
진홍빛 비단 위로 촘촘하게 수놓아진 색실들이 새벽빛을 받아 찬란하게 피어났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옛 도안이라는 말에 지유의 목울대가 젖어 들었다.
7년 동안 쇠파이프가 날아들고, 붉은 유성 페인트로 더럽혀졌던 이 좁은 골목길이, 지금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축복의 제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골목 저편, 낡은 2층 벽돌 건물 계단에서 구두 소리가 맑게 울렸다.
지유가 붉은 활옷 자락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짙은 남색 한복 도포에 옥빛 술띠를 두른 성재환이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어깨는 넓고 반듯했으며, 눈빛은 깊고 맑았다.
재환의 품속에는 언제나처럼 지유가 채워주었던 흑청색 잉크의 각인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새벽 공기를 가르고 얽혀 들었다.
재환은 가마 앞에 서서 진홍빛 활옷을 입은 지유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7년 전 서울행 기차 창밖으로 피 흘리는 무릎을 감싸 쥐던 어린 소녀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거악의 폭압을 견뎌내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 마침내 자신을 돌아오게 만든 위대한 여인을 향한 경외와 끝없는 연모였다.
재환이 천천히 다가와 지유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지유야."
"재환아."
두 사람 사이에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윤 씨가 헛기침을 하며 가마채를 잡았고, 골목 양옆으로 동문 청과물 김 씨, 방앗간 배 씨, 우체국 직원들이 줄을 지어 섰다.
"신부 탑승하시네! 광한루원으로 출발합시다!"
우체국 박 씨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육송 꽃가마가 가볍게 들려 올려졌다.
삼거리 김밥집의 '끝까지 남은 사랑' 간판 위로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며, 남원의 하루가 찬란하게 열리고 있었다.
2. 광한루원으로 향하는 길
가마의 창을 덮은 얇은 비단 발 사이로 남원의 아침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가마의 흔들림은 불안하지 않고 요람처럼 포근했다.
가마 앞에서는 성재환이 늠름한 걸음으로 길을 이끌었고, 그 뒤를 최민재와 만삭의 몸으로도 환하게 웃는 윤하은이 따르고 있었다.
동문 우체국을 지나 요천 둑길로 접어들자,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불어났다.
새벽부터 소식을 들은 남원 시민들이 둑길 양편으로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 변호사님! 지유 양! 축하합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남원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중학생들이 모자를 벗어 흔들었고, 밭일을 나가던 아낙들이 광주리를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요천 제방 1공구, 지난여름 부실공사로 무너져 내려 흙탕물이 넘실대던 그 비극의 현장은 이제 단단한 화강암 축대로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그 둑길을 따라 수백 명의 시민들이 줄을 지어 꽃잎을 뿌렸다.
가마 안에서 지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귀를 울리는 시민들의 환호성 너머로 지난 세월의 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빨갱이 김밥집'이라며 붉은 페인트를 끼얹던 사내들의 거친 욕설, 쇠파이프로 통유리창을 부수던 굉음, 한밤중에 포클레인 엔진을 울리며 들이닥치던 공포, 그리고 영안실 문을 걸어 잠그겠다며 협박하던 비열한 목소리들.
그 모든 참혹한 어둠 속에서 홀로 무릎을 안고 울던 밤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도망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가게를 지켰고, 카운터 밑바닥의 낡은 서류를 지켰으며, 서울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재환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둠을 밀어낸 자리에 남원 시민들의 환호와 꽃잎이 내리고 있었다.
재환은 요천 둑길을 걸으며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열여덟 살의 봄, 지유의 자전거 뒤를 따르며 푸른 노을을 바라보던 제방길이었다.
그 길에서 지유는 자전거 뒷모습을 스케치해 주었고, 자신은 가문의 죄악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었다.
이제 그 둑길 위에서 자신은 더 이상 쫓기듯 떠나는 죄인이 아니었다.
불의한 권력의 사슬을 끊어내고, 친부의 원죄를 사법적으로 단죄했으며, 약자들의 빼앗긴 땅을 되찾아준 당당한 남원의 아들로서 지유의 꽃가마를 이끌고 있었다.
광한루원 정문인 청허부(淸虛府) 앞에 다다르자 인파는 셀 수 없이 불어나 있었다.
남원 시내뿐만 아니라 운봉, 인월, 산내면 우포리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온 농민들까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기 오신다! 성 변호사님하고 지유 각시 오신다!"
땅을 되찾았던 105인 농민 대책위의 박성두 노인이 흰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꽹과리를 치며 앞장서 나왔다.
"성 변호사님! 지유 애기씨! 우리 남원 농민 백다섯 명이 오늘 두 분을 위해 길을 엽니다!"
박성두 노인의 꽹과리 소리에 맞춰 풍물패의 장구와 북소리가 청허부 앞마당을 웅장하게 뒤흔들었다.
문화재관리청과 남원시청의 특별 허가로 활짝 열린 청허부의 육중한 삼문을 통과해 꽃가마가 광한루원 경내로 들어섰다.
수백 년 된 고목들 사이로 단풍잎이 비단처럼 흩날리는 완월정(玩月亭) 앞마당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3. 완월정의 대례
완월정 앞 호수는 가을 하늘을 그대로 담아내어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오작교의 둥근 홍예석 다리 난간마다 청사초롱이 곱게 걸려 있었다.
완월정 넓은 누각 앞마당 잔디밭에는 멍석이 깔리고, 붉은 융단 위에 웅장한 대례청이 차려져 있었다.
지리산 대나무로 엮은 병풍 앞에는 청홍의 양초가 꽂힌 촛대와, 놋그릇에 담긴 쌀, 대추, 밤, 그리고 백년가약을 상징하는 한 쌍의 목기러기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가마가 대례청 앞에 멈추어 섰다.
성재환이 가마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옷깃을 여미고 가마 문을 열었다.
재환이 내민 단단한 손을 잡고 지유가 가마에서 내려섰다.
진홍빛 활옷에 수놓인 금박 모란이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양 볼에 찍은 붉은 연지곤지와 이마의 곤지가 지유의 맑고 결연한 이목구비를 더욱 눈부시게 받쳐주었다.
모여든 시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곱다…… 순례 형수 닮아서 정말 천사 같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두 사람은 대례청 마당을 가로질러 초례청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동편에는 신랑 성재환이, 서편에는 신부 한지유가 섰다.
오늘 혼례의 주례와 집례를 맡은 이는 전주지법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였다.
법복 대신 단정한 한복 도포를 입은 문 판사가 엄숙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창홀을 시작했다.
"신랑 신부, 손을 씻고 하늘과 땅, 그리고 온 남원 시민 앞에 예를 갖추시오."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맑은 요천 수변의 물을 길어 담은 놋대야가 올라왔다.
재환과 지유는 정결하게 손을 씻고 하얀 면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 손수건은 7년 전 비 내리던 처마 밑에서 지유가 재환의 빗물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신랑, 북쪽을 향해 절하고 신부에게 기러기를 올리시오."
집례관의 외침에 따라 재환이 상 위에 놓인 목기러기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었다.
평생 짝을 바꾸지 않고, 한 번 맺은 신의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킨다는 영원한 절개의 상징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깊게 허리를 숙여 기러기를 건넸다.
지유는 떨리는 두 손으로 그 기러기를 받아 안았다.
나무 기러기의 매끄러운 감촉 위로 재환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절을 올리는 교배례(交拜禮)가 이어졌다.
지유가 먼저 깊은 절을 올렸고, 재환이 답배를 올렸다.
맞절을 나누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두 사람의 귓가에는 지나온 세월의 격랑이 스쳐 갔다.
7년의 별리(別離), 신림동 고시촌의 단칸방에서 흑청색 잉크로 써 내려가던 사법시험 답안지, 남원 삼거리의 찬 바닥에서 부치지 못할 편지를 모아두던 양철 상자, 덤프트럭의 살해 위협과 옥중 권력자의 서슬 퍼런 공작들.
그 모든 칼바람을 뚫고 마주 선 두 사람의 이마가 땅을 향할 때, 대례청을 둘러싼 수천 명의 하객들은 숨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표주박 잔을 나누는 합근례(合巹禮)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박을 둘로 쪼개어 만든 두 개의 표주박 잔에 공설 방앗간에서 빚은 맑은 청주가 채워졌다.
신랑이 한 모금을 마시고 신부에게 건네고, 신부가 그 잔을 받아 마신 뒤 다시 신랑에게 넘겼다.
두 조각의 표주박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온전한 박을 이루듯, 둘로 나뉘었던 두 사람의 삶이 이제 영원히 하나로 얽히는 순간이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재환이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금빛 닙 위에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라틴어가 새겨진 펜이었다.
재환은 문 판사가 내민 붉은 비단 혼서지(婚書紙) 위에 단정한 한자로 서약의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약속을 지킨 자와 끝까지 남은 자, 남원의 땅 위에서 영원히 함께 머물다.'
지유가 그 곁에서 흑청색 잉크병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있었다.
만년필 끝에서 흘러나온 흑청색 글씨가 혼서지에 깊고 푸르게 스며들었다.
문 판사가 혼서지를 높이 들어 시민들을 향해 선언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듯, 권력의 폭압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진실을 지켜낸 두 사람이 오늘 영원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아-!
광한루원 완월정 마당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하늘 높이 오색 풍선과 국화 꽃잎이 흩날렸다.
4. 오작교 위의 눈물
대례가 끝난 후, 성재환과 한지유는 하객들의 환호 속에서 오작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 아래를 지나 오작교 돌계단에 이르렀을 때, 인파의 맨 뒤편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에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 성호석 전 차관이었다.
성호석은 차마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하고 멀찍이 회랑 기둥 뒤에 서서 혼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가는 붉게 짓물러 있었고, 가슴팍 안주머니에는 서울 성북동 사저와 잔여 재산을 남원 공익 장학재단에 전액 신탁 완료했다는 법원 공증서가 들어 있었다.
성호석을 발견한 재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골목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성호석에게 쏠렸다.
한때 남원을 쥐고 흔들던 군수이자, 강태석과 결탁해 토지 비리를 묵인했던 가문의 원죄를 짊어진 인물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지유가 먼저 재환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지유는 진홍빛 활옷 자락을 정돈하며 성호석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성호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지유야…… 나는, 나는 그저 멀리서 축복만 하고 가려 했다. 내 지은 죄가 깊어 너희의 이 복된 자리에 그림자를 드리울까 두려웠다."
성호석의 떨리는 목소리에 지유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유는 깊게 허리를 숙여 성호석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성호석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잔디밭을 적셨다.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원망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삼십 년의 비극은 법으로 바로잡혔고, 아버님께서는 참회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약속과 치유뿐입니다. 오늘 저희의 혼례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지유의 맑은 음성에 성호석은 주저앉듯 무릎을 꿇으며 지유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내 딸아. 너희가 남원에 남겨준 정의가, 내 부끄러운 죗값을 씻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재환이 다가와 무릎을 꿇은 부친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부자간의 거칠고 아팠던 7년의 단죄와 침묵이 마침내 온전한 화해와 속죄의 눈물 속에서 녹아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민재 기자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윤하은이 배를 감싸 쥔 채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민재 씨, 우리 단비도 뱃속에서 쿵쿵 뛰어요. 정말…… 정말 좋은 날이에요."
"그래, 하은아. 남원에 진짜 봄이 왔어. 기나긴 겨울이 드디어 끝난 거야."
민재가 하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벅찬 미소를 지었다.
지유와 재환은 부친 성호석의 배웅을 받으며 오작교 돌계단을 올랐다.
오작교의 가장 높은 홍예 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7년 전, 열여덟 살의 성재환이 학생증 증명사진을 찢어 건네며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고 울먹였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리고 며칠 전 달빛 아래서 백금 반지를 끼워주며 '내 남은 모든 생을 너와 함께 머물겠다'고 청혼했던 그 돌다리였다.
다리 아래 호수 물결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와 흩날리는 단풍잎이 곱게 어우러졌다.
재환이 지유의 손을 잡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지유야. 서울로 압송되던 통일호 기차 안에서, 나는 매일 밤 남원의 지도를 그렸다. 내 아비의 죄를 찢어발기고, 강태석을 법정에 세우는 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검사의 칼날을 쥐고 남원에 돌아왔을 때, 나를 살린 것은 복수심이 아니라 네가 켜둔 김밥집의 작은 백열등 불빛이었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재환의 눈을 응시했다.
"알아, 재환아. 네가 법복을 입고 돌아왔을 때, 네 눈빛 속에 남아 있던 고통을 보았어. 하지만 이제 너는 칼을 휘두르는 검사가 아니라, 흙 묻은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변호사잖아. 네가 지키려 했던 법은 높은 관청의 호통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의 약속이었어."
"그래.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해. 내 남은 생은 남원에서, 너와 함께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겠다."
재환이 지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가 햇살 아래서 눈부시게 교차했다.
오작교 아래 호숫가에 모여선 수천 명의 시민들이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그것은 한 편의 비극적인 서사시가 끝나고, 진정한 사랑과 정의가 이 땅에 뿌리내렸음을 선포하는 축복의 함성이었다.
5. 모두의 잔치, 남원의 봄
완월정 앞마당과 회랑 전체가 거대한 잔치판으로 변했다.
광한루원 잔디밭 곳곳에 멍석과 평상이 깔리고, 남원 구도심의 모든 상인들이 들고 온 음식들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졌다.
삼거리 김밥집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광한루원 연못 위로 그윽하게 번져나갔다.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는 갓 쪄낸 무지개떡과 인절미를 광주리째 날랐고, 동문 청과물 김 씨는 지리산 특산 꿀사과와 배를 산더미처럼 깎아 올렸다.
"자자, 오늘 술과 떡은 무제한입니다! 남원 105인 농민 대책위에서 빚은 햅쌀 막걸리도 백 말이나 올라왔으니 취할 때까지 드시오!"
목공소 윤 씨가 막걸리 사발을 높이 들며 호탕하게 외쳤다.
잔치마당 한가운데에는 1992년 요천 변 논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박성두 노인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성 변호사님이 우리 땅을 찾아줬어! 우리 지유 각시가 우리 억울함을 달래줬어! 에헤라디야, 오늘 같은 날 춤이 안 나오면 언제 춤을 추겠는가!"
박 노인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풍물패가 신명 나는 장단을 맞추었다.
우체국 집배원 박 씨는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뭐랬소! 성 변호사가 신림동에서 첫 번째 엽서 보냈을 때부터 내 알아봤지! 그 편지에 먹물이 아주 시퍼렇게 살아있더라니까! 지유가 그 엽서를 품에 안고 칠 년을 버텼어!"
"박 씨 아저씨, 또 거짓말하신다! 그때 아저씨는 주소도 없는 엽서라고 투덜대셨잖아요!"
윤하은이 핀잔을 주자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최민재는 카메라를 메고 잔치판 구석구석을 누비며 행복한 남원 사람들의 표정을 렌즈에 담았다.
그의 취재 수첩에는 이미 내일 자 남원일보 1면 머리기사의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약속의 승리, 남원의 새로운 봄을 열다 - 완월정에서 울려 퍼진 정의와 사랑의 축가.'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지유와 재환은 대례복을 벗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평상 사이를 돌며 이웃들에게 술과 음식을 권했다.
흙 묻은 작업복을 입고 온 산내면 우포리 농민들도, 아이를 업고 나온 젊은 부부들도 두 사람의 손을 맞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성 변호사님, 우리 우포리 가처분 인용해 주셔서 불도저가 다 물러갔습니다. 이제 발 뻗고 잡니다."
"지유 씨, 김밥집 계속할 거지요? 지유 씨 김밥 안 먹으면 남원 사람들은 하루 일이 안 잡혀요."
지유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삼거리 김밥집 문은 내일도 아침 일찍 열립니다. 언제든 따뜻한 밥 드시러 오세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풍악 소리가 요천 변의 맑은 물줄기를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하늘은 짙은 보랏빛과 쪽빛이 뒤섞인 아름다운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완월정 지붕 처마 끝에 걸린 청사초롱에 하나둘 불이 켜지며 호수 수면에 붉고 푸른빛의 꽃을 피워냈다.
6. 광한루원에 남은 맹세
잔치가 끝난 늦은 저녁, 하객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광한루원 경내에는 다시금 그윽한 고요가 찾아왔다.
연못가 벤치에 나란히 앉은 성재환과 한지유는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밤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며 완월정 단청의 풍경을 은은하게 울렸다.
지유가 품속에서 작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7년 전 재환이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과,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넸던 빛바랜 증명사진, 그리고 오늘 교환한 혼서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사진 뒷면에 적힌 글씨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선명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재환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남원 톨게이트에서 네가 넘어졌을 때, 네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 나는 내 아비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었다. 가문의 이름이 저주 같았고, 내가 법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오직 피비린내 나는 복수 때문이라고 믿었지."
재환의 나지막한 고백에 지유가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네가 돌아왔을 때, 넌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세웠잖아. 네 아버지를 법정에 세우면서도 넌 무너지지 않았어. 법이 무엇인지, 사람을 살리는 법이 어떤 것인지 네가 온몸으로 증명해 줬어."
"네가 내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야, 지유야. 네가 남원에 끝까지 남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권력의 독기에 취해 괴물이 되었을지도 몰라. 네가 삼거리 김밥집을 지켜낸 그 정직함이 나를 인간으로, 참된 법률가로 남게 해 준 거야."
재환은 품에서 각인 만년필을 꺼내 지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칠흑처럼 짙은 옻칠 바디에 금빛 닙, 그리고 가문의 규율을 상징하던 라틴어 법언이 새겨진 만년필이었다.
"이제 이 펜은 내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이야. 남원에서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갈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의 기록들을 네가 이 펜으로 적어줘."
지유가 만년필을 가슴에 품어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응. 우리 내일부터 삼거리에서 다시 시작하자. 넌 맞은편 이층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난 일층에서 그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말아줄게."
"떠나는 자는 약속을 남기고, 끝까지 남은 자는 그 약속을 지켜낸다……."
재환이 읊조리듯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오작교를 건너 청허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남원의 밤공기는 더 이상 시리지 않았다.
30년 동안 이 고을을 짓누르던 토건 세력의 폭압과 부패의 어둠은 법의 준엄한 심판과 민초들의 연대 속에서 완벽하게 소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뿌리내린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았던 사랑과 약속의 승리였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에는 김밥집의 원목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과 2층의 '성재환 법률사무소'가 서로를 따뜻하게 마주 보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남원의 깊은 밤하늘 위로 마침내 영원히 지지 않을 찬란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